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권-러시아-만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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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권, 러시아, 만주 지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 근대 이전
만주 지역의 원주민 퉁구스어족은 시베리아 지역에도 널리 분포한다. 정확히는 중앙시베리아 및 동시베리아, 동북시베리아 지역이 해당된다. 퉁구스어족은 예니세이 강과 자바이칼 지방에 살았다가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 강을 넘어 지금의 만주 동부와 연해주에 살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예니세이 강#s-3, 북아시아(예니세이 강 중류 동안) 부분 참조. 고대에는, 공식적 의미의 시베리아는 아니지만 역사적 의미로서 시베리아에 포함되기도 하는 오호츠크 해 연안 일대와도 접해 있다보니, 고대에는 해당 지역의 주민들(주로 고아시아인) 문화인 오호츠크 문화가 프리모리예(외만주) 북부의 여러 민족 문화에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주나라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산융이나 동호, 숙신 등이라 불렀다. 또한 주나라는 지금의 요서까지 간접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넗혔으나 다시 상실했다. 이 때문에 논란의 대상인 기자조선설이 나왔다. 다만 본격적으로 요서, 요동이 중화의 영역이 되기도 했던 시대는 다름 아닌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이다. 연나라 때에는 북쪽 변방에 장성을 쌓아 이민족들의 침입을 막기도 했었다.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연나라의 장성, 진나라와 조나라의 북방 변경 성곽들을 이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한 편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유민들과 진나라의 백성들은 진나라의 폭정을 참지 못해 고조선 등 요동, 요서 주변 지역과 더 넘어서 한반도로 도망쳤으며, 이전에도 북방민족들의 침입이나 전쟁의 혼란으로 고조선으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다. 한 편 북방의 만리장성은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 때의 국경선이 되어 흉노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한나라는 고조선과 교류도 했지만 동시에 고조선의 중개무역으로 인한 갈등을 피할 수 없었고, 한무제는 고조선을 위협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는 고조선과의 전쟁으로 이어져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켜 점령한 곳에 한사군 중 하나인 현도군을 압록강 유역에 세운다. 이후 한나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한반도와 남만주의 여러 지역 민족들, 국가들과 교류도 했는데, 부여는 한나라와 친하게 지냈다. 고구려도 한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동시에 현도군 등을 침략해 필요한 자원들을 약탈하기도 했었는데, 이 때문에 한나라와 수차례의 분쟁들도 있었고, 고구려와 전쟁했던 부여가 한나라와 동맹을 맺게 된다. 또한 왕망이 쿠데타로 신나라를 잠시 세웠을 땐 고구려를 경멸하며 깍아내리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왕망 축출 이후, 후한이 다시 나타났을 때도 여전히 대립도 있었다. 한나라가 분열하여 삼국시대가 열릴 때에는 요동과 요서는 공손씨 정권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오랫동안 독자적 세력으로 군림했다. 일부 호족들도 이미 선비족과 오환족을 끌어들이기도 했었다. 고구려는 필요할 때마다 공손씨 세력들, 훗날 공손씨 세력들을 점령한 조비의 위나라와 무역과 동맹을 맺으면서 동시에 이들과의 분쟁도 있었다. 자세한 것은 동천왕 부분 참조. 중국대륙에서는 삼국시대가 끝나고 서진이 들어섰으나 얼마안가 막장스러운 내분으로 다시 혼란스러웠고 여기에 선비족도 가세해 더 심각했다.
