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무기체계

 



1. 개요
2. 문제점
2.1. 빈약한 화력
2.2. 부족한 방호력
2.3. 공업능력의 부족
2.4. 처참한 신뢰성
2.5. 원인
2.5.2. 일본 해군의 경우
2.5.3. 양쪽 모두
2.5.3.1. 자살특공
2.5.3.3. 레이더 개발 금지
2.5.3.4. 통신 문제
2.5.3.4.1. 무전기는 먹통입니다
2.5.3.4.2. 암호는 장식입니다
2.5.3.5. 대공포
2.5.3.6. 부실한 군수지원
2.5.3.6.1. 자원 부족
2.5.3.6.2. 운송 불가
2.5.3.6.3. 사용 불가
3. 전쟁 이후
4. 대중문화에서의 일본군의 무기체계
4.1. 애니메이션과 소설
4.2. 게임
5. 일본군의 사용무기
6. 관련문서


1. 개요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무기체계를 설명한다. 근데 상황이 정말 개판이다.(...)

2. 문제점



어떤 국가든 무기 개발 및 그 실전 배치가 성공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시행 착오와 실패, 엄청난 규모의 흑역사를 만들고 돈만 날리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1]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듯 이런 시행 착오, 실패와 흑역사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건 아니다.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지만, 이 시행 착오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군사, 무기 교리를 바꾸거나, 실패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기술로 다시 새로운 것을 개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일본군도 무기 개발 과정에서 시행 착오와 실패를 겪었고, 기본적으로 일본군이 개발한 무기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일본군의 무기는 이런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는 것이다. 이는 부족한 공업능력과 군부의 구시대적인 전쟁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대표적인 예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항공전의 주 전술이던 '''저속 선회전'''을 콘셉트로 해서 제작한 제로센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항공전들을 보면 거의 절대 다수가 ''''붐 앤 줌''''으로 대표되는 급강하 기동전이었다. 예외적으로 소련 공군은 항공기 기술의 부족으로 선회전을 했지만 그 결과는 더 많은 항공기를 투입하고도 더 많은 손실을 입어야 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항공 관련 기술[3]의 부족으로 항공기들의 양력이 부족하므로 복엽기가 거의 대다수였기 때문에 저속 선회전으로 싸웠던 것인데 이후 급격히 발전하는 항공기 관련 기술은 공중전의 양상을 바꾸어버렸다. 물론 대전 초반에는 연합군도(특히 미군[4]) 선회전으로 싸웠다가 제로센에게 당한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비교적 빠르게 붐 앤 줌으로 교리를 갈아탔다.[5]
그 후 제로센의 후계기랍시고 나온 A7M 렛푸도 선회전을 콘셉트로 잡을 것을 요구받았다가 실패작이 되었다. 나중에는 '붐 앤 줌'을 장기로 하는 기종들[6]이 개발/배치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성능 자체는 쓸만했는데 이번에는 공업능력이 발목을 잡아서 기존에 배치된 기체들을 대체하지 못했다.[7] 결정적으로 성능이 쓸 만하다는건 품질이 완벽 하다는 전제하에만 적용되는 것 이었다. 당시 일본군 에겐 좋은 품질의 무기를 대량으로 양산할 능력이 없었다. 이 문제는 비단 항공기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며, 전차, 군함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전차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기의 전차전 교리+기병대의 방해+'''화력지원의 중요성을 무시한 보병대의 간섭'''[8]으로 인해 대전차전용으로는 써먹지도 못하며, 보병 지원용으로'''만''' 굴려먹었으니....[9] 그 결과 이들의 무기체계에는 무기 개발 및 배치에서 나타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었다.

2.1. '''빈약한 화력'''


이 문제로 가장 유명한 사례가 일본군의 대전차포이다. 일본군 육군이 지상전에서 반자이 돌격에 심지어 대전차 자폭조까지 동원하면서 미군에게 그토록 고전한 원인 첫 번째가 바로 이거다. M4 셔먼은 1,500m 밖에서도 여유롭게 치하의 장갑을 뚫는데[10] 치하의 주포는 미군에서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500야드(약 450미터)정도 거리에 들어오면 3.25인치(82mm)를 관통할 수 있었고 셔먼 초기형의 전면이 57도 경사의 51mm이므로 실질적인 두께는 93mm이므로[11] 이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야 관통할 수 있다. 게다가 다른 무기와는 달리 이건 끝까지 해결이 안된 문제다.
덕분에 일본은 89식 대공포처럼 함포까지 동원해야 했다고...[12] 고고도의 항공기의 경우 제로센F4FF6F를 맞춰도 쉽게 떨어지지가 않는다거나[13] 7.7mm, 12.7mm 기관총 1~2정만으로 무장한 Ki-43 하야부사 같이 무장이 빈약한 경우가 많았다. 제로센의 경우는 기관포와 기총의 탄도차이가 커서 7.7mm를 주로 써먹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변명할 수라도 있지 하야부사는... 그나마 항공기용 무장은 상황이 양호한다고 볼 수 있는 게 항공기용 20mm 기관포는 나중에는 물건 자체는 제법 괜찮은 물건이 나오기는 했다.[14] 문제는 그런 기관포들도 갈수록 자원부족 등의 이유로 성능이 더 떨어졌다. 자원부족으로 포신 내구도가 감소해 약장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Ho-5가 그 예시.

2.2. 부족한 방호력


주력 전차로 쓰인 97식 전차의 장갑은 2차 대전 시점에선 이미 구식화돼서 퇴물 취급 받은 소구경 대전차포는 물론이고 심지어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나 총류탄에 관통될 수도 있었다. 다만, 중기관총은 철갑탄을 사용한 경우이고 총류탄도 대전차고폭탄을 사용한 경우 한정이다. 중기관총은 좀 심하지만 대전차고폭탄은 대전차용으로 만든 물건인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어찌되었든 '''주력''' 전차가 저 모양이니 다른 기갑차량이야 더 설명이 필요없을 지경.
해군의 경우는 좀 덜하기는 하지만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토네급 중순양함 치쿠마는 '''호위구축함'''과의 '''포격전'''에서 패배했고, 타카오급 중순양함 초카이는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과의 '''포격전'''에서 패배했다.[15] 심한 파도를 만나면 장갑이 찢어지는 무츠키급 구축함의 경우는 제4함대사건에서 '''41척 중 19척의 함선이 피해를 입었다.'''[16] 애초에 일본은 조약을 위반하지 않는 한도에서 무장을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무장을 과하게 적재해야 했고 결국 함선의 방호력을 낮출 수밖엔 없었다.
특히 일본군의 군함들은 성능은 절륜했지만 유폭하기 매우 쉬운 산소어뢰를 달고 다녔기 때문에 더 쉽게 터져나갔다. 초기 일본의 어뢰발사관은 어뢰보호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어, 대놓고 '''"날 쏴줍쇼"''' 하는 거나 마찬가지 수준으로 어뢰를 바깥에 그대로 내놓고 다녔기 때문에, 한두발이라도 피탄되면 유폭해서 그대로 격침되었다.[17] 그리고 대공포도 절대 다수가 개방식이었기[18] 때문에 기총에 대한 방어력도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 항공기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 문제는 특히 해군기에서 더 돋보이는데, 해군기들은 초기형 기체들이 엔진 출력부터 너무 낮은 데다가 느린 순항속도로 억지로 항속거리를 쥐어짜다시피 길게 하다 보니 무게를 줄이기 위해 방탄판을 빼버려 방어력이 매우 낮았다. 대표적으로 태평양 전쟁 후기의 연합군에게 '''원샷 라이터''' 내지는 '''플라잉 지포''', '''플라잉 시가'''등의 별명으로 불리던 G4M이 있다.[19]
이는 전투기도 예외는 아니라서 제로센의 경우 주익에 연료탱크를 달아놓고도 거기에 대한 방어수단 따윈 존재하지 않았으며 조종사에 대한 배려도 없어서 방탄판도 없었다.[20] 제로센의 경우 당시 엔진출력 문제로 인해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출력이 1,000 마력대 정도 밖에 안 되는 엔진에서 기동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다 보니 당시 제로센의 조종사들은 실전에 들어가면 방해되는 건 무전기에 안테나마저 빼야 했을 정도였고, 방탄판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다가 기체를 만든 재료의 강성 문제로 인해 날아가면서 속도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이러한 방어수단의 부재는 최소한 J2M 라이덴까지 그대로 이어진다.[21] 이는 일본 해군 항공기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문제로 급강하폭격기인 D4Y 스이세이나 뇌격기인 B6N 텐잔도 방어수단이 없다시피 했다.[22] 이 문제는 앞에서 언급된 지상기지에서 운용한 G4M도 예외는 아니라서 절대다수가 중량을 절감한다는 이유로 방탄판도 방루탱크도 없었기에 F2A의 M2 중기관총으로도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었다.[23] 그래서 G4M의 경우 이 기체를 운용하던 일본군 해군이나 이들의 적인 미군이나 거의 같은 별명으로 불렀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 형편없는 방어력은 해군에 한정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육군기는 Ki-43 하야부사부터 이미 조종사를 보호하는 방탄판과 자동방루탱크를 가지고 있었으며 Ki-84 하야테쯤 가면 서방권 기준으로도 충분한 방어수단을 갖추고 있었다.[24] 이는 폭격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방어에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Ki-49 돈류의 경우에도 방탄판과 방루탱크를 갖추고 있었다.[25] 그러나 문제는 육군의 '''중요 육상전력'''인 전차가...

