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
吳恒寧[1]
블로그
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1961년 충청남도 천안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나와[2] 지곡서당에서 한문학을 공부한 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사관 제도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 강사와 국가기록보존원 연구원을 겸임했던 이력이 있으며 이후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가 전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로 활동 중이다. 한편으로 계속 사관제도 및 역사관을 연구한 논문집과 저서를 저술하는 한편, 이 외에 이런저런 논문들을 투고하는 중이다. 인천사연구소에서 광해군 강독을 진행하기도 했고, 지금은 문을 닫은 인문학 연구집단 '수유너머[3] 구로[4] 의 연구원으로 있기도 하였다. 전공인 성리학과 조선시대 제도사, 사학사가 주 연구 대상이며 이 때문에 막대한 분량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대부분을 원전으로 수 차례 읽었다고 한다.[5]
2. 상세
Daum에 블로그가 있기는 한데 관리상태가 안습이라 방명록에는 성인광고만 가득해서(…) 홈페이지라기에는 그렇다. 신변잡기는 주로 수유너머 구로 커뮤니티에서 썼지만 그곳이 폐쇄된 지금은 가끔씩 다른 수유너머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정도이다.
그는 도올 김용옥처럼 서양의 유물론 사관에서 말하는 역사도식을 거부하며 이에 따라 '조선왕조와 성리학=전근대=타파해야 할 대상' 식의 사관과 '고대/중세/근대'의 개념도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현재 국내 사학계는 '조선 왕조가 어떻게 근대 사회로 이행됐는가'에만 주목하여 조선 사회 전반, 특히 세도정치와 외침 탓에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조선 말기를 하향평가하고 있다며, 그러한 쇠망 과정으로 조선사 전체를 비하하진 말자는 입장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기획한 고전의 향연 강의에서도 두 사람과 김경희가 함께 조선사를 다뤘다. 그렇다고 오항녕이 성리학에 무조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김용옥의 사서 역주만 보더라도 성리학의 '기본적 틀'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으며, 오항녕은 그런 김용옥의 노선을 기본적으로 견지중이다. 유물론 부정 사관에 대한 보다 자세한 것은 김용옥 항목으로.
2009년 이전에는 대중에게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학자였으나 한겨레 지면상에서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부정하는 이덕일의 연재를 정면 반박하는 글을 투고하여 한겨레가 판을 접기 전까지 강하게 몰아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전보다 인지도가 올랐다.
그런데 실은 당시 논쟁에서 오항녕의 논지에도 어느 정도 논리적 오류가 있었다. 그런데 뒤에 본인이 밝히기로는 일부러 허점을 드러내서 떠봤는데 반론이 들어오기도 전에 한겨레 데스크에서 논쟁을 잘랐다고 한다. 그는 이 반박기사를 <조선의 힘>에 잘못된 역사인식의 예로서 재수록하고 청소년용 책인 <기록한다는 것>에는 소송방지 차원에서인지 이덕일의 이름은 뺀 채 언급했다. 해당 내용은 아래 단락 참조.
3. 이덕일과의 논쟁
2009년 당시에도 한겨레신문이 이덕일을 밀며 그를 찬양하는 기사를 써주고,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기사를 쓰는 경향을 보였는데, 보다 못한 그는 직접 한겨레 학술 판에 뛰어들어 이덕일과 지상논쟁을 벌였다. 이에 당황한 한겨레 신문이 황급히 판을 접자 그는 이듬해 출간한 <조선의 힘> 서론에서 그러한 행태를 까면서 들어갔고, 책 내에서는 아예 각잡고 깠다.
사실 이런 류의 지면 설전에서 관련 매체는 판만 빌려줄 뿐 짐짓 중립적인 척 하지만, 엄연히 친분관계와 논조가 있는지라 국민일보 지면에서 벌어졌던 정원기-황석영 논쟁 때처럼 구독하는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서 한쪽에 힘을 실어주거나 혹은 갑자기 논쟁을 일방적으로 쉬쉬하며 덮는 짓을 일삼았다. 예전의 점잖은 식자들이 이런 언론사의 행태를 대충 넘어갔던 것과는 달리 이러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셈이다.
저서 집필의 한 동기가 되었다는 한겨레신문 기사에 대해 비판한 본문을 구체적으로 발췌하자면 아래와 같다. 그야말로 날카롭게 선 비판을 볼 수 있다.
