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은퇴 이후의 삶

 

1. 개요
2. 사업
3. 정치
4. 방송, 지도자 활동
5. 사망 직전까지
6. 사망
7. 사후 추모, 기념


1. 개요


최동원의 은퇴 이후 삶을 서술한 문서.

2. 사업


은퇴 후엔 의류사업가로 나서 뒷모습 누드 사진을 넣는 파격적인 광고를 선보이다 망했다.

3. 정치


이후 잠시 정치계에 입문하여 출마하지만,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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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민주당 소속의 최동원. 포스터는 최동원 스스로 직접 디자인했다고 하며, 포스터나 선거 문구 모두 정치계에서도 상당히 세련되었다고 평가받았다. 90년대의 포스터임을 상기하자.[1]
원래 최동원은 당시 경남고 선배였던 김영삼이 여당인 민주자유당으로 출마할 것을 권유를 받았다.[2] 그러나 최동원은 이를 거절하고 1991년 5월 1일 3당 합당에 반대하던 통일민주당 탈당파인 이기택노무현이 있었던 꼬마 민주당에 입당했다.[3] 그리고 그 해 6월에 있었던 광역의원 선거에 부산직할시 시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여기서 최동원은 부산 서구에서 출마했는데, 부산 서구는 김영삼이 1956년부터 대통령 취임전까지 출마해서 당선되었던 지역구로[4] 김영삼 본인과 소속당인 민주자유당의 사실상 성지같은 지역구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동원은 민주자유당의 골수 지역구에서, 그것도 해당 지역구의 국회의원이자 정당 대표인 김영삼에 대한 반대[5]를 선거 홍보물에 드러내면서 직할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최동원 출마에 대한 여론이 여러가지 있었다. 괜히 정치판에 나갔다가 이미지만 망가질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운동선수 출신인데다가 이전까지 딱히 정치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가진 유권자도 있었다.
결국 최동원은 낙선했지만, 37.8%라는 적지 않은 득표율을 올렸다. 원래 김영삼의 지지 성향이 강한 부산 중에서도 특히 부산광역시 서구는 위에서 말한 김영삼의 존재 때문에 보수세가 강했던 상황이기에 민주당계 정당 후보들은 엄두내기도 힘든 성적을 거둔 것이다. 최동원 사후, 민주당계 정당에서 최동원이 살았다면 영입해서 부산 선거에 나설 텐데... 하는 말이 간혹 나오는 이유였다.
참고로 저 득표율은 당시 최동원이 나왔던 서구에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되어서야(!)'''[6] 깨졌다.[7] 얼마나 최동원이 선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산 전체로 확장해도 2004년에 치른 17대 총선에서 깨졌고, 그때는 노무현 탄핵 소추 이후 전국에서 열린우리당 돌풍이 났을 때였다.

4. 방송, 지도자 활동


낙선 이후 최동원은 방송계에 진출하여 걸출한 입담을 과시하며 여러 군데를 전전했다. 이 때문에 나이 어린 사람들은 연예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많은 롯데팬들이 씁쓸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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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2군 감독 시절
이후 2001년 한 해동안 잠시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있다가 2003년부터 KBS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을 맡으며 야구계로 돌아왔고,[9] 2006년 시즌을 앞두고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화 투수코치로 부임, 류현진 성장에 이바지했다. 김인식 감독이 WBC 대표팀을 이끌고 경기를 치르던 도중에 국제전화 걸어서 "감독님, 물건 하나 왔습니다."라고 말하였고, 이후 시범경기에서의 부진으로 개막 로스터에 오르지 못한 류현진을 다시금 강력하게 추천하여 로스터에 포함되도록 힘썼다. 게다가 김인식 감독은 원래 류현진을 불펜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최동원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선발로 데뷔하여 첫경기 7이닝 무실점 10K를 찍고 순식간에 슈퍼스타가 된다. 이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활동했다. 다만, 이 시기 대장암이 발병하면서 치료 및 요양을 하느라 2군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때문에 2008년 시즌 후 건강상의 이유로 재계약하지 않았고, 2009년 시즌부터는 2군 타격코치였던 우경하가 감독직을 계승했다.

