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고증
1. 개요
김한민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에서 보여준 상당히 공을 들인 고증에서 많은 사극팬들의 지지를 받은 바 있으므로, 그보다 더 많은 예산이 투입된 이번 영화가 더욱 더 사극팬들의 기대를 받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고증에 있어서 오류가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으며, 영화적 허용으로 볼 수도 있을만한 요소로 보기에는 사실성을 떨어뜨리는 항목들이 많아서 따로 문서가 분리되었다. 이 영화 이후 개봉되는 동주나 박열이 고증을 지키면서 성공을 거두거나 성공이 예상되고 있어 명량이 고증을 지키지 못한 것은 명백한 비판점이다. 또 2017년에 개봉한 덩케르크가 생동감 넘치는 공중전을 엄청난 수준의 고증을 지키면서 촬영하면서도 고증적 오류가 없다는 점에서 고증을 지켜도 얼마든지 멋진 장면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극중 화려함을 위해 고증을 무시해도 된다는 발언이 얼마나 몰지각한 것인지 공개적으로 밝혀진 셈이다.
2. 역사적 사실 관련
'''명량 해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세부적인 관련 사항은 명량 해전 항목 참조. 아래는 영화와의 차이점을 집중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참고로 실제사례나 역사를 바탕으로한 대다수의 영화가 기존 사실보다 부풀려서 좀 더 드라마틱하고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명량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앞서 말한 대다수의 영화가 주인공 측을 더 강하게 만든것에 반하여 이 영화는 약화시켰다.
2.1. 인물들의 호칭 관련
- 왜군 장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관백이라 칭하는데, 히데요시는 관백 직함을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에 해당하는 태합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히데츠구는 이미 1595년에 역모 혐의로 제거되었지만 히데요시가 관백을 다시 겸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유시점에서는 '태합 전하'로만 불려야 하는 게 맞다. 왜장들이 서로를 성으로 부르는데 사실 제대로 따지자면 관직명으로 부르는 게 맞다. 또한 가토 요시아키가 도도 다카토라를 도도 님(様)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의 위치를 생각하면 관직명으로 부르거나 정 성으로 부르고 싶으면 도도 공(殿)라고 부르는 게 어울린다. (사실 작내에서 가토 요시아키가 존대를 하는 걸 보면 두 사람의 관계를 상하 관계로 설정한 것 같다.) 딱 한 번 '도도 님(殿)'이라고 칭하는 부분이 있긴 하다. 문제라면 둘 사이는 이웃집 원수사이라는 것과 상하관계도 아니었다는 것. 즉 인물관계 설정이 완전히 잘못됐다.
- 극 초반, 배설이 이순신에게 따지면서 "통제공"이라 칭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시종일관 부하 장수들이 이순신에게 "장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고증에 어긋난다는 의견이 있었다.[1] 백의종군 후 복직된 이순신의 품계는 정 3품 '절충'장군' 이었으므로 극중 "장군"이라는 칭호는 고증 오류가 아니라는 의견이 있는데, 절충장군 또한 정3품 당상관 품계였으므로 "장군"이라는 호칭은 잘못된 것이 맞다. 일반적인 수군절도사들은 정3품 당상관이었기에 "영감"으로 불려야 고증이 맞는 것이 맞다.
실제로 이순신이 한산해전 이후 정2품 상계 정헌대부에서 절충장군으로 품계는 낮아졌어도 여전히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이자 정3품 수군절도사였다. 당연히 장군으로 부르면 안되는 것이다. 애초에 품계 서열이 낮은 것은 정치적인 문제일 뿐이며, 해군참모총장 자리에 대장이 아닌 중장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임명되었더라도[2] 아래 사람들은 직함인 참모총장으로 호칭할 것이기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통제사에게 "장군"이라고 칭하는 건 엄청난 결례다. 최소한 이순신의 휘하의 수군이라면[3] , 극 초반 배설이 언급한 "통제공"이나 "통상", "통상대감", "통제사 대감" 등의 존칭으로 부르고, 아랫 부장들을 "장군"이라고 불러야 지휘 서열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이순신이 정유년에 파직되어 직위 해제된 뒤, 명량해전 이후 다시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기 전까지도 부하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에게 계속해서 통상 대감이나 통상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파직 됐던 사람이라지만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간 경력이 있고, 삼도수군통제사의 직함을 가진 이상 굳이 그보다 아래 품계인 정3품의 관료를 부르는 호칭인 영감이라고 불러서 상관의 떨어진 직급을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조선시대에 직함의 중요성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던것 이상이라, 현직이 없이 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직을 불러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다만 이런 존칭의 어감 자체가 TV사극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겐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므로 각본상에서 의도적으로 친숙한 어감인 "장군"으로 호칭을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도 같다.
같은 이유에서 이순신이 정유년에 파직되어 직위 해제된 뒤, 명량해전 이후 다시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기 전까지도 부하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에게 계속해서 통상 대감이나 통상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파직 됐던 사람이라지만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간 경력이 있고, 삼도수군통제사의 직함을 가진 이상 굳이 그보다 아래 품계인 정3품의 관료를 부르는 호칭인 영감이라고 불러서 상관의 떨어진 직급을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조선시대에 직함의 중요성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던것 이상이라, 현직이 없이 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직을 불러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다만 이런 존칭의 어감 자체가 TV사극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겐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므로 각본상에서 의도적으로 친숙한 어감인 "장군"으로 호칭을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도 같다.
2.2. 교지의 시점 오류
국왕 선조가 내린 수군 혁파 교지에 적힌 연도가 터무니없이 틀려버렸다. 교지에 나온 만력 30년은 1602년으로 7년 전쟁은 이미 끝났고 이순신은 시공을 넘어온 미래의 교지를 받은 게 된다. 1597년 정유는 실제로는 만력 25년, 선조 재위 30년이므로 이 둘을 혼동해 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고는 하지만 날짜도 틀린 것으로 봐서 (교지의 날짜는 9월 20일, 명량해전은 음력 9월 16일) 다른 교지를 보고 베낀 다음 본문만 수정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애초에 선조 30년 같은 기년법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기본적인 사실에서 고증오류를 일으켜 버렸다. 교지의 년도가 틀렸음을 지적한 포스팅
일반인들 입장에서 한자로 쓰여진 교지의 내용을 세밀하게 읽어볼 사람은 별로 없을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작은 디테일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속설을 무색하게 하는, 사소하긴 하지만 다소 허탈한 고증오류인 셈.
2.3. 전투에 참여한 함선 숫자 관련
2.3.1. 개봉 전
영화 시놉시스나 포스터를 보면 12척의 판옥선이 330척의 왜선을 무찔렀음을 강조하고 있다. 난중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아군의 참전숫자가 12척[4] 이라서 그렇게 되었다는 제작사의 코맨트가 있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적선단의 규모도 동 사료에 의해 133척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고려해야 할 점은 난중일기는 충무공의 시점에서 쓰여진 기록이므로 적선단의 규모가 133척이라는 기록은 충무공의 시야 또는 전투 종료 이후 전과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정리되었을 숫자로 보여지며, 일본측 기록에는 최대 333척까지 참여했다는 사료도 있으며, 이충무공 전서같은 사료에는 200척 이상 최대 330척까지 기록되는 점을 고려할 때, 꼭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구석이 있다.
또한 상업영화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위한 마케팅의 일환으로 아군의 숫자는 최대한 적게, 적군의 숫자는 최대한 크게 묘사해 명량 해전이 가지는 숫적인 열세를 극복한 위대한 전쟁이라는 극적인 효과를 노린 문구로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2.3.2. 개봉 후
아군의 12척이라는 숫자는 순수하게 전투에 참여한 판옥선의 숫자이며, 충무공은 해전 이전에 여력을 모아 1척의 거북선을 건조중이라는 설정이었다. 충무공도 이 1척의 거북선의 활약에 내심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출정 전날, 부하 장수 배설의 배반으로 허무하게 불타버리는 상황이 묘사된다. 실제로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1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뒤늦게 합류[5] 했다고 전해지지만 영화적으로 각색한 부분.[6]
거북선이 왜 주류가 안 되었는가를 무시하고 그냥 대중 입맛에 맞춘 그런 영화란 평을 듣기 좋은 이유 중 하나이다.
왜군의 규모도 홍보물의 330척이라는 설정과는 다르게 실제로 스크린에 보여지는 함대 규모는 난중일기에 나오는 133척에 근접한 수준으로 묘사된다.[7]
3. 복장 관련
3.1. 계절 옷차림 오류
1597년 9월 16일에 벌어진 해전인데 겨울옷(가령 누비옷)들을 껴입고 있다는 지적이 있으나, 명량해전은 음력 9월 16일에 벌어졌으니 양력으로는 10말에서 11월 초인 늦가을과 초겨울의 중간 시점이다. 당시는 기후가 현재 한국보다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했지만 동시대 대부분 문명들처럼[8] 계절맞춤옷 한두 가지로 기후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얇고 통풍이 잘 도는 옷부터 누비로 기온을 저장하는 옷까지 여러 종류의 의류를 다양하게 껴입는 식으로 체온을 조절했을 뿐더러 내륙기후와 해양기후가 완전히 달랐기에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입는 겨울옷이 조금 과하다는 지적 정도는 가능해도 고증오류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따지고 싶다면 당시 해안 거주민들의 초겨울 복식을 가져와야 우길 수 있는 정도.