(한겨레 기사와 한겨레 21의 칼럼을 보고) '''…그 글들을 보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콩쥐-팥쥐' 구도와 무척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뒤 '콩쥐-팥쥐론'은 내가 한국 역사학을 설명하는 유용한 구도가 되었다.''' (중략) '''…그런데 논쟁을 유도하기 위해 기획했다던 <한겨레> 문화부에서는 막상 논쟁에 불이 붙으니까 서둘러 판을 거뒀다. 이때 2년 전에 내가 쓴 글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12p)
'''…'처리'는 말 그대로 '조치'라는 의미도 있지만 주로 '처형'을 포함한 판결을 의미한다. <한겨레> 기사의 문맥에서 보면 '처리'가 '처형'으로 읽히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그 기사의 서술은 부정확하다.''' (중략) '''…이 사안에 대한 유성룡과 윤두수의 의견 사이에는,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하는 것 같은 대단한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254p)
'''<한겨레>는 여차하면 '전근대적' 운운하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런데 정작 '전근대'와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뜻으로 쓴다.''' (259p)
'''…<한겨레> 기사처럼 보면 조선 정치계는 '당쟁만 일삼았던' 세상이 되게끔 되어 있다.''' (269p)
4. 주요 주장
이덕일과의 설전 이후 그는 2010년 1월에 역사비평사에서 대중서인 <조선의 힘>을 출판했는데 그 책이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올해의 도서'에 이름을 올린 것도 그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계기 중 하나이다.
그는 학창시절 조선사와 성리학을 전공하면서 조선사를 보는 기존의 역사관인 근대/전근대, 사대/민족의 이분법적 분류에 반감을 갖고 '콩쥐-팥쥐 프레임'(선악으로 편협하게 바라보는 구도)이라 정의하면서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받는 성리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바로잡을 것을 대학원 시절에도 주장하며 94년부터 관련 논문을 내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사에 대한 재인식을 설파하고자 쓴 것이 <조선의 힘>이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9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진 조선 후기 긍정론에 편승하여 조선 후기를 너무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오는 중이다.
그는 <조선의 힘>에서 한국 사학계가 몇몇 인물과 사건들을 너무 상향평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가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KBS 프로그램인 '한국사 전'(傳). 그는 이 프로그램을 주 타깃으로 광해군을 비판하면서 대중역사교양서 시장의 광해군에 대한 긍정론은 식민주의 프레임의 부산물이자 잘못된 역사인식이라고 강력히 비판하였다. 또한 한명기 교수에 대해서는 '이나바 이래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대한 긍정적 시각만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들면서 '지적한 일은 적절하나 중립 외교에 긍정적으로 대하면서 다시 이나바의 문제로 회귀했다'는 평을 내리고 있다. 다만 오항녕 교수의 주장 중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에 빗댄 부분에 대해서는 지나친 정치적 물타기 아닌가 하는 시선도 있다.
또 다른 국왕인 세조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으로, 그의 재위는 조선을 퇴행시켰다고 주장하며 쿠데타라는 함의를 담아 계유정난이라는 용어를 전폭적으로 밀었다. 상대적으로 단종에 대한 연민도 곳곳에 강하게 녹아 있다.[6] 후대 숙종이 단종을 복권시킨 것을 가리켜서는 "봐라, 역사는 이렇게 다 기억하고 있지 않냐!"며 뿌듯해했다. 한편 명종 시기의 대리청정인 문정왕후에 대해서도 공납의 폐해가 극대화되었다는 이유로 연산군 못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런 반면 인조와 송시열, 서인(노론) 등에게는 옹호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특히 인조반정의 경우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큰 의의를 두어 '계해반정(癸亥反正)'으로 우러르며 역사적 과오를 바로잡는 사건으로 칭송했으며 병자호란도 외교적 실패가 아닌,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히 자존심을 지키려던 문명국다운 기개로 평가했는데, 이러한 평가에 너무 옹호가 과도하다는 반응이 따른다. 단, 인조가 제도사 부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 제대로 조망하고 광해군이 받고 있던 잘못된 스포트라이트(백성을 아끼는 애민군주)를 제거한 공로는 있다.
5. 광해군/인조에 대한 평가
오항녕 교수가 광해군 비판의 선구자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만 학계와 관련된 논문 제공 사이트들을 검색해 보면 이미 이전부터 광해군에 대해 상당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광해군 연간의 외교사에 대해 다룬 한명기 교수의 책도 내치에서는 '광해군의 토목정책으로 인해 중립 외교에도 악영향이 갔다'면서 부정적 논조로 평하고 있고 추국 정치에 대해서도 좋게 서술하지 않는다.
