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혈통
1. 개요
예전부터 제대로 된 근거없이 막연하게 유비의 혈통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문열이 평역 삼국지에서 주장하기를 "중산정왕 유승은 100명이 넘는 자식을 두었는데, 그 많은 자손들 중에 족보를 사칭해서 끼어드는 것은 쉽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중국의 학원강사인 위안텅페이(袁腾飞) 역시 주장했던 것으로[1] , 유비가 종친이었다는데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당장 이문열의 경우엔 정확히는 유승의 아들 유정의 후손이라고 정사 삼국지에 명시되므로 이문열이 정사도 제대로 안 읽었다는 증좌가 되며, 위안텅페이 역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나 사료 없이 사견을 표명한 것에 지나지 않고, '유비가 황실 종친일 수도 있지만 당시 종친만해도 수십만이었다'며 종친이라고 다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마무리했다. 결국 유비가 황실 종친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나 추론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정사 기록이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2. 유비의 계보
정사에 기록된 유비의 조상들을 살펴보면,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먼 후손으로, 일단은 황족이긴 하다. 황족이라면 황족이지만, 후한은 광무제 계열이 아닌 전한 황실의 자손에게는 황족의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유승의 서자인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으로, 유정은 주금을 한무제에게 적게 올렸다가 파면되었다.[2] 그 후에는 유비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에서 복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비의 조부 유웅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3. 혈통에 대한 의혹 제기가 터무니 없는 이유들
3.1.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사칭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사실상 없다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의 후예는 당시 황제인 헌제와 촌수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까마득한 방계다. 두 사람의 집안이 갈라지기 시작한 건 경제 세대인데 헌제는 그의 13대손이다. 유비가 경제의 몇대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350년에 이르는 걸로 보아 그래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헌제와는 20촌이 넘는 사이였을 것이다. 거기다가 중산정왕은 아들의 숫자만 무려 120(!)명에 달했고 그 후손은 지나가다 발에 채이는 돌멩이만큼이나 많았기 때문에 중산정왕의 후예라는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유비에게 별다른 정치적 도움이 안됐다.[3]
당시에 촌수로 유비보다 현 황실과 더 가까운 종친 인사는 얼마든지 많이 있었다. 당장 조조 밑에서 모사로 일하던 유엽만 해도 후한 광무제의 7남 부풍질왕 유연의 후손이었다. 다른 군웅인 유우는 광무제 장남인 동해공왕 유강의 후손, 진왕 유총은 후한 명제의 후손으로 이들은 후한 황통에서 그렇게 먼 인물들도 아니였다. 당장 광무제의 손자의 후한 장제의 후손들이 돌아가면서 황제 하던 시절이다. 더 가까운 종친 인사들도 가만히 있는데 까마득한 선조의 몰락한 방계의 말예 주제에 그것만 내세워 한 황실 부흥을 기치로 걸고 발호했다간 세간의 통렬한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4]
전한 황족 계열들만 봐도 유표, 유언, 유대, 유요 등 유비보다 훨씬 격이 높고 명성도 높은 유씨 일족 군웅들이 많았다. 하지만 유우는 공손찬에게[5] , 유총은 원술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유요는 손책에게 축출당하는 등 황족이라도 힘이 없으면 얼마든지 비참한 수모를 당할 수 있었다. 유표나 유언[6] 처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힘을 키운 황족들은 아예 조정을 무시하고 황제놀음 까지 하는 상태였다. 거기다 조조가 황실을 장악한 이후에는 황제는 그냥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저항하려고 했다간 복 황후, 동귀인 처럼 무참히 찍혀나가는 상황이었다. 어설픈 종친 사칭은 이득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논영회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유비의 조상은 바로 그 다음 대에서 일찌감치 한무제 때 작위를 박탈당했고, 후한 시대에는 이미 광무제 직계 이외의 전한 황실 후손은 제위계승권을 인정 안 해서 유비 정도의 종친은 성만 황성을 쓰는 일반 백성이나 다름 없었다. 조선 기준으로 대략 영조대에 임영대군[7] 파 11대손이 왕족 운운하는 수준이었다.[8] 중산정왕의 후손이 몇인지 육성후가 작위를 박탈당했는지 같은 문제는 나올 것도 없이 그냥 까마득하다.
더군다나 중산정왕의 120명이나 되는 아들 숫자 때문에 당시 황실 종친의 숫자는 말도 안 되게 뻥튀기 되어 직계여도 거의 대부분 종친 취급을 받지 못했다. 유비의 선조는 그중에서조차 서열이 상당히 낮은 축에 들어갔으며 이미 그 당시에 후작 작위를 박탈당했다. 왕위계승권에 근접했던 왕자여도 11대손 쯤 내려오면 종친 취급을 거의 받지 못하는데 이미 당대에 작위를 박탈당한 먼 후손이 종친 취급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비는 한 제6대 천자인 경제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유엽은 한 제16대 천자인 광무제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이다. 그런 즉, 무제, 소제, 폐제, 선제, 원제, 성제, 애제, 평제, 정안공, 경시제, 광무제까지는 유엽에게는 직계이지만 유비에게는 직계가 아니다. 이러니까 차라리 광무제의 후예라고 사칭하는 게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사칭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유엽조차 조조의 참모 중 한 명이었을 뿐 황실종친이라고 해서 뭔가 특출난 대우를 받은 게 아니었다.