2.3. 공업능력의 부족


산업 혁명이 서구에 비해 100년 가량 늦은 일본 특성상, 애초에 '''일본 공업능력 자체가 미, 소[26] 등 기존의 서양 열강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27], 연합군의 온갖 공습과 공격, 일본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전비, 전장의 인적 자원 소모 등으로 인해, 전쟁 중반 이후 일본의 공업 수준은 그야말로 나락까지 떨어졌다.[28]
사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총력전'이나 '소모전' 같은 개념은 군사이론가들도 거의 거론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체계적인 군수 시스템 등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시행 착오를 거쳐서 확립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시점에는 이미 체계적인 군수 시스템을 갖추고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상태였고, 대량 생산 체계는 총력전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공업 생산력과 기술력의 한계가 뚜렷했다. 물론 당시 일본도 나름 잘나가던 열강이었고, 사실 일본이 아닌 영국, 프랑스, 독일 등도 1시간에 구축함이 한 척씩 진수되는 정신나간 천조국의 생산량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일본이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미국의 싸대기를 갈겼다는 점'''.[29]
더군다나 본토가 전쟁터가 된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은 본토의 생산 시설이 폭격을 맞는 일도 없으니 줄기차게 군수 물자를 뽑아내기도 쉬웠다.[30] 일본의 항모 전력은 산호해 해전미드웨이 해전, 라바울 항공전 등을 거치면서 갈려 나갔고 저 위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끝에 완전 소멸해버리다시피 했다. 그리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정규 항공모함 즈이카쿠를 미끼로 내던지며 최종 소멸 확인을 찍어 버렸다.[31]''' 하지만 미국은 정규 항공모함만 수개월마다 한 척씩, 과장 좀 보태서 '''풀빵 찍어내듯''' 건조 → 취역시키고 있었으니... 그뿐 아니라 F6F 헬캣, F4U 콜세어를 비롯한 함재기와 P-47 썬더볼트, P-51 머스탱, B-29과 같은 육군의 항공기 역시 생산량이 어마어마했다.
아리사카 소총의 경우처럼 경제 봉쇄와 전쟁이 장기화되며, 기술과 공구가 노후화 되고 제대로 된 원료들이 떨어져 가자 기존에 멀쩡히 나오던 무기들도 품질이 조악해지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그리고 생산 시스템이 기계화, 규격화 정도가 낮은 일본은 숙련공의 가치가 높았는데, 일본 군부는 숙련공들을 싹싹 긁어서 '''알보병으로''' 징집해 전쟁터로 내보내 소모시키는 이해 불가한 '''병신짓'''을 했다. 그러자 필로폰 빨고도 피곤해서 꾸벅꾸벅 조는 여학생들이 볼트와 너트를 조이게 되었으니, 일본의 공업 생산력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어가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32]
그리고 기술을 제대로 전수해 줄 숙련공이 줄어드니 기술의 전수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그나마 경력이 좀 쌓였다 싶으면 또 병사로 차출되어 소모돼 버리니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러니 일본의 기술력은 날이 갈수록 떨어져서 바닥을 찍고 만다. 이는 항공기라고 예외일 수 없어서 대전 말에 생산된 기체는 후반으로 갈수록 품질이 더 떨어진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
이로 인해서 피해를 본 대표적인 경우가 Ki-84 하야테같은 기체들이다. 정상적으로 만들어지기만 하면 동시기 공랭식 엔진을 단 기체중 상위권에 들어가는 기체인데 정작 양산기는 신뢰성과 숫자가 모두 부족했다. 거기다 연료가 부족해서 송근유같은 저질기름까지 사용하려는 시도가 있었을 정도였다. 항모갑판에 비행기를 주욱 늘어놓으면 동종의 함재기들이 날개 길이가 들쭉날쭉하는 이런 막장 상황에서 생산 물량이나 품질이 보장될 거라고 믿는 건 코미디 그 자체.
요약하자면 '''태생적으로 부족한 하드웨어 + 총력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일본 군부'''의 콜라보가 무기의 양과 품질을 쌈 싸먹었다.
일본군 무기는 신뢰성과 내구성이 크게 뒤떨어졌고, 호환성이 개판이라 보급과 정비도 힘들었다. 특히 육군과 해군간의 물건은 거의 호환되지 않았고, 한술 더 떠서 같은 조직에서 운용된다고 해도, 심지어는 똑같은 기종인데도 '''생산 업체가 다르면 부품이 호환되지 않았다.'''[33] 또한 수뇌부의 구시대적 전술에 기인한 쓸데없는 요청들로 인해 개량이 늦어지거나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적었다. 재수 없으면 개량을 안 한 것만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2.4. 처참한 신뢰성



훈련용 무기도 그렇지만[34], 전쟁터에서 실전에 들어갈 무기들은 어떤 종류를 막론하고 신뢰성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즉, 총이든, 포든, 항공기든, 전차든, 심지어 군함이라도 '''성능 이전에 믿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성능이 좋고 단가가 싸다고 해도 신뢰성이 꽝이면 군용에서는 탈락이다. 일례로 미 해군도 잠수함, 뇌격기, 구축함들의 무장인 어뢰의 신뢰도 문제로 근 2년을 골치를 썩인 바가 있다. 이 당시 미 해군의 어뢰는 신뢰도 문제가 하도 심각하다 보니 어뢰 스캔들이라고까지 불렸었다.
야마토급 전함의 기관출력이 타 선진국은 물론 다른 일본군 군함의 그것보다도 유독 낮았던 이유도 이 신뢰성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호텔 신세가 됐지만 일본 해군의 전략상 야마토급은 가장 중요한 주력함이자 전략 무기였기 때문에 사소한(?)고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사태는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반면 신형 기관의 실험함이기도 했던 시마카제류호는 기관에서도 문제가 속출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기들은 위의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 중요한 신뢰성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사태를 초래한다. 이는 대전 후반으로 가면서 미군의 공습과 자원 부족문제가 겹치면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항공기의 경우 Ki-84 하야테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기체들을 보면 분명히 2차 세계대전기 전투기들 중에서도 상위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35] 신뢰성에 문제가 많았고[36] 시간이 갈수록 더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어느 정도였는지 하면,

1945년에 생산된 하야테의 조종석에는 절대 타지 마라. 최근에 생산된 녀석들일수록 불량품이 더 많아서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것들이다. 차라리 1944년에 생산된 초기형이 더 믿을 만하다.

이런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구형인 하야부사가 신뢰성은 보장된다는 이유로 선호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나마 빨리 배치된 하야테가 저모양이니 더 늦게 배치된 항공기들의 상황은 더 심각했을 것이다. 좀 다른 사례로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장해서 만들었으나, 개장 완료도 못 하고 단 한 척의 잠수함이 쏜 단 네 발의 어뢰를 맞고 격침당한 시나노가 있는데 이건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 야마토급 전함의 함체를 가지고 있었던[37] 만큼 정상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렇게 어이없게 격침되면 안되는 물건인데 말이다.
그러나 부실공사의 희생양이 시나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 가토급 잠수함 7번함 SS-218 알바코어가 쏜 '''어뢰 단 한 방 맞고 항공유 공급 배관이 망가져 기화해서 퍼져나온 항공유에 튄 기관의 스파크 한 방으로''' 폭침당한 다이호도 그런 예 중 하나다.[38]
항공기, 군함만 주야장천 나와서 육상 무기에 대한 의문점도 생길수 있는데, 97식 전차로 모든 설명이 끝난다.
그나마 개인화기의 경우는 사정이 양호해서 아리사카 소총의 경우 위력이 좀 떨어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괜찮은 물건이기는 했다. 수작업(?)으로 만들었던 문제도 38식에서 99식으로 넘어가면서 해결되었고 그 이외에도 총 자체는 괜찮았다. 문제는 일본의 역량 부족으로 생산량이 수요를 못 따라갔고 전쟁 말기에는 신뢰성까지 떨어졌다는 거지만.[39] 권총의 경우 자살 권총이란 오명이 붙은 권총까지 존재하는 등 이쪽도 그나마 상황이 낫다는 거지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아래의 '''대공포''' 문단에도 나오지만, 대공 화력의 경우 이 신뢰도 문제는 일부의 독일산 수입 장비를 사용한 대공포를 제외하면 정말 극악을 달리고 있었다. 빠르게 연사해서 적 항공기를 두들겨야 하는 대공포가 연사 속도에도 제한이 걸려서 일정 속도 이상으로 연사하면 포신이 망가진다든지 하는 문제들이 대표적인데, 이렇게 된 원인이 알고 보면 일본군 특유의 구세대적 사상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당장 연합군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 때도 독일에 비하면 거의 손을 놓은거나 마찬가지였을 정도니...
일례로 연합군이 독일을 폭격한 건 도시 하나를 거의 가루로 만들다시피 해버린 드레스덴 폭격도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불렸을 정도로 독일군의 저항도 꽤나 심했던데 반해 일본군의 경우 주력이던 부대들은 거의 대부분이 동남 아시아, 만주 일대에 있었고 정작 본토에는 신주불멸 운운하며 제대로 된 대책이 없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아래에도 나올 레이더 문제와 겹쳐서 야간 방공대책도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말 다 했다.[40]

2.5. 원인




2.5.1. 일본군 육군의 경우




2.5.2. 일본 해군의 경우





2.5.3. 양쪽 모두



2.5.3.1. 자살특공

일본군은 엘랑 비탈 같은 정신주의 교리에 너무 집착해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면서 무작정 돌격하기 같은 전술 같지도 않은 전술[41]로 수많은 병사들을 기관총 앞의 제물로 내다버렸을 뿐 아니라, 미군의 셔먼에 대항하기 위해 대전차총검술이라고 불리는 자살 특공 전법(?)을 선보였다.''' 대전차 총검술에 비해서는 효과적인 대전차 공격술로 자돌폭뢰라는게 있었는데 대전차총검술은 적어도 성공한다면 살아돌아올 가능성이라도[42] 있지만 자돌폭뢰는 성공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는 자폭공격이었다. 그리고 Ki-115 츠루기는 해군과 같이 개발한(!) 자살특공 전용 비행기였다.[43]게다가 기존의 폭격기나 전투기의 무장과 장갑을 제거하여 기체를 가볍게 한 후 고고도까지 상승해서 대기했다가 적의 폭격기를 발견시 하강하여 때려박는 방식(...)인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까지 운용하였고 심지어는 기존의 가미카제로는 위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으로 성형작약탄을 대형화시켜서 만든 '사쿠라탄'을 탑재한 4식 중 폭격기를 개발하여 배치하였던 적도 있었다.역시나 이 것 역시 행방불명이나 전과 미확인 등 성과 없이 실패(...)
해군이라고 다를 바가 없어서 카미카제 같은 비효율적인 전술을 정규 전술로 채택한 것도 모자라[44] 조종사를 1회용으로 소모해버리는 MXY-7 오카, Ki-115 츠루기[45] 같은 비행기는 물론이고 사람이 직접 탄 상태로 배에 들이박아서 공격하는 어뢰인 가이텐, 일본군 육군이 만든 대전차무기인 자돌폭뢰의 대함버전인 후쿠류, 가이텐의 발전형인 카이류, 대함 자폭 보트인 신요 같이 바다와 하늘을 가리지 않고 만들었다.
더불어 이때 개발된 자살병기들은 자살공격이라는 반인륜적인 문제점을 제외하더라도 기술적이나 설계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많았는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생각도 안할 물건이라 대부분 급조한 설계였고, 거기에 자살공격의 특성상 단기 급조 훈련으로 양성한 소수의 인원으로 다수의 능숙한 승조원이 탄 연합군 군함을 목표로 1격 필살이라는 상징에만 눈이 멀어 심각하게 큰 탄두를 장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결과 조종성따위는 엿바꿔먹어서 가뜩이나 숙련되지 못한 피해자들이 제대로 조종조차 할 수 없는 병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이 어처구니 없는 병기를 개발한다고 엄청난 시간과 예산 그리고 자원들을 쏟아처 부어버려서 정작 절실하게 필요했던 신병기들을 개발, 생산하는데 큰 차질을 주게 된다.

