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선수 경력
1. 클럽 경력
1.1. 프로 데뷔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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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선 믿기지 않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150cm가 조금 넘을 정도로 키가 작은 신체 조건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 맘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키 좀 크라고 보약을 왕창 먹였더니 그 한약빨의 포텐이 중학생 때가 지나서야 터져 동북고등학교 시절에 폭발적으로 컸다고 한다.
1.2. 상무 축구단 (군 복무)
1990년 대학을 졸업하고 K리그에 진출할 당시 최대급 대어였으나, 황선홍과 함께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해 파문을 일으킨다. 자세한 건 후술.
1.3. 포항제철 아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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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과 타구단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포항은 홍명보의 상무 전역 후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게 되었고 홍명보는 유공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포항에서 이미 가급여를 받고 있었고, 이중 계약 파문으로 번질 수 있었지만 3:1 트레이드[1][2] 를 통해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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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데뷔 첫 해 MVP 수상, K리그 베스트 11, K리그 우승
1994년 세계올스타전 출전, 아시아 축구 연맹 수비상, K리그 베스트 11
1995년 세계올스타전 출전, 5월 10일 유공 코끼리(현 제주 유나이티드)전에서 48m 프리킥 골 성공(당시 최장거리 골), K리그 베스트 11 영상
1996년 K리그 전북 다이노스전에서 해트트릭 기록, K리그 베스트 11, FIFA 올해의 선수 공동 21위(스페인어)
1994 미국 월드컵에서 2골을 기록한 후 당시 대표팀 기술고문이었던 비쇼베츠를 통해 유럽 3개 팀[3] 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지만 계약 문제로 유럽 진출이 거듭 무산되다가 마침내 '1996 시즌이 끝나면 해외 진출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적할 팀을 물색,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본행을 결심한다. 그런데 1994 미국 월드컵 직후 주병진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자신은 한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J리그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1.4. 벨마레 히라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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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 J리그 벨마레 히라쓰카 입단. 당시 이적료 11억. 세계올스타전 출전.
벨마레 데뷔전은 스위퍼가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 그러나 보복 행위로 백태클이 들어오자 그 선수를 밟아 레드 카드를 받았다. 당시 벨마레엔 일본대표 와그너 로페스와 나카타 히데토시가 있었기에 홍명보에게 리베로 역할이 아닌 수비의 구심점 역할을 요구했고, 당연하게도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 1998년 팀 재정이 악화되면서 고액 연봉자를 팔기 시작했고 홍명보도 트레이드 시장에 나왔다.
1.5. 가시와 레이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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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J리그 가시와 레이솔 이적.
1999년 홍명보를 영입한 가시와 레이솔은 만년 중하위권 팀에서 단숨에 리그 3위로 도약, 2000년 외국인으로서 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이 시즌도 역시 리그 3위. 우승을 목표로 황선홍과 유상철을 영입해 외국인 3명 제한을 모두 대한민국 대표팀 주전으로 채운다. 이른바 '''코리안 삼총사''' 탄생이다. 홍명보가 일본 축구팬에게도 커다란 존경과 애정을 사는 이유도 이 당시 활약상 때문이다.[4]
- 1998년 가시와 레이솔의 경기당 실점률은 1.7점. 99년에는 0.8점이 됐다.
- 1999년 세계올스타전 출전. 당시 말디니와 함께 뛰면서 수비라인을 조율하는 홍명보의 모습을 보고 외국 해설자가 "마치 두 명의 말디니를 보는 것 같다"라고 언급한 바 있음.[5]
결국 '철저하게 리베로 홍명보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기능하는 팀'은 대표팀이 아닌 J리그 프로팀인 셈이었다. 황선홍과 함께 1990년대 일본 대표팀에게 무수한 좌절을 안겨준 인물이 홍명보란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6]
1.6. 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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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에서 아이콘이나 다름없던 홍명보에게 은퇴 후 지도자 생활-차기 감독-을 요청했으나,
라는 말과 함께 사양하고 J리그 생활을 정리한다.[7]일본의 팀은 인솔하고 싶지 않다. '''나의 영혼은 항상 한국에 있다.'''