한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명목도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한 이후, 그러니까 오로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세력을 모은 뒤에나 도움이 되었다. 그것도 정통 유씨 황실이 조조에게 찌그러져서 힘을 잃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도움이 되는 듯 안 되는 듯 하는 어중간한 혈통이었던 셈이다.
3.2. 후한 말엽 당시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드는건 불가능하다
이는 족보라는 물건이 단순히 전근대시기 이전까지 공통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시대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착각이다. 같은 '족보'여도 명칭만 같을 뿐, 유비가 살던 2~3세기와 17~18세기 이후 시대의 족보는 사실상 별개의 물건이었다.
족보를 위조해서 친족에 끼어드는 행위는 조선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가짜 족보가 나돌 수 있었던 것은, 인쇄술의 발달로 집집마다 제각기 족보를 갖출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짜라도 일단 족보를 만들어두면 그 문헌에 근거해서 같은 조상이라고 우겨서 끼어드는 시도를 할 수 있고, 끼어들기를 당하는 쪽도 '문서화'된 족보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영부영 일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족보 위조 행위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날조라기보단 어느 정도 몰락한 잔반과 금전적 거래로 말을 맞췄다. 양반전이나 태평천하 등 당대의 족보 문제를 다룬 작품을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또한 개인 뿐만 아니라 문중에도 여러 혜택을 주는 등 이런 저런 일들을 해줬기 때문에 암묵적인 합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이 조선시대 후기의 사정이다. 후한을 비롯해서 인쇄술 발달 이전의 사정은 완전히 달랐다. 우선에 족보가 집집마다 있는게 아니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인쇄술이 없었고, 종이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조선시대와는 달리 집집마다 족보를 한 부씩 갖추는 건 불가능했다. 즉, 족보는 일족의 유력자나 관청에서 보관되거나, 유력자의 묘비문 형식으로 기록하거나, 친족들의 기억에 의지해서 서로의 관계를 식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친족을 인증하는 것은 일단 친족 서로 간의 기억과 유력자만이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헌 정보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록 문화가 발전하기까지 집안과 친인척 관계를 중요시하지만 따로 족보가 없는 경우에는 씨족이나 부족의 혈통을 전적으로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조상 직계는 4대는 기본이고 그 이상도 외우기도 했으며 그들의 자손관계까지 외우는 경우도 흔했다. 지금이야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예전엔 팔고조도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위아래로 본인의 혈연관계를 외우는 것이 기본 소양이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 기록기술과 문화가 발달하기 전에는 많은 문화권에서 보였던 공통된 현상인데, 이름 자체를 XX의 아들 XX 하는 식으로 짓거나 자기소개를 할때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까지 밝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서양 중세물이나 이슬람 문화권, 유목민족 등을 다룬 매체에서 자기를 소개할 때 이름만 말하는 게 아니라 "A의 아들인 B의 아들 누구요."하고 내력을 대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예시]
친족을 사칭하려면 그들에게 가서 집안 내력을 말하고 기억을 맞춰야 했는데 생판 남인 외부인이 끼여들기 불가능했다. 당장 나 누구 자손이오 라고 칭하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기본에 그들의 형제 관계와 자손 내역까지 말하는 게 기록 기술 발전 이전에 기본이었다. 현대의 대한민국에는 많이 이러한 개념이 퇴색되었지만 아직도 농촌의 집성촌에 가면 사촌을 넘어서 팔촌까지 족보를 외우는 노인도 있다.[9]
후한시대는 농경사회다보니 요즘처럼 도시로 나가서 일한다든가의 이유로 가족 구성원들이 멀리 퍼져사는 시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거리에 모여서 사는게 기본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친족 사회는 조선시대 양반들도 한 수 접고 갈 정도로 폐쇄적이고 견고했다. 그렇기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일족임을 사칭하여 끼어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모든 친족을 강압하거나 일시에 속여서 많은 사람의 기억을 일시에 변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족보 위조를 해서 끼어듦을 당하는 문중도 한미해야 하고 끼어들 사람의 집안 자체도 상당히 잘 나가야 한다. 끼어드는 사람은 족보를 위조하고 누군가를 매수할 돈이 필요하고, 문중은 그런 지원을 받을 만큼 상황이 좋지 못해야 했기 때문. 하지만 유비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둘이서 가내 수공업으로 근근이 목에 풀칠하고 살던 가난한 청년이었단 건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그의 공부도 좀 잘나가는 집안 어른이 돈대줘서 겨우 마쳤고 나중에 유명해진 후에도 돗자리나 짜던 놈이라고 인신공격을 당할 정도였는데 족보를 사서 황족을 사칭했다기엔 가세가 너무 기울어있지 않은가? 거의 조선 후기의 잔반 수준인데 이 정도면 유비는 족보를 팔아서 누군가를 문중에 끌어들이는 쪽이라면 몰라도 족보를 사서 문중에 끼어드는 쪽은 절대 될 수가 없는 셈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세가 기울었다곤 해도 엄연한 나라의 황실이 족보 위조 행위에 찬성하고 이를 동조할리도 없었다.
