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역사
1. 개요
스페인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스페인을 지배한 민족을 보면 켈트-이베리아족(~ 기원전3C) → 로마인(~ 5C 초중반) → 고트족(~ 8C 초) → 무어인(~ 13C 초중반)[1] → 스페인인(~ 현대) 순이다. 이슬람의 공격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서고트의 후예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분열되었다가 다시 합쳐지고 레콩키스타로 이슬람을 축출한 것이 스페인 왕국의 시작이다.
2. 고대: 역사의 시작에서 로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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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부터 이베리아 반도에는 켈트족과 이베리아인들이 다수를 이루며 살고 있었으나 카르타고인들을 필두로 한 지중해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연안에 도시들을 건설했다.
이미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과 카르타고 등이 식민 도시를 건설하면서 일찍이 진출을 시작한 지역으로서 최초의 본격적인 내륙 개척은 유명한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이유로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장 격렬한 전장이 되었다. BC 209년 로마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공격해와 카르타고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이 지역은 로마의 속주 히스파니아가 되었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의 반란군이 히스파니아를 중심으로 로마를 위협했던 탓에 공화정 말기까지 히스파니아 지역은 로마의 골치를 많이 썩히는 곳이었다. 이 시기 이탈리아 반도에서 많은 로마인들이 히스파니아 반도로 이주했다. 이들과 혼혈된 켈트-이베리아인들은 오늘날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제국 시대에 접어들자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바뀌어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세네카를 배출했고 유명한 오현제(五賢帝) 5명 중 2명(트라야누스(재위 98~117)와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를 배출할 정도로 안정되고 번영한 곳이 되었다. 황제를 배출할 정도라는 것은 로마 제국의 본토인 이탈리아 다음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재정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번영했다. 특히 히스파니아의 '''은광'''은 로마 재정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다. 로마의 통용 화폐가 은화였음을 감안하면 짐작이 갈 만하다. 얼마나 캐댔는지 나중에는 제련하려고 불 땔 나무도 없어질 정도였다. 그리고 히스파니아의 은광 고갈은 쇠락기에 접어든 로마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3. 중세: 서고트 왕국, 알안달루스, 국토회복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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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년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 서고트족이 이곳으로 진출해 서고트 왕국(414~711)을 세우며 로마의 시대는 끝났다. 이베리아에는 서로마 제국 붕괴 후 게르만계열의 수에비족 반달족 고트족이 들어왔다. 이 3종족은 이베리아를 두고 대결하다가 결국 서고트족이 승리해 수에비족과 반달족을 복속시켰고 일부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로 이주했다. 6세기에는 동고트 왕국이 동로마 제국에 멸망당하자 동고트족 일부도 받아들였다. 많은 게르만 종족을 흡수한 서고트 왕국은 당시 서유럽에서는 상당히 선진화된 문물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마 붕괴 직후의 중세 게르만 문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게르만인의 본거지 격인 독일이 아닌 스페인에 가장 화려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당시 게르만족 국가 특유의 분할상속이 문제였다. 결국 이슬람과 내통하던 귀족의 도움을 받아 711년 우마이야 칼리파가 이베리아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서고트족의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고트족의 문화는 오늘날의 스페인에 아직도 일부나마 남아있다. 그리고 이때 일부 귀족이 북부로 도망가 훗날 레콩키스타의 기반이 되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다. 이슬람의 정복 직후 이베리아는 반달족(Valdals)의 땅이라는 뜻으로 반달루시아라 불렸으나 후에 알안달루스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약 780년 동안 스페인은 이슬람 세계의 영역이 되었다.[2] 이때 이베리아를 정복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계 부족들과 동쪽에서 이주해 온 아랍, 베두인, 흑인들을 한데 뭉뚱그려 유럽에서는 무어(Moor)인이라고 불렀다.[3]
