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대평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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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대전 서구 을)
제17대
구논회[18]

제17대
심대평


제18대
이재선
대한민국 국회의원 (충남 공주시·연기군)
제17대
정진석

제18대
심대평


개편
박수현[19]
이해찬[20]


제24·33-35대 충청남도지사
심대평
沈大平 | Sim Dae-pyung

<colbgcolor=#8c8c70><colcolor=#fff> 출생
1941년 4월 7일 (82세)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1]
본관
청송 심씨 안효공파 온양공파[2]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 / 석사)
본관
청송 심씨 안효공파 온양공파[3]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경제학 / 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 / 석사)
종교
천주교(세례명: 임마누엘)
가족
배우자 안명옥, 슬하 장남 심우정, 차남 심우현, 삼남 심우찬[4]
소속 정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7, 18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7, 18
약력
제24, 33~35대 충청남도지사
제17대 국회의원(대전 서구 을)
제18대 국회의원(충남 공주시·연기군)
국민중심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
국민중심당 대표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건양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
1. 개요
2. 생애
2.1. 정치 경력
3. 여담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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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관료, 정치인이다. 사상 첫 민선 3선 충청남도지사로, 한때 충남권의 맹주로 떠올랐던 인물.

2. 생애


대전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현재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산하.)를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관료로 근무하였다. 박정희 정부 때는 국무조정실에서 근무하였다. 전두환 정부 때는 의정부시장, 대전시장 등을 역임하였다. 노태우 정부 때는 관선 충청남도지사,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2.1. 정치 경력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남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6년 1월, 자유민주연합이 한나라당과의 합당을 꾀하자, 반발하는 이들과 함께 탈당하여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국민중심당을 창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열린우리당 구논회 국회의원의 별세로 치러진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중심당 후보로 대전광역시 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이재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중심당 후보로 출마, 기호 5번을 배정받았으나, 그 해 11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무소속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였다. 2008년 2월, 이회창과 함께 자유선진당을 창당하고, 기존의 국민중심당을 흡수 통합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충청남도 공주시-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9년에 '충남지역 총리 지명설'을 두고서 이회창 총재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8월 30일에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며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하였으며[5] 2011년 복당하였다.
이후 당 대표직에 올랐으나, 여전히 이회창 총재와의 불화가 지속되었다.
이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침몰 직전의 자유선진당의 총선을 지휘하였으나, 자유선진당은 비례 득표율 3%를 간신히 넘기며 비례대표 2명, 지역구 3명만 당선되어, 원내 정당을 유지하는 것에 감사할 처지로 몰렸다. 본인도 직접 지역구 후보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이해찬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미 선거 초반부터 양자 대결에서 밀리던 상황이었다. #
같은 해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며[6], 자유선진당의 후신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되자 새누리당 소속으로 있으면서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였다.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자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장관급), 건양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2017년 지방자치발전위원장 퇴임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며 은퇴했다.

3. 여담


  • 장남 심우정은 검사(연수원 26기)이고, 삼남 심우찬은 육군사관학교 52기 수료 후 사법시험(제50회)에 합격하여 2015년 12월 대통령비서실 행정관을 지냈다.
  • 같은 충청권의 맹주였던 이회창이인제와의 관계는 좋지 못하다. 당장 이회창의 당 운영에 반발해서 창당한 정당이 국민중심연합이며, 재합당 후에도 계파 갈등이 지속되었다. 결국 계파 갈등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대로 터지며 이회창은 탈당하고 만다. 이인제와도 역시 에피소드가 있는데, 2005년 자민련을 탈당하고 만든 국민중심당에 합당 선도합의로 이인제를 포함한 3명의 의원이 중심당에 합류했다. 그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심대평이 대선 후보가 되자 이인제는 탈당하고 민주당에 복당한다. 이렇듯 김종필의 은퇴 후 떠오른 충청권의 맹주들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7]
  • 2020년 국회방송 오유경의 책방 7회에 출연하며 8년만에 국회로 방문했는데, 인터뷰에서 정치인으로는 큰 성과를 못 거두었다며 본인은 공직자로 불리길 희망한다고. 논산지역의 지방지인 놀뫼신문과의 장문의 인터뷰에서도 현직에서 물러난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도정에 관련한 주제에 달변인 모습을 볼 수 있다. #
  • 초대 민선 충남도지사, 3선 도지사라는 정치적 무게감에 비해서 사실 중앙 정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사실 도지사로서의 심대평은 상당히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경실련 등의 민선자치 도정평가에서 항상 1위를 도맡아 했으며, 천안/아산/당진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제조업 기업을 대거 유치했다. 그 외에도 '백제문화권' 개발이나 생계보호특별조례, 계룡시 신설 등의 업적을 남겼다.

