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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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야구인. 전 KBO리그 선수이며 현 skySports 야구 해설위원. 아래에 서술하겠지만 국내 최초로 '''5개 스포츠채널 야구해설을 뛰었다!'''
선수시절의 현장 경험에 기자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분석력이 더해진 조화로운 해설로 롯데와 LG팬들을 제외한 전 구단 팬들에게 불호가 없는 대표적인 해설가이다. [3]
아래에 설명할 부친 이성규씨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향은 경북 안동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대구로 가서 야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부친의 모교인 대전고로 진학했다. 부친의 모교 야구부의 중흥을 위한 선택으로 고교야구에서도 제법 촉망받는 선수였다.
1981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동렬, 김건우, 조계현등 과 함께 차출되어[4] 제1회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초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5]
다만 몸이 좋지 않아 1년 유급하게 되는데 이게 그의 야구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가 유급을 끝내고 복귀하는 시점에 문교부(현 교육부) 에서 '''고교야구 유급생 출전정지 결정을 때린 것.''' 이 당시 고교야구가 성적을 위해 멀쩡한 고교생을 유급시키는 막장 행각이 있어서 내린 결정이기는 했는데, 엉뚱하게 이효봉이 독박을 쓰게 되었다. 결국 본인 최고의 페이스가 될 수 있었던 고3 시즌을 날리고 대학에 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재야에서는 제법 촉망받았지만, 정작 성인 무대에서는 자신의 재능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인정받은 기량으로 고려대학교에 진학할 수는 있었지만, 이 시기 고려대학교는 박노준, 선동열이 뛰놀던 그 장소(…)[6] .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전신인 빙그레 이글스에 1986년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실업야구팀인 한국화장품과 상무를 거쳐 1989년 드디어 빙그레 이글스를 통해 프로의 세계로 입문한다. 그러나 부상의 덫에 걸렸고, 1990년 1군 7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점 4.22를 기록한 게 끝이었다.
은퇴이후 야구 매거진 <주간야구> 기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효봉의 선친인 이성규씨와 막역한 친구사이였던 주간야구의 김창웅 주간이 친구 아들이 안타깝게 은퇴하게 되자 재능을 아까워 해서 입사했다고 한다. 글을 잘 쓸 줄 몰랐지만, 죽도록 노력해서 따라잡았다고. 하지만 스포츠신문들의 증면경쟁에 따른 기자스카웃이 이어지면서 주간야구가 93년 11월 말 문을 닫은 후에는 케이블채널 <한국스포츠TV>(현 SBS Sports)에 경력직 야구기자로 입사한다.
방송해설자로 입문한 건 1999년.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한국스포츠TV가 야구 해설자를 영입할 자금이 없자, 고육지책으로 사내 야구기자를 해설위원으로 쓰면서부터이다. 전년도에 MBC라디오와 병행으로 맡아 온 김소식 위원이 1999년 SBS로 이적하게 되어 대타로 들어갔다[7] . 이 때부터 필력과 말발은 죽였다. 이 당시 모든 야구팬들이 기억하는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을 김성주 캐스터와 함께 중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0년 한국스포츠TV가 SBS로 넘어간 후, 인력 구조조정을 둘러싼 갈등 속에 SBS Sports 채널은 2003년 파업 사태를 맞게 되고, '''이 때 캐스터와 해설위원 등의 일부 인력들이 SBS의 높으신 분들 때문에 숙청당하게 되는데 이 명단에 이효봉도 끼어 있었다.''' 지못미…. 당시 이효봉은 구조조정되는 인력들 편에 섰다고 한다.[8][9]
한국스포츠TV에서 짤린 이후 2004년부터 2007년까지 LG 트윈스의 스카우트#s-11로 4년 간 일했다. 이 때 크리스 옥스프링을 데려오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당시 LG스카우트 팀은 이후 계속해서 LG 팬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됐으며, 유지홍 스카우트 팀장은 나중에 뇌물 수수로 짤렸다(…).
