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영(1970)
[clearfix]
1. 개요
前 축구 선수, 現 축구 지도자로 전남 드래곤즈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선수로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투혼을 보여주며 4강신화에 기여하는등 전설적인 수비수였다.'''"다음 게임, 광주에서 스페인 반드시 또 잡겠습니다. 국민들(께서), 성원해주십시오."'''
- 2002년 6월 18일 이탈리아전 승리 직후
은퇴 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으며, 2012년 대한민국 올림픽 축구대표팀 수비 코치로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동메달) 수상에 기여했다.
현재 K3리그에 참가하는 천안시 축구단의 감독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전남 드래곤즈 (1995~2005)
[image]
동아대, 국민은행을 거쳐 전남의 창단 멤버로 합류하여 전남에서만 11년을 뛴 전남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201경기에 나서서 4골을 넣었다.
현역 시절 아파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친 수비 로 유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역 내내 퇴장 기록은 없고, 경고 또한 33번에 불과할 정도로 깨끗한 수비를 선보인 선수. 정작 파이터 이미지는 없던 최진철이 K리그 경고 2위를 마크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의 결과다.
축구화에 일부러 쇠로 된 징을 박아, 경기장 입장할 때부터 상대 선수에게 쇳소리를 들려주며 위압감을 심어줬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왼발을 쓰는 수비수로 유명하고, 이 덕분에 월드컵 당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고, 실제 오퍼도 몇 건 있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에서도 오퍼가 온 적이 있었는데, 뉴캐슬 측이 나이가 너무 많다며 턱없이 낮은 이적료를 부르는 바람에 딜이 무산되었다.[1] 특이한 것은 파올로 말디니와 같이 실제로는 오른발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을만큼 연습해서 세트피스를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왼발을 향상시켰다는 점.
2005년 11월 6일,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광양 홈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로는 A매치 105경기에 나서서 3골을 기록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5번째 센추리 클럽 가입자이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주전 수비수로 출전했다.
1992년 10월 21일, UAE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여 1993년 3월 9일, 캐나다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첫 골을 넣었다. 이후 미국 월드컵 1차 예선에서 활약한 이후 한동안 대표팀에서 멀어졌다가 1996년 3월에야 다시 선발되었다.
1997년 차범근 감독이 부임한 이후 꾸준하게 대표팀에 선발되어 수비진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고,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최종 명단에 승선하였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홍명보, 최진철과 함께 3백을 형성해 한국 대표팀의 4강 신화에 일조했다. 16강 이탈리아전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에도 불구하고[2] 이탈리아전 당시에는 코칭스태프들이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까봐 골절 사실을 숨기고 단순 타박상이라고 알려줘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보호대, 이른바 '타이거 마스크'를 착용해 다음 경기에 나서면서 유명세를 탔다. 덕분에 일반인은 보호대를 벗은 그의 얼굴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 타이거 마스크에는 비화가 있는데, 당시 대표팀 의료진은 김태영과 똑같이 코뼈 부상을 당했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수비수인 미야모토 츠네야스가 특수 제작한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온 것을 떠올렸고, J리그 소속이었던 유상철이 일본의 마스크 제작업자를 수소문하게 된다. 다행히 연락이 닿아 이탈리아전 다음날 새벽에 일본에서 제작자 두 명이 한국으로 날아와 김태영의 얼굴 본을 뜬 뒤 10시간 만에 마스크를 만들 수 있었다.
[image]
김태영의 마스크
[image]
미야모토의 마스크
여담으로 이 당시에 제작한 타이거 마스크는 은퇴 후 김태영 선수의 아내가 액자를 짜 왔고 그 액자에 보관한 상태로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한다. [3] 하지만 4강 독일전에서 결승골 실점의 빌미가 된 패스 미스를 범한 흑역사도 있다.[4][5]
여담으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룸살롱 마담들을 대상으로 한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남성적인 매력이 있다''' 는 것.[6] 하지만, 설문조사가 진행된 02년 당시 김태영 선수가 거의 30대 중반이었던만큼, 그 연령대의 선수를 냉정한 외국인 사령탑이 눈도장 찍을 정도면, 어머니, 부인 등 가족들의 철저한 내조가 뒷받침되었다고 보는게 옳을 듯.
