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나이팅게일
1. 개요
영국의 간호사이자 행정가, 사회 개혁가.[4]
한국에서는 백의의 천사라고 알려진 병의원 제도의 개혁자. 크림 전쟁 당시 38명의 성공회 수녀와 함께 이스탄불에서 간호사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 유명세를 이용해 현대 간호사의 기틀을 잡고 발전시켰기에 흔히들 "간호학의 대모(大母)"로 불린다.
또한 통계학자, 사회 개혁가로도 활동하며 또한 통계 자료의 시각화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통계 관련 서적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크림전쟁에서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도표 가 유명하다.[5] 그러한 업적들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통계학회의 첫 여성 회원이 되기도 하였고, 미국통계학회의 명예 회원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성격은 여러모로 독불장군 내지는 대장군으로 불릴 정도로 고집이 있었다고 하며, 이러한 성격도 그가 이루어낸 업적들을 달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동문학가 신지식 선생(1930년~2020년)이 쓴 나이팅 게일 전기(어린이 그림위인전기, 계몽사)에 따르면, 빈틈없는 병원운영능력과 영국군을 설득하여 병원운영에 필요한 간호물자를 보급받는 소통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 생애
2.1. 간호사가 되기 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별장에서 부유한 영국 상류층의 딸로 태어났다. 영국인이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플로렌스'라는 이름이 붙었다.[6] 사족으로 언니 파세노프 역시 나폴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폴리의 그리스식 이름인 파세노프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매의 출생지가 영국이 아닌데다가 각각 다른 이유는 플로렌스의 부모님이 결혼식을 마치고 떠난 세계일주급 신혼여행 때문이였다.
그녀는 커가면서 간호사가 되어 병들고 다친 이들을 돌봐주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신앙적 사명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절의 간호사는 상당히 하대받는 직업이었으며, 요양원에서 잡일을 하는 청소부·잔심부름꾼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었기에 당연히 명문가의 딸들은 간호사가 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일부 병원을 제외하고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그다지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일례로 의사가 되려던 음악가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아버지가 "직접 병원에 가보라"고 말해서 18살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 대병원을 방문했다가, 쥐가 넘치고 지저분한 병원을 보고 구역질을 하며 의사를 포기하고 작곡가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찰스 다윈이 시신해부 실습 당시 고어함에 질려 의사의 꿈을 접고 생물학자가 된 것처럼 당시 유럽을 포함한 웬만한 나라들의 의료계가 이랬다. 부잣집은 병원에 가느니 아예 실력 좋은 의사를 찾아 직접 주치의로 고용하여 병원이라는 곳을 기피했을 정도였고, 사실 실력이 좋다면 이런 식으로 개인에게 고용되는게 의사에게도 병원에 들어가는 것보다 여러모로 이득이였다.[7] 또한, 당시에는 낮은 임금을 주기 위해 교육수준이 낮은 여성들을 주로 고용했기 때문에 간호사들의 직업의식이나 능력도 매우 떨어지는 편이라 전문 직업으로 인정도 받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간호사는 아직도 처우가 나쁜 직종이다.
그런 이 시대에, 금수저 집안의 귀한 막내딸이었던 플로렌스가 가족들에게 '간호사가 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라며 사회에서 멸시받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니 집안의 분위기는 BOOM. 아버지는 상당한 부호였으며 지역 시의원이었기에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문 집안으로, 플로렌스도 어릴 적부터 아가씨 소리를 들으며 귀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나중에 주지사 선거에도 나갔을 정도다(낙선했지만). 플로렌스의 간호사 일을 막기 위해 아버지는 강제적으로 혼사를 여러 번 준비했으나 플로렌스는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2.2. 크림 전쟁
어쨌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하여 간호사가 된 이후, 크림 전쟁에 군 간호사로서 참여하게 된다. 위인전에 나오는 나이팅게일의 모습은 주로 이 시절의 모습. 당시 전쟁에서는 총 맞아 죽는 병사보다 죽지 않을 정도의 부상을 치유하지 못해서 사망하거나, 병사(病舍) 내 전염병이 돌아 사망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심각한 위생상태와 맞물려 작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감염이 된다든지, 파상풍에 걸린다든지 하는 문제는 일상다반사로 전사자보다 부상으로 인해 전투 후 사망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이팅게일은 군 위생(軍 衛生)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열악한 보건위생 때문에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각종 통계자료를 만들어 제시하며 끊임없이 보냈으며, 결국 영국의 지원을 받아낸다. 즉, 위생을 처음 도입했다. 이미 1600년대부터 위생의 개념이 있었으며 1800년대 초중기에 위생법 등이 발효되었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은 그녀라고 봐도 무방하다. 덕분에 영국군 부상자의 사망률은 40%대에서 2%로 감소하는 기적을 보게 된다.
