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전차부대(한국전쟁)

 

1. 전차부대 창설의 역사
1.1. 육군 전차중대 창설
1.2. 육군 전차대대 창설
1.3. 해병대 전차중대 창설
1.4. 국군 전차부대 주요 전투
2. 전차부대 초기 운용장비
2.1.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2.2. M4A3E8 셔먼 중형전차
3. 한국전쟁 이후
3.1. 주력전차 보유
3.2. 기갑여단 창설
4. 기갑병과 제정 및 창설기념일
5. 육군본부 기갑감실 및 야전군 기갑참모부 신설
6. 기타


1. 전차부대 창설의 역사


한국전쟁 초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6.25 전쟁6.25 전쟁/전쟁의 전개'''를 참조하기 바란다.[1]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은 미국의 대한(對韓)군사원조정책(1948~1950)인 ‘국내 치안유지 수준, 북으로의 공격 억제’ 정책에 따라 공격용 무기인 전차를 보유하지 못했다.[2]
한국전쟁 이전에 창설된 육군 부대는 제1, 2, 3, 5, 6, 7, 8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 육군참모본부(현 육군본부) 직할 독립기갑연대(이후 수도경비사령부 배속)와 제17연대가 있었지만, 단 1대의 전차도 없었고, 미국이 원조해 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27대와 M2 / M3 하프트랙 병력수송장갑차 24대가 기갑연대에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에 비해 북한군은 85mm 포를 장착한 T-34-85 전차[3], T-34-76을 개량하여 ATO-41화염방사기를 장착한 OT-34 화염방사 전차, SU-76 76.2mm 자주포 등의 기갑장비도 보유하고 있었고 이 외에도 각종 장비를 소련으로부터 도입하여 기갑전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50년 6.25 전쟁 당시 국군과 북한군의 장비 상황은 국군이 북한군보다 매우 열세였으며 한국전쟁 초기 대한민국 국군은 남침의 선봉이었던 북한군 제9전차여단 등이 운용한 T-34-85 전차에 의해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물론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육군은 동부전선에서 6사단이 포병을 동원하여 방어전에 성공하였고 8사단도 대관령이라는 지세를 이용하여 군사력을 보존하고 강릉을 재탈환하는 등의 건실한 방어를 보여주었고 특히 6사단의 경우 북한군 제2군단(2사단, 12사단)을 초토화하는 전과를 세우면서 선전하였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는 옹진반도를 방어하던 육군참모본부 직할 17연대가 개전 직후 북한군의 화력에 밀려 해상으로 철수했고 1사단은 청단-개성-문산(임진강 선)에서 서울이 함락되기 전까지 방어에 성공하였으나, 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을 방어하고 있던 7사단의 경우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인 상황[4]에서도 의정부의 1연대는 선전했지만 포천의 9연대가 괴멸되면서 전선이 함께 붕괴되었다.[5] 이후 6월 27일 국군의 수뇌부인 신성모와 채병덕이 후방 3개사단(대구의 3사단 22연대, 대전의 2사단, 광주의 5사단)을 7사단 정면으로 축차 투입하는 실수를 범하면서 수도경비사령부(현 수기사) 3연대와 4개사단(2, 3, 5, 7사단)의 붕괴[6]를 가져왔다.
게다가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는 한강의 인도교가 폭파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방어하던 1, 6, 8사단이 후방 차단의 위협으로 인해 후퇴를 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M1 57mm 대전차포 등의 중장비를 포기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방어부대의 전투의지 상실[7]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6월 28일 새벽을 기점으로 북한군이 총공세를 펼치게 되고 오전 6시경에는 북한군 주력 전차부대의 서울 진입과 주요 시설 접수가 이루어지면서 서울을 점령당했다.
이후 국군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하고 흩어진 국군병력을 재편성하며 미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기 위해 1950년 6월 28일 ~ 7월 4일까지 육군 혼성 "수도경비사령부, 1, 2, 3, 7사단, 독립기갑연대, 김포전투사령부"가 북한군의 1, 3, 4, 6사단과 105땅크사단[8]에 맞서 싸운다. 이 전투가 한강 방어선 전투이다.
1950년 7월 5일과 7월 24일에는 사단 재편성이 단행되어 해체되지 않고 유지된 사단은 1사단, 6사단, 8사단의 3개 사단뿐이었으며, 3사단은 7월 5일부로 해체되었으나 예하 22, 23연대의 편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7월 24일에 다시 사단으로 재구성되었다. 이 4개 사단(1, 3, 6, 8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사단(2, 5, 7사단)은 해체되었다가 이후 재창설된다. 수도경비사령부는 7월 5일에 수도사단으로 개칭되었다.
이에 전차의 필요성을 절감한 대한민국 국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아 전차부대를 창설하기로 한다.