5. 사망 직전까지


은퇴 후에도 롯데 팬들은 최동원을 간절히 찾았다. 마침 5위로 2008년 시즌을 마친 한화 이글스가 최동원 감독과 재계약을 안 한다는 기사가 떴고, 이에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롯데 프런트와 최동원 간의 과거사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최동원을 모셔오자"라고 하는 등 급반응을 보였으나... 결국은 KBO 경기감독관에 임명되었다. 여전히 야구계에서 그의 입지는 좁았다. 롯데에 오고 싶어도 프런트 [10] 때문에 힘들 것 같다는 게 대세. 그리고 암 투병 경력 등 이래저래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이 많은 1군 코칭스태프는 현실적으로 무리다.
경기감독관으로 재임하면서 우천취소 문제로 인해 징계를 먹었던 흑역사가 있다.
2009년 시즌부터 롯데 자이언츠 기념관이 생기면서 역대 레전드의 유니폼이나 장비들을 전시했는데 '''최동원 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롯데와 최동원의 관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나중에는 최동원 칸도 채워졌다.
2009년 7월 4일, 최동원은 '''21년''' 만에 롯데 유니폼을 입고서 사직에서 감격적인 시구를 했다. 21년 만에 롯데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의 시구는 많은 화제가 되었고, 당시 중계를 하던 KBS N 스포츠에서 특별히 캠을 가까이 붙여서 최동원의 역동적인 투구폼을 담아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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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을 벗은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역동적이다.
많은 팬들은 롯데가 최동원을 초청해서 시구를 했으니 서로의 관계가 좋아진 게 아닌가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롯데가 초청한게 아니라 2009년 프로야구 타이틀 스폰서인 CJ그룹 마구마구에서 전설적인 선수를 초청해 시구 행사를 벌이는 '레전드 시리즈(legend series)' 이벤트였다고 한다.

사직구장에서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시구장면.최동원은 2004년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도 시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사직구장에서 틀어줬던 영상.
참고로, 그때 구장에서 최동원의 시구를 본 관중 가운데 롯데 올드팬들은 위에 적혀 있듯 '''21년만에 최동원이 롯데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로 올라오자 눈물까지 흘렸다'''. 그만큼 최동원이 롯데 팬들에게 있어서 큰 존재이다. 게다가 이 날은 경남고 후배 송승준이 당대 최강이었던 SK[11]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둠으로서 경기의 의미가 한층 더 커졌다.
MBC ESPN '날려라 홈런왕'에서 유소년 야구 감독직을 맡고 있다. 웃기도 많이 웃고 의외로 웃기기도 하신다. 최근 방영분에선 카라의 깜짝방문에 차명주 코치와 함께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셨다. 미래, 야구계에 '최동원의 아이들'이 출현하길 기대해본다.
한 때 인터넷 상에 간암으로 인해 투병 중이라는 카더라가 돌았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다.[12] 자기는 등산 열심히 하고 내려왔는데 무슨 이야기냐며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본인이 극구 부인하니 정말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듯 했으나...
2011년 7월 22일,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레전드 리매치에서 '''심하게 야윈 모습'''으로 나와 충격을 주었다. 일단 인터뷰에서는 건강에 이상이 없고, 체중이 많이 불어 식이요법을 통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너무 심하게 살을 뺀 것이라며 와병설을 부인하기는 했지만 많은 팬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이미 그당시 외견은 굳이 암이 아니라 하더라도 다이어트라고 볼 수준도 아닐 정도로 너무 심각했으며, 대놓고 얘기만 안 할 뿐 큰 병환이 있다는 것을 대다수의 팬들은 이미 알았다.
결국 그날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하고 계속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 타석이라도 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본인은 너무 야인 생활을 오래해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중간하게 서는 것은 싫다고, '''솔직히 말한다면 허리를 삐끗해서'''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했다.[13] 동생인 최수원 심판이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걸 다 알아채지 않겠냐! 굳이 나가야겠냐!" 말리기도 했으나 끝내 끝까지 말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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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것이 최동원 생전에 마지막으로 입은 유니폼이 되고 말았다'''. 수척한 얼굴에 비해 가 나와 있던 것은 대장암 말기로 인해 복수가 차 있던 것이었다. 고교 선배인 허구연이 이를 눈치채고 괜찮은 거냐고 묻자 최동원은 모른 척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병원에서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레전드 매치에 나온 것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라운드에서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유족들은 말하고 있다.