4. 정황 증거
4.1. 적대 인물들도 혈통을 의심하지 않는다
후한 말에는 상대방의 혈통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을 경우 그 점을 트집잡아 공격하는 프로파간다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원술이나 공손찬이 원소가 얼자라고 '종놈', 심지어는 원가도 아닌 게 원가를 사칭하는 놈이라고 헐뜯었던 것이라든가, 원소가 조조의 혈통이 '환관' 집안이라고 헐뜯었던 것은 전부 당대 사서의 기록에 남아있다. 그런데 그 악명 높은 조조와 조비마저도 유비의 혈통에 대해서는 전혀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특히 조조의 경우 그 유명한 논영회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평생에 걸쳐 다른 모든 군웅들을 제껴놓고 오직 유비만을 자신의 가장 껄끄러운 상대로 여겼던 인물이다. 혹시라도 유비에게 혈통 관련해서 뭔가 트집잡을 거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유비의 혈통에 대해 조사해보는 것이 당연하며, 당시 협천자를 통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의혹거리가 있었다면, 그걸 트집잡아 역적으로 몰아붙여 유비 세력을 궤멸하는 거 정도는 굉장히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과거 유비의 직업을 가지고 돗자리 짜고 짚신 만들던 놈이라고 욕할지언정(...) 혈통을 가지고 욕하지는 못했다.
이는 조조가 유비의 혈통이 거짓이라는 증거는 커녕 의혹조차도 찾지 못했다는 말이다. 훗날 유비가 칭제를 할 때 멸망한 한(후한)을 잇는다는 의미로 국호를 한이라 했는데, 이 당시 후한을 멸한 조비 측에서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당연히 유비의 혈통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나 조비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유비의 혈통을 부정하지 못했다. 적어도 삼국시대 당시에는 유비의 혈통에 의문을 제기할 여지 자체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렇듯 당대의 거의 모든 기록과 당시 사람들이 당사자인 유씨 일족에서 적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유비가 황실 종친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후대사람들이 유비의 혈통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사실 굉장히 뜬금없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대 사서를 보면 혈통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뭔가 기록에 남기거나 확실하지 않다고 서술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수의 경우 손견이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자손이라는 떡밥에 대해서는 "아마 손무의 자손일 걸로 추측된다."라는 불확실한 추정만 했지만 유비와 조조는 명백하게 그들의 조상이 누구인지 거론했다. 그런데 손견은 현대에서 이미 손무의 자손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굳어졌고, 유비는 혈통을 사칭했다고 의심을 받는다.
일부에서는 조위의 입장에서 조조 인생 최후의 난적이었던 유비를 의도적으로 띄워줘야 조조에 대한 면피가 되니 사서에 유비의 황실 혈통을 긍정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위는 그렇다 쳐도, 조위 외에 유비와 적대하던 그 누구도 유비의 혈통에 대한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다. 예로 유기-유종의 승계 문제를 두고 대립하던 형주 채씨 문중,[10] 적벽 직전 조조에게 항복하자고 노래를 부르며 손유동맹을 반대하던 강동 호족들,[11] 유비의 입촉을 반대하던 친 유장 휘하 서촉 세력들이나 한중에서 대치했던 장로, 아무런 정당성 없이 뜬금포로 칭제를 감행한 손권 등 조조 아니어도 유비를 까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누구도 이걸 써먹은적이 없다.[12] 까놓고 촉한 수립의 정당성이 오롯이 유비의 황실 혈통에 있었는데[13] 혈통을 문제삼을 수 있었으면 조위나 동오가 이걸 안 써먹었을 것이며, 그런 심리전이 벌어졌으면 당대 기록에 흔적이 남지 않았겠는가?
애초에 삼국지는 조위가 아니라 서진에서 편찬한 역사서다. 서진 입장에서 최대 관심사는 한-조위-서진으로 이어지는 정권 승계의 정당성이지 조조의 통일 실패에 대한 변명 따위가 아니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이 승계구도에 가장 껄끄러운 존재인 촉한 황실의 혈통에 대해 아무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 후대의 유비 혈통 논란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이미 유비의 혈통 문제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 사실관계가 이미 다 정리되어 있었고 완벽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4.2. 정사에 일족과의 교류와 가계에 대한 상세 기록이 있다
당시의 중국 사회는 일가 친척간의 배타적인 상호 부조 구조가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사 선주전에는 유비가 유씨 일족과 가진 관계들이 묘사되어 있고, 특별히 신뢰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된 적이 없다.
