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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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2기 출범식 모습.(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대운동장)
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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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고려대에서 열린 한총련 출범식 모습.
범청학련 남측본부 산하 총학생회 연합체. 약칭인 '''한총련'''으로 유명하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전농 등과 연대 관계이기도 하다. 약자가 비슷해보이지만 조총련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공식 웹사이트상에서는 한국대학총학생회'''련'''합 으로 나오고, 페이지 제목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으로 나오는 등 두 표기 방법이 혼재되어 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학생운동을 이끌던 전대협을 계승하여 1993년에 창립하였다. 1994년 쌀 수입 반대 투쟁을 벌였으며 특히 1995년 전/노 학살자 처벌 투쟁으로 5.18 특별법 제정에 공헌함으로써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후 1996년 전북대학교에서 열린 한총련 4기 출범식에 당시 유종근 전라북도 도지사가 "한총련은 민족의 미래"라고 축사를 보낸 바 있다. 그러나 이 축사와 관련해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1996년 제7차 범민족대회 및 제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 와중에 벌어진 연세대 사태 이후 1998년 5기부터 대법원에 의하여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1993년 창립 시에는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 한총련'이라는 표어를 내걸었으나 1994년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으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표어를 바꾸면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표어의 저주 이런 게 아니라 충분히 이유가 있다. 이 표어의 변경이 바로 한총련 주도 세력의 변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한총련이 출범하는 1993년에는 문민정부의 출범, 현실개혁주의 시민운동의 급성장, 서태지로 대변되는 신세대의 출현, 프로 스포츠의 흥행, 해외 배낭여행 열풍 등 이미 세상은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성장해서(일단 겉으로 보이기엔) 어느 정도의 제도적 민주화가 가시적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사회에서 NL-PD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거대 담론-상명하달-동원식-거리 투쟁 위주의 학생운동을 평범한 대학생들은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서 한총련 내외부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정치 투쟁만 하던 NL과 PD를 넘어서 평범한 대학생들의 일상에 주목한 제 3세력인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학생회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등 학생운동에도 새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또한 한총련 내에서도 김영삼 정부에 대해서 소위 "견인이냐? 타도냐?" 논쟁이 불거졌다.[1] 한총련이 처음 내걸었던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 한총련'''이라는 구호도 이런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1990년대 사회상에서 대학이 생활 공동체, 학문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은 운동권은 물론 평범한 대학생, 교수, 직원 등 대학 사회 구성원이라면 모두가 공감할만한 구호였다. 특히 투쟁보다 생활을 앞에 두었다는 것은 정치 투쟁 구호만 난무하던 학생회 선거에서 생활협동조합, 예산자치제 등의 선거 공약으로 파란을 일으킨 21세기 그룹의 돌풍과 맞물려서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오랜 군사정권 동안 대학생들은 민주화 운동의 선봉이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정치 투쟁에 대한 일반 시민의 공감과 지지도가 대단히 높던 시절이다. 설사 공감하지 않더라도 "젊은 혈기에 돌도 좀 던지고 하는 거지, 왕년에 데모 안 해본 사람 누가 있나" 식의 정서가 보편적이었다. 이 때문에 투쟁의 공동체란 구호도 별반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즉 생/학/투 공동체는 운동권이라면 치를 떠는 일부를 제외하면 한국 사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구호혔다.
그러나 모두가 단결해서 조국 통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식의 획일적 사고 방식에 쩔어있던 NL계는 이러한 다양한 의견 분출을 위험하게 여겼다.[2] 이들은 이런 잡사상이 조국통일의 선봉대여야 할 한총련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집단주의 논리로 한총련 지도부에서 다른 계파들을 모조리 숙청한다.[3] 생활 속의 진보, 대학 개혁을 외치던 21세기[4] 는 물론 노동자 계급 해방을 주장하던 PD계까지 순결한 자주민주통일 대오 건설의 곁가지라면서 모조리 쳐낸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이란 새 구호를 내건다. 대학생, 교수, 직원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공감할 수 있었던 생학투에 비해서 새로운 구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것이었다. 오로지 골수 운동권들 그중에서도 NL계만이 열광할 뿐.
즉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지킬 건 지키고 바꿀 건 바꾸는 식으로 혁신하는 게 아니라,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무조건 옳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따라오라'''라면서 귀막고 눈감고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면서 세상에 자신들의 이념을 강요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토록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으면서, 실상 자신들은 독재정권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물론 한총련은 이후에도 출범식에 무려 10만명을 동원하는 등 대외적으론 엄청난 위세와 조직력을 과시했지만, 일반 시민들은 물론 평범한 대학생들의 삶에선 서서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설사 낮은 수준의 투쟁 구호였을지라도 대다수 대학생들의 공감과 암묵적인 지지 속에서 활동하던 전대협 시대에 비해서 한총련 시대에 접어들면 대학은 한총련에 열광하는 소수와 그들에 무관심한 다수로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한총련을 완전히 움켜쥔 NL계는 자신들끼리 싸우다가 1994년, 1995년을 거치면서 강경파(자주단결[5] )와 온건파(자주혁신[6] )로 대분열한다.[7]
한총련 초기에는 전대협 때의 분위기를 이어받아서 정치적 감각이 있었던 온건 NL파가 한총련을 주도하는 와중에 PD 등 다른 학생운동 정파들도 한총련 운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95년을 기점으로 북한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주체사상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NL 강경그룹(일명 자주단결파)이 한총련 중앙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고 PD는 물론이고 같은 NL온건파(소위 자주혁신파)까지 싸그리 숙청해버렸다. 그리고 시대에 뒤쳐진 이들이 무뇌아적이면서도 구태의연한 일들을 벌이는 통에 이틈을 타서 안기부와 보수 언론에서 한총련을 난타할 만한 건수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96년 연세대 사태,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가 바로 무조건적인 정권 타도, 폭력 투쟁만을 밀어붙이던 NL강경파의 실책이다.