이후 나이팅게일이 영국군의 사망률을 눈에 띄게 감소시킨 점, 그리고 밤마다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닌 점 등의 이미지가 합쳐져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라는 이름으로 각종 언론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며 나이팅게일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2.3. 종전 이후
전쟁 중 나이팅게일은 지역 풍토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침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에서 얻은 유명세를 이용하여 기부를 받아(더 정확히는 funding을 받아) 1860년 7월 9일 자신의 간호 철학[8] 을 고스란히 담아낸 최초의 근대식 간호 학교를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설립했다.[9] 당시 전염병에 대해서는 2가지 학설이 존재했다. 하나는 히포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장기설(나쁜 공기가 병을 만들어낸다)이었고, 또 하나는 루이 파스퇴르 등을 비롯해 당시 막 발견되기 시작했던 미생물설(미생물이 병을 만들어낸다)이었다.
현대에는 미생물설이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에는 장기설이 조금 더 우세했고, 나이팅게일도 장기설의 강력한 지지자였기 때문에 이 병원에서는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창문의 위치, 크기, 간격, 환풍기의 위치, 개수 등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한 조건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나이팅게일이 지지했던 학설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지금 보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조건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결국 장기설에서 주장하는 '나쁜 공기' 자체가 병원성 미생물을 포함하고 있는 비위생적인 공기였기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주장한 위생적인 환경은 치료에 분명히 의미가 있었고, 병이 전파되지 않기 위한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거리,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도록 온도, 습도 등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할 것, 환자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개인별 조명을 설치할 것 등 현대 병원설계에서도 다수 포함하고 있어 병원 건축에서도 상당히 참고하고 있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환자와 환자 사이의 최소거리라던지, 간호사 1명당 담당하는 최대 환자의 수[10] 등은 병원의 수익문제로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지만, 원칙상 지켜야 하기는 한다는 게 중론. 참고로 나이팅게일이 세웠던 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환자의 만족도나 회복속도가 월등히 좋다고 한다. 그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제적십자에서는 매년 세계의 우수한 간호사들에게 '''나이팅게일 상'''을 수여하고 있으며 후학들이 간호사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나이팅게일 선서'''는 간호사들의 좌우명으로 알려져있다.
그녀가 남긴 업적과 행적을 모두 보면 현장에서만 뛰며 근무를 하는 간호사라기보다는 '''보건 행정가'''에 가깝다. 즉, 나이팅게일은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전문가라기보다는 행정가, 정치가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간호사 중에 간호감독 등 행정직이 있어서, 간호사라는 것이 완전 틀린 것은 아니다. 성격 역시 온화하고 부드러운 귀족 여인이라기보다는 여러모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배짱도 좋고 집안도 좋은 그녀가 단호히 개혁의 칼날을 휘둘렀기에, 그전까지의 전근대적 병원 행정과 간호사의 지위가 진일보했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실제로 그녀는 크림 전쟁 종결 이후 한때 봉사한 적이 있었던 구빈원의 의료 복지 체계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크림 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대우받은 지라 인맥도 넓었고 꾸준히 주장한 덕에 동조자들 및 조력자들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력자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 근거를 더욱 확충하고 논리를 보강할 수 있었고. 중간에 그녀의 제안에 호의적인 자유당이 선거에서 패하는 악재가 터지는 바람에 원안대로 추진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자신의 제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영국에서 1911년에 실시될 국민보험법과 1946년 시행된 전국민 의료복지의 선구적 조치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통계 자료의 시각화에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며, 통계 관련 서적에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크림전쟁에서 영국군 사망 원인에 관한 도표가 유명하다. 이른바 장미 도표(Rose diagram)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그래프의 모양이 활짝 핀 장미꽃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후에 나이팅게일은 영국 왕립 통계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선출될 정도다.