3.2. 조선측 복장 관련
[image]
감독이나 제작진의 고증관련 발언이 무색하게 충무공을 비롯, 조선군이 입고있는 갑주나 복장 양식에 상당한 고증오류가 존재하고 있다.
충무공의 갑주를 보면, 기존 창작물에서는 이순신이 조선 후기의 갑옷인 두석린갑을 입고 있던 적이 많던 것에 비해 당대에 널리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는[9] 찰갑류와 두정갑을 표현한 것까지는 좋으나, 찰갑을 가죽끈으로 매듭짓는 수결법은 아예 고증이 안되어 있고[10] 찰갑의 모양 또한 그 어떤 유물이나 국조오례의 등에 있는 갑주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체불명의 갑옷으로 묘사되어 있다. 유물이 몇점 없어도 당시의 회화나 유물 등이 남아있고 기록을 따져보면 어떤 갑옷을 주로 입었을지에 대해서는 추정이 가능하다.
투구에 있는 가리개는 두정갑 양식인데 기존 유물들에서 볼 수 있는 드림의 크기와 달리 너무 삽살개 처럼 크고 넓게 늘어져 있다. 갑주에 있는 찰편, 즉 미늘에는 금형에서 찍어낸 듯한 도깨비 문양이 다닥다닥 박혀있다.[11] 게다가 허리띠는 작은 갑옷을 하나 덧대고 허리띠로 동여맨 중국식 갑주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괴상망측한 변형형태이고[12] , 이순신 갑옷의 흉갑쪽 금박 용 문양 장식은 판갑옷에나 어울림직하며 장식이 과하다. 용 문양장식은 400만원이나 하는 고가로 장군의 위엄을 위해서 따로 주문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촌스럽고 쌈마이한 느낌이 나버린게 큰 문제점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의 방호력을 고려치 않은 듯한 장식인 것이다. 이순신의 식별성을 위해 저런 장식을 넣었는데 오히려 그 것 때문에 갑주 고증의 전체적인 질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허리띠의 플라스틱삘이 진하게 나는 도깨비 문양은 덤. 한국 갑옷에서는 포를 둘러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밑의 제작기 영상을 보면 책들을 수없이 뒤졌다고 나오는데 그 발언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고증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갑주 고증에 대한 총평이라고 할 수 있다. 의상감독이 전국의 이순신 동상을 다 바꾸자는 각오로 갑주를 제작했다고 하는데 또 영화상의 멋을 추구했다는 앞뒤가 안맞는 말을 하였다.
이순신이 무슨 갑옷을 입었는지는 사료나 회화자료가 없기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당대 수군의 보고나 기록에서 찰갑 기록이 많이 보인다는 점[13] , 그리고 두정갑은 고려 때부터 원의 영향을 받아 쓰이고 있었다는 점[14] , 무엇보다도 이순신의 5대손 후손이자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봉상 장군 갑주의 경우 두정갑이라는 점을 볼 때 찰갑이나 두정갑류로 고증을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찰갑이라고 하더라도 단순히 찰편을 엮은 갑주를 묘사했다 뿐이지 제대로 된 고증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이 명량 갑주의 문제점이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의상감독은 사료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림과 연기자의 액션과 영화적인 멋을 강조하였다고 답변하였다. 하지만 최민식의 카리스마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수 있음에도 고증을 반쯤 버리면서까지 주인공 보정을 줄 필요가 있었냐는 데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외에 부장들의 갑주에서도, 충무공의 그것보다는 정도는 덜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그렇게 당시 시대상에 맞는 복장 고증이 아니어서 다소 아쉽다는 의견도 있다. 승병들의 복장 의 경우 불멸의 이순신 시절 수군복장에서 水자를 卍자로 바꾸어놓은 게 전부인 수준이고, 권율은 생뚱맞게 갑주에 중국식 피박갑주를 두르고 있다.
더욱이 승병들의 경우, 작중에서 어두운 색이라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앞치마 형태를 하고 앞에 卍자가 그려진 약식가사를 입고 있는데 이 역시 고증오류. 앞치마 형태의 약식가사는 본래 일본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한국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일본 불교가 들어오던 구한말~일제 강점기이며, 한국 불교에서 이를 정식으로 도입한 것은 해방 이후다. 그마저도 일상적으로 입는 빈도를 보자면 대한불교조계종에서나 낮은 직급의 스님들이 입을 뿐, 전통적인 가사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태고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단에선 찾기 힘들다. 생활수행을 중시하는 원불교에서는 행사시가 아니면 잘 입지 않으며, 진각종의 경우 더 간략화시킨 것을 사용한다. 차라리 현대 군종승려들이 입는 반가사를 쓰는 것이 욕을 덜 먹었을 것이다.
또한 일반 병사들이 전부 다 갑주를 걸치고 있는데, 드라마에서 보아왔던 포졸복에 덩그러니 水를 새겨넣어 수군임을 표시하는 것보다는 더 현실적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문제는 일반 병사들 '''전군이''' 두정갑을 걸치고 있는데, 오히려 장군인 이순신보다도 더 좋은 갑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 유머. 두정갑이 당시 비교적 신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류라고도 볼 수 있다. 동래성 해자 발굴 등으로 밝혀진 바로는, 임진왜란때까지는 찰갑을 비롯한 조선 전기 무장이 상당히 많이 쓰였다는 게 정설이다. 게다가 일반 병사들이라고 해서 두정갑의 장식이나 이런걸 조금씩 없앤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 때문에 또 고증이 산으로 가 버렸다. 차양이 없거나 투구의 양식이 유물과는 딴 판이거나. 이래저래 문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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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본에서 후대에 그린 기록화인 조선전역해전도를 보면 조선 수군들이 죄다 두정갑을 입고있는걸로 묘사되어 있다. 후대에 그려진거라 고증 정확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고 여겨지지만[16] 이 그림을 보면서 조선 수군을 묘사할때 이런식의 중무장으로 묘사하는게 좋겠다! 는 일각의 의견이 있었고, 명량은 이에 부합되는 묘사를 보인다.
조선군 병사 전원이 갑주를 입고 싸운 것은 엄밀히 말해 고증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이라기보다는 '희망사항'에 가까우며, 당장 임란이 끝난 이후 기록에선 엄연히 '통제사의 병력도 갑옷을 입지 않고 싸웠다'고 하는 판에 전원 갑주 착용은 엄연한 고증 오류라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해, 이 기록은 임란 이후 100여년 지난 후의 실록 기사이며, 조선시대 후기의 기록에서 전선 1척, 사후선 1척을 운영한 함평현의 기록에는 수군용으로 철갑과 투구 50벌씩을 보유한 기사를 보면 병사들도 제대로 갑주를 착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조선군의 갑주 부족 문제는 국초부터 꾸준히 지적된 것으로, 위의 임란후 기록 한줄이 전부가 아니다. 조선군은 원칙적으로 전원이 갑옷을 준비해 입도록 되어있지만, 이 원칙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는 지적은 실록에 수두룩하게 나온다. 예를 들어 중종 17년의 실록 기사를 보면, 조선의 가장 정예병들이라고 할 수 있는 6진의 군사들도 태반이 갑옷을 입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후기 기록 중에 1개 현이 갑주 50벌을 보유했다고 해서 모든 군영이 충실하게 갑주를 보유했다고 볼 이유는 없다. 반대로 갑옷과 장비 미비에 대한 기록도 많다. 이런 상황과, 특히 임란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봤을 때, 조선군 병사 전원의 갑주 착용이 '희망사항'에 가깝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통영시에서 2011년(영화 촬영 이전)에 한산도 대첩 당시 통제영 조선수군의 복식을 복원하여 강남패션 페스티벌에 참여했었는데 여기서는 병사에게 흉갑 형태의 찰갑과 투구를 입힌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군이 장비하는 환도도 길이가 카타나 수준으로 긴것은 둘째치고[17] 패용까지 타치와 동일하게 칼자루가 전방을 향하며 날이 바닥을 향하도록 패용한다. 수많은 사극에서 전혀 고증되지 않았던, 딱 보기에도 타치나 카타나 패용과는 구분이 가능한 조선 특유의 환도 패용은 명량까지 와서도 고증되지 못했다. 다만 환도 패용의 경우 칼자루 전방 패용, 활을 쏘기 위해 후방에 패용하거나 아예 후기로 가면 조총을 쏘기 위에 뒤춤에 패용하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식의 고증이 꼭 틀리기만 한것은 아니다, 다만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방식인 칼자루 후방 매기가 전혀 고증이 되지 않았다는 점만이 아쉬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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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 역시 마찬가지로 당시 조선군의 환도가 검신 등의 외형에서는 일본도와 두드러지는 차이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손잡이 부분에서는 어피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극중 조선군, 심지어 이순신조차 끈으로 둘둘 말은 일본식 손잡이로 된 환도를 사용한다.
