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
雨傘革命 / Umbrella Revolution (2014 Hong Kong protests)
雨傘運動 / Umbrella Movement
1. 개요
국민당 치하에서는 자유의 많고 적음이 문제지만 공산당 치하에서는 '''자유의 있고 없음이 문제다.'''
추안핑(儲安平 1909~1966)이 1947년 잡지 <觀察>에 발표한 '中國的政局'이란 글에서.[출처]
2014년 9월 28일부터 시작된 홍콩 주민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 처음에는 대학생·지식인 중심의 시위였으나, 이후 중·고등학생과 일반인들의 광범위한 지지까지 합류한 전 홍콩적인 시위가 되었다. 시위 전개 과정에서 홍콩 경찰이 최루탄과 최루액·살수차 등을 이용해 진압을 펼치자 시민들이 지참하고 나온 우산[2] 을 이용해 최루액을 막아내는 모습이 보이자 '우산 혁명(Umbrella Revolution)'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한국 언론에서도 우산 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홍콩에서는 정치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이전에도 여러 번 일어났지만, 이러한 대규모 시위로 홍콩 정부의 평판도 손상되었고, 주변국(특히 대만)도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어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값을 치르든, 우린 이 문제를 다음 세대에 떠넘길 수 없습니다!
'''이번 세대가 우리의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조슈아 웡(黃之鋒)이 우산 혁명을 주도하며.
2. 주요 세력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은 크게 셋이다.
- 사랑과 평화의 센트럴 점령(讓愛與和平佔領中環·Occupy Central with Love and Peace, 이하 센트럴 점령)
홍콩대학 법학부 교수 베니 타이(戴耀廷·Benny Tai), 홍콩중문대학 사회학부 협력교수 찬킨만(陳健民·Chan Kin-Man), 침례회 목사 추이우밍(朱耀明·Chu Yiu-Ming)이 공동대표로 있다. 2013년 1월 16일 "센트럴을 점령하자"는 내용이 담긴 <시민 저항의 가장 파괴적인 무기(公民抗命的最大殺傷力武器, Civil disobedience's deadliest weapon)>라는 베니 타이의 기고가 계기가 되어 3월 27일 창단했다. Occupy Central이라는 구호에서 볼 수 있듯 월가 점령 시위의 구호를 답습했으며, 비폭력을 표방하고 있다.
- 홍콩 전상학생연회(香港專上學生聯會·Hong Kong Federation of Students, 이하 홍콩 학련)
홍콩 최대의 대학생 조직. 그 이름대로 청년 세력을 대표하고 있다. 홍콩대학 문학부 학생인 알렉스 차우(周永康·Alex Chow)[3] 가 총비서장이다. 시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건 홍콩중문대학 학생이자 부비서장인 레스터 셤(岑敖暉·Lester Shum).
8개 대학 학생회가 회원으로 가맹했다. 서울에만 수십 개의 4년제 대학이 있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고작 8개만 가맹했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홍콩의 4년제 대학은 저 8개뿐이다. 즉 홍콩 대학생 조직 전체가 시위에 가담한 것이다.
8개 대학 학생회가 회원으로 가맹했다. 서울에만 수십 개의 4년제 대학이 있는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고작 8개만 가맹했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홍콩의 4년제 대학은 저 8개뿐이다. 즉 홍콩 대학생 조직 전체가 시위에 가담한 것이다.
- 홍콩대학 학생회
- 홍콩중문대학 학생회
- 홍콩이공대학(香港理工大學·The Hong Kong Polytechnic University) 학생회
- 홍콩시티대학(香港城市大學·City University of Hong Kong) 학생회
- 홍콩침례대학(香港浸會大學·Hong Kong Baptist University) 학생회
- 링난대학교(嶺南大學·Ling Nan University)[4] 학생회
- 홍콩수인대학(香港樹仁大學·Hong Kong Shue Yan University) 학생회
- 홍콩과학기술대학교(香港科技大學·The Hong Ko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학생회
- 학민사조(學民思潮·Scholarism)
혁명의 상징이자 스타로 급부상한 학생운동가 조슈아 웡(黃之鋒·Joshua Wong)이 위원장이다. 표준중국어로는 황즈펑, 광동어로는 웡지풍이라고 부른다. '학민'은 "학생도 시민의 의무를 이행하여 적극적으로 급진적 사회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조'는 5·4 운동에서 나온 용어로, 중국의 전통 사상을 버리고 민주·사상·언론의 자유를 내세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고등학생 활동가의 조직치곤 꽤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데, 중국 공산당이 홍콩 정부를 통해 주관하는 중국 국민 교육의 철회를 구호로 2011년에 창단했다.[5] 청소년 계층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원칙적이고 강경한 성향을 띤다. 그래서 중국 본토에서는 이들을 극단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했다.
