스페인-프랑스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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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프랑스'''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2.2. 중세
2.3. 대항해시대 이후 16세기
2.4. 17~19세기
2.5. 20세기
2.6. 21세기
3. 문화 교류
4. 대사관
5. 관련 문서


1. 개요


스페인프랑스의 관계. 스페인과 프랑스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양국 모두 유럽연합의 회원국이며 교류도 매우 활발한 편이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초기에 프랑스지역은 켈트계통의 갈리아인, 스페인에는 켈트족과 이베리아인들이 혼혈된 켈트이베리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켈트이베리아인들은 어찌보면 최초의 혼혈민족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 지역과 스페인 북부 지방에서 남하한 금발 빨간머리 흰피부의 켈트인들과 북아프리카에서 올라온 검은머리 꺼무잡잡한 피부의 이베리아인들이 혼혈된 것이 켈트이베리아인들이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금의 프랑스 지역과 스페인은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라틴어가 널리 사용되고 로마화되면서 로마인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분열 때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이 서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2.2. 중세


서로마 제국의 멸망 뒤에는 스페인과 프랑스지역에 서고트 왕국이 세워졌으나 서고트족들이 프랑크족 등 다른 게르만족들에 밀려 이베리아반도로 중심지를 옮겼고 프랑스 지역에는 프랑크 왕국이 세워졌다. 이후 서고트왕국은 프랑크 왕국과 동고트왕국의 지배를 받지만 다시 독립적으로 영향력을 키워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이 때에는 로마 문화와 로마법도 많이 보존하면서 동시에 혈통, 문화, 언어에서 완전히 로마화되었고 프랑크 왕국도 혈통, 언어, 문화에서 완전히 로마화되었다.
하지만 서고트 왕국은 계속된 분열 속에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왔고 서고트 왕국은 이슬람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스페인을 정복한 뒤 우마이야 왕조프랑크 왕국투르-푸아티에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물러나고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다. 그리고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아랍의 지배하에서 알안달루스라고 불렸다. 하지만 스페인 북부서 서고트왕국 멸망 직후 남은 기독교세력+게르만족들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워서 이슬람세력에 대항하니 레콩키스타의 시작이다.
언어적으로도 같은 라틴어에서 나뉘게 되는데 프랑스는 게르만어파켈트어(갈리아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스페인은 아랍어, 베르베르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2.3. 대항해시대 이후 16세기


스페인이 레콩키스타이후 최종적으로 나스르 왕조가 정복된 이후, 스페인은 아랍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세력을 키워 미국 북부, 동부 지방, 브라질을 제외한 전 지역 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 필리핀, 서태평양의 일부 섬들, 심지어 유럽 내부에서는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부지방도 차지했다. 심지어는 프랑스의 일부 영토, 플랑드르까지 스페인의 영토였다. 스페인이 유일하게 프랑스를 크게 압도하던 시기이다. 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대부분 스페인의 승리로 끝났다.