2.4. 말년
위인전 같은 데서는 크림 전쟁 때 이야기만 나오기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의외로 크림 전쟁이 터진 뒤에도 꽤 오래 살았다. 사망했을 때 나이가 '''90살'''. 사실 이렇게나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말년에는 영국인들조차도 나이팅게일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
참고로 말년에 제자인 팬위크와 간호사 면허 제도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싸웠다. 나이팅게일이 간호학이라는 학문의 시초인 이유는 간호사 제도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간호 철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팬위크는 현대 간호사의 제도적인 부분에 많은 발전을 가지고 왔다. 영국간호사협회의 창립자이자 ICN(International Conference of Nursing, 국제간호사협회)의 초대 회장이다.나이팅게일은 간호란 사명정신,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면허제도에 거부감을 가졌으나, 팬위크는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면허제도를 주장하였다.
결국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숨진 뒤부터, 이쪽 세력은 힘을 잃었다. 1919년 영국에서 간호사 면허시험이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간호사가 되려면 면허 시험을 봐야 했다. 결과적으로 간호사들이 전문직으로 대우받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에, 현대 간호학자들의 입장은 나이팅게일과 팬위크 둘 다 큰 기여를 했다는 것. 물론 대중적 인지도나 간호철학에서의 영향력은 팬위크가 나이팅게일에게 상대가 되지 않고, 간간히 간호학 개론에서 이름을 보이는 수준. 또한 제자들이 미국에도 많이 건너가서, 오히려 미국쪽에 더 빨리 간호가 발전하게 됐다.
대단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대영박물관 아카이브에 '''육성'''이 보존되어 있다. 1890년에 녹음된 자료이니 나이팅게일이 70세 정도의 노년일 때 녹음한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에 향년 90세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공적을 기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햄프셔 주 웰로에 있는 성 마거릿 교회 내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에는 나이팅게일을 기념하는 부조가 벽면에 걸려 있다.
3. 백의의 천사와 등불 든 여인
한국에서는 나이팅게일의 별명이 유독 "백의의 천사"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녀를 칭하는데 자주 올라오는 명칭은 위에도 설명되었다시피 "The Lady with the Lamp"(등불 든 여인)이다. 이는 크림 전쟁에 대해 써진 타임지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문구는 또한 미국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시 "산타 필로메나"[12] 에 다시 등장하면서 더더욱 유명해진다.She is a "ministering angel"[11]
without any exaggeration in these hospitals, and as her slender form glides quietly along each corridor, every poor fellow's face softens with gratitude at the sight of her. When all the medical officers have retired for the night and silence and darkness have settled down upon those miles of prostrate sick, she may be observed alone, with a little lamp in her hand, making her solitary rounds.그 병원들에서 그는 한치의 과장도 없이 "섬기는 천사"였다. 복도 하나 하나를 그의 가녀린 모습이 지날 때마다, 모든 이들의 얼굴이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누그러졌다. 모든 의료진과 군의관들이 밤을 맞아 처소로 돌아가고 적막함과 어둠이 길게 누워있는 병자들 위에 내려 앉을 때면, 작은 등불을 그 손에 들고 홀로 순회를 돌고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이러하듯,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그의 별명은 보통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등불 든 여인"이다. 다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백의의 천사"로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는 간호사라는 직업 자체의 별명으로 고정되었다. 흰색 복장보다는 녹색이나 청색 가운이 더 보기 쉬운 요즘 간호사들의 복장 트렌드를 생각하면 아이러니.Lo! in that house of misery
A lady with a lamp I see
Pass through the glimmering gloom,
And flit from room to room.