이효봉이 욕 먹는 대표적인 사례가 2007시즌 드래프트에서 사이버 투수 김유선을 1차 지명한 것이다. 김유선은 덕수고 3학년 때 부상으로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봉중근과 같이 2007년 드래프트 1차 지명으로 뽑혔다. 예상대로 2012년 시즌 후 방출당할 때까지 1군은커녕 2군에서도 등판하지 못했다. 거기에 LG는 경기고 우완투수 김강률을 1차 지명하려다가, '''전학생 1차 지명 금지''' 조항으로 인해 2차 지명에서 두산에게 김강률을 빼앗기는 삽질까지 했다. 반면 이 해 두산 베어스의 1차 지명은 임태훈, 이용찬. 그런데 2007년까지는 유지홍 팀장이 독단으로 신인을 뽑았고, 이형종, 정찬헌을 뽑은 2008시즌 신인 지명이 이효봉의 작품이란 설도 있다.
2008년 KBS N 스포츠의 해설위원으로 컴백했다. 그리고 2009년 CJ 산하의 Xports로 둥지를 옮겼다가, 1년도 안 돼 Xports가 SBS에 인수되어 2009 시즌이 끝난 뒤 경제채널로 전환되어 버리면서, MBC ESPN(당시 명칭으로 기술)으로 한 번 더 자리를 옮겼다. 이러면서 4개 스포츠 방송사의 해설위원을 모두 거치는 대업을 달성한다!! 2012년에는 중계권을 다시 따낸 CJ 산하의 XTM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5년에는 XTM이 야구중계를 포기하고 skySports가 대신 중계권을 따내면서 다시 한번 자리를 옮기게 된다.
2018년 skySports는 프로야구 중계를 포기하게 되었는데, 결국 임용수 캐스터와 함께 IB SPORTS 측에서 고교야구와 2018년 7월 새롭게 다시 부활한 퓨처스리그 중계의 해설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JTBC3 FOX Sports에서 중계하는 2018 BFA U-12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의 중계의 해설도 담당했다.
2019년 5월부터 한화 이글스 홈 경기를 중계하는 대전 지역 CMB로 프로야구 해설에 복귀했다. 그리고 9월 26일 창원 NC 파크에서 벌어지는 한화 이글스와 NC 다이노스 경기의 뉴미디어 채널 중계의 해설자를 맡았다.
경기에 몰입은 하지만 감정을 쉽게 이입시키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한 사인 읽기의 귀재로 투수의 구질과 코스, 그리고 경기 전반의 작전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어머니가 교장선생님을 지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것 같다. 특히 단점을 꼬집기보다는 장점을 많이 부각시키고 다소 정줄놓은 플레이가 나와도 심하게 질책하지 않는다. 항간에는 이효봉에게 질책받는 선수는 선수 생활을 접어야 한다는 우스개소리도 있다. 심지어 중계 중에 희생 번트가 나오자 "아~ 번트 잘 댔어요"라고 역시 칭찬일색의 해설을 했는데 문제는 2루 주자가 3루수의 송구에 잡히고 만다. 그러자 이효봉은 결국 "너무 잘 댄 희생번트를 3루수가 기가 막힌 호수비로 송구해서 잡았다"라고 포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다만 2012년 5월 15일 중계를 맡았을때 그 날 여러 의미로 경기를 지배한(…) 이대수의 플레이를 보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하게 질책했다. 웬만해서는 선수 질책을 잘 안했던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그만큼 그날 이대수의 플레이가 얼마나 어이상실했는지 그대로 말해준다. 결국 이날 대첩을 쓴 이대수는 열흘 간 2군으로 강등되어야 했다. 반면에 좋은 플레이가 나오면 그게 왜 좋았는지, 어떤 점이 좋은지 구체적으로 집어가며 칭찬해준다. 그래서인지 스포츠서울이 프로야구 선수들 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9.3%(12명)로 영예로운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모두까기 인형. 기사
단점을 정말 찾기 힘들 정도의 해설을 보이지만 가끔씩 너무 완벽한 야구에 대한 동경심이 있다는 여론도 있긴 하다. 그리고 너무 차분한 나머지 듣는 사람에 따라 졸음이 유발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긍정적인 면을 많이 부각시키다 보니 명백히 어떤 선수의 삽질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치켜세우려는 해설을 해 선수의 잘못을 덮으려는 듯한 해설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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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방송 중계를 할 당시의 기록지이다. 중계석이 그라운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투구 궤적 등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모니터를 통해 투구궤적은 물론 스트라이드 폭이나 타자와의 타이밍 등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진짜 손 아프겠다(…).