중·고등학생 활동가의 조직치곤 꽤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데, 중국 공산당이 홍콩 정부를 통해 주관하는 중국 국민 교육의 철회를 구호로 2011년에 창단했다.[5] 청소년 계층의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원칙적이고 강경한 성향을 띤다. 그래서 중국 본토에서는 이들을 극단주의자로 규정하기도 했다.
3. 배경
1997년, 영국에게서 홍콩을 다시 반환받을 때 덩샤오핑은 홍콩에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가 적용되지 않고, 현재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최소한 50년간 유지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유지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6] 그리하여 홍콩은 중국의 일개 행정구역이면서도 독자적인 헌법·행정부·법원을 보유하는 고도의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홍콩의 정부수반인 홍콩 행정장관은 <홍콩 기본법 제45조>에 따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통해 선출되므로 상대적으로 친중파가 당선되기 용이한 구조였다. 그래서 홍콩의 야당 세력인 '민주파'는 행정장관 선거의 직선제를 꾸준히 요구해왔고, 결국 2017년부터 홍콩 특별행정구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행정장관을 선출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위 짤방에서 왼쪽은 홍콩 TVB에서 개최하는 미인대회의 결선 방식이고, 오른쪽은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안이다. 저 미인대회는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이 10인을 뽑고, 이 중에서 또 3인을 남긴 뒤, 최후의 1인은 1인 1표의 팬 투표로 결정한다. 그런데 중국 정부의 제안은 이와 놀랄만큼 닮았다. 중국의 의회인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과반수 지지를 얻은 후보자 2~3인을 내보내면, 홍콩 구민은 이 중 1명을 직접 선거로 뽑으라는 것이다. 당연히 전국인민대표대회는 민주파·반중파 인사가 홍콩 행정장관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반길 리가 없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직접 선거를 하더라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허가를 받은 친중파 후보 1·2·3 중 한 사람을 뽑는,''' 심하게 말하면 '어용 선거'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직접 선거는 보장하지만 후보는 대륙 입맛에 맞는 사람만 허가하겠다'는 조삼모사와 같은 논리로 보고 울화통이 터진 홍콩인들은, 입후보의 자유까지 보장하라며 시위에 나서게 된다.
일국양제 원칙 자체야 50년은 형식적인 숫자이고 중국인도 홍콩인도 둘 다 자동 연장으로 보며[7] , 그나마 "사회주의 체제"는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고 중영 공동성명에 명시되어 있어 상관없지만 이렇게 되면 일국양제는 껍데기만 남고, 실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중국 중앙정부가 꼭두각시 행정장관을 통해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르게 되어 대륙과 홍콩은 통합된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래서 홍콩인들은 이 사실을 직시하고 반발 운동을 벌여 왔고, 이것이 폭발한 것이 우산혁명이다. 참고로 홍콩을 방문한 원자바오 총리는 성난 시민들에게 둘러싸여 항의를 받기도 했다.
물론 이는 직접적인 기폭제였을 뿐이고, '홍콩'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민주파는 이전부터 계속 친중파나 중국 정부의 홍콩 간섭 정책에 반발해왔다. 이를테면 조슈아 웡은, 과거 중국이 홍콩 고등학교 교과목에 중국 공산당에 대한 찬양 내용을 담고 있는 국민교육 과목을 추가하려고 하자 학생들의 시위를 조직해 교과목 채택을 무위로 돌려놓았다. 또 홍콩 반환 이후 중국인이 대거 홍콩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물가가 상승하고 일자리는 줄어들어, 홍콩 젊은이들의 삶이 어려워진 것을 시위의 원인 중 하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기사
4. 진행 상황
[image]
주요 시위 지역. 처음에는 애드미럴티(金鐘·Admiralty) 등 도심에서 시작하였으나 코즈웨이 베이(銅鑼灣·Causeway Bay)와 완차이 구(灣仔區·Wan Chai District)를 거쳐 카우룽 반도의 몽콕(旺角·Mong Kok)까지 시위가 번지고 있다.
- 8월 3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가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를 사실상 거부했다.
- 9월 22일: 홍콩의 24개 주요 대학들이 홍콩 중문대학교에서 1주일의 동맹 휴학을 선언하였다.[8] 센트럴 점령과 홍콩 학련 등이 이 집회에 참여했으며, 이후 산발적인 집회를 통해 주민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주민들은 센트럴 점령의 활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등 소극적인 분위기였다.
