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신라)
1. 개요
신라의 진평왕~선덕여왕 시기의 왕족이며 신라의 추존 국왕. 일반에는 김용춘으로 더 알려져 있다.[5]
신라의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이자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로, 제29대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이다. 비록 본인은 사촌에게 밀려 왕위 계승이 물건너가면서 그냥 귀족으로 격하당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TOP OF 진골인 데다가 생전에는 당대의 요직을 역임하고 사후에는 아들 태종 무열왕이 왕까지 해먹고 손자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했으니 최종적으로 인생의 승리자라 할 만하다. 왕위에서 밀려난 왕족이 숙청당하지 않고 이렇게나 대우받았던 것은 자못 기이한 일이지만, 그 자세한 이유는 아래에서. 아들이 왕이 되어 추증해준 시호는 문흥대왕(文興大王)이다.
알려진 가장 유명한 업적은 경주의 랜드마크인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감독한 일(645~646)이지만, 낭비성에서 있었던 김유신의 데뷔 무대(629)도 바로 이 사람이 감독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로써 김용수와 김서현, 그 다음 세대인 김춘추와 김유신, 나아가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으니... 그야말로 신라 역사의 빼놓을 수 없는 고리. 비형의 실존 모티프로 추정되기도 한다.
2. 이름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용수'를 '용춘'이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빈도상으로 본다면 삼국사기에서는 용수가 2건에 용춘이 3건이고,[6] 삼국유사에서는 용수가 1건에 용춘이 2건[7] 으로 둘 모두 근소하게 용춘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온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는 김용춘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1964년 도굴되었다가 2년 뒤에 되찾은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에 따르면 오히려 김용수 쪽이 정식 이름으로 보인다. 이 기록은 후대의 삼국유사와도 완벽히 교차검증된다.
요극일, 『황룡사 찰주본기』, 872년 음 11월 25일.}}}이에 감독관인 이간 용수(龍樹)와 백제에서 온 대장(大匠) 아비(阿非) 등에게 명하여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이 탑을 만들게 했다. 선덕왕 14년 세차 을사(643)에 처음 건조하여 4월 ▨▨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 모두 마치니 철반(鐵盤) 이상이 높이 7보에 이하가 높이 30보 3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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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삼국유사』 탑상 황룡사구층탑, 1281년경.}}}이에 보물과 비단으로 백제에 요청하니 이름이 아비지(阿非知)인 장인이 명을 받고 와서 나무와 돌을 다루었고, 이간 용춘(龍春)이 일을 맡아서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렸다. …… 마침내 그 탑을 완성하였다. 찰주기에는 "철반 이상의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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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 쪽이 정식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이외에도 더 있는데, 바로 이 시기 신라 왕실의 작명 풍조 때문이다. 당시 신라 왕실의 이름들을 정리해보면 '''왕이 곧 부처'''라는 생각으로 고대 인도의 실제 석가모니(싯다르타)의 가족 이름을 그대로 본뜨고 있었다. 진평왕 백정(白淨)은 싯다르타의 아버지, 그 아내인 마야(摩耶)는 싯다르타의 어머니, 그 동생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은 모두 싯다르타의 숙부들의 이름이었다. 이외에도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銅輪)과 숙부인 사륜(舍輪)은 전륜성왕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즉 당시 신라의 왕가에서는 철저히 불교의 전승에 의거해 이름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8]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용수라는 이름에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3세기 초에 살았던 대승 불교의 대조사 나가르주나(Nagarjuna)의 이름이 바로 한자로 용수(龍樹)이기 때문이다.[9] 따라서 용수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따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용춘이라는 이름은 이와 같은 불교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다른 측면에서의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특수한 의도 없이 지은 이름이라기에는 그가 단순한 왕족도 아닌 엄연한 예비 왕위계승자였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한편, 대승 불교의 대척점에 있는 부파 불교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비담이 있기 때문에 둘이 형제 관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최치원, 『성주사 낭혜화상비』, 9세기 말}}}곧 북행하여 종신토록 지낼 곳을 찾아다녔는데, 마침 왕자 흔(昕)이 은퇴하여 산중의 재상이 되었으니 우연히 바라는 바가 합치되어 이르길 "스님과 나는 모두 조상이 용수(龍樹) 을찬(乙粲)이니 스님은 안팎으로 모두 용수의 자손이십니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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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자 문화권에서의 피휘 관습을 고려한다면 이 사람의 정식 이름이 '용춘(龍春)'일 경우 아들인 '춘추(春秋)'가 같은 봄 춘(春) 자를 써서 그 이름을 범하게 된다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점.[10] 다만 신라 중대에 피휘라는 관습이 얼마나 어떻게 존재하였는지 애매하고,[11] 피휘에 대한 인식이 고려 전기를 기점으로 강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오히려 아버지의 이름 일부를 물려받는 통자(通字) 관습이 있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부분.
