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협 해전

 



'''대한해협 해전'''
'''시기'''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장소'''
대한해협
'''원인'''
북한군 무장수송함의 남하
'''교전국'''
[image] 대한민국
[image] 북한
'''지휘관'''
[image]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소장[1]
[image] 총참모장 직무대행 김영철 대령[2]
[image] 701함 최용남 중령
[image] 해군부상 한일무 중장
[image] 제2 위수사령관 홍동철[3]
[image] 수송함 함장 신원 불명[4]
'''전력'''
대한민국 해군
구잠함 1척
소해정 2척
조선인민군 해군
제2위수사령부
1000톤급 무장수송함 1척
766군부대[5] 600여 명
945군부대[6]
'''피해'''
백두산함 조타실 및 주포 피격
전사 2명
부상 2명
무장수송함 침몰
병력 '''전멸'''(추정)[7]
'''결과'''
[image] 대한민국 해군 대승
북한군 무장수송함 격침. 대한민국의 6.25 전쟁 최초 승전.
'''영향'''
부산에 입을 뻔한 막대한 피해 예방
이후 UN군의 한반도 제해권 장악에 기여
[image]
백두산함[8]
1. 개요
2. 당시 열악했던 해군의 상황
3. 전투 전개
3.1. 첫 출전
3.2. 교전 개시
3.3. 전투 결과
4. 의의
5. 기타
6. 같이보기


1. 개요


백두산함은 작지 않아.

처음 백두산함을 만났을 때도, 독도함을 보는 지금도.

나는 한 순간도 백두산함을 작은 배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 백두산함 갑판 출신 대한해협 해전 참전용사(퇴역 갑판 일등준위)[9]

6월 25일 ~ 6월 26일 사이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대한민국 해군조선인민군 해군 간의 해전. 이 해전으로 부산으로 침투하려 한 북한군 제766독립보병연대 및 제945육전부대와 괴선박을 수장시켜 부산 교두보 안정화에 기여한 전투다.

2. 당시 열악했던 해군의 상황


한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은 해방 이후 난립하던 다른 사설 군사 조직들과는 달리 미군정의 승인을 받은 첫 군사 조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해군에는 일본 제국 해군이 쓰다 진해에 버린 목선 몇 척만 있었고[10] 그나마 상당수는 만들다 방치한 것을 해방병단원들이 어떻게든 자재를 구해 완성해 굴리는 열악한 환경에 처했다. 조선해안경비대가 된 이후 미국 해군이 쓰던 상륙정이나 소해정 등을 여러 척 넘겨받았으나, 함정 간 혹은 함정에서 육상을 타격하는 게 불가능한 이들 소형 지원함정들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주무장이 강해봐야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었고, 후에 37mm 대전차포를 장비하는 개수를 했으나, 이마저도 포가 부족해 출동 나가는 배가 입항한 배의 포를 인계받아 교대로 장착하고 나가야 했다.
결국 함포가 있는 전투함을 구입하기로 결심한 손원일 제독은 '함정건조기금 거출위원회'를 결성해 장교들과 하사관, 수병들이 봉급의 일부분을 기금으로 냈고, 나중에는 국민들까지 모금에 동참하였다. 이때 모인 1만 5000달러에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더 얹어 줌으로써 손원일 제독은 6만 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가 미국상선단사관학교 실습선으로 무장이 제거된 채 쓰이다 민간에 매각되었던 화이트헤드 함을 포함한 총 4척의 초계정(Patrol Craft, PC)[11][12]을 사오게 된다.[13] 이 4척 중 화이트헤드가 바로 백두산함이다.[14] 백두산함은 하와이에서 3인치 포를 장착하고[15] 에서 3인치 포탄 100여 발을 구입한 뒤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하였다. 함정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백여 발에 불과하여 나무 모형의 포탄을 만들어서 장전 훈련만 하는 등 당시 해군의 상황은 정말로 열악했다.