한편, 내몽골 자치구 지방의 몽골계 민족들과도 관련이 매우 깊다. 후술하겠지만 만주 서부(내몽골 동부 포함)는 산융, 동호 등 일부 몽골계 민족들이 거주하기도 했으며, 선비족 중 일부 부족들은 몽골계에 가까운 몽골계와 퉁구스족의 혼혈이었으며, 선비에서 갈라진 오라혼, 오환과 거란도 마찬가지였다. 선비족에서 갈라진 남부의 오환은 한나라를 약탈하기도 했고, 답돈이 통일했을 때는 매우 강성했지만 조조가 오환을 토벌하야 답돈이 죽은 후 오환은 다시 약해져 규모가 줄어들었고 선비족 모용부에 흡수되었다. 동시에 오환은 세 분류로 나뉘어져 단선비와 우문선비, 해족, 실위가 되었다. 거란은 해족에서 나왔다. 또한 선비에서 갈라진 실위는 몽올실위 또는 맹고국이라 불렸는데, 훗날 몽골족이 된다. 내몽골 서부지역은 모용선비와 탁발선비가 진출하기도 했으며, 모용선비는 부여를 침략해 사실상 망국으로 만들고 고구려도 침략했으나, 후연 때에는 광개토대왕이 후연과 싸워 이겼다. 훗날 모용선비는 내몽골과 간쑤 성을 넘어 칭하이에 토욕혼을 세운다. 선비족 지파 중 하나인 단선비(단부선비) 중 일부는 훗날 윈난 등 중국 남부로까지 갔다고 전해진다. 탁발선비는 북위를 세우면서 중국 북부를 통일해 남북조의 북조를 열었고, 전성시대에는 중가리아 동부까지 점령하기도 했으며 이는 서위와 동위로 분열 이후, 북제와 북주까지 유지되었다. 동위와 북주는 산동과 하북 등 중국 대륙 북동부와 요서를 점령했고, 내몽골 동부 및 서만주의 거란, 습, 해, 오라혼 등을 제압하면서 동시에 복속시켰다. 북조 국가들은 남쪽의 동진 멸망 이후 남조의 여러 왕조들과의 전쟁을 반복했다. 훗날 북주가 들어서 북조들을 통일, 수나라가 남북조의 국가들을 통일한 이후에도 이러한 강역은 유지되어 당나라까지 이어졌다. 고구려는 수당시대에도 처음에 교류도 했으나 동시에 견제도 했고 고구려와의 마찰들이 있었으며, 결국 요서, 요동과 인근 지역에서 분쟁들이 나타났다. 수는 고구려 침공을 세 번 실패하여, 나중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으나 고구려 침공 이전의 지나친 해외원정과 수양제의 사치와 항락으로 인해 국력이 기울어 반란으로 인해 수양제는 살해당한 후 여러 반란으로 망하여 수를 이은 당나라가 들어섰고 당나라도 처음에 잘 지냈으나 정치적 마찰로 고구려를 침략하나 고구려에 패한 후 국세가 잠시 휘청하기도 했었다. 나중에 나당연합을 결성해 고구려를 멸했지만 30년 후에 고구려 유민들과 당의 간접지배를 받은 말갈족 대부분이 힘을 합친 발해가 나타났다. 발해는 나중에 당나라와 친하게 지내 발해 문화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비단길 중 초원길 또는 담비의 길을 통해 발해 등 만주의 옛 나라들이 서역과 무역을 할 때 시베리아 지역의 소수민족들이나 그들을 지배했던 돌궐, 위구르 카간국과 교류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발해는 10세기에 국력이 약해지고반대로 부족들의 통일로 힘이 세진 거란의 요나라에게 멸망당한다.
당나라 역시 황소의 난과 안사의 난 이후 국력이 쇠약해졌으며, 당나라 말기에는 각종 절도사들의 반란에 시달렸다. 당나라의 지배를 반쯤 받았던 거란은 이 틈을 타서 국력을 키운다. 거란의 흥기로 나타난 요나라의 압력으로 북방국경의 영역이 줄어들고 오대십국 시기에 더 줄어들어 송나라가 다시 재통일할 무렵에는 수당시절과 달리 오대십국시대에 줄어든 북방강역이 유지되었다.