이 시기 스페인은 놀라울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750년 압바스 왕조의 반란으로 멸망한 우마이야 왕조의 잔당이 안달루스로 도망쳐 와 건국한 후(後)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수도였던 코르도바는 화려한 예술, 문화, 학문의 중심지로 바그다드 못잖은 번영과 명성을 떨쳤고 지금도 많은 문화 예술품을 남겨 그 찬란한 유산을 엿보게 하고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비롯, 로마 멸망 이후 곳곳에 흩어진 그리스, 로마시대 원전을 보존한것도 이 시기였다. 중세 이전 유럽 전체에서 인구 5만을 넘는 도시는 대략 네 곳 뿐이었는데 그중 두 곳이 알안달루스의 세비야, 코르도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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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정복 이후 8세기 초반부터 북부의 험악하고 황량한 지형을 무기삼아 살아남는 데 성공한 나바라 왕국, 아스투리아스 왕국, 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1세가 수복한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중심으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이 시작되어 700년 이상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현재 스페인 서북부의 레온 왕국, 북중부의 카스티야 왕국, 포르투갈 왕국으로 나뉘어지고 바르셀로나는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변해 새로운 국가들이 국토수복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이슬람 세력은 11세기 초에 후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이후 사분오열되었다가 모로코에서 발흥한 알-무라비뚠 왕조(Almoravids)와 알-무와히둔 왕조(Almohads)의 지배를 차례대로 받으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무라비트와 무와히드 세력은 이슬람 광신자들을 주축으로 한 종교 세력이었기 때문에 종교에 관용적이고 이성과 문화를 중시했던 알안달루스의 문화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이렇게 세력이 물갈이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슬람 세력의 반경은 변경에서부터 야금야금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한 최후의 이슬람 세력인 나스르 왕조가 등장했을 때는 이미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의 격차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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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회복운동은 700년의 역사 동안 꾸준히 수행되지는 않았다. 물론 전체적으로는 계속 이어진 것이 맞지만 같은 기독교 국가들끼리도 서로 대립하며 전쟁을 벌였고 이슬람 세력끼리도 갈갈이 찢겨져서 서로 반목이라도 일어나면 기독교 국가와 동맹을 맺고 상대방을 치는 상황을 자주 선보였다.(…) 포르투갈 백작령이 왕국임을 선언하며 레온 왕국에서부터 분리되어 포르투갈 왕국이 되었던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사실 이슬람 세력의 영토가 줄어든 것은 전면전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대신 싸워주고 대가로 땅을 준 이유가 더 크다.(…) 기근이나 페스트 같은 질병이라도 창궐하면 즉각 전쟁은 휴전 상태에 돌입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085년 톨레도 점령,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의 승리 등으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의 영역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무슬림 타이파 세력은 세비아, 코르도바를 비롯해 1270년대까지 중남부 지방을 모두 잃고 안달루시아 끝단 그라나다 지방까지 밀려나는 상황에 처했다. 14세기 초 마린 왕조가 마지막으로 반격을 시도해 보았지만 무용지물이었고[4] 오히려 1410년에는 포르투갈에게 아프리카 북쪽 끝인 세우타를 빼앗기며 쇠퇴했다. 1469년 10월 가장 강대한 양대 세력인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레온-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은 결혼을 통해 통일 에스파냐(스페인) 왕국을 성립시켰고 1492년 마지막 거점인 나스르 왕조의 그라나다가 항복해 무혈 함락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711년 이래 무려 782년만에 종료되었다. 무어인들 대다수는 이슬람 세력이 수세에 몰리는 동안 원래 살던 곳으로(아랍인들은 아라비아나 이집트로, 베르베르인들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고 그라나다가 항복한 후에도 남은 사람들은 추방되거나 이베리아인에 동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4. 근세: 스페인의 탄생과 발전
4.1. 스페인 제국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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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식민제국으로서 스페인 제국의 역사는 15세기부터 시작된다. 카스티야 왕국은 15세기 중반 후안 2세 ~ 엔리케 4세 시기 왕위계승문제로 혼란스러웠지만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 알폰소가 사망후 이복 여동생 이사벨이 즉위하여 빠르게 내부를 수습했다. 아라곤 왕국은 베네치아에 필적할 만한 지중해 해상제국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한때 이탈리아 남부를 넘어 그리스를 넘보기도 했고, 1409년 최초로 시칠리아에 부왕(Viceroy)을 파견해 통치를 시작했다. 1443년 나폴리 왕국마저 차지하여 부왕을 파견했으나 곧 동쪽으로의 경제권 건설은 난관에 부딫치게 되었고,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자벨 1세와 아라곤 왕국 페르난도 1세의 혼인 이후 대체적으로 인구에서 우월한 카스티야 왕국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부부왕의 치세 시작으로 통합 스페인으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통일과 영토수복을 계기로 스페인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1492년 10월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었다. 1500년 무렵 통일된 스페인의 인구는 6,800,000명으로 이미 상당히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특히 앞선 항해 기술을 활용해 중남 아메리카를 모조리 선점하고 이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양의 금과 은 덕분에 유럽 최대의 부를 누리게 되었다.[5]