3. 전투 전개



3.1. 첫 출전


[image]
백두산함을 지원했던 소해정 YMS-512 구월산정
전날 훈련을 마치고 진해항에 정박해 있던 백두산함에 1950년 6월 25일 오전 11시에 진해통제부사령관 해군 준장 김성삼 제독으로부터 의아 선박이 발견되었으니 긴급출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승조원들은 6월 24일에 진해항에 들어왔고, 휴일이었던 관계로 대부분 외출한 상태였으므로 헌병 차량 등을 동원해 승조원들을 소집하느라 4시간 뒤인 오후 3시에 출동 준비를 마쳤고, 승조원 60명을 태우고, YMS-512 구월산정·YMS-518 고성정과 함께 출항하였다(518정은 보급 문제로 늦게 출항). 당시 백두산함에 내려진 명령은 '동해안으로 쳐들어온 적 상륙 특공대를 격멸하라!'였다.[16]
백두산함은 18시 30분을 지나 부산 오륙도 등대를 통과하면서 침로를 북으로 잡아 북상했다. 20시 12분 영일만 부근, 북위 35도 15분 동경 129도 31분 해역, 쌍안경으로 우현을 살피던 조병호 일등수병이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 최영섭 소위[17]에게 보고했다. 우현 45도 수평선쪽에서 검은 연기를 포착한 것이다. 연기의 굵기로 보아 어선은 아니었다. 이 내용은 함장에게 보고되었고, 함장은 변침하여 동쪽을 향해 추적했다. 12km 뒤에서 따라오던 512정에게는 “본함은 작전상 잠시 항로를 이탈하니 귀 정은 예정대로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21시 30분 괴선박[18]을 발견하였다. 어선도 상선도 화물선도 아닌 해군의 수송선과 비슷한 검은색의 배였다. 배 이름도 국기도 없어 분간할 수 없자 이에 백두산함은 국제 기준에 따라 검문을 시작하였다. 먼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가면서 수기(깃발)신호를 보냈다. 함교 뒤편에서 김세현 삼등병조와 최도기 삼등병조가 수기신호를 보냈으나, 괴선박은 응답없이 계속 남하했다. 백두산함은 이어 국제발광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30분 동안 『J.F 너의 국기를 게양하라.』, 『N.H.I.J.P.O 너의 국적을 제시하라.』, 『I.J.G 언제 어디를 출항하였는가?』, 『L.D.O 목적항구가 어디인가?』를 반복했으나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이 남하를 계속했다.
백두산함은 상황을 해군본부에 보고하였고, 본부는 선박의 정체를 정확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백두산함은 다시 발광신호를 보냈다. 『K 정지하라.』 『O.L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라는 발광신호를 두 시간동안 수십 차 보냈으나 역시 하등의 응답이 없었기 때문에 적선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백두산함은 괴선박과 100m 거리까지 접근한 뒤 조명을 비추고 괴선박을 보았다. 괴선박의 갑판 앞쪽에는 대포로 보이는 커다란 물체가 포장되어 있었고, 갑판에 국방색 군복을 입고 앉아있는 인원들, 중갑판 양쪽에 중기관총 2정이 배치되어 있었다. 위험하다 판단하여 다시 거리를 벌린 뒤 23시 40분 함상회의가 소집되어 괴선박이 인민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해군본부에 타전, 나포 명령을 받아 적선을 유도했으나 어렵다 판단, 다시 무전을 보내고 3분 뒤 적선을 격침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26일 00시 30분 경 백두산함이 처음으로 3인치 함포를 적선을 향해 발포했다. 혹여나 있을 민간 및 아군 선박에 대한 오인 공격을 막기 위해, 일단 경고 사격을 1회 실시해 (적일 경우) 놀라서 괴선박으로부터 대응 사격이 시작되면 격파 사격을 하기로 했다.