한편 중세 북송 시대에 닝샤, 산시(섬서) 서부, 간쑤, 칭하이 일부와 내몽골 서부를 점령한 탕구트의 서하는 요하 강, 요동과 요서, 만주 서부에서 흥기했던 요나라와 친했고, 남송 시대까지는 연해주와 아무르 강 유역을 포함한 만주 동부에서 일어난 금나라와 대체로 친하게 지냈다. 물론 만주의 정복 왕조였던 요, 금과 싸우기도 했었다. 요나라는 몽골도 점령했지만 외몽골 남부와 동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몽골 전역은 사실상 간접통치였고, 진짜 영역은 요동과 요서, 내몽골, 서부 만주와 산시(섬서), 허베이 북부까지 였고, 어느 정도 관용도 베풀기도 했었다. 요나라가 거의 멸망될 무렵, 야율대석을 포함한 몇몇 거란족 및 요나라 백성들은 몽골을 넘어 서몽골 일부, 중가리아와 투르키스탄의 천산 산맥과 추이 강까지 걸친 서요를 세웠다. 서요의 이명 카라 키타이는 몽골을 통해 동유럽에도 전해져 오늘날 러시아어 및 여러 중앙아시아 언어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키타이 및 중세 영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의 어원이 되었다.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들은 각 부족들끼리 뭉쳐 금나라를 세운다. 금나라는 요와 달리 몽골 지배를 포기했고 지금의 내몽골 및 몽골 동부와 남부만 사실상 금의 영역이었으나 몽골 부족들의 간섭을 지나치게 했고, 이간질로 인한 내분도 일으켜 한동안 통합을 못하게 했으나, 금나라 역시 강압적 통치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과 한족, 거란족 등의 타민족들의 반란과 내분으로 흔들린 나머지 갈수록 약해졌고, 이때 칭기즈 칸이 카마그 몽골들을 통일한 이후 나타난 몽골 제국이 등장했다. 몽골은 서요, 서하, 후요, 동하, 금을 침공해 멸망시켜 동북아시아 일대를 재통합시켰으며 훗날 원나라가 된다.
원나라가 중국에서 망하고 다시 몽골 고원으로 돌아간 이후, 명이 들어설 무렵 명대에는 요동과 요서는 명나라의 영역이 되고, 동부의 여진족 및 야인으로 불렸던 만주의 우량카이는 명에게 복속되고 간접지배를 당해 때로는 오이라트와 북원을 제압하는 도구로 쓰기도 했으나 누루하치가 다시 여진족을 통합하고 사할린도 점령, 더 넓게는 우량카이 등 만주 대부분의 제족인들과 내몽골의 몽골계 민족 및 내몽골 동부 등 서만주의 몽골 부족들까지 통합시켜 청나라가 된다. 그러나 또한 외몽골과 중가리아의 몽골 부족들은 만주에 거의 거주해있던 퉁구스계와의 대립이 심했다. 몽골계 민족들과 퉁구스계 민족들은 사이가 안 좋기도 했으나 동시에 훗날 몽골족의 호르친, 차하르 등 일부 부족들은 만주족의 청과 동맹을 맺고, 정치적 밀접 관계를 맺기도 했었다. 청대부터 여진, 야인이라는 단어를 금지하는 대신 만주족으로 이름을 바꾸고 몽골과 티베트로부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다. 청나라는 훗날 중국 대륙과 팽호, 대만을 점령하게 된다.
한 편, 동유럽에서는 타타르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동슬라브계가 통합되어 세워진 루스 차르국의 동진으로,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서부를 시작으로 시베리아 동부가 차례로 점령되었고, 이 과정에서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여러 퉁구스 제족들 및 튀르크계의 야쿠트족, 몽골계의 부랴트족 등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들이 정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사크 탐사대는 청나라 국경까지 탐사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탐사대는 보급을 받기 힘든 조건과 잉여 식량이 부족했던 시베리아 자연 환경의 영향으로 탐사 지역 원주민들의 식량을 무상으로 약탈하곤 했는데, 청나라 국경으로 남하하던 코사크들이 청나라와 우호적인 부족들까지 약탈과 방화하는 일이 많아 분쟁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강희제는 코사크들을 대군을 동원해 토벌한 후 러시아와 국경과 관련된 조약을 맺는데,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후 러시아와의 분쟁은 끝나고, 교류를 했으며, 러시아로부터 서구 문물들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이는 옹정제, 건륭제 때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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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근대 이후, 현대
