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만주 관계

 



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중세
2.2. 근세, 근대, 현대
3. 관련 문서


1. 개요


만주와 중앙아시아 일대 지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편의상 대중동(중근동), 남아시아, 캅카스, 동유럽 일부 지역도 언급될 때도 있다. 만주에는 일부 무슬림들도 거주하며, 중앙아시아 혹은 러시아를 통해 들어왔다. 중국에서 들어온 무슬림 후손인 후이족 외에도 러시아 제국에서 하얼빈에 철도를 건설할 때 들어온 타타르인 무슬림들도 있었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중세


고대 원시 인도유럽어족이 카프카스에서 중앙아시아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청동기 및 기마술이 중국과 만주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도 전해졌다.
오호십육국 시대부터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혹은 중동[1] 출신 불교 승려(호승)들이 만주 지역에도 종종 방문하였고 이들 중 한반도로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만주에서 기원한 선비족 탁발부 등 유목 정복 왕조들은 북중국을 정복한 이후 한족과의 갈등을 줄이고자 고대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고, 특히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 불교의 기틀이 다져진다.
당나라 치세 초반 소그드인 상인들은 발해의 말을 당나라에 수출하며 많은 이익을 남겼고 이를 반영하듯 발해 유적에는 소그드 주화가 발견되었다. 중앙아시아 출신 소그드 상인들은 동으로는 발해, 서쪽으로는 동로마 제국을 연결하며 고대부터 중세 초 사이의 세계 무역을 주도하였다.
중세 아르슬란 칸국(카라한 칸국)이나 사만 왕조 출신 무슬림들은 북방 초원길을 이용해 내몽골과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요나라와 교류를 했으며, 요나라 뿐 아니라 서하와 송나라와도 교류를 했다. 요나라는 지금의 베이징에 이슬람 사원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이 사원은 청나라 때 재건축이 되어 지금도 있다.# 훗날 요나라 유민들은 야율대석의 지휘 하에 중앙아시아 동부에 이주하여 서요를 건설하며 이웃 국가들에게 자신들이 지배자가 중국의 황제(타그바치 )라고 과장하면서 권위를 내세웠다.[2] 연경을 오가던 위구르 상인들은 여진족의 금나라가 건국된 이후에도 무역을 지속하였다.
사마르칸드에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펑 유대인들도 있었으며 카이펑 유대인들은 송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고 이들은 송을 침략한 금나라와의 싸움에서도 송나라 군사로 파견되어 금나라와 싸우기도 했었다.
원나라 사료를 보면 만주 지역에도 중근동 출신 인구가 상당수 유입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들 중에는 무슬림 외에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도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세 말 원나라의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회회인[3]들은 코가 무척 길고 털이 덥수룩하고, 킵차크 칸국에서 온 사람들은 머리색이 노랗고 눈 색이 파랗기 때문이 괴이한 외양으로 한족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2.2. 근세, 근대, 현대


원나라, 명나라 시기를 거쳐 대거 중국에 정착한 중앙아시아, 중근동 및 유럽인들은 상당수가 한족에 동화되었고 이들 중 이슬람교를 고수한 사람들은 후이족이 되었다. 후이족들의 주 근거지는 서북지방이었지만 북경에도 상당수의 후이족들이 거주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내몽골과 서북 지역, 북경을 연결하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육로 무역 비중보다는 해상 무역 비중이 증가하여 세계사 교과서나 중국사 개론서에는 무시되는 경우도 있지만, 육로 무역 자체는 쇠퇴하지 않고 이어졌다. 신장성은 비단길에서 유명했던 장소였던만큼 신장성을 통해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페르시아 왕조들과 인도 반도의 무굴 제국(무굴 제국과는 벵골과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를 통해 무역을 하기도 했음)[4], 그리고 러시아와의 교류도 있었으며, 코칸트 칸국과도 국경에서 분쟁이 있었던 동시에 장사를 했다. 인도에서는 일부 중국화된 인도 요리를 '만주 요리'라고 부를 때도 있는데 이는 청나라와 무역을 했을 때 음식에도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
또한 신장성을 개척했을 때 위구르인, 한족, 후이족 뿐 아니라 일부 다우르족만주족, 오이라트계 몽골족, 시버족들도 이곳에 징용되거나 강제이주되었으며, 신장에 정착한 시버족들은 지금도 시버어만주어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한 일부 만주 지역 원주민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해서 무슬림이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만주의 봉금령이 풀린 후 수많은 한족들이 이주했으며 한족 뿐 아니라 후이족들도 이주하게 되었으며 후이족들의 영향으로 무슬림이 된 퉁구스계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후이족 뿐 아니라 오스만 제국, 러시아의 타타르족을 통해 이슬람을 믿게 된 사람들도 있었으며 만주에도 타타르계 러시아인들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과 교류를 하기도 했었으며, 신장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야쿱 벡 정권을 도운 적도 있었고, 신장성의 위구르인들과 많은 교류들도 있었으며, 일부 터키인들 선교사들도 위구르인 거주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러시아는 16세기 무렵부터 영토확장정책을 펼치며 흑해 연안에 침략과 무역 등으로 오고갔던 크림 타타르인, 그 외 일부 캅카스 지역의 제족들을 공략했으며 코사크들도 복속시켜 러시아의 용병이 된다. 러시아는 용병인 코사크와 함께 이들 중 일부를 러시아의 용병으로 징병하여 훗날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진출, 청나라와의 전쟁에 파견되기도 했었다. 극동으로 파견된 러시아군 중에는 일부 스웨덴인, 독일인 포로 외에도 일부 무슬림들도 있었다. 베이징 조약 이후 프리모리예와 아무르 강 유역이 러시아인에 개척되면서 다양한 종교 신자들도 이곳에 이주하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부터 소련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의 무슬림들도 이주했었다. 현재에도 러시아령 외만주에는 아제르바이잔인, 타지크인, 우즈베크인, 키르기스인, 아르메니아인 등 중앙아시아권 사람들이 존재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하얼빈에 이주하기도 했었다.

3. 관련 문서


[1] 고대 파르티아 동부 지역은 불교가 우세했었다.[2] 또한 서요의 지배자들은 "구르칸"으로 칭해졌는데 이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이다. 이 칭호가 중국의 천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컨셉을 모방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3] 중세 기록 상으로는 회족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중동에서 온 무슬림이나 기독교도 혹은 유대인들을 의미한다.[4] 훗날 벵골을 비롯한 인도 동부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영국의 점령으로 동인도를 접수하며, 벵골과 아삼 지역을 아편을 재배하는 곳으로 만들어, 아편을 밀무역했으며, 청의 지나친 은화 요구는 아편으로 밀무역으로 변하고 이 소식이 청에 적발되면서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