2.5.3.2. 야기-우다 안테나

야기-우다 안테나(Yagi-Uda Antenna)는 일본의 공학자인 우다 신타로(宇田新太郎:うだしんたろう,1896~1976)가 1926년에 개발했다. 야기는 지도교수였던 야기 히데츠구(八木秀次)에서 따온 것. 이 발명은 전기기술역사에 남게 되어 '''IEEE 이정표'''에 선정되었다. 논문은 공동명의로 발표되었지만, 특허 출원은 교수의 갑질로 야기 단독명의로 되었기 때문에 그냥 야기 안테나라고 불리기도 했다. 비록 야기 교수도 당대에 그다지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지만 관련 공적을 혼자 쓸어갔고 후에 야기 안테나라는 회사를 세웠다. 우다는 이런 일을 당하고도 의욕적으로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여 후에 카호쿠문화상을 수상하였다.
[image]
이렇게 생긴 물건이다. 방송 수신용 외부 안테나 중 UHF 수신 안테나가 딱 요렇게 생겼다.
이 안테나는 기존의 것보다 월등한 성능을 가진 지향식 안테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 독일 등에서 그 혁신적인 성능에 주목하여 육상 기지나 함선, 심지어 항공기에까지 레이더용 안테나로 대대적으로 도입하였으며, 현대에 TV 수신용 안테나로 쓰인다. 개발자가 일본인이니, 이쯤 되면 일본군도 이 안테나를 많이 써먹었을 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군은 이 안테나를 쓰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물건을 쓰지 않은 이유는 후술하지만 일본군이 "적을 앞에 두고 전파를 쏘는 것은 '''한밤에 불을 켜고 자기 위치를 알리는 꼴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일본의 관련 학계에서도 이 말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파벌 때문인지 보신 때문인지는 의문이다. 사실 전파 역탐지가 위험하다는 말이 일리는 있다. 문제는 레이더의 성능을 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거다. 거기에 상대방도 레이더를 쓰고 있으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상대방은 레이더로 다 보고 있는데 자기만 장님이 되는 셈이니...[46] '''그리고 전파 역탐지 문제가 가시화될 정도의 거리라면 그냥 레이더를 잠시 안 쓰면 된다는 아주 편리한 해결책이 있었다.'''
더 나아가 패시브 레이더란 물건도 있다. 즉, 전파를 발산하지 않고 수신만 하는 레이더[47]로서 1935년 로버트 왓슨이 개발/시연했었고, 실제로 2차대전중 영국, 프랑스, 소련, 독일 등등의 국가가 군사적으로 사용했었다. 전파발신이 문제가 된다면 수신만 하면 된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라디오 안테나만 보더라도 유사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 건 뒀다가 죽끓여 먹었나보다. 일본군이 이렇게 했다가 망한 게 바로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 해전. 다만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레이더를 역추적하는 장비를 이용해서 미 함대를 먼저 발견한 경우를 보면 일본도 이걸 알아내기는 알아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시점이면 이미 과달카날까지 털린 시점이라는거...
1942년, 일본군은 싱가포르를 점령한 후 영국군의 레이다 관련 서류를 입수하는데, 거기서 Yagi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Yagi라는 단어가 대체 무슨 뜻인지 고민하던 일본군은 결국 영국군 포로에게 질문했고, 그 포로는 '''"빙딱들아. 너희나라 사람이 만든 안테나잖어. 영국 출신인 나도 안다."'''라고 가르쳐주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보물을 내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아 뒤늦게 개발에 착수하지만 그동안 연합군은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 해전에서 연합함대를 죄다 털어먹어버렸고 결국 대전 말기에 13호 전탐에나 겨우 도입하였으며 그 전까지는 전부 위의 일본군 해군 문서의 전함 항목에 있는 파고다 마스트의 원흉이기도 한 다이폴안테나를 사용했다. 한편, 미국은 원자폭탄 투하에도 관련 기술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야기 우다 안테나의 발명자인 우다 신타로는 이 일로 전쟁 중은 물론 전후에도 암묵적으로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48] 그래놓고 1975년 죽기 1년전에서야 일본 정부는 신타로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했는데 그는 굉장히 불쾌한 얼굴을 하며 상을 받았다. 그리고 인터뷰에서도 좋은 것을 만들어줬더니 나를 무시하고 매국노 취급하던 나라에서 내가 죽어가니까 훈장이나 주니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냐며 차갑게 대꾸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혁신적인 병기인 레이더와, 그 병기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늘려줄 수 있는 야기-우다 안테나를 무시한 행위는 결국 일본군 전체에 엄청난 손실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2.5.3.3. 레이더 개발 금지

원래 일본 제국이 전자분야를 처음부터 등한시 한 것은 아니었다. 1909년에는 광석검파기를 개발했고 1916년에는 진공관을 개발 및 양산하는 수준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전은 '''1936년에 일본 내 모든 전파기기의 연구 및 개발이 금지'''되면서 멈췄다.[49] 이 따위 명령이 내려온 이유는 단파라디오로 일본 국민들이 외국의 방송을 듣고 불온세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50]. 게다가 명령이 유지된 기간도 의외로 길어서 1941년 8월에 가서야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전파 탐신기술의 개발 재착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구가 금지된 기간에도 몇 번씩이나 사태를 수습할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황소고집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1938년에는 영국이 신형 전파탐지기를 개발했고 실전 배치단계에 도달했다는 첩보를 일본 제국이 입수한 후 관련학계의 연구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나온 결론은 일본도 개발해서 군에 채용하자는 것으로,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일본 육군 병기국에서 돌아온 답변은 "적을 앞에 두고 전파를 쏘는 것은 한밤중에 불을 켜고 자기 위치를 알리는 꼴이므로 아무런 이점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일본 육군만 바보가 되지만, 1940년의 일본 해군 군령부는 정찰하기 위한 장비가 스스로 전파를 발신하는 것은 기습이 생명인 해상작전에서 위치를 드러내는 꼴이 되므로 그런 장비는 필요가 없다라는 이유로 고성능 레이더 개발에 필수적인 SHF 전파의 연구 개발마저 취소시켰다.[51][52]
이러다가 앞서 언급한 영국 본토 항공전의 정보를 입수한 후에야 다시 레이더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일본의 높으신 분들은 일본화한 인종론에 입각해서 서양인들의 푸른 눈은 야간에는 맹인이므로 야간전에는 일본군의 훌륭한 견시로 대처가 가능하며, 레이더 같은 것이 있더라도 서양인이 우월해질 수 없다는 이론을 신봉했다.[53] 그리고 레이더 개발도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육군과 해군이 따로 개발에 돌입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도 않는 등의 뻘짓을 벌었다.
덕분에 일본군의 레이더는 등장도 늦었고 성능도 열악했다. 우선 일본군이 개발한 레이더 중 2,000대쯤 양산되어 함선 대부분에 쓰인 물건이 22형 전탐기다.[54]
[image]
[image]
이것이 문제의 22형 전탐기
Type 22 수상레이더의 화면[55]
[image]
[image]
SG레이더의 모습
[image]
[image]
SG레이더의 화면[56]
SG레이더의 화면부 및 조절부위
이렇게 된 이유도 참 한심한데, 상기의 야기-우다 안테나를 거부한 것 외에도 수신기의 문제가 심각했다. 이 문제는 1944년 7월에 광석검파기를 이용한 신형 슈퍼헤테로다인 수신장치가 제작되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개발에 관련된 관계자가 광석검파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제작도 가능했으나 충분히 실험하지 않은 채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도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광석검파기는 열에 약하고 불안정하다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에 회로가 간단한 오토다인 방식을 고집한 것이 수신기의 성능이 열악했던 주된 이유로 밝혀졌다.
게다가 당시에 광석검파기를 실험했던 것도 해당 기술연구소의 연구원이 아니고 당시 학도 동원을 위해 기술연구소에 와 있던 도쿄대학 이학부 대학원생인 시모다 코이치와 이화학연구소의 기쿠치 세이시 박사 등 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발 책임자란 인간이 실험도 안 해보고 이미 가지고 있고 적용 가능하며 양산도 가능한 수준의 기술을 제멋대로 쓰레기 처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22형 전파탐신기의 실용화가 지연되었던 것은 단순한 기술력 부재만으로는 말할 수 없는 관료적인 구조 요인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image]
[image]
[image]
야마토급 전함에 붙어있는 21형 전탐기 (Type 21 General Purpose Radar)[57]
후에 야기 우다 안테나를 도입한 13호 대공경계전탐이 개발되었는데, 소형화/경량화에 성공하여 110kg의 무게로 월등히 좋은 성능을 보이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기존의 전탐들을 폐기하고 대량으로 생산하여 거의 모든 함선에 13호 전탐을 장비시켰지만 이미 해는 1944년 중기였다. 이 성능 차가 어느 정도냐면 기존 전탐들이 100km 거리에서 항공기 편대, 2~30km 내에 있는 전함이나 감지해 낼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에 반해 항공기 편대를 최대 300km 밖에서 탐지 가능했으며, 이는 13호 전탐의 예상 스펙의 3배, 표시눈금 한계인 150km의 2배에 달하는 탐지능력이었다.
그러나 13호 대공경계전탐은 말 그대로 탐지거리만 늘었지 방향이나 거리 측정능력은 기존의 일본군 레이더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그래서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는 기존의 레이더도 같이 달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레이더들의 위치를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면 오요도처럼 전파 간섭이 발생해서 안그래도 떨어지는 성능이 먹통 수준이 된다. 여기에 더해서 레이더 화면도 미국의 SG레이더의 PPI 스코프와 같은 것을 끝까지 개발하지 못했으므로 측정은 앞서 언급한 22호 레이더의 파형화면을 보면서 레이더 경계요원이 알아서 해야 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는 레이더 관제사격이나 레이더 연동 대공사격같은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58]
덕분에 일본의 레이더는 성능도 조악한 것이 생산도 힘들었고, 문제점을 어느 정도 수정한 후에 개량할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그 결과 말이 레이더지 실제로는 적군의 레이더 전파를 포착해서 경고해주는 전파탐지기에 가까운 물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후 일본해군의 레이더들은 포경선에 장착됐는데 이러한 포경선에 탔던 영국군 장교가 22호 레이더를 비난하며 이러한 레이더 때문에 일본군이 졌다고 할 정도.
그리고 운용법도 망했다. 필리핀 해 해전 직전에 타위타위에 집결한 일본군 함대는 자체적으로 레이더 사용을 금지했다. 이유는 레이더 전파를 역추적한 미 해군이 일본군 함대를 찾아낸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미 한참 전에 미군은 잠수함과 레이더, 항공기를 통해 일본군 함대를 찾아낸지 오래였고, 레이더를 안 키면 미국의 공습을 일본군이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59] 결국 이 문제를 끄집어낸 장교 덕분에 일본군은 레이더를 다시 가동했다.
여기에 더해서 필리핀 해 해전 직전에 항공모함용 함재기에 일본군이 개발한 프로토타입 항공기용 레이더를 장착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공습에 투입하기 전에 공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간신히 달아놓은 레이더를 철거하고 대신 어뢰를 탑재한다. 비록 일본군의 레이더가 성능이 좋지는 않았겠지만 어뢰 1발 단 함재기 몇 대가 늘어나는 정도의 공격력 강화보다는 미리 고공에 매복한 적 전투기를 탐지하거나 미국 함대의 위치를 탐지하는 이득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이런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출격한 비행기들은 다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에서 그루먼 철공소산 지옥고양이들의 밥으로 전락한다.