한 경기 중계하는데 10시간을 투자한다고 한다. 경기 전날 저녁 때 양팀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는데 2~3시간 , 경기 시작 3시간 전에 나와 선수,감독들 찾아다니며 사전 취재, 그리고 야구경기 3-4시간 이 정도면 거의 10시간 안팎 맞다.
그의 아버지는 MBC의 아나운서였던 이성규다. 이성규의 야구 사랑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10] 프로야구 출범 이전,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었다. 이날 해설을 맡기로 한 김계현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해설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때 장내 아나운서가 “야구장에 이성규 아나운서 있으면 중계실로 좀 와 달라”고 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성규 아나운서는 어렸을 때부터 평소 라디오를 통해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경기를 즐겨 들었고, 일본 야구전문잡지 슈칸베이스볼을 정기구독할 정도로 야구에 심취해 있었다. 고교야구가 최고인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 방송 관계자들은 이성규 아나운서가 분명 구덕구장을 찾았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었다. 야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에게 대타 해설을 맡긴 것이었는데, 기존 해설가 뺨치는 해설로 대박을 터뜨렸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아나운서를 은퇴한 이성규에게 MBC는 지방 야구중계 해설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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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이효봉 위원은 한국스포츠 중계 역사상 진귀한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다. MBC 아나운서를 했고 나중에 MBC SPORTS+에서 일한 임주완 캐스터가 지난 2010년 이효봉 위원과 같이 프로야구 중계를 하게 되면서, 국내 최초로 한 캐스터가 부자 해설위원과 차례로 콤비 플레이를 하게 된 것.
대전고등학교 출신이라서 그런지 한화 이글스 팬들에게는 단비와도 같은 존재다. 은근히 인기팀들 위주의 편파가 종종 보이는 허구연(이쪽은 거의 대놓고), 하일성 해설위원보다 훨씬 사랑받는다. 위에도 설명되었듯이 어떤 팀의 중계를 맡든 편파 없이 차분하고 정확하며 자세한 해설로 인기가 좋다. 이 덕분에 허구연, 이용철, 마해영 등의 해설자들을 편파해설로 성토하는 게 일상인 10개 구단 갤러리에서도 이효봉을 까는 글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한화 팬들은 칰효봉이라고 부르며 해설을 들으면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해진다고 말할 정도(…).
롯데 자이언츠 조정훈을 대단히 좋아하는 듯하다. 그가 등판하면 정말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조정훈이 공익 입대한 2011 시즌에는 롯데 경기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 조정훈이 전역 후 복귀하는 2013년 시즌에는 큰 활약이 기대된다지만 조정훈은 또 팔꿈치가 나갔다.
1. 소개
대한민국의 야구인. 전 KBO리그 선수이며 현 skySports 야구 해설위원. 아래에 서술하겠지만 국내 최초로 '''5개 스포츠채널 야구해설을 뛰었다!'''
선수시절의 현장 경험에 기자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분석력이 더해진 조화로운 해설로 롯데와 LG팬들을 제외한 전 구단 팬들에게 불호가 없는 대표적인 해설가이다. [3]
2. 선수 시절
아래에 설명할 부친 이성규씨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향은 경북 안동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대구로 가서 야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부친의 모교인 대전고로 진학했다. 부친의 모교 야구부의 중흥을 위한 선택으로 고교야구에서도 제법 촉망받는 선수였다.