이 레전드 리매치가 있기 전 박동희김성한과 함께 긴 시간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길어서 최동원 파트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 초등학교 때까진 축구부에서 뛰다가 축구에 대한 흥미를 잃고, 어머니가 마침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어 어머니를 따라가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 연세대 출신들의 정치 공작으로 최동원이 어쩔 수 없이 고려대가 아닌 연세대로 갔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혔다.
  • 1983년 데뷔 시즌을 9승 16패로 부진한 성적으로 마감한 후, 하루 400개를 던져가며 훈련한 끝에 페이스를 끌어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그는 후배들에게는 이렇게 무식하게 훈련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해라'고 할거라고... 그래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굵고 짧게 선수 생활을 할 것 같단다. 그게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에.
  • 지금 1984년 한국시리즈로 돌아가 그 때처럼 등판하라고 한다면 답을 유보할 거란 말을 했다. 최후가 그런 것(트레이드)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던지진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14]
그 밖에도 심금을 울리는 그의 말들이 많다. 최동원의 팬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6.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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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중 생전 마지막으로 쓴 싸인볼

원래 별은 밝은 낮이 아닌 어두운 밤에 빛나게 마련입니다. 그는 화려했던 현역시절보다 더 화려하게 빛날 거예요.

빅토르 메사,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

최동원은 레전드 매치 당시 와병설을 부인했던 것과 달리 실은 2010년부터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해 경기도 포천 등에서 요양 중이었다. 그러던 중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일산의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011년 9월 14일 새벽 2시 2분,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장효조 감독이 숨을 거둔 직후인 1주일 전부터 병세가 악화되었다고.[15] 사실 레전드 매치 당시 괜찮다고 한 인터뷰 기사도 기자에게 아프다는 말을 절대 쓰지 말라고 간곡하게 부탁해서 쓴 거짓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팬들에게 자신의 병세가 알려지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본인의 마지막 소원은 고향팀에서 감독을 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친정팀 롯데와의 화해는 살아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한화 이글스에서도 비록 프랜차이즈 스타는 아니지만 4년간 코치로 연을 맺었던 점을 고려하여 한화그룹 임직원이 상을 당한 경우에 준해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롯데 자이언츠 구단에서는 기일 오후까지 별다른 대응이 없어 폭풍같이 까였다. 롯데 구단에서 명예 감독 임명, 최동원 데이 명명을 '''검토'''하겠다고 한 것이 전부였다. 이미 한화에서 빈소까지 차린데 비해 롯데는 고작 이 정도냐며 폭풍같이 까였다.
결국 롯데는 팬들의 여론을 의식한 듯, 앞서 언급했듯 최동원을 명예감독으로 추진하는 것을 '''검토'''하겠다고 밝헜으며, 영구결번과 9월 30일을 최동원 데이로 지정[16]하겠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15일 조문에서 밝혀 극적 화해의 마지막 실마리는 남겨두고 있다.[17]
'''더군다나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에 대한 영구결번 역시 당시 롯데 자이언츠 사장이었던 장병수가 "해당 번호를 달고 뛰고 있는 이정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더더욱 팬들의 화를 돋구었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도 이를 까는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팬들한테 욕은 욕대로 먹었지만 결국 롯데는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였다.'''[18]
먼저 세상을 떠난 장효조와 여러모로 묘한 우연의 일치가 있다. 최동원은 롯데에서 데뷔했지만 위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고 장효조는 최동원의 맞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전설이 일주일 간격으로 작고한 2011시즌 페넌트레이스 1, 2위는 경상도 지역 연고의 삼성과 롯데. 만약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붙게 되었다면 여러가지의 관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될 한국시리즈가 되었을 것이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던지고 싶다.'''라고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운명하는 순간까지 야구공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공은 그의 501, 502탈삼진 공.[19] 진정 뼛속까지 야구인.