홍명보는 월드컵 직전인 2001년 포항 스틸러스와 2003년까지 2년 계약을 맺었다. 계약 기간 중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내면서 홍명보는 다시 한번 포항의 인기 스타로 떠올랐고, 포항 경기 때 홍명보를 보러 포항스틸야드가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월드컵 이 후 출연한 경림이의 길거리 특강에서 포항 스틸러스를 좋은 팀으로 만들고 떠나고 싶다고 했었다.
1.7.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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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MLS로 이적하겠다는 주장과 함께 LA 갤럭시로 이적해서 포항에게 엄청난 통수(...)를 선사했다. 자세한 건 후술.
2002년 7월 본격적으로 LA 갤럭시 이적을 고려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고 2002년 11월 LA갤럭시 입단을 선언했다. 이로써 2002년 11월 17일 K리그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5일 뒤 미국으로 출국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다만 논란과는 별개로 미국 축구 내에서 긍정적인 족적을 남기긴 한 듯하다. 경기 전에 애국가도 나오고 한국계 미국인이 미국 국가를 불렀으며, 하프 타임에 태권도 시범단의 공연이 나오는 등 한미 문화 교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LA갤럭시에서 보관 중인 홍명보의 축구화.
2. 국가대표 경력
- 1984년 AFC U-16 축구 선수권 대회 청소년 대표
- 1990년 FIFA 이탈리아 월드컵 국가대표
- 1990년 다이너스티컵 국가대표
-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 1991년 셰필드 하계 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
- 1992년 다이너스티컵 국가대표
- 1994년 FIFA 미국 월드컵 국가대표
-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 1995년 다이너스티컵 국가대표
- 1995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1996년 AFC UAE 아시안컵 국가대표
- 1998년 FIFA 프랑스 월드컵 국가대표
- 1999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 국가대표
- 2000년 미국 CONCACAF 골드컵 국가대표
- 2000년 AFC 레바논 아시안컵 국가대표
-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국가대표
-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
2.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89년부터 2002년 11월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89년 겨울 이회택 감독이 고려대학교의 홍명보를 국가대표팀에 선발. 동년배 황선홍과 함께 막내였지만 이미 황선홍은 1988년 AFC 아시안컵을 통해 스타가 되었기에 홍명보 본인은 꽤나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2.1.1.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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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전 수비수였던 스위퍼 조민국이 부상을 당해 대안으로 국가대표로 뽑혔고, 1990년 2월 노르웨이와 친선경기에서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리고 이회택 감독의 총애를 받으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선발출장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졸전을 거듭하여 월드컵 진출팀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처참했다.[8] 그러나 그 속에서도 홍명보는 '향후 10년 국가대표팀을 대표할 선수'로 평가받았다.
2.1.2. 1994 FIFA 월드컵 미국
1993년 도하 월드컵 지역예선 한일전에서 0:1으로 패배후 홍명보는 '이후 내가 또 한일전에서 진다면 축구화를 벗겠다'고 맹세했다고. 그리고 이 맹세는 끝까지 지켜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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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 월드컵이 홍명보란 이름을 처음으로 널리 알리게 된 실질적인 대회였다. 첫 경기인 스페인전에서는 0:2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1:2로 따라붙는 프리킥골을 성공시켰다. 사실 멋지게 들어가거나 그런 건 아니고 수비벽 맞고 굴절된 공이 운좋게 골대 안으로 들어가서 임팩트는 없었다.[10] 오히려 그 직후 황선홍과 2:1 패스 후 날카롭게 서정원에게 찔러준 패스가 1:1찬스를 만들었고 서정원이 득점하면서 '''버저비터같이 경기가 거의 끝나기 직전 2:2로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다.'''[11] 물론 서정원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지만[12] 날카로운 패스를 찔러주며 1골 1어시를 한 홍명보도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대망의 독일전에서는 디펜딩 챔피언인 독일을 상대로 후덜덜한 활약을 보여줘서 독일 선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특히 1:3으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림같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활약의 절정을 맞았다. 참고로 이 골은 94년 월드컵 가장 먼거리에서 성공시킨 골로 기록되었다. 골을 성공시키고 담담하게 손가락 하나만 척 들고 활보하는 쿨한 세레머니가 인상적이어서 당시 동네축구 초중딩들이 많이 따라했다. [13] 그리고 이 골로 '''한국의 첫 월드컵 한 대회 본선 멀티골 기록자가 되었다.'''[14] 그러나 팀은 2-3으로 패배했고 이로 인하여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여담으로 독일전에서 주장 완장을 찼는데 원래 주장은 아니었고 최인영이 주장이었는데 전반전의 부진으로 이운재로 교체되면서 홍명보가 주장 완장을 찼다.(위 사진에서도 완장을 찬 사진과 없는 사진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4월드컵의 활약으로 유명세를 타고 부동의 국대 수비수로 활약했다. 유벤투스 FC와 AC 밀란 초청 내한 경기 때 각각 득점으로 연결된 롱패스는 그의 패싱력을 보여주는 백미.