1981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동렬, 김건우, 조계현등 과 함께 차출되어[4] 제1회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초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5]
다만 몸이 좋지 않아 1년 유급하게 되는데 이게 그의 야구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가 유급을 끝내고 복귀하는 시점에 문교부(현 교육부) 에서 '''고교야구 유급생 출전정지 결정을 때린 것.''' 이 당시 고교야구가 성적을 위해 멀쩡한 고교생을 유급시키는 막장 행각이 있어서 내린 결정이기는 했는데, 엉뚱하게 이효봉이 독박을 쓰게 되었다. 결국 본인 최고의 페이스가 될 수 있었던 고3 시즌을 날리고 대학에 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재야에서는 제법 촉망받았지만, 정작 성인 무대에서는 자신의 재능을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 인정받은 기량으로 고려대학교에 진학할 수는 있었지만, 이 시기 고려대학교는 박노준, 선동열이 뛰놀던 그 장소(…)[6] .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전신인 빙그레 이글스에 1986년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실업야구팀인 한국화장품과 상무를 거쳐 1989년 드디어 빙그레 이글스를 통해 프로의 세계로 입문한다. 그러나 부상의 덫에 걸렸고, 1990년 1군 7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점 4.22를 기록한 게 끝이었다.
2.1. 연도별 주요 기록
3. 야구기자 시절
은퇴이후 야구 매거진 <주간야구> 기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효봉의 선친인 이성규씨와 막역한 친구사이였던 주간야구의 김창웅 주간이 친구 아들이 안타깝게 은퇴하게 되자 재능을 아까워 해서 입사했다고 한다. 글을 잘 쓸 줄 몰랐지만, 죽도록 노력해서 따라잡았다고. 하지만 스포츠신문들의 증면경쟁에 따른 기자스카웃이 이어지면서 주간야구가 93년 11월 말 문을 닫은 후에는 케이블채널 <한국스포츠TV>(현 SBS Sports)에 경력직 야구기자로 입사한다.
4. 프로야구 해설자 시절 1기
방송해설자로 입문한 건 1999년.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한국스포츠TV가 야구 해설자를 영입할 자금이 없자, 고육지책으로 사내 야구기자를 해설위원으로 쓰면서부터이다. 전년도에 MBC라디오와 병행으로 맡아 온 김소식 위원이 1999년 SBS로 이적하게 되어 대타로 들어갔다[7] . 이 때부터 필력과 말발은 죽였다. 이 당시 모든 야구팬들이 기억하는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을 김성주 캐스터와 함께 중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0년 한국스포츠TV가 SBS로 넘어간 후, 인력 구조조정을 둘러싼 갈등 속에 SBS Sports 채널은 2003년 파업 사태를 맞게 되고, '''이 때 캐스터와 해설위원 등의 일부 인력들이 SBS의 높으신 분들 때문에 숙청당하게 되는데 이 명단에 이효봉도 끼어 있었다.''' 지못미…. 당시 이효봉은 구조조정되는 인력들 편에 섰다고 한다.[8][9]
5. LG 트윈스 스카우트 시절
한국스포츠TV에서 짤린 이후 2004년부터 2007년까지 LG 트윈스의 스카우트#s-11로 4년 간 일했다. 이 때 크리스 옥스프링을 데려오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당시 LG스카우트 팀은 이후 계속해서 LG 팬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됐으며, 유지홍 스카우트 팀장은 나중에 뇌물 수수로 짤렸다(…).
이효봉이 욕 먹는 대표적인 사례가 2007시즌 드래프트에서 사이버 투수 김유선을 1차 지명한 것이다. 김유선은 덕수고 3학년 때 부상으로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봉중근과 같이 2007년 드래프트 1차 지명으로 뽑혔다. 예상대로 2012년 시즌 후 방출당할 때까지 1군은커녕 2군에서도 등판하지 못했다. 거기에 LG는 경기고 우완투수 김강률을 1차 지명하려다가, '''전학생 1차 지명 금지''' 조항으로 인해 2차 지명에서 두산에게 김강률을 빼앗기는 삽질까지 했다. 반면 이 해 두산 베어스의 1차 지명은 임태훈, 이용찬. 그런데 2007년까지는 유지홍 팀장이 독단으로 신인을 뽑았고, 이형종, 정찬헌을 뽑은 2008시즌 신인 지명이 이효봉의 작품이란 설도 있다.