1.1. 육군 전차중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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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광주 상무대를 출발하는 M32 구난전차와 전차중대 장비
'''1950년 9월 말''', 육군본부가 전차부대 창설요원 소집명령(지명차출) 하달하였다.
'''1950년 10월 말''', 미군으로부터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6대를 교육용으로 인수하였다.
'''1950년 11월 10일''', 동래(부산)의 육군종합학교 교수부에 전차과를 개설. 초대 과장 장송주 소령 (국본 일반명령 제90호에 의거)
'''1950년 12월 18일''', 최초의 전차기간장병 교육개시 (장교 김종찬 소위 외 10명, 사병 28명)
이 당시 교육담당관 편성은 다음과 같다.
교육계획 담당: 曺南哲(조남철) 소령
조종교육 담당: 金東馥(김동복) 소령
포술교육 담당: 金 煥(김 환) 소령
정비교육 담당: 羅龍洙(나용수) 대위
교범번역 담당: 金東煥(김동환) 중위
'''1951년 1월 중순''', 중공군 개입으로, 미군이 6대의 교육용 전차인 M36 잭슨을 회수, 긴박한 전선에 우선 투입을 위해 교육과정이 해체되었다.
'''1951년 2월 6일''', 육군종합학교가 육군보병학교로 개편되었다.
'''1951년 2월 21일''', 보병사단에 전차중대가 인가되었다.
'''1951년 3월 중순''', 육군보병학교(육군종합학교에서 개칭 51.2.6부)가 미군으로부터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38대, M32 구난전차 2대를 인수하였다.
'''1951년 4월 4일''', 육군보병학교 교수부 전차과를 전차대대로 개편하고, 육군보병학교 학생연대에 교도전차대대를 창설, 중단되었던 전차장병 교육을 재개하였다. 전차 장교 초등 군사반(OBC# 1기), 전차병 승무원반 및 2종 정비 장교 및 2종 정비 장병반 (육본 교육지시 제31호에 의거), 이후 75mm 포를 장착한 M24 채피 경전차도 3개 소대분을 지원받아 교육용으로 운용했으나, 미군이 회수하여 대만으로 공여했다.
'''1951년 10월 5일''',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독립 전차중대로서 제51전차중대와 제52전차중대가 창설되었다. 뒤이어 1952년에 제53, 55, 56, 57, 58, 59 전차중대가 창설되었고, 1953년에 제60전차중대를 추가로 창설함으로써 대한민국 육군은 전쟁기간 중에 총 9개의 독립 전차중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51년 10월 28일''', 육군보병학교가 동래에서 광주로 이전하였다. 동년 11월20일까지 이동을 완료하였다.
'''1952년 1월 7일''', 육군보병학교 교수부 전차대대와 학생연대 전차대대를 통합하여, 보병학교 전차교육대로 개편하였다. (보병학교 일반명령 제2호에 의거)
'''1953년 5월 15일''', 육군 기갑학교가 창설되어 M36 대전차 자주포 36대, M32 구난전차 2대를 배치하고 본격적인 전차병 육성에 들어갔다.
보병학교 전차교육대를 해체하고 기갑학교 창설 (국일명(육) 제139호에 의거)
초대교장: 대령 朴鍾珉(박종민)
병력 : 장교: 152명, 사병: 593명
장비 :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36대, M32구난전차 2대
교육과정 : 고군반, 초군반, 전차장반, 승무원반, 2종정비 장사병반, 포탑정비반, 통신정비반
육군 독립 전차중대의 창설 시기
'''51중대'''
1951년 10월 5일
중대장 김도호 소령
국일명(육) 제143호에 의거
경남 동래
'''52중대'''
1951년 10월 5일
중대장 김동복 소령
국일명(육) 제143호에 의거
경남 동래
'''53중대'''
1952년 2월 1일
중대장 조칠성 대위
국일명(육) 제04호에 의거
전남 광주
'''54중대'''[9]
1952년 5월 18일
중대장 박승정 중위
국일명(육) 제42호에 의거
전남 광주
'''55중대'''
1952년 8월 1일
중대장 이원복 소령
국일명(육) 제93호에 의거
전남 광주
'''56중대'''
1952년 10월 5일
중대장 이근한 대위
국일명(육) 제149호에 의거
전남 광주
'''57중대'''
1952년 11월 8일
중대장 박우춘 대위
국일명(육) 제202호에 의거
전남 광주
'''58중대'''
1953년 2월 22일
중대장 이오철 대위
국일명(육) 제249호에 의거
전남 광주
'''60중대'''
1953년 2월 4일
중대장 김융식 대위
국일명(육) 제45호에 의거
전남 광주
제51전차중대가 제52전차중대 보다 먼저 창설되었는가 논쟁이 있는데, "육군본부 작전지시 제98호"를 보면, 육군 보병학교장에게 1951년 10월 5일 0시 부로 제52전차중대를 통합 지휘하라는 지시가 있기 때문에 2개 중대가 함께 창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51년 10월 7일 18.00 육군본부 작전지시 제98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一. 제51전차 중대장은

1. 1951년 10월 14일 08.00까지 선박에 승선 완료할 수 있도록 인원 및 장비를 자대 수송기관을 이용하여 동래(EP 0715) 부근 현 위치로부터 부산(EP 0588) 부근으로 이동하라.

2. 1951년 10월 15일 08.00까지 목적지 속초리(DT 6528)에 도착하도록 이동하라.

3. 목적지 도착과 동시에 제1군단장에게 배속한다.

4. 목적지 도착 시는 최신속한 방법으로 육군본부에 보고하라.

二. 육군 보병학교장은

1.1951년 10월 5일 00.00부로 제52전차중대를 통합 지휘하라.

2. 육군본부 명령이 유할 시까지 교육훈련을 실시하라.