이들은 시대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끝까지 정권과 맞서 싸우면 대중들이 자신들을 계속 지지해 줄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한다. 실제 이들은 1996년부터 1997년 사이에 김영삼 정권의 지지도가 폭락하고, 정권 교체의 여론이 치솟자 지금이 1987년 6월 항쟁 직전과 같은 상황이라고 오판하고 끝까지 전민항쟁을 외쳤으나, 현실은 그들만의 외침이었다.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에 반발해서 일어난 민주노총-한국노총의 총파업은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많은 환호를 받았지만, 한총련 출범식은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외면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어난 이석씨 프락치 오인 살인사건으로 한총련의 도덕성은 치명타를 맞았으며, 이때부터 전국의 수많은 학교들이 한총련 공식 탈퇴나 활동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적단체 판결에 대해 북한에서는 한총련을 해체하고 별개의 단체를 조직하여 이적단체로써의 제약을 피할 것을 지령하였으나, 한총련 지도부는 북한의 지령을 수용하지 않고 조직을 유지하였다. 북한의 지시를 거의 순종하던 한총련으로써는 이례적인 태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안습'''의 극치가 되었다. 범청학련, 민주노총, 전농 등과 같이 전의경의 주적이었던 것도 같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으로 몰락한 것.
2. 한총련 진군가
3. 역대 의장
1992년 전대협 7기 시절부터 이후 한총련 의장들이 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을 겸하기도 했으나 2002년 10기부터 한총련 의장은 범청학련 남측본부 상임 부의장을 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2008년 16기 땐 의장 공석으로 투쟁본부장이 사실상 수장을 맡은 바 있었다.
- 1기(1993년) : 김재용 한양대 총학생회장
- 2기(1994년) : 김현준 부산대 총학생회장
- 3기(1995년) : 정태흥 고려대 총학생회장
- 4기(1996년) : 정명기 전남대 총학생회장
- 5기(1997년) : 강위원 전남대 총학생회장 - 1980~90년대 초반까지 성행했던 '고등학생운동(고운) 세대' 출신 의장.
- 6기(1998년) : 손준혁 영남대 총학생회장
- 7기(1999년) : 윤기진 명지대 총학생회장
- 8기(2000년) : 이희철 조선대 총학생회장
- 9기(2001년) : 최승환 부산대 총학생회장
- 10기(2002년) : 김형주 전남대 총학생회장
- 11기(2003년) : 정재욱 연세대 총학생회장 - NL혁신그룹
- 12기(2004년) : 백종호 한국외대 총학생회장
- 13기(2005년) : 송효원 홍익대 총학생회장 - 사상 첫 여학생 의장.
- 14기(2006년) : 장송회 전남대 총학생회장
- 15기(2007년) : 류선민[9] 전남대 총학생회장
- 16기(2008년) : 김현웅 투쟁본부장(전남대 총학생회장)
4. 조직 구성 및 성향
기본적으로 한총련은 의장 아래 대의원을 직선 총학생회장, 단과대 학생회장들로 구성한다. 출범 초기에는 전대협의 분위기를 이어받아서 NL-PD-일부 자유주의적 성향의 학생들을 포괄하는 빅텐트격인 단체였지만 1994년 주사파 파동과 김일성 조문 논쟁 이후 사이비종교 수준의 조직력을 자랑하는 강경파NL이 완벽하게 주도권을 틀어쥐고, 1997년 연세대 사태 이후로는 여타 정파들과 온건 NL 그룹이 단체로 탈퇴하면서 사실상 NL 단일 정파 단체가 되었다. 물론 단일정파라고 해서 갈등이 없던 건 아니고 거기서도 말이 그나마 좀 통하는 축과 망상에 찌든 축이 대결하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물론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제대로 활동하기 힘들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기는 했다.
먼저 '이사회' 격인 대의원대회는 최고의사결정기구로 의장 선출, 강령 및 규약의 제/개정, 특별기구장 인준, 의장 탄핵권, 예결산 심의 및 의결, 총노선 채택 등 사업 전반의 심의/인준/의결 등의 권한을 가졌다. 대의원은 당연직과 선출직으로 구성되는데, 2007년 15기 기준 총원은 1329명으로, 이중 사고 993명, 재적 대의원은 336명이었다.
상임의사결정기구인 중앙위원회 아래 중앙상임위원회, 그 아래로는 중앙집행위원회와 상무위원회가 있으며, 집행위 아래에는 전업 활동가 조직이자 실세격인 '정책위원회'를 비롯해 조직위원회, 연대사업위원회, 문화국, 정보통신국, 투쟁국, 교육선전국, 사무처, 전문대사업국 등 9개국이 있고, 연대사업위 산하에 농민국, 대외협력국, 노동국, 정치국 등 4개, 사무처 아래에 기획국 및 재정국을, 정책위 산하에 '정책협의회'를 각각 뒀다. 특별기구로 조국통일위원회(조통위)[10] 및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학자추), 대변인을 두고 부문 계열 조직으로 전여대연, 전농동연, 전한련 등 7개 조직을 뒀다.