2.4. 17~19세기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를 격파하며 이탈리아, 나아가 서유럽 육상 패권을 확실시한 1559년 카토 캉브레시스 조약부터 스페인 역사상 최후의 피레네 산맥 이북의 영토였던 세르다냐, 로세요 (현대 프랑스론 루시용) 일대를 프랑스가 할양 받으며 대륙의 스페인 패권을 끝낸 1659년 피레네 조약까지 16-17세기 백년은 양국 관계사상 스페인이 거의 유일하게 주도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한 대립이 가장 격렬한 시기였다. 이 이전이나 이후에나 유럽사의 일관적인 패턴에 따라 프랑스 격파 없이는 스페인의 서유럽 패권도 이루어질수 없었고, 이 와중 스페인에 맞서 이탈리아와 저지대에서 세력 사수하겠다고 비공식 간접 지원도 아니고, 나머지 유럽이 전부 타락한 기독교 세계를 징벌하기 위해 땅으로 올라온 사탄의 이교도 군대쯤으로 인식하던 오스만 제국과 대규모 군사 동맹까지 맺은 프랑스 행보에 스페인과 동맹 세력들은 질색했다.[1]
프랑스는 프랑스 나름대로 중세 내내 '교회의 장녀'란 국가 이데올로기를 주장했던것과는 영 대조적으로 스페인을 꺾고 서유럽 패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종교니 전통적인 동맹 관계니 다 필요없다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밀어붙히며 결국 30년 전쟁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구도 많고 역사도 깊은 카톨릭 국가가 개신교 동맹 측에 붙는 모습까지 보였다. 당연히 스페인을 주축으로 한 범카톨릭 세력은 가짜 카톨릭, 위그노 이단의 소굴, 권력에 미쳐서 신앙도 도덕도 다 팔아먹는 막장 국가 프레임을 프랑스에 씌우려고 했으며, 이에 따라 이 시기 예수회를 비롯한 카톨릭 교회 내부에선 많은 이들이 이름만 카톨릭이지 칼뱅주의 이단으로 보던 얀센주의 신학이나, 장 보댕을 필두로 본격적으로 세속 권력의 안정성을 종교적 순수성보다 우위로 둔 정치적 현실주의적 사상가들이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약한건 우연으로 보기 힘들다. 서유럽 패권과 카톨릭 세계의 맹주 자리를 두고 충돌한 양국간의 험악한 대결은 잉글랜드나 네덜란드 반란군 같은 개신교 세력과도 거리낌 없이 동맹 맺으며 대스페인 전선의 주축에 있었던 프랑스가 결국 30년 전쟁이 끝나고도 스페인과는 따로 전쟁을 10년이나 더 치루며 결국 피레네 협약을 맺고 스페인 패권을 분쇄하면서야 끝이 난다. 아직도 프랑스를 겉과 속이 다르고, 탐욕을 위해선 뭐든지 다 팔아 먹는 위선적인 족속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스페인의 민간적 반불감정은 여전히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교회의 장녀' 운운하던 이웃 열강이 패권 사수하겠다고 무슬림, 개신교도들과 확확 손잡으며 스페인과 싸우던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다고 보기 힘들다.
영원할 것 같았던 스페인 제국의 영광도 17세기에 들어서며 급격히 저물어갔다. 16세기 100년간은 스페인이 프랑스를 압도했지만 스페인의 연이은 국제전 패배와 프랑스의 팽창으로 둘의 관계는 바뀌어갔다.[2] 특히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은 혈연적으로도 긴밀한 관계가 되어갔다. 이러한 이유는 더이상 스페인이 독자적으로 유럽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어져 프랑스와 연대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카를로스 2세의 서거 후에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사이에 스페인 왕위를 다투고 전쟁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스페인 측과의 협상도 없이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을 왕위에 올리려 했고, 프랑스는 카를로스 2세 본인의 뜻을 따라 앙주 공작인 부르봉의 필리프를 왕위에 올리려 했다. 결과적으로 앙주 공 필리프가 펠리페 5세로써 스페인 왕위를 차지했지만 스페인과 프랑스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19세기 초반 프랑스 혁명제국의 등장으로 프랑스, 스페인 부르봉 왕조가 폐지 됐으나 모두 왕정복고가 되었다.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침략을 무찌르기는 했지만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마지막으로 남은 쿠바, 푸에르토 리코, 필리핀, 서태평양의 일부 작은 섬들도 미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스페인은 외교적으론 프랑스의 제2중대 쯤의 위치로 떨어졌고, 내정에 있어서도 프랑스의 강력한 간섭과 영향을 받았다. 부르봉 왕정복고 프랑스는 이웃나라에서 자유주의, 입헌주의 세력이 사촌들을 약화시키고 집권하는 꼴을 볼수 없다고 1823년 대규모의 절대왕정 복고 간섭군을 보내 라파엘 리에고를 비롯한 스페인 자유주의 혁명가들의 목을 처버렸고, 이 사건은 나폴레옹 점령기 동안 나름 큰 세력을 성장한 스페인내 친프랑스 성향 자유주의, 계몽주의 세력들이 (afrancesados) 프랑스와 손절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주로 대외 식민지 정책에서 스페인 제국의 몰락이 더 심해지면 본인들의 이권도 위험하겠다 싶은 인도차이나, 북아프리카 일대에선 오히려 프랑스가 억지로 자국군을 파견하며 스페인 세력 유지에 도움을 준적도 있었다.