6. 야구해설자 시절 2기
2008년 KBS N 스포츠의 해설위원으로 컴백했다. 그리고 2009년 CJ 산하의 Xports로 둥지를 옮겼다가, 1년도 안 돼 Xports가 SBS에 인수되어 2009 시즌이 끝난 뒤 경제채널로 전환되어 버리면서, MBC ESPN(당시 명칭으로 기술)으로 한 번 더 자리를 옮겼다. 이러면서 4개 스포츠 방송사의 해설위원을 모두 거치는 대업을 달성한다!! 2012년에는 중계권을 다시 따낸 CJ 산하의 XTM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5년에는 XTM이 야구중계를 포기하고 skySports가 대신 중계권을 따내면서 다시 한번 자리를 옮기게 된다.
2018년 skySports는 프로야구 중계를 포기하게 되었는데, 결국 임용수 캐스터와 함께 IB SPORTS 측에서 고교야구와 2018년 7월 새롭게 다시 부활한 퓨처스리그 중계의 해설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JTBC3 FOX Sports에서 중계하는 2018 BFA U-12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의 중계의 해설도 담당했다.
2019년 5월부터 한화 이글스 홈 경기를 중계하는 대전 지역 CMB로 프로야구 해설에 복귀했다. 그리고 9월 26일 창원 NC 파크에서 벌어지는 한화 이글스와 NC 다이노스 경기의 뉴미디어 채널 중계의 해설자를 맡았다.
7. 해설 스타일
경기에 몰입은 하지만 감정을 쉽게 이입시키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또한 사인 읽기의 귀재로 투수의 구질과 코스, 그리고 경기 전반의 작전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어머니가 교장선생님을 지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것 같다. 특히 단점을 꼬집기보다는 장점을 많이 부각시키고 다소 정줄놓은 플레이가 나와도 심하게 질책하지 않는다. 항간에는 이효봉에게 질책받는 선수는 선수 생활을 접어야 한다는 우스개소리도 있다. 심지어 중계 중에 희생 번트가 나오자 "아~ 번트 잘 댔어요"라고 역시 칭찬일색의 해설을 했는데 문제는 2루 주자가 3루수의 송구에 잡히고 만다. 그러자 이효봉은 결국 "너무 잘 댄 희생번트를 3루수가 기가 막힌 호수비로 송구해서 잡았다"라고 포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다만 2012년 5월 15일 중계를 맡았을때 그 날 여러 의미로 경기를 지배한(…) 이대수의 플레이를 보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하게 질책했다. 웬만해서는 선수 질책을 잘 안했던 그가 그렇게 말할 정도로 그만큼 그날 이대수의 플레이가 얼마나 어이상실했는지 그대로 말해준다. 결국 이날 대첩을 쓴 이대수는 열흘 간 2군으로 강등되어야 했다. 반면에 좋은 플레이가 나오면 그게 왜 좋았는지, 어떤 점이 좋은지 구체적으로 집어가며 칭찬해준다. 그래서인지 스포츠서울이 프로야구 선수들 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29.3%(12명)로 영예로운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모두까기 인형. 기사
단점을 정말 찾기 힘들 정도의 해설을 보이지만 가끔씩 너무 완벽한 야구에 대한 동경심이 있다는 여론도 있긴 하다. 그리고 너무 차분한 나머지 듣는 사람에 따라 졸음이 유발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긍정적인 면을 많이 부각시키다 보니 명백히 어떤 선수의 삽질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치켜세우려는 해설을 해 선수의 잘못을 덮으려는 듯한 해설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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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방송 중계를 할 당시의 기록지이다. 중계석이 그라운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투구 궤적 등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모니터를 통해 투구궤적은 물론 스트라이드 폭이나 타자와의 타이밍 등을 자세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진짜 손 아프겠다(…).