그가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 나왔던 2011년 7월의 인터뷰에서, "별은 하늘에만 떠있는다고 별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줘야 그게 진짜 별이에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제 야구계를 위해 나도 뭔가를 하려고 해요. 이젠 그냥 '최동원'이란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나처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어요. 야구가 뭐냐고요?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최.동.원' 이름 석 자지. 야구가 전부였지…."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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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아침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그의 발인이 엄수되었다. 이날 유족과 롯데 구단 관계자, 동료 및 선후배 야구인 등 약 100여명이 모여 최동원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장효조의 발인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쓸쓸하지 않은 발인이었다. 최동원의 영정이 영구차에 실리자 롯데 시절 동료였던 양상문 해설위원과 1988년 트레이드 당시 같이 삼성으로 갔던 후배 김성현 인창고 코치는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최동원의 영면을 기원하였다.
최동원의 시신은 벽제 화장장에서 생전에 그가 아끼던 글러브와 유니폼과 함께 화장되어 한줌 재가 되었고, 경기도 고양의 청아추모공원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최동원 모친 "동열아, 너라도 건강챙겨라"
최동원의 부고 소식을 접한 많은 팬들이 십시일반하여 조화를 보내고 장례식장에 직접 조문을 가기도 하였다.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250만원을 걷어 조화와 부조금을 유족 측에 전달했고 한화 이글스 갤러리[20]와 "롯데사랑 거인사랑"에서도 조화를 보내어 최동원을 추모했다. 아버지가 팬이었다는 10대 소녀가 장례식장을 찾아가 조문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춘천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팬도 있었고, 수산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온 차림의 팬도 있었다. 최동원이라는 존재가 야구팬, 특히 롯데팬들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를 두고 '롯데 팬의 절반은 최동원이 만들어 주었다'는 평도 있었을 정도.
최동원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 2011년 당시 한국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던 외국인 투수 세 명, 레다메스 리즈벤자민 주키치, 브라이언 고든에게 최동원의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투구 영상을 보여주며 그를 평가해 달라고 했는데[21] 세 명 모두 엄지를 추켜세우며 감탄했다. #
  • 레다메스 리즈: "(옆에 있던 임찬규의)영웅이 될 만한 투수이다. 커브와 역회전공 모두 평가가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 저렇게 온 몸을 사용하는 큰 투구폼으로 제구가 되는 투구 메커니즘은 처음 봤다. 임찬규가 저런 우상을 잃었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 벤자민 주키치: "역회전공 하나만 봐도 대단한 파워 피쳐였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시리즈 최종전같은 중요한 경기에서 저렇게 자신 있게 몸 쪽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건 평소 몸 쪽 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렇게 공격적인 투수를 좋아한다. 위기의 순간에 이런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거의 없을 것이다. 커브도 저렇게 각이 큰 커브는 오랫만에 본다. 특히 저런 투구폼에서 나오는 커브는 처음 봤다. 역회전공과 커브를 던질 때 타점도 약간 다른 것 같은데 정말 특이하다. 내 투구 폼보다도 훨씬 독특하고, 타자들이 아주 곤란해 했을 것 같다."
  • 브라이언 고든: "이런 공을 던지려면 아주 강한 마지막 동작이 필요하다. 마지막 동작에서 공을 때리듯(hit) 던져야 저런 역회전이 걸릴 텐데 그 동작이 매우 자연스럽다. 보통 2스트라이크 이후에 몸 쪽 공으로 삼진을 잡기 위해 이런 공을 던지는데 1스트라이크에서 던진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커브도 크게 휘는 좋은 커브지만 역회전공이 더 대단한 것 같다. 이런 커브와 역회전공을 한 사람이 동시에 구사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7. 사후 추모, 기념