그러나 건륭제 말년 및 이후에는 타민족과 백성들의 반란으로 계속 약해졌고 아편전쟁에서 패배당하면서 더욱 약해진 청나라는 1860년대, 영국과 프랑스 동맹군들에 의한 제2차 아편전쟁으로 더욱 큰 피해를 보자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협상금 등의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 댓가로 연해주, 아무르 강 등 외만주 일대를 러시아에게 주게 된다.[1] 자세한 내용은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문서 참조. 또한 내만주와 중가리아와 몽골까지 간접지배하는 등 청나라 북부 지대는 러시아의 진출과 침략으로 인한 간섭이 심해졌다. 1871년에는 러시아가 신장의 일리 강 유역을 점령하였고, 발하슈 호, 일리 강과 추 강 유역의 절반 등 중가리아 일부 등을 장악하였다.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해당 지역의 러시아 제국의 주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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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만주는 근대 후기부터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를 개척하면서 건설한 철도인 '철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지나는 곳 중의 하나이며, 소련 시기에는 많은 동유럽, 러시아 및 인근 지역의 유대인들이 이 길을 통해 극동 지역으로 이주되기도 했었다. 러시아는 하얼빈을 대놓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연해주로 지나가는 요충지로 만들고 러시아식 신도시를 건설했으며 다롄을 러시아 제국의 항구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1890년대에는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나라가 지배한 대만, 팽호제도와 더불어 요동 반도까지 일본에게 넘겨줘야 했고, 1904년과 1905년에는 요동을 비롯한 만주 남부는 러일 전쟁의 격전지대가 되었다. 일본은 요동 반도를 다시 얻고, 사할린 남부, 쿠릴 열도 남부 4개의 섬들도 러시아가 일본에 할양해서 일본의 땅이 되었다. 요동 반도에는 뤼순 감옥이 들어선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이러한 청나라의 무능한 외교, 한계로 인해 실패된 여러 내부 개혁들, 부정부패와 한족 탄압 등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결국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된 후 중화민국이 들어섰고, 일본은 몽골과 만주 등 중국 북부지역의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유도시켜 자신들의 세력으로 만들려고 하기도 했었고 스파이들을 중국에 보내기도 했었다. 이를 "만몽독립운동"이라고 불렀다. 외만주 일대는 러시아에게 점령된 이후 러시아화가 되었으나 러시아 혁명 및 내전으로 혼란을 겪었고 연해주와 아무르 강 유역 지방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계 이주민들이 세운 젤레나 우크라이나, 반공과 왕정 복고를 주장한 백군들의 마지막 세력이 되었다가 적군과 소비에트 세력들에 패배하고 극동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이 세워졌다가, 공산화가 되어 백군 세력들은 내만주 일대로 도망쳤고[2] ,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이후로는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만주, 몽골에 대한 패권 및 영토야욕이 심해졌다. 서부 몽골의 옛 영역이었던 외서북(러시아에 빼앗긴 신장 서북부 일대)의 일리 강, 추 강과 발하슈 호는 소련의 영역이되었고, 외몽골이 독립했지만 친소 사회주의 공화국이었기에 일본은 남은 내몽골과 만주, 그리고 멀리 신장 지역(북부의 중가리아 일대 포함)까지 점령을 목표로 했고, 이는 훗날 중국 대륙과 동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으로 변했다. 일본이 만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게 해주겠다는 거짓말과 더불어 해외에서 활동한 일제 지배하의 조선 지역의 독립군 및 독립운동가들을 잡겠다는 빌미로 여러 군벌들로 분열되었던 국민당 시기 중화민국의 동북지방 군벌 중 하나인 봉천군벌에 접근을 하다가 봉천군벌을 멸망시키고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게 된다. 또한 만주국을 시작으로 내몽골 동부와 중부까지 침략해 몽강국이라는 괴뢰 성향의 식민지를 더 늘이게 된다. 일제의 압력에 의해 일제와 추축국을 돕게되지만 소련과 중화민국 등 연합군들에 의해 무너지면서 내몽골 지역과 만주는 다시 중화민국에게 돌려받게 된다.