2003년 코엘류호 출범 이후에도 유상철, 최진철과 함께 수비 라인을 형성하여 2004년 본프레레호 출범 이후 2004 AFC 아시안컵 중국에도 선발되어 7월 19일 요르단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7] 김태영은 독일 월드컵 출전도 내심 노렸으나 많은 나이로 인한 노쇠화와 2004년부터 잦은 부상을 겪기 시작해 회복 이후에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해왔다. 결국 국가대표에 대한 미련을 접고 2004년 12월 대표팀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2.3. 플레이 스타일
180cm의 센터백으로서는 작은 키[8] 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대 최고수준의 수비수로 추앙받는다. 최진철-홍명보-김태영 이 조합은 한국의 역대급 수비라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원래 왼발을 못 썼지만 파울로 말디니처럼 죽어라 연습해서 왼발을 잘 쓸 수 있게 된 것을 보면 노력이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김태영은 여기서 대인마크 능력과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자신의 작은 키를 커버했다. 당시 크리스티안 비에리라는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에게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음에도 경기를 뛰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투지와 끈질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스페인 전에 라인이 뚫려 침투하던 루이스 엔리케를 끝까지 쫓아가 마크하는 장면은 김태영의 플레이의 백미. 작은 키지만 운동능력이 뛰어나 제공권이 제법 뛰어난 편이었고, 상술한대로 속도와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 그야말로 한국의 '칸나바로'와 같은 스타일이라 볼수 있다.
실제로 수비수임에도 스피드가 빠른 편이어서 대인마크에 약하고 스피드가 빠르지 않은 홍명보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고, 이를 살려 강점인 대인마크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본 포지션은 센터백이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윙백으로 출전했다.[9]
2.4. 기록
2.4.1. 전남 드래곤즈
- K리그 준우승 1회: 1997
- FA컵 우승 1회: 1997
- FA컵 준우승 1회: 2003
- 아디다스 컵 준우승 1회: 1997
- 대한화재 컵 준우승 1회: 2000
- 아시안 컵 위너스컵 준우승 1회: 1999
2.4.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AFC 아시안컵 3위: 2000
- FIFA 월드컵 4위: 2002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 2003
2.4.3. 통산 성적
2.4.3.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2.4.4. 주요 개인 수상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수상: 2002
- K-리그 베스트 11 선정: 2002, 2003
- K-리그 대상 공로상 수상: 2005
- 푸마-스투 프로축구 베스트11 특별상: 2005
3. 지도자 경력
2006년 관동대학교 축구부 코치를 거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각급 코치를 역임하면서 홍명보 감독을 보좌하였으며, 2009 U-20 월드컵 8강 진출과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올림픽 이후 울산 현대의 코치로 부임했으나 이후 홍명보의 부름을 받고 A대표팀 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브라질 월드컵 종료 후 부진한 결과를 책임지고 홍명보가 물러나면서 같이 물러났다.
2014년 12월 15일 노상래 감독의 부름을 받고 친정팀 전남 드래곤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하였으나, 2015 시즌 후 성적 부진을 이우로 사임했다. 이후 홍명보를 따라 항저우 뤼청행이 거론되었지만, 홍명보를 따라가지 않고 해설가로 활동하였다. 전남 수석 코치 당시 감독(노상래)-수석코치(김태영)-선수(김병지)가 모두 70년생 동갑내기 친구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2016년 6월 태국 프리미어 리그로 갓 승격한 팀인 파타야 유나이티드 FC의 감독 제안을 받았지만 선수단 구성, 환경적인 문제가 많아 감독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image]
2016년 12월 12일 이운재와 함께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코치로 부임하면서 U-20 대표팀 시절 같은 코치였던 서정원 감독과 재회하였고, 2018시즌까지 활동하였다.