한 경기 중계하는데 10시간을 투자한다고 한다. 경기 전날 저녁 때 양팀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는데 2~3시간 , 경기 시작 3시간 전에 나와 선수,감독들 찾아다니며 사전 취재, 그리고 야구경기 3-4시간 이 정도면 거의 10시간 안팎 맞다.
그의 아버지는 MBC의 아나운서였던 이성규다. 이성규의 야구 사랑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10] 프로야구 출범 이전,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었다. 이날 해설을 맡기로 한 김계현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해설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이때 장내 아나운서가 “야구장에 이성규 아나운서 있으면 중계실로 좀 와 달라”고 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성규 아나운서는 어렸을 때부터 평소 라디오를 통해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경기를 즐겨 들었고, 일본 야구전문잡지 슈칸베이스볼을 정기구독할 정도로 야구에 심취해 있었다. 고교야구가 최고인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 방송 관계자들은 이성규 아나운서가 분명 구덕구장을 찾았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었다. 야구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에게 대타 해설을 맡긴 것이었는데, 기존 해설가 뺨치는 해설로 대박을 터뜨렸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아나운서를 은퇴한 이성규에게 MBC는 지방 야구중계 해설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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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이효봉 위원은 한국스포츠 중계 역사상 진귀한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다. MBC 아나운서를 했고 나중에 MBC SPORTS+에서 일한 임주완 캐스터가 지난 2010년 이효봉 위원과 같이 프로야구 중계를 하게 되면서, 국내 최초로 한 캐스터가 부자 해설위원과 차례로 콤비 플레이를 하게 된 것.
대전고등학교 출신이라서 그런지 한화 이글스 팬들에게는 단비와도 같은 존재다. 은근히 인기팀들 위주의 편파가 종종 보이는 허구연(이쪽은 거의 대놓고), 하일성 해설위원보다 훨씬 사랑받는다. 위에도 설명되었듯이 어떤 팀의 중계를 맡든 편파 없이 차분하고 정확하며 자세한 해설로 인기가 좋다. 이 덕분에 허구연, 이용철, 마해영 등의 해설자들을 편파해설로 성토하는 게 일상인 10개 구단 갤러리에서도 이효봉을 까는 글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한화 팬들은 칰효봉이라고 부르며 해설을 들으면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해진다고 말할 정도(…).
롯데 자이언츠 조정훈을 대단히 좋아하는 듯하다. 그가 등판하면 정말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조정훈이 공익 입대한 2011 시즌에는 롯데 경기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 조정훈이 전역 후 복귀하는 2013년 시즌에는 큰 활약이 기대된다지만 조정훈은 또 팔꿈치가 나갔다.
8. 사건사고
- 2013년 5월 19일 중계 도중에 방송사고를 내 버렸다.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서 롯데가 스코어 11:2로 크게 이기던 9회말에 김시진 감독이 마무리 투수 김성배를 등판시켰다.[11] 광고 시간 도중에 그걸 본 이효봉은 김성배를 올리냐, 아이구…라는 말을 뱉었는데, 이때 딱 광고가 끝나버리면서 이 말이 그대로 전파를 타 버렸다! 플짤 다행히(?) 사람들은 이효봉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김시진 감독의 투수 운영이 얼마나 엉망이면 이효봉마저 까냐'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방송사고는 묻혔다. 이때 김시진 감독은 이 경기에 내보내지 못하면 근 1주일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컨디션 점검차 내보냈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경기에서 김성배가 수비 도중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는 바람에 왼쪽 허리에 담이 일어났다는 것이지만.
- 사실 이 사고 외에도 해당 시즌에 광고 타임 사이에 한 말이 나간 적이 종종 있었다. 동년 8월 3일 두산 vs SK전에서도 투구수 100개를 향해가던 SK의 선발 투수 윤희상이 6회에도 올라오자 "어우, 6회도 나와."(...)라고 한 말이 전파를 탄 적이 있다.당일 경기 영상.(2:29:43~45초 사이를 잘 들어보자.)
아무래도 윤희상이 그때까지 5이닝 3실점을 기록 중이었고, 3타자 연속 홈런을 맞기도 한데다 오재원과의 마찰도 있었고, 3:3 동점이었기 때문에 6회에도 등판하기는 힘들다고 본 듯 하다.