2011년 9월 30일, 언론에 보도된 대로 두산 베어스와의 홈경기를 '''"최동원 데이"'''로 명명하고 경기 전 최동원 선수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11번의 영구결번식이 거행 되었다. 이날 최동원 선수의 모친과 아들을 비롯한 유족이 참석하였으며, 최동원 선수의 외아들인 최기호 씨가 시구자로 나섰다. 이날 경기는 선발 라이언 사도스키가 2회초에 두산 윤석민에게 3점 홈런을 맞아 조기강판 하며 흔들렸지만 곧바로 등판한 장원준이 7⅓이닝 4피안타(탈삼진 4개, 사사구 1개) 무실점으로 쾌투하였고, 타선에선 강민호이인구가 먼저 간 선배를 추모하는 홈런포를 가동하며 롯데가 6-3으로 뜻깊은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부산에서 최동원 기념 야구박물관 출범식이 열렸고 이 자리에는 부산 시장을 비롯해 부산시 인사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롯데는 화환 하나 보내고 직원 하나 보낸 것이 전부였다.
2013년 들어 사직 야구장에 최동원의 바람이었던 롯데 감독으로의 금의환향이라는 꿈을 추모하기 위해 동상 제작 모금을 했고 2013년 9월 들어 동상이 공개, 정식 제막식은 9월 14일에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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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구장에 세워진 최동원의 동상.
그런데, 최동원 동상이 세워지고 난 이후에 동상에 함부러 올라가거나 동상 부근에서 흡연 및 쓰레기 무단투척도 모자라 동상 옆 배수로나 뒷편 화단에 대소변을 누는 행위가 비일비재 하다. 특히, 모친 김정자 여사도 자주 찾는 곳인 만큼 절대로 이러한 행동은 아예 하지 않는것이 좋다. # #
2013년 12월 24일부터 2014년 3월 2일까지 열려있을 예정인 부산 벡스코 2013 야구체험 스토리에서는 최동원의 유품 전시관이 마련된다. 모친이 찾았으며, 금의환향한 부산 출신 메이저리거 추신수도 12월 31일 이곳을 찾아 사인볼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박동희 기자가 쓴 칼럼에 따르면 이만수 감독(2011년 당시 SK감독대행)이 사망 사흘 전부터 매일 찾아와 문병을 했었다고 한다.
박동희 기자가 이외에도 여러가지 최동원에 관한 일화가 담긴 기사를 시리즈로 다.
9년 후인 2020년 11월, 최동원이 타계한 해에 창단한 경남의 신생 NC 다이노스가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직후, NC의 김택진 구단주는 평소 존경했던 최동원을 추모하고자 우승 트로피를 들고서 고양 청아공원에 안치된 최동원의 납골당을 방문했다. 최동원의 어머니 김정자 여사도 자필 편지로 김 구단주에게 축하와 감사를 전했다.
[1] 보면 알겠지만 민주당계 정당인데 파란색 계통을 썼다. 사실 꼬마 민주당이나 그 이후의 새정치국민회의 시절 파란색 계통도 민주계의 보조색이었다. 이 컬러는 2013년까지 사장되었다가 부활하여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의 주 컬러가 되었다.[2] 출처는 최동원의 선거 포스터로 비록 최동원 본인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공식 선전물에 직접 언급한것으로 보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3] 여담으로 이때 같이 민주당에 같이 가입했던 사람이 김을동이다.[4] 1956년 선거는 낙선했고 가택연금을 당한 전두환 정권때는 출마가 불가능했다.[5] 김영삼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거대여당의 대표라고 했지만 사실상 김영삼을 직접 지목한 것이다.[6] 오거돈(시장) 51.36%,정진영(구청장) 44.17%[7] 다르게 말하자면 27년동안이나 저 기록이 안 깨진 것이다. 얼마나 서구가 보수세가 강한지 알 수 있는 대목[8] 방송사의 어떤 프로그램에 박경림과 같이 출연했었는데 최동원의 현역시절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나오자 박경림은 해설자로만 알았지 실제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 뛰었는 줄은 몰랐다면서 놀라 하는 모습이 나온 적 있었다.[9] KBS 스포츠 해설위원으로 있었는데 홈런이 나올 때마다 너머너머너머너머...너머가써요오!!가 주특기였다.당시 최악의 성적을 찍던 롯데 경기를 중계할 때 목소리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여주기도...[10] 하지만 후에 작고한 뒤에 양상문이 했던 말로 보아 선수 시절에는 최동원이 이것저것 잘 챙겨줬으며, 장례식장에도 양상문이 두 번이나 참가한 것 등을 볼 때 그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롯데와의 관계가...