5. 지역별 조직
아래 모토는 전부 진군가의 특정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 서총련(서울지역)
- 모토: 구국의 횃불
- 동총련(동부지구): 성동구, 광진구, 동대문구, 중랑구, 노원구
- 서부총련(서부지구): 서대문구, 은평구, 마포구[11]
- 서남총련(서남지구): 중구, 용산구, 동작구, 관악구
- 북부총련(북부지구): 반제청년동맹]: 종로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 경인총련(경기-인천지역)
- 모토: 불패의 그 이름
- 경기남부총련(남부지구): 수원시, 화성시, 오산시, 평택시, 안성시, 안산시, 시흥시, 안양시, 군포시, 의왕시, 과천시
- 경기동부총련(동부지구):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 용인시, 이천시, 여주시, 양평군
- 인부총련(인천-부천지구): 인천광역시, 부천시, 김포시
- 충청총련(대전-충남-충북지역)
- 모토: 애국의 열정 승리의 확신
- 대전총련
- 충남총련
- 충북총련
- 강총련(강원지역)
- 모토: 6만의 신뢰 승리의 약속
- 원주지구
- 춘천지구
- 영동지구
- 남총련(광주-전남지역)
- 모토: 새 조국 건설의 선봉 자주의 횃불
- 광총협(광주지구)
- 여순총협(여수-순천지구)
- 목총협(목포지구)
- 광전대협(광주지구 전문대 총학연합)
- 전북총련(전북지역)
- 1998년 지역총련 차원에서 한총련 탈퇴를 선언했고, 잔류파들은 협의체 '전북총협'으로 개편했다. 지역 단위의 탈퇴는 전북이 유일하다. 전북총련은 이후 역시 한총련을 탈퇴한 다른 학생운동 그룹들과 손잡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가 2000년경을 기점으로 극우로 급격하게 변질되어 이른바 뉴라이트 반운동권의 시초가 되었다.
- 전북총련의 탈퇴와 극우 전향의 배우에는 주사파 대부 김영환이 있다. 김영환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민주민족혁명당이란 지하당을 조직하고 1990년대 내내 직접 전북총련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자신들을 지도하던 김영환이 1990년 후반 주체사상을 포기하고 북한민주화운동가로 변신하자, 전북총련 간부들도 역시 영향을 받아서 돌아선 것이다.
- 부경총련(부산-울산-경남지역)
- 모토: 언제나 줏대있는 조국의 자주통일 선봉대
- 동부총협(부산 동구지구)
- 서구총협(부산 서구지구)
- 마창총협(마산-창원지구)
- 서경총련(경남 서부지구)
- 부울전협(부산-울산지구 전문대 총학연합)
- 대경총련(대구-경북지역, 단일지구)
- 모토: 겨레의 자랑
- 제총협(제주지역, 특별지구)
- 모토: 반미구국의 선봉
6. 한계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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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는 안 나오지만 뉴스에서는 미군이 쪽수에 밀려 성조기를 다시 빼앗긴다. 미 육군 스트라이커 여단의 훈련 중 난입한 한총련 학생들. 미 육군의 제지로 끝나기는 했지만 당시 장갑차와 실탄 등까지 동원된 훈련이란 점에서 엄청난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96년 연세대 사태, 일명 '''한총련 사태''' 당시 사진. 저 사건 전이나 후나 저와 비슷한 일을 '''수도 없이''' 저질렀다. 물론 가면 갈수록 장비가 진화돼 감에 따라 강도는 '''더더욱 심해졌다.''' 그나마 2000년경 이후 시대의 변화를 의식해 평화 시위를 하는 쪽으로 가기는 했지만 위 사진에서 나온 2003년 미군부대 난입이나 국방부 기습 사태 등 쇠파이프나 화염병만 안 썼을 뿐이지 고도의 과격 시위를 선보여왔다. 심지어 저 위에 미군 훈련장 난입 때 그 임수경 방북 사건을 이끌었던 '''전 전대협 3기 의장 임종석'''(문재인 정권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과격했다고 비판할 정도면 말 다한 거다.#[12]
심지어 같은 소속인 '''남총련'''에서 비판 성명이 나왔다.
참고로 한총련 출신 인사들 중 진보 정당에서 활동을 이어 나가거나[13] 지역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경우를 꽤 찾아볼 수 있다.