- 유비는 아버지 유홍이 요절한 탓에 가난해져서 노식 밑에서 배우게 될 때 친척 삼촌뻘인 유원기로부터 학비 지원을 받았다.[14]
- 어릴 적에는 친척인 유씨 가문 아이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다.[15]
- 어릴 적에 불경한 말[16] 을 했다가 지나가던 유씨 가문의 한 어른[17] 에게 혼이 난 적이 있다.
- 유비의 가계나 집안 형편이 기운 사유 등은 정사에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18]
다만, 자치통감에서 계보 기록의 부재를 들어 의문을 제시하긴 했다.[20] 그러나 '중산정왕의 후손이 지나치게 많아서 구체적인 가계도가 없다'라는 수준인 데다가 향촌 사회가 붕괴된 위진남북조 시대나 족보 날조가 성행하던 당 시대의 사례를 기계적으로 유비와 비교한 것이라, 후한 말기 당시에 황실 종친들과 주변인들이 유비의 혈연관계에 대해서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을 반론하지는 못한다.
애당초 한나라의 인재등용방식인 향거리선제가 이런 견고한 한나라 시기 향촌사회를 근거로 성립가능한 제도였고, 유비의 조부 유웅은 바로 향거리선의 방식 중 하나인 효렴을 통해 등용되었다. 향촌사회가 붕괴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사람들이 워낙 이리저리 유랑하다 보니 배타적인 친족 집단이 명확하게 유지되기 어려웠고 엉뚱한 집안 사람이 끼어드는 것이 조금 더 쉬워졌다.[21] 허나 유비는 그 시절이 도래하기 전에 태어나고 성장하여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기에 해당사항이 없다. 예컨대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맞아 유손동맹을 맺었을 당시에도 제갈량이 유비를 한실의 후예로 당당히 유세했을때 손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유장과 유비 자신이 같은 한종실임을 천명했을 때 다른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유비가 오를 칠 때도 오나라 측의 반응이나 주변인들이 반응 역시 '선조인 한을 멸한 국적(國賊)인 위를 먼저 쳐하지 않느냐' 라고 했다, 이 역시 유비가 한황실의 후예라는 걸 당대인들이 인정했다는 증거이며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자치통감 자체도 유비와 그가 세운 나라를 각각 한주(漢主), 한(漢)으로 표기함으로서 당대에 그들이 한나라의 계승을 천명하고 본래의 국호가 한(漢)이라는 사실 자체는 그대로 적었다.
후세 학자들의 경우 유비가 한종실인것을 당연하게 판단했고 오히려 삼국지에서 유비를 한소열제로 쓰고 제기(帝記)로 기록해야 하는데 왜 선주라는 표현을 쓰느냐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조선의 학자 성대중 같은 사람은 자치통감과 저자 사마광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며 "사마온공은 경에서는 맹자를 의심하고, 사서에서는 위나라를 황제로 칭했으며, 양웅을 성인으로 과장하고, 순욱을 왕좌지재라고 했으니, 비판할 점이 많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흠잡지 못하는 것은 그의 행실이 상도에 맞아 비난할 만한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司馬溫公以經則疑孟, 以史則帝魏, 詡揚雄以聖人, 目荀彧以王佐, 可議者多, 然人不得以疵之者, 以庸行之無可議也)"라고 하기까지 했다.
4.3. 유표, 유장 등 당대의 유씨 군웅이 유비를 친족으로 보았다
장송이 유장에게 유비를 소개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유비가 유장의 친척이라는 이유였다. 당시 관념에서 성씨 사칭은 중대한 범죄 행위이고,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다면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다. 거기다 종친 사칭? 그리고 후한 조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후한 말 황실은 유명무실하였지만, 유표와 유장은 각각 형주, 성도의 군주였다. 직접 유비와 만난적도 있는데 만약 사칭이었다면 유비 세력은 끝장났을 것이다.[22]
4.4. 칭제 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을 한 이후 물러났다. 이에 유비는 조비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면서 자신도 황제가 되었다. 당대 후한에서는 황족과 황족이 아닌 자에 대한 경계가 명확했으며 이 때문에 똑같이 칭제를 하더라도 원술은 온 천하가 전부다 원술을 적대한 반면 유표, 유언이 칭제를 했을 때는 그런 반응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유비가 칭제를 할 당시의 상황을 보자면 사람들은 유비의 칭제를 헌제 퇴위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칭제로 인정하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유비가 황족이었기에 헌제를 대신해서 한의 황제를 계승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당시 그 손권조차 이를 우려해서 함부로 칭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유비는 바로 칭제를 하고도 그 제위가 그대로 인정되었던 것은 이게 황족인 유비와 황족이 아닌 손권의 차이이기도 했다. 물론 손권도 나중에 칭제하긴 하나 그것은 229년, 즉 이로부터 9년이나 지난 시점[23] 에서 후한이 완전히 멸망한 게 인증이 되고 나서야 칭제한 것이다.