2.1.3.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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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아시안컵에서도 팀의 주축으로 출전했지만 당시 스위퍼로 포변하여 황혼기를 불태우던 김주성과 겹쳐서 당시 감독인 박종환이 홍명보의 패싱력을 써먹기 위해서 미드필더로 올렸는데 그때마다 성과는 영 아니올씨다였다. 다만 이란에 2:6으로 패한 전설의 "씩스투참사" 때는 김주성이 미드필더로 홍명보가 스위퍼로 원상복귀 했는데 전반전엔 2:1로 이기고 있다가 후반전엔 알리 다에이의 학살이 시작되면서(...) 참패했다. 알리 다에이의 마지막 골 상황에서는 가볍게 제쳐지는 굴욕도(...) 후술할 하나회 사건도 이 참패로 불거지기도 했고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던 홍명보가 처음으로 곤혹스런 입장에 처한 시기인데 이후 차범근호 시기에 워낙이나 아시아를 씹어먹으며 승승장구해서 조용히 잊혀졌고 홍명보는 계속 주축 수비수였다.
2.1.4.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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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월드컵 예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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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월드컵 멕시코전 때.
1998 월드컵 때는[15] 수비진의 핵심으로 팀을 이끌었다. 도쿄대첩을 비롯한 예선에서 한국팀은 펄펄 날면서 본선행을 결정지었고 덩달아 당시 감독이던 차범근, 주 득점원이던 최용수와 더불어 주가가 올랐다. [16] 그러나 본선에서는 세계와의 격차만 확인하며 처참하게 발렸고 이에 홍명보라고 별 수 있던건 아니었다. 0:5로 발린 네덜란드전에서 그냥 빨리 경기가 끝나기만 바랐다고 한다.
98 월드컵으로 한국축구는 처참하게 세계와의 격차만 확인했고 차범근 감독은 중도경질당하는 등 내홍을 겪었으나 홍명보는 계속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계속 감독이 바뀌는 와중에도 홍명보의 자리는 탄탄했으며 핵심이었다. 그리고 홍명보도 이젠 원숙미가 느껴졌고 팀이 지고 있거나 경기가 답답할 때는 공격에 가담하면서 센터백 오버랩을 본인의 장기이자 국대의 한 공격 옵션으로 만들었다.
2.1.5.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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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에서 이란과의 8강전에서 이동국의 극적인 골든골에서 완성된 오버랩을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은 0:1으로 패색이 짙다가 경기 종료 직전 김상식의 동점골로 극적으로 연장으로 간 상황이었다. 연장전 들어서 홍명보는 수비보다 공격에 더 치중했고 수비에서 2:1 패스를 이용해 갑자기 치고 나가며 노정윤에게 연결했고 노정윤은 이동국에게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주면서 골든 골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렇게 극적으로 올라가서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볍게 쳐발리며 3-4위전으로 내려앉았다(...).