[11] 당시 2년 연속 우승팀이었고 그 해에는 준우승을 했고 2009년 9월 아시아 연승기록인 19연승을 찍을 정도로 강팀이었다.[12] 실제로는 대장암이었다.[13]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암으로 투병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오지 못했던 것.[14] 그러나 최동원은 트레이드로 인한 배신감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 이 때부터의 혹사로 한때 팔로 수저들고 식사하기도 불편한 어깨를 가지게 되었던 그의 비참하던 몸상태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롯데와의 최후가 그렇지 않았다면 몸이 다시 그렇게 된다 해도 다시 그렇게 던졌을 거라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15] 그러나 최동원의 병세가 악화될까 장효조의 부고는 알리지 않았다. 불세출의 스타들끼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통했던 듯... 참고로 당시 보복성 트레이드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선수 또한 장효조였다. 자신의 팀을 위해 살가죽이 까질 정도로 노력하던 타격왕이였음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한 경우.[16] 이 날은 1984년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날이기도 하다.[17] 사실 최동원에 대한 대응이 늦어진 것은 당시 구단주 대행이던 신동인이 평소 최동원과의 사이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최동원의 빈소에 롯데 직원들이 가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신동인이 "거길 왜 가느냐" 며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사실 최동원과 롯런트의 관계는 매우 안좋았는데, 최동원의 부친이 과거 전쟁에서 한 쪽 다리를 잃은 것을 보고 '''고깃덩어리라는 매우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거기다 상술하다 싶이 연봉협상도 매우 지지부진했고 이대호나 마해영 같은 레전드도 이런 사건으로 다른팀으로 이전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타격 7관왕인 이대호가 "내가 이만큼하고 연봉이 겨우 7천만원 오르면 후배들은 뭐로 먹고 사느냐"라고 말하고 일본으로 갔을 정도. 사실상 고향, 부산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참아온것이지 롯데가 좋아서 야구를 한게 아니였다는 말이었다. 사실 롯런트가 프랜차이즈 스타 푸대접하는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유명하다. 애초에 이쪽이 원조. 말을 막 하기로 유명한 치바 롯데 마린즈의 프랜차이즈 스타 카쿠나카 카츠야는 타격왕을 차지한 다음 해에 연봉이 1억 엔을 돌파했는데 그것에 대한 인터뷰 자리에서 '''솔직히 다른 팀이었으면 연봉 2억엔 정도는 줬겠지만 롯데니까 뭐...''' 라고 대놓고 프런트를 깠다.[18] 최동원의 영구결번판은 당초 외야 펜스에 설치됐다가 2015년 전광판 좌측 기둥 밑에 옛 롯데 유니폼 컬러인 하늘색 바탕에 붉은색 등번호로 디자인돼 다시 설치됐다.[19]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쥐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손에 잡힌 것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20] 다소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데뷔시즌 시범경기에서 죽쒔던 류현진이 붙박이 선발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당시 한화 이글스의 투수코치였던 최동원이 류현진은 무조건 선발로 써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최동원이 아니었다면 류현진 또한 비슷한 시기에 지명되어 노예로 굴려지다가 망가진 다른 유망주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칰갤에서 조화를 보내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의외인 일이 아니다.[21] 선입견이 없도록 최동원이 어떤 선수였는지 사전 설명 없이 동영상을 보여줬다고 한다. 다만 레다메스 리즈는 동료인 임찬규에게 "이 분이 나의 영웅이었다"라고 살짝 귀띔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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