시대적인 흐름을 전혀 타지 못했는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계 정당 정권이 집권을 하였음에도 이적단체 규정을 해제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전히 '''정권 타도'''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으며, 당시 모 대학 한총련 계열의 한 총여학생회 후보의 캐치프레이즈가 '''반여성적 정권 타도'''였을 정도로 80년대에 사용하던 정권 타도라는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이때쯤이면 1-4기 전대협 의장들도 현실주의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민주당에 한창 입당하며 정계 주류가 되었던 때라 흐름을 전혀 타지 못했으니 더더욱 까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총련에 우호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김대중 정부 시기는 한총련이 매우 단호하게 탄압받던 시절이다.''' 당시 경찰 공안부서, 검찰 공안부, 국정원은 한총련의 멸종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서 달려들었다. 한총련 활동을 하는 학생회장은 여전히 지명수배 그리고 감옥행이었고 한총련 간부들은 그 가족들까지 모두 사회적으로 불명예 대상이었다. 몇년 간 한총련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분위기 때문에 의장 선출을 위한 대의원대회조차 열지 못해서 인터넷 약식 투표로 의장을 뽑을 정도.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으로 남북간에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총련에 대한 배척의 분위기도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학생회장이 한총련 활동을 하면 여전히 지명수배, 그리고 감옥행. 그리고 이런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분위기는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진다.[14]
김대중 정부가 한총련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배척을 가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이다. 일단 첫째로 김대중 대통령 본인이 전형적인 친미주의자, 중도개혁주의자였다는 점이다.[15][16] 일부의 비난과 달리 처음부터 김대중은 체제 타도를 부르짓는 학생운동, 반미에 목숨거는 NL계와는 성향이 정반대로 주한미군 철수, 한미 군사동맹 해체 주장에는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이때문에 전두환 정권 시기에 학생운동이 반미주의, 좌익혁명 노선으로 흘러가자[17] 상당한 우려를 표시했으며 1992년 대선을 앞두고 (NL계가 주도하는) 전국연합과 정책 연대 협상을 할 때도 주한미군 철수, 한미군사동맹 해체 공약은 끝까지 거부하였다. 선거 때마다 NL계가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한 건 정권 교체를 위해서 그나마 될놈 밀어주자는 선거 전술이었지, 반미 노선이 일치해서가 아니다. 특히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전국연합과 정책 연대를 했다가 패배한 이후로는 재야 세력, 학생운동을 멀리하고 오른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18] 거기에 오랜 군사정권의 정치 공작으로 덧씌여진 '빨갱이' 이미지를 고려하면 더더욱 한총련을 가혹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바로 경찰, 검찰, 그리고 정보기관의 생존 본능이다. 오랜 기간 야당과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탄압하면서 조직을 유지하던 경찰의 공안부서[19] , 검찰 공안부, 국정원의 국내 파트는 정권 교체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자신들이 수십년동안 짓밣았던 세력이 집권했으니 전전긍긍한 것이다. 어떻게든 조직을 유지할려면 명분과 일거리가 필요한데 이젠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시도하지 않는 이상 집권당이 된 민주당계를 조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야당이 된 한나라당을 때리는 건 누가 봐도 박쥐같은 짓이었다. 오랜 기간 자신들의 먹이감이었던 재야 세력은 대부분 제도권 정치인이 되거나, 온건 성향의 시민운동가로 변신하면서 잡아들일 명분이 없었다. 이때 떠오른 게 한총련이다. 이미 서울 시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폭력 투쟁 때문에 국민의 혐오를 받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친북성을 보이면서 정권 타도만 외쳐대고 있었고 정권도 이들과 거리를 두고 있으니 표적으로 삼기 완벽했다.[20] 이러면서 공안기관들이 일제히 한총련에 집중해서 매년 수많은 한총련 계열 학생회장과 간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반체제 사범으로 감옥에 보내면서 자신들이 존재 가치를 증명하였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는 한총련에 우호적이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노무현이 한총련 합법화 의지를 밝힌 적이 있고, 또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총련의 합법화 및 수배 학생의 일괄 수배 해제 등을 긍정 검토해왔으며 실제로 한총련 관계자들을 사면 대상에 대거 포함시키는 등 우호적 태도를 취해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저러한 주장이 있는 듯 하다.
외환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화로 인해서 몰아닥친 대학생들의 취업 생존 본능으로 인해서 2000년 이후 학생운동이 급격하게 퇴조하는 가운데 외부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한총련 탄압, 내부적으로 상당수 학생운동 세력의 한총련 이탈 그리고 한총련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서 한총련은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우선 종북적 성향을 가진 대학생 단체라고 비난받고 있으며 일부 대의원과 중앙집행국원들은 주체사상을 추종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진보 세력 내에서 종북주의자 논쟁과 더불어 큰 떡밥으로 작용하고 있다.
NLPDR의 특성상 전체주의적 요소를 강요하기도 하며 학생회의 권한을 중시하기 때문에 '''직선 학생회가 세워지지 않으면 가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21]
한총련은 이름으로는 총학생회 연합이나 상명하달하는 구도로[22] ,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에는 PD 세력이 아예 따로 나오는 한총련 탈퇴 파동이 있기도 하였다. 이는 1997년 이석 치사 사건, 이종권 치사 사건 이후에도 이어져 사실상 소수단체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다고 영향력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지만.)
이름 그대로 총학생회 연합으로 각 학교 학생자치단체장을 회원으로 하나 지도 대상은 가입한 각 대학 총학생회에 소속된 개별 모든 학생으로 하고 있는 좀 야리꾸리한 형태를 하여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룰을 따를 것을 강요한다. 그 이유는 '''직선의 직선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직선이나 다름없다'''라는 원시적인 이유이다. [23] 그렇기 때문에 학생은 자신이 투표한 직선 학생회장의 판단에 책임을 지고 직선 학생회장의 투표권 행사로 세워진 한총련의 행보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저 룰을 한국 정치에 그대로 대입하면, 정당과 상관없이 국회의장이 대빵을 먹게 되는 해괴한 형태가 된다. 이 논리는 주체사상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파인 PD 계열과는 항상 대립하였다, 그리고 학생회에 지나친 권한을 부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친 한총련계 학생회를 세우려 하는 문제점도 비판받았다. 만약, 비운동권 및 한총련에 반하는 학생회장 후보가 선거에 출마하면...? 정말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렸다. 선거운동 차원에서도 다구리치고 물리적으로도 치고(...) 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간 다음이 문제였다.
