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만주 관계
1. 개요
일본과 만주 지역의 관계에 대한 문서.
2. 상세
2.1. 현대 이전
고대의 경우 한반도와 만주 남부, 시베리아 남부를 통해 일본 열도에 인류가 들왔다.
일본은 섬이었지만 동해를 통해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보니 만주의 국가, 민족들과도 교류하거나 몇몇 퉁구스계 원주민들도 들어온 적이 있었다. 고구려, 발해와도 무역과 왕래가 많았으며, 발해에서 들여온 모피는 일본 귀족들에게 고급 제품이었다.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의 요나라가 만든 동단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요나라와의 관계에선 공식적 외교가 이뤄지지 않았을 뿐, 요나라와의 문물 교류, 왕래를 했었다. 한 편 연해주에서는 '도이'라고 불린 여진족들이 배를 타고 해적 행동을 해서 주변의 고려 동부 해안은 물론, 심지어 일본까지 약탈했었는데 이를 '도이의 입구'라 부른다. 여진족 해적 문제가이 엄청 심각해서 일본인들이 여진족에게 납치당했는데 우산국에서 고려 해군들이 이를 발견해서 해적들을 소탕시키고 일본인들을 구해주었다는 기록도 있었을 정도였다.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는 일본과도 교류를 했었다. 하지만 몽골에게 멸망한 이후에는 딱히 이렇다할 정도의 교류와 관계는 없었다.
한 편 여진족과의 두번째 접촉은 임진왜란 때였다. 목적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다음 명나라를 침략하는게 목적이었던 만큼 여진족과도 접하게 되었다. 함경도를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는 두만강을 넘어 야인여진들과의 전투도 있었으나 여진족들이 워낙 세서 저항도 컸고 저항 세력에게 포위되자 얼마안가 철 수하고 만다.
임진왜란 후기 및 거의 끝날 쯤 이후 여진족 또는 만주족은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일본은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이 끝난 이후 주변국들과의 관계개선을 하여 주변국들과 교류를 다시 했었고 청나라와도 교류를 하게 되었다.
1800년대에는 극동 일대까지 진출한 러시아와는 오호츠크 해를 접해 있다보니 쿠릴과 사할린으로 분쟁이 있었는데 1844년 협정을 체결해 쿠릴과 사할린까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시기, 서양으로부터 근대화 기술과 선진문물을 받아 경제와 기술이 높아진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면서 중국 대륙을 다시 침략하려 했었고, 이 때 정한론이 주장되어 조선도 침략하려고 했다. 그 결과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간섭했고, 조선에 진출하려던 러시아, 조선에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려는 청나라와의 갈등이 나타났으며, 이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두 전쟁 이전까지는 사실 일본이 이들보다 완전히 강했다고 보긴 애매했는데 이 두 전쟁에서 결국 승리하면서 일본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에도 서영 열강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며,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얻어 관동주를 얻고, 사할린 남부, 쿠릴 열도 남부 4도들을 얻자 더욱 기게가 강해지게 되었으나 동시에 자만심과 허영심에 사로잡히는 계기가 되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만주와 접한 일제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한 걸 목격했고 일본 정부는 훗날 중화민국에 여러 간첩들을 보내 만주족, 몽골족 등 중국 북부의 민족들을 부추겼다.
러시아 내전 중 시베리아 내전에서 개입하였다. 연해주를 중심으로 하바롭스크 블라고베셴스크는 물론 시베리아 동부 이르쿠츠크까지 침략했으나 미국이 이에 대한 비난을 하자 갈등이 나타났고 긴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 결국의 미국의 강요로 철수하게 된다.
2.2. 현대 이후
이후 일본은 더욱 대륙에 대한 집착이 커졌으며, 특히 만주, 몽골(내몽골)에 대해 간섭을 했다. 이로 인해 봉천군벌과의 갈등도 컸는데, 이는 조선의 독립군들을 몰래 도와주게 되었다. 일제는 장쭤린을 살해하고 훗날 만주사변을 일으켜 창춘에서 괴뢰국 만주국을 만들고, 훗날 만주 인근 접경의 내몽골에서는 몽강국까지 세웠다.