1949년부터 중국 내전이 일어날 때 공산당 세력들은 동북 지방(내만주)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이후 국민당이 패배하여 대만, 팽호 등으로 달아나면서 내만주를 비롯한 중국 대륙은 중국 공산당의 영역이 되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바뀌게 되었다. 신강 북부와 동북지방은 소련과 접했으며, 소련과 처음에는 동맹을 그럭저럭 잘 유지되는 듯했으나 호르쇼프의 스탈린 비판 이후 중국은 흐루쇼프의 행동들을 비난하며 관계가 안 좋아져 소련이 아닌 중국식 사회주의로 가겠다고 했으며, 냉전 시기, 사회주의권의 제2 세계에서는 친소파와 친중파로 갈라졌다. 이런 갈등들은 1964년부터 1969년까지 일어났던 중소국경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만주 지역에서 분쟁이 심했는데, 중국에 대한 반발, 연해주에 살던 중국인들 및 퉁구스계 소수민족들에 대한 경계심으로 원래 퉁구스어 단어, 중국식 단어로 쓰인 연해주, 아무르 강 유역의 도시나 마을, 그 외 장소들의 지명들은 러시아식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일부 정도가 퉁구스식 이름으로 불리거나 유래된 지명들이 조금 남아있는 편이다. 분쟁이 끝난 이후에는 소규모, 제한적 무역 정도만 좀 있었다가, 관계 개선과 냉전이 끝난 이후부터 본격적 중국과 러시아는 이곳에서 여러 방면에서의 교류와 왕래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만저우리 시에는 중러, 몽골 간의 문화 교류가 이어지고 있고, 두만강 일대는 북중러 3개국 간의 국경이다보니 여기서도 해당 국가들의 사업들, 노동자들이 오거나 무역도 있다. 하얼빈과 헤이룽장성은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기도 하며,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 아무르 주에서도 중국인, 원주민들인 만주족들이 이주해오기도 했다.
2.3. 대만과 만주 지방
한 편, 만주는 현재 중국 본토에 속해있다보니 대만에서는 되찾아야할 영역으로 본다. 단, 러시아령 만주는 현재 러시아령이 되었고 중화민국 시기의 영토가 된 적이 없다보니 러시아령 만주에 대해선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대만이 모든 고토를 되찾는 게 힘들다는 걸 알아서인지 그냥 대만으로 분리독립하자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러시아 연해주 등 외만주와 상당히 가깝다보니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 등으로 관광하러 오는 대만인 관광객들도 많다고 한다.
2.4. 동구권 이주민
러시아가 외만주를 점령한 이후 러시아인을 비롯한 동유럽, 캅카스와 중앙아시아에서 온 이주민들도 많았다. 특히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 그리고 유대인들과도 관련이 깊다. 만주 바로 옆에 위치한 유대인 자치주 외에도 하얼빈으로 이주한 러시아계 유대인들도 많았다. 한 때는 러시아 제국에서 하얼빈 역시 러시아인 영구 정착을 염두해두고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중학교 15개, 고등학교 6개를 건설했으며 정교회 성당 외에도 폴란드인을 위한 가톨릭 성당, 독일계 러시아인을 위한 교회와 덴마크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개신교 교회, 러시아계 유대인을 위한 시나고그까지 운영되었다
적백내전 당시에는 만주 하얼빈이 신장 지역과 함께 러시아인 백군 난민들이 피난하는 주요 루트 중 하나였다. 한 때 하얼빈만 해도 수십만여 명의 러시아 백군 난민이 거주하였으나 오늘날 만주에 잔류한 러시아인들은 거의 없고 대개 하얼빈에서 상하이를 통해 미국이나 호주, 프랑스 등으로 재망명하였다.
러시아계 중국인들 중 반공 성향의 사람들은 국공 내전 시기 홍콩이나 대만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대만으로 도망간 러시아계 중국인들은 주로 신강 출신이 많다고 하며, 만주에서 온 러시아계 중국인들은 일부이다.
2.4.1. 중국의 러시아계 유대인, 그 외 유대인들
러시아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중국으로 이주한 케이스이며, 유대교를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카이펑의 유대교도와 가깝다. 물론 기본적으로 러시아계이다 보니 카이펑의 유대교도와는 종교를 제외한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소련은 만주 근교에 유대인 자치주를 건설하고 유대인들 중 지원자를 받아 이주시켰다.
1970년대 소련에서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하면서 유대인 자치주 내 유대인 인구는 거의 다 이스라엘를 떠나서 오늘날 해당 자치주 내의 유대인 인구는 극소수만 남아있다. 하얼빈으로 이주한 일부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인 자치주에서 생산된 물건을 밀수하여 하얼빈의 중국인, 일본인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이곳을 점령했던 일본군들은 복어계획으로 이들을 이용해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일본군의 패배로 없던 계획이 되고 말았다.소련 내 유대인을 위한 민족 지역을 만듦으로써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첫째로 레닌주의 교리에 따르면 민족 영토가 결여된 채 오직 문화에 토대를 둔 민족은 인정받을 수 없었다. 둘째로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의해 러시아 밖 팔레스타인에서 계속 정착지를 찾으려 한다면, 소련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받게 될 것이었다.