2.1.6.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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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는 히딩크와 힘싸움 내지 자존심 싸움이 있었다. 히딩크는 틈만 나면 한국축구도 포백을 써야 된다며 역설했는데, 주지하다시피 홍명보는 쓰리백에 최적화된 수비수인지라 이 말은 곧 홍명보를 플랜에서 배제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 실제로 몇 달 동안 홍명보가 국대에 뽑히지 않은 시기가 있었고, 심지어 가끔 쓰리백을 쓸 때조차 히딩크는 유상철이나 송종국 등 멀티플레이어를 리베로로 시험해 보았다. 홍명보에겐 꽤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듯. 그러나 히딩크도 팀을 통솔하는 리더로서의 홍명보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에서는 쓰리백과 포백을 넘나들면서 그야말로 절정의 활약을 보여줬다. 홍명보가 이끄는 한국 팀의 3백 최진철-홍명보-김태영[17] 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18] 등 엄청난 강호들을 상대로 단 2실점[19] 만을 기록하며[20][21] 최고의 수비 라인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스페인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서 승리를 확정 짓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한국 축구 최고의 명장면이다.[22]
하지만 매우 아쉽게도 마지막 3/4위전에서 경기 시작 '''11초''' 만에 공을 터키 공격수 하칸 쉬퀴르에게 빼앗겨 실점하는 실수로 아직도 깨지지 않은 월드컵 최단 시간 골을 만든 흑역사도 있다.[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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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끝나고 홍명보는 '''아시아인 최초, 아니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지역 출신으로서 최초로 브론즈볼을 수상'''하게 되며 유종의 미를 거둔다.[25] 골든볼이 골키퍼인 올리버 칸이고, 실버볼이 공격수인 호나우두였던 것을 감안하면 월드컵 최고의 수비수로 평가받은 격이다. 또한 2002년 FIFA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도 다섯 표를 받으며 공동 17위에 랭크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참조(독일어)[26]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당시 박항서 코치가 와일드 카드로 뛰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며 사양했다.
2.1.7. 국가대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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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월드컵이 끝나고 11월 20일 브라질과의 평가전[27] 에서 황선홍과 함께 명예롭게 국대를 은퇴했으며 후배들이 무등을 태워서 경기장을 한바퀴를 도는 훈훈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여담으로 홍명보는 1990~2002 사이의 4회의 월드컵에 개근하였으며, 한국이 치렀던 '''모든 경기'''에 출전했던 선수이다. 그가 월드컵에서 치른 경기는 '''16경기'''로, 이는 아시아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1] 포항 김진형, 이석경, 조정현↔홍명보[2] 여담으로 이 트레이드가 포항의 압승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진형은 줄곧 유공 포백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통산 자책골 0'을 기록할 정도로 준수한 수비력을 보였고, 조정현은 통산 188경기에서 36골 23도움을 기록하며 이원식 이전 유공의 슈퍼 서브로 맹활약했다. 따지고 보면 윈윈 트레이드였는데 홍명보의 이름값이 넘사벽이고, 김진형과 조정현이 국가대표와 거리가 먼 선수들이어서 그렇지(...).[3] 그 중에 FC 바르셀로나와 AC 밀란이 있었다. 흠좀무...[4] 이때문에 당시 발매된 위닝일레븐 J리그 시리즈에서 홍명보의 능력치는 그야말로 '''신급'''이다. 가시와 레이솔을 잡고 확인해보면 팀 기본전술에도 센터백 오버랩이 설정되어있고, 켜는 순간 수비진 가운데의 노란 점 하나가 폭풍처럼 오버래핑을 한다.[5] 이 부분은 사실 홍명보가 주위선수들에게 지시하는걸보고 해설자가 비꼬는 투로 "뭐죠. 말디니가 두명인가요?"라는 식으로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6] 센터백 오버래핑을 팀 전술로 완성시킨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자 문제도 있고, 팀의 규모 문제도 있고 한국 프로에서는 쉽지 않았다.[7] 이때 이 말을 들은 일본 팬들 중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식의 볼멘소리도 조금 있었다고 한다.[8] 엄밀히 얘기해서 졸전은 아니었다. 그냥 당시 한국축구의 실력이나 수준이 세계레벨과 워낙이나 격차가 있었을 뿐이다. 당시의 한국축구의 위상은 현재 한국축구 위상과는 많이 달랐다. 