한편 가톨릭 공동왕으로 통일 스페인 왕국을 다스렸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라 1세는 헌신적으로 국가를 다스려 강력한 스페인의 성장을 이끌었다. 공동왕은 카스티야라는 전제주의에 가까운 국가와 아라곤이라는 입헌주의에 가까운 국가라는 상이한 두 국가를 '명목상' 통합시켰고 이것을 이용해 대귀족들의 정치적 힘을 약화시켜 교회에 대한 왕권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 '공동왕(1479~1504)' 시기에 나타난 문제는 이후 두고두고 스페인을 괴롭혔다. 목축이 국가 산업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농업의 발전은 급속히 정체되었고 자영농의 성장이 지체되었다.[6] 또한 건국 이념으로 삼은 가톨릭의 과도한 몰두도 스페인 사회와 정치 전반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1478년 설치된 종교 재판소가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과 무슬림을 학살, 추방해버린 까닭에 알안달루스 시절에 쌓아올린 사회적 유산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이후 스페인의 산업 구조는 상대적으로 떨어진 구조를 유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돈을 제대로 된 곳에서 빌리지 못해서 40%가 넘는 이자를 내다가 파산했지만 같은 시대 네덜란드에서는 불과 3%에 불과한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스페인의 사회적, 산업적 기반을 약화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신대륙에서 유입된 부였다. 신대륙의 금과 은은 높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빈부 격차를 강화시켰다. 귀족들은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해 세력 다툼을 할 능력이 충분했다.
한편 통일 스페인 왕국의 적법한 계승자였던 '공동왕'의 후계자 후안이 어릴 때 병으로 사망하고 당시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왕비였던 장녀 이사벨라가 출산 중 사망해 이사벨라 1세 사후 차녀인 후아나에게 계승권이 돌아가면서 스페인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결국 합스부르크 왕가(압스부르고 왕조)가 스페인 왕조를 계승하고 1516년 어머니 후아나 여왕와의 공동 통치 형태로 스페인의 국왕이 된 카를로스 1세가 1519년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 후 전 합스부르크 영지를 상속받았고 이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피선되어(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명목상 선출제였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위를 겸직해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영토만 보면 이때가 스페인-합스부르크의 최고 전성기였다.
이탈라이를 놓고 벌어진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 루터의 종교 개혁과 퍼져만 가는 독일에서의 개신교 사상, 강력한 황제의 출현을 전혀 바라지 않는 독일 제후들과의 계속된 분쟁 등으로 식민지에서의 막대한 수입을 깡그리 지출한 탓에 국고로 돌아갈 돈이 없어 파산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것을 모두 식민지에서 차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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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페인은 부유했던 플랑드르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8차에 걸친 프랑스의 개입을 물리치는데 성공하고, 레판토 해전(1571)에서 오스만 제국을 패배시켜 상징적인 제동을 거는 데 성공[7] 하고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해 이베리아 연합을 형성하는 등(1580) 전성기를 달렸지만 억압적인 통치와 전비를 감당하기 위한 가혹한 과세 정책에 반발해 네덜란드 독립전쟁(1581~1648)이 터졌고 전 네덜란드가 전화에 휩싸이자 스페인의 국력은 급속히 추락해 결국 1575년 두번째 파산이 발생했다. 게릴라전에 능한 네덜란드인들은 잉글랜드·프랑스의 협력까지 얻어 스페인에 대항했다. 1588년 스페인이 준비한 비장의 무기 무적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영국-네덜란드 해군과 해적에 패배하면서 세 번째 파산과 함께 '최강국'으로서의 스페인 제국의 이미지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후 잉글랜드, 네덜란드를 비롯해 신생 모직 공업 국가의 등장으로 스페인 본토 산업이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4.2. 가톨릭 국가로서의 스페인
당시 스페인은 가톨릭 신앙을 중시했다. 그래서 개신교도, 유대인, 무슬림에 대한 탄압이 스페인 왕국 성립 내내 계속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펠리페 2세 시대에 두드러졌다.
