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계 캐나다인

 

영어: French Canadian, Franco-Canadian
프랑스어: Canadien français, Franco-Canadiens
1. 개요
2. 기원
3. 프랑스계 캐나다인 유명인
4. 관련 문서


1. 개요


프랑스 혈통을 가진 캐나다인들을 말한다.
비록 7년 전쟁의 패배로 캐나다의 프랑스계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자부심은 여전하다.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가톨릭을 믿고[1] 불어를 고수한다. 몬트리올같이 타지역과의 교류가 많은곳에서는 영어도 통하며 당연하겠지만 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친다. 하지만 퀘벡 불어도 프랑스 본토식 불어와는 이질화되기도 했다. 오래된 지리적 및 역사적 단절 때문에 신대륙과 구대륙 방언 차이가 커지는 일은 흔하다. 불어가 프랑스라는 나라의 중앙집권화 속도에 비해 은근히 방언 차이가 큰 건 본토가 아닌 퀘벡이나 기타 해외에서 쓰이는 프랑스어 방언 때문이다.
이들은 흔히 알려진 퀘벡뉴브런즈윅생피에르 미클롱, 그리고 노바스코샤에도 많다. 그리고 그 외 영어권으로 알려진 앨버타 등에도 소수지만 프랑스계가 섞여 산다.
2010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퀘벡의 프랑스어 화자들의 3분의 1은 자신을 오롯이 '퀘벡인(Québécois, 퀘베쿠아)'이라고 지칭하고, 39%는 '캐나다인'이라고 인식은 하나 그 전에 앞서 '퀘벡인'이라고 본인을 소개한다고 한다. 오직 20% 미만이 자신을 '퀘벡인이자 동시에 캐나다인'이라고 생각하며, 7%가 '퀘벡인' 전에 '캐나다인'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오직 '캐나다인'이라고만 소개하는 사람들은 1%에 그쳤다. 출처
프랑스계 캐나다인에 비하면 굉장히 소수고, 존재감도 해당 지역을 벗어나면 같은 미국인들도 '그런 커뮤니티도 있었어?'라 할만큼 옅지만 아직까지도 프랑스어와 문화적으로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프랑스계 북미인 커뮤니티는 미국에도 있다. New England French라 부르며 역사적 기원은 퀘벡, 아카디아인들과 마찬가지지만 익히 알려진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 상실, 미국 독립 전쟁, 영미간 국경 확정 과정을 겪으면서 미국측에 살게 된 프랑스어 모어 커뮤니티는 메인, 버몬트주와 뉴욕북쪽 끝자락에도 전통적으로 존재해 왔으며, 이들은 역사적 기원과 문화적 맥락은 캐나다의 옛 동족(?!)과 공유하지만 법적 의미로 '캐나다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니 굉장히 복잡미묘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캐나다의 사촌들 만큼 독자 정치세력화 할 인구 기반, 역량도 없고,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캐나다보다 훨씬 더 강하게 융화주의를 추구하다 보니 갈수록 불어 모어 화자가 줄어들고, 뉴잉글랜드 프랑스어 또한 역시 사멸위기인 케이준 프랑스어가 부러울 만큼 줄고 있다 보니 적극적으로 캐나다쪽 프랑스어 화자 인구들과 연대하여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2. 기원