- 9월 26~27일: 밤부터 아침까지 학생 시위가 벌어져 50명이 체포됐다. 시위대는 26일 밤 홍콩 정부청사 앞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다 청사로 진입을 시도해 경찰과 충돌했다. 그리고 조슈아 웡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조슈아 웡은 이날 밤 체포되었는데, 체포되기 직전 "10년 후 초등학생들이 홍콩의 민주화를 위해 시위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라고 역설하여 찬사를 받았다.
해가 뜬 뒤에도 시위가 계속되었다. 당초의 시위자는 100여 명 정도로 적었으나 시위대는 갈수록 늘어났다.
- 9월 28일: 실질적인 '혁명'의 시작. 홍콩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여[9]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강경 진압은 시위대에 대한 지지가 도리어 늘어나는 역효과를 낳았다. 우산이 시위의 상징으로 우뚝 선 날이었다.
- 10월 1일: 중국의 국경절[10] 이었으나 시위대는 시위를 계속하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도심지에서의 시위이고 무려 10만여 명의 시민이 시위에 나섰으나 (외신들의 공통된 보도에 따르면) 철저하게 비폭력적이고 질서정연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우산 혁명'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위대가 들고 있는 물품은 우산이나 마스크 정도가 전부이고,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숙제를 하는 모습이나 시위대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 같은 게 보도되고 있다. 센트럴 바깥으로 시위가 확산된 것도 이날이었다. 시민단체들의 예상을 넘어선 규모로 시위가 커져 원래의 시위구역 바깥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난 것.
시위대 중 학생 지도부는 행정장관인 렁춘잉(梁振英, Leung Chun-Ying)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으며, 10월 2일까지 퇴진하지 않을 경우 점거 구역을 정부 청사 등으로 확대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 10월 2일: 렁춘잉과 학생들의 면담이 있었으나 결렬되었다.
- 11월 18일: 기세를 탄 홍콩 경찰은 몽콕에 설치한 바리케이트 철거에 나섰다.
- 11월 26일: 시위대의 핵심인물인 조슈아 웡이 다시 체포되었다. 레스터 셤 등 혁명의 주요 인물들도 상당수 체포되어, 우산 혁명은 중요한 국면을 맞게 되었다.
- 11월 27일: 홍콩 카우룽싱(九龍城) 법원은 조슈아 웡과 렁콕훙(梁國雄) 사회민주연선(社會民主連線) 주석 등 당국이 체포한 시위대에게 몽콕 지역의 출입 금지를 조건으로 보석을 허가한다고 밝혔다. 조슈아 웡은 체포 과정에서 폭력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홍콩 경찰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몽콕 지역에 배치한 경찰관을 2배 수준인 6000명으로 증원했다고 한다.
난리통에 정말로 시위자 1명을 집단 폭행한 경찰관 7명이 체포되었다.
- 11월 30일: 조슈아 웡의 체포는 시위대의 재결집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했으며, 4천여 명까지 불어난 시위대가 항의의 뜻으로 특별행정청 정문 봉쇄에 나섰다. 당국은 청사를 폐쇄했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후추 스프레이와 곤봉이 난무했고 부상자는 30명을 넘겼다.
시위대의 구호가 뜬금없이 "쇼핑 하러 가자"[11] 로 바뀌어 큰 웃음을 주고 있는데, "시위 캠프 철거 후 더 많은 시민이 몽콕에 쇼핑을 하러 가야 한다"는 당국의 발언을 조롱한 것으로 보인다고. 시위대는 당국의 '만만디' 전략에 '혁명의 불씨'를 꺼뜨릴 뻔했다고 보고, 적극적인 반격을 통해 충돌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전술의 선회를 시도하고 있다.
- 12월 1일: 중·고등학생이 시위에 가세하여 시위대의 규모가 불어나고 있다. 홍콩 법원은 시위대의 본거지가 있는 애드미럴티의 간선 도로에 대한 점거 금지 명령을 내렸다. 렁춘잉은 오후 기자회견에서 "지금부터 주저없이 법 집행을 하겠다. 경찰의 관용을 힘이 약한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선전포고를 보냈으며, 조슈아 웡 등 3명은 "지금 이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 12월 2~3일: 센트럴 점령의 공동대표인 베니 타이·찬킨만·추이우밍이 2일 경찰에 자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센트럴 점령에선 "자수는 도심 점거 운동의 실패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시위대의 철수를 설득하기 위해 법적 처벌을 감수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다음날 자수했으며, 경찰은 이들을 조사한 후 별 일 없이 석방했다. 학민사조와 홍콩 학련 등 학생 세력은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 12월 4일: 홍콩 학련이 도심 점거 시위 중단 여부를 1주일 안에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센트럴 점령 측이 자수를 선택하면서 대학생들 역시 방식의 변화를 시도하려는 모양새다. 조슈아 웡은 단식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는데, 단식투쟁에 2명이 추가로 참여했으나 자신은 혈당 저하로 포도당을 주입받는 상황.