펠리페 2세와 합스부르크 스페인(압스부르고 왕조)의 가톨릭 신앙 강조는 펠리페 2세의 개인 성격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정체성이 가톨릭에 기반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스페인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언어, 문화, 정치 체계가 모두 달랐던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등의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국가들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국가다. 15세기 후반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와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한 국가로 통일될 때도 군사적, 외교적 측면에서의 통합만 이루어졌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정책적으로 조율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카스티야인과 아라곤인들은 서로를 외국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8] 이베리아 본토 내에서만 해도 이렇듯 정치적 통합에 장벽이 많았는데 아라곤령의 남이탈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지였던 플랑드르, 부왕 치세에 더욱 확장된 식민지, 펠리페 2세의 재위 중 편입한 포르투갈까지 포함한다면 '스페인'이라는 국가의 실질적인 정치적, 사회적 구심점은 레콩키스타와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십자군적 투쟁이라는 공통적인 역사적 경험이 가장 컸다. 이 상황에서 스페인이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펠리페 2세의 유별난 광신성은 이러한 근본적인 상황에서 개인적인 성향이 가미된 것 정도라 봐야 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스페인의 종교적 열기는 정치적, 사회적 차원으로도 그대로 이어져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트리엔트 공의회보다 50년 가량 앞선 가톨릭 군주와 시스네로스 추기경 시절에 이미 성직자의 교구 부재 문제, 사제들의 무지함, 교회 내의 위계 질서 확립 등 기존 교회가 시달리고 있던 많은 문제를 혁파하고 자체적인 재번역판 성경 출간,[9] 알칼라 대학 설립, 인문주의 학문적 토양에 기반한 신학 교육 체제 정비 등 훗날 가톨릭 교회 전체가 직면할 개혁 자체를 대다수 이룬 상태였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가톨릭 세력이[10] 스페인의 리더십을 따른 것은 신앙에서도 스페인이 선례를 보여 주어 여러 면에서 따를 만한 입장에 되어 있었던 점이 크다.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 중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은 다른 국가들이 시달렸던 식량 폭동도 적었고 전통적 자치권을 둘러싼 아라곤과 남이탈리아의 단편적 반란들을 제외하고는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안정적인 편이었고 많은 동시대 스페인인들은 '스페인의 안정은 종교적 안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식의 기록과 발언을 통해 이것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틈만 나면 귀족, 도시, 왕권이 서로 충돌하며 내전을 벌이고 이런 국내 분쟁이 장기화되는 근간에 종교적 분열이 있었던 동시대 영국,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어권 국가들과 달리 '''이베리아 반도는 적어도 내부에 확실한 평화의 공간(space of peace)이 있었고''' 이런 내부적 안정에 있어서 많은 동시대 지식인, 비평가들은 종교적 통합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11]
아울러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의 원칙은 스페인 외의 가톨릭 국가와 개신교 국가에서도 똑같았다. 가톨릭의 자체적 쇄신 운동을 포함해 대부분의 종교 개혁은 단순히 '개인들'의 신앙을 쇄신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를 쇄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개혁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상이었고 타 종파는 묵인될 수 있을지언정 관용되지는 않았다. 이 점은 스페인도 네덜란드도 같았다. 종교 개혁이 휩쓸고 간 16세기, 17세기 유럽은 종파적 배타성이 일반적이었다. 네덜란드, 베네치아, 독일의 자유시처럼 흔히 '종교적 관용'의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 역시도 대동소이했는데 네덜란드의 종교의 자유란 개신교 신자의 자유일 뿐이었고 가톨릭 신자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그나마 지역에 따라서 가톨릭 신앙이 묵인되는 지역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묵인이었을 뿐이지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네덜란드 헌법에 명시된 것은 1848년이 되어서고 가톨릭이 금지에서 풀린 것은 1853년부터다. 30년 전쟁 당시의 프랑스나 작센 선제후국처럼 동시대에 종교적 여건과 분리된 실리 추구 정책을 폈거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제국 처럼 종교적 관용이 그 특징인 동시대의 다른 사례들도 있지만 이러한 국가들은 유럽 세계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들로 스페인과 비교하기에는 어렵다. 개신교권의 스코틀랜드, 스웨덴, 가톨릭권의 남부 독일 등 스페인보다 처지가 좋지 않았던 국가는 많다.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다고 여겨지는 전성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예수회의 학문적 지원을 등에 업고 폴란드를 스페인, 이탈리아 도시 국가 같은 공격적이고 본격적인 가톨릭 단일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귀족들,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의 개신교도들과 연합하여 종교 개혁을 폴란드 내에서도 확산 시키려는 개신교 귀족들, 그리고 양쪽 라틴계 기독교들 사이에 쩌리가 되지 않고 정치적, 종교적 자치를 확보하려는 현대 우크라이나 일대의 정교회 계열 코사크 귀족들이 정신없이 삼파전을 벌이면서 막대한 국력이 손실되었다.[12]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치하의 종교적 관용은 비무슬림들에 대한 차별을 기반으로 하는 불평등한 공존이지 현대적 의미에서의 관용이 아니다. 베네치아, 함부르크, 리가 등 종교적 관용의 보루로 평가되는 도시 국가들도 역시 재정적 이유로 이교도의 존재가 허락된 것이지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고 공권력도 은근슬쩍 동조한 반개신교/반카톨릭/반유대인 폭동은 주기적으로 터졌다.