출간시기는 조선의 힘보다 늦었으나 《조선의 힘》의 레퍼런스 중 하나이며 논문으론 더 먼저 발표되었던 대동법 권위자 국학진흥원 이정철 박사의 《대동법 : 조선 최고의 개혁》도 광해군 치세를 두고 당시 지어진 궁궐의 수 및 들어간 비용이 역대 정권 중 가장 많았음을 비판하며 '파행적'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관련 파트 마지막 문장으로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급한대로 이런 조치[7] 를 통해서나마 광해군대의 '일탈'을 '정상화' 해야 했다"(63p 5~7)라고 적었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점은, 광해군에 대한 비판이 학계에 이미 존재했으며 현재도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오항녕과 같은 저주에 가까운 극단적인 저평가가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이라는 것은 엄연히 차원이 다른 얘기라는 것이다. 광해군의 내치 전반을 단순히 실패로 규정하는 것부터가 그다지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고 볼 수 없는 견해이며, 후금과 충돌 방지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회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단연 오항녕의 독자설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정치의 모든 분야는 다 연관되어 있으니 내치를 망쳤으면 외치도 좋게 볼 것 없다는 식의 흑백논리적 해석도 학계에 전혀 일반적이지 않으며 오항녕의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2012)이 출간된 이후에야 (역덕후 사이에서만) 유행하고 있는 논리다. 이건 엄밀히 따지면 오항녕의 지론도 아니다. 오항녕은 "외치에 있어서는 얼핏 긍정적으로 보일 만한 점이 있으나 결국 내치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감안하면 그조차도 진정한 성공이라고 볼 수 없다."는 식이 아니라 광해군이 정치, 외교, 국방, 경제, 문화 모든 부분에서, 또 모든 과정에서, 즉 접근 방향, 방법론부터 결과까지, 완벽 철저하게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취미로 역사를 파는 일반인들처럼 특정 인물에 대한 총체적 평가 같은 것에 그렇게 목을 매지 않는다. 더구나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사회 경제적 여건을 무시하고 단순히 자신이 재구성한 통치자의 인물상을 국가의 운명과 직결시켜 "왕 누가 나라를 망쳤다(또는 살렸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굉장히 꺼리는 것이다. 양란기 정치사에 대해서는 한명기와 오항녕이 튀는 축에 속하는 셈인데, 특히 오항녕이 극단적인 것이다. 한명기만 해도 광해군이나 인조나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는 식이었지, 오항녕처럼 한쪽은 지선, 다른 한쪽은 지악으로 만들지 않았다.
오항녕과 같은 극단적인 광해군/인조관이 학계에서 널리 인정을 받는다고 볼 만한 정황은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광해군의 특정 정책을 비판적으로, 인조의 특정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해서 오항녕의 견해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주류 학계에서 특정 학자를 대놓고 배척하는 일 역시 학계에서 흔한 경우가 아니다. 굳이 찾아 본다면, 이쪽에 증거가 몇 개 나오긴 한다.
일단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이 출간된 다음 해에 한명기가 《역사평설 병자호란》(푸른역사, 2013)을 출간한 것은 오항녕식 광해군/인조관에 대한 공박으로 평가받는다(김시덕, 조선시대는 한국의 '오래된 미래'인가?, 역사비평 113, 2015, 399p).
참고로 그러한 평가를 내린 문헌학자 김시덕도 오항녕의 광해군/인조관에 대해서 상당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보다시피 두 군주에 대한 오항녕의 평가는, 인조반정 직후 인목대비가 내린 교서가 여럿이 써서 대외적으로 공개한 것이라는 이유로 왜곡 가능성을 일축한다든가, 인조 정권의 실정조차 꼭 오늘날의 정치 모리배들마냥 잃어버린 15년을 운운하며 광해군 탓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아연한 부분이 많다. 광해군과 인조의 통치를 각각 '죽음'과 '삶'으로 대비시킨 것은 무슨 종교 경전을 읽는 느낌이다.예를 들어, 인조 정권이 온갖 문제를 무릅쓰고 명을 도와 후금과 맞선 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명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 제국주의나, 이라크를 침공하는 데 병력을 보내라는 미국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조선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운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엄연한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라면, 미국 역시 한국전쟁 당시 남한을 돕지 않았던가?''' 당연히 이승만 정권은 비판받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고, 특히 한국전쟁 초기에 보여준 여러 실패는, 보수 진영에서도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오항녕의 논리에 따르면, 미국 역시 한국전쟁 때 남한을 도왔으므로 베트남이나 이라크에서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에 남한군을 요청할 수는 있는 것이다.
