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대표 직인 날인 거부 사태
1. 개요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의 김무성 당 대표가 일부 선거구 공천에 대한 공천관리위원회(공관위)의 추천장에 대표 직인 날인을 거부한 사태다. 물론 도장 자체는 제자리에 계속 있었지만, 어차피 김무성의 허락 없이 직인을 날인할 수도 없으므로 도장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 통칭 '''옥새 파동''', '''옥새런#s-1.2'''이라고도 불렸다. 옥새 파동은 주로 언론에서 쓰였고, 옥새런은 네티즌들이 가볍게 쓴 표현이다.
2. 배경 - 김무성과 친박의 악연
2000년대까지만 해도 김무성은 친박1호 정치인으로, 한땐 '''친박계의 좌장'''으로도 꼽히던 인물이었다.[1] 실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조직과 자금을 관리하며 선거운동을 이끌었던 것도 김무성이었고, 사족으로 이때 유승민 역시 박근혜 캠프에서 "줄/푸/세"로 대표되는 정책을 입안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친이, 친박이 철천지원수가 된 후에도[2] 김무성은 친박계로 분류되어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은 친이계가 18대 총선에서 친박계 정치인들을 공천 학살할 당시 피해를 봤다.[3] 그리고 이에 반발한 친박계는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와 친박연대라는 정당을 만들었고[4] , 이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친박계 의원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를 꾸려 총선에 출마했다.[5]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친박계의 좌장으로 꼽히던 김무성은 일명 '친박 무소속 연대'로 출마해 살아남았고 한나라당으로 복당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중반 들어 김무성은 '세종시 수정안 파동'으로 박근혜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본격적인 탈박, 비박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박근혜 의원이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되면서 그간 비주류였던 친박계는 당권을 장악하게 된다. 당권을 거머쥔 박근혜는 지난 총선에 대한 복수로 이번에는 친이계를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고, 이때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김무성도 배신자로 간주해서 공천에서 제외했다. 이에 김무성은 공천에서 탈락한 친이계 인사들과 자유선진당을 묶어서 보수신당으로 총선에 나가볼까도 했지만, 보수 판세가 좋지 않아 선거 승리를 위해서 뜻을 접고 당에 남아 다음 기회를 엿보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2013년 재보궐선거로 원내 복귀에 성공한다.
다만 박근혜가 대선에서 승리한 뒤에도 김무성은 한동안 친박계의 견제 때문에 당에서 겉돌기만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고 당심도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2014년 당내 선거에선 김무성과 유승민이 각각 당대표, 원내대표에 선출되며 비박계가 당권을 장악하게 된다.[6]
3. 상황
3.1. 김무성과 친박의 공천 다툼
2016년 3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무성을 위시한 비박계는 상향식 공천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이어왔다. 김무성의 처음 목적은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 경선제)였지만, 친박계의 견제를 이겨내지 못하고 뜻을 접어야 했다. 대신, 국회의원 후보를 아래에서 위로 공천하는 상향식 공천을 통해 민주적인 공천을 뿌리내려야 한다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를 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다.
사실 김무성의 이러한 입장은 총선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박근혜 정부의 연이은 실정 탓에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자 그에 대한 반사 이익으로 유승민 의원으로 대표되는 비박계의 인기가 올라가던 추세였기 때문에, 여론조사의 반영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향식 공천으로 방침을 정할 경우 친박계가 경선에서 우수수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친박계는 위에서 내려 꽂는 전략공천과 다를 바 없는 '우선 추천식 공천'을 주장하며 김무성 대표와 강하게 부딪쳤다.