등록금과 같은 대학생의 문제에 대한 투쟁 대신, 반미 운동 등 기성정치에만 치중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건설적 비판과 소수 의견이 '''"전체 대학생을 대표한다는 미명 하에 묻혀진다"'''라는 점이고, 이는 한총련의 노선을 필요 이상으로 강경하게 만듬과 동시에 일반 학생들도 등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년간의 스케쥴을 짜는 데 있어서 각 대학교 학생회의 현안과 입장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빡빡하게 짜서 하달하기 때문에 각 대학교 학생회가 학생복지 및 당면 현안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되어 학생회가 제 기능을 못하는 문제점도 컸다. 물론, 이들이 대학교 현안에 매달린다고 해봐야 뭔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일단 건설적인 비판과 대안이 막혀 있다. 즉, 학생복지를 향상 시키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냥 닥치고 해대는 강경 일변도의 투쟁으로 얻어내는 게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이들이 잡고 있는 학생회는 정말 거짓말도 안하고 일년 내내 반미, 파업, 정치 투쟁이나 하느라고 바빴다. 그럼 학교 현안은.....가끔 잊을 만하면 해주기는 한다. 반미, 파업 등에 들이는 공에 10분의 1도 안들이는 데다가 왠지 하는 둥 마는 둥 듯한 느낌이 강한건 착각이다.
농활을 활성화하고 또 오염시킨 집단이기도 하다. 이 집단의 활동성은 도움이 되는데, 학생 개인은 경험과 봉사활동에서 하고 오지만, 한총련과 연계된 학생회는 저녁시간 이후 전농과의 연계에 농활을 이용한 경향이 있었다.
너무 화려하게 하는 나머지 정치 투쟁하는 건 아닌데 학교 현안 관련 투쟁은 하는 지 모르는 학생들도 있었다. 참고로 학교 밖이 아니라 학교 안에서의 얘기다. 학생회장 선거 공약마저도 '''주한미군을 몰아내겠습니다.''', '''FTA 반대''' 가 있었다. 본질적으로 학생의 권리와 자치를 위해 뽑아주는 게 학생회장인데, 주한미군 몰아내기와 FTA 반대가 학교 내의 복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이다.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독재 국가에서 탈피한지 이미 오래된 시점까지도 '학생=혁명의 기수'란 구세대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외 각종 학생자치와는 무관한 문구도 포함돼 있었다. 이거 없으면 무슨 죽일 놈 취급이라도 받는 듯이.
해마다 전 국토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훓어주면서 각 미군기지 앞에서 폭력 사태를 벌였다. 이 때 동참해 주는 것은 민주노총과 진보연대 등 관련 단체들. 참고로 전의경 1년 행사(?)중 제법 큰 것이 한총련 학생들 및 범청학련 통일선봉대와의 싸움질이다. 그 외에 가장 큰 행사는 3~4월 춘계투쟁, 5월 노동절 대회 및 광주민중항쟁 기념일, 6월 공동선언절, 11월 학생의 날, 농민의 날 및 노동계 하반기 투쟁.
그외 한총련의 깃발을 볼 수 있는 곳은 각종 파업 등 큰 시위 판이다. 거의 꼬박꼬박 나온다. 그 중에서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곳은 '''폭력시위'''다. 티비에 나올 정도로 큰 폭력시위라면 100% 확률로 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7. 몰락과 근황
한총련이 전대협의 조직력을 물려받았고, 이를 토대로 초기에는 엄청난 영향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대명사로 남아있긴 하다. 그러나 현재의 한총련은 겨우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연대 항쟁으로 존립 기반이 흔들리던 한총련은 5기 집행부 출범식을 무리하게 강행하는 과정에서 이를 진압하던 전경 1명을 숨지게 한 데 이어, 지나가던 선반공을 프락치로 오인하고 집단 폭행해서 살해한 이석 치사 사건 등 ## 연속해서 사고를 치며 몰락하기 시작한다. 이에 검찰과 경찰은 합동으로 '한총련 와해 전담반'을 구성하여 한총련 소속 학생들에 무더기 수배 영장을 내리고 한총련 소속 학생회장들에게 자진 탈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이후 기수를 거듭할 때마다 번번이 이적단체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북한에서는 한총련에게 활동이 어려워진 기존 한총련 조직을 버리고 새 조직을 만들어 활동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북한의 요구를 한총련이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 조언 혹은 지시를 한총련은 듣지 않고 조직을 유지한 채 제법 한참 동안 활동한다. 당시 한총련을 감시하던 보안부서에서는 한총련이 북한의 조언을 무시하자 상당히 놀라워했고 언제까지 한총련이 버틸지 궁금해했다.
PD 계열 대의원들은 1999년에 한총련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전국학생회협의회(전학협), 전국학생연대회의(2005년 전국학생행진으로 개칭)을 구성했다. 전학협은 2004년 해소하여 현재 사회당 학생위원회나 대학생사람연대 등 서클 중심의 단체로 바뀌었다. 이외에도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학사정연), 다함께 등등 다양한 집단으로 떨어져 나왔고, 비운동권이 당선된 학교는 곧바로 한총련 탈퇴 루트를 타는 현상이 발생했다.
