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역사

 


1. 신라의 천년과 함께한 경주
2. 시대별 역사


1. 신라의 천년과 함께한 경주


신라의 수도 경주를 그래픽으로 재현한 모습.
경주는 신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다. 고구려백제가 계속 수도를 옮겼음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이라 불렸다. 신라 전성기 때 서라벌의 호수는 17만 8936호[1]로, 최대한으로 추산해보면 대략 90만의 인구가 나온다. 세계 최대의 양대 도시인 장안바그다드의 인구가 100만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은 숫자인데[2], 그래서 오늘날의 수도권처럼 도시를 넘어선 근교까지 포함한 것이라는 설, 골품제의 신분 유지를 이유로 호적만 경주에 두고 지방으로 이주한 인구까지 포함한 수치라는 설, 호가 아닌 구(口)의 잘못된 표기로 보고 35만여 명 정도로 파악해야 한다는 설, 당대 농업 개간 능력 고평가하는 관점에서 수도 경주의 면적을 다르게 계산해서 그 정도가 나온다고 보는 설 등이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가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을 감안하면 90만 인구는 경주와 경주 일대의 인구를 포함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같이 적힌 고구려 전성기 인구 105만과 백제 전성기 인구 76만도 실제로는 대성산성과 평양성 지역의 인구와 한성(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 일대의 인구만을 파악한 규모라는 것이 정설이다. 어쨌든 수십만 이상의 인구 규모는 그 당시로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수치임이 틀림없다. 일본 헤이안 시대 수도 헤이안쿄(지금의 교토)에는 20만 명의 인구가 살았는데 당시 교토와 경주의 면적이 비슷하고 신라와 일본의 체급 또한 엇비슷하기 때문에 경주 인구 100만설은 더욱 의문이 간다.
신라가 망한 이후 고려시대에도 한동안은 과거의 영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몽골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지금의 경주 시가지는 신라 시대의 경주 시가지와는 지리적으로 좀 차이가 있다. 신라시대의 경주 시가지 중심은 현대 경주 시가지의 남동쪽인데 주로 논밭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황룡사 등의 유적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민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에 땅을 파헤치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건설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점이다.
[image]
신라시대 경주 시가지의 모형. 도로와 주택들은 도시계획에 의해 바둑판 모양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앞 부분에 경주 월성이 보인다. 단, 월성 안의 건물 배치는 상상일 뿐이다. 월성 북쪽에는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그 동쪽에 황룡사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가 분황사다. 임해전에 붙어있는 안압지 등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통일신라시대가 기준인 것 같다. 또, 월성 남쪽 강 건너에 있는 절은 인용사다. 월성 남북쪽으로는 너비 23m의 주작대로가 있고, 그 북쪽 끝에 보이는 건물은 또 다른 신라의 궁궐터인 전랑지(대궁지)다. 다만 이 곳은 현대 경주의 시가지에 포함되어 버렸고[3] 발굴과 연구가 미흡해서 정확한 이름은 불명이다. 아직까지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2. 시대별 역사



2.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천 년 간 신라수도였고, 왕경 일대가 서라벌, 금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자세한 사항은 서라벌 문서 참조.
한편 안강읍 일대는 신라 초기 때 음즙벌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가 파사 이사금에 의해 정복되어 신라 소속의 비화현이 되었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일대는 모혜현, 북구 신광면 일대는 동잉음현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비화현, 모혜현, 동잉음현은 각각 안강현, 기계현, 신광현으로 개편되었다. 다만 신라의 이러한 천년 영광은 견훤의 서라벌 함락으로 큰 상처를 입으면서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하게 된다. 견훤은 서라벌을 함락하면서 서라벌의 재물만 약탈한 게 아니었다. 무기 만들 줄 아는 장인 및 궁녀 등등 포함하여 많은 이들을 포로로 잡아 수도 전주로 옮기게 되는데, 적어도 서라벌이 이런 식으로 그 주민의 조직적인 강제 이주를 당한 건 이 시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2. 고려


'''고려 시대 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경주
(慶州)
(천수 18)

안동대도독부
(安東大都督府)
(940)

동경
(東京)
(987)

경주
(慶州)
(1012)

동경
(東京)
(1030)

경주
(慶州)
(1204)

동경
(東京)
(1219)