오항녕은 1623년 3월 26일의 경연(經筵)에서 인조가 신하들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대목을 소개하며 “이런 정도의 말을 하는 걸 보면 인조는 군주의 자질이 있었던 듯하다”라고 논평한다. 또한, 인조반정 직후 인목대비가 내린 교서(敎書)에서 비판한 광해군의 죄목은 거짓되거나 과장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혼자 작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반포된 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대목에서 전개되는 논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쿠데타 세력이 전(前)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을, 혼자 작성한 것이 아니고 반포되었다는 이유로 왜곡되지 않은 것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현대 한국사에서 되풀이하여 공포된 쿠데타 세력의 각종 선언문도, 마찬가지 이유로 참되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오항녕은 광해군 정권에 대한 혹평과는 반대로, 인조 정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우호적으로 총평한다. 반정은 말 그대로 인민들이 ‘정상적인 생활[正]로 돌아가는[反]’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선조 이후 해결해야 할 민생과 재정, 사회적 문제가 멈추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남은 정도가 아니라 악화된 채로 방치되고 엉켜서 나뒹굴고 있었다. 잃어버린 15년의 시간이 남긴 무게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실기(失機)의 업보까지 남기게 마련이었다. (…) 인조반정 이후 사람들은 다시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반정은 그들이 선택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러므로 선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었든 그들은 다시 농사를 지어야 했고, 바닥 난 재정을 긁어모아 나라를 운영해야 했으며, 후세를 낳고 기르고 가르쳐야 했다. 무너진 사회의 기강을 세워 그래도 좀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했으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어야 했다. 그러다가 미처 여력이 없던 차에 닥친 침략에 허둥대기도 하고 답답하여 죽고 싶기도 했다가, 다시 일어서 하루하루 이 땅에서의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지금 우리처럼.” '''이상의 서술에서 현대한국의 정권 교체 역사, 그리고 지난 정권을 잃어버린 ○년이라고 비판하며 현 정권의 실정(失政)을 전(前) 정권의 책임으로 돌리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400p~401p)
그러다 보니 서강대 계승범 교수는 2013년 8월 10일 동국대 한국불교사연구소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 '''“광해군 시기 및 계해정변에 대해 학계에서 지난 80여년에 걸쳐 축적한 다양한 연구 성과와 이해의 수준에서 오히려 퇴보해 조선시대 그것으로 단순히 회귀시켰다”'''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기사 링크
김기협 전 계명대 교수도 오항녕의 '회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링크
애초에 오항녕이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을 쓰게 된 계기가 대충 (오항녕 본인의 논리에 따르면)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을 정당화하는 만선(滿鮮) 사관에서 비롯된 광해군 재평가론을 한국의 역사학계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대중에 유포한 것에 대한 반발이었으니, 광해군 평가에 관한 한, 오항녕 vs 학계의 대립 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하등 무리라고 할 것이 아니다.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비슷한 예가 되겠다. '''전통 시대에 광해군의 폄하가 심했던 상황은 명백한 것이고, 이를 보정하는 노력은 일본 학자의 것이든 누구의 것이든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당시 상황과 연구자의 입장에 따라 지나쳤던 거품은 제거하더라도, '딱지 붙이기'로 끝낼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인색해서는 병든 관점을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건강한 관점을 세우는 데는 아쉬움이 있기 쉽다.
6. 비판
그의 논조가 워낙 자기 색을 강하게 띄다 보니 이런저런 비판도 많다.