1.2. 육군 전차대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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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와 전차부대 병사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1953년 7월 휴전이 될 때까지 중부전선을 중심으로 휴전선 전면에서 피아간의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진행되었고, 이 기간중에 육군의 독립 전차중대는 1951년 10월부터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한다.[10]
육군은 먼저 동해안 제1군단에는 제51, 56, 60 전차중대, 중부전선 제2군단에는 제52, 55, 58 전차중대, 그리고 금화, 철원, 연천지역의 육군 보병사단에는 제53, 57, 59 전차중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독립 중대 단위로 배치됨으로써 보급, 정비, 행정, 교육훈련 등에 많은 문제가 도출되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전차부대의 통합지휘와 군수지원, 집중적이고 융통성 있는 운용을 위하여 '''독립 전차중대를 전차대대로 통합'''하기로 하였다.
'''1953년 1월 25일'''에는 제52, 55, 58 독립 전차중대를 통합하여 '''제1전차대대'''가 창설되었고, 4월 5일에는 제51, 56, 60 독립 전차중대를 통합하여 '''제2전차대대'''가 창설되었으며, '''제3전차대대'''는 4월 25일에 제53, 57, 59 독립 전차중대를 통합하여 창설되었다.
각 전차대대에는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를 66대, 3개 전차대대에 총 198대를 편제하여 각 군단 직할 전차대대로 배치하였다. 당시 각 중대는 4개 소대로서 각 소대는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5대, 본부에 3대, M32 구난전차 1대로 편성하였다.
육군 독립 전차대대의 창설 시기
'''1대대'''
1953년 1월 25일
대대장 중령 朴道璟[11]
제52, 55, 58중대
국일명(육) 제24호에 의거
전남 광주
'''2대대'''
1953년 4월 5일
대대장 중령 曺南哲(조남철)
제51, 56, 60중대
국일명(육) 제82호에 의거
전남 광주
'''3대대'''
1953년 4월 25일
대대장 소령 金東馥(김동복)
제53, 57, 59중대
국일명(육) 제111호에 의거
강원 금화

1.3. 해병대 전차중대 창설


[image]
해병대의 M4 셔먼 중형전차
해병대는 육군보다[12] 먼저 전차중대를 창설했지만 전차와 전차병은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전차병 교육을 완료하고 해병대 전차중대가 본격적으로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6월 초순이었다.[13]
'''1951년 8월 25일''', 해병대 독립 전차중대를 편성하였다. (보유 전차 없음)
'''1951년 9월 10일''', 해군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11월 1일부터 해군 자동차학교에 입교하여 운전 교육을 받고 있던 189명의 교육생 중에서 20명을 차출하여, 그 해 8월 25일에 전차가 1대도 없는 상태에서 이미 편성된 전차중대에 배치한다. 이후 해군 자동차학교를 해병대가 인수하여 해병 기갑학교로 개창하고 차출된 20명이 비공식적으로 해병대 기갑학교 1기 교육생이 된다.
'''1951년 12월 초순''', 운전 교육을 받은 신병 12명의 보충을 받는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전차는 보유하지 못했다.
'''1951년 12월 중순''', 부산의 부전역에서 미 해병대로부터 교육용으로 M4A3E8 셔먼 이지에잇 중형전차 5대를 원조받는다.
'''1952년 1월 28일''', 해병 50명이 강원도 양구 해안 펀치볼[14]에 주둔해 있던 미 해병대 1사단 전차대대에 배치되어 전차 탑승요원 30명, 전차 정비병 10명, 전차 통신병 10명으로 나뉘어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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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1기 전차교육생 수료 기념 사진'''[15]
'''1952년 3월''', 미 해병대 1사단 전차대대와 함께 경기도 파주로 이동하여 교육 훈련을 지속하였다.
'''1952년 5월 4일''', 해병대 제1연대 전차대대의 수료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미 해병대로부터 M4A3E8 셔먼 중형전차 15대를 추가로 원조받고 나서야 비로소 대한민국 해병대는 완전한 전차중대를 편제할 수 있게 된다.
해병대 전차중대의 창설 과정
'''전차중대 편성 (창설)'''
1951년 8월 25일
보유 전차 없음
경남 부산
'''교육용 전차 인수'''
1951년 12월 중순
보유전차 5대
경남 부산
'''전차병 교육 개시'''
1952년 1월 28일
보유전차 5대
강원 양구
'''전차병 교육 수료 및 전차 인수'''
1952년 5월 4일
보유전차 20대
경기 파주
해병대 전차중대의 편성(창설)은 1951년 8월 25일에 진행되어 비록 육군(1951년 10월 5일)보다 2개월 가량 빨랐지만, 전차의 인수와 전차병 교육도 없이 형식적으로 편성만 이루어진 전차중대였으며, 제대로 된 전차병 교육을 이수하고 전차를 인수하여 완전한 전차중대를 편성한 건 육군보다 7개월 늦은 1952년 5월 4일이 되어서 이다. 게다가 육군은 해병대 보다도 14개월 먼저(1950년 10월 말) 교육용 전차를 인수하였고, 13개월 먼저(1950년 12월 18일) 교육을 시작하였다. 육군은 먼저 전차를 인수하고 전차병 교육의 과정을 거쳐 전차부대를 편성 창설했다. 더욱이 육군 전차중대가 해병대 전차중대 보다도 8개월이나 먼저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므로 육군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전차중대는 1951년 10월 5일에 창설된 제51, 제52전차중대이지만, 해병대 입장에서는 육군의 M36 잭슨은 전차가 아닌 대전차 자주포이며 (육군은 경전차로 취급하였다), 물론 전차병도 없고 단 1대의 전차도 보유하지 못한 전차중대의 창설이었다고는 하지만, 1951년 8월 25일에 전차부대를 편성하여 1952년 5월 4일에 M4A3E8 셔먼 중형전차를 배치한 해병대 제1연대 전차중대가 국군 최초라고 여긴다.