게다가 종교 개혁의 시대 당시 가톨릭 세력의 반격의 핵심이 된 트리엔트 공의회의 성직자의 교구 참석, 면벌부 판매 문제, 사제 교육의 문제 등 많은 규항 자체가 공의회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파격적인 정치적 지원에 힘 입은 스페인 출신의 주교들이 옛날 방식 그대로의 교회 구조를 유지하고 싶었던 친 교황청파와 프랑스 주교들을 상대로 치열한 논쟁을 벌여 규정된 반쯤은 스페인이 주도한 개혁이었던 만큼 이 당시 스페인 입장에서 가톨릭 신앙과 국가적 행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할 수도 있다.
추가로 스페인의 이단 심문은 끔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이 당대 타 유럽 국가들보다 더욱 폭압적이지도 않았고 주로 영미권의 대중에게 친숙한 지식인들이 형성한 스테레오 타입처럼[13] 독재적인 국민 탄압 기관은 절대 아니었다.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 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천명이고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스페인 이단 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최대 한도로 잡아도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1540년부터 1700년까지 연간 5.2명이 처형된 것으로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타 국가들보다 스페인이 더 광신적이였다고 말하기는 힘든 숫자다.[14] 스페인 이단 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15]
[image]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년~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 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의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개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년~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스페인 종교 재판소는 로마 종교 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해서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47년~1668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유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 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다른 증거다.
「종교개혁」, Peter Marshall[16]
이 이미지에서 보듯 AD 1540-1700의 스페인 종교재판에서는 826명의 사망자가[17] 유대교, 이슬람교, 루터교, 신비주의, 이단은 아니지만 틀린 신앙관(propositon), 중혼(bigamy), 교사죄(Solicitation), 미신(Superstition) 등을 합쳐서 발생했을 뿐이다.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이라는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종교 내전을 겪고 종교 문제 자체에 질릴 만큼 질린 후에야 이러한 종교적 정체성과 국가적 정체성의 분리가 이루어 질 수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귀족들의 자치적 전통이 워낙 강해서 이렇게 종교(뿐만 아니라 국정 모든 일에 관련해)와 관련된 중앙의 확고한 개입 자체가 불가능해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교 분리라는 개념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던 시절에 스페인만 유별나게 광신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신앙과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이성이 분리 되기 이전 시대의 기준에서는 나름 합리성과 체계성을 추구한 제정일치 구조였다고 볼 수 있다.
5. 스페인의 중흥과 근대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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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2세의 초상화.
펠리페 2세의 치세와 죽음(1598년) 이후로 위그노 전쟁, 30년전쟁(1618~1648) 등과 같은 유럽에서의 분쟁에 계속해서 간섭하면서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다. 한편 스페인 왕국의 새로운 수도가 된 마드리드의 인구는 1600년에는 50,000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펠리페 2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총신)들에게만 정치를 맡겨 국정은 파탄에 이른다.[18] 그 중에서도 능력있고 출중한 관료들의 개혁 시도는 많은 부분에서 좋지만은 않았다. 17세기 중후반에는 국왕 카를로스 2세(재위 1665~1700)가 36년 동안 통치했다. 카를로스 2세는 능력이 모자라다는 폄하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합스부르크 왕조에서 보기 드물게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했다. 그 전 군주들은 총신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카를로스 2세는 총신을 두지 않고 직접 통치하려고 했다. 이 시기에 스페인의 인구는 느리지만 계속 증가해 1700년 무렵 8,800,000명에 달했고 마드리드의 인구는 1700년에는 110,000명으로 계속 증가해서 스페인 왕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귀족 과두제에 가까워진 스페인 왕국을 왕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권력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 고위 귀족들은 카를로스 2세를 적대시했다. 거기에다 그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자손조차 남기기 못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의 불씨를 남기고 사망했다."성모 마리아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고 싶은 것을 하느님(야훼)에게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풍토(風土)를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을 들어 주었다. 다음에는 가장 좋은 과일과 밀을 부탁했고 가장 뛰어난 말과 칼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들도 모두 들어 주었다. 그들은 다시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춤을 부탁했고 또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가장 용감한 남성을 부탁했다. 하느님은 이것도 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좋은 정부(政府)를 부탁했다. 그러자 당황한 성모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사들이 하루도 천당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페인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는 우화.)