복식은 아니지만 이순신 본선의 수(帥)자 깃발이 두어 번 등장하는데, 깃발의 帥자가 컴퓨터로 프린트한 글씨체로 보인다.
하지만 대장선에 걸린 수자기만큼은 미군으로부터 반환받은 어재연 장군기에 맞추어서 고증한 것으로, 생각보다 현대적이다. 최근에 반환받아 매스컴을 탔으니 사람들 기억에도 남았을 것이고, 구한말이라 이순신이 활약하던 시대와는 거리가 있으나 어찌되었든 조선의 장군이 실제로 사용하던 깃발이라 이쪽에 고증을 맞춘 듯 하다.
3.3. 일본군측 복장 관련
일본군측 무장의 갑주에 관한 문서
일본 장수들의 갑주를 일본에서 직접 제작해 들여왔다고 했는데, 갑주 고증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명량에서 나온 갑옷이 오오요로이라는 것인데 명량의 갑옷은 오오요로이가 아니다. 오오요로이라면 매우 큰 견갑이 있어야 하며, 전체를 찰갑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갑옷은 안나온다. 엉뚱한 태클이 계속 된 갑옷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갑옷인데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갑옷에 투구에 날개장식이 있다고 하나 흉갑과 견갑만 봐도 오오요로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갑옷인데, 이건 단순히 다케다 신겐의 갑옷에서 투구의 털장식을 검은 색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 외 흉갑과 견갑을 도세이 구소쿠에 가깝게 바꾸었으니 오오요로이라는 지적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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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떠나 도도 다카토라의 갑옷은 확실히 고증이 잘못되었다. 갑옷이 금색이고 특히나 해당 그림 가몬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몬과도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에 도도가 아니라 태합인 히데요시같은 느낌이 들 지경. 도도 다카토라의 갑주 허나, 이해가 가는 것이 곧이곧대로 고증대로 제작되어 등장했다면 많은 관객들에게 오해를 사 개그 캐릭터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고증을 완전히 무시한 것도 아니며, 본작에서는 날개를 대폭 축소시키고 색상을 금색으로 바꾼것을 빼면 기본적인 원형은 살렸다.
4. 전술 관련
비판이 많던 철쇄설을 배제했으며, 이순신의 대장선이 초반 홀로 역류에 견디며 분투하다가 아군이 합류하고 물살이 바뀌면서 몰아쳤다는 명량해전의 큰 얼개는 지켜지고 있으나[18] , 세부적인 면에서 지적을 받고 있다.
스토리상 해전의 큰 얼개는 다음과 같다.
1. 일본 수군 1대와 교전, 적선 다수 격파
2. 물살이 격해지며 피섬으로 이동, 추격대와 백병전
3. 공포에 질린 병사가 화약통 발화, 근접부대 섬멸
4. 대장선 건재 알린 후 아군 합류+구루지마 본대 접근
5. 구루지마 격파 후 일본 수군 사기 저하로 퇴각, 추격+충각 섬멸
이중에 주로 비판받는 장면은
- 격꾼들만 고생시키고 절대 펴지않는 돛
- 조일 함선간 높이 차 등의 고증
- 전력차로 인해 포격전 위주였던 전투에서 과도한 백병전씬
- 배가 조금 흔들리자 닻을 그냥 쿨하게 끊어버림
- 세 명이 대나무 삿대로 밀면 밀어지는 판옥선
- 대장선 망루 점거가 코앞이던 왜군들이 화약통 발화 한 번에 멘붕
- 화약통이 째로 터진 대장선과 그 갑판은 멀쩡(멘붕왔다고 화약통에 불씨 꽂아 넣는 병졸의 어이없는 개연성은 접어두고서라도!)
- 조선 수군은 그틈에 멘붕에 빠지지도 않고 왜군 척살
- 러닝타임만 길게 잡아먹은 뜬금없는 화공선씬
- 행주치마 패러디한 이정현의 치마
- 조각배, 그것도 어딘가 고정시킨 줄이 아닌 어민이 손으로 끄는 밧줄에 예인되는 대장선
-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쉽게 분간하기 어려운 조선수군의 전략과 전술
- 수군 병사가 대놓고 말하는 호로새끼들에 대한 감독의 주입식 메시지
4.1. 영화상에서 등장한 무기 목록
판옥선의 주력 함포로 등장했다. 주로 무쇠로 만든 철탄을 사용하는 모습이며 해전장면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사실 조선 수군의 주력 함포는 지자총통 이하급의 현자총통과 황자총통이었으며 천자총통은 지나친 화약 소모 등을 이유로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육군보다는 훨씬 많이 썼기 때문에 대장선에 천자총통이 주력으로 장비된다 하더라도 이상할것은 없다. 권율 장군이 행주 대첩에서 쓴 천자총통도 사실 이순신이 몇기를 써보라고 줬던 것이다. 그만큼 조선 육군에서는 더더욱 희귀했던 물건.[19] 그러나 함포가 천자총통 일색인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명량해전 당시 주력이 된 함선은 경상우수사 배설의 잔존 함대였으므로 이미 천자총통이 현자총통으로 대부분 교체가 끝났을 시점의 배들이며 통제공이 육지를 순회하며 총통을 긁어모았다 하더라도 모든 화포를 천자총통으로 교체할 정도였을 확률은 매우 낮다. 권율 장군에게 보낸 천자총통 또한 더 이상 배에서 쓰지 않는 잉여물자를 보냈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함포가 전부 천자총통인 것은 천자총통 특유의 육중한 비주얼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영화 속 내용을 근거로 비판해보자면 일단 화포를 바퀴달린 받침대에 올려 운용한 것은 맞다. 그러나 받침대와 화포를 1차적으로 고정시키고 그러한 화포 1대를 함선과 연결시켜서 사용하는 것이 맞다. 화포가 배와 고정되어있지 않으면 한 발 쏠 때마다 화포가 4~5미터씩 밀려나기에 뒤에 있는 수병들은 반동으로 뒷편 갑판으로 날아가거나 혹은 화포나 기물에 부딪혀 다칠 위험을 안고 싸워야 한다. [20] 따라서 극중 충각전법을 펼친다고 배가 좀 흔들리자 대포가 굴러다니고 수병의 손을 찧는 일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수병들의 고생을 부각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포받침 바퀴에 깔리거나 하는 식으로 연출했어야 한다.
[image]영화 속 내용을 근거로 비판해보자면 일단 화포를 바퀴달린 받침대에 올려 운용한 것은 맞다. 그러나 받침대와 화포를 1차적으로 고정시키고 그러한 화포 1대를 함선과 연결시켜서 사용하는 것이 맞다. 화포가 배와 고정되어있지 않으면 한 발 쏠 때마다 화포가 4~5미터씩 밀려나기에 뒤에 있는 수병들은 반동으로 뒷편 갑판으로 날아가거나 혹은 화포나 기물에 부딪혀 다칠 위험을 안고 싸워야 한다. [20] 따라서 극중 충각전법을 펼친다고 배가 좀 흔들리자 대포가 굴러다니고 수병의 손을 찧는 일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수병들의 고생을 부각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포받침 바퀴에 깔리거나 하는 식으로 연출했어야 한다.
대장선이 구루시마의 세키부네에게 포위되는 상황에서 근접한 적함에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는 화포로 등장한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이 대완구를 사용한 것 자체는 맞지만[21] , 문제는 대완구를 설치한 포차가 마반차라는 것. 마반차는 고종 5년인 1868년, 그러니까 흥선대원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대완구에서 발사된 폭발형 포탄이다. 심지가 타들어가는 일종의 지연신관식 작동을 통해 근접한 세키부네에 발사된 이후 갑판의 틈을 통해 하부 격군실에 떨어져 시밤쾅!! 당연히 피격된 해당 세키부네는 걸레짝이 되어 침몰한다.
[image]해전 초반부, 돌입해오는 구루시마의 1진이 천자총통의 집중포화에 엉키고 설켜서 진형이 흐트러진 순간 대장선의 사수들이 일제히 발사한다. 작중 등장한 무기는 소신기전에 가까운 형태로서, 작은 폭발통을 매달은 화살의 형태다.
그러나 발사 방법은 완전한 고증오류. 조선전역해전도에 그려진 잘못된 발사법을 그대로 답습했다. 신기전은 화살 뒤쪽에 활줄을 거는 오늬가 없어 보통 화살처럼 쏠 수 없으며, 철저하게 자체 추진력으로만 날아가는 로켓 무기다.
그러나 발사 방법은 완전한 고증오류. 조선전역해전도에 그려진 잘못된 발사법을 그대로 답습했다. 신기전은 화살 뒤쪽에 활줄을 거는 오늬가 없어 보통 화살처럼 쏠 수 없으며, 철저하게 자체 추진력으로만 날아가는 로켓 무기다.