게다가 그나마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한 것도 '왕'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당시 촉나라는 한중 공방전 상황이었으며 유비는 자신이 한중을 지배해야 하는 명분을 제시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 명분을 만들려고 한중왕에 등극한 것일 뿐이었다. 물론 유비는 촌수야 좀 멀긴 해도 황족이 맞기 때문에 유비가 한중왕을 칭해도 이 역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이는 손권 역시 유비를 한중왕으로 인정했다. 이 왕이라는 자리는 군웅할거 시기에 가장 세력이 강성한 황족이었던 유표, 유장조차 감히 칭할 수 없었던 지위다.
한마디로 유비가 황족이 맞기 때문에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할 때에도, 유비가 천자로 제위할 때에도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며 만약 유비가 황족이 아니었더라면 한중왕으로 등극할 때 이미 누군가가 반드시 딴지를 걸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조가 동소의 발의로 위공에 오를 것과 구석을 청할 때 순욱이 나서서 말렸고, 조조가 위공에 오른 것은 순욱 사후 1년 뒤였다.
5. 결론
각종 정황 근거와 기록에서 명시됐듯이 유비는 한고조 유방의 후손이자 중산정왕 유승의 서자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이라고 봐야하며, 이를 정면으로 부정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한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중에 육성정후 유정이 있다. 그는 기원전 117년 한무제에 의해 육성정후로 봉해져서 후에 유비가 태어나는 유비의 본적지 탁군 탁현으로 이주했다가 제사에 바칠 금을 바치지 않아 작위를 박탈당했다. 이후 유정의 후손들은 탁군 탁현에서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후일 그곳에서 유비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부정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유비가 유승의 아들 유정의 후손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으며, 당대 인물들도 다 인정했거나 적어도 왈가왈하진 않았다. 단, 힘이 없었던 시절엔 이미 황족의 권리가 없어진 단순한 방계 종친의 혈통이었을 뿐이므로 그저 그냥 간판에 불과했던 것뿐이다.
태어났을 때 부터 유비는 황족의 피만 이어받았을 뿐, 황족의 권리 따위는 없던 유정의 후손들이 모인 탁군 탁현 유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유홍의 외동아들에 불과했다. 이런 유비의 황족 타이틀이 먹히기 시작한 때는 유비 본인의 실력과 명망이 천하를 뒤흔들고, 동시에 기존 후한 황실의 권위가 추락하는 난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유비의 황손 타이틀은 처음엔 사실상 있으나마나인 것에 불과했으나 난세에 본인 스스로의 실력으로 다시 그 가치를 부각시킨 것이다. 동시대에 유우, 유표, 유언 부자, 유요, 유엽, 유총 등 유비보다 조정에 오래 있었거나 세력이 강했거나 직계에 가까운 전, 후한 출신 황족들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후한이 멸망한 이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새로운 한나라의 재건을 선포하여 삼국의 한축에 서고 마침내는 전, 후한을 잇는 제3의 한나라인 촉한을 세운 것은 오로지 유비뿐이었다.
결론적으로 "황족 타이틀"이라는 있으나마나 가치가 없던 것을 유비 스스로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다시 가치를 빛낸 것이지, 하늘에서 선대 황제에게서 뚝 떨어져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마치 200년 전 방계 황족[24] 에 불과했으나 한을 재흥시킨 후한의 중흥황제 광무제 유수처럼 말이다.
그리고 위의 계통을 이어받은 진나라의 관리조차 진수가 쓴 삼국지에서 유비는 한황실의 후손이라는 서술을 전혀 문제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진나라 관리들은 삼국지야말로 뛰어난 책이므로 필사해서 보존할 가지가 있다고 했다. 즉, 촉한을 멸한 진나라의 관리들조차 유비의 혈통을 부정하진 않았다.
6. 기록의 오류?
정사 삼국지 선주전의 유비 선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런데 한서 15권 왕자후표에서 유정은 원수 6년이 아닌 원정(元鼎) 5년에 작위를 잃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전한에는 정후나 향후가 없고 모든 후국은 현급으로 대우받았다. 그리고 육성현은 중산국과 탁군의 경계에 있는 현이지 정이 아니다. 다만 유비의 선조인 유정이 주금에 연좌되어 후를 잃었다는 기록은 한서나 정사 삼국지나 같다.(유정은) 원수(元狩) 6년(기원전 117년)에 탁현의 육성정후로 봉해졌으나, 주금에 연좌돼 후를 잃어서, 일가를 이곳에 이뤘다.
그렇다고 이 기록을 잘못되었다고 무시하기에는 살펴볼 만한 점이 있다. 우선 전한에서 모든 후국은 현급으로 대우받았다고는 하나 실상은 향 규모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후국이 적지 않았다. 유표의 경우에도 조상인 유교가 욱랑후였는데 욱랑은 후한에선 정에 불과했다. 그리고 왕자후표 마지막에는 '탁'이라고 적혀 있는데, 왕자후표 마지막의 지명을 후국이 전봉된 지역 이름으로 보는 학설이 있다. 즉 유정이 중산국 육성현을 봉토로 받았다가 이후 탁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정이 옮겨질 때 탁군 탁현 관할의 정 규모의 봉토를 받았고, 정후가 있는 후한에서 이를 아예 처음부터 정후였다고 오해했을 수 있다.