계승전쟁 이후 즉위한 펠리페 5세의 스페인-부르봉 왕가(보르본 왕조)의 통치 이후에 스페인은 중흥을 이루었다. 보르본 국왕들은 프랑스의 예를 본받아 행정을 강화하며 각종 개혁[19] 을 시행했다. 또한 유럽과 신대륙의 무역을 장려하고 국내 발전에 힘썼다. 카를로스 3세 시기에는 루이지애나를 획득했다. 마드리드의 인구도 계속 증가해서 1800년에는 170,000명이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로 카를로스 1세 ~ 펠리페 2세 시기 초기의 압스부르고 왕조만큼의 위상을 가지지는 않았다. 다만 식민제국으로서는 최대 영토와 국제적 패권을 가진 시기로 유럽 권역 내의 영향력이 감소한 대신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최정점은 18세기에 달성했다.
나폴레옹 전쟁(이베리아 반도 전쟁)이 발생하면서 본토가 게릴라 전쟁의 여파로 독일 못잖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20] 나폴레옹 전쟁 도중인 1810년에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의 본국 점령 등으로 인해 식민지였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멕시코의 미겔 이달고, 호세 모렐로스, 비센테 게레로와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콜롬비아, 페루의 시몬 볼리바르, 아르헨티나의 호세 데 산 마르틴, 마누엘 벨그라노,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우루과이의 호세 아르티가스 등 독립 운동 지도자들의 활약으로 인해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설치한 식민지 부왕령[21] 체제는 붕괴되어 현재의 중앙, 남아메리카의 국가들로 독립하게 된다. 1820년 스페인의 인구는 12,200,000명으로 늘어났지만 다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1833년에는 왕위 계승을 놓고 3살 먹은 여왕 이사벨 2세(재위 1833~1868)를 지지하는 이사벨리노스파와 이사벨 2세의 삼촌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대공을 지지하는 카를리스타와의 내전이 벌어졌고 이사벨파가 승리하고 나서 자유주의적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페인도 당시 많은 지역처럼 인구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고 자유주의자들이 펼친 개혁책은 잘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이사벨 2세를 옹립한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능과[22] 여전히 잔존한 카를리스타의 준동 등으로 스페인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1870년 스페인의 인구는 16,200,000명으로 증가하기는 했지만 주변 국가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한 번은 혁명으로 스페인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다가 쿠데타로 도로 왕정이 복고(스페인 왕정복고)되고 무정부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등 국가의 상황이 극도로 혼란에 빠져들었고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재위 1874~1885)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에 간신히 다시 국가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미국에게 할양하고 쿠바를 독립시키고 나머지 태평양 식민지는 독일에 팔아 넘기는 등 대부분의 식민지들까지 영유권을 포기, 처분하며 식민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1910년 스페인의 인구는 20,300,000명이 되었지만 주변 국가에 비해서는 국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까스로 남은 모로코 식민지(스페인령 모로코)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리프 전쟁으로 확대됐다. 초기 진압에 실패하고 투입된 군대가 전멸 수준까지 치닫자 1923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프리모 데 리베라가 통치를 시작했다. 리프 전쟁은 프랑스의 원조로 간신히 승리했지만 이 군사 정권조차도 1929년에 밀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붕괴했다. 이후 1931년 군사 정권을 지지하던 왕가를 내쫓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공화정 이행 뒤에도 국가적인 위기와 왕당파의 준동으로 인해 혼란을 거듭하다 1936년 선거에서 좌파와 중도 세력의 연합 전선인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집권 인민전선 내부의 좌파와 중도 세력간은 물론이고 좌파 내에서도 무정부주의, 사회민주주의, 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 등의 다양한 의견들이 많았고 주변 국가도 유럽 안에서 좌파 정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국가는 없었다. 조지 오웰만 하더라도 심지어 그 소련이 원했던 것도 자유주의 영국, 프랑스와 다리를 이어줄 수 있는 적당히 좌파의 지분도 크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공화국이었다는 점을 이미 전쟁 와중인 37년에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시절 국가적 차원에서 스페인 좌파 정권을 지원한 것은 멀리 떨어져 있고 군사적 지원을 할 국력도 없었던 멕시코 뿐이었다.