- 제임스 포사이스 저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
2.4.2. 중국의 러시아계 타타르인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백인계 타타르인들(특히 볼가 타타르인)의 후손들. 일반적인 러시아계 중국인 및 알바진인과 다르게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후이족이나 위구르족 같은 중국의 다른 무슬림 민족들과 가깝다. 물론 말 그대로 러시아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후이족 및 위구르족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이질감이 존재한다. 하얼빈 철도를 지키기 위해 타타르 군인들이 주둔한 시작으로 하얼빈에 모스크가 지어지고 상당수의 타타르인들이 하얼빈에 정착하였고 자체적으로 신문도 인쇄하였으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전후하여 대부분이 하얼빈을 떠나고 오늘날에는 노인 몇 명만 남아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2.4.3. 그 외 다른 동구권 이주민들
외만주에서는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유대인 외에도 몇몇 러시아 소수민족들을 비롯하여 에스토니아인, 독일인, 폴란드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헝가리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아제르바이잔인, 타지크인, 우즈베크인, 키르기스인 등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동중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도 있다.[3]
2.5. 만주 지역, 퉁구스계 소수민족들과의 관계
퉁구스족들의 경우 러시아에는 어웡키족, 어웡족들이 많이 살며, 중국에도 어웡키족들이 있다. 중국의 어웡키족들 중 한 갈래는 솔론족이나 오르촌족들이 되었으며, 연해주, 아무르 강 하류, 사할린 일대로 내려간 퉁구스계 민족들은 울치, 윌타, 오로치, 킬리("킬레", "길레" 또는 "길러", "키러", "킬어"라고도 부름)가 되었으며 청대에는 왈가족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퉁구스족들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우데게족, 나나이족이 되었다. 연해주에 거주하는 우데게족들은 만주족으로 분류되거나 허저족이라고도 부르는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하는 나나이족에도 편입되었으며, 나나이족들도 러시아, 중국 두 국가에 있다. 또다른 유명한 퉁구스의 한 갈래 민족으로는 말갈과 여진, 여진에 갈라진 일파가 유지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여러 퉁구스 제족들과 혼혈되어 나타난 만주족도 있으며, 신장 지역으로 이주한 퉁구스족은 신장 솔론족, 시버족이 해당된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는 근대 서양에 알려져 중국을 떠오르는 모습은 청나라 시기의 복장이 되기도 했고, 청대의 문화는 당시 서양에 알려져 시누아즈리가 유행하기도 했었는데, 청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재 퉁구스 민족들은 중국인과 러시아인, 러시아로 이주해온 각 동유럽 국가들 계통 사람들과 혼혈되었으며, 연해주의 우데게족, 나나이족들과 혼혈된 중국인들은 "타즈인(taz)"이라고 불리고 있다. 중국 한족과 만주족들은 역사적 이유로 서로 좋은 편은 아니다. 러시아인의 경우 중국 한족만큼은 아니지만 만주의 반이 러시아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선 아쉬워하는 편이다. 다른 소수민족들은 딱히 이렇다할 갈등은 없지만 나라가 없는 소수민족이라서 좀 차별받거나 좋은 시선으로 보진 않는다.