2.5.3.4. 통신 문제


2.5.3.4.1. 무전기는 먹통입니다

위의 레이더 항목에 있듯이 전파에 대한 연구를 금지시킴으로 나오게 된 일본군의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통신장비의 허술함이다. 운용 능력, 방호력, 공격력부터 개판인 제로센, 치하, 야마토 등 일본군 무기들의 안습함을 더 증폭시킨 원인 중 하나가 아군끼리의 연계가 안된다는 것인데, 이 원인이 통신이 안된다는 점 에서 비롯되었다. 군대에서는 고대로부터 깃발을 사용한다든지, 북을 치는 등 다수의 부대 간/병사들 간의 유기적인 팀워크를 위해 갖가지 통신수단이 강구되어왔다. 다양한 전술행동이나 진법/진형을 위해서도 통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대전에서 그것도 공중전에서 통신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건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통신이 안되기에 할수 없이 나온 게 항공기들의 수신호[60], 군함들과 전차들의 발광신호[61], 연막신호 같은 것들이지만[62], 이걸로는 전투 중에 제대로 써먹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제로센 문서에 '''무전기''' 항목이 따로 있겠는가.
이건 전투 외의 상황에서도 큰 문제가 되었는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소류의 정찰기는 미 항공모함들을 발견했는데도 '''무전기가 고장나서 보고하지 못했다.''' 그 뿐 아니라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오보 때문에''' 오자와의 항모 부대를 미끼로 던지면서까지 감행한 승부수도 무의미하게 되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구리다 턴.'''[63]
이 통신 문제는 1945년 무렵에서야 어느 정도 해결되며, 343 해군항공대의 경우 개선된 통신장비에 힘입어 1:1.5라는 교환비를 연출하기도 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저 무렵의 일본은 일본어가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되든지, 항복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거지만...

2.5.3.4.2. 암호는 장식입니다

통신의 보안에도 투자가 게을러터져서 암호를 써서 통신을 하면서도 식수를 떡밥으로 던진 미군의 낚시에 역으로 걸린다든지, 해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일본군의 암호는 미군에게 쉽게 해독되었고, 미군의 암호는 일본군이 절대로 해독할 수 없었기에 그 차이는 더 벌어졌다. 오죽하면 일본군의 문제점을 다룬 문서에 '''숭숭 뚫리는 암호'''라는 항목이 따로 있겠는가.
사실 이건 연합군이 암호 해독을 너무 잘 한 것도 있기는 하다.[64] 동맹국인 독일의 암호도 영국 본토 항공전무렵에 이미 줄줄 새고 있었고 그나마 크릭스마리네의 암호가 좀 더 오래 버티면서 영국을 위협했을 뿐이다. 독일은 암호가 뚫린 것을 알고 더 이상 뚫리지 않게 막으려는 노력이라도 했다.[65] 일본도 아예 손을 놓은건 아닌지 난수표를 바꾸는등의 어느정도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결국은 다 뚫려버렸다.[66]

2.5.3.5. 대공포

[image]
[image]
[image]
96식 2연장 대공포 (九六式二十五粍高角機銃, Type 96 25 mm AT/AA Gun)
쇼카쿠에 장착된 대공포
이 역시 문제가 많아서 존재감 Zero였다. 이것도 알고 보면 위의 레이다 부분에 있는 대로 구세대적 사상이 원인을 제공한 거지만..
전쟁 초반기 대공포의 일부는 고각이 제한되는 등의 심각한 문제점은 둘째치고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카탈로그에서 나오는 발사속도보다 실제 발사속도가 극단적으로 감소하는 막장상황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나마 전쟁 초반의 물건들은 제대로 된 공작기계로 생산했으므로 신뢰성까지 낮지는 않았지만, 전쟁 후기에 생산된 대공포는 위에 언급된 문제점을 별로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가는데다가 수량도 매우 적고 신뢰성까지 낮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본의 대공포 대부분이 기계화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3식 5인치 대공포는 이런 일본군 대공포의 문제점을 모두 보여주는 물건으로, 부앙각 조정 속도와 발사속도가 모두 느린 물건이었다. [67] 게다가 자동장전장치는 커녕 장전보조장치조차 존재하지 않아서 순수하게 인력으로 장전해야만 하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포 구경이 5인치쯤 되면 체격이 작은당시 일본인 수병의 체격조건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난다. 3식 대공포의 탄 무게가 23~28kg 정도 되는데 이걸 수직으로 장전한다고 생각해보자. 결국 장전을 위해서는 포를 5°~10°로 내려서 장전해야만 했다. 거기다 앞에서 이야기한 느린 부앙각 조절과 시너지효과를 일으켜서 실제 발사속도는 본래 사격속도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것은 이 부앙각 조절이 인력으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아래에도 언급될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 이 대공포탄을 손으로 장전하는 수병들의 모습이 잘 나와 있다. 극 중에서는 나이 어린 대공포 조작원이 그 무게를 못 이기고 훈련 중에 포탄을 포좌에서 떨어뜨리고 만다. 영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대공포를 사용하려면 약 5명이 필요했다. 포탄 발사 시 반동으로 탄약통이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한 명씩 달라붙어 몸으로 고정시키는 데에 3명, 나머지 2명이 각도 조절과 발사를 담당하는 식으로 밀집하기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졌다. 여기에 방어 시설은 모래 주머니로 주변을 에워싸는 것 외에는 변변한 것 없이 그냥 노출되어 있어 적기의 기총사격에 무력화되기가 대단히 쉬웠다. 이 때문에 기관총으로 주변을 향해 쏴도 단체로 죽어가는 광경이 펼쳐질 정도로 그만큼 이 대공포의 성능은 그만큼 최악이다. 관련 영상, 4분 43초부터
그나마 89식 대공포는 이런 문제들이 어느정도 완화돼서 장전기도 있었고 장전한다고 포신을 내리는 짓거리도 할 필요가 없어지기는 했다. 발사속도도 분당 5~10발 수준이던 3식과 비교하면 분당 14발로 상당히 개선된 모습을 보이며 상승률은 미국의 5인치 38 구경장 양용포와 비슷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68] 다만 비교적 느린 탄속과[69] 그로 인해서 구경에 비해서 포탄의 상승한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어서 한참 작은 구경의 8,8cm FlaK와 비슷한 상승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 이외의 요소에서는 국제적인 수준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는 대공포를 만들어내기는 했다.[70] 문제는 일본은 이런 대공포를 1932년에 개발해놓고도 대수상화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구축함과 같은 보조함에는 대공화기로는 의미가 없는 3식을 계속 채택했다는 점과[71] 종전까지도 성능의 향상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결함을 보완하고자 대량의 대공포를 탑재하긴 했지만, 미군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데다가 전함의 경우 밀폐식 선회포탑형 대공포보다 비장갑, 오픈탑 구조를 이룬 노천식 대공포가 많았고 서로 혼재해 있었기 때문에,[72]갑판에 적 전투기가 기관총질만 해줘도 피바다가 펼쳐졌다.[73] 그래도 대공화력을 무시한건 아니라서 전함과 항공모함에는 89식 대공포를 달아주기는 했지만 미군 함정들에 설치된 숫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74] 위력, 포신부양속도, 포탑회전속도 등은 막 배치된 시점에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전 말까지도 그 성능에서 발전이 없었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빨라지는 항공기들에 대해 대응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미군 전투기들은 기관총질만 하는 게 섭섭했는지 로켓탄까지 달고 와서 마구 쏴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저층방공망을 담당하는 20mm급 기관포조차 대부분은 연합군의 장비와 비교해서 훨씬 열악했다는 것이다. 96식 25mm 고각기총에 탄띠방식 급탄이 아닌 15발 탄창 방식 급탄을 한다던가[75], 총신이나 총몸체 가공능력 부족으로 발사속도에 제한이 가해진다던가... 그나마 탄약의 위력은 상대적으로 대구경인 25mm라 준수했지만 다른 문제점이 많은데다가 연합군처럼 중거리 대공화망을 형성해줘야할 40mm급 화기가 없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데는 한계가 컸다. 물론 일본도 이 문제를 알아서 어떻게든 40mm 보포스를 복제하려고 했으나 종전까지도 제대로 복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96식 25mm 고각기총의 문제는 포 자체보다 효율적인 사격지휘장치가 없었다는 점 이고, 오히려 이게 더 큰 문제로 꼽힌다. 96식 25mm 고각기총도 그럭저럭 쓸만한 수준의 성능은 되었다. 독일의 주력 함상 대공기관포인 2cm C/30이나 이탈리아의 브레다 20/65도 이 대공포와 거의 비슷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탈리아는 브레다 37/54라는 37mm 대공기관포도 같이 썼기 때문에 사정이 조금 나았다 미군 역시 96식 25mm 고각기총이 자국의 오리콘 20mm보다 한 발의 위력은 더 강해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기는 했고. 적어도 37mm 단발포와 13.2mm 기관총을 대공무장으로 사용한 프랑스 해군보다는 그나마 일본이 사정이 나았다고 볼 수도 있다.
96식 25mm 고각기총은 탄창멈치가 없어서 탄창이 빠지기 쉽다는 문제도 있는데 이건 원본인 호치키스 25mm 기관포에 탄창멈치가 없고 탄창의 무게로 탄창이 빠지는것을 방지하는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일단 탄창이 심심하면 빠지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미군에서 테스트 한 결과가 고각 사격시 탄창이 빠질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덕분에 탄창탈락방지+신속한 재장전을 위해서 대공포원들이 탄창을 잡고 사격을 했는데 일본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 보면, '''대공포 사격시 병사들이 탄창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육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능의 열악함은 둘째로 치더라도 까고 싶어도 수량 자체가 크게 모자라서 깔 게 없다는 안습함을 자랑한다. 오죽하면 산악용 야포인 94식 산포까지 총동원해서 대공사격을 했겠는가? 만약 일본군에 제대로 된 대공포가 많이 있었다면 대공포로 전차를 사격하지 전차 하나 잡자고 대전차총검술을 하거나 자살돌격을 하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 본토에서 고고도 요격을 담당하는 대구경 대공포도 성능이 형편없었다. 대공포탄이 B-29가 있는 고도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뚝 떨어진다. 답이 없다. 그나마 도쿄 대공습 당시에는 미군의 B-29들이 '''한밤중에''' 낮은 고도에서 폭격했기에 조금 나았지만 역시나 역부족이었다.[76] 그나마 독일제 부품을 사용한 5식 15cm 대공포처럼 B-29 4대를 격추하며 활약한 것들도 있지만, 그 수가 고작 2문이었다.