특히 이 당시 일제는 파시즘으로 변했으며, 우생학도 나오게 되었다. 일본군들은 점령지에 731부대를 포함한 여러 부대들을 두어 생체실험을 하는 장소들을 만들었다. 이 때 수많은 중국인, 한국인, 몽골인과 일부 몽골계 민족, 러시아인(소련군 포로 포함), 미군과 영국군 등 전쟁포로, 정치범들, 만주족을 여러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만행들을 자행했다. 사할린에서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의 강요로 인해 강제노동을 당해야 했다. 강압과 학살, 강제노동 등 여러 만행들은 일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져 수많은 중국의 여러 저항자들이 나왔으며, 그 중 소수민족들도 일본에 저항했으며, 그 외 조선의 독립군들과 손을 잡고 같이 저항하기도 했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2차 세계대전이 패망하고, 8월 폭풍 작전, 노몬한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이 만주를 점령하고, 사할린과 쿠릴 열도의 4도들 역시 되찾으면서 몇몇 일본인들만 일본 본토로 도망가고 대다수의 만주에 남은 일본인들은 소련의 통치를 받게 된다. 소련도 일본과의 전투에서 소련인들이 희생되었고, 나치 독일과 손잡은 추축 세력이었기에 소련 입장에서는 일본인들을 절대 곱게 봐줄리 없었고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보복을 했다. 소련이 만주에서 철수한 이후 만주는 다시 중화민국의 땅이 되었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를 받게 되며, 이 시기 만주 지역의 일본인들은 수많은 중국인들과 살게 되다보니 저절로 중국에 동화되었다.
러시아령 만주에도 소수의 일본인들이 거주하는데, 이들도 제정 러시아가 프리모라예까지 개척한 이후 연해주에서 건너온 이주민, 사할린을 지배했을 때 들어온 이주민들, 일본이 시베리아에 개입했을 당시의 일본인들이거나 일제의 강압 통치를 피하거나 소련과의 전쟁 때 끌려온 일본인, 일본군 포로들의 후손들이다. 이곳 사람들도 일상에선 러시아어를 쓰는 등 일부 러시아에 동화되었다.
3. 소수민족들과의 관계
역사적 이유로 근현대에 만주를 침략했고, 점령지에서 억압시키거나 약탈, 학살, 그 외 전쟁범죄들을 저질렀기에 일본에 대한 인상은 만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다음으로 절대 좋지 못하다. 지금도 만주의 퉁구스계 제족 원주민들은 인구 수가 적은데 이 또한 일제가 이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생체실험, 마약 흡입 강요, 학살들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허저족 마을을 방문하던 일본인들에게 허저족 전통주식인 잡은 물고기마저 다시 강에 버려서 일본인들은 다른 곳에서 음식과 물을 얻었다고 하니 얼마나 안 좋은 지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들은 나나이인과 우데게인들이 자신들과 혈통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인지 일본은 연해주의 우데게족, 나나이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할 때도 있다고 한다. 물론 사이가 안 좋아도 먹고살기 위해 일본으로 이주하여 알본에서 일하는 퉁구스 제족 출신 사람들도 있다. 일본에는 중국과 러시아의 소수민족들 그룹들도 있는데, 다우르족, 어웡키족, 오로촌족 등의 그룹들도 있다고 한다.
만주족 역시 언급한 소수민족들처럼 일본과의 관계가 그리 좋진 않다. 심지어 청일전쟁처럼 일본과 싸웠지만 패배한 적도 있었고 멋대로 만주국이라는 국가처럼 유사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실상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물론 만주족과 다른 만주의 소수민족들 중 반중 및 한족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 만주는 중국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일본과도 친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와는 별도로 역사, 정치적으로서의 친일까진 아니며, 옛 만주국 국기와 국장을 사용하며 범투란주의 성향 및 분리독립 비슷한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많지도 않고 하필 보여주는 것도 괴뢰국 만주국 국장과 국기(...)이다. 물론 만주를 상징할 만한 국기나 국장이 없다보니, 비교적 역사적으로 가깝고, 명목상 겉모습이나마나 근대국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해서인지 분리주의 성향 또는 만주와 러시아 또는 중국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만주국이 아닌 "만주(manchuria)"라는 개념으로 쓰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굳이 본다면 비공식적으로 쓰이다보니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건 둘째치고서라도 인정받지 못한다.
4. 관련 문서
- 일본/외교
- 중일관계, 러일관계
- 러시아/외교, 중국/외교
- 극동 연방관구
- 만주
- 만주/역사
- 청일전쟁, 러일전쟁
- 러허 성
- 만몽독립운동
- 러시아 내전
- 만주사변
- 중일전쟁
- 노몬한 전투
- 소련 점령하 만주
- 퉁구스, 숙신
- 동호
- 도이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동유럽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