여기에 민주화 이후 탈정치화된 대학생 및 젊은이들의 입장과 더불어 경제 호황기 시절이었던 전성기 때와는 달리 크게 말라버렸다는 혹평을 받았다. 또 과거 제5공화국 시기와는 다른 성향의 분위기까지 더해져서 한총련의 지위도 말라들었다는 것. 게다가 1997년 문민정부 말기에 일어난 '''외환위기'''와 실업난과 경제난으로 대학생들의 미래까지 암담해지게 되면서 이 때를 계기로 대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매우 낮아지게 되었던 계기까지 맞게 된 것도 원인이었다.[24]
그래도 한총련이란 조직은 2000년대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조직력도 상당했다. 2003년 3월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총련 합법화에 대한 의지를 밝히면서 전교조나 민주노총처럼 당당히 합법 재야 단체로 도약하나 싶더니만, 그 해 '''5.18 민주화운동 23주년 기념식장에서 과격 시위 사건'''이 터지자[25] 결국 합법화는 물 건너갔고, 이후 혁신계열인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한총련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학생운동단체 수립"을 내걸었고 이후 정통 계열인 NL 비선과 정통계열에서 개량화된 NLPDR 혁신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시기에 대학 운동권 1번지인 한양대 총학생회가 한총련을 탈퇴했다. 그 와중에 노 정권은 7월 25일에 수배 중인 한총련 학생 152명 중 79명을 수배 해제시켰다.
결국, 2006년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이 구성되면서[26] NL 혁신을 주축으로 한 대다수의 한총련 가입 학교는 한총련을 탈퇴하고 한대련으로 활동 범위를 옮겼고, 정치적 한계로 소수화된 NL 비선 중에서도 선두급이었던 전남대 총학생회조차 한총련을 탈퇴하고 한대련으로 이적(?)하였다. 한총련이 이적단체여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활동이 어려웠다는 점도 한 몫 했다. 그런데 이런 걸 보면 요새도 이적단체 컨셉을 유지하고 있는듯. 참고 게다가 2008년 한총련 16기 의장 선거에 단 한 명의 후보자도 나오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거기에 예정되었던 16기 출범식 역시 촛불 집회로 인해 무산되었다.
결국 지금은 극히 소수의 학교(혹은 단과대학 학생회)만이 한총련에 남아 있었으나 2017년 기준으로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학교 공대나 자연계는 확고한 한총련 지지파이나, 03-04학번 이후로 자연대에서 운동권은 '''소멸'''했다. 이유는 04학번이 단대 학생회장을 맡을 때 자연대 학생들의 의견수렴을 하지 않고 멋대로 성명서를 발표해 자학대회[27] 에서 탄핵 발의 되는 사건이 있었고 (탄핵발의와 탄핵은 다르다. 당시 연서를 받아 탄핵 발의만 되었고 실제 탄핵을 하는 데 필요한 정족수인 대의원의 3분의 2가 모이지 않아 탄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그 뒤로 09년도에 단대 학생회가 들어설 때까진 자연대는 학생회가 없었다. 공대쪽 역시 큰 영향력은 지니고 있지 않은 듯. 그래도 몇 년 동안이나 단과대 학생회를 차지하는 걸 보면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28]
어쨌거나 현재는 한대련이 사실상 한총련의 위치를 이어 받았다고 할수있다. 한대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진 않았으나, 아직도 이적단체의 영향이 남아있기 때문에 국가정보원이나 경찰, 검찰 공안부 등에서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2011년 8월 26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명령에 의해 사이트가 폐쇄되었다. 진보네트워크센터 측은 폐쇄 조치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는 방송통신위원회의 조치가 적법하다고 판결하였다.참고 진보네트워크 측은 이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 제2부는 이를 기각하였다. 한편, 진보넷 측은 폐쇄 조치의 법적 근거인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도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제기하였으나 이 역시도 2015년 10월 21일에 합헌 결정이 났다. 결국, 한총련의 홈페이지의 복구는 요원하게 된 것이다.
2017년 9월 한총련 전직 간부들이 이적단체 규정 20년만에 광주서 첫 모임을 가졌다. 한총련 전직간부 80명은 16일 광산구청에서 모임을 갖고 90년대 한총련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공과를 평가하고 향후 역할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들은 생활현장에서 공동체, 나눔, 정의 등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는 데 힘을 모으기로 했다.기사
8. 웹사이트에 대해
PC통신 시절 한총련은 나우누리에 CUG(폐쇄 이용자 그룹)를 뒀으나,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경찰의 수색영장으로 폐쇄되자 인터넷으로 영역을 옮겨 나우누리 호스팅을 받아 http://blue.nowcom.co.kr/~hcy/라는 도메인을 사용했다. 이후 1997년에 신비로를 거쳐 1998년 시민네트워크협의회(CPNet)로 옮겨 http://hcy.cpnet.co.kr로 바꾸었다가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에 따라 폐쇄되었으나 1999년부터 진보네트워크로 이적하면서 http://hcy.jinbo.net/으로 바꾸었지만 별 활동이 없어서 폐쇄했다. 이후 2000년 12월부터 홈페이지를 또다시 개설하여 11년을 쓰다가 2011년 8월 26일자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명령으로 홈페이지 폐쇄. 사유는 '''이적단체''' 판결 및 이적표현물 게재였다. #
9. 기타
이 항목은 리그베다 위키 시절, 연세대 사태 부분을 지우는 무개념 반달러 때문에 동결처리된 바 있었다. 편집 및 작성에 유의하길 바란다.