1.4. 국군 전차부대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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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을 지키는 제51전차중대와 제53전차중대의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대한민국 육군의 전차부대가 처음 전선에 투입된 것은 1951년 10월이었고 해병대의 전차부대가 처음 전선에 투입된 것은 1952년 6월이었다. M36 잭슨의 경우 본격적인 전차가 아니고 전차를 지원하는 대전차 자주포였기 때문에 북한군 전차와 실제적인 대전차 전투는 수행하지 못하였고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고지 쟁탈전과 보병 지원 임무만 수행하였다. 당시 미 육군의 전차부대가 서부지역에 집중 배치된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 육군 전차부대는 주로 동부지역에 배치되어 운용되었다.
육군 전차부대의 주요 전투로는 '동해안 지역의 월비산 및 351 고지 탈환전', '중부 화천지역의 689 고지, 오봉 고지, 삼각봉 고지, 지형능선 전투', '중서부 금화 연천지역의 노리 고지, 베티 고지, 쿠인 고지, 백마 고지'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해병대 전차중대는 1952년 5월 경기도 개풍군 장단면 수전포로 이동, 6월부터는 도라산 및 임진강 장단지구 전투에 투입되어 지금의 임진강 자유의 다리 건너 155고지(도라산 전망대)를 중심으로 사천강 하류 전초 진지까지 넓은 지역에서 해병대를 지원하였다. 1952년 7월에는 사천강을 도강하는 중공군 보병 1개 대대 병력을 격파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육군과 해병대의 각 전차부대들이 전선에 배치된 시점은 아래와 같다.
육군과 해병대 전차부대의 전선 배치 시기
'''51중대'''
1951년 10월 15일
부산 수영에서 선편으로 강원도 속초로 이동, 제1군단에 배속, 동해안 지역 전투참전
'''52중대'''
1952년 3월 5일
강원도 금화로 이동, 제2군단에 배속, 금화지구 전투참전
'''53중대'''
1952년 6월 24일

'''54중대'''
1952년 8월 29일

'''55중대'''
1952년 12월 18일

'''56중대'''
1952년 12월 16일

'''57중대'''
1952년 11월 13일

'''58중대'''
1953년 2월 22일

'''60중대'''
1953년 5월 7일

'''1대대'''
1953년 4월 5일
제2군단에 배속, 오봉산, 저격능선, 949고지, 수도고지, 피의능선, 화랑고지 전투에 참전
'''2대대'''
1953년 5월 15일
제1군단에 배속, 동해안 전투에 참전
'''3대대'''
1953년 6월 10일
미 제9군단에 배속, 연천,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
'''해병대'''
1952년 6월 초순
도라산 및 임진강 장단지구 전투에 참전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전차부대는 보병사단 전차중대 또는 군단 예하 전차대대로 편성되어 보병 작전을 지원하는 분산 운용 개념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창설 초기부터 소대단위로 전투를 벌이며 보병부대의 돌격전에 화력지원용으로 운용되었고, 전차를 대규모로 운용하는 개념이 발전되지 못하였다. 반대로 북한군은 처음부터 전차 여단/사단으로 편성 운용됨으로써 사단급, 연대급 전차 운용 개념이 형성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상군의 중심부대로 성장하였다.
그 후 초기 북한군의 전차 운용은 소련군의 기동전 사상을 바탕으로 공세적이고 대규모적인 전차 운용 개념이 발전하였고, 초기 대한민국 육군의 전차부대는 미군의 소모전 사상을 바탕으로 방어적인 전차 운용 개념이 발전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현대화된 전차 운용 개념과는 차이가 있음)

2. 전차부대 초기 운용장비


아래의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와 M4A3E8 셔먼 중형전차는 6.25 전쟁(한국전쟁) 중에 도입되어 미국으로 부터 공식적으로 공여받아 1950년대 말에서 길어도 1960년대까지는 대한민국 국군에서 운용한 장비였다.
이외에도 6.25 전쟁 중에는 T-34-85크롬웰 전차 등을 노획[16]하여 운용한 사례가 있다. 특히 크롬웰 전차의 경우 2013년에 발간된 '6.25 바다의 전우들'이라는 서적에서 해병대가 운용한 사진이 있다. 1951년 2월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제2차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할 당시 북한이 인천 월미도 방어에 배치한 야포 8문과 크롬웰 전차 1대를 노획하여 해병대가 운용했다.[17]