2.5. 20세기


19세기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불안한 정치상황은 20세기에도 지속됐다. 프랑스는 공화국 성립 이후로 스페인을 깔보는듯한 태도를 취해왔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칭하며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라거나 피레네 이남의 저질족속들이라 칭한 말은 프랑스인들이 전통적으로 스페인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스페인이 모로코를 식민지배하려고 침입했는데 프랑스가 개입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모로코가 북아프리카서 대서양으로 빠지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니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결론적으로 프랑스의 개입으로 어정쩡한 관계가 되었다. 모로코 북부는 스페인이 나머지 지역은 프랑스가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불쾌한 협상이었다. 특히 모로코의 상업적 중심지는 모두 프랑스가 점령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영 찝찝한 결과였다.
2차대전 시기에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점령될 때 스페인은 나치와 같은 파시즘 프랑코 정부가 있었으니 가만히 프랑스가 점령되는 걸 구경이나 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 프랑스 정부는 지리적으로는 가까운 나라이나 정치적으로는 멀고도 험한 관계였다. 대전 후 프랑스는 유럽과 국제 정계에서 냉전기 지정학적, 역사적 이유로 백안시 하는게 당연했던 소련 중심 동구권과 더불어 스페인 왕따를 주도했다. 사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 해방 때 소속은 프랑스 국내군이었지만 스페인 내전 이후 공화파 망명객들 중심으로 구성 된 레지스탕스 활동 건도 있고, 내전 이전 프랑스가 좌파 레옹 블룸 내각일 때 프랑스 국내 문제로 제대로 못 도와주고 이념적 동지들을 방관했던 것에 대한 책임 등등으로 프랑코 정권과 결코 친해질 수 없었다. 따라서 프랑코 생전 전후 유럽에서 프랑코 스페인 왕따도 동쪽에선 소련, 서방에선 프랑스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막상 경력이나 사상은 비슷한 반공 우파 군인 출신 정치임에도 불구하고 드골과 후임 정권들은 스페인 공화국 망명정부, CNTUGT 등 망명 정치세력, 훗날에는 ETA까지 자국을 기반으로 삼아 국경을 넘으며 반체제 활동을 하는걸 묵인해줬고, 스페인은 스페인 나름대로 "프랑스가 자국 치안 안정을 방해한다!"며 적극 항의했지만 워낙 전반적인 프랑코 왕따시키는 국제 분위기에 묵살당했다. 하지만 프랑코 사망 후 스페인에 민주정부가 세워지고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프랑스 정부도 스페인을 파트너로 인정했다.

2.6. 21세기


스페인과 프랑스는 현재는 나토, 유럽연합의 회원국들이자 문화교류를 포함한 다양한 교류가 많이 활발한 상태이다. 그리고 두나라는 라틴 연합에도 속해 있다. 스페인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중 하나가 프랑스이고 반대로 프랑스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 중 하나가 스페인이다. 그리고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교구인 우르헬의 주교는 안도라의 군주(공동 영주)로 두고 있다.
상술한 역사가 말해주듯 스페인은 그나마 프랑스와 육상으로 접한 나라 중에서 근대 이전 부터 통일 국가로서 틈이 보이면 패권 경쟁할만한 체급이 되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깊은 문화적, 역사적 공유점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로 투닥거리는 관계였다. 16-17세기 스페인이 세계 제국으로서 최고 잘나갈 시절 프랑스는 중세의 패권 국가 시절과 부르봉 왕조 아래 패권을 다시 차지할 때 까지 내부 혼란, 왕조 교체, 귀족간 분쟁 등으로 그로기 상태였고, 반대로 프랑스의 유럽 패권 재탈환 과정 또한 17세기 중반 이후 스페인을 마구 줘팸하면서 결국 왕가마저 프랑스 출신 왕가를 심어두면서 완성되었다. 근대 들어와서도 나폴레옹과의 전쟁은 정직하게 스페인쪽에서는 자기들끼린 그렇게 사이 안 좋은 좌우파, 카스티야 카탈로니아 전부 한 입으로 조국 해방 전쟁으로 칭송하고, 그 이후로도 스페인 좌파 쪽에서는 부르봉 왕가를 싸고 돈다, 우파 쪽에서는 불순한 사상을 계속 퍼뜨린다 하며 이유는 전혀 달라도 반불 감정 자체는 공유했다.[3] 양국 모두 유럽 연합 소속의 근대 민주주의 국가인 지금에야 당연히 여러 방면에서 밀접하게 협력하는 관계지만, 민간 차원의 사회적 국민 감정으로는 프랑스쪽은 별로 생각이 없는 반면 스페인 쪽에서는 아직도 프랑스인들을 가바쵸[4]라는 멸칭을 붙이며 은근히 질시하는 경향이 있다.
요약하자면 현대 들어와서는 일반인들끼리 서로 가끔 가다 욕하는 정도지만 어쨌든 스페인 내에서는 적어도 역사적으로 반불감정이 상당히 오래 존재해왔으며, 프랑스의 문화적 영향력을 패권주의적 시각으로 경계하는 조류도 여전하니 혹시나 해당 나라로 여행가거나, 현지 출신 사람들과 연관된 주제로 대화할 일이 있으면 알아두어서 손해 볼 건 없다. 국제 정치적 대국관계에서야 같은 유럽연합 소속 밀접한 이웃나라지만, 민간 감정 차원에서 스페인인들은 여전히 프랑스를 아니꼽게 보고, "프랑스 못지않게 스페인도 위대한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했다!"란 식으로 문화적 경쟁감이 강한 편이다. 기본적으로 반왕실 감정이 강한 대도시의 공화주의적 좌파 성향 시민들도 그렇고, 근왕주의적 우파도 민족가톨릭주의nacionalcatolicismo) 국가관의 주체로서 스페인 왕실이란 '''기관을 추앙하는거지''', 막상 거기 앉아 있는 게 정치적 전통도 확연하게 다르고, 전성기 스페인 제국에게서 유럽 대륙의 패권을 강탈해온 프랑스 출신 부르봉 왕가라는 사실 자체는 껄끄럽게 보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5]
2018년 9월 26일에 프랑스의 마뉘엘 발스 총리는 바르셀로나 시장직에 출마를 선언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꿩 섬에 대해 스페인측과 프랑스측은 공동소유를 합의하면서 1년에 6개월씩 영토소유국가가 바뀌고 있다.#