2.5.3.6. 부실한 군수지원

보급을 경시한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당장 손자병법에서도 전쟁 시 1순위로 언급하는 게 보급이다. 물론 해군과 육군 둘 다 보급에 대한 개념이 없는건 아니어서 최소한 군인이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았고 능력이 되는 범위 안에서는 안굶기려고 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 능력을 기르는데 소홀했고 그 결과 계획대로 보급을 해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론 일본군도 보급을 하려 노력하기는 했는데, 예외도 있기는 있었다. 바로 전설의 임팔 작전.

2.5.3.6.1. 자원 부족

일본군은 기본적으로 자원이 없었고, 동남아시아를 침략한 후에야 그럭저럭 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양은 연합군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고, 그나마도 육군과 해군에게 유전을 각각 배당해줘야 했다. 문제는 해군쪽에 배당된 유전은 정유시설이 박살난 터라 기름을 퍼내지 못한다는 점(...) 육군의 정유시설을 빌리면 되겠지만 일본군에는 그런 협조정신이 없었다. 오죽하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에 '보급체계 분리'라는 항목이 따로 있겠는가.

2.5.3.6.2. 운송 불가

없는 자원을 긁어모았다면 그걸로 무기와 부품과 연료 등을 만들어서 사용처에 전달해야 하는데, 일본군의 수송체계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 해군의 경우, 식량을 수송하는 급양함마미야, 이라코, 2척 밖에 없었다. 2척으로 태평양 전체의 해군기지에 보급을 해주려니 급양함들은 정비와 수리를 할 때만 빼고 계속 돌아다녀야 했다. 유조선을 비롯한 다른 수송선도 언제나 모자랐기에, 일본군의 보급은 언제나 모자랐다. .
더욱 큰 문제는 호위체계가 형편없다는 점이다. 태평양에는 일본군 수송선을 호시탐탐 노리는 미군 잠수함들이 득시글거리는데[77], 수송선을 지켜야 할 호위함들의 성능과 수량이 수준미달이니 시도 때도 없이 털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원을 긁어모아도 사용처에 전달이 안 되는데 어떻게 전쟁을 한단 말인가?
일본 육군도 다를 바가 없다. 당장 트럭부터가 거지 같은데 어떻게 제대로 된 지원세력을 갖춘단 말인가. 일본군 육군의 지원세력이 얼마나 처참한지는 임팔 작전 항목 참고.[79]

2.5.3.6.3. 사용 불가

어떻게든 자원을 사용처에 운반했다면 닦고 조이고 기름쳐서 유용하게 써야 하는데, 일본군은 그것도 잘하지 못했다.
일본군 해군에는 훌륭한 공작함 아카시가 있었다.[80] 이 배는 '''연합함대의 '평시' 연간공수의 40%를 단함으로 시행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많은 활약을 했다. 무장은 매우 빈약하지만, 공작함에 중요한 건 수리 능력이지 화력이 아니니까 매우 쓸만 했다.
그런데 이 배는 '''한 척이다.''' 일본 연합함대의 규모로 보아 공작함 6척은 있어야 하는데 한 척이다. 이래서는 그 많은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고, 아카시가 격침되면 일본 해군은 망했어요. 대양해군에서 공작함이나 수송함 같은 지원함 세력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인데, 지원세력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점은 일본 해군의 큰 실수였다. 물론 일본군이라고 보급을 아주 경시한건 아니지만 해군의 경우 그놈의 함대결전사상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81]
그리고 아카시가 연합함대의 연간 공수비율이 40%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도 걸러들어야 한다. 왜냐? '''전시가 아닌 평시'''다. 즉 전시에는 아카시 한 척으로 공수 요구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나온다.
사실 공작함은 아카시 이후 한척 더 나오긴 한다. 아사히#s-5.1라고.. 그런데 이 아사히의 경우 문제가 많아서 제대로 쓰지도 못했다.[82] 게다가 아카시는 만들 때부터 공작함으로 만든 배지만 아사히는 원래 1차 세계대전도 터지기 전인 1900년에 진수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다.[83] 게다가 그마저도 함종이 한 번 바뀐 것도 아니고 세 번 바뀌어서 공작함이 된 거다.[84] 그 아사히 이후로는 연습항공모함 호쇼와 중뇌장순양함 키타카미를 공작함으로 개장해서 써먹으려고도 했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일본에 제대로 된 공작기계가 없어서 하나마나. 결국 둘 다 종전 후 수송선 역할만 하다가 끝났다.
트럭이나 공작함 같은 군수지원도 엄연히 무기인데 전투장비에만 집중한 나머지 보급에 대해서는 소홀해졌고 이는 일본군에게 매우 큰 문제가 되었다. '''"초보자는 전술을 연구하지만, 숙련자는 보급을 연구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3. 전쟁 이후


위에 적은 주옥같은 문제점은 일본군이 미군에게 박살나는데 크게 기여했고, 전후에 일본군은 해체되었으며 자위대가 창설된다.[85] 그러나 위에 적은 문제점은 대부분 그대로 계승되었다. 자세한 것은 자위대/문제점 항목을 참고하자.
전후 살아남은 무기들은 대부분 폐기처분되나, 일본 국외에서는 이거라도 아쉬워서 주워다 쓰곤 했다. 개인화기나 전차는 물론 야포와 전투기까지.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프랑스 식민제국, 북한과 한국 등등. 어쨌건 한 열강의 제식무기들이었던 만큼, 일부는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향해 불을 뿜는 등 유용하게 쓰였다.
대발동정처럼 민/군을 안 가리고 그럭저럭 유용한 물자는 민간인들도 득템해 유용히 썼다.
함선을 포함한 몇몇 물자는 승전국이 배상 등의 명목으로 뜯어가 소모되었다.
다만 한국은 미군이 한반도에 오자마자 조병창[86]과 무기들을 죄다 폐기처분해버리는 통에 별 재미는 못봤다. 약간의 개인화기나 만들다 만 경비정 정도. 대신 신생 국군은 곧바로 훨씬 나은 미제 무기를 들게 된다.

4. 대중문화에서의 일본군의 무기체계



4.1. 애니메이션과 소설


가공전기 등에서는 비교적 멀쩡한 무기로 등장한다. 그러나 주로 등장하는 건 야마토급 전함이나 A6M처럼 이름이 많이 팔렸거나, 치누처럼 스펙'''만''' 좋아보이는 병기들이고, 97식 전차처럼 답이 없는 물건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경우가 많다.
고증을 철저하게 한 경우에는 야라레메카 본래의 모습을 충실히 보여준다. 한 예로 걸즈 & 판처에서 89식 중전차의 화력과 장갑 고증을 충실하게 했더니 픽션적 허용으로 보정까지 붙여줬는데도 상대팀 전차를 한 대도 못 잡는다. OVA '이것이 진짜 안치오 전입니다!' 에서는 탱켓인 CV33 5대를 격파하는 대활약을 펼치지만, 중형 전차가 탱켓을 잡는 건 당연한 일이다.당연히 일본군이나 딴나라 기준에서 봤을때 탱켓이고 이탈리아군은 경전차로 분류했다(...) 이 정도 가면 이탈리아군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갈것이다.
재난영화인 '남자들의 야마토'에서는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털리는 전함 야마토의 비참한 성능을 보여준다. 96식 25mm 고각기총의 탄창을 손으로 누르고 사격하던 일본군 대공포반원들이 미군의 공격으로 쓸려나간다.