김 대표가 위에서 아래로 가는 전략공천(하향식 공천)을 극도로 꺼리는 이유가 또 있었다. 위에 서술되어 있는 속셈도 있지만, 본인 스스로도 이른바 "공천 학살"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18대, 19대 총선에서 두 번이나 공천 배제 대상이었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상향식 공천에 긍정적이었던 것을 보면, # 평소 소신+두번씩이나 피해를 본 경험+정치적인 계산이 더해진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공천권을 쥐게 되는 당대표가 된 다음에도 김무성은 청와대와 친박계의 등쌀에 밀려 공천을 관장하는 공천관리위원장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청와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새누리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이 된 이한구 의원은 공공연히 김무성 대표와 각을 세우면서 오히려 '당대표도 공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등 독설적인 화법으로 비박계를 연신 압박했다.[7]
때문에 이 시기 김무성은 엄청난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원과 여론의 지지를 받아서 당대표가 됐는데, 공천관리위원회 심사장에 들어와서 공관위장 이한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면서 심사를 받거나[8] , 당대표의 권한 중 하나인 비례대표 선정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거나,[9] 심지어 '박근혜의 황태자'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당시만 해도 핵심 친박 인사였던 윤상현 의원에겐 취중이 긴 하지만 "김무성 그 새X 죽여버려." 같은 망언까지 들을 정도로 안습한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런 굴욕 속에서 어떻게든 자기 세력 지키기에는 성공해서 이재오, 유승민 의원 등 대표적인 비박계 인사들이 잘려나가는 와중에도 김무성계 의원들은 제3차 공천 학살에서 다수는 살아남는다.[10] 때문에 당시 친박계와 거래를 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고, 실제 훗날 일부 인정하는듯한 말을 하기도 했다.
위 글은 최종 공천이 완료된 3월 24일 새벽, 새누리당 당사 인근에 있는 감자탕집에서 당 지도부 인사들끼리 회식을 하는 장면을 박종희 공관위 위원이 본인의 SNS에 올린 것이다.
한편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 과정에서 공관위장 이한구는 유승민과 이재오를 공천에서 탈락시키기에는 명분이 부족하여 역풍이 우려되고, 그렇다고 경선을 시키자고 하자니 친박계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공천 마감일이 가까울 때까지 이들 지역구를 컷오프도 경선도 아닌 공백 상태로 놔두며 규정상 본인 스스로 탈당하지 않으면 출마도 못하는 상황을 만든다. 그렇게 유승민과 이재오가 울며겨자먹기로 탈당하면 이한구는 본인이 직접 탈락은 안 시켰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 전략으로 명분을 얻고 이 두 사람의 지역구를 포함해 총 5개 지역구에 친박계 후보를 공천한다는 계획이었다. 결국 시나리오대로 흘러가 23일 밤 유승민이 탈당 선언을 하며, 이대로만 가면 친박계가 원하는 계획대로 실현이 되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새누리당의 공천 전쟁은 친박계의 압승으로 굳어지는 듯 했지만...
3.2. 직인 날인 거부
[image]
3월 24일 오후, 김무성은 기자회견을 열어 유승민, 이재오 지역구를 포함한 '''몇몇 선거구에 대한 공관위 추천장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며, 후보자 등록이 마무리되는 3월 25일 저녁까지는 최고위를 열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광역시 영도구로 내려가 버렸다.
'''이로 인해 새누리당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선거법상 후보자 추천장에는 당인과 '''당대표의 직인''' 두 개의 날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장이 없어져서 그랬다면 다시 파면 되겠지만, 도장 주인이 날인을 거부하는 상황[11] 에서 최고위와 원내대표 멋대로 직인을 함부로 쓰면 법적 고발은 불가피할 것이고(각 당대표의 직인 사본이 전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으니 위조도 못 한다), 그렇게 되면 당선된 후보자들도 당선 무효 처리가 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무성 대표가 최고위 개최를 '''안''' 하겠다고 선언하고 보란 듯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헌 30조[12] 에 해당하는 상황이라고 우길 수조차 없게 되었다.
기자회견 이후 김무성은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영도대교에서 '''인생샷'''을 찍는 등, 여유롭게 지역구를 활보했다. 이에 원유철 원내대표는 당과 협의 없는 무책임한 기자회견이고, 부산으로 내려가 최고위 개최를 요구할 것이라는 긴급 브리핑을 내놓았고, 서청원·이인제 등 친박계 최고위원들 역시 김무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그날 밤 부산에 부리나케 도착한 원유철은 김무성을 만나 자갈치시장의 한 횟집에서 간신히 회동한 뒤 다음 날 상경하였다. 회동 후 각자의 입장 차이만 유지한 듯, 원유철은 최고위 개최를 수락하였다는 발표를 내놓았고, 김무성 대표는 점심을 먹고 당사에 가서 최고위는 열지 않고 당무만 보겠다고 하였다. 기사 이는 유고라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당사에 있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3.3. 최종 공천 결과
그러나 11시 30분에 열린 최고위에 참석해 친박계 최고위원들과 5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유승민의 지역구인 대구광역시 동구 을과 이재오의 지역구였던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그리고 유일호의 지역구인 송파구 을에는 공천을 하지 않고, 대신 대구광역시 동구 갑과 수성구 을, 그리고 달성군에는 공천을 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유승민·이재오의 지역구를 지켜내면서 실질적인 판정승을 거두었다. 특히 친유계·친이계의 좌장인 두 의원을 지켜냄으로써 향후 정국에서 비박계의 구심점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2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청와대를 상대로 권력 투쟁에서 오랜만에 우세 승을 보인 것도 주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러면서도 핵심 친박 정종섭·추경호를 살려주어 체면치레는 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계파 갈등 봉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음과 동시에 이면적으로 실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유승민을 안전하게 연착륙시켜서 대선 후보로의 급부상을 견제하고 실질적으로 무소속으로 출마했을 때 당선이 아주 위험한 이재오를 구제하여 친이계와 손을 잡는 4가지 토끼를 동시에 잡은, 평소의 곰이 아닌 여우 같은 행보를 보여줬다.