실록의 세종 29년 기록에 신기전의 사용법(세종 118권, 29년(1447 정묘 / 명 정통(正統) 12년) 11월 22일(신해) 1번째기사, '평안,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주화의 소용량을 보고하게 하다' 참조).[22] 을 봐도, 활로 쏘다는 기록은 없다. (실록에는 주화라 나오지만 바로 다음해인 세종 30년 주화의 공식명칭이 신기전으로 바뀌기 전 기록이라서 주화로 나오는 것 뿐이다.) 그렇다고 국내의 일부 네티즌들이나 서적에서처럼 제작진이 조선시대 사용한 불화살인 석류화전(石硫火箭)과 신기전을 헷갈렸는가 하면[23] 그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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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석류화전 복원품이다. (천을 감싼 건 안에 화약뭉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화공선이 대장선을 향해 접근하자 사수들이 발사하는데, 신기전과 달리 화살 뒤 천뭉치를 감싼 게 분명하게 보인다. 특히 일본 화공선 위에 젖은 짚더미에 박혀 불이 꺼져버려 위력을 상실하는 장면까지 나와 의외로 화살을 자세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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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석류화전 복원품이다. (천을 감싼 건 안에 화약뭉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화공선이 대장선을 향해 접근하자 사수들이 발사하는데, 신기전과 달리 화살 뒤 천뭉치를 감싼 게 분명하게 보인다. 특히 일본 화공선 위에 젖은 짚더미에 박혀 불이 꺼져버려 위력을 상실하는 장면까지 나와 의외로 화살을 자세히 볼 수 있다.
- 조란환
맨 처음 대장선에 접안해 승선하려는 왜병들에게 슬로우 모션으로 선사한 일종의 산탄이다. 수많은 쇠구슬 다발을 총통에 넣어 발사한 형태이며 원래대로라면 조란환에 피탄된 왜병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찢겨져 고어물을 찍었겠지만 영화 등급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신체 손상은 거의 묘사되지 않고 피만 살짝 살짝 흩날리는 정도이다. 영화상에선 천자총통에서 발사된 것으로 나오지만, 그 어떤 구경의 총통에도 사용 가능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판옥선에 승선을 시도하는 왜병들을 상대로 자주 사용된 포탄이다. 심지어는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에도 장비되어 성벽에 쇄도하거나 배에 접현을 시도하는 왜군들에게 쏘아졌으며, 기록에는 불랑기포나 대조총에도 사용했다고 나온다.
치열한 전투와중에 구루시마가 회심의 카드로 보낸 화공선을 발견하고 대장선에서 부랴부랴 대응책을 찾는 과정에서 이미 모든 포탄을 소모했다는 상황속에 무기고에 남아있던 대장군전이 턱하고 쓰러지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대용의 신중한 조준끝에 발사된 대장군전은 화공선에 명중하는 성과를 보였지만, 폭발이 아닌 관통이 목적인 무기이므로 이렇다할 저지력을 보여주진 못한채 화공선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주는데 그쳤다.[24]
왜군의 기본 무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 나오며 한국사극에서 선보이던 심지총과는 확연히 다르게 고증이 잘되었다. 여러모로 버프를 먹어서 손이 한방에 날아가기도 하고, 명중률은 저격수를 운용하기까지 할 정도... 아래의 조총 만능설 항목 참조.
- 일본 활
조총과 관련해 고증오류가 있다. 실제로는 조총 도입 이후에도 왜군들은 활을 조총보다 더 많이 사용했는데, 죄다 조총만 사용하고 있다. 정작 주력이어야 할 일본활과 화살은 도도 다카토라의 지휘대 한쪽에 장식용으로 놓여있다[25] (...).
- 오오즈츠(大筒, 대조총)
2인 1조로 운용하는 대구경 조총. 이순신을 엄호하는 방패병들을 말 그대로 날려버리는 위력을 보여준다.
- 호로쿠비야
대장선에 근접한 왜병들이 손에 들고 빙빙 돌리다가 던진 폭발형 무기. 파편이 날리는게 아니라 화염병과 비슷하게 착탄한 지점에서 화염이 피어오르는 일종의 소이탄으로 나온다. 그러나 실제하고는 고증이 안 맞는 부분으로, 실제로는 같은 시기 한국의 질려포통처럼 폭발하는 작렬탄이고, 내부에도 위력 증가를 위한 쇠조각이 있다.
- 일본군의 대포
와키자카의 기함을 보면 누각 좌우에 매달린 대포를 볼 수 있다. 실제로 사용되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짧게 나와 확실하진 않으나, 매끈한 포신과 포신 뒤쪽 부분이 네모난 것으로 보아 불랑기포 항목에 있는 오토모 소린이 기증받은 서양 불랑기포로 보인다. 삭제장면에선 와키자카가 준비한 무기로 좀 더 비중 있게 나온다. 다만 저기서는 안택선 들보에 매달아서 쏠수 있다고 하는데 신재호의 주장에 따르면 정상적으로 갑판에 거치할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들보에 매달아서 대포를 쏜다는 헛소리의 근거를 조선전역해전도를 들먹이는 것부터가 제작팀이 얼마나 역사에 무지한지를 드러낸다.*
4.1.1. 조선군 측 승자총통, 조총의 미출현
[image]
명량 해전 당시 사용되었던 것이 유력시되는 승자총통이 '''실제 발굴'''되었음에도, 정작 작중에서는 승자총통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아쉬운 부분. 또한 백병전 비중에 비해 이순신 장군이 '''빗발치듯 쏟아부었다'''고 하였던 승자총통과 활 등의 투사무기에 대한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조선군이 원거리 화기로 총통과 완구, 활만 사용하나 시대적으로 조선군도 조총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시점이다. 참고로 이순신은 1593년 9월에 왜군의 조총 복제에 성공했고, 이순신 외에도 조선 내 각계의 조총 복제 노력과 항왜들의 지원으로 사극의 모습과 달리 임란 중반부를 거치면서 조선군도 어느 정도 조총을 사용했다.
4.1.2. 조총 만능설 관련
이순신의 배에서 초요기를 내걸 때 일본 측에서 조총으로 저격을 시도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중반에 나오는 구루지마의 부하 저격수 '하루' 인데, 다른 일본군들이 새총 쏘다시피 지향사격을 하는 것과는 영 딴판. 초요기를 세우려는 것을 저격하고 이순신 장군도 저격하려 하는데 이렇게 조총으로 저격을 하는 연출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당장 왜란 당시에도 평양성 전투, 용인전투 등에서 조선군 장수들이 저격을 당한 사례가 빈번히 언급된다. 병자호란때는 청 태종의 사위 백양고도 조선 포수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파도에 흔들리는 선박 위에서 다른 선박 위의 목표물을 저격하는게 말이 안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 옹호론: 약 200년 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호레이쇼 넬슨 제독 또한 프랑스 해군 테메레르급 전열함 르두터블과의 접전에서 저격수가 발포한 머스킷 총탄에 저격당해 전사했다. 물론 시대차이가 좀 있기는 하지만 당대의 머스킷은 발화 매커니즘 정도를 제외하면 명중률이나 탄궤적 측면에서 조총과 큰 차이가 없었고 더군다나 트라팔가르 해전도 영화상의 해전 못잖게 난잡하게 진행된 전투였던만큼 저격수에게 주어진 여건은 영화와 거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26]
- 비판론: 머스킷 완발식인 조총(매치락) 이라면 명중률에서 큰차이가 없지만 순발식인 플린트락과는 명중률이 비교하기 힘들정도로 차이난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시대에는 사실상 플린트락으로 사실상 완전히 대체되어있는 시점이며 더군다나 호레이쇼 넬슨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라이플 연대' 라는 저격수 부대도 있었다. 즉 임진왜란 당시와 트리팔가르 해전 당시랑 동일시 하면 안된다.
더구나 거리도 문제인데 해전에서는 육전보다 적과의 거리가 더 멀기 마련이며 설령 조총의 저격능력이 생각보다는 우수함을 감안하더라도 망원조준경도 없는 시대에 그 먼거리를 저격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27] 넬슨이 저격당한 시점은 르두터블이 넬슨의 빅토리호와 접현해서 병사들이 백병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코 영화에서처럼 멀리 떨어진 배에서 저격당한 게 아니다.
또한 전투 초기 돌격해오는 일본 함대에게 포격하는 과정에서 포탄으로 공격해야 마땅할 정도로 먼 거리에서 조총을 사격하는 위엄을 볼 수 있는데[28] , 조총에 각을 주어 사거리를 늘리는 운용은 '''실존'''했으나 그렇다고 그렇게 멀리까지 날리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image]
조총의 곡사사격법에 대한 설명 이미지.
즉 곡사사격이 언뜻 황당해보이긴 하나 곡사사격 자체가 오류는 아니다. 하지만 사거리가 과장되었다는 비판은 여전히 유효하다. 연출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지 애매한 부분이다.