- 12월 6일: 조슈아 웡이 단식을 중단했다. 108시간동안 단식을 했으나 의사가 뜯어말려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다만 단식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 12월 10일: 시위대가 지역 주민에 사죄 및 감사함을 표명하는 행사를 단행했다. 시위대의 동력이 바닥났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 12월 11일: 시위대 본거지인 애드미럴티 지역의 캠프의 철거작업 시작
- 12월 15일: 마지막 남은 공식적인 시위대 캠프 철거작업 종료. 시위 해산.
5. 결과, 영향
시위가 12월 15일자로 종료되면서, 홍콩 시민들은 '진정한 민주화'를 쟁취하지 '''못했다'''. 사실 이번 직선제 문제도 홍콩만의 일이 아닌 (최종적으로) 중국 전체의 일임을 생각해볼 때 애당초 성공하리라는 기대는 상당히 어려웠지만.
하지만 홍콩 시민들은 이번 우산 혁명으로 홍콩의 민주주의 수준에 대한 공론화, '''중국 공산당이 약속한 높은 수준의 자치권과 일국양제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세계에 폭로''', 그리고 '''홍콩 시민 스스로의 단결력'''을 쟁취하였기 때문에 이번 시위는 완전한 실패가 아닌 절반의 성공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한편 중국 대륙 정부는 괴뢰 직선제를 지켜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홍콩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이 해외에 알려져 비난을 받았으며, 홍콩 시민들을 전혀 납득시키지 못함으로써 홍콩의 반중 감정을 심화시키고, 대만에서도 중국 공산당에 그나마 협조적인 중국 국민당이 참패하는 등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키려다 도리어 역풍이 불어 손해가 만만치 않았다.
더불어 세계적인 언론-인터넷 통제국인 중국은 이와 관련된 모든 검색어를 통제했고, 그동안 통했던 인스타그램이 이 때를 기점으로 차단되었다.
그리고 시위 종료 후 약 한 달 째인 2015년 1월 12일, 홍콩 경찰이 시위 핵심 인물들을 하나씩 체포하거나 소환 조사하려 하고 있다. 이에 맞서 홍콩 민주파는 새로운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2015년 9월 28일, 우산과 천막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우산혁명 주도세력들은 9월 28일을 1년전 '우산'이 처음 등장한 날로 보아 기점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홍콩의 민주주의와 자치를 제대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홍콩 독립운동의 기세가 커지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6. 반응
6.1. 중국 내의 반응
친중파인 렁춘잉이 행정장관으로 있는 홍콩 정부는 당연히 이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강경 진압을 천명하였고, 진압에 나선 경찰은 최루탄 등을 사용하여 진압에 나섰다. 또한 10대 청소년을 포함하여 시위대 75명을 연행하였으나, 이게 시위대를 향한 광범위한 지지를 부르는 역풍을 불러오자 강경책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뒤에서 친중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는 루머가 횡행하고 있다. 경찰이 친중 단체의 홍콩 시위대 습격을 무시한다거나 하는 루머도 있었다. 다만 모두 확실하지는 않다.