이렇게 공천, 무공천 대상자가 정해지자 본인 입장에선 날벼락을 맞은 격인 이재만 전 동구청장은 당 최고위원들을 만나려고 했으나 진입을 거부당하자 '''"온 몸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분하다!"'''며 분노를 토해냈으며, 유재길 후보는 법적 대응도 감수할 것이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유영하 후보는 당의 결정에 승복하겠다며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과 대조적이다.[14]
이후 중앙일보에서 기사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공천 협상 결과는 원유철이 주도했다고 한다. 당인도 김무성이 밝힌 대로 당사에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은 김무성이 '30시간의 법칙'[15] 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유승민의 지역구 같은 경우는 청와대에서 동의를 해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왜냐하면 현재 유승민 지역구의 여론은 무소속 유승민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청와대에서 사실상 직접 공천한 이재만 후보가 패배하게 되면, 청와대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와대에서 합의를 해줬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새누리당에서는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 사태를 선거 홍보에 써먹는 비범함을 선보였다.
4. 결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이런 새누리당의 추태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상으론 여당이 승리할 것이란 예측이 우세했기 때문에, 새누리당에서도 선거 기간엔 일단 이기고 보자는 식으로 어떻게든 갈등을 묻어두고 선거에 임했으나, 선거 결과 국내 총선 역사상 손에 꼽힐만한 대반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러한 행위들은 죄다 물거품이 되고 만다. 새누리당은 선거에서 참패했고, 비박과 친박은 선거 패배의 이유가 니들 때문이라며 서로 공격하기 시작해 계파 갈등은 더 심해지게 된다.
새누리당이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옥새 투쟁으로 김무성이 지원하려고 한 무소속 후보들 역시 다수는 낙선하고 만다. 새누리당 후보 공천을 추인했지만 속마음으론 무소속 후보를 밀었을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에선 컷오프(공천 탈락)에 반발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주호영 의원만 생존, 새누리당 무공천 지역에서는 유승민만 생존하고 이재오와 김영순 전 송파구청장은 낙선했다.[16]
5. 여담
사실 총선을 앞두고 이 정도로 여권이 스스로 분열을 작정하고 혼란을 조장한 배경엔,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분열로 인해 20대 총선에서 겉으로 보기엔 새누리당이 과반 혹은 원내 제1당 자리를 지킬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고, 때문에 친박계가 월권 논란 등으로 욕 좀 먹더라도 공천권을 강하게 밀어붙여 비박계를 몰아내고 당을 장악하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평이 나온다. 한편으론 김무성 역시 박근혜가 레임덕이 오던 시기였으니 자신이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로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선거를 승리한 뒤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일부러 옥새런을 일으키는 승부수를 던진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결국 공천 파동과 이에 따른 옥새런이 단행될 수 있었던 이유도 새누리당의 텃밭인 영남권 다수 유권자 표를 등에 업고 공천 과정에서 어떤 추태를 부려도 "야이~ 그래서 새누리당 안 찍을 거야?ㅎㅎ"라는 안일한 생각을 한 것이 한 단초를 제공했다. 정치인의 모든 행위는 곧 정치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정치인 김무성이 왜 영도대교에서 '지역 발전 예산 김무성이 책임지겠습니다.'라는 대문짝만한 현수막이 보이는 사진을 찍었는지 생각해보자.