7. 삼국지연의에서의 유비의 혈통
육성정후 유정 이후 혈통 기록이 없는 정사와는 달리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혈통을 세세하게 언급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정사에서는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 육성정후 유정이 후작을 잃고 탁현에 정착했다'까지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후의 기록은 연의의 창작이다. 창작인 만큼 엉성한 부분이 있는데, 분명 유정이 후작을 박탈당했는데도, 벼슬이 확실히 기록된 유웅을 제외하고 모조리 후작인 것으로 적었다(...). 또한 유웅을 이어 주군에서 복무했다고 기록된 유홍은 졸지에 백수가 되어버렸다. 볼드체로 표기된 부분은 확실하게 정사에서도 존재가 언급된 부분.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劉勝) - 육성정후 유정(劉貞)''' - 패후 유앙(劉昻) - 장후 유록(劉綠) - 기수후 유연(劉戀) - 흠향후 유영(劉英) - 안국후 유건(劉建) - 광릉후 유애(劉哀) - 교수후 유헌(劉憲) - 조읍후 유서(劉舒) - 기양후 유의(劉誼) - 원택후 유필(劉必) - 영천후 유달(劉達) - 풍령후 유불의(劉不疑) - 제천후 유혜(劉惠) - '''동군범령 유웅(劉雄) - 유홍(劉弘, 무관직) - 유비'''
다만 연의의 기록대로면 유비는 황숙이 될 수 없다. 이 혈통대로면 유비는 경제의 18대손이 되는데 헌제는 경제의 13대손으로 헌제가 유비의 현조뻘로 훨씬 항렬이 높게 되어버린다. 촌수로 따지면 31촌이 된다. 굳이 호칭을 찾자면 황숙이 아니라 황제의 십삼종내손 혹은 황십삼종내손이라는 해괴한 타이틀(...)을 써야 한다. 그냥 헌제가 황실 혈통을 이어받은 유비같은 군웅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비를 지원해주려고 황숙으로 칭했다는 쪽이 좀 더 설득력있을 정도.
더군다나 유비는 까마득한 방계인데 방계는 보통 세대의 진척이 직계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25] 헌제도 경제의 직계는 아니지만 나름 황실 내부에서 혈통을 이어왔는데 한참 전에 방계가 된 유비의 혈통이 18대손까지 진행된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렇게까지 진행이 빠르려면 유비의 선조들은 아주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장손으로만 가계를 이어왔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경제(기원전 188년 출생)와 유비(161년 출생)의 연대간격은 약 350년인데 이를 18대손으로 나누면 평균 20년밖에 되지 않는다. 20년이면 당시 시대상으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까지는 별 무리가 없지만 첫 아이를 제외한 다른 아이까지 봤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나이다.
기왕 창작할 거면 정말로 혈통상 헌제의 황숙 위치가 될 수 있게 경제의 11~12대손 정도로 맞췄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부분.
사실 따지고 보면 황숙이 되는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단 방계는 동생으로만 이어지는게 아니고, 동생으로든 형으로도 갈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의 양녕대군은 세종보다 형임에도 왕이 못 되었기 때문에 양녕의 후손은 방계 왕족이다. 물론 황제처럼 변수가 많지 않는 이상 작위를 물려받는건 웬만하면 장남이기 때문에 황제와 거리가 멀어진 유정의 직계는 웬만하면 장남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두번째로 둘의 조상은 나이차이가 많지 않다. 일단 헌제의 조상은 경제의 7남 장사정왕 유발이고 유비의 조상인 경제의 9남 중산정왕 유승보다 형이 맞다. 그런데 유승의 수많은 아들 중 유비의 조상인 육성정후 유정과 유발의 아들 중 헌제의 조상인 용릉절후 유매는 둘 다 출생연도가 불명이다. 제후로 봉해진 연도로 따지면 유정은 기원전 127년, 유매는 기원전 124년으로 유정이 더 빠르다.[26] 유승과 유발 모두 자식이 많았으므로(유승보단 덜하지만 유발도 열명 이상 자식을 뒀다) 사촌지간인 둘 중 누가 더 나이가 많았는지는 불명이다.오히려 제후 책봉 연도로 보면 유비의 조상인 유정이 헌제의 조상인 유매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다.
세번째로 애초에 헌제가 직계가 된 것은 광무제 때부터 따져서 직계이다. 즉, 헌제의 후한의 직계 황족이지, 만약 전한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면 유비와 마찬가지로 방계황족이었을 것이다. [27] 유비가 전한의 방계 후손이라고 해도, 헌제의 조상들 역시 전한 기준으론 방계 황족이기 때문에 "전한의 방계 황족들인 유발과 유정"의 세대 진척 중 유정(유비 조상)만 딱히 느릴 이유는 없다.