일본군의 조총 사격은 대부분 판옥선의 선체와 방패에 막히긴 하지만 일부는 틈을 파고들어 사상자를 낸다.[29]
전반적으로 영화상에서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의한 피해보다는 선상 백병전에 의한 피해가 더 크게 묘사된다. 백병전을 하지 않는 나머지 10척 함선들은 인원 피해모습이 거의 없기 때문.
4.2. 폭발 관련
4.2.1. 개봉 전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해전 장면중, 포탄을 맞은 세키부네가 화염을 내뿜으면서 산산조각나는 장면을 두고서, 당시 조선의 화포는 주로 철탄을 쐈기 때문에 저런 강렬한 폭발은 말이 안된다는 고증덕후들의 비판과 영화적 연출로 봐야한다는 의견 및 왜군 화약 보급선에 명중했기 때문이라는 반론까지 어우러져 키배가 벌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폭발 그 자체를 두고 논란이기도 한데, 사실 화약 보급선에 맞았다고 해도 큰 폭발이 일어나는 건 어색한 일이기는 하지만[30] , 조선 수군은 단순 철환만 쏜 것이 아니다. 당시 조선 수군은 조란환, 대장군전은 물론 '폭발'하는 파열탄인 비격진천뢰[31] 도 웅포 해전 등에서 사용한 기록이 있는 등 생각보다 다양한 탄종을 운용했으므로, 비격진천뢰가 화약 보급선(혹은 자폭선)에 명중했다면 충분히 폭발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있다[32]
4.2.2. 개봉 후
예고편에서 논란이 된 대폭발 장면은 구루지마가 회심의 카드로 준비한 화공선으로 밝혀졌다. 그 전 장면들에서는 철탄에 의해 관통되거나 먼지폭발을 일으키는 장면이 묘사되며, 백병전 상황에서 근접한 세키부네에게 비격진천뢰를 발사해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연출도 등장하는 등, 전반적으로 고증에 맞는 포격전을 묘사하고 있다.
구루지마가 보낸 화공선의 경우, 그 안에 가득 화약통을 채우고서 도화선을 이용해 자폭을 수행하려는 설정이며, 정작 대장선에서는 남아있는 포탄이 없어서 마지막 하나 남은 대장군전으로 대응을 하지만 치명타를 입히지 못해 위기에 처한다. 이를 뒤늦게 발견한 아군의 지원사격으로 대장선과 충돌하려는 순간 극적으로 피격당해 대폭발을 일으킨다는 설정이다.
4.3. 선상 백병전 관련
과도한 논쟁으로 한때 이 항목만으로 새 문서를 작성할 수 있겠다는 말도 나왔을 정도. 두 의견이 혼재되어있으니 판단은 알아서 하자.
4.3.1. 개봉 전
[image]예고편에서 등장한 선상 백병전 장면으로부터 논란이 시작되었다.
주된 쟁점은 난중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대장선의 피해는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으로 나와있다는 것으로 이는 예고편의 장면처럼 처절한 백병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예고편의 백병전 장면이 영화에 등장하면서 논란이 심화되었다.[33][34]
4.3.2. 개봉 후
명량은 전체 러닝타임의 50% 가량인 전반부는 해전을 앞둔 조선측 분위기와 일본측 분위기를 보여주며 거기에서 드러나는 각종 인물들의 심리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고, 나머지, 후반부인 50%가 순수히 해전 그 자체를 묘사하고 있다.
그 중, 선상 백병전 장면은 2차례에 걸쳐 일어나 해전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대장선의 사상자는 5명이며 "적선 30척을 깨부숴 물리쳤다."라고 적었으며, 주된 전투 내용은 함포사격이나 선상에 비치된 각종 원거리 무기를 이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근접전에 있어 우세한 일본군의 특성상 치열한 백병전이 발발했다면 난중일기에 기록된 대장선의 사상사 5명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설득력 있으며[35] , 만약 백병전이 벌여졌다고 해도 적선의 주력인 세키부네는 대부분 판옥선에 비해 높이가 낮았기에 공성전의 성격을 띄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즉 영화에서 서술된 '도선을 허용하고 적과 아군이 뒤섞인 처절한 백병전'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 또한 안위의 판옥선에서는 실제로도 백병전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안위 함선 쪽의 백병전도 영화에서 나오긴 하지만 아주 잠깐만 묘사하고 넘어간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축소해서 보여주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만 강조한 것.
물론 '거대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의 특성을 고려해야 하며, 백병전은 현대의 사극 트렌드와 극적 연출, 그리고 상업성을 위한 인위적 고증오류이다' 라고 말하며 제작진을 옹호하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실제 조선수군의 전투절차를 고려하면 이러한 지적은 역사적 무지의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조선수군은 0거리 사격과 근접해서 화력을 일제히 퍼부어 적을 침묵시킨 후 급속이탈하는 굉장히 고화력의 고기동전투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명량해전이다. 백병전같은 왜곡없이도 충분히 처절하다. 특히 이순신 본인이 안위의 함선을 구하기 위해 연달아 3척을 까내려부쉈다고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런 짓을 하려면 부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대장선이 전복될 각오와 안위의 함선이 포격에 휩쓸릴 각오를 하고 해야하는 '''미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위의 배에서는 익사자가 나타났으니 연출에 따라 충분히 처절해질 수 있다.
또한 상업적인 면에서도 비판이 얼마든지 가능한데, 두 차례 백병전의 연출 강도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두번째 백병전 장면은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평도 자주 보인다. 예를 들어 첫번째 백병전은 소형의 세키부네에서 판옥선의 건현을 기어올라오는 공성전으로 묘사해서 어느 정도 견딜 만한 위협으로 묘사하고, 두번째 백병전은 동일한 높이의 아타케부네에서 구루지마의 최정예 부대가 쏟아져 들어오는 더 위급한 상황으로 연출했다면 상업적으로도 괜찮고 고증도 적당히 살리는 일석이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36]
5. 함선 관련
5.1. 세키부네의 크기 관련
영화상에 등장한 왜군의 함선은 크게 기함격인 안택선과 주력 전투함선인 세키부네 두 종류다. 이 중 안택선은 판옥선과 비등한 크기로 묘사되어서 큰 문제는 아니지만, 자주 등장하는 세키부네의 경우 판옥선의 여장(갑판에 설치된 난간처럼 보이는 것)과 높이차이가 별로 없을정도로 상당한 높이를 가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판옥선은 해상의 성벽과도 같을 정도로 왜병 입장에서는 백병전을 벌이기 이전, 판옥선에 승선하는 과정부터가 상당한 난관이었을 정도로 두 함선의 체급차이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영화상에선 세키부네도 죄다 중대형 함선으로 등장한다는것.
영화상에선 판옥선에 근접한 세키부네에서 갈고리를 던져서 거리를 좁히고 널판지 비슷한 나무 사다리를 걸어서 승선을 시도하는데, 기록으로 보자면 두 함선간의 높이 차이 때문에 보통은 왜병이 길다란 사다리를 타고 수직에 가깝게 기어 올랐다고 하며, 이런 왜병을 저지하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창을 쑤셔대거나 길다란 장검으로 댕겅댕겅 하거나 활을 쏘거나 돌을 던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지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37] 그럼에도 영화상에선 세키부네에서 판옥선으로 도선하는 왜군에게 '''조란환으로 영거리 사격'''을 할 정도로 두 함선의 높이차가 '''없다!'''
아마도 상위 항목에서 언급된 논란의 백병전을 염두에 두고 실제의 크기보다 다소 과장하여 함체를 키워서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세키부네의 존재 자체는 고증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화선항목에 나오듯이 일본에서는 에도막부 시기 목할법의 도입 이전에는 같은 배라도 배 크기가 들쭉날쭉이었다. 그러나 작중에서는 모든 세키부네가 하나같이 판옥선이나 안택선과 거의 같은 크기를 가진 싸움배마냥 나오며, 이는 분명한 고증오류다. 역사적인 면을 감안한다면 해적 출신인 구루지마 수군의 세키부네들은 소형으로, 그렇지 않은 와키자카나 도도의 세키부네는 대형으로 하는 게 맞다.[38]
5.2. 대장선의 내구도 논란
일종의 주인공 보정이라고 보여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순신이 탑승한 대장선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순수히 영화상에 묘사된 해전의 과정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은 구루시마 함대의 끈질긴 대공세를 계속 이겨내는데, 처음 선상 백병전 과정에서 PTSD에 빠져 이성을 잃은 병사가 장루 근처의 화약통에 불을 붙여 대폭발을 하는데도 그 여파를 받았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판옥선의 갑판은 멀쩡했다. 특히 해전 클라이막스에서 구루시마가 보낸 화공선이 거의 충돌 직전 아군의 지원사격에 또다시 대폭발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것으로 묘사된다.