인민전선 집권 후 반발한 군부와 기득권층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1936~1939)이 발생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이 전쟁에 관심을 끊었지만 독일, 이탈리아, 소련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해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과 사회주의 간의 대리전으로 비화되었다. 또한 당대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인민전선 의용군에 자원해 전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이 대표적이고 이 시기를 다룬 유명한 영화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있다. 당시 나치 독일은 대량의 공군을 투입하여 최초의 현대적인 공습을 선보였고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당시의 상황을 게르니카라는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6. 프랑코 독재
1939년 3월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가 이끄는 쿠데타 군은 마드리드를 제압하고 내전을 종식시켰다. 이후부터 프랑코의 철권통치가 시작된다. 프랑코는 내전에서 나치 독일의 많은 지원을 받았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면한 얼마 안 되는 국가로 남았다. 프랑코는 그래도 사회주의는 사냥해야겠다며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1개 보병사단(청색 사단)을 보내기는 했다. 의용군을 보냈을 때는 잠시 비교전국으로 상태를 변경했다가 훗날 독일이 밀리고 서방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재빨리 철수시켰다. 그래도 이 시기부터 스페인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해서 1950년에는 27,900,000명으로 증가해 인구 증가가 느려지던 주변 국가와는 다르게 오히려 더 빠르게 늘어났다.
처음에는 파시즘 국가라는 명목으로 서구권에서 따돌림을 받던 스페인도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의 대서양 전략의 구도에 필요했던 덕분에 점차 관계 개선을 해 나갔고 프랑코는 철권 통치로 인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권좌를 굳건히 지키다 천수를 누리고는 1975년 11월 병사했다. 프랑코는 1940년대에 왕정복고를 선언해 놓고는 섭정의 지위로 독재를 펼쳤고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지명해 두었다. 프랑코가 죽자 후안 카를로스 1세(재위 1975~2014)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더불어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말기에 아프리카에 남아있던 마지막 식민지인 적도기니의 독립을 승인하고 마드리드 조약으로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에게 양도함으로서 마지막 해외 식민지들을 정리했다.
한편 미소간의 냉전이 고조됨에 따라 미국은 자신들의 입장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53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스페인을 방문하게 된다. 이후 스페인은 영토 내에 미군 기지를 설립하는 조건으로 1959년까지 총 10억달러 규모의 경제원조를 받게되며, 이에 힘입어 스페인 경제는 1950년대 연 5%의 성장률을 기록하게 된다. 스페인 경제의 만성적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외화부족이 심각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젊은 경제관료와 은행가, 기업가들의 개혁으로 1958년에는 OECD, 그리고 1959년에는 IMF와 세계은행에도 가입하여, 정치적인 고립[23] 과 상관없이 서유럽권과의 경제통합이 가속화 되었다. 또한 이전부터 나름 기반이 탄탄했던 이른바 비(非) 굴뚝산업이라 불리는 관광업을 국책사업으로 지원하여 남는 노동력과 식민지인을 동원해 사회인프라와 숙박업소를 확충하고, "스페인은 다르다"는 구호로 대대적 홍보를 하였다.[24] 특히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의 여름휴가지와, 겨울철 피한지로 각광받으면서 '''1960년대 말에는 한 해 관광객이 2000만에 이르렀다.'''
이러한 경제부흥과 더불어 철옹성같은 프랑코의 권력에도 차차 보이지않는 금이가기 시작했고, 60년대부터 비밀리에 노동조합도 창설되었다. 1981년의 반동이 있긴 했지만 1975년 프랑코 사후, 스페인이 국내 별다른 소요 없이 빠른속도로 정권이양과 민주화가 달성된데에는 이러한 중산층이 영향이 지대했다.
프랑코 정권이 남긴 영향은 스페인이 안고 있는 역사적 문제 중 하나다. 국제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국제연합 인권 위원회, 국제사면위원회, 유럽연합 등에서 프랑코 정권을 비난하며 그에 대한 모든 기념과 추앙을 통제해줄 것을 스페인 정부에 줄기차게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40년간 그 나름대로의 이념으로 스페인을 통치했던 사람인 만큼 스페인에서 무작정 그를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바깥에서 볼 때야 프랑코는 자국민 수십만명을 학살한 독재자에 지나지 않지만 스페인 시골 마을에 가면 가정집에 프랑코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 등 프랑코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고도 살아 남아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한 거대 노조들이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대도시에서 프랑코 옹호를 함부로 하다가는 신변을 책임지지 못할 수도 있다. 36년의 철권 통치 하에서 무수한 스페인 자유주의자와 사회운동가, 민주주의 인사들이 철저하게 탄압당하고 희생된 역사는 스페인 현대사의 흑역사로 묻히게 되었다.