김영삼&김대중 前 대한민국 대통령들도 민주화 운동 시기와 대통령으로 집권했을 당시에 이들을 한사코 지지하지 않고 선을 그었었다. 두 사람들이 군부 독재의 선동 때문에 그렇지, 사실상 둘은 철저한 자유주의자에 반공 친미주의자였으며 거의 주사파에 가까운 이들을 지지하지 않았었다.[29]
네이버 웹툰 뷰티풀 군바리에서 대총련 으로 이름을 바꿔 등장. 이들의 악랄함이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0. 관련 문서
11. 관련 자료
- <제15기 한총련의 총노선분석>: 경찰청 치안정책연구소. 2007.
-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 (1997~2019): 한총련을 상당기간 주도했던 전남대 총학생회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다.
[1] 3당 야합 등 과정이 지저분했지만 어찌하던 최초의 문민 대통령인 김영삼을 지원해 군사정권의 잔재를 쓸어내고 개혁을 완수하도록 지원해야 된다는 게 견인파의 주장이었다. 즉 한총련이 선도적으로 군부 잔당을 공격해서 김영삼 정권이 이들을 쓸어버리게 하자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하면 김영삼을 적폐청산의 도구로 쓰자는 주장. 반면에 강경파는 김영삼도 어차피 군부와 야합하고 재벌 기득권층에 투항한 구세력으로 일련의 개혁 행보는 쇼에 불과하며, 한총련이 선도적으로 '''정권 타도'''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2] 주사파들은 입버릇처럼 '''"온 세상을 주체사상으로 일색화하자!"'''라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다양성과 공존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무리들이다. 원래 주체사상이 김일성 1인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니 당연하다.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부정선거, 경선조작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도 전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3] 한총련 중앙 간부진에서 마지막 PD계 간부가 축출된 게 1993년 겨울로 알려져 있다.[4] 이들은 훗날 민주노동당 창당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머리 숫자로 밀어붙이는 NL들한테 또다시 밀려나고 만다. 현재는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시민운동 등으로 흩어졌다.[5] 인천연합이 이 정파였다. 현재 인천연합은 NL온건파에 속하는 걸 생각하면... [6] '''경기동부연합'''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초기의 경기동부연합은 인천연합의 뻘짓을 욕하던 NL온건파였다. 하지만 지금 하는짓을 생각해보면... [7] 혹은 강경파를 자주, 온건파를 사람사랑(약칭 사사)로 칭하기도 한다. 다만 사람사랑은 전국적 계파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다.[8] 다만, 전대협 진군가도 여전히 많이 애창되기는 했다. 전대협 진군가에 비하면 대놓고 NL 색채가 강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전대협 진군가가 뭔가 활동감이 넘친다면 한총련 진군가는 노래가 울적울적거리는 느낌이 강해서(...) 실제로 해당 진군가는 조국과청춘 3집 나온 이듬해 1995년에야 등장했다. 따라서 94년까지는 전대협 진군가에서 전대협만 한총련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다.[9]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 협박편지 사건의 용의자[10] 산하 기구는 범청학련 남측본부가 있다.[11] 경기도 소재의 한국항공대학교와 종로구 소재의 상명대학교는 서부총련 소속이었다.[12] 정확히 말하자면 역대 전대협 의장들은 (나중에 진보정당으로 간 6기 태재준을 제외하면) 모두 졸업 후에는 NL계와 결별하고 중도개혁주의 노선을 내걸고 청년운동, 시민운동을 하다가 결국 민주당계 정당에 입당해서 제도권 정치인이 되었다. 거기에 96년 연세대 사태, 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를 거치면서 온건NL계, 비주사NL들이 모조리 한총련에서 탈퇴하면서 2000년대 넘어가면 한총련 지도부에는 시대 흐름을 전혀 읽지 못하는 소위 꼴통 주사만 남아서 자기들끼리 눈막고 귀막고 사이비 종교 부흥회 마냥 발악하던 시절이다(...) 전대협 의장들을 포함해서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던 지도부급 인사들은 대부분 NL이념에서 탈피해서 현실적인 개혁주의 정치인 혹은 시민운동가로 변화해서 사회 주류로 안착하였다. 하지만 NL노선(주체사상)을 고수하던 한총련 지도부들은 이 흐름을 전혀 타지 못하고 지하에서 짱박히다 보니(...) 막장화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남은 부류들은 임종석 등조차 '변절'했다며 깐다. [13] 대표적인 사례로 민주노동당 중앙당 기획조정실장, 통합진보당 서울시당 위원장을 거쳐서 현재 민중당 공동대표를 역임 중인 정태흥 3기 의장과 민노당 대변인, 대외협력실장, 원내대표 비서실장 등을 지낸 손준혁 6기 의장을 들 수 있다. 참고로 정태흥은 경기동부 그룹이 차세대 간판으로 꾸준히 밀고 있는 사람이다. 서울지역 재보선 때마다 출마시키고. [14] 2004년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뒤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들고나오면서 탄압의 강도가 많이 내려가긴 했다. 일단 수배는 하지만, 별로 잡으러 들지는 않는다 정도로.[15] 참고로 당시의 한미관계는 광복 이래 최고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김대중과 미국의 빌 클린턴은 죽이 잘 맞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도 클린턴 행정부와의 사전 협의속에 진행된 일이다.[16] 김대중 납치 사건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때 김대중을 구원한 것도 미국 정부였다. 