4.2. 게임


사실대로 고증하면 밸런스 붕괴가 일어날 것이기에, 고증을 무시하고 일본군 무기의 성능과 수량을 대폭 상향시킨다.
온라인게임 월드 오브 탱크를 보면 일본군 6티어 중전차 O-I는 가공할 만한 화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것은 이것 역시 프로토타입이며 양산형은 단 한 대도 생산되지 못했다.[87]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프로토타입이 양산형보다 강하다는 것이나 특정 인물,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든 전용기, 에너지나 내구도등을 희생한 강력한 결전 병기 같은 효율성이 꽝인 로망뿐인 병기들을 일본의 대중문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저런 로망을 위해 만든 것도 일기당천의 위력은 커녕 기본적인 위력조차 안나오는게 태반이었다는 것이지만.
월드 오브 워플레인 역시 고증에 충실한 편이다. 제로센 트리 한정이지만 선회력은 최강인데 고도성능과 엔진성능따윈 개나 줘버린 지 오래고 유리몸에 불까지 잘붙는다는 점까지 넣어놨다... 이는 신덴도 마찬가지.
월드 오브 워쉽에도 일본 함정들이 등장하는데, 오히려 동급 미국 함정을 압도하는 성능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된 이유는 월드 오브 워쉽의 전장이 통상적인 포격전보다 좁은 범위에서 수뢰전 위주로 전투가 벌어지는, 일본 해군이 정확히 원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88] 또한 게임이라는 특성상 보급이나 수리 등 군수지원의 필요성도 전혀 없다. 반면 미국 함정들의 강력한 대공화력, 레이더를 통한 탐지능력과 포격능력 등은 게임 내에 반영되지 않거나 반영되더라도 쓸 데가 없는 경우가 많다. 다만 레이더는 소모품이긴 하지만 연막 등의 은폐된 적함을 찾는 데는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최근 미함정들은 죄다 버프 먹은데 반해 일함정들은 그대로여서 오히려 미국이 더 빛나는 상황이 많은 추세이다
워 썬더에서도 등장한다.
워썬더 일본군은 버프를 많이 먹어 초반에는 선회전으로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나 후반에 갈수록 프로토타입이나 소수만 생산되고 만 녀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며 그마저도 뭔가 하나씩 문제가 있는경우가 많다.

5. 일본군의 사용무기


일본군/무기 문서 참고.