중국 공산당은 결론적으로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홍콩 내정은 홍콩인이 알아서 하라"는 입장이었고, 홍콩이 분리독립만 선언하지 않으면 무력개입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내심이야 친중국 세력을 지지했겠지만, 어쨌든 사태 내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시위대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으므로, 외교부 대변인 화춘잉(華春瑩)을 통해 '법에 의한 처리'를 주문하였다. 10월 1일엔 시진핑이 '일국양제'를 고수한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현재 중국 공산당의 직선제안을 고수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다. 또 여론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인스타그램 등 인터넷 SNS 서비스를 차단하고, 중국 대륙 내 인터넷과 언론에서 우산 혁명에 대한 내용을 검열하는 한편, 외신의 홍콩 관련 보도를 차단하는 등 언론 통제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위 한 달이 지나자 시진핑이 직접 반란이라는 단어까지 언급하며 강경 대응할 태세임을 예고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홍콩이 전세계적으로 보는 눈이 많다보니 아무리 자국의 특별행정구이고 법적 근거가 있다고 해도 국제사회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산 시위는 티베트나 위구르와는 달리 독립 문제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자치를 보장한 홍콩의 내정이기 때문에 중국측이 개입할 명분도 없고, 더군다나 여기에 개입했다가 유혈사태라도 나면 서방측에게 중국 체제가 민주화를 탄압한다는 좋은 선전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더욱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독립운동 세력이 일부 개입하기는 했지만 주류 세력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홍콩의 민주주의는 중국 공산당이 중영공동선언으로 50년간 보장을 약속했기 때문에, 더더욱 개입의 명분은 없는 상태였다. 천안문 학살의 잔인한 유혈진압 이후 현재까지도 서방측의 인권공세에 별말 못하는 것을 보면 섣부른 유혈사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격을 추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2]
'''더 큰 이유는 시위의 최고조기에서도 학생을 제외하면 이 시위에 대해 홍콩 중산층의 반응이 싸늘했기 때문에''' 실패는 예상되었고, 중국 공산당이 섣불리 개입해서 민심을 자극하기 보다는 그대로 놔두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시위가 끝난 후 공산당의 입김이 들어간 선거제에 대한 지지율이 도리어 더 높아졌다. 홍콩 교민신문
다만 천안문 사태 당시보다 중국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과 미-중 간 상호교류가 넘사벽으로 커진 것, 미국의 대외 영향력과 경제 상황이 (해외에 대한 적극 개입을 또 시도하기에) 다소 어려운 상황임을 감안하면. 미국은 어지간한 대참사가 벌어지지 않는 한 웬만하면 방관할 가능성도 있다. (ISIL의 준동에도 이전 테러와의 전쟁 때와 같은 개입은 하지 않는 미국이다!) 당장 천안문 사태 직후의 경제제재도 잠시 하는 척하다가 그냥 유야무야되었다. 결국 홍콩에서 섣불리 일을 벌였다간 가장 손해보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중국 공산당이 너무나 잘 알기에 불상사는 없었다. 티베트나 위구르와 같은 분리독립세력에 대해서는 엄단을 부르짖는 시진핑이 홍콩에 대해선 말로만 강경대응을 논했을뿐이다. 물론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티벳이나 위구르와는 달리 중국에서 독립하자는게 아니기 때문에 중국이 개입할 명분도 없었다. 실제로 홍콩의 시위는 일부 지역, 일부 학생 계층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굳이 무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홍콩 시위 자체보다는 이 운동이 자국에 옮겨붙지 않을까 더 염려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위에 대한 보도는 중국 매체에서 철저히 통제되었다.
6.2. 중국 외의 반응
백악관 대변인 조니 어니스트는 정례 브리핑을 통해 "홍콩 기본법에 따른 홍콩의 보통선거와 홍콩인들의 열망을 지지한다"고 발언하여 시위대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국무장관 존 케리(John Forbes Kerry)는 중국 외교부장 왕이(王毅)의 면전에서 "홍콩의 시위를 존중해야 한다"며 우산 혁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물론 왕이는 이를 내정간섭으로 보고 맞받아쳤다.
현재 홍콩 문제와 관련해서 앞으로 32년간 개입할 권리가 있는 유일한 국가이고, 당연히 개입에 나섰다. 1997년 중국에 반환하되, 50년간은 홍콩의 체제를 보장하기로 합의했기에, 영국이 유사시 개입할 권리가 인정된다. 영국은 홍콩의 체제보장과 관련하여 2047년까지 해당 합의에 의거 중국이 일국양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칙이 훼손되고 있음에 우려를 표했고, 외무부를 통해 홍콩의 보통선거안을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 닉 클레그(Nicholas William Peter Clegg) 부총리는 항의의 의미에서 중국 대사를 초치할 계획임을 밝혔다. 일국양제가 중국의 일방적 약속이 아닌 영-중 양국의 합의이기 때문에 영국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일국양제가 지켜지는지를 확인하겠다며 바로 조사단을 보냈는데, 11월 30일, 우산 혁명을 조사하려는 영국 조사단의 홍콩 방문을 중국이 허용하지 않겠다고 한 사실이 밝혀졌다. 거절 사유는 중국이 홍콩의 체제에 있어 아직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이 개입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것.