마지막으로 유비가 방계란건 경제의 방계->유승의 방계->유정의 방계, 유정 아들의 방계, 이런 식으로 '''계속 방계란 소리가 아니라''' 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나온 시점부터 방계란 것이다. [28] . 위에 언급됐다시피 중산정왕은 아들이 너무 많아 직계여도 종친 취급을 못 받을 정도였으니, 만약 유비가 유정의 직계였어도 아무 힘 없는 일반 백성으로 사는게 이상한 건 아니다.
종합하면 애초에 유비와 헌제의 같은 대 조상인 유발/유승 형제와 사촌지간인 유매/유정의 나이차이가 크지 않고, 유정의 이름모를 아들로부터 유비가 직계인지 방계인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유비가 헌제보다 항렬이 높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정-유비 사이에 중간에 누가 있었는지, 장남인지 동생인지 전혀 기록이 없으니까 세대 진척이 더 느릴지 빠를지 아는건 불가능하지만, 유비가 경제의 11~12대손이 되는게 이론상 가능은 하다는 말이다.
[1] CCTV에서 큰 인기를 끈 중국판 설민석 같은 존재로, "위안텅페이의 한말/삼국 강의(2014, 원제 《袁腾飞讲汉末三国》, 상하 2권. 한국에는 "위안페이의 삼국지 강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음.)"을 집필한 사람이다. "마오쩌둥이 1949년 이후 잘한 것은 오직 죽은 것뿐"이란 말 때문에 교사에서 쫓겨난 이후 학원 강사가 된 것인데, 그것과는 별개로 그가 주장한 유비 혈통 의혹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2] 주금이란 매년 8월 천자가 종묘에 제사지낼 때, 제후왕이나 열후들이 부조 형식으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봉헌하는 황금을 말한다. 그런데 전한 한무제 때 제후왕들의 세력을 꺾고 전제 정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주금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거나 정해진 양에 모자란다는 죄목으로 많은 이의 작위를 빼앗는데, 유비의 조상도 이때 걸린 것이다.[3] 아주 도움이 안 된 건 아니고, 유비 떠돌이 생활을 할 때부터 적벽 이후 성공하는 과정에서 쏠쏠한 도움이 되었다. 전-후한의 황족 유씨라는 명분은 그가 한중왕으로 등극하는 데 가장 큰 명분이었고, 여기 저기 떠돌아다닐 때도 명사 대접받는데 알게 모르게 잘 써먹었다. 즉, 유비가 어느 정도 세력을 성장시킨 후에야 비로소 황족이라는 것이 빛을 발했던 것이지 그 이전에는 돗자리나 짜던 촌놈이라는 멸시를 심심찮게 받았다. 즉, 본인이 어느 정도 위치에 설 때는 도움이 되었으나 그 위치까지 올라간 건 본인의 업적이다. 실질적으로 유비가 황족 어드밴티지를 활용하는 건 헌제와 조조에게 황숙 인증을 받은 뒤인데, 왕년에 돗자리 팔던 깡촌 건달 두목에 불과했던 인물이 한 나라의 '''황제와 승상'''한테 인증받을 수 있는 네임드까지 올라간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4] 실제로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종의 17대손이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태어난 이승만은 왕족 대접을 전혀 받지 못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냥 산술적으로 따지면 1대에 자식을 세명씩 봤다고 쳐도 경제부터 헌제까지 13대가 지나는 동안 자손이 '''160만명'''에 달하는데, 경제도 그렇고 헌제의 조상인 장사정왕 유발만 해도 자식을 많이 두었다. 자식 많기로 유명한 유승이 세상에 뿌린 (...) 자손들까지 하면 정말 엄청난 수의 "황족"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는 사망률이 높았고 자식을 못보거나 멸문하는 경우도 많아 실제론 훨씬 적은 수치겠지만, 그리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수일 것이다.[5] 다만 공손찬 역시 유우를 죽인 일로 원소의 분노를 아주 크게 샀고 결국 원소에 의해 멸망당하고 성에 불을 지르면서 자결했다.[6] 이 둘 역시 경제 대에서 후한 황족이랑 갈라졌다.[7]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8] 유비가 영제와 동항렬이라고 가정할 경우. 참고로 동아시아에서 통상적인 종친의 범위는 군주의 5대손까지다. 임영대군파 11대손쯤 되면 종친부에 들어있던 시기보다 종친부 벗어난 시기가 더 오래될 지경.[예시]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 푸틴 가문의 블라디미르의 아들 블라디미르,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 사우드 가문의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 등등. 반지의 제왕만 봐도 아라고른은 자신을 소개할 때 꼬박꼬박 '''아라소른의 아들 아라고른이오.'''라고 말한다.[9] 팔촌은 현대에서는 남남이나 다름없지만, 과거 개념으로 보면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다. 특히 다 같이 대대로 사는 집성촌이라면 "네가 누구 아들이냐?" 한마디만 물어봐도 촌수가 바로 나온다.[10] 유비가 유기를 적극 후원할 수 있었던 것이 유비가 방계라도 하여간 친족이라는 데 있었다. 