계림부
(鷄林府)
(1308)
주로 크게는 '''경주'''와 '''동경'''이라고 불렸다. 그 외에도 안동, 계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전 신라시대와 비교하여 면적이 넓어졌다. 지금의 외동읍에 해당하는 임관군, 양북면에 해당하는 약장현을 통합하였다.
935년(천수 18년)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이후 태조 왕건에 의해 경주(慶州)라고 부르고 경순왕 김부를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이 지역 일대를 통치하게 했다. 이후 987년(성종 6년) 서경(평양직할시), 개경(개성시)과 함께 고려 3경을 이루고 왕이 가끔 행궁에도 방문했을 정도. 그러나 이후 1012년(현종 3년) 현종에 의해 경주로 격하되었지만 곧 1030년(현종 21년) 다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견훤의 서라벌 함락과 이후 경순왕의 개경 상경으로 주민이 많이 유출된 이래로, 적어도 신라 시대에 비해선 인구는 크게 줄었던 게 분명하다.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새벽에 작은 누(樓) 머리에 일어나서, 발[箔]을 걷고 하늘을 쳐다본다. 누 아래는 곧 계림이니, 기괴한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고. 늙은 나무에 연기가 부슬부슬, 일만호(一萬戶)에 비꼈네. 흰 구름은 동쪽 산에 날고, 푸른 물은 서쪽 포구로 달린다. 우뚝 솟은 황금절들, 서로 바라뵈며 아침 햇빛 따사롭구나. 반월성(半月城) 가운데 빽빽하게 서 있는, 꽃과 대[竹] 이제는 주인이 가고 없네.

(중략)

멀리 조망하려고 서루(西樓)에 오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 남쪽 트인 곳에 인가가 조밀하며, 문물은 신라의 옛 땅일세. 금찰(金刹)들이 인가 사이에 섞여 있어 열에 아홉은 되는 듯. 성적(聖跡)이 세속에 섞여 있어서, 지나가는 손이 구경하기에 바쁘도다. 큰 저택과 아름다운 절들이, 전란(戰亂) 뒤엔 들밭을 이루었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 경상도 경주부 백률사

정지상은 고려 중기 김부식과 동시대 사람이고 이후 기록은 고려 말 14세기 문인 박효수의 시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신라의 왕궁이었던 경주 월성은 무너져 대나무이 무성해졌지만 시가지는 거대했고 황금빛 사찰이 빛나 지나가는 사람이 구경하기 바쁜 화려한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몽골 전쟁으로 많은 큰 건물들이 폐허로 남은 상황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1204년(신종 7년) 무신정권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또 다시 경주로 강등되었다.[4] 그러나 1219년(고종 6년) 다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1308년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를 제후국 체재로 개편하라는 원의 압박으로 인해 계림부(鷄林府)로 격하되었다. 당시에 고려의 경(京) 다음으로 고려의 최상급 행정기관인 목(牧)도 제후국 체제로 개편되면서 없어지는 판국이다 보니 부 정도만 해도 나름 위상은 있는 편이었다.
흔히 무신정권 기간에 신라부흥운동으로 인해 경주는 서울에 밀려 3경(京)의 위상을 잃었다고 하는데,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이 일어난지 겨우 15년이 지나 다시 동경이라 불리며 원간섭기에 황제국만 가질 수 있었던 행정구역이 제후국의 위치에 걸맞도록 격하되기 전까지 부수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2.3. 조선


'''조선 시대 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계림부
(鷄林府)
(1392)

경주부
(慶州府)
(1394)
1392년 계림부라 불렸던 경주는 1394년 경주부(府)로 승격되어 평양, 함흥 등과 더불어 지방 행정구역 중에서는 최상급 행정구역이 되었다. 경상도 감영(도청)을 이 곳에 두었지만 곧 상주로 이전했다. 1895년에 경주군이 되었다.
고려 시대와 비교하여 지금의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에 해당하는 안강현, 지금의 포항시 기계면에 해당하는 기계현, 포항시 신광면에 해당하는 신광현, 경산시 자인면에 해당하는 자인현 4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조선 시대에 특기할 사항으로는 이언적의 본향으로 지금의 양동마을로까지 이어지는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는 점이다. 흔히 경주에 널려 있는 불교 유적 때문에 경주 = 불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교에서도 꽤나 유서 깊은 지역이다. 이황과 더불어 영남 학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이언적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주는 양반 문화가 발전한 지역이었다.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는 증거로 1909년 호구 조사의 결과에 있는데, 당시 경주 내에서 양반이 2,599호로 전국에서 양반이 제일 많았다. 인구 비율로 보나 전체 인구로 보나 대도시 중에서는 경주보다 양반이 많은 곳은 '''없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사상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동학의 탄생지라는 점.
1906년 기계면과 신광면이 흥해군으로, 죽장면이 청하군으로, 동해면이 장기군으로[5], 외남면(현 울주군 두동면, 두서면)이 울산군에 편입되었다.[6]