내몽골 동부와 접한 흥4맹으로 이주한 퉁구스 민족들은 몽골계 민족들과 혼혈되어 몽골계 민족들에 동화되었으며, 이들은 동호라 불렸는데 투족의 조상인 선비족, 다우르족의 조상인 거란족들이 대표적이다. 모용선비는 선비족 중에서 강한 부족 중 하나였으며, 중국 역사에서 혼란스러웠던 오호십육국시대에는 전연과 후연을 세우기도 했었으나 모용연들이 망하자, 일부 선비족들은 서진하여 티베트 동부에 토욕혼을 세워, 자신들의 집단을 유지했는데 이는 투족이 되었다. 다른 선비족들도 자신들의 집단과 세력들을 유지하다가 북위를 중심으로 하여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에 흡수되었고, 북위의 호한통합 정책으로 서서히 한화되어 북주가 멸망할 때 정치적으로서의 선비족 집단세력들은 소멸되었다. 중원에 있었던 한화된 선비족계 출신들은 훗날 수나라와 수의 정치적 제도와 문화, 사회를 계승한 당나라를 세우는 관롱집단이 되기도 했으나 정체성으로서는 한화되었기에 선비족이라 보기 힘들었다. 반면 만주 북서부, 내몽골 동부에 남아있던 선비족들은 우문선비에서 갈라진 거란이 되었으며, 거란은 몽골 제국 이후 대부분이 혈통이 비슷한 몽골에 동화되었을 때 일부 거란인들은 눈 강 일대로 이주하여 자신들의 정체성, 고유 문화, 언어를 지켰는데, 이들이 다우르족이 된다. 거란은 멀리 동유럽에도 알려졌는데, 중국으로 알려지기도 했던만큼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강성한 힘과 수준 높은 문화, 기술 덕분이었다. 거란을 뜻하는 "키타이"는 중국으로도 와전되어 중국을 뜻하는 단어가 되기도 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캐세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러시아어로 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른다. 한편, 내몽골, 몽골 동부, 자바이칼로 이주해도 몽골계에 동화되지 않고 퉁구스계로 유지된 민족들은 "함니간(khamnigan)"이라 불렸다. 선비족, 거란족이 중국을 괴롭힌 역사가 있음에도 투족, 다우르족과의 관계는 만주족-한족, 몽골족-한족만큼의 갈등은 딱히 크게 없는 편이다. 다만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선비족과 거란족도 부정적으로 취급한다. 과거 다우르족들은 청나라 시대에 러시아의 침략을 막는 용병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청의 요새들을 지켰다. 일부 러시아에 투항한 다우르족과 자바이칼에 살던 어웡키족들은 러시아에 동화되었으며, 이들은 '간티무로프(여성 이름은 간티무로바)'라 불렸다. 나탈리아 간티무로바도 이들과 혼혈된 러시아인의 후손이라고 한다.
퉁구스족들은 일부 시베리아, 러시아 극동과 접한 지역에 있는 니브흐족을 비롯한 고시베리아인들과도 혼혈이 되었다. 말갈, 여진, 만주족 역시 이들과 같이 살면서 혼혈, 퉁구스화가 되었으나 니브흐인들은 퉁구스족이 되지 않았다. 시베리아, 극동으로 이주한 퉁구스족들도 다른 고시베리아인들과 혼혈이 진행되었다.
2.6. 해외의 퉁구스족
미국, 캐나다 등에도 중화권 출신의 만주족을 비롯한 소수 만주의 제족 사람들이나 러시아 출신의 퉁구스 소수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청나라 중후반인 18세기에 본격적으로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로 이주한 중국인들과 만주인 등 청나라, 중화민국 시절 사람들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해온 대표적인 만주족 출신의 중국계 미국인이자 대만계 미국인은 존 푸(傅履仁, John Fugh)이며, 미군 육군 소장이었다.
3. 여담
추운 기후와 아시아 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만주는 중국이 지배하고 있고, 외만주와 더불어 시베리아 역시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으며, 게다가 퉁구스 제족들이 거주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4. 관련 문서
- 러시아/외교, 중국/외교, 대만/외교
- 극동 연방관구
- 만주
- 만주/역사
- 청나라 치하 타이완 섬
- 네르친스크 조약
- 베이징 조약
- 청일전쟁, 러일전쟁
- 러허 성
- 만몽독립운동
- 러시아 내전
- 만주사변
- 중일전쟁
- 노몬한 전투
- 퉁구스, 숙신
- 동호
- 치파오
- 만주 요리
- 러시아식 중화 요리
- 러시아계 중국인, 중국계 러시아인
- 만저우리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동유럽 국가
[1] 간혹 만주로도 보기도 하는 사할린 섬의 경우 청나라가 이곳에 관리를 파견하는 등 지배했으나 제대로 된 지배를 하지 못했고, 1844년 러시아와 일본이 쿠릴과 사할린 문제를 해결했을 때 청나라는 사할린의 자국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했다.[2] 이미 외만주를 근거지로 하기 전부터 중국과 접한 또다른 국경 지대인 신장 중가리아로도 도망치기도 했고 일부는 몽골로 도망치기도 했다.[3] 동구권은 아니지만 심지어 러시아에 의해 연해주로 이주해온 온 미국인, 프랑스인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