2.1.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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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M36 잭슨은 전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전차는 아니다.[18] M36 잭슨은 미군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전차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대전차 자주포’로서 영문 명도 '''"Tank Destroyer"'''라고 부른다.[19] 특히 티거 2, 티거, 판터 등 미군의 M4 셔먼을 능가하는 독일군의 전차들에 맞서기 위해 90mm 대전차포를 갖춰서 화력은 강력했으나, 상부 포탑이 개방되어 있고 장갑이 전차보다 얇아서 전면에서 싸우기보다는 매복하여 적전차를 기습하는 임무로 운영되는 등 방어력이 약한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2차 대전 당시 M10 울버린, M18 헬캣, M36 잭슨 등의 대전차 자주포를 운용했었고, M36 잭슨의 경우 90mm 대전차포를 주포로 쓰고 있었기에 당시의 한국군에게는 부족함이 없었다.[20]
M36 잭슨은 한국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에 인도된 최초의 "전차형" 장갑차량으로서, 본격적인 전차는 아니지만 전차가 아쉬웠던 당시 국군의 입장에서는 소중한 존재였으며, 기갑병 훈련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전후에도 한동안 운용되다가 1959년에 퇴역한 후에는 전방지역 고지에서 고정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용산 전쟁기념관과 상무대 육군 기계화학교에 실물이 전시되어있다.
'''자세한 내용은 M36 잭슨 문서를 참고.'''

2.2. M4A3E8 셔먼 중형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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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A3E8 셔먼 이지에잇'''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M24 채피 경전차[21], M26 퍼싱 중형전차[22], M46 패튼 중형전차[23] 외에도 M4 셔먼 중형전차[24]를 운용했다.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운용한 M4 셔먼 중형전차는 M4A3E8으로 M4 셔먼 계열의 완성형이다. 주포는 사격 시의 떨림방지 장치를 장착하여 HVAP 고속철갑탄을 사용 가능한 76.2mm 포로 교체하고 현가장치(서스펜션)를 HVSS로 개선하여 더욱 우수한 험지 주행능력과 주행 안정성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말인 1944년 겨울부터 유럽전선에서 운용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지에잇'''이라는 명칭은 정식 제식명칭이 아니며, 일선 전투부대에서 이 전차를 부를때 사용한 별명이다.
물론 M4 셔먼 중형전차는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티거 중전차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티거 전차를 만나면 정말 개박살났다. 영화 FURY(퓨리)의 전투 장면 참조, 이후 티거를 박살내는 건 2차대전 마지막에 등장하는 90mm 포를 장착한 M26 퍼싱이었다.
미군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총 679대의 M4A3E8 셔먼 중형전차를 가져왔고 성능과 전차병의 숙련도가 우수했기에 북한군의 T-34/85를 상대로도 선전을 펼쳤으며, M26 퍼싱 전차가 도착한 뒤에도 꾸준히 전투에 참가하였다. 1954년 휴전 후에 미군이 철수하면서 388대의 M4A3E8 셔먼 중형전차를 대한민국 국군에 인도하였다.
대한민국 육군은 1950년 11월에 미군에게서 도입한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를 경전차로 간주하고 교육용으로 수령해서 실전에서 운용하기도 했지만, ‘대전차 자주포’를 전차처럼 운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육군이 보유한 제대로 된 '''전차'''는 전후 미군에게서 인수한 M4A3E8 셔먼 중형전차가 '''최초'''라고 여긴다.
'''자세한 내용은 M4 셔먼 문서를 참고.'''

3. 한국전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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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1월 23일, 야전 훈련 중인 제1야전군 제5전차대대 M4A3E8

3.1. 주력전차 보유


6.25 전쟁(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육군은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216대와 ‘M4A3E8 셔먼 이지에잇 중형(重型)전차’ 388대로 총 604대의 전차와 대전차 자주포를 보유하게 된다. M4A3E8 셔먼 중형전차는 '''대한민국 육군 전차의 효시'''로 일컬어지며, 실질적인 전투력을 지닌 대한민국 육군의 첫 번째 실전용 '''주력 전차'''(MBT : 主力戰車, Main Battle Tank)였다.
대한민국 육군은 M4A3E8 셔먼 중형(重型)전차를 인수하면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차대대도 갖추게 되었다. '''1954년 2월 21일''' '''제5전차대대''' '''창설'''을 시작으로 제6, 7, 8, 9, 11, 12 전차대대가 6월 1일부터 8월 29일까지 창설되어 총 7개의 명실상부 전차대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각 군단 별로 1~2개의 전차대대를 배치할 수 있게 되었다.
육군은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전차대대'''를 M4A3E8 셔먼 중형(重型) 주력 전차를 최초로 배치받으며 창설된 '''제5전차대대'''로 여긴다. 그러나 제1전차대대는 자신들이 최초라고 생각한다. 경전차도 아닌 '대전차 자주포'이기는 하지만, '전차대대'라는 명칭을 제일 처음 사용한 건 제1전차대대이다.
1950년대 말 ~ 1960년대 초에는 M47 패튼도 순차적으로 도입되어 전차대대의 장비들이 개선되었으며, 비공식적이지만 1950년대 ~ 1960년대에는 M26 퍼싱과 M46 패튼도 극소수 운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는 M46 패튼 교육 훈련 사진과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서 M26 퍼싱과 M46 패튼을 소량 도입하여 운용했다고 언급하고 있고 1961년 6월 2일에 방영된 대한뉴스 316호에서 M46 패튼을 운용하고 있는 영상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의 M46 패튼은 1957년 전후로 퇴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에 영상의 전차는 육군의 것일 가능성이 크지만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 문건에서는 국군이 M46 패튼을 운용했는지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3.2. 기갑여단 창설