마잉주는 물론, 정부 차원에서 시위대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중국은 대만에 하나의 중국을 내세워 압박하면서 홍콩의 일국양제를 대만에도 적용하겠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으므로, 홍콩이 일국양제 하에서 최대한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대만 입장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대응은 일국양제가 훼손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시위가 다시 불붙은 11월 29일 대만에서 지방선거가 열려, 친중 성향의 중국 국민당은 민주진보당에 대패했다. 홍콩을 향한 중국의 대응이 반중 정서를 부추겼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을 정도로, 대만은 우산 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결국 이로부터 약 1년 후 정권까지 반중성향이 강한 민진당 정부로 바뀐다.
관영 언론을 통해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다. 다만 반정부 성향의 민간 언론들은 시위를 지지했다.
정부 차원의 논평은 없었지만, 진보 성향의 한국인들 중에 지지를 표하는 이들이 있었고 홍콩의 한인 유학생들 일부가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시위대들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참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은 정부에 스스로 맞서 싸워 민주화를 쟁취해낸 국민들이기 때문에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7. 시위 주동자 사법처리
- 시위를 주도한 조슈아 웡 등의 학생운동가들은 보석상태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2016년 7월 유죄판결을 받았다. 형량선고는 8월에 있다고 한다. 중국과 친중파 측은 조슈아 웡등의 학생운동 세력이 미국이나 서방과 같은 외부세력의 사주를 받았다는 선전전을 펴고 있다. 8월 15일, 조슈아 웡 및 학생 지도부 세명은 중형이 내려질 것이라는 서방 언론의 예측과는 달리 불법집회 및 도로 점거 혐의로 120시간 사회봉사 명령 또는 3주 구류에 1년 집행유예로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았다. BBC기사 보석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피고 세명은 재판 참가후 바로 귀가. 이렇게 가벼운 형량이 선고된 것은 사태가 별다른 유혈 없이 진정된데다가, 홍콩의 전반적인 여론은 "스무살도 안된 애들이 그냥 객기부린거 너그러이 봐주자"는 식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중형을 언도하면 오히려 반중파들의 입지만을 강화시켜준다고 판단한듯 하다.
- 하지만 2017년 8월에 열린 항소심에서 이들은 징역 수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 주동자 조슈아 웡은 6개월, 네이선 로는 7개월, 알렉스 초우는 8개월을 받았다. 이렇게 1심에서 가벼운 형을 내렸다가, 갑자기 항소심에서 양형이 높아진 이유는 처음에 가벼운 형량에 분노한 중국 당국이 홍콩에 압력을 넣었다는 설이 있다. 조슈아 웡은 "민주화운동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수감되었다. 다른 운동가들도 법정구속되어 교도소에서 복역을 시작했다. 홍콩 우산 시위를 지지했던 차이잉원 대만 주석은 이들 운동가들의 수감에 성명을 발표해 항의했다.
- 2018년 1월 17일. 홍콩 고등법원(한국의 대법원)이 조슈아 웡에 대해서 징역 3개월을 선고하였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사회민주연선 소속의 라파엘 웡 역시 이날 징역 4개월 15일형을 선고 받았다. 우산혁명 지도자 중 한 명인 레스터 셤은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8. 기타
- 세계가 이 혁명을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홍콩은 국제 도시인 동시에 중국의 민주주의에서 큰 상징성을 갖고 있는 만큼 이게 어떤 결말을 맞느냐에 따라 차후 중국의 대내 정책이나 민주주의 정책의 앞길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시위 초기에 행정장관 렁춘잉의 딸이 시위대를 향해 초고도의 어그로를 끌었다. 당연히 사퇴 압박을 강하게 받고 있던 렁춘잉은 코너에 몰렸었다.
- 한편 한국처럼 민주화를 위한 희생을 각오했다는 학생들의 인터뷰와 한글로 된 피켓이 등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시위대는 한국의 시위법도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루탄에 대한 대응으로 랩으로 얼굴을 감싼다던가 집회방식 등을 노동당에 직접 연락해서 전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 시위대에 폭력을 가하는 폭력단체가 등장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에서 보낸 요원들이라거나, 삼합회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횡행하는 상황.
- 홍콩 유명인들의 지지 발언이 이어졌는데, 특히 주윤발·양조위·유덕화 등 많은 홍콩 스타들이 시위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반대로 성룡 등 친중 노선을 띤 인사들의 시위 자제를 촉구하는 발언도 있었다). 시위를 지지한 이들의 중국 본토 활동이 금지당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까짓거 돈 좀 덜 벌면 그만이라고 쿨하게 화답한 윤발 따거. 2015년 현재 위의 연예인들은 중국 대륙에서 잘 활동하고 있다.