화공선 이전에는 멀쩡했던 판옥선의 외형이, 폭발 이후에는 좌현 격군실 중앙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선체 하부에 물이 들어차 다급하게 물을 퍼내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 구루시마 안택선의 충각공격이 시기 적절하게 발생한 대형 회오리에 의해 막히긴 했으나, 심한 데미지를 입은 판옥선 선체는 회오리에 휘말린 와중에도 몇번이고 안택선과 접촉이 있었다. 또한 아군의 지원으로 안택선이 침몰한 이후에는 정작 대장선은 회오리에서 자력으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심대한 손상을 입어 선상의 장수들이 이순신을 바라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이 또한 천행으로 묘사한 어민들의 도움[39] 으로 위기를 극적으로 빠져나오며, 이후 합류한 아군 선단과 함께 바뀐 조류를 타고 왜군에게 일제히 충각돌격[40] 을 시전하는데 다른 아군 함선들은 원래 단단한 판옥선에 이렇다 할 전투도 하지 않아 멀쩡하지만, 이미 자력으로 회오리를 벗어나기도 어려운 지경의 처절한 상태의 대장선이 아무렇지도 않게 적선단을 들이받는 충각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그런 주인공 보정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 다만 멀쩡한 상태의 판옥선이라 해도 회오리를 벗어나는건 불가능했는데 외부의 도움으로 벗어날수 있었다는 상황으로 볼수도 있다. 실제로 대장선은 마지막까지 격노꾼들이 노를 저을수 있을 정도로 항행능력 자체는 멀쩡했다.
이순신이 탑승하는 대장선은 처음부터 크고 단단하게 설계되었었고, 그렇게 두들겨 맞았음에도 구멍이 뚫릴 정도의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좌현 중에서도 한군데 뿐이며, 나머지는 거의 멀쩡하게 남아 있었으니 정면충돌로 세키부네를 가라앉히는것은 말이 안될 정도는 아니다. 한선과 왜선은 크기 차이 이외에도 배의 제작방식과 구조 때문에 왜선이 내구도에서 상당히 불리했다. 더불어 판옥선은 한반도 연안에서의 화포전을 주 전법삼아 남서해안의 거친 물살을 헤쳐나가며 싸우기위한 목적으로 오로지 그것에만 '''특화'''되어 설계 건조된 연안용 전함이었기에 그 내구도는 상상 이상으로 무지막지하게 튼튼하다.[41]
거기다가 실제 역사에서는 영화에서 상대한 것보다 훨씬 많은 적선을 대장선 혼자서 격침시키다시피 했으니 '''판옥선의 실제 내구도는 영화에 나온 것보다 더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 포인트.'''
6. 일본어 대사 관련
감독의 전작인 최종병기 활에서도 거의 사어에 가까웠던 만주어를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으므로, 이번 영화에서도 왜군측 등장인물들은 몰입감을 높이기 위하여 모두 일본어를 구사한다. 그러나 일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줄 아는 관객 입장에서는 어설픈 일본어 억양으로 인해 몰입감이 심각하게 떨어진다.
이 일본어 대사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티저에서 류승룡이 'リシュンシンはワシがこの手で捕まえる'라는 대사를 치는데, 동사 자체가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사용되기엔 미묘하다. 저런 상황이라면 '적장을 토벌하다' 내지는 '물리치다' 정도의 의미를 갖는 동사 討つ 내지 討ち取る를 써야 했다. 정 포박한다는 뜻을 살리고 싶었다면 「捕まえて参ろう、引っ捕まえて見せよう、捕まえてご覧にしんぜよう」등의 표현이 나았을 것이다.
만주어는 심지어 원래 쓰던 민족들마저도 잊어가고 있는 언어라 잘 살려냈다고 평가받았지만, [42] 국내에 일본어 능력자가 만주어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상태에서 오류가 많은 일본어 대사는 상당한 불만과 비판을 받고 있다. 거기에 류승룡의 발음이 심각하게 어눌하고 부정확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중.[43]
시사회에 참가한 일본인 관객으로부터는 류승룡의 어색한 일본어 발음 때문에 많이 깨고[44] , 일본 수출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반응도 나왔다. 여기 다만 일본어 발음의 문제와는 별개로 일본 사학계가 '별것 아닌 사건' 정도로 치부하면서 덮으려 드는 임진왜란 관련 작품이고, 현재 한일 양국민의 감정이 나쁜 이 상황에서 똑같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불멸의 이순신과는 달리 명량이 일본에 수출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메인 예고편과 티저 예고편에서 등장하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류승룡 분)의 대사 중 "조선은 내가 먹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일본 다이묘들이 개인적으로 군대를 운용하는 경향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모리 다카마사라는 히데요시의 군감까지 참가하는 전투에서 이런말을 했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잘 해봐야 준장 정도 계급인 자가 국가 원수의 명령을 받고 적국을 침공했을 때 "이제 이 나라는 내가 먹겠다"라고 발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셈. 따라서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는 본국에서 파견한 정치장교가 있는 상황에서 고증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실제 영화상에선 사석에서 자신의 심복과 "관백은 곧 죽을테니 내가 조선을 먹튀하겠다..."식으로 말하는, 그러니까 '''저 말도 안 되는 의도로 말한 게 맞았기 때문에''' 오히려 잘못이 아니게 된 대사다. 전국시대를 지나온 일본 다이묘라면 타국에 영토욕과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작중 모리 다카마사가 아예 안 나오기도 하고. 조선 출병시 700명밖에 안 데리고 온 말단 다이묘가 할 말이 아니란 말은 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말단 병사에서 시작해서 일본을 통치하는 위치에 올랐으니 자기도 못할 건 없지 않겠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이상한 설정은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거북선을 '메구라부네(めくらぶね
[
盲船]
, 눈먼 배)'라고 불렀는데, 작중에서는 거북선을 메쿠라부네가 아니라 '깃코센/기코센(きっこうせん/きこうせん[
亀甲船]
)', 즉 한자식 이름인 '귀갑선(龜甲船)'이라고 부른다.그리고 대사 문제는 아닌데, 작중 자막에 계속 '와키자카 야'''쓰'''하루'라고 나온다. す/ス가 아닌 つ/ツ로 오해한 것인지...
7. 그 외
- 최근 사극의 유행이라서 그런지, 백의 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백성들의 의상 색감이 굉장히 화사하다. 정작 진짜로 다채로워야 할 일본 수군 병사들 복장은 소속과 상관없이 빨강 흑색으로 거의 통일되어 있다(...)
- 수군이 신호를 보낼 때 신기를 현대 군대가 수기를 흔드는 방향으로 신호를 보내듯이 일정한 형태로 흔든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흔드는 모습으로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참조링크
- 영화 오프닝 장면에서 파직당하고 한양으로 압송된 이순신이 고문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정탁이 올린 <신구차>를 보면 이순신은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인 형신(刑訊)을 한 차례 당했다. 형신에 대한 자세한 설명 포스팅 사극에서 주인공이 큰 고통을 받는 고문하면 떠오르는게 단근질 아니면 주리틀기 일색이라 그런 듯.
- 조선 병사들이 밤에 거북선을 지키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횃불을 든 병사들의 위치가 거북선과 너무 가깝다. 거북선도 몸체는 나무로 만들어진지라 불에 취약한데 저렇게 가까이 불을 들고 있으면 까딱하다가 다 태워먹기 십상이다(...) 이건 고증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아쉬움이 있다. 또한 화재 위험이 낮은 초롱등도 당대에 많이 썼고 거의 손전등과 같은 형태인 조족등도 있었는데 전혀 구현되지 않았다. 이건 다른 사극들도 마찬가지지만....
- 해전 종료 후, 아들과 함께 거북선 건조장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통제영이 설립된 이후 파악된 거북선의 숫자는 3척이었고, 원균의 삽질덕에 모두 사라졌고, 이후에 등장하지 않음으로 볼 때,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장면이다. 프리퀄을 예고하는 에필로그에서 나온 거북선은 한산도 대첩에서 명백하게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당연한 장면이지만, 후속격인 노량에서 거북선이 등장하는 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대목.
- 출정하기 전날 밤에 여러 지휘관들이 상념에 잠겨서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왔는데, 어떤 지휘관이 곰방대를 물고 담배를 피고 있었다! 담배가 임진왜란기에 조선에 유입되었다는 학설을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왜구들 사이에선 곰방대까지 보급된 상태였다 하니, 왜구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피웠다는 식으로 커버는 가능하다. 제대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광해군 시기부터.
- 같은 장면에서 안위의 뒤에 거제현령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巨濟縣令을 巨濟懸令으로 잘못 썼다(...).
- 거북선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아직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영화에서는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 나무로 상판을 덮고 창날이 튀어나온 형태로 표현된다. 상판에는 검은 칠을 한 목재를 사용했다. 돌격선으로서 철갑선이라면 너무 둔중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채용한 모양이다. 용머리도 수직 누각형이 아니라 수평형. 용머리 자체가 기계장치로 돌출과 수납이 가능한 구조로 표현해놨다. 또한 용머리에 포가 장비되어 있다. 이는 예전 KBS 역사스페셜에서 재현한 고증을 따른 것.