2.4.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이후 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경주군
(慶州郡, 1914)

경주시
(1955)
월성군
(月城郡, 1955)

경주시
경주군
(1989)

'''경주시
(1995)'''
1914년 양남면과 양북면이 환원되었다. 1931년 경주면이 경주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양북면 일부가 감포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 초기에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었으나 점차적으로 부산, 대구광역시가 성장함으로 인해 경주는 전국 대도시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경상도 내에서의 주요 도시로만 기능했다.

2.5. 대한민국


1949년 강서면이 안강읍으로 승격되었다.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일대가 경주시로 승격되었으며, 경주군의 잔여지역을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였다.[7] 1973년 월성군 서면 일부를 건천읍으로 승격하고 월성군 내남면 율리를 경주시에 편입하였다. 1980년 외동면을 외동읍으로 승격하였다. 1987년 월성군 현곡면 금장2리가 경주시로 편입되어 석장동이 되었다.
1989년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34년만에 명칭이 환원되었다.
1995년 경주시와 경주군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월성'이란 명칭은 '월성 원자력 발전소' 등의 이름으로, 아직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950년 한국전쟁 초기부터 끝까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낙동강 방어선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사수된 덕분이다. 낙동강 전선이 최대로 밀렸을 때, 경주 북쪽 안강까지 내려왔으나 결국 경주는 방어선 안에서 지켜졌다. 그래서 경주에는 국보급 문화재들이 파괴당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60년대 이후 산업화가 되면서 인근 포항, 울산보다 산업화 면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항구도시인 포항, 울산보다 입지가 밀리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문화재 보호 때문에 거의 도시 전체가 개발이 제한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동안 경부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혜택을 받지 못했고, 관광을 제외하면 성장 동력이 없었다. 포항, 울산, 그리고 부산, 대구로 인구가 많이 유출되었다. 또한 2010년대 들어서는 아예 영남권 자체가 추락하는 추세 때문에 정체가 지속되었고 이때부터 지진이 연달아 터짐에 따라 앞으로의 전망이 영 불안하다.
[1] 삼국유사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戶"[2] 학계는 통일신라의 전체 인구를 최대 400만 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는데 전체 인구 400만 명 중 90만 명에 가까운 숫자가 경주와 그 근처에서 거주했다는 것은 역시 전근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치이다. 일단 한 곳에 집중적으로 밀집된 100만에 가까운 인구를 먹여살릴려면 그만한 엄청난 규모의 인근 곡창지대와 도로, 각종 시설 등의 인프라가 필요한 터인데 경주와 그 일대에서 이러한 인프라에 관련한 대규모 유적이 발견된 예는 매우 드물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라는 높은 인구 밀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굶주리지 않고 살았는지 의문이다. 비슷한 대규모 도시인 고대 로마 등지에서 아직도 무수한 수도시설과 도로 등의 거주편의시설이 남아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의문이 가시지 않는 사실.[3] 현재에도 거주지 및 경주고등학교, 알천남로 일대의 주유소와 이런저런 철물점 등등이 전랑지 바로 옆에 붙어있다. 더 동쪽에는 경주소방서 본부까지 1996년 이전해 현재까지 이어져온다.[4] 강등된 것도 모자라 경상도의 이름도 바꿔버렸다. 경상도의 경(慶)을 삭제시켜 아예 경상도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부르기까지 했다.[5] 편입 직후 양북면과 양남면으로 분리.[6] 환원된 양남면과 양북면을 제외하더라도 무려 면적상으로는 현재 포항시 북구의 과반, 울주군에서도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들이 떨어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큰 면적을 자랑하는 경주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그만큼 주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조선시대 행정구역 상으로는 큰 고을일수록 관할지가 넓었기 때문.[7] 신라의 도성 이름인 '경주 월성'에서 따온 것이다. 대구-달성, 수원-화성과 비슷한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