3.2. 교전 개시


경고 사격에 적 수송선은 백두산함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중기관총과 포를 사용해 응사에 나서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었으며, 늦게 출항했던 YMS-518정도 전투에 동참하였다. 여기서 적선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좌현쪽에 등 하나가 꺼지지 않은 것이다. 그 등불 덕택에 백두산함은 조준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발을 적선 갑판 쪽에 명중시켰다. 그러나 적선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듯이 응사를 계속했다. 이에 함장의 명령으로 배 흘수 아래쪽을 노리고 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렇게 백두산함은 선체 아래쪽을 노리기 위해 접근했다. 접근할수록 명중률은 높아졌고, 900m까지 접근했을 때, 백두산함에서 발사된 포탄이 적선의 마스트에 명중(!)했고, 외부 선체에도 구멍이 나서 적 수송선이 침몰하기 시작했다. 침몰하는 와중에 적 수송선은 발광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를 본 아군 함정들은 위치를 더욱 확실하게 노출한 적 수송선을 향해 정확히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백두산함은 함포로 20발을 쏴서 5발을 맞췄다.[19] '''그런데 3인치 함포가 고장이 나버렸다!''' 3인치 함포를 계속 쏘다 보니 격발 장치의 고무 스프링이 녹아 고장난 것이다.[20] 주무장이었던 함포가 고장나자 함장 최용남 중령은 기관총으로 반격을 명령, 적 수송선과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접근한 탓에 백두산함이 적탄을 맞고 말았다. 85mm 포탄 한 발이 조타실을 관통하며 3명의 승조원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종식 소위가 발에 부상을 입고,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는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다. 부상자는 식당으로 옮겨졌고, 군의관 김인현 중위가 응급치료를 실시했지만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는 전사했다. 전병익 이등병조는 전역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26일 새벽 1시 38분 결국 적 수송선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치열했던 포격전이 끝났다. 전투 이후 백두산함은 진해에 입항 후 사상자만 상륙시킨 뒤 재보급 후 전투가 벌어진 해역으로 재출동, 적선 침몰의 증거를 찾기 위해 일대를 4시간 동안 수색했으나 생존자는 없었고 옷가지와 기름띠, 나무상자 같은 간접 증거물만 떠다녔다. 그렇게 백두산함은 본 임무인 묵호 해안 상황 대처를 위해 함수를 돌렸다.

3.3. 전투 결과


  • 아군 피해
    • 2명 전사
      • 전병익 일등병조(사후 추서, 포탄 장전수, 1929년 6월 24일생, 1948년 6월 해군신병 제10기, 교전 3일 뒤 사망.[21])
      • 김창학 이등병조(사후 추서, 조타수, 19291월 29일생, 1948년 6월 해군신병 제10기, 현장에서 치료도중 사망.[22] [23])
    • 2명 부상
      • 김종식 소위 (병기관장)
      • 김춘배 삼등병조 (주포 전환수)
    • 백두산함 조타실 및 주포 아래 피격.
  • 적군 피해
    • 적 수송선 격침, 승조원 및 육전대 600여 명 전원 사망(추정)
[image]
김창학 삼등병조
전병익 이등병조
국군의 두 전사자의 유해는 포항에서 진해로 옮겨져 경남 진해 시내 평지봉 기슭에 안장되었고, 전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되었다.

4. 의의


[image]
대한해협전승비
북한의 후방침투기도 차단 및 부산 교두보 안정화에 기여한 전투. 만약 이 해전에서 적 수송선을 격침시키지 못하고 후방 침투를 허용했다면, UN 연합군의 군수 기지 역할을 할(당시엔 일단 미 공군만 먼저 참전한 상태였다) 부산 교두보에 침투한 적 병력이 교란을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것이라 예측되기 때문이다. 다른 경상도 후방 지역에 출몰했던 빨치산들도 소규모 존재했으나, 백두산함이 격침시킨 괴선박의 육전대원들은 그런 산속이 아니라 부산항에 직접 상륙해 당시 후방이어서 빈약한 국군의 반격을 오래 버티며 항만 시설을 파괴하고 UN군의 병력 및 물자 양륙을 지연시켜 낙동강 방어선 유지를 곤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버틸 당시, 한반도 제1의 항구인 부산항이 무력화되면 남는 항구도시는 해군 기지가 있는 진해 뿐인데, 여기는 해군 기지로 특화된 곳이라 대규모의 병력과 물자 하역 시설이 빈약한 데다 부산보다 전선에 훨씬 가까운 위험한 곳이었다. '''바로 바다 건너 동네 마산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24] 워낙 급박했던지라 해군사관생도들까지 차출해 육전을 치러야 했을 정도였다. 전략적으로 보면 명량해전 못지 않은 크나큰 승리였던 셈.
또한 이 당시 북한 해군은 전투함이라고 불릴만큼의 강력한 군함이 없었다. 개전 시점에서 수송선 계열의 군함들[25]을 제외한 북한 해군의 함정, 그 중에서도 동해에 위치한 제2위수사령부의 함정은
  • 소련제 OD-200급 초계정 3척[26]
  • 어뢰 2발을 장비한 17톤급 어뢰정 5척[27]
  • 미국 GM社제 YMS-1급 소해정 2척과 일본제 니가다 소해정 1척[28]
  • 1949년 자체건조된 로동자급 경비정 2척[29]
등이 사실상 전부였으며, 나머지는 빈약한 견인발동선이나 배떼[30] 밖에 없어서 전투에 쓸 수 없었다. 당시 원거리 항해를 할 필요없고 동해와 서해의 해군 전력을 배치할 수 없는 지형적 조건, 소련 해군의 힘이 약하던 시절 미국과 38선에 관해 합의를 한 뒤라 북한이 그럴싸한 전투함을 구하려고 해도 여건상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무장수송선인 1000톤급은 북한의 주요 해군 전력 중 하나였는데 이를 격파했으니 북한 입장에선 큰 타격이었다.
거기다 600명 정도의 병력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게 후방사단이 38선에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전원 투입됐으므로 후방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경찰병력과 예비 병력이 남아있었다 해도 부산 방어는 시간이 걸렸을듯 하다.