6. 관련문서



[1] 그나마도 개발부터 실전 배치까지를 한 번에 성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2] 붐 앤 줌이라는 기동 특성상 상대보다 높은 고도를 확보해야 하는데 당시 소련은 과급기 관련 기술이 형편없어서 4,000m이상 올라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소련 공군 입장에선 독일 공군에게 고도 우위를 확보할 수 없으니 선회전을 하는 게 그나마 가망이 있었던 것. 거기에다가 당시 소련에선 전투기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가 지상군 지원이었다. 때문에 소련 전투기는 추축국의 지상 공격기를 격추하기 위해 저공에서 활동했다. 그 전에 소련 공군의 항공기들은 금속 기술 문제로 목재 동체를 가진 항공기도 있었다.[3] 동체 관련 기술도 그렇지만 특히 '''고고도에서 출력 유지''' 같은 엔진 관련 기술.[4] 다만 미군의 경우는 어느 정도 변명거리가 있다. 애초에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공습만 아니었으면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이 최소 1년은 늦춰졌을 것이다. 이전에 미군이 갖고 있는 항공전 교리라 해봐야 별도로 연구한 '''중(重)폭격기를 이용한 전략 폭격'''을 제외하고는 복엽기가 난무하던 1차 대전기의 것들이기 때문에 참전 초기 미군의 교리는 일본군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무서운 건 이러고도 일 년만에 신뢰성 최상의 전투기들을 왕창 만들어 항공전력을 압살해버렸다는 것...[5] 미군에게는 제로센을 사냥하기 위한 선택지가 붐 앤 줌 외에 하나 더 있었다. 제로센에게 꼬리를 잡혔을 때 '''동료기와 통신을 하면서''' 꽈배기 꼬듯 선회비행을 하는 동안 역으로 제로센의 꼬리를 노리는 타치 위브가 그것. 제로센은 무전기가 장식이라 불가능한 일이었다.[6] Ki-84 하야테, N1K-J 시덴[7] 이건 기체보다는 엔진의 문제가 심했는데, 이는 기술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공업능력의 부족으로 일정한 품질을 가진 물건으로 대량으로 양산해내지를 못한 게 문제였다. 쉽게 요약하면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쓸만한 품질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 게다가 수리나 보수, 정비를 맡아야 할 숙련공을 공장이 아닌 알보병으로 갈아넣어서 전선의 총알받이로 내몰아버리는 통에 정비 문제도 심각했으니... 일단 고출력 엔진 자체는 1941년에는 제법 개발이 진행되어서 실제 가동까지 한 상태였다.참조. [8] 사실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 같은 자해에만 목맬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정신주의 교리와 이거다.[9] 이게 97식 전차야라레메카로 불리는 근원적인 원인이다.[10] 셔먼에 장착된 75mm 주포는 수직으로 착탄시 1,500m에서 54~79mm를 관통하며 3,000m에서도 30mm를 관통할 수 있다. Bird, Lorrin Rexford; Livingston, Robert D. (2001). WWII Ballistics: Armor and Gunnery. Overmatch Press. pp. 62–63.[11] 물론 경사장갑이라 실제 방어력은 이것보다는 조금 떨어질 것이다.[12] 사실 대공포의 용도가 구경에 따라 다르지만 어찌 됐는 고고도에서 고속 비행하는 항공기를 격추하기 위해서는 일반 포보다는 정확하게 조준하여 포탄을 더 높이, 더 빠르게 발포할수 있어야한다. 통상적으로 이걸 달성하긴 위해선 포탄을 길이와 구경을 늘려 장약을 더 많이 넣고, 포신을 길게하면 된다. 근데 물리법칙(힘=질량×가속도)을 생각하면 당연히 전차에게도 먹어준다. 나치 독일의 8,8cm FlaK가 대표적인 예. 원래 대공포였지만, 6호 전차 티거의 주포로도 장착되는등 대전차포로 더 유용하게 쓰였다. 그리고 연합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T-34/85와 76mm 셔먼, 퍼싱의 주포도 대공포가 기반이 된 물건이다.[13] 실은 이 F4F 와일드캣F6F 헬캣은 당대 기준으로 가장 기체 강도가 튼튼한 전투기로 분류된다. F6F 헬캣같은 계열 엔진을 쓰는 F4U에 비해서는 조금(?) 허약하긴 하므로 예외로 두더라도 F4F 와일드캣은 그 시대 가장 튼튼한 전투기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영국군도 이 전투기에 대해 튼튼한 전투기라고 평가를 했을 정도.[14] 사실 당시 괜찮은 20mm 기관포를 운용한 나라가 독일과 영국 정도였다. 소련제 기관포도 위력이 부족했고 미국의 경우도 라이선스 생산한 물건들이 묘하게 원판보다 떨어지는 신뢰성을 보인다거나 복제에 실패했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다. 미국의 입장에선 변명할 거리도 있었다. 미국이 이상하게 기관포에서 삽질을 한 건 그놈의 단위계의 영향이 컸기 때문. 거기에 미국은 기존에 사용하던 12.7mm 기관총 6~8정을 다는 것으로 충분히 때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15] 이건 어뢰발사관에 맞아 유폭되어서 그렇다. 분명 놀라운 전과이고 어뢰발사관이 제대로 방어되지 않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일반화할 수 있는 전과는 아니다. 문제는 저렇게 한 포가 원래 대공포로 쓰던 포라는 거. 그러나 초카이의 잔해를 확인한 결과 공고급의 함포 오사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16] 함수가 잘린 후부키급 구축함, 함교가 박살난 무츠키급 구축함, 비행갑판이 박살난 항공모함 호쇼 등. 다만 저 경우는 함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저런 상황에서 훈련을 강행한 지휘부의 잘못이 크다. 저 상황이라면 일본군이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의 해군함정이라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만큼 악천후였다. 일례로 미군도 태풍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코브라(태풍) 문서를 보자.[17] 다만 군함간의 포격전의 경우 어뢰발사관을 '노려서' 맞추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아무 대책도 없이 둔 게 잘한 건 당연히 아니다. 노려서 쏘는 게 아니라고 어뢰 발사관에 안맞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실제 사례까지도 존재하기 때문. 군함끼리의 포격전에서 어뢰발사관 때문에 당한 대표적인 사례가 타카오급 중순양함 초카이인데... 그 포격전의 상대가 하필 호위항공모함이었다. 꼭 포격전만 해당되는건 아니라 항공기의 공습으로 어뢰가 유폭된 사례도 있다. 그 예시로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는 어뢰를 버려서 살았고 동형함 미쿠마는 버리지 않아 유폭되어 격침되었던 일이 있다. 공습도 어뢰발사관을 핀포인트로 노리기는 어려우나 어뢰발사관이 있는 상갑판에 폭탄을 직접 꽂아버리는 급강하폭격은 어뢰의 유폭을 유발하기 딱 좋았다. 어쨌든 어뢰를 운용하는 일본군 자신들에게도 위험한 물건이었던 것은 분명하다.[18] 그래도 대구경 대공포에 한해서는 포방패라도 달아주기는 했다.[19] 참고로 이 기체는 일본군에서도 부르던 별명이 연합군과 비슷한데, 이 기체를 운용하던 일본군 해군에서 이 기체를 부르던 별명이 '''"1식 라이터"''' 모양이 담배를 닮았다고 해서 '''하마키(葉巻)''' 내지는 '''"불타는 낙엽"''' 이었다.[20] zeke-52. 게다가 저 테스트 기체는 비교적 후기모델인 52형이다. 심지어 격추당한 미군 폭격기 승무원이 M1911으로 제로센의 조종사를 맞춰 격추된 사례도 있다. 제로센의 캐노피는 권총탄도 방어 할 수 없었던 것.[21] J2M.[22] Clash of Wings: World War II in the Air [23] Torpedo: The Complete History of the World's Most Revolutionary Naval Weapon.[24] Ki-43 PDF, Ki-44 PDF Ki-61-I PDF, Ki-61-II PDF, Ki-84 PDF 해당 자료에서 히엔만 Fuel tanks, Self-sealing라고 되어있고 나머지는 Fuel tanks, Protected라고 표시되어있다. 그러나 하야테와# 하야부사는 자동 방루 탱크를 장착하고 있었으므로 쇼키의 Protected 또한 방루탱크를 이야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25] World War II: the Encyclopedia of the War Years, 1941-1945, International Warbirds: An Illustrated Guide to World Military Aircraft, 1914-2000.[26] 사실 소련도 제정 러시아 시절만 해도 공업 능력이 서구에 비해 50년 정도가 뒤떨어져 있었으나, 스탈린의 5개년 계획으로 순식간에 공업국으로 탈바꿈한다.[27] 이렇게 된 원인 역시, 당시 중일전쟁으로 인해 대륙이라 해봐야 중국 정도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주만 공습 직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앞으로 미국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말인 '''"미국과 강화 협상을 준비할 겁니다."'''도 이것을 대변해 준다. 문제는 미국이 강화협상이 아닌 대일선전포고를 시작으로, 대 추축국 선전포고를 때려버렸다는 거지만.[28] 이것에 박차를 가한 게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다.[29] 동맹국인 독일은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을 피했지만 미국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원래 독일의 계획대로라면 최소 1943년까지는 미국을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이 선빵을 안 날렸어도 결국은 미국과 독일이 전쟁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영국이 독일과의 싸움에 미국의 참전을 요구하고 있었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 선박도 공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 이것 때문에 전선에의 우선 투입 전력 구분에 혼선도 많이 생겼다. 이 혼선의 대표적인 사례가 과달카날 전투 초기 미군의 상황을 보면 나온다. 솔직히 일본 제국이 미국을 때린 이유부터가 어이없는데, 독일은 일본이 소련을 쳐서 극동 방면으로 소련이 (유럽 동부전선에서 자기들이 소련을 잡아주고 있으니) 양면 전쟁으로 버틸 수 없게 만들어서 자멸하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일본 제국이 소련을 한 번 건드렸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는지라, 그나마 석유를 핑계로 미국을 건드린 것. 게다가 이러한 일본의 계획(소련을 치지 않고 동남아나 미국을 친다)은 일본에 있는 소련 스파이에 의해 탐지되어 뒤가 털릴 걱정을 덜은 소련은 극동 전력의 대다수를 유럽전선으로 돌려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한다.[30]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에식스급 항공모함이다. 비단 항공모함만이 아니라 잠수함 잡으라고 만드는, 당시에는 카미카제 경고용의 레이더 피켓 함으로도 쓰였던 구축함의 경우 '''100척 넘게(!)''' 만든, 문자 그대로 찍어낸 구축함 함급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총 175척(!)이 뽑혀나온''' 플레처급 구축함.[31] 다른 항공모함도 있긴 했으나, 이미 함재기로 쓸 전투기도 없었고, 그나마 있던 나머지 항공모함들은 구레 군항 공습으로 사실상 몰살당했다.[32] 더 큰 문제는 이 볼트와 너트를 만든 곳이다. 공장들이 폭격을 맞아버려서 일반 가정에서 군용 볼트와 군용 너트, 군용 리벳 같은 걸 만든다. 도쿄 대공습 직전 도쿄 상공에서 커티스 르메이가 한 말인 '''"사실 저 아래 스즈키 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 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가내 수공업이라 하지."'''가 바로 이것.(원문과 함께 더 정확한 번역은 항목을 참고.) 그러니 제품 생산 속도, 제품의 질 모두 땅에 떨어져버릴 수밖에.[33] 이런 경우의 예가 현실의 야라레메카로 불리는 97식 전차 치하다.[34] 당장 현대 한국군에서도 훈련용 무기의 신뢰도 불량으로 인해 훈련중 사망하거나 중상에 이르는 부상을 당한 경우가 수두룩하다.[35] 공랭식 기체중에는 F4U 초기형보다 조금 처지는 수준이고 Fw190의 A형과 비교하면 형식과 관계없이 더 빠르고 상승률도 더 우수하다. 도라는 액랭식이므로 패스.[36] 기체 자체로는 괜찮았는데 엔진의 문제가 심각했다. 왜인지 하면, 하야테의 엔진으로 쓴 건 나카지마 호마레 엔진인데, 이게 잘 만들어졌어도 일단 출력 여유폭이 엄청나게 좁다. 당장 카탈로그 상 비슷하거나 조금 더 우위인 미국의 R-2800 엔진과 스펙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37] 원래 전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려면 불필요하게 두꺼운 장갑은 다 덜어내고 항공기 운용 장비를 탑재해야 하지만 (카가의 경우 이렇게 잘 만들어졌다.) 시나노는 사방에다 장갑을 미칠듯이 둘러쳐놓은 야마토급의 전함 함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38] 이건 구조적인 문제도 있긴 했지만 보수반의 서툰 대처가 더 문제이기는 했다. 폭발성 가스가 발생하자 그걸 함 전체로 골고루 퍼트려서 뽑아내겠다는 이해불가능한 바보짓을 했던 것. 그러나 폐쇄식 격납고의 특성 때문에 이건 어쩔 수 없었다는 견해도 있다.[39] 물론 패전국이 패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막 찍어낸 물건이 품질이 좋을 걸 기대하는 게 도둑놈 심보기는 하다.[40] 특히 대공화력에 대해서는 석기 시대 매니아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세한 건 일본 본토 공습#s-4 문서를 참고하자.[41] 단, 돌격 자체는 분명히 전술이다. 그러나 이것도 화력지원이 제대로 받쳐줘야 제대로 된 전술이라 친다. 화력지원도 안될 것 같으면 양쪽이 전부 화력지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화력지원도 없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우라돌격을 본 독소전쟁의 소련측 참전 용사들이 괜히 '''"우리는 저딴 식으로 허접하게 싸우지 않았다!"'''며 격노한 게 아니다.[42] 딱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미군을 상대로 대전차총검술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것. 이건 소련군을 상대로도 마찬가지. 탱크 데산트 문서 참고.[43]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해놓고도 이름을 다르게 부여했다는 거. 츠루기(剣)는 육군에서 붙인 이름이며, 해군에서는 이걸 토카(藤花, 등나무 꽃)라고 불렀다.