오! 저 고통의 집 안에
등불을 든 한 여인이 보이는구나
희미한 어둠 속을 지나가며
방에서 방으로 스치는구나
이렇듯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백의의 천사"에 비해 "등불 든 여인"이라는 별칭은 한국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 심지어 위키백과에서도 "등불을 든 천사"라는 절충(?)안을 별칭으로 쓰고있다. 다만 그 옆에 영어로 써진 게 "등불 든 여인"이라 그렇지. 이 백의의 천사라는 명칭은 그녀를 다룬 전기영화중 하나인 "White Angel"(백색 천사)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이야기로는 크림 전쟁 당시 군에서 물자를 안주자 그가 직접 망치로 군 창고 문을 따고 의료 물자를 강탈해 간 적이 자주 있었는데 그녀의 저돌적인 개혁가적인것 까지 포함해 '''망치를 든 여인(Lady with the hammer)''' 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게 순화되어 등불이 된거 아닌가하는 이야기도 있다.
4. 업적이 실제보다 부풀려졌다는 설과 반박
업적이 지나치게 고평가되었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크림 전쟁 당시 간호사로 현지에서 활동한 시기도 길지 않고, 그나마도 후방 병원에서 있었으며 크림전쟁 이후의 활약도 거의 없다. 끽해야 자문 정도. 높이 평가 받은 것은 고위 신분의 백인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 반대편에 있는 메리 시콜[13] 의 재조명과 더불어서 역으로 더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나이팅게일의 진짜 업적은 위생의 도입이다. 위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병상과 병원의 위생을 확립하는 데에 공헌이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사망자 비율과 위생의 연관 관계를 통계를 통해 한 눈에 보여 준 것으로 유명하고[14] , 이로 인해 과학동아 통계 디자인 관련 기사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다만 위인전 등에서 나이팅게일의 활동을 실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묘사하고, 이를 지나치게 미화해서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나이팅게일의 진짜 업적도 폄하되는 것. 다른 의미의 '빠가 까를 만든다'에 가깝다. 또 무시되는 업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비종교적인 배경'''에서 학문적 차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게 한것. 그전까지 간호는 종교와 연관되어 종교개혁 때 배척되었다.
그 외에도 위인전 때문에 잘못 알려진 사실도 많다. 마치 나이팅게일이 20대 즈음의 묘령의 나이에 크림 전쟁에 간호사로 나간 것처럼 묘사된 경우가 많다. 특히 해당 인물을 집중 조명하지 않고, 잠시 짚고 넘어가는 식으로만 다루는 역사 만화에서 그러한 점이 더 심하며, 이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20대, 심한 경우 10대에 종군 간호사로 활동한 줄 아는 사람까지 있다. 하지만 크림 전쟁이 일어난 것은 1853년, 거기다 그가 간호사들을 이끌고 간 것은 1854년이다. 이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미 30대 중반이다. 전문적으로 간호훈련을 한게 1851년 31세때이니.
여러가지로 '인류의 선'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이 사람도 자세히 파고 들면 근거는 없지만 온갖 구린 소문이 돌아다닌다. 위의 사망 이유에 대한 소문은 그것의 단편. 사실 당대에는 '''나지도 않은 소문이다.''' 나이팅게일에 대한 구린 소문의 근원은 그가 당대로서는 드물게 독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초상화를 보다시피 미모로도 유명했기에 구혼을 몇차례나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래서 레즈비언이 아닌가 하는 먼 훗날의 호사가들의 말이 있긴 했지만 나이팅게일의 여러 개혁이 탄력을 받았던 것은 그녀의 활약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낭만성'''과 결합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행정적인 측면에서는 대단히 '''독선적'''인 점이 있었다. 크림 전쟁 그곳 의무대 지휘자는 당연히 의사였지만 나이팅게일 후견인이 '''육군성 장관'''이라 그가 빽으로 자기 이론을 강요했고 후반기에 영국에서 또다른 간호부대가 파견되었는데 '''간호부대의 책임자가 자신과 동급'''이라는 이유로 마구 간섭하고 항의해서 결국 이 책임자는 자신의 부하 직원을 남기고 영국으로 소환된다. 후임자로 온 의사와 간호사들은 직책으로는 동급이지만 사실상 나이팅게일의 부하직원 취급을 받았었다.