5. 기타


이 승전으로 인해 백두산함장 최용남 중령은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이는 전쟁 중 해군이 받은 1호 훈장이었다. 또한 백두산함 기관장 신만균 소령이 을지무공훈장을 수훈받고, 나머지 장병들도 충무무공훈장 등 훈·기장을 수훈했다.
최용남 중령은 이후 해병대로 전과했으며, 제1연대[31]장 시절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려 장군으로 진급했다.
이후 서해를 통해서도 북괴뢰군이 침입을 기도했으나 역시 해상에서 걸려 꼬르륵...
백두산함은 전투 이후 여수 철수작전에서 대한민국 육군미 육군 제24사단 패잔병 2,300여 명을 수습하였고, 덕적도-영흥도 탈환 작전, 인천상륙작전, 2차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미국이 PF함을 비롯해 많은 군함을 공여함으로써 후방으로 밀려난 뒤 1959년 스크랩되었다. 그 중 돛대 부분은 남아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전쟁 초기의 크고 작은 해전이 있은 뒤 미국이 동해와 서해에 항공모함전함을 배치하면서 한반도 주변의 제해권은 UN군이 완전히 장악한다. 이후 UN 해군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인 해안포격과 폭격을 시작했고, 서해안과 동해안의 도서 지역을 대부분 탈환한다. 결국 북한 해군은 징발한 어선이나 바지선 등으로 한밤 중에 몰래 기뢰를 부설하고 도주하는 등의 게릴라전 정도만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고, 휴전시까지 사실상 영해 개념을 상실하게 된다.
전사자인 김창학 이등병조와 전병익 일등병조의 이름은 각각 윤영하급 고속함 14번함과 18번함의 이름으로 정해졌다.
2014년 6월 26일 부산 중앙공원에서 제64주년 대한해협 해전 전승기념식이 거행되었다.