허나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이는 이전부터 위태위태했던 새누리당내 계파 갈등의 결정타가 되어 20대 총선 패인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중도보수층을 비롯한 민심 자체는 당시 이한구의 공천폭거와 진박 감별사 타령 등 친박의 막장 행각에 분노하는 민심이 더 강했지만, 강경우익층은 반대로 김무성 패거리의 난동(...)이 언론 등으로 확대되며 이런 패배를 맞게 되었다고 오히려 비박계를 탓하며 갈등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된다.
6. 관련 문서
[1] 아이러니하지만 1990년대엔 YS의 상도동계로 분류되던 인물이였다. 그러다 이젠 친박 맏형 소리 듣기도 하는 서청원과 함께 2천년대 상도동계에서 친박으로 넘어온 드문 케이스. 그러다 탈박한 이후엔 비박계 혹은 범친이계가 되었다.[2] 사실 경선 과정은 다툼이 표면화되는 과정이었을 뿐이고, 본질은 3당합당부터 내려오는 보수정당내 이념 갈등이 터진 것이었다.[3] 이때 탈락한 주요 인사들이 김무성을 비롯해 김기춘, 홍사덕, 서청원, 이규택, 박종근, 이해봉, 한선교 등이었다.[4] 새로 만든 것은 아니고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정근모를 후보로 내세웠던 참주인연합에 입당하여 이름을 바꾼 것이다.[5] 무소속 후보들이 왜 친박연대에 가지 않았냐 하면, 한나라당에서 복당 안시켜줄까봐..[6] 하지만 2015년 유승민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 하나로, 선거로 선출된 정당한 원내대표임에도 친박계의 등쌀에 밀려 말 그대로 반강제적으로 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후술되어있듯 2016년 총선 과정에서 친박계의 제1목표는 유승민 정계은퇴가 된다. 제2목표는 친이계 포함 비박계 쓸어내기 정도?[7] 이때 정두언 의원이 자신을 포함한 비박 살생부가 있다는 말을 김무성 대표에게 들었다고 발언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때만 해도 김무성 대표는 그런 일 없다고 했으나 3년 뒤인 2019년 11월엔 의견을 번복하며 살생부를 인정했다. 다만 당시 살생부는 비박 뿐만 아니라 친박 인사도 있었다며, 정두언 의원이 친박의 비박 학살 식으로 언론플레이 한 것이라는 듯한 의견을 같이 피력했다. # 다만 이때 친박 인사로 거론된 사람들이 서청원과 이인제였는데, 둘은 알다시피 김무성과 비슷하게 저 쪽에서 넘어온 케이스라 순혈 친박(?)은 아니긴 했다. 혹은 진짜 지금 당장 정계 은퇴해도 무리없는 노년층들이라 정리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허나 이한구가 공관위원장이 되면서 이런 계획들은 다 어그러졌고, 서청원과 이인제도 다 공천받았다.[8] 이에 대해 전원책 변호사는 도대체 투표로 뽑히지도 않은 공관위장이 무슨 자격으로 당원들의 투표로 뽑힌 당대표를 심사하냐며 당 내부의 민주주의를 철저히 기만하는 행위라고 노발대발하기도 했다. [9] 이는 썰전 특별편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의 발언을 통해 밝혀지는데, 이준석 전 위원의 말에 의하면 당시 김무성 대표는 후보 지원 유세 중 동석했던 비례대표 후보들의 얼굴과 이름조차 몰라볼 정도였다고 한다.[10]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김성태, 김학용, 정미경, 서용교, 박민식, 김을동 등이다.[11] 도장 채로 갖고 내려갔다고 흔히 알려졌지만, 다음 날 김무성이 당시 도장은 안 가지고 내려갔다며 인터뷰에서 밝혔다. 도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도장을 찍는 권한이 관건이었기 때문.[12] 당대표가 사고나 해외 출장 등으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원내대표 등의 순서로 직무를 대행한다.[13]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으로 인해 추천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14] 이는 김영순 후보에게 수치상 밀렸음에도 유영하가 단지 친박이란 이유로 김영순을 밀어내고 공천받았기 때문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낀듯.[15] 김무성 당시 대표가 자신이 한 말을 30시간 이내에 철회한다는 데에서 나온 법칙.[16] 이재오는 원래 새누리당에 유리하지 않은 지역구를 개인기로 당선되어온거라 탈락할 법도 했지만, 김영순은 새누리당 우세 지역이라 평가받던 송파에서 떨어져 할 말이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