9. 여담
- 비 더 레전드를 29콤보까지 찍은 상태에서 2014년 6월 25일에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건창을 찍었다가 서건창이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는 바람에 콤보가 끊겼다는 사실이 XTM 베이스볼 워너B 생방송 도중 밝혀져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그러나 비더레 규정상 야구관계자는 상금수령자 대상에서 제외된다. 만약 이효봉위원이 40콤보를 찍었어도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날 비 더 레전드 상위 100명 중 1~5위를 포함하여 무려 53명이 서건창을 찍었다가 단체로 콤보가 끊기고 말았다.
- 모바일게임 마구마구2017 for Kakao를 플레이하면 그의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현제는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 모 LG팬의 목격담에 의하면 잠실경기 종료 후 집에 가는 오지환을 붙잡고 10분동안 타격에 관한 문제점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 2018년 10월 20일 준플레이오프 넥센:한화 2차전 경기를 임용수 캐스터와 함께 아프리카TV를 통해 중계방송을 하였다. 기존 방송과 달리 평소 하지 않던 이야기나 시청자 댓글에 대한 소통을 하기도 하였다. 야구 캐스터는 포수와 같아서 해설이 던지는 공을 잘 받아줘야한다는 중계철학을 임용수 캐스터와 같이 공감하면서 이야기 하였다. 또 캐스터가 너무 아는체를 하며 해설 영역에 침범하는 중계를 하는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도 나타내었다. 시청자가 좌우놀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좋은 투수들이 없는 팀이 좌우놀이를 해요라고 답변했다. 그렇다고 좌우놀이 무용론을 펼친것은 아니다.
[1] 지명된 후 실업팀 한국화장품과 상무 입대 후 1990년 입단[2]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병역특례를 받았으나 어째서인지 상무에서 군복무하였다.[3] 2016년 5월 6일부터 8일까지 두산 ,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기아 3연전에서 편파에 가까운 해설을 한 이후로 롯데와 LG 팬들의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4] 이때 선린상고 동기였던 박노준은 차출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1963년생인 선동렬, 김건우와 달리 박노준은 1962년 생으로 1살이 많아서 나이제한에 걸렸기 때문이다.[5] 아래 서술된 바와 같이 유급생 출전제한으로 이효봉은 고3이던 1981년에 고교대회에 전혀 출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해 7월에 열린 세계청소년대회에 대표로 차출된 것은 고2 때인 1980년에 지역예선에서 매번 격돌했던 북일고의 감독이던 김영덕이 대표팀 감독을 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1980년 북일고는 전국대회 2관왕을 차지한 강호였으나 대통령기와 청룡기에서는 지역예선에서 이효봉이 활약한 대전고에 발목이 잡혀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당시 신생팀인 북일고가 지역예선에서 지역맹주인 대전고에 심판판정에서 매우 불리했었다는 측면도 있었다.[6] 고려대학교 마운드는 당시 에이스들을 싸그리 끌어모았는데 양상문 79학번, 진동한 80학번, 선동열과 정삼흠 81학번, 박노준과 이효봉은 82학번[7] MBC는 김소식(허구연과 양대산맥이었다) 해설위원이 SBS로 떠난 뒤 라디오 진행 고정 해설위원이 아직까지 뜸한 상태다[8] 이 당시 숙청된 인력 중에는 현 KBS N 스포츠의 이기호 캐스터, 현 프리랜서 축구 캐스터로 활약중인 박찬 씨 등도 있었다.[9] 이 때 김성근감독이 검은 봉지에 음료수 사들고 와서 이효봉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효봉은 친김성근계 인물로 꼽히고 있다.[10] 2010년 4월 16일, 스포츠동아 발췌.[11] 혹시 야구를 잘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짧게 설명하자면 마무리 투수는 보통 '세이브' 상황(통상 3점차 이내의 접전 상황)에서 등판해 게임을 말그대로 '마무리'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김시진 감독은 9점차라는 큰 점수차이에 마무리 투수를 등판시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