6. 같이보기




[1] 개전 당시에 함정 인수를 위해 미국에 있었다.[2] 부재 중인 참모총장을 대리하여 지휘.[3] 계급 불명[4] 해군 특성상 배를 침몰시키면 물증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적의 신원을 파악할 수가 없다. 생존자가 하나라도 나와야 신원이 파악된다.[5] 당시 북한 육군 제766독립보병연대를 칭하며, 1949년 4월부터 1950년 8월 19일까지 존속하였다. 잘 알려진 연대 지휘관으로는 오진우가 있다. 이 부대는 포항 전투에서 본래 3,000여 명의 병력이 1500여 명으로 절반이나 손실된 상태였고 당시 북한 육군 제12사단의 병력이 1200여 명이라는 괴멸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남은 제12사단과 합쳐져 해산되었다.[6] 제2위수사령부 관하 육전부대[7] 대한민국 해군도 적의 전략과 전황보고를 위해서 필사적으로 포로 혹은 시체를 확보려 했고, 전투종료 4시간 후에는 백두산함 뿐만 아니라 구월산정도 투입되어 수색작전을 펼쳤지만 한자키릴 문자가 써있는 조각난 나무상자 밖에 찾을 수 없었다고...[8] 대한해협 해전 당시 북한군 괴선박과 교전하였다.[9] 마리얼레트리 작가 오소리참전용사 인터뷰 중 나온 명언이다.[10] 일제강점기까지는 대한제국 시절 일본에 발주해 만든 광제호가 한반도에 있긴 했으나 해방 이후 일본인들을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용도로 쓰이면서 일본으로 넘어가 버렸다.[11] 전투함이긴 했으나, 미국 해군에선 대잠 초계정으로 대량으로 뽑아낸 소형 함정이었으며(보통 대위정장#s-2으로 부임했다), 화력도 3인치 포와 기관포 정도로 빈약했다. 본래 손원일 제독은 이보다 큰 2천톤급 호위함정인 Patrol Frigate(PF)을 사오려 했으나, 이들은 미국 의회가 한국에 금수조치한 군수품들이어서 사지 못하고, 대신 궁여지책으로 민간에 불하되어 법적으로 군용 선박이 아닌 PC들을 골라야 했다.[12] 미군이 왜 공산 북한을 코앞에 둔 우방국 한국에 무기 금수 조치를 취했냐면, 북한의 전쟁 의지를 크게 보지 않고 괜한 분쟁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은 미국이 무기만 주면 38선을 넘어 쳐들어갈 기세로 큰소리를 치고 있었고 이는 미국이 한국에 주력무기 급의 병기를 넘기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13]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14] 백두산(白頭山)의 백두를 영어로 직역하면 White Head가 된다. 우연의 일치치곤 기막힌 이야기다. 화이트헤드는 해양대 졸업생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군 장교로 임관했다 전사한 화이트헤드 소위의 이름을 딴 것이다.[15] 이때 태극기를 달고 입항하였는데 하와이의 교민들이 처음엔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의 거대한 순양함구축함들 사이로 나타난 조그마한 쪽배(...)를 보고 절망했으나, 곧 다들 마음을 고쳐먹고 태극기를 보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 때 하와이 교민 사회의 어두운 면이 부각되었는데, 이승만이 하와이에 체류하면서 친이파와 반이파로 파벌 싸움을 조장해 친이파가 우세한 상황에서, 반이파 교민들은 친이파들의 견제로 군항 근처에도 못 가보고 산 위에서 멀리 보이는 조그만 백두산함을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16] 그러나 그 때엔 이미 삼척, 울진, 정동진 등지에 북한 해군 육전대가 상륙해 대한민국 육군 8사단을 포위하려 하고 있었다. 당 해역을 전담하던 해군 묵호 경비부가 뒤늦게 이들이 상륙에 사용한 발동정 등을 격침 및 나포하고 해안에 함포를 사격해 적 육전대를 산악으로 도주케 했지만, 현지에서 가용한 해군과 경찰 등으로는 지상전에서 이들을 완전히 격퇴할 수 없어 결국 군경 및 공무원 가족 등과 함께 함정 편으로 철수했다.[17] 대령 예편. 현 한국해양소년단연맹 고문.[18] 미국제 1,000톤급 상선을 무장수송선으로 개수한 선박으로, 함급이나 함명은 알려져있지 않다.[19] 단순 계산으로 약 25%. 승조원들이 포를 한 번도 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은 수치다.[20] 이 스프링은 교체도 금방 할 수 있었고 함포를 구입하면서 예비 부품을 잔뜩 받아 함내에 갖춰두기도 했지만 실탄 사격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100발 밖에 못산 포탄이 아까워서 모의탄으로 장전과 조준 훈련만 했고, 이때서야 처음으로 실탄을 쏘며 싸우던 백두산함의 승조원들로서는 원인을 바로 알아채긴 어려웠다.[21] 사망 당시 21세로 전사 59년만인 2009년 11월 11일에 을지 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이렇게 늦은 이유가 김창학 이등병조와는 달리 전병익 일등병조의 유족들과는 연락이 되지 못했기 때문. 결국 여동생을 어렵게 찾아서 09년 11월 11일에 열린 제64주년 해군창설 기념식에서 무공훈장을 받으셨다.[22] 전사 당시 21세. 치명적인 흉부 관통상을 입은후 치료도중 적함은 어찌 되었습니까? 라고 갑판사관에게 물어보았고 그가 괜찮다. 모두 침몰하였다.라는 대답을 하자 사망직전에 갑판 사관님. 끝까지 싸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만세! 라는 말을 남기고 절명 하였다고 한다.[23] 당시에도 유족들과 연락이 되지않고 있었던 전병익 일등병조와는 달리 당시 전투에 참여한 해군전우회 60명은 정기적으로 유족들과도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9월 28일에 그가 졸업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위치한 부용초등학교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다.[24] [image]
마산 전투당시 지도로, 오른쪽에 Chinhae라고 써진 글자 아래 검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진해해군사령부'''가 위치한 곳이다.
[25] 1780톤급 수송선 남포호와 1000톤급 무장수송선 등.[26] 제1 초계정대 소속[27] 제2 어뢰정대 소속[28] 제3 소해정대 소속[29] 제4 경비정대 소속[30] 배떼는 윗부분에 판이 있어 배다리 역할을 수행하는 배를 의미한다.[31] 현재 제1해병사단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