- 서울 홍콩 관광청 사무소의 발표에 따르면, 시위 지역의 교통이 빡빡할 뿐 큰 불편함이나 위험은 없는 것 같다.
- 한편 칭화대학 강사인 경제학자 셰궈중(謝國忠, Andy Xie)은 "3개월째 지속되고 있는 민주화 시위로 홍콩 경제가 침체기를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홍콩의 한 정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지역 소비와 긴밀히 연결된 소매판매가 지지부진한 것은 민주화 시위가 소비 심리에 타격을 입히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13]
- 시위장소 주변 상인들이 "생업에 타격을 입고 있다"며 시위대가 설치한 바리케이트를 가져가는 등 실력행사에 나섰다. 관련기사 관광업계에서도 시위대 탓에 타격이 크다고 했다.[14]
- 2015년 9월 3일, 11월 17일 두 차례에 걸쳐서 축구판 우산 혁명이 벌어졌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를 참고.
- 2016년 1월부터 다시 시위가 발생했다.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인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의 주주 등이 두 달 새에 5명이나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중국 정부의 소행으로 보고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집회는 수십 명이 참가하는데 그쳤고, 우산 시위 때처럼 크게 번지지 않았다.
- 2016년 2월 춘절 몽콕의 어묵 노점상 단속이 도화선이 되어서 몽콕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일어났다. 여기까지만 적으면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대치상황이라 별달리 특기할 사항도 없겠지만, 문제는 여태까지의 상황과 대단히 이례적으로, 폭력 시위의 양상이 드러난 첫 대치다. 춘절이더라도 노점상의 경우 눈감아주는 게 암묵적 관례였는데, 이 관례를 깨고 노점상을 강제철거하는 게 직접적인 발단이 되어서 이에 격노한 홍콩 분리주의단체의 주도로 상황이 격화되었다. 홍콩 전통어묵은 단순히 어묵만이 아닌 서민층의 길거리 음식이라는 상징도 있었기 때문에 이 시위를 지지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일명 '어묵 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물론 렁춘잉 등의 친중 공권력들은 노발대발한 상황. 한편 홍콩 경찰의 처장인, 스티븐 로는 앨런 라우 경찰작전처장에게 강력한 질타를 날렸다. 이유는 단순하다. 앨런 로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했단(...)어처구니 없는 이유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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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경찰이 경찰을 공격한 것도 아닌, 인터뷰 중인 노인 시위자를 어깨를 툭툭 건드려서 쳐다보게 한 다음, 최루가스를 얼굴에 직접 분사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정당한 진압이 아니라 희롱이나 다름 없는 짓이기에 파문이 일고 있다. 안 그래도 면역력이 떨어지는 노인한테 캡사이신이 주력인 최루가스를 눈에 직사하면 실명할 수 있다. 홍콩 경찰이 인권같은 건 이미 내다 버린지 오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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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안 알려져 있지만, 홍콩에서는 진격의 거인이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고 있다. 2013년 시진핑이 홍콩 행정장관 선거를 기만적인 직선제로 만들겠다고 한 순간부터 거인을 중국에, 조사병단을 홍콩에 대입하여 중국의 홍콩 병탄 시도에 항의하는 시위에 자주 나온다. 기사 2014년 우산혁명 당시 가장 많이 패러디되었다. 2014년 이후로 '''진격의 거인은 홍콩 민주화의 상징'''으로 올라섰다. 거인을 무찌르는 것이 홍콩 민주화의 달성이라면서.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시위에서도 혁명기 발브레이브와 더불어서 진격의 거인이 등장하였다.
- 메쉬 네트워크 기술을 활용한 모바일 메신저인 FireChat 이 시위대의 소통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블루투스,와이파이를 이용해 데이지 체인 방식으로 메쉬 네트워크를 구성해 이동통신사의 기지국을 거치지 않고 근거리 무선 네트워크를 형성해 정부의 통제를 피한것이다. 단일 기기의 블루투스와 와이파이 신호의 커버리지는 수십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지하철역,시위현장등 다수가 모여드는 곳에서 유의미하게 높은 비율의 FireChat 유져가 있을 경우 서로의 스마트폰이 데이지 체인으로 연결되어 메쉬 네트워크를 형성해 그 만큼 커버리지가 넓어지게 된다. 다만 보안이 취약해 감청이 손쉽다거나 경찰이 시위대를 사칭하여 대화에 참여해 함정을 파는것이 가능하다는 우려도 나왔다. 개인간 대화는 종단간 암호화가 되지만 단체 채팅방은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고 암호화없이 평문으로 전송되기 때문이다. 2018년 FireChat의 업데이트가 중지되고 스토어에서 앱이 내려가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는 유사한 앱인 Bridgefy가 활용되었다.