'''1968년 4월 1일'''에는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M48A1 패튼을 배치하며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독립 기갑여단인 제1기갑여단(제1, 5, 15전차대대)과 함께 제2기갑여단(제2, 6, 16전차대대)을 창설하면서 대한민국 국군은 본격적인 기갑부대를 갖추게 되었다. (초대 제1 및 2기갑여단장 손장래 장군)
제1기갑여단제2기갑여단과 함께 1971년 10월 4일에 제1군단에 배속되었으나 1972년 10월 13일에 제5군단으로 예속전환되었고, 여단 예하 제1전차대대가 군일명 제24호에 의하여 제2군단 직할 전차대대로서 예속전환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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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제 670호-국토 방위는 철통 같다(제1 및 2기갑 여단 창설 기념식)
1970년에 보유한 전차는 M47 전차 532대, M48 전차 140대로 도합 672대였으나, 1970년 10월 29일에 미국으로부터 '''M48A2C 전차'''를 1개 대대 분량 50대를 공여받아 기갑여단에 우선 배치하였고, 1972년 230대를 추가로 공여받으면서 총 952대의 전차를 보유하게 된다. 이를 미국 측과 협의하여 부대 편성에 전차 754대, 구난전차로 50대 개조, 그외 장비 33대로 총 837대를 운용하였고 나머지 115대의 M-47 전차는 동류전환하여 부속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972년까지 미국으로부터 총 280대의 M48A2C 전차가 지원되고 M113 APC 270대도 증강(1973년)받으면서 한국군은 1972년 9월 18일부터 1972년 11월 15일까지 M48A2C 전차를 기갑여단에 배치하며 기갑부대를 개편하기 시작하였는데, 1개 전차소대를 기존 5대에서 3대로, 전차중대를 16대에서 13대로, 전차대대를 50대에서 32~35대로 하였고, 이후 1개 기계화보병사단[26], 2개 기갑여단, 7개 군단 독립전차대대, 기갑학교 2개 전차대대 등 총 14개 전차대대와 19개 사단 전차중대로 개편을 실시하였다.
이후 육군의 초기 전차대대는 장비 등의 개편을 거듭하여 현재는 아래의 부대에 소속되어 있다.
육군 초기 전차대대의 2020년 현재 소속 부대
'''제1전차대대'''
제7보병사단 직할
'''제2전차대대'''
국방개혁 2.0으로 해체[27]
'''제3전차대대'''
제3보병사단 직할
'''제5전차대대'''
제1기갑여단 예하
'''제6전차대대'''
제2기갑여단 예하
'''제7전차대대'''
제1보병사단 직할
'''제8전차대대'''
수도기계화보병사단 26여단
'''제9전차대대'''
육군기계화학교
'''제11전차대대'''
육군기계화학교
'''제12전차대대'''
제11기계화보병사단 61여단
대한민국 육군 독립 기갑여단
'''고유명칭'''
'''상징명칭'''
'''창설일'''
'''창설지'''
'''상급부대'''
'''주둔지'''
'''전차대대'''
'''제1기갑여단'''
전격부대
1968년 4월 1일 오전
경기도 가평군 (1군단)
제5군단
경기도 포천시 강원도 철원군
제5, 15, 19 전차대대
'''제2기갑여단'''
충성부대
1968년 4월 1일 오후
경기도 양주시 (1군단)
제1군단
경기도 파주시
제6, 16, 29 전차대대
'''제3기갑여단'''
번개부대
1988년 9월 1일
광주광역시 (1야전군)
제2군단
강원도 홍천군
제80, 83 전차대대
'''제5기갑여단'''
철풍부대
1990년 12월 1일
경기도 연천군 (6군단)
제6군단
경기도 양주시 연천군
제38, 39, 55 전차대대
'''제102기갑여단'''
일출부대
2008년 10월 1일
강원도 양양군 (8군단)
제8군단
강원도 속초시 양양군 고성군
제33, 58 전차대대
'''제20기갑여단'''
독수리부대
2019년 11월 29일
강원도 홍천군 (3군단)
제3군단
강원도 홍천군
제37, 59 전차대대
'''제30기갑여단'''
필승부대
2020년 11월 30일
경기도 고양시 (1군단)
제1군단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제51, 52, 53 전차대대
*창설일 순

4. 기갑병과 제정 및 창설기념일


  • 기병병과 제정 : 1948년 12월 15일 국군조직법 제3장12조에 의거, 보병, 기병, 포병, 항공, 헌병 등, 제 병과 제정
  • 기갑병과 제정 : 6.25 전쟁 기간 중, 전차부대의 창설로 새로이 창설(기갑, 수송, 항공, 화학)되는 여러 병과와 함께 1952년 3월 ?일 국군조직법 제?장?조에 의거 제정
  • 기갑병과 창설기념일 :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51 및 52 독립전차중대의 창설일인 1951년 10월 5일로 지정