- 광해군에 대한 비판 중 오항녕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받고 있다. 특히 실록에 대해 의도적 개입 여지를 외면하는 점이 그러한데, 그의 다른 저서인 선조수정실록청의궤에서 엿보이다시피 그도 실록이 왜곡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광해군일기 중초본에서 유대조가 광해군을 호의적으로 평한 내용을 정초본에서 삭제한 사실 등을 덮어두는 점 등, 자신의 논지에 맞는 근거들은 적절히 제시하면서 반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자료들에 대해선 의식적으로 침묵하거나 축소해서 다루는 게 아니냐는 의혹과 비판이 존재한다. 사실 오항녕도 이러한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어서 <조선의 힘> 책 말미에 "『광해군일기』 태백산본이 중초본으로 현존한다. 거기에 붉은 먹으로 표시된 사항들이 '교정'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광해군일기』의 '교정' 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는데, 실록 편찬 과정의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다루어야 할 연구주제라고 생각한다"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 교정 중에는 비판 중에서 정도가 심한 것-광해군일기는 실록이 아닌 일기로서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편찬에 착수, 정묘호란으로 중단된 기간을 빼고 작업이 진행되어 1632년 완료되었다-도 일부 포함되어 있음을 속간에서 밝혔다.
- 대동법과 관련하여 '대동법에 소극적=악(惡)'이라고 단순 도식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존재한다. 다만 광해군이 이후의 왕들과 달리 공납에 비판적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학계에서 거론되는 화두이자 주요 비판점 중 하나로서, 정확히는 공납에 대한 인식이 문제지 사실 대동법 자체가 쟁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납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을 통해 대동법으로 귀결되는 과정은 조선사 중후기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제도적 개혁 과정이며 심지어 대동법 도입 이후에도 여전히 삼정의 문란 같은 변칙적 수탈이 여전했던 만큼 쉽게 다룰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 궁궐 건축에 든 철의 양이 화포를 마련하는 철의 양(1만근)보다 10배(10만근)나 많다고 했지만 정작 예로 든 것은 심하 전투가 일어나기 4년 전인 1614년이다. 그 이후에는 국방력 강화가 계속됐고 22년에는 3만여근의 철을 구한 이에게 포상하기도 했다(14년 10월 30일). 또한 21년에는 군사들을 보내 총 3만근의 철을 만들도록 했다(13년 9월 14일). 이 외에도 광해군 재위기간 중 철을 모으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나며 이는 다른 시기와 비교해서도 두드러지는 편이다. 흥기하는 후금에 대한 방비를 도외하고 궁궐 사업에 집중하였다는 논지에 대해서도 강화도의 성지 수축 및 남한산성 행궁 증축 등이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반박할 수 있고(13년 9월 10일자 정충신의 발언 등) 수군을 적극적으로 훈련시켰으며 거북선 재제조를 명하기도 했다(14년 7월 22일). 또한 인조 2년 9월 1일자 실록을 보면 광해군 시기에 서북변 일대의 군대가 꾸준히 증강되었음을 짐작케 해 주는 문헌도 있다("요즘 5∼6년 동안 남쪽의 군사를 징발하여 멀리 서쪽 변방을 방수(防戌)하게 하였으므로 나라 안이 소란해지고 백성의 힘이 소진되어, 적이 오기도 전에 나라가 먼저 피폐해졌습니다. 따라서 올해 묘당이 의논을 정하여 남쪽의 군사를 징발하지 않기로 한 것은 참으로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다만, 광해군 시기 군비 강화의 사례인 화기 도감 및 남한산성 축조에 관련하여 화기도감이 1614년 창설 이후 1년간은 불랑기를 비롯해 각 진영에 보급할 화기를 제조했으나 이후론 실질적인 화기 제조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남한산성의 강도 보강 및 증축과 강화도 성지 수축은 인조 시기에도 계속되었다는 연구가 나오기도 했다(이홍두, "병자호란 전후 강도의 진보 설치와 관방체계의 성립", 인천학 연구 Vol 9, 2008, p.8)[8] . 또 광해군 시기에 수집된 철물 수량 중 군수용과 영건용의 비율 차는 명확하지 않은 데다가 광해 4년 5월 29일(4만 근), 광해 9년 11월 14일(기사로는 수만 근, 사관평으로는 1만 근), 광해 9년 12월 14일(정철 1만 3천 5백 근, 신철 1만 근) 광해 11년 11월 19일(정철 3만 근) 등 궁궐 공사에 한번 끌어오는 철의 양이 최소 수만 근에 달하는 실록 기사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광해 11년 4월 14일 실록 기사처럼 영건용으로 강화도의 군량미를 빼서 쓴다거나 동년 12월 20일자 기사처럼 둔전으로 거두어 들인 군량미를 영건사업에 전용한 몇몇 경우를 생각해보면 좀 더 연구의 진척이 필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쉽게 단언하기 힘들다.