하지만 오히려 독선적인 면모는 많은 군인들을 살리기도 했다. 크림전쟁 당시에도 군에서 필요한 물자를 내주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군창고로 처들어가 들고오거나 그녀의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포기할 때까지 논쟁을 계속했다는 일화 등에서 알 수 있다. 현대에도 2014 서아프리카 에볼라 유행이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신천지 감염 사건처럼 의료인들의 권고 사항을 무시하다가 사태를 키우는 일이 잦다. 그래서 의사나 간호사들 중에서는 이런 독불장군이 많고, 전시의 야전 병원이나 전염병 유행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는 의료인들의 이런 면모가 상황의 악화를 막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밀림의 성자로 불리는 알베르트 슈바이처[15] 나 수단의 돈 보스코로 불리는 이태석 신부같은 네임드 의료봉사자들도 너무 강압적이라고 환자들에게 항의를 받았을 정도지만,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진 바 있다. 나이팅게일이라고 다를 건 없는 법이다.
종합하자면 성모 마리아 사촌동생 급의 '''지나친 미화'''는 있을지언정 당대에는 구린 소문은 없었다는 게 지배적이다.
5. 나이팅게일 선서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같이 1893년 만들어져 간호사로서의 윤리와 간호원칙을 담은 내용을 간호학도들이 맹세하는 의식이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이다. 다만, 나이팅게일 선서는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미국의 한 간호학교[16] 에서 그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의사들이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사실 제네바 협약에서 수정한 판본이다.
선서식 때 간호학도들은 손에 촛불을 든 채 하얀 가운을 착용하는데, 촛불은 주변을 비추는 봉사와 희생 정신을, 흰색 가운은 이웃을 따스히 돌보는 간호정신을 상징 한다.[17]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나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전력을 다 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6. 여담
- 초상화를 보다시피 상당한 미인으로도 유명해서 구혼자가 많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 터키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Üsküdar) 부근에 그녀가 크림전쟁 당시 근무했던 야전병원이 남아 있다. 본래 오스만 군대가 병영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병영으로 쓰였다가 현재는 버려진 상태. 조만간 터키 정부에서 박물관을 세울 예정이라고 하나 언제 완성될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이름은 하미디예 병영으로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 사후 1912년, 국제적십자회의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최우수 간호사에게 '나이팅게일 기장'이 제정되었으며, 2년에 한 번씩 시상중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 수상자는 1957년에 수여받은 이효정(1897~1964)이다.
6.1. 매체에서
-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 세계 옛날 이야기에서도 몇몇 위인들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이팅게일도 나왔다. 여기선 위에 일화가 각색되었고 의료물품을 넣어둔 창고에 간호사들을 데리고 닥돌한다! 경비병들이 거절하자 나중에는 총기를 들고 경고 사격을 하여 숫적으로 밀린 경비병이 데꿀멍하여 열게하고 싸그리 물품을 가져가 버린다.
- 타임보칸 24에서는 등장시 다르게 묘사된 역사적 인물들과 비슷하게 원래부터 콧대높은 여성으로 등장하는데 23화 스토리는 출생 전,이후인 아예 그'의 일생을 간략하게 묘사해 놓으면서 끝냈다.
- 2015년 유비소프트에서 제작한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에도 출연한다. 이비 프라이를 만난 클라라 오데아가 가짜 약으로 인해 쓰러지자, 이비는 황급히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이때 이비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나이팅게일. 이비에게 진짜 약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게되는데 템플기사단을 족쳐 진짜 약을 구해다 주는것이 이비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이 수행해야할 임무. 이비가 진짜 약을 구해다주자 그 약으로 바로 클라라를 치료하는데 성공한다. 등장은 여기서 끝인데 당시 시대에 영국에 위인들이 꽤나 많았던지라 나이팅게일도 벨을 제외한 다른 실존 인물들처럼 서비스차원에서 등장한 인물인듯.
- 황뢰의 가크툰의 등장인물 플로렌스 아메기노 나이팅게일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 Fate/Grand Order에 서번트로 등장한다. 세간의 이미지대로 힐러로 나오지만 생전의 과격한 행보를 적절히 과장해서 버서커로 등장한게 특징. 나이팅게일(Fate 시리즈) 문서 참조.
- 연애 클리셰 중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효과라는게 있지만, 정작 나이팅게일 본인은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이기 때문에 간호와 관련되었다는 것 외에는 연관성이 없다.
- 로맨스 판타지 웹 소설 외과의사 엘리제의 주인공인 엘리제 드 클로랜스의 모티브가 이 사람이다.