- 영화상에서도 이순신이 사용하는 검에 "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45] 라는 유명한 문구를 새겨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문구가 새겨진 검은 2m에 가까운 장검[46] 이며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한 검에 그 문구가 새겨져 있는 것은 고증오류라고 볼 수 있으나, 대중들에게 이순신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는데 상징적인 문구라서 새겨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오류로는 이순신의 전투용 칼이 좌대에 놓인 것. 조선시대에는 좌대에 칼을 놓지 않았으며, 현대에 좌대에 칼을 놓는 것은 일본에서 들어온 검도 영향이다.
- 전투가 끝나고 수봉이 이순신에게 토란을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모양만 봐선 감자 같지만, 당시에는 감자가 전파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여 토란으로 대체한 것.
- 전투가 끝난 후 격군들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고생한 걸 후손들이 모르면 그건 호로자식이다' 라는 대사가 있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호로자식이라는 말 자체는 속설과 달리 병자호란 이전부터 쓰였던 욕설이기에 시기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애국 마케팅이 지나친 것일 뿐. 사실 호로자식보다 '후손' 같은 집합적인 개념을 일반 평민이 자연스럽게 쓰는 게 더 문제인데, 문맹이 극적으로 줄어들고 호적이 일반화된 20세기에 들어서나 이런 개념이 일반화된 것이지 보통 족보도 없는 평민들에게는 그 자리에 없었을 가족 친지들이 자신들의 모험담을 믿어줄까부터 의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후손을 생각해서 많은 기록을 남겼던 이들은 주로 사대부였던 것을 감안해서 이순신 주변의 군관들이나 어쩌다 휘말린 선비 김중걸이 오늘 일을 기록으로 남기면 후손들이 읽으면서 믿어줄까 같은 식으로 말했다면 같은 애국마케팅이라도 관객들이 당혹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 울둘목에서 대장선이 닻을 내릴 때, 닻의 모습이 현대의 배에서 보이는 서양식 스톡 앵커다.
조선시대 닻은 이렇게 생기거나, 아니면 적당한 크기의 돌에 줄을 감은 돌닻(정碇)을 사용했다.
- 이순신과 아들 이회가 식사를 하는데 겸상을 한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는 소반을 사용하며 독상을 받는 것이 기본 예절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는 중종때 부자 겸상을 사유로 아버지를 죽이는 강상죄를 범한 이동이라는 죄인이 아버지가 겸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참작되어 사형에서 유배형으로 줄어들었다는 이야기가 퍼져있는데 이는 자료를 잘못 해석하여 왜곡된 이야기가 퍼진 것이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 중종 때 처벌받은 이동이라는 인물은 아버지와 겸상 중에 잔소리를 듣고 아버지에게 사발을 던져서 폭행하고 아버지가 죽지는 않았으나 패륜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이는 무지해서 일어난 일로 강한 처벌보다 교화를 먼저해야한다고 황해감사 김정국이 깨달아 곤장으로 감형해준 일화다. 출처1 출처2
다만 밥을 한 술 뜨려고 할 때, 이순신은 숟가락으로 먹지만 이회는 젓가락으로 밥을 뜨려 한다. 지금은 크게 뭐라 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1980~90년대만 해도 젓가락으로 밥을 떠먹는 것은 식사예절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고, 지금도 한일 양국의 식사예절을 논할 때 한국인은 숟가락 일본인은 젓가락 차이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온다. 그것 외에도 한가지 덧붙이자면 밥상머리에서는 묵묵히 밥만 먹는 것이 과거의 식사예절이었기 때문에 부자지간에 대화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을 것이다.
- 작중에서 왜군 장수들 사이에서 구루지마 미치후사와 해적 출신 수군을 해적 출신이라며 은근히 낮춰보는 분위기가 흐르는데, 실제로는 일본 수군 중 해적 출신들은 상당히 명성이 높은 편이었다. 공해상에서 상선을 덮치고 해군이 나타나면 도주하는 일반적인 해적의 이미지와 달리 전국시대 일본의 해적은 특정 수역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지나는 모든 배에 통행세를 거두는 집단이라 수전 경험이 훨씬 많았기 때문
- 준사가 길이가 좀 짧은 모양의 궐장노(단발 쇠뇌의 일종)를 사용한다. 그러나 일본은 쇠뇌가 주력으로 사용된 게 헤이안 시대 초까지라, 작중 배경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명맥이 사실상 끊어졌을 시점이다. 설사 사용했다 해도 비싼 무기였던 쇠뇌를 스파이로 잡입한 준사가 쓰기에는 무리인 것이, 헤이안 초에 일본에서 쇠뇌의 명맥이 끊어진 이유가 쇠뇌가 복잡하고 값비싼 장비였었기 때문. 왜군 입장에서는 대영주도 아닌 이름모를 한낱 병사(혹은 하급무사)가 말로만 듣던 쇠뇌를 들고 다닌다면 당연히 입소문이 금방 퍼지는 것은 물론이요, 다들 이상하게 보지 않겠는가? 다만 조선에는 쇠뇌가 남아있었다. 당장 진주성 전투중에도 쇠뇌가 사용된 기록이 나온다. 굳이 설명하자면 조선의 쇠뇌를 노획한 것이라 우겼을 것으로 보인다.
[1] 조선시대 '장군'이라는 칭호는 사실상 첨절제사나 만호에게나 붙일 수 있고, 정3품 이상인 당상관부터는 쓰지 않는 호칭이라고 생각을 하는거 같습니다, 무관 역시도 2품으로 승진하면 문반 품계인 '가선대부'를 받기 때문에 장군 칭호를 쓰지 않는 것이 원칙. (2품부터는 무관 역시 문관의 품계를 받는다는 것은 고등학교 국사책 부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참고로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 이후 그 품계가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갔다.) [2]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해군 제 19대 해군참모총장 김홍렬 제독으로,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군 수뇌부 숙청 때 해군참모총장과 해군중장 3명이 모두 해임되면서 소장이던 김홍렬 제독이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는데, 전쟁시 외에는 2계급 특진이 안되는 군 인사법 규정 상 2년 임기 중 첫 1년은 중장 계급으로 참모총장에 재직했고 1년을 채운 후에야 대장으로 진급하여 다음 1년간은 대장 계급으로 재직했다.[3] 함대사령관에게 휘하 대위~대령급장교가 자신들과 비슷하게 호칭한다 보면된다.[4] 이 부분 역시 아군 함선은 12척이 아니라 13척이 맞다.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1척을 인솔하였으며, 후반에 전장기세가 아군에도 유리했음에도 응전하지 않았을뿐 전장에는 있었다(...) 해당전투 후 결국 보직변경을 요청하여 육군으로 보직을 옮겼다.[5] 사실 전투 초반부터 전장에 같이 있긴 했었다. 다만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을뿐(...) [6] 사실 이것도 고증오류다. 충무공은 귀선이 한창 만들어질때에도 저걸 하나 만드느니 화포를 몇개 더 만들겠다고 깠다. 게다가 만들기 어려운 거북선을 하나 만드느니 판옥선을 몇 척 더 만들었을 것이다. 거북선을 보면 잘 알겠지만 만드는 목재랑 철, 그리고 들어가는 화포와 만들기 위한 인부들도 많이 필요해 판옥선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당장 판옥선 하나 만드는데 산에 있는 모든 소나무를 베어야 했을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드는 함선인데 거북선은 두 말하지 않고도 그 당시 조선수군 상황으로는 운영하기도, 작전을 펼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7] 왜군은 선봉 구루지마, 중군 와키자카, 후군 도도로 나뉘며, 각 제대별로 기함격인 안택선 1척에 약 30여척 내외의 세키부네로 구성된 것으로 보여진다.[8] 즉 현대 사회와 달리[9] 왜 추정이냐하면 조선 초중기 갑주 유물이 몇 점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류성룡 찰갑 이전 800년 동안은 갑주 유물 자체가 거의 없다. 정말 몇 점 안된다. 오히려 삼국시대 갑주 유물이 더 많다. 조선 후기 두정갑이나 두석린갑은 그래도 유물이 좀 있는 반면에, 조선 초중기의 유물은 거의 없다.[10] 의상감독의 답변에 의하면 시간과 비용, 재질의 문제로 그대로 묘사하지는 못했다는 답변을 했다.[11] 문양을 넣은 찰은 발해 시대 유물은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찾을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쭈글거리는 느낌이 오히려 찰갑보다 지갑의 느낌을 준다. 지찰갑도 있었으니 나름 고증 자체는 소 뒷걸음질치다 쥐잡은 격으로 맞추었나?[12] 조선시대 무관의 복식 중 광대라고 하여 비슷한 게 있으나, 극중에 나오는 것처럼 무식하게 넓고 투박하지도 않고, 테두리에 털이 달리지도 않았다.