- 이례적으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까지 비판하면서 심하 전투(정확히는 부차 전투)에서 병력의 약 60%(1만 3천 가운데 8천) 가까이 상실한 것이 실리인가 하는 주장을 펼치며 여기에도 궁궐 공사를 결부지었다. 그러나 당시 대내외적 정황 측면에서 조선 측의 참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광해군은 그 전에도 몇 번이나 명나라 측에 참전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고, 심하 전투 또한 조선측의 외교 역량보다 상국인 명의 삽질로 인한 군사적 패배에 휘말린 것에 가까우며, 40%라는 생존률도 명의 동로군과 남로군이 전멸한 정황을 고려할 때 그렇게까지 낮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 이를 갖고 외교적으로 접근하며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게다가 이 시점 이후 광해군의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는데, 심지어 명의 황제가 거듭 칙령을 내리며 하사한 은의 사용을 거부하고 전부 창고에 보관하면서까지 군대가 동원되는 빌미를 억제하고자 했던 노력을 도외시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따른다.
- 인조반정 이후에도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인조 정권에 의해 거의 그대로 계승되는데, 정작 광해군 시기의 외교에 대한 비판과 달리 인조 시기의 외교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는다는 이중잣대의 문제점도 비판에 오를 만한 사항. 특히 정묘호란에서 패해 정묘조약을 맺은 이후부터는 외교가 더욱 신중해져서, 서인 강경파가 끝까지 강홍립 처형을 주장했음에도 인조가 그와 그 가족을 보호하는가 하면 주화파인 김자점과 최명길을 밀어주고 적지 않은 예산을 소모하는 등 후금(청)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으려는 중립적 줄타기 외교를 병자호란 직전까지도 지속하였다. 그런데 정작 오항녕은 광해군과 같은 외교 노선을 탔던 인조 시기의 외교를 문제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적용 잣대가 다르다는 비판이 따른다.
- 야심을 위해 정국을 뒤흔든 세조도 강하게 비판하며 그 치세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나, 정작 환국 등으로 붕당 구조를 흔들고 피를 뿌렸던 후대의 왕들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관점의 균형에 대한 비판도 따른다.
- 병자호란에 대해서 인조 정권도 사실은 중립 외교를 폈니 어쩌니 하면서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당시 정권이 숭명/반청에 크게 경도되어 있음을 속시원하게 인정했는데, 그게 과오라고 봤다는 뜻이 아니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심을 지키려던 문명국의 기개"라는 찬양이었다. 당시 지배층이, 장삼이사는 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어버이 나라와의 의리'를 지키느라 백성들을 말발굽에 밟히게 만든 일이 조금의 부당함도 없다는 것이다. 오항녕을 추켜세우는 이들조차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반응이 많다. 얼핏 보기에, 자국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야 할 국가가 백성들을 사지로 내몬 일을 두고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라며 옹호하는 극단주의자가 파죽지세로 논변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오항녕 같은 이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주류 사학계를 '신랄하게' 비판할 때 대개의 학자들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런 점은 좀 의문이었지만요." 하는 식으로 점잖게 대응하는 탓이 적지 않다.
- 정치색을 드러낸다는 비판이 있다. 저서에서 자주 현대 시사를 언급하는데,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을 비난하는 등 한쪽으로 경도된 느낌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문재인 대선 캠프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대선 캠프의 자문위원이 문재인 기록관의 용역을 맡았다는 조원진 우리공화당 의원의 주장이 기사로 나기도 하였다.
7. 저서와 연구서 일람
- 역주 선조수정실록청의궤(2004)[9]
- 영종대왕[10] 실록청의궤(2007)
- 조선 초기 치평요람의 편찬과 전거(2007)
- 조선 초기 성리학과 역사학(2007)[11]
-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2009)
- 조선의 힘(2010)
- 기록한다는 것(2010)[12]
- 광해군(2012)[13]
- 사통 (2012)[14]
- 역사에서 찾는 지도자의 자격 (2012, 공저)
- 밀양 인디언, 역사가 말할 때(2014)
- 유성룡인가 정철인가(2015)
- 조선 역사학의 저력(2015)[15]
- 역사문헌교독법(2015, 번역서)
- 경연, 평화로운 나라로 가는 길(2016)
- 율곡의 경연일기(2016)
- 호모 히스토리쿠스(2016)
- 간신(2017)
- 실록이란 무엇인가: 조선 문명의 일기(2018)
- 후대가 판단케 하라: 조선실록의 수정과 개수(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