- 국산 SF 모바일 게임 엘라의 2048에서는 나이팅게일의 DNA로 탄생한 클론소녀 소라가 등장한다. 헌신적인 힐러 포지션.
- 리인카네이션의 꽃잎의 등장인물로 나온다. 당연하게도 치유능력이 있다.
6.2. 고양이 사랑
나이팅게일은 고양이에 대한 무한 사랑을 펼쳤던 인물이기도 하다. 영국 매체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나이팅게일은 생전에 "고양이는 인간보다 더 많은 연민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양이 '비스마르크(Bismark)'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는데,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은 음식을 마치 신사처럼 먹는다고 해서 나이팅게일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식탁에서 사료를 먹었을리 만무하지만 이 간호사는 "(비스마르크는)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며 치켜세웠다. 비스마르크는 페르시안 수컷고양이로, 가장 예민하면서도 애정어린 특유의 성향으로 나이팅게일을 사로잡았다.
1942년에 출판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삶(The Life of Florence Nightingale)'에는 그가 이 페르시안 고양이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이들을 "거의 호랑이와 야생동물 같다"고 표현한 것으로 나온다. 이 고양이 가족은 나이팅게일과 벌링턴 호텔에서 같이 생활했는데 호텔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고 한다.
1854년 영국과 러시아간 크림 전쟁(Crimean War)이 발발했을 때 당시 부상당한 영국 병사들의 참담한 상황은 뉴스로 전파되며 많은 사람들을 격노케했다. 병사들이 입원해 있는 스쿠타리(Scutari, 현재 터키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 지역)내 군사병영이 악취와 환자들의 과잉 현상으로 최악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 정부는 나이팅게일을 비롯한 38명의 여성들을 터키로 보내 현장 의료진들을 돕도록 했다.
그해 11월, 나이팅게일과 동료들은 터키 땅을 밟았다. 특히 그 곳에서 나이팅게일은 거의 쉴 시간 조차 없이 일했는데 밤에도 등을 들고 다니며 아픈 병사들을 체크했다. '등불을 든 천사'라는 수식어는 그의 이런 헌신적인 태도에서 나왔다. 당시 밤에는 쥐들이 들끓었는데 빗자루를 들고다니며 이들을 죽여야하는 상황이었다. 쥐들은 병영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는데 심지어 환자의 머리위에서 여유로이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됐던건 바로 한 병사에게서 받은 작은 노란색 고양이였다. 불행히도 이 고양이는 나이팅게일과 영국으로 돌아갈때 배안에서 생명을 마감했다.
나이팅게일은 90년동안의 삶에서 약 60마리의 고양이들을 돌본것으로 추측된다. 한번에 17마리의 고양이를 돌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알려진 고양이 이름만도 바츠(Barts, 영국 바톨로뮤 병원에서 따온 이름)부터 머프, 팁, 톰, 디즈레일리(벤자민 디즈레일리 영국 전 총리), 글래드스톤(윌리엄 글래드스톤 영국 전 총리) 등 매우 다양하다. '퀴즈(Quiz)'라는 이름의 고양이도 있었는데 나이팅게일이 탄 열차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던 용감무쌍한 작은 페르시안 새끼 고양이였다. 퀴즈는 부상을 입었지만 생존했다.
1859년 런던에서 출간된 나이팅게일의 간호학 저서에는 "작은 반려동물은 종종 아프거나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을때 최고의 친구가 된다"고 평가돼있다. 여기서 위안과 동지애를 제공하는 작은 반려동물은 당연히 고양이를 뜻한다. 당시 고양이는 나이팅게일이 혼자 식사를 할때, 혼자서 잠자리에 들때 항상 주위에서 그와 함께 한 존재였다. 나이팅게일의 이야기를 담은 여러 책에는 항상 고양이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가 일을 할때 고양이가 그의 목에 붙어있었다거나 혹은 그의 사촌이 사망했을 때 한 고양이는 나이팅게일의 목에 팔을 두르며 위로했다고 씌여있다.
그러나 1910년 8월 13일. 나이팅게일은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고양이들과도 이별했다. 고양이들에 대한 유서는 따로 남기지 않았다.