  • 행정가로서는 오늘날 현대 충남 행정의 밑그림을 닦았다고 할 만큼 매우 유능했던 셈이나, 그 업적을 홍보하여 자신의 브랜드로 삼기엔 소속 정당 자민련의 늙은 이미지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개인 역시도 도정의 성공을 부각해 전국 정치인으로 발돋움 하기보다는, 지역 할거 정치인으로 안주하였기에 구태한 지역주의 정치가의 이미지를 결국 벗지 못했다. 자신의 지역 내 패권을 위해 두 차례나 탈당해 독자 창당 노선을 밟은 것 역시 비판을 받았다.
  • 자유선진당 시절 중앙 정치의 이합집산에 개입되었던 대표적 두 장면이 있다.
    • 2009년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 이회창 총재를 회유하기 위해 심대평 총리 카드를 던졌으나, 이회창 총재가 먼저 거부한 장면이다. # 물론 마치 심대평 총리를 가로막기 위한 모양새처럼 되어 양자의 갈등이 심해지는 원인이 되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행정도시 이전을 막기 위한 '방탄' 국무총리, 즉 현실의 정운찬 총리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가능성은 현실화 되기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심대평 지사가 세종시 수정안을 받아들이며 총리가 되었다고 한들, 정운찬 총리처럼 지역의 지지만 잃고 정계에서 더 일찍 퇴장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 2012년의 경우엔 자신이 직접 몸값 올리기에 나섰던 경우였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원장에게 숙청당한 새누리당 비박 인사들의 불만이 높았는데, 그 맹주 격인 김무성 전 대표에게 직접 신당 창당을 제의한 것이다. # 그동안 박세일국민생각이나, 정운찬 등에게 동업제의를 받았을 때도 반신반의하던 김무성이었지만 이번 경우에만큼은 선진당의 지역기반이나 제3당으로서의 의석수, 선거 지휘의 전권을 넘기겠다는 조건에 반색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김무성 본인이 탈당 기자회견 직전에 생각을 철회함으로서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리고 심대평과 자유선진당은 예정된 몰락의 길로 가게 되었다. 설령 현실화가 되었다고 해도, 자유선진당에겐 실제 19대 총선 결과보다는 무조건 나았겠지만, 비박계의 입장에선 보수 분열이라는 책임을 떠안게 되는 치명적인 제안이었다. 더욱이 심대평 의원 개인의 운명만을 따지면, 세종시의 경우 온건 보수세력이 추가로 결집했다고 한들 이해찬을 이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5 - 2005
정계 입문

2005 - 2006
탈당[8]

2006 - 2008
창당

2008 - 2010
합당[9]

2010
탈당[10]

2010 - 2011
창당

2011 - 2012
합당[11]

2012
당명 변경

2012 - 2017
합당[12]

2017 - 2020
당명 변경
정계 은퇴

2020
합당[13]

2020 -
당명 변경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616,006 (67.88%)
당선 (1위)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656,795 (84.63%)
당선 (1위)
[14]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508,796 (66.96%)
당선 (1위)

2007
2007년 재보궐선거 (대전 서 을 국회의원)[15]

24,573 (60.30%)
당선 (1위)
[16]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후보사퇴
[17]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공주·연기)

47,937 (63.32%)
당선 (1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세종)
15,679 (33.82%)
낙선 (2위)

역대 선거에서 충청권 보수정당 소속으로만 출마했다.

6. 둘러보기









[1] 現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2] 청송 심씨 26세손 '輔'자 항렬이지만 일부 집안에서는 '輔'자 대신 '錫'자를 쓰기도 한다. 참고로 심대평의 족보상 이름은 용석(勇錫)이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3] 청송 심씨 26세손 '輔'자 항렬이지만 일부 집안에서는 '輔'자 대신 '錫'자를 쓰기도 한다. 참고로 심대평의 족보상 이름은 용석(勇錫)이다.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image][4] 출처.[5] 이후 자유선진당은 심대평 의원의 탈당과 동시에 같이 교섭단체(선진과 창조의 모임)를 이루던 창조한국당 문국현의 의원직 상실로 교섭단체에서 해제된다. 그래도 보건복지위원회의 위원장직은 안 뺏겼다.[6] 당적은 유지했다. 이회창 전 총재가 아예 새누리당에 복당했던 것과는 대조적.[7] 그러나 당내 위치는 셋 중 가장 높은 것 같은데, 장관급 위원장을 합당 후에도 역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인제는 그때 국회의원이였지만 이후 2번 연속 낙선에 경선 탈락을 하며 사실상 정계 은퇴에 임박해 있고, 이회창은 바른정당으로 갔다가 당적을 정리하며 현재는 무소속이다.[8] 신당 창당[9] 자유선진당에 흡수 합당[10] 당내 갈등[11] 자유선진당과 신설 합당[12]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13]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14] 범여권 단일후보
(DJP 연대)
[15] 전임자 열린우리당 구논회 의원 작고[16] 反한나라 연합 후보. 공식적으로 선거연대는 없었지만 당시 지지율이 저조했던 열린우리당이 공천을 하지 않았고, 전임 구논회 의원의 부인이 심대평과 만나는 등 사실상 심대평을 지지했다.[17]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