7. 왕정복고와 민주화
1975년에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일단 프랑코 정권의 기본틀을 그대로 유지했다. 사실상 프랑코의 자리를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대신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프랑코 체제가 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프랑코가 죽기 전에 정부 요직에 임명해놓은 프랑코 정권의 강경파(프랑코 체제가 프랑코 사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온 인사들)를 프랑코에게서 물려 받은 자신의 권위로 몰아내고 민주주의의 도입을 수용한 프랑코 정권의 온건파들을 정부 요직에 임명하는 한편 스페인 내전 이래 탄압되어 온 사회노동당과 공산당 등의 좌파 정당들을 합법화해 정계 진출도 허용했다. 그리고 이들의 합의로 1977년에 정말 오랜만에 자유 총선이 이뤄졌고 1978년에는 민주주의,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지방자치를 규정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민주화를 달성했다.
1981년에는 군부에 의해 반동 쿠데타 시도가 있었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방송으로 군부를 질타해 불발로 끝나게 되었다. 덕분에 프랑코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 국왕이라는 초기의 평가를 뒤엎으며 후에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조차 방송에서 "국왕 만세"를 외칠 정도에 이르렀으니''' 그 인기의 상승폭을 짐작케 한다.
이렇게 프랑코 사후 자유주의자들이 싫어하던 왕정이 다시 돌아왔지만 국왕은 실권을 갖지 않는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국왕은 옛날처럼 마드리드 왕궁에 살지 않고 마드리드 근교 사르수엘라 궁전에서 생활하면서 마드리드 왕궁은 행사 때만 이용한다.
독재 정권 후신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합의로 이루어진 민주화는 비록 프랑코 정권의 유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남겼지만 민주화를 통해 스페인은 문화적으로도 권위주의의 그림자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언론 자유 지수도 빠르게 올라갔다. 정치적인 '침묵 협약'과 별개로 문화적인 부분에서는 'La Movida Madrileña'(라 모비다 마드릴레냐)라고 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프랑코 시절 억눌렸던 젊은이들은 패션과 표현의 자유를 만끽했고 'Mecano'같은 밴드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같은 영화 감독도 등장하는 등 스페인은 1980년대에 들어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의 중흥기를 일구어 냈다.
한편 스페인은 구 식민지 국가들의 연합체인 이베로-아메리카 공동체(Cumbre Iberoamericana)를 운영하고 있고 스페인 국왕이 수장을 맡고 있다.[25] 스페인의 대 중남미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았고 정기적인 정상 회담과 정치, 경제, 교육, 환경 협력을 하고 있다. 2017년 기준 스페인의 중남미 FDI 액수는 영국, 프랑스와 같은 다른 유럽 국가보다 6배나 많고 ACS[26] , 텔레포니카, CAF, Mafere, Codere 등 많은 스페인 기업들이 언어적, 문화적 연고를 무기로 아직도 중남미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텔레포니카 같은 기업의 경우 남미 통신 시장을 장악하고 전체 수익의 반을 남미 시장에서 낼 정도.[27]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인기를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건 중에서 2007년 산티아고에서 열린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이 있다. 포르투갈,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의 두 정상들과 라틴 아메리카 정상들이 모여 회의하는 장소에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과 함께 실질적인 남미의 맹주 중 하나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계속 미제의 앞잡이 운운하며 회의를 지연시키자 '''"거 입 좀 닥치지!?"'''[28] 하고 꾸중(?)한 사건이 유명.[29]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이 장면을 녹음한 것이 벨소리로 큰 인기를 모았고 스페인어권 인구가 있는 중남미 지역에서도 벨소리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2008년 글로벌금융위기로 인해 스페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써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약 40년간 국민당과 사회노동당이 주거니 받거니 이어 오던 양당 체제가 붕괴되고 좌파 신생 정당 포데모스와 중도 우파 신생 정당 시우다다노스(Ciudadanos)가 제 3세력으로 대약진했다.
2014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펠리페 6세 국왕에게 양위했다. 즉위식 때 반대파도 있었지만 환영 인파가 훨씬 많았고 국민들은 새로운 이미지를 바라고 있다. 아직까지는 상당수의 스페인 국민들에게 왕실은 옛 영광을 상기시키고 재현할 수 있는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다. 2018년 6월 1일에는 집권 국민당의 불법 정치 자금 모금 혐의의 책임을 지고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물러나고 사회당의 페드로 산체스 당수가 신임 총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