3. 문화 교류


언어적인 것에서도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는 같은 로망스어군에 속해 있어서 둘 다 영향을 주고 받았고, 차용어도 서로 존재해있다. 그리고 프랑스어 어휘가 스페인어에서도 많이 보이고 있고, 스페인어도 프랑스어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내에서도 스페인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고,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스페인도 문화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프랑스도 스페인과 교류를 하면서 스페인 문화에도 영향을 받았다.

4. 대사관


양국 모두 대사관이 존재한다. 마드리드에는 프랑스 대사관, 파리에는 스페인 대사관이 있다.

5. 관련 문서



[1] 역사적으로 따지면 사실 십자군 시기를 필두로 동유럽, 근동에서 정치적 이해관계만 맞으면 크리스천 군주가 무슬림 영주와 동맹을 맺는거 쯤이야 흔했던 일이지만, 1543년 겨울 하이르 앗 딘 지휘 아래 오스만 수병 3만명이 주둔하며 아예 프랑스의 지중해 거점항구였던 툴롱의 대성당을 임시로 모스크로 개조한 것 같은 중세의 일시적, 지역적 동맹을 넘어 프랑스 같은 서유럽 복판의 강대국이 아예 만단위 오스만 대군을 받아 들여 공동 작전을 한건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2] 게다가 서인도 제도의 대부분의 작은 섬들과 일부 섬들, 중남미의 일부지역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고 거기에다 스웨덴, 폴란드, 덴마크 등 신흥강국들도 서인도 제도의 일부 지역까지 잠시 차지했다.[3] 반대로 다른 라틴권 대국인 이탈리아 상대로는 우익은 반공 동맹국이었다고, 좌익은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의 역사를 공유한다고 성향 막론하고 호감이 주류인 걸 보면 대불관계는 구도나 역사적 배경은 비슷한데 결론은 정반대인 기묘한 상황이다. 아무래도 17세기 전후로 이탈리아는 현지 소국들 상대로 스페인이 갑질하는 입장이었지만, 프랑스는 반대로 내부 통일 이후 부르봉 왕조 상대든, 나폴레옹 상대로든 주로 쥐어 박히는 입장이라서 생긴 차이로 보인다[4] gabacho, 카탈루냐어로는 가바츠 gavatx라고 하며, 똑같이 이 프랑스 까는 단어를 쓴다는 점에서 반불감정 하나만은 진짜 카스티야, 카탈루냐가 공유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5] 한국으로 치면 대한제국 최후의 정통 황제위 요구자이구제정복고를 통해 대한제국 황제위에 오르고 더 나아가 아들도 얻어 이구의 직계 혈통이 재건된 대한제국의 황제위를 대대로 계승하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이구의 어머니인 이방자일본 황실 출신인데 일본 제국일제강점기로 대표되는 한민족 탄압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존재 자체가 증오의 대상이기 때문이다.[6] 스페인 지역과 프랑스 지역은 과거에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