유비를 쳐내고 유기를 낙동강 오리알 만드는 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혈통 논란으로 유비를 친족집단에서 축출하는 것이며 안 그래도 유표는 유비를 은근히 경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채씨네가 그걸 못한 이유는 뻔하다.[11] 연의의 논쟁씬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긴 했지만 연의는 명대의 저작임을 잊지 말자. 그나마도 제갈량이 아가리 닥치게 만든다.[12] 여기서 유표, 유장, 손권 정도는 그래도 유비의 황실 혈통을 한 번씩은 써먹었으니, 황족 타이틀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 위해 눈감아준 것일 수 있다손 쳐도, 서촉 호족들이나 장로는 정말 아무런 부담 없이 유비에게 마음껏 딜을 넣을 수 있는 입장인데도 한 번도 유비의 혈통을 깐 적이 없다.[13] 위촉오 3국 중 촉은 유일하게 익주와는 하등의 인연이 없는 쌩 외지인들이 들어와 세운 국가다. 이런 국가들은 보통 현지세력과의 통혼을 통해 기반을 다지려 하는데 유비는 그나마 목황후와 혼인했지만 유선은 유비의 친위세력인 장비의 딸만 연달아 황후로 맞을 정도로 촉에서 유씨 황실의 권위는 막강했다.[14] 모친이 공부하게 해, 같은 가문(同宗) 유덕연, 요서의 공손찬과 함께 전 구강 태수이자 같은 군 출신인 노식을 섬겼다. 유덕연의 부친 유원기는 항상 유비에게 베품이, (아들) 유덕연과 같았다. 유원기의 처가 이르길 "각자 일가를 이뤘는데, 어찌 항상 이와 같을 수 있으십니까!" 유원기가 이르길 "우리 종중의 이 아이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오."[15] 선주는 어릴 때, 종중의 여러 아이와 나무 아래서 놀며 말하길 "나는 반드시 곧 이러한 우보(羽葆:깃털로 장식 된 덮개)가 덮인 수레를 탈 거야."[16] 바로 위 각주에서 우보 덮인 수레를 타고 싶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천자가 타는 수레를 뜻한다.[17] 숙부 유자경이 이르길 "너는 허튼소리 마라, 우리 문중 망하겠다!"[18]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이 탁현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으나, 주금(酎金) 문제에 좌죄되어 후작을 잃고 이로 인해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선주(先主)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東郡范令, 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선주는 어릴 때 부친을 잃어, 모친과 신발을 팔고 돗자리를 짜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19] 진수는 조조는 재상 조참의 후손, 유비는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고 명확하게 적어놨다. 오히려 손견의 경우 손자의 후손일 것이라고 애매하게 적은 것과 비교된다.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역사가였던 진수도 유비의 혈통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20] "소열제의 한이 비록 중산정왕(한경제의 아들)의 후예라고 하지만 그 친족관계가 멀어서 그 세대의 수와 이름, 관직 등을 기록할 수 없으며, 유송의 고조가 초원왕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 남당 열조가 오왕 각의 후예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그 옳고 그름을 구별하기 어려우므로 감히 광무제(전한 멸망 후 흥한의 기치를 내걸고 다시 천하를 회복한 후한의 창업자)나 진의 원제(서진 멸망 후 동진을 강남에 세워 진왕조의 명맥을 이은 동진의 창업자)와 비교하여서 한나라의 유통을 잇게 할 수 없다." - 《자치통감》권69 위기일 황초 2년[21] 영가의 난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유유의 일족이 이러하다, 사실 그 역시도 당대엔 점령한 사례지방에서 후퇴해야 했을 때 해당지역민들로부터 '선조의 무덤'(서한 황족들의 무덤)이 이 지역에 있으니 후퇴하지 말아달라며 어느정도는 옛 한나라 유씨 취급을 받았었다.[22] 지휘력이나 결속력이 부족해 다스리는 지역에 비해 힘이 약한 편이었던 유장은 거물급 군웅인 유비의 힘이 필요했다쳐도, 당시 유표는 조조나 원소조차 견제하는 강자였다. 물론 유비의 실력이 탐날 순 있겠지만, 유표 세력이 언제 폭탄이 될줄 모르는 혈통 사기꾼을 안아야 할 정도로 급박한 적은 없었다.[23] 이때가 삼국지 1세대 최후의 생존자인 조운이 사망한 해이기도 하다.[24] 정확히는 중산정왕 유승의 이복형인 경제의 7남 장사정왕 유발의 5대손.[25] 방계는 맏아들의 동생들의 혈통이다. 동생들은 맏형보다 결혼도 나중에 하고 애들도 늦게 낳으니 당연히 세대의 진척이 느리다.[26] 제후 책봉 시기엔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유정이 나이가 더 많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어쨌거나 비슷한 시기에 책봉된 만큼 나이도 비슷하다고 추정해볼 순 있다.[27] 물론 실제로 전한은 멸망했기 때문에 광무제의 직계인 헌제는 직계 황족이 맞다.[28] 물론 실제론 유비쪽으론 유정까지 방계긴 했지만, 설령 유정이 유승의 장남이었어도 마찬가지로 방계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