9. 후폭풍
9.1. 2016 홍콩 입법회선거
2016년 9월 4일 열린 홍콩 입법회선거에서 우산혁명의 주도층인 청년 세력이 대거 당선됐다. 민주파 자체는 70석 중 27석에서 30석으로 3석이 늘어나는데 그쳤지만 직선제에서 40석 중 22석을 건지고 간선에서 뒤진 것이기에 홍콩 시민들의 표심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산혁명 시위에서 대학생 연합의 리더격이었던 네이선 로는 불과 23세로 역대 최연소 입법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외에도 우산혁명의 당사자이거나 지지를 보냈던 20~30대 청년 정치인이 대거 당선됐다. 또한 이번 선거는 투표율 58%로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최고 참여율을 보였다. 또한 처음으로 독립 운동에 긍정적인 후보들, 이른바 독립파 정치인들이 당선되어 입법회에 진출하였다. #
우산혁명 2주년을 맞아 다시 시위가 열었으며,# 2017년 1월 1일. 새해 첫 날에도 민주화 요구에 대한 시위가 일어났다.# 홍콩 경찰이 반중 성향 시위를 벌인 10명을 체포하자 정치 탄압이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9.2. 중화민국 정권교체 기여
더욱이 양안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적인 행보가 여실히 드러나고 중화민국 유권자들에게도 악영향을 주었다. 결국 2016년 중국 국민당은 참패하고 민주진보당의 차이잉원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9.3. 시진핑 독재 강화
이전에도 해왔던 일이지만 시진핑은 이 사건 이후로 독재를 더욱 강화하는데 결심을 굳힌 듯 보인다.
10. 관련 문서
[1] 시위대가 제작한 로고. 초창기에는 엄브렐라 같이 다소 섬뜩한 로고들이 보였지만, 지금은 다른 로고들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출처] @[2] 비나 햇볕을 막기 위해 지참하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달리 홍콩에서는 10월이 지나도 덥고 습한 편이다.[3]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법률위원회 위원장인 저우융캉(周永康)과 이름이 같은데, 공교롭게도 그 저우융캉은 시위가 다시 주목받을 시기인 2014년 12월 5일 부패 혐의로 체포됐다. 같은 듯 같지 않은 두 명의 '저우융캉'[4] 한국의 영남대학교와 한자명이 같다.[5]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는 한국 청소년인권운동의 경우, 3년 이상 존속하는 조직이 극히 드물다.[6] 다만 이 약조문을 실제로 선포한 사람은 장쩌민이다. 덩샤오핑은 홍콩 반환을 5개월쯤 남기고 사망했다.[7] 현지의 법학계에서는 이렇게 해석하는데 동의하며 중국 정부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8] 홍콩 중문대학교는 휴학 기간은 짧았지만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걸 고려해 일부러 수업 지도를 상당히 늦추는 등 교수들도 협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긴 센트럴 점령의 공동대표 가운데 한 명이 이 학교 사람이니.[9] 홍콩 경찰의 최루탄 사용은 2005년 한국 농민들의 반 WTO 원정 시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다.[10]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날이다.[11] 쇼핑하다는 광동어로 買嘢(maai5 je5 마이 예 : 구어) 또는 購物(kau3 mat6 카우 맛 : 서면어, 아나운서들은 'gau3 mat6 까우 맛'이라고도 발음한다.)이라고 한다. 그런데 북경 당국은 당연히 보통화로 했기 때문에 보통화로는 購物(gou4 wu4 꺼우 우)라고 한다. 이걸 비꼬아서 홍콩 시위대는 보통화 발음을 흉내내서 鳩嗚(gau1 wu1 까우 우)라고 하여 조롱했다. 덧붙여서 鳩(gau1 까우)는 광동어 비속어이다. 영 좋지 않은 곳과 관련있다.[12] 물론 천안문 당시에도 그랬듯, 중국이 유혈사태를 일으키더라도 서방측에서 중국에 가하는 제재는 실질적으로 없거나 유명무실할 가능성이 높다. 하려면 못할 것은 없다는 것.[13] 그러나 그 소매 구매자인 홍콩 시민들 대부분이 시위에 지지를 보냈던 상황을 생각해보아야 한다.[14]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있었다. 2008년 촛불시위 때 광화문 일대 식당 주인 등 상인들이 "시위로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걸었다 패소한 일이 있다. 관련기사 유인촌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촛불집회 때문에 외국 관광객이 줄었다"고 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