[1] OM[2] DStJ[3] 그의 생일이 국제 간호사의 날(International Nurses Day)로 지정되어 있다.[4] 사실 그녀의 업적 대부분은 행정가이자 사회 개혁가로서의 활동 도중 이루어진 것들이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선 그녀를 "사회 개혁가이자 통계학자, 그리고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로 칭하고 있다.[5] 이런 활동을 강력히 할수 있는 이유가, 영국 육군 의료총감직이었기 때문이다.[6] 피렌체를 영국에서는 플로렌스라고 부른다. 베네치아는 베니스, 밀라노는 밀란, 나폴리는 네이플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피렌체보다 플로렌스가 더 오래된 이름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 피렌체의 이름이 플로렌티아였고, 플로렌스는 플로렌티아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다.[7] 병원이 위생적이고 깔끔하게 바뀌게 된 시기는 위생학이 발전하고, 세균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20세기 초 부터이며, 그전까지 병원은 돈 없고 가난한 서민들이나 들어가는 곳이었고 부자들이나 귀족들은 주치의를 직접 두거나 왕진을 다니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8] 요약하자면 '쾌적함을 느끼는 환경에서 환자의 회복이 더 빠르다. 간호사는 환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쾌적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9] 現 킹스 칼리지 런던의 Florence Nightingale Faculty of Nursing, Midwifery & Palliative Care[10]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 가족관계, 몸상태 등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며, 이를 위한 최대 환자 수는 12명이라고 규정하였다.[11] "그 천사들은 섬기는 영"이라는 내용의 히브리서 1:14절을 인용한 어구이다.[12] 성녀 필로메나, 살아 있는 묵주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인물로, "막 개종한 그리스의 왕의 딸로 태어나 어렸을 적 맹세한 순결 서약을 지키기 위해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청혼을 거절하고 그 대가로 고문을 받았으나 고문의 상처가 금세 치유되는 기적들을 보이고 감옥에서 오히려 더 아름다워지자 로마인들이 회심하는걸 두려워한 황제의 명으로 처형, 결국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성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나폴리의 수녀 마리아 루이사가 주장했다. 참고로 이 주장 자체가 좀 흠좀무한게, 성녀 필로메나의 유해는 10살에서 13살 정도로 되는 어린 아이의 유해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 황제중 하나이다.) 기도를 잘 전구해준다(하느님에게 전달해준다)는 것으로 유명하며, 19세기 초반, 유해가 발견된 후 순교 사실 빼고는 사실상 밝혀진 것이 없는 인물(위의 이야기는 한 수녀의 "주장"이다) 이 순전히 "중재 기도가 강력하다(?)"는 사실만으로 시성된 인물이기도 하다.[13] 1805~1881.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 태생 흑인으로 크림전쟁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간호사로 갈 것을 결정했으나, 영국에서도 크림 전쟁 현지의 나이팅게일 간호사단에서도 흑인이라서 탈락. 자국에서는 군의로 활동하는 등 경력도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전방에서 응급치료에 나서서 결국 현지 병사들의 제보에 의해서 터키, 영국, 프랑스 3개국에서 훈장을 받았지만 재정적 지원이 없어서 결국 사비로 의료소를 하고 크림 전쟁이 끝난 뒤에는 빈곤속에서 병으로 사망. 워낙 삶 자체가 드라마틱했고, 초상화가 최근 발견되면서 근래에 와서야 주목받고 있다. 그 영향으로 EBS 지식채널 e에도 등장했다.[14] 그 통계표 이름이 '''장미도표'''. 장미 모양처럼 보기쉽게 정렬해서 이런이름이 붙었고, 이 업적으로 영국 통계학회의 '''첫 여성회원'''이 되었다.[15] 알베르트 슈바이처 본인이 직접 남긴 기록에는 '주의사항을 준수하지 않는 환자들에게 건장한 체격의 간호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완력으로 찍어누르니 고분고분해지더라'는 서술도 있다(...).[16] 나이팅게일 제자들이 미국에 건너가 '''본격적으로''' 간호전문직 관련 법규제정 등을 활발히 이끌었다[17] 학교에 따라 복장은 실습복, 촛불은 '''LED 촛불'''로 대체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