[44] 사실 일본군 해군도 카미카제 전술을 태평양 전쟁 초반부터 정규전술로 체택해서 쓰진 않았다. 카미카제 자살특공이 본격적으로 쓰인 건 1944년의 레이테 만 해전 이후다. 더 안습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저 무렵 일본의 상황이 단기적으로는 카미카제가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었다는 거다. 물론 인권, 종전 이후 등을 생각하면 정말 못할 짓이지만.[45] 육군기의 형식명인 Ki 번호로 알 수 있듯이 육군이 주로 사용한 것이다. 해군에서는 잘 쓰지 않았는데, 문제는 해군이 육군에서 한 술 더 떠서 프로펠러 엔진도 아니고 로켓 엔진을 달아서 독자적으로 이륙이나 이함이 불가능해 폭격기에 실려서 공대함 미사일로서나 써야 할 MXY-7 오카를 기업체도 아닌 해군 공창에서 만들고 있었다는 거. MX는 특수활공기라는 뜻이며, Y가 바로 이걸 주로 제작한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딴 것이다. 그리고 MXY-7 오카를 날리기 위한 운송도 해군의 G4M이 담당한 경우가 많다.[46] 특히 총포를 쏘는 순간 총구 화염이나 소리 때문에 위치를 모를래야 모를수가 없다.[47] 쉽게 말해 능동적으로 적을 찾는 게 아닌, 적이 내쏘는 무전기 전파, 레이더 전파 등등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으로 전파 발신원의 추적용으로 쓰이는 것이다. 천체망원경 중 천체가 내쏘는 전파를 수신만 하는 전파망원경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48] 덤으로 야기 히대츠구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다. 그런데 야기 교수는 대전기에도 일본군에게 전파탐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는 게 함정.[49] 밑에 나올 무전기 문제도 이것이 원인이다. 무전기도 엄연히 전파를 써야 하는 장비이고 무전기로 인해 아군끼리의 연계작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훨씬 더 크다. 이것을 무시한 결과가 일본군 항공기들의 수신호(적기가 몇기임을 알릴때 사용.), 승강타와 방향타를 이용한 신호(적기가 어느 방향에 있다는 걸 알릴때 사용.)들과 군함 & 전차들의 발광신호, 연막신호같은 것들이다.[50] 이럴 경우에는 단파라디오 소지만 막거나 방해전파를 쏘든가 하는 보다 세련된 방법이 있다. 심지어 동맹국인 독일의 방송과 음악도 듣지 못하게 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이 북한의 존재 때문에 1993년까지 단파라디오 소지를 금지했다.[51] 물론 전파도 탐지가 되므로 적 세력 직전에서 전파를 쏴대는 짓을 하면 역탐지의 우려나 적어도 적함이 왔다고 광고하는 상황이 생겨 문제가 생기긴 한다. 특히 수뢰전대 따위로 야간 뇌격전이나 야간 근접전을 노리던 일본군 해군에는 확실히 우려할만한 상황이었던 셈. 하지만 적어도 무조건 위치가 파악된다고 봐야 하는 육상기지나 상대적으로 원거리 포격력과 높은 피탐지율을 가지는 전함 같은 대형 함선에는 무조건 달아야 했다. '''그리고 전파 역탐지 문제가 가시화될 정도의 거리라면 그냥 레이더를 잠시 안 쓰면 된다는 아주 편리한 해결책이 있었다.''' 야간전에서 탐조등으로 대놓고 함대위치를 노출시키며 닥돌하던 놈들이 정작 이상한 이유로 더 필요한 장비를 버렸던 셈. 저렇게 탐조등으로 야간전을 하다가 역으로 털린 사례도 있다 .과달카날 해전 참고. 게다가 레이더는 단순히 적을 먼저 탐지/발견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미군의 경우 적극적으로 적과의 거리와 방위와 같은 사격제원을 선제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으며 기계식 사격통제컴퓨터와도 연동이 되었다. 미 해군은 야간전에서조차 적을 먼저 발견하고 방위와 거리, 그리고 적의 숫자를 먼저 인지했으며 계산기를 통해 더 정확한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눈 먼 상태로 등화관제조차 못하고 탐조등 켜고 나 여기 있소 표적 잘 보고 쏴주시오 하는 꼴이었던 것이다.[52] 그나마 현대에는 대레이더 미사일 같은 물건들이 있어서 조심해야 하지만, 이때는 전파 발신원을 안다고 해도 바로 그곳을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53] 간혹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라 불릴만한 사례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매번 이렇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근본적인 원인은 옥시덴탈리즘이 팽배했던데 있다. 게다가 맹점이 있는데 바로 견시원들의 시야고착. 단적인 예로 미드웨이 해전의 대역전극인 '운명의 5분'은 견시원들이 저공에 있던 뇌격기와 전투기들에'''만''' 시계가 박혀있다보니, 나왈급 잠수함 2번함 노틸러스를 잡으려다가 뒤처진 아라시가 남긴 항적을 추적해서 고공으로 날아온 급강하폭격기들을 일찍 감지하지 못해서 벌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카가의 견시원이 가장 먼저 급강하폭격기 편대를 발견하고 급히 전파한 시점에는 이미 급강하폭격기들이 급강하 궤도로 들어가고 난 후...[54] 탐지율과는 별개로 미군의 레이더를 이용한 관제사격의 명중률은 썩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본군보다는 나았다. 예를 들어 레이테 만 해전의 수리가오 야간전의 경우 미군은 그 압도적인 상황에서도 0.6%의 명중률밖에 기록하지 못했지만, 일본군은 해당 해전에서 명중률 0%를 찍었다. 결국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구축함 시구레를 빼고 몽땅 격침당했다.[55] 보여지는 부분은 오실로스코프 같은 파형이다.[56] 이것이 PPI 스코프(Plan Position Indicator scope) 화면이다.[57] 출처는 Anatomy of the Ship : The Battleship Yamato - Janusz Skulski, 저 그림은 야마토의 오키나와 특공 당시를 그린 그림이다.[58] 판독하기 쉬운 PPI 스코프와 달리 일본의 레이더는 판독이 어려웠지만, 일본의 오실로스코프같이 생긴 저 화면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판독하는 사람의 능력이 좀 필요하고 단순하긴 하지만 대상의 높낮이를 추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게 왜 좋은 점이냐면 당시 미군의 레이더도 '''물기둥이나 파도 등 해상에서 발생하는 온갖 클러터/노이즈들과 함선'''을 구별 할 수 없었는데 일본군은 이게 가능했다. 화면을 보고 적의 위치를 판독하는 건 좀 어렵지만 적과 잡다한 노이즈를 걸러낼 수 있다는 점은 꽤나 끌리는 점이었다.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미군은 둘다 썼다. 아이오와급 전함#s-4.1.1 문서에 보면 나오는 FC 레이더의 B 스코프가 그것. 장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단점도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59] 위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상대방의 레이더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레이더를 켜야 한다. 그리고 적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도 레이더가 돌아가야 하는데, 일본은 이것마저 묵살했다.[60] 항공기들의 경우 한 술 더 떠서 방향타와 승강타로 날개를 흔들어서 방향표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61]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 항공모함 카가, 아카기, 소류가 요크타운을 임시 모함으로 쓰고 있던 새러토가 소속 제3급강하폭격기대대와 엔터프라이즈 소속 제6급강하폭격기대대에 의해 순식간에 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히류가 자기들이 항공전 지휘를 맡겠다고 발광신호를 보냈다가 당했다.[62] 덩치가 큰 항공모함이나 전함, 그리고 해저를 움직여야 하는 잠수함의 경우 내부 통신용으로 썼던 게 관이다. 영화 도라도라도라 같은 것들을 보면 나온다. 이 시점에 미군은 이미 무전기를 군함과 전차들의 내부 통신용으로도 쓰고 있었다.[63] 이전 서술에서는 마치 무전 오보만 아니었으면 일본측이 이길 수 있었다고 표현되었으나, 이는 지나친 과장이다. 구리다 턴이 없었으면 당초 목적인 미 상륙부대에도 제법 피해를 줄 수 있던 정도일 뿐, 결과적으로 궤멸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는 점은 차이가 없다. 이미 필리핀해 해전에서 함재기와 조종사는 다 날려먹고, 남은 항모까지 미끼랍시고 다 내준 마당이다.[64] 실제로 연합군의 미국과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기부터 암호해독, 암호화 같은 보안 분야에 공을 들이고 있긴 했다. 심지어 진주만 공습때도 미국은 일본의 암호를 전부 해독하고 있었다. 다만 이 내용이 너무 모호해서 진주만을 공습할거란 사실을 몰랐던 것. 이 전훈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끝나고 만든 것이 NSA이다.[65] 그 중에서도 특히나 암호에 민감한 잠수함대의 노력이 가장 처절했다. 오죽하면 이걸 배경으로 한 영화도 있다. U-571 참조.[66] 야마모토 제독의 전사.[67] 다만 이 포는 '대공사격도 염두에 둔 대수상용 함포'에 가까운 물건이었고, 대공포로 사용하기 보다는 구축함과 같은 보조함의 주포로 주로 사용되었다. 주력함에 사용된 대공포는 후술할 89식 대공포이다.[68] 89식이 분당 16도 미국의 5인치 38 구경장의 경우 분당 15도~18도이다.(전함의 대공포 버전은 15도이다.)[69] 타국의 대공포에 비해서 포탄이 더 무겁다.[70] 영국의 주력 대공포였던 4.5인치 양용포와 비교해도 발사속도는 14:12로 약간 앞서며 상하각 조절은 분당 16도와 10~20도로 크게 밀리지는 않는다. 미국의 5인치와 비교하면 발사속도는 14:15로 약간 밀리기는 하지만 압도적이라고 할 수준은 아니다.[71] 구축함에 대수상 전용 함포 대신 양용포를 채택할 경우 나타나는 위력 저하는 양용포의 더 우수한 속사능력으로 충분히 보완이 가능하다. 그래도 사거리가 부족하다고 판단된다면, 구경장을 늘리거나 장약양을 늘리는 등의 개량을 하면 된다.[72] 게다가 밀폐식 선회포탑형 대공포는 일본 함선들 중 '''야마토와 무사시밖에''' 설치되지 않았다.[73] 그나마 대구경 대공포에 한해서는 포방패라도 설치해주기는 했으며 3식의 경우에는 포방패가 너무 얇다고 판명되자 장갑을 보강해주기도 했다.[74] 미군 주력함들이 대구경 대공포를(보통 38구경장 5인치 양용포) 12문씩 설치한 반면에 일본군은 야마토급 정도를 제외하면 4문정도에 그쳤다.[75] 연합군의 20mm 오리콘도 탄창을 쓰기는 하지만 이쪽은 탄약이 더 많이 들어가서 사정이 훨씬 양호하다. 사실 일본도 20mm 오리콘이 있기는 했는데(전쟁 전에 라이선스를 구매해 국산화한 것), 함상 대공포로는 안 쓰고 기총으로만 사용했다. 만약 이것을 함상 기관포로 사용했다면, 대공능력이 강화되는 것은 물론, 항공기와 함선의 보급을 통일할 수 있어 보급, 특히 항공모함의 보급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5발이면 정말 장탄수가 적은것 이다. 소구경 대공포는 기본적으로 총알을 쏟아 부으며 탄막을 설치해 적기의 접근을 막는데 15발이면 탄막을 설치하는게 불가능하다.[76] 이 당시 일본은 야간 공습에 대한 방어능력이 없다시피 하다. 도쿄 대공습에서 격추당한 B-29는 난사되는 대공포에 재수없이 맞은 것.[77] 당장 저 마미야마저 발라오급 잠수함 SS-315 USS Sea Lion의 뇌격에 의해 격침됐다.[78] 여기서 사나다가 무타구치 렌야의 계획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다. 당대 일본군 내 육군과 해군의 관계를 대입해서 생각하면 저 말은 대략 '''"지금 무타구치 사령관입안한 작전 계획을 정 실행해서 성공시키려면 그 웬수 같은 물개놈들 손이라도 빌려야 될까말까인데, 네놈이 정녕 그러고 싶냐!?"''' 이런 뜻이 된다. 그리고 이 발언은 다른 의미에서도 충격적인 발언이기도 한데, 일본군내 고질적이던 연공서열조차 무시한 발언이란 것이다. 사나다 조이치로는 무타구치 렌야의 육군 대학 '''후배''', 그것도 '''10년 후배'''다.[79] 무타구치의 삽질이(임팔 전투) 유명하기는 한데 이 경우 일본군 내부에서도 이건 아니다라고 봤기에 엄청나게 태클을 걸었고 삼간사우로 악명높은 사나다 조이치로 조차도 제동을 걸어서 보급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못한다면 해군의 협조라도 얻어야 한다고 했다.[78] 그게 어찌저찌 도조한테 까지 올라갔고 마지막으로 도조 히데키가 보급문제를 물었고 제대로 답을 못하자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근데 저렇게 해놓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서명을 해줬다고(...). 임팔 전투를 다룬 일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예 대본영을 대놓고 깐다.[80] 그런데 따지고 보면 아카시에 적재된 공작기계들은 일본이 자체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독일에서 수입한 공작기계들이라 일본군은 아카시같은 훌륭한 공작함을 또 건조할 능력이 없었다. 아카시 문서를 참고하자.[81] 함대결전사상이 원인인 이유는 함대결전이라는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승패가 몽땅 갈리기 때문이다. 즉, 한 번 크게 싸우고 그 이후가 없는 것. 당장 일본군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급 전함만 해도 알 수 있다.[82] 이리 된 이유도 가관인데. 아카시에 적재된 독일제 공작기계들은 당시의 일본 내에서도 비슷한 규모를 가진 공장을 찾을 수 없었다. 쉽게 표현하면 수리용 공작기계들 80% 이상을 아카시라는 단 한척의 배에 몰아넣은 것.[83] 함급으로는 시키시마급 전함이다.[84] 원래 전함이었다가 연안방어함으로 분류가 바뀌고, 그 다음에는 잠수함에 대한 관리, 보급을 하는 잠수모함으로 바뀌며, 마지막으로 바뀐 게 공작함이다.[85] 참고로 항복하여 무장해제되어 기존의 무기와 지상 병기, 군용기는 바다에다 버리거나 스크랩 처리나 소각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잔존 군함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군함의 경우 더 안습인게 '''핵실험(!)으로 처분'''당한 군함도 있다. 전함 나가토의 경우 핵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맞았다. 비키니섬 핵실험 항목을 참고할 것.[86] 당시 책임자였던 채병덕 소좌(한국전쟁에서 전사 후 국군 중장으로 추서)가 신생 국군을 위해 지켜냈다고 한다.[87] 다만 일본트리 말고도 독일의 E-75나 E50M, 중국의 59 패튼등 상상의 전차가 있으니 너무 일본꺼만 뭐라하는것도 좋지 않다.[88] 비슷하게 이득을 본게 독일 함정들이다. 이쪽은 근거리 전투만 상정하고 만들어서 포스트 유틀란트 방어구조를 적용하지 않았는데 게임 양상이 근거리 포격전이다보니 구식 방어구조를 사용한 독일 전함들의 부실한 갑판장갑은 그리 부각되지 않는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