5. 육군본부 기갑감실 및 야전군 기갑참모부 신설


  • 1953년 2월 15일 : 육본 작전국 기갑과 설치. 초대과장 朴珠東(박주동) 중령. (육본 작전국 일일명령 제20호에 의거)
  • 1953년 9월 20일 : 육본 기갑감실 창설. 초대감 대리 曺南喆(조남철) 중령 (육본 일반명령 제99호에 의거)
  • 1953년 12월 15일 : 제1야전군사령부 기갑참모부 창설. 초대참모 曺南喆(조남철) 중령. (국방부 일반명령 제48호에 의거)

6. 기타


한국전쟁 중 한국군과 미군 및 UN군 그리고 중공군과 북한군이 운용한 전차는 7개 국가 약 2천여대이며, 그 종류도 다양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축소판을 연상 시켰다.
미군은 M24 채피, M4 셔먼, M26 퍼싱, M46 패튼 전차 등을 보유했으며, 영국군은 처칠 전차, 크롬웰 전차, 코멧 전차, 센추리온 전차 등을, 캐나다군과 필리핀군의 경우 M4 셔먼 전차를, 한국군은 M36 잭슨과 M4 셔먼을 보유하였다. 중공군은 당시 자체적으로 전차를 생산하지 못하였기에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T-34-85IS-2보유했고 북한도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소련에서 T-34-85와 화염방사전차 OT-34 등의 T-34 전차 계열 총 242대를 지원받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쟁기간 동안 150대 이상을 추가로 지원받아 총 400대 이상을 보유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에는 최소 11종류 이상의 전차가 등장했다.
그 중 미국의 M46 패튼 전차와 영국의 센츄리온 전차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한 신형 전차였으며 그 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전에 참여한 전차였다.
주력 전차 외에도 미군과 영국군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전투 기동지원장비를 운용하였다. 도랑이나 대전차구, 부서진 교량을 극복하기 위한 교량 가설 전차, 낙석이나 장애물을 파괴하고 험난한 지역을 개척하기 위한 전투공병 전차, 도로상에 전화선을 매설하는 전화선 매설 전차, 박격포 전차, 화염방사기 전차, 전면에 도저 삽날을 부착하여 진지를 구축할 수 있는 도저 장갑차, 전차 등이 고장났을 때 구난할 수 있는 구난전차 등이 있었다.
특히, 무엇보다도 논과 밭, 계단이 많고 하천과 계곡 등 기복과 굴곡이 많은 한국의 지형에서는 지형을 극복하면서 통로를 개척하는 '''"전투공병 장비"'''가 사막이나 도시 지형보다 더 필요하고 필수적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차부대는 점점 발전해나가면서 1950년대 말 이후로 M47 패튼, M48 패튼 등이 외국으로부터 도입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로는 한국형 전차인 K-1 전차를 시작으로 K-2 흑표 전차 등의 국산 기갑장비가 개발되어 운용되고 있다. 또한 1996년에는 불곰사업으로 러시아제 T-80U 전차 33대와 T-80UK 지휘용 전차 2대를 도입하여 2004년부터 실전 배치하여 2019년 현재도 운용 중이다.
우리 육군과 해병대는 1952년 말에는 중·고등학생을 모집하여 소년 전차병[28]으로 구성된 전차부대를 창설하였는데 이런 내용은 아직도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대한민국 국군에서 운용한 기갑장비들의 경우 '''아래의 틀'''을 확인하거나 '''대한민국 국군/장비''' 문서를 참고하는 것을 권장한다.