그 시초는 캐나다를 유럽에 처음으로 알린 프랑스의 탐험가인 자크 카르티에(Jaque Cartier)다. 그는 처음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북부 대서양을 건너오는 노르망디 쪽 루트로 왔는데, 춥고 황량한 풍경을 보고 실망했다! 스페인인들이나 포르투갈인들이 풍요로운 남아메리카미국 남부지역, 브라질 등을 먹고 황금이나 향신료, 고무 등을 대거 챙기는 데 비해 캐나다 땅은 통 얻어 갈 게 없었던 것. 특히 스페인령 북아메리카텍사스, 뉴멕시코, 미시시피앨라배마 해안, 플로리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최남단 등과 캘리포니아를 포함하는 북부 멕시코는 기후가 따뜻하여 농사도 잘 되고 자원도 꽤 많이 날 정도였으나 춥고 건조한 캐나다는 그딴 거 없었다. 포르투갈남아메리카브라질은 스페인의 식민지들처럼 황금이나 은 같은 지하자원은 없으나 이쪽은 플랜테이션으로 인해 고무가 많이 나고 향신료도 풍부해 돈이 되었다. 그러나 국토 대부분이 냉대기후이고 일부가 아한대기후인 캐나다는 그런 걸 기대하기 힘들었었다.[2]
그래도 명태 등 한류성 어종이 많이 잡혀 북부 프랑스 해안지방의 어부들을 중심으로 이주민들이 건너간다. 그리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에 살던 바스크인들도 건너간다.[3] 나중에 입소문을 타고 포르투갈인 어부들까지도 캐나다 이주를 시작했으며 래브라도 반도는 포르투갈 어부들이 발견해 명명한 곳이다.
1608년 사뮈엘 드 샤플랭이 퀘벡을 비버 모피 무역의 거점으로 삼으며 영구 정착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퀘벡의 누벨프랑스 식민지에는 모피 무역업에 종사하는 남성 이민자와 현지처에 해당하는 원주민 여성 그리고 이들 사이의 혼혈인 메이스Meis가 살았다. 당시 프랑스인 여성이 이민 오는 경우는 드물었으며 인구는 별로 늘지 않고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 인구가 비교적 소수였기에 영국 및 스페인 식민지 인구와 경쟁하는데 있어서 많이 불리한 환경이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프랑스 왕실은 1663년부로 15세에서 30세 사이의 미혼 여성 800여명의 여러 물자와 지참금을 딸려 보내 정착지에 합류시켰는데, 이들이 오늘날 퀘벡의 프랑스계 캐나다인의 직계 기원을 이룬다. 당시 프랑스는 딸랑 800명민 보낸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들에게 출산 장려금을 후하게 주었기 때문에 새로 이민 간 여자들은 애를 되는대로 많이 낳았고, 프랑스 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다산 문화가 꽤 오래 이어졌다. 1700년 조사 결과 인구 약 2만여 명 정도였던 퀘벡 프랑스인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퀘벡 프랑스인들은 19세기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과 인구증가율이 높은 민족 집단 중 하나'''로 추정되며, 심지어 184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에 1백만여 명에 달하는 퀘벡 프랑스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퀘백의 프랑스어 사용자들은 사실상 당시 파견된 여성 800여 명의 후손으로 상당히 제한된 유전자 풀을 가진다 한다.#
프랑스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영국북아메리카에 대한 이권 일체를 넘기기 전까지 활발히 북아메리카를 식민지화했다. 미시시피 강 상류의 미네소타 등 넓은 땅도 자신들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이겨서 왕위를 차지한 스페인으로부터 이권을 넘겨받은 후 루이지애나라는 이름으로 거대 식민지로 만들었다.[4] 그리고 프랑스령 캐나다의 범위는 미국의 메인 주위스콘신, 일리노이, 인디애나, 미시간주로도 확장이 된다. 미국 자동차 이름인 캐딜락만 해도 프랑스 탐험가 카디악의 이름에서 따 왔고 디트로이트불어로 해협을 뜻하는 데트루아에서 왔으며, 중서부 유일의 국제도시 시카고는 쉬카카라는 불어 지명에서 유래했다. 이 땅들은 나중에 모두 영국에 넘긴다.

3. 프랑스계 캐나다인 유명인




4. 관련 문서



[1] 다만 라이시테의 영향으로 비종교인들도 어느정도 존재한다.[2] 캐나다에서 온대는 밴쿠버뿐이다. 밴쿠버 섬으로 가면 따뜻한 기후 덕에 종려나무 등 야자수도 볼 수 있긴 하고 4계가 그나마 뚜렷하다. 나머지 지방은 더럽게 길고 추운, 10월부터 4월까지의 겨울과 짧은 봄인 5월, 그리고 짧고 무더운 6월~8월까지의 두 달간의 여름, 그리고 다시 9월 한달 간 짧은 가을 뿐이다. 여름에는 40도가 넘어 쪄죽고 겨울에는 -40도가 넘어 얼어 죽으며 그나마 여름조차도 최저기온은 항상 15도 아래라 밤엔 춥다...[3] 당시 바스크인들은 유대인집시들과 마찬가지로 유럽 전역에서 극심한 핍박과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다.[4] 물론 직접 지배는 못하고 대부분 인디언 자치주였고 명목만 프랑스령이었다. 직접 통치한 곳은 뉴올리언스와 배턴루지 등 해안지대가 전부.[5] 엄밀히는 캐나다 동부와 가까운 작은 섬인 프랑스령 생피에르 미클롱 섬 출신인데 캐나다-프랑스 이중국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