2020시즌을 앞두고 당성증 감독의 후임으로 K3리그 참가팀 천안시 축구단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계약기간은 최소 기간 2년, 최대 3년까지이며 연봉은 역대 천안시청 축구 감독 중 최고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전임 감독 당성증이 구단을 떠난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던 만큼 천안 팬들의 인식은 썩 좋지 못했다.
4. 해설자 경력
2006 FIFA 월드컵 독일 당시에는 여성 국제심판인 임은주[10] 와 함께 MBC에서 해설자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전남 코치에서 사임한 후 2016년에 MBC의 축구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이후 MBC에서는 하차했으며, 2016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SBS에 축구 해설위원으로 합류했다.
5. 여담
MBC 공감토크쇼 놀러와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특집에서 이정수 선수가 골을 넣는걸 예언하기도 했다. 본래 공격수 출신으로 '''골맛을 아는''' 이정수의 면면과 전남 드래곤즈 시절의 스승 허정무 감독의 성향을 감안하여 예측한듯 한데, 그래도 놀랍기는 마찬가지.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98년에는 13번을 달았으나 2002년 월드컵 때는 등번호 '''7번'''을 달고 활약했다. 10번 못지 않은 7번의 상징성과 그의 포지션을 감안했을 때 등번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면이 있긴 하나, 아마도 10번을 이영표에게 배정하였던 것과 비슷한 이유로 김태영이 이 등번호를 받게된 게 아닌가 싶다.[11]
이을용의 증언에 의하면 겉보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착하고 깔끔한 성격이라고 한다. 후배랑 방을 같이 써도 본인이 청소 다 하고 빨래를 칼같이 갠다고 한다.
[1] 만약 이적이 성사되었다면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가 나왔을 판이었다.[2] 당시 부상을 낸 축구선수는 바로 크리스티안 비에리 [3] 2016년 피파온라인 3 2002 레전드 리턴즈 이벤트로 찍었던 영상에서 오랜만에 쓰고 나왔다.[4] 다만 이 실점은 수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이민성, 홍명보, 유상철의 책임도 있었다.[5] 당시 영상을 자세히 보면 패스 미스를 한 선수의 등번호가 7번이다.[6] 사실, 김태영 코치의 고향인 고흥군은 옛날부터 완력이 좋은 장사들을 배출하기로 이름이 있는 곳이다. 호남에서는 "여수에서 돈자랑하지 말고, 고흥에서 힘자랑하지 마라."는 말이 지금도 전해진다.[7] 요르단전 이후 무릎 부상을 당해 남은 대회를 소화하지 못했고, 김태영의 빈 자리는 당시 전남 시절 동료였던 만 19세의 김진규가 출전했다. 김진규는 어린 나이로 인한 경험 부족을 제대로 드러내어 8강 이란전에서 이영표와 함께 수비 불안을 노출하여 3-4 패배의 원흉이 되었다.[8] 당시 동아시아 기준으로 작은 키는 아니다. 당시 일본 수비의 정신적 지주였던 미야모토 츠네야스가 176이었고 히딩크호 출범 초기 황태자로 불리웠던 송종국은 175의 신장으로 히딩크호의 중앙수비(스위퍼)를 담당했다. 단 유럽 이외의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유럽 선수들과 비교해보면 작은 것은 맞다.[9] 그래서 그런지 피파 온라인 4에서는 김태영을 센터백 포지션보다 윙백이나 풀백 포지션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능력치가 한 단계 더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10] 강원 FC 대표이사와 FC 안양의 단장 및 야구의 키움 히어로즈 단장을 지냈던 그 분 맞다.[11] 2004년 김태영이 대표팀에서 은퇴한 이후 7번은 2005년부터 박지성이 이어받게 되면서 한국 국대의 에이스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고, 현재는 손흥민이 이 등번호의 주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