[1] 이하 기술(記述) 내용(목차 1~4)은 전 육군대학 교수 노양규 군사학 박사의 논문 “6.25전쟁 시 전차운용의 특징과 영향”을 참조, 인용하였다.[2] 이종학著 "6.25전쟁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1949년 신성모 장관이 미 군사고문단측에 189대의 M26퍼싱전차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당시 미군은 만약 남한에 공격용 중장비를 제공할 경우 이승만대통령이 북진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한국군의 무장을 경찰력수준의 치안력을 확보하는데 두었다.[3] 독일식 기준 표기법으로는 "T-34/85", 러시아식 표기방법으로는 "T-34-85"이다.[4] 이 축선은 계곡을 따라 개활지가 펼쳐지고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북한군의 침공 회랑으로 알맞은 곳이었으며, 북한군은 제3, 4, 15사단과 105전차여단 예하 2개 전차연대를 투입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그에 비해 방어하고 있던 국군의 전력은 유재흥 사단장이 이끄는 7사단의 2개 연대로서 북한군 전력의 1/10 수준에 불과했다.[5] 이 때 북한군은 개전 첫날 그대로 서울로 난입할 뻔했지만 전차의 통과가 불가능하여 2일을 낭비했다.[6] 다만 3사단 23연대는 후방에 건재했다.[7] 특히 경기도 방면(전방)의 1사단의 경우 임진강 선에서 방어를 하고 있어서 후퇴를 할 경우 한강 인도교나 한강철교를 건너서 후퇴를 해야했지만 이 때 1사단은 후퇴하라는 명령도 못들었다. 결국 장비를 전부 포기하고 개인별로 한강을 건너 탈출하면서 전투력의 60%이상을 상실했지만 그래도 제대를 유지하면서 퇴각하는데는 성공했으며 이후 김홍일 장군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서 병력을 재수습하여 서부전선 사단급 이상의 부대 중 유일하게 부대 건재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8] 서울함락 이후, 북한군 9전차여단은 1950년 7월 5일에 제105땅크사단으로 승격되었다.[9] 이후 59중대로 개칭[10] 해병대 전차중대의 경우 1952년 6월 초순부터 투입되었다.[11] 이름이 박도경 혹은 박도영으로 추정.[12] 당시 육군은 'M36 대전차 자주포'를 도입하여 '경전차'로 간주하고 1951년 10월 5일에 전차중대를 창설했다.[13] 이하 기술 내용(목차 1.3)은 "해군지 2010년 3-4월호, 5-6월호 전 해병대사령관 공정식 장군 인터뷰 기사"를 참조, 인용한 것이다.[14] 이 지역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높이 1,200m 안팎의 고지 능선에 오목하게 형성된 분지(남북 7.5 km, 동서 5.5 km)로서,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화채 그릇처럼 보였다고 하여 한 종군기자가 이 동부 전선의 전략적 요충지를 '펀치볼(Punch Bowl/화채 그릇)'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15] 해병대 제1연대 전차중대 초대 중대장 오상규 대위가 미 해병대 교관으로부터 수료증서를 받고 있다.[16] 1950년 7월21일 제6보병사단 7연대 3대대가 평남 개천에서 북한군 보급열차를 노획하고 열차 안에서 8대의 T-34-85를 노획하였다. 더불어 7월22일에는 7연대 1대대가 청천강가에서 김일성의 승용차를 노획하였다.링크 [17] 크롬웰은 알다시피 영국군이 센추리온 전차와 함께 운용했다. 한국전쟁 기간에 영국군이 중공군 또는 북한군에게 노획당하여 월미도 방어에서 북한군이 사용했다. 이후 해병대가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에 들어온 영국 해병대가 사전 고지도 없이 회수해 가 버렸다. 해군이 영국군에게 항의했지만, 결국 돌려받지는 못했다.[18] 구축전차(驅逐戰車)라고 불리기도 한다.[19] 미군도 M36 잭슨을 전차로 분류하지 않는다.[20] M36 전차의 특징은 제2차대전 시 주로 대전차 공격(對戰車攻擊)을 위하여 사용되었고 포탑(砲塔)의 철갑(鐵甲)이 전차에 비하여 약하고 포탑의 뚜껑이 없다. (한국전쟁사 제3권 제21장 중에서…)[21] 75mm 포를 장착한 미군의 M24 채피 전차는 북한군의 85mm 포를 장착한 소련제 T-34-85 전차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미군은 일본에서 긴급 조달한 제78전차대대 소속 전차소대의 M24 전차 8대를 1950년 7월 10일 전의-조치원 전선에 투입하여 북한군 T-34 전차와 대결하였지만 곧 2대가 파괴되었고 이튿날 북한군 T-34 전차 1대를 파괴하는 것에 성공하였으나 M24 전차 5대가 추가적으로 파괴되자 철수시켰다.[22] 90mm 포를 탑재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에서 중전차로 분류하였으나 전후 중형전차로 재분류되었다. 한국전에 배치된 M26 퍼싱은 총 300대 이며 T-34/85를 상대로 강력한 위력을 보여줬다. 한국전쟁 중 M26 퍼싱의 최초 기갑전은 다부동 전투였으며 북한군 T-34/85 전차들을 완전히 박살내 버린다. 그러나 M26 퍼싱은 40톤을 넘는 중량에는 상당히 부족한 500마력 포드 GAF 8기통 가솔린엔진 때문에 한국의 지형에서는 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23] 90mm 포를 탑재한 M26을 개량하여 810마력 콘티넨탈 AV-1790-3 12기통 가솔린엔진을 장착하였다. 높은 엔진 출력 덕분에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 지형에서도 우수한 전투력을 발휘했다.[24] 비록 76.2mm 포에 불과했으나, 장포신으로 화력이 강했고 HVAP 고속철갑탄을 사용하여 T-34/85 전차와의 교전에서도 선전했다.[25] 이하 - 국방사 1972.1~1981.12 참조, 인용[26] 수도기계화보병사단, 1973년 3월 21일에 M113 APC를 기반으로 대한민국 국군 최초로 기계화보병부대로 개편[27] 자세한 건 제3군단 참고.[28] 이하 원문의 출처는 "해군지 2010년 3-4월호, 5-6월호 전 해병대사령관 공정식 장군 인터뷰 기사"이다. - 육군이 소년 전차병을 모집할 때와 비슷한 시기에 해병대도 17~19세 사이의 소년 전차병 88명을 모집하여 1952년 8월, 경상남도 진해에서 소년 전차병 제1기 교육을 시작하였다. 교관은 모두 우리 해병대원이었으며 교육 기간 동안 전차는 한 대도 없이 이론 교육만 하였다. 원래 신문 모집 공고에 낸 대로, 미국 본토나 오키나와에 있는 미 해병대 기지에서 교육을 한 뒤 이들을 교관 요원으로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전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감에 따라 이들 소년 전차병들은 신병 교육 3개월, 특수교육(수송·통신) 4개월 훈련이 끝나면서 모두 자대 배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