일부의 비난처럼 김대중이 반미좌경용공 분자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17] 5.18 민주화 운동을 신군부가 유혈 진압하는 데 미국이 방조(?), 방관(?) 혹은 지원한 것에 대한 후폭풍이다.[18] 영국에 가서 우파의 대명사 마가렛 대처를 연구하였고, 귀국해서 아태평화재단을 만든 다음에는 온건 보수 성향의 군인, 관료, 기업인들을 대거 영입하였다. 임동원, 천용택, 정세균에 심지어는 자기 사람들을 고문하던 엄삼탁 전 안기부 기획실장까지 영입하였다.[19] 보안분실, 일선 경찰서 보안과/정보과 등등[20] 또 하나는 노동운동 세력이었다. 특히 외환위기 직후 기업들이 대규모 구조조정(정리해고)를 하면서 노동자들이 반발하자 정권이 직접 나서서 이들을 모조리 때려잡았다. 최루탄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1998년 만도기계 파업을 비롯해 2000년 건강보험관리공단 사회보험노조 파업, 2001년 대우차 파업 등이 대표적이며 2000년 롯데호텔 노조 파업 때는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해서 파업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아예 검찰이 공안사건을 만들기 위해서 파업을 유도한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까지 터져나왔다.[21] 한총련은 학생회 연합단체이기 때문에(이는 전대협에서 이어져온 정통이다. 문제는 한총련으로 이름을 갈아엎었는데도 이 규정을 없애지 않았다는거지만) 일단 회원은 '''한총련 대의원을 직선 학생회장으로 두고 있는 단위의 대학생 전체'''다. 예를 들어 A대학교는 한총련에 가입해 있고 A대학교 총학생회장이 한총련 대의원이라면 이론상으로는 A대학교 학생 전원은 한총련 회원이다. 회비의 경우 회원이 지불한 학생회비에서 일정 금액을 대학별로 분담금을 부담하는 것으로 한다. 개인 자격으로 한총련에서 활동할 수는 있지만 대개는 대의원을 겸하고 있으며 이는 회원 여부와는 상관 없다. 직선 학생회가 세워지지 않은 경우, 예를 들어 비대위가 건설되었을 때 대의원의 자격은 잃지만 활동은 계속할 수 있다.[22] 하지만, 의아하게도 (명목상으로 가장 높은) 한총련 의장이 별로 손을 쓸 수 없었고(...) 실질적으로 30명 정도의 중앙집행부가 사실상 조직을 좌지우지했다. 물론, 그에 따른 대가로 "의장님"이라고 존칭을 붙이며 엄청나게 대해주긴 했지만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전락하면서 메리트도 없어졌다. 이는 한총련 회장에 당선되는 순간 '''바로 공개수배'''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이명준 저) 참고.[23] 직선의 직선으로? 그러면 이른바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직선'으로 선출한 것과 뭐가 다르지? 미국 대선의 선거인단 제도를 근거로 이런 행태를 옹호하는 자들도 있지만, 이건 까놓고 말해 '''무식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인단은 유권자의 의향에 따라 투표한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주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더 많이 지지한다면 선거인단은 민주당에 투표한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식으로 전권 위임을 받은 양 제멋대로 투표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위키러의 기억이 맞다면 이건 꼭 민주 집중제 때문은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개별 학생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단체로 가려고 하는 마스터 플랜이 있었다. 사실 전대협이 한총련으로 바뀐것도 그 과정의 하나였고. 그 후 망해서 그렇지... [24] 제5공화국 시절에 활동했던 60년대생과는 달리 1997년 당시 대학생으로 있었던 70년대생의 대학생들부터 경제위기와 실업난이라는 중고(重苦)에 접하게 되면서 이 때부터 점차 대학생들의 정치 및 사회운동 참여가 저조해졌다는 일설도 있다. 이 당시 대학생들은 IMF 구제금융 위기와 기업들의 구조조정이라는 악재까지 겹쳐서 직업 진로나 미래에 대한 암담함과 우울함이 다른 때의 대학생들과 매우 비교되는 부분이었다. 여기에 그 당시 존재했던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거나 망하게 된 것도 원인이 된 것.[25] 사실 과격 시위를 한 이유가 한총련 측이 5일 전 부시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을 '굴욕 외교'라고 간주한 것 때문이었다.[26] 단, 한대련이란 조직 자체는 2003년부터 있었다.[27] 자연대 학생 대표자 회의를 부르는 말, 대개 단과대 학생 대표자 회의는 그 단과대학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지는데, 자연대라서 자학대회. 물론 여기에는 자조의 뜻이 담겨있다.[28] 참고로 서울대 총학생회는 전통적으로 PD 계열이 강세였다. 서울대는 한창 한총련이 흥하던 90년대 중반에도 한총련은 물론 NLPDR 계열이 한 번도 수권하지 못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즉, 서울대 총학생회는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한총련에 속하지 않았으며 주요 대학 가운데 한총련 계열이 가장 힘을 쓰지 못하는 학교였다. [29] 위 사진의 왼쪽을 잘 보면 김영삼 대통령을 타도하자는 글귀가 보인다. 결국에는 김영삼&김대중 前 대통령들조차도 이들과 전혀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에 이 둘은 6.25전쟁을 몸소 겪었다. 김영삼은 6.25전쟁 정훈병으로 입대하였고, 김대중도 대북인식의 논란이 있지만 6.25전쟁에서 죽다 살아났기에 지지할 수가 없었다. 덧붙여 김대중 본인도 맨날 군부독재에 죽을 뻔했지만 미국에게 여러 번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기에 반미주의자인 단체들에게 절대로 호의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