즉, 제 실력을 발휘못했다거나 특별히 본선무대에서 더 못했다거나 했던 건 아니라는거[9]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전에서 일본과 2차례 대결했는데 이미 출전을 확정지은 대표팀이 홈경기에서 사지에 몰려 있던 일본에 0:2로 패배한 바 있다. 이때 홍명보는 경고 누적으로 1경기 출전정지가 되었기 때문에 출전할 수 없었다.[10] 단 한국팀의 첫 득점을 신고하며 뒤늦게나마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 골은 의미가 컸다. 이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진이 '''지금부터 재밌는 경기 양상이 될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 진짜로 이 골 이후 한국팀의 사기는 확 올라갔다.[11] 단, 당시 중계화면을 보면 추가시간이 2분 남아있었다.[12] 방송사에서 매일 새벽마다 틀어주는 애국가에도 서정원의 세리머니 장면이 나올 정도였다.[13] [image]잘 보면 이것도 별로 환하게 웃는 얼굴은 아니다(...). 당연한 것이 '''16강행이 달려있는 경기였고''' 득점을 했음에도 '''팀은 지고 있었다.''' 기쁨을 제대로 느낄 상황이 아니었던 것. [14] 애초에 월드컵 본선에서 2골 넣은 선수가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에 별로 없다. 2020년 현재에도 2골 이상 기록자는 홍명보를 비롯해서 안정환, 박지성, 손흥민(이상 3골), 황선홍, 이청용, 이정수, 유상철(이상 2골)이 전부며, 이중 2002년 세대가 아닌 인물은 이청용, 이정수, 손흥민 뿐이다.[15] 주장은 최영일이었다. 그런데 최영일이 결장한 경기(멕시코전 등)엔 유상철이 대신 찼다.[16] 다만 당시 예선을 하면서 포스트 홍명보라며 장대일이란 신예가 등장하며 몇 경기는 빠지기도 했었다. 미남에 연예인과 약혼도 했던 장대일은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로는...[17] 물론 송종국과 이영표가 양쪽에 서서 수비에 활발하게 가담함으로써, 수비 상황에서는 5백과도 같은 상황이기도 하였다.[18] 훗날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은 2006, 2010, 2014 월드컵에서 차례로 우승을 차지한다. 그러나 2018 월드컵에서 터키와 이탈리아가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고, 폴란드, 독일이 조별리그에서 탈락,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16강에서 탈락하며 이 기록은 깨진다.[19] 미국전에서 1실점, 그리고 터키전에서 3실점을 기록하며 7경기 6실점, '''0점대'''의 실점율을 기록했다. 지옥과 다름없는 최악의 대진표로 월드컵 7경기를 모두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0점대 실점율을 기록했다.[20] 이 당시에 이운재 역시 야신상 유력 후보였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선방을 선보였다.[21] 당시 상대 공격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와 파울레타, 이탈리아의 크리스티안 비에리, 스페인의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독일의 미하엘 발락 같은 유럽에서도 하이 레벨의 월드클래스 선수들이었다.[22] 애국가 영상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23] 이 사건(?)에 대해 홍명보는 '''"유상철이 골키퍼에게 패스할 줄 알았다. 그 상황에서는 골키퍼에게 패스하는게 당연하다"'''고 해명했다.*[24] 이 사건을 계기로 홍명보와 유상철이 사이가 틀어져 그 다음부터 공식 석상에 한 번도 같이 안 나왔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당연히 루머이다. 그 후로도 같이 잘만 나왔다.# 월드컵 3-4위전은 사실상 승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보너스 경기와 같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난다 긴다하는 월드클래스 선수들도 어이없는 실수를 경우가 굉장히 많은게 축구인데 이거 가지고 싸워서 사이가 틀어졌다는건 말도 안된다. 해당 경기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원래 월드컵 3-4위 결정전은 그동안 경기에 못뛰던 벤치 멤버가 나오거나 유종의 미를 거두는 식 또는 김빠진 경기가 된다. 한국은 당시 월드컵 4강을 달성하고 축제 분위기에서 보너스 경기처럼 대회를 마무리 했기 때문에 터키에 연속으로 골을 먹은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김병지가 이운재를 선택한 히딩크 감독의 결정을 존중하고 인정하지만 3-4위전에서는 내보내줄 수 있지 않았냐며 푸념하기도 했다.[25] 월드컵이 끝나고 방송에서 그전까지는 조별 예선만 마치면 짐싸서 한국으로 왔으니 이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웃으면서 얘기했다. 사실 한국에게 월드컵은 패턴이 아시아에선 승승장구->세계무대에서 멸망이던 시절이라(...)[26] 또한 같은 해에 2002년 발롱도르 투표에서는 설기현이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누렸다.참조[27] 3-2로 대한민국이 아쉽게 패배. 호나우두가 혼자서 2골을 넣었으며 경기 막판에 호나우지뉴가 페널티 킥으로 결승골을 넣어 브라질의 전설 마리우 자갈루 감독에게 A매치 100승을 안겨준 경기로 더 유명하다. 참고로 이 당시 대한민국 감독은 김호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