[13] 당대에 일반화된 갑옷은 두정갑이니 두두미갑이니 이런 명칭을 살리지 않고 단순히 갑으로 표기했는데 조선 전기는 찰갑, 후기에는 두정갑을 갑으로 지칭했다.[14] 성종대 국조오례의에도 두정갑이 등장한다.[15] 정3품 상부터가 당상관, 이하가 당하관, 당하관중에서 정7품 이하가 참하관, 이상이 참상관이다. 당상관의 기준으로 무관은 정3품 상 절충장군 이상이 당상관이고, 어모장군 이하가 당하관이다. 수군이라면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좌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정도만 당상관이다. 참상관은 종3품 순천부사 우치적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인 종6품은 현감, 부장, 종사관까지이고, 정7품은 참군 등이 해당된다.[16] 후대에 그려진 서양의 십자군 기록화가 죄다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는것으로 묘사되는 그림이 존재하는것처럼. 참고로 십자군 시대에는 사슬갑옷이 대세였지 플레이트 아머같은건 아직 없었다.[17] 엄밀히 따지면 틀린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일본도에 맞서기 위해 길이가 길어지고 두 손으로 잡을 수 있게 한 환도가 분명 존재했기 때문이다.[18] 특히 전투 초반에 대장선이 역류에 거스르는 상황에 있었음은 2011년에 나온 비교적 최신 학설인데 이를 전면수용하였다.[19] 애시당초 함선을 개박살 낼 위력의 함포(화포와 함포는 엄연히 다르다, 함포는 함선용 대포로 원거리사격용이다)를 육지전투(행주대첩)에서 실전 사용했더니 일본육군이 맨붕에 빠졌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착각하면 안되는 것은 유럽과는 달리 조선은 함재포와 육상용 화포의 구분이 없었다. 수군이 쓰던 천자총통은 드물긴 해도 육군도 쓰고 있었으며 주력 함포인 현자총통은 진주성 전투의 주력 화포였다.[20] 영국 해군도 바퀴달린 포받침을 선체에 줄로 묶어 운용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사격하면 1~2미터 뒤로 밀려났다고.[21] 비격진천뢰가 대완구용 포탄이다.[22] 검색시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주화의 이익'이라 친 뒤 세종실록에 나오는 1건을 보면 된다.[23] 이런 오류가 널리 퍼진 이유는 중국에서 우리나라의 신기전과 같은 무기를 화전(火箭)이라 부르고, 우리나라도 종종 화전, 혹은 신기화전이라 불렀기 때문이다.[24] 물론 대장군전이 관통하는 과정에서 포로 격군을 결박했던 쇠사슬이 파손되면서 임준영의 행동에 제약이 다소 사라졌으며, 그로 인해 화약통을 물에 빠트리면서 대장선에 위험을 신호했고, 이를 알아차린 준사에 의해 다음 대처가 진행되도록 한 상황을 이끌어냈다.[25] 어디까지나 아직 당시 일본군의 주 원거리 투사무기는 활이었다.[26] 여담이지만 이전에 명량해전을 다뤘던 김경진의 소설 격류에서는 일본 제일의 저격수가 이순신을 저격하려고 특별히 고용되어 참전, 조선 대장선의 장수를 저격 사살하였으나 이는 이순신을 보호하기 위해 미끼 역할을 했던 순천 감목관 김탁이었고, 저격수는 분노한 순천 부사 우치적의 애기살 역저격으로 죽는 묘사가 있다.[27] 전설적인 저격수로 알려진 시모 해위해가 바로 스코프 없이 저격을 선호했기로 유명하지만, 역시 인간의 한계 때문에 500m를 넘어가는 저격을 하지는 못했고, 보통은 150m 안팎의 단거리 저격이 일반적이었다.[28] 마치 유탄을 쏘듯 각도를 재서 곡사로 퍼붓는다.[29] 투구를 쓴 병사가 머리를 들었다가 헤드샷 당하는 장면이나 50구경 기관총도 아닌데 조총 탄환에 손목이 날아가는 장면이 다소 오버스럽긴 하다. 특히 그정도 곡사로 쏠 정도의 거리면 조총 유효사거리조차 지난 시점일텐데 이러면 부상자조차 내기 힘들다 (그냥 하늘에서 쇠구슬이 후드드득 떨어지는정도 될것이다.). 특히 영화의 조선 수군은 갑옷으로(심지어 대부분이 두정갑!!으로.)중무장했기 때문에 이런 사격으로는 눈 같이 민감한 부위에 맞지 않는 이상 전혀 피해를 줄수 없다.[30] 아부키르만 해전에서 불타던 오리앙호가 대폭발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타닥타닥 불타다가 폭발한 것이다. 다만 서양 배는 너무 두꺼워서 포탄이 도저히 하부까지 뚫고 들어갈 수 없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31] 다만 비격진천뢰는우리가 아는 것처럼 불꽃을 일으키며 터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한쪽 구멍으로 화염과 파편이 뿜어져 나오는 식이다.[32] 그외에도 적은확률이지만 자폭선 내부에 횃불등 잠재적불씨들이 있었을확률이있다(사실 애초에 자폭선내에 자폭을위한 도화선도 작중내에 묘사되었다).[33] 실제 역사속에서도 근접전에서는 일본군이 강해 이순신도 왠만하면 적에게 근접전을 허용하지 않고, 대포로 사격 및 화살로 적을 부수는데 집중했다고 한다. 노량해전만 해도 당시에 이순신이 전사한 원인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순신이 적진에 포위된 진린의 배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고 자신도 그 눈 먼 총알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34] 당시의 조선은 중기로 오자마자 중기병과 근접전에 쓰는 무구에 대해 천외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이런 사태가 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탄금대 전투 당시에도 기병이 전부 궁기병에 국가에서도 근접전으로 하는 칼싸움과 창보다는 궁술을 중점으로 합격시켰는데 이로 인해서 조선은 일본군에게 근접전을 허용해 버리면 대책이 없는 병사들이 되었다. [35] 영화 내에서도 당연히 5명보다 훨씬 많이 다치고 죽는다[36] 그래서인지 몰라도 김한민 감독이 출연했던 배우들과 다큐형식으로 찍은 명량 : 회오리 바다를 향해서의 GV에서도 이 백병전에 대한 질문이 나왔는데 이에 감독의 입장은 이순신 장군의 배에서 백병전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넣지 않으려고 했으나 막상 촬영에 들어가 보니 너무 밋밋해서 치열함을 위해 부득이하게 그 장면을 넣어야 했다고 밝혔다.[37] 임진왜란 이전 전국시대 일본에서 한창 내전이 일어날 때도 해전에서 세키부네가 아타케부네를 상대로 싸우거나 작은 세키부네가 큰 세키부네를 상대로 싸울 때 이런 식의 싸움이 일어났다.[38] 전근대 일본 싸움배 중 가장 큰 배인 안택선이 등장한 이유 자체가 조선기술의 발달도 있지만, 해전이 해적 출신의 독립 수군세력 중심에서 일반 지방영주들도 해군을 양성하면서,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무사 계급이 사령관으로 앉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선상 백병전이 발달한 일본에서도 일단 내 배가 크면 적이 도선하기 힘들어 방어가 유리하고, 이쪽에서 활과 조총을 날려 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점은 유효했다.[39] [image] 이 장면도 억지인 부분인게, 거대한 판옥선을 어민들이 작은 고깃배를 끌고나와 그것도 갈고리를 걸고 '''사람의 힘으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단 이에 호응해서 남아 있던 노를 필사적으로 저은 장면도 나왔으니 아주 말이 안되는 장면은 아니며, 해군이나 해양경찰청 의무경찰 출신이라면 알겠지만 배는 바다에 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외로 현대의 수백 톤이 넘는 철선조차도 줄을 걸고 여러 명이 동시에 인력으로 잡아당기는 것만으로도 천천히 딸려갈 수도 있다. 라고 볼 수도있겠으나 그것은 잔잔한 바다위나 항구에서의 이야기이고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는 배를 끌어내는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물리학적으로 생각해보아도 F-ma를 완전히 무시하는것이다. 당연히 0에 작은 힘들 더하면 움직이는것은 당연하나, 이미 소용돌이의 힘도, 질량도 넘사벽이다. [40] 영화상에서는 일본군과 조선인 모두 '''충파'''라는 용어를 쓰는데 영화상의 창작 용어다. 고대든 근세든 현대든 이러한 전술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41] 다만 연안용이라 먼바다로 나갔다간 원균처럼 폭망하는 사례도 있다.[42] 사실 그 구사자 없는 만주어조차도 조금 언어에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발음이나 억양 등에서 곧바로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43] 제작보고회 자리에서 류승룡은 직접 일본어 구사에 관해 "외국인이 한국어를 발음할때 느껴지는 어색함이 있는것처럼 자신의 일본어 발음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양해를 바란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44] 다만 발음 문제만이라면 어차피 일본은 수입하는 외국 작품들은 대부분 더빙을 적용하는게 일반적이므로 이게 문제가 될 가능성은 적다.[45] 삼척서천(三尺誓天)-석자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동색(山河動色)-강산이 떨고, 일휘소탕(一揮掃蕩)-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혈염산하(血染山河)-피로 강산이 물들도다.[46] 현충사에 보관된 이 장검은 실전용 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