당시 삼국에서는 용수와 용춘만이 아니라 흠순과 흠춘, 관장과 관창, 성충과 정충, 비사벌과 비자벌, 미조와 미추, 주몽과 추모처럼 무성 치경 마찰음(s), 유성 치경 마찰음(z), 무성 치경 파찰음(ts), 유성 치경 파찰음(dz)이 분리되지 않고 혼용되는 사례가 일관적으로 나타난다.[12] 결론적으로 이 인물의 이름은 '용수'라고 하는 것이 올바르며, '용춘'이라는 기록은 용수의 음차에 따른 이표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2.1. 필사본 화랑세기
그런데 현전하는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김용수와 김용춘을 같은 사람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형제관계인 서로 다른 두 사람으로 나누어 설정하면서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다. 둘이 형제가 맞다는 근거로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일운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동일인물에 대한 이칭으로 만은 볼 수 없다는 것, 용수와 용춘이 동일인물일 경우 7년 만에 이찬에서 파진찬으로 2단계가 강등된 것인데 이는 가능성이 낮다는 점 등이 있다.[13]
문제는 위에서 본 것처럼 1972년에 발굴된 황룡사 찰주본기가 새롭게 판독되면서 황룡사 구층목탑을 감독한 김용춘이 김용수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어 화랑세기의 '용수·용춘 형제설'은 폭망했다. 지금은 이게 오히려 필사본 화랑세기가 박창화의 위작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 가운데 하나.
이에 진서론 진영에서 나온 반론은 찰주본기의 용수 표기가 잘못이라는 주장[14] 과 화랑세기의 요절 기록이 잘못이라는 주장[15] 으로 나뉜다. 일단 화랑세기에서 용춘이 죽은 해는 명시되어 있지만 용수가 죽은 해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용수가 죽으며 부인(천명공주)과 아들(김춘추)을 용춘에게 맡겼다는 말이 나오고 이후 선덕공주가 즉위하였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문맥상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용수가 죽은 것처럼 해석된다. 그래서 찰주본기에 공사 감독자가 용춘으로 적히는 것이 맞지만 용수로 단순오기 되었다는 것이 전자의 주장이다. 당시 신라인들이 단순오기를 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말 그대로 가능성이다. 후자는 찰주본기의 용수 표기가 맞다고 인정하고 이때 용수도 살아있었다고 주장한다.[16] 다만 이 경우 '''이미 애를 셋 넘게 두었을 만큼 다 자라 독립한 아들'''[17] 을 동생에게 입적시켰다는 말이 되는데, 그 이유는 화랑세기에 용춘이 서자밖에 없어서 김춘추가 적자로 입적되었다고 나와있다. 그러므로 후자의 주장대로 용수가 죽지 않고 이때까지 살아서 공사를 감독했다고 본다면 말은 된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가설을 위한 가설으로 보여질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2.2. 비형랑 설화와의 관계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적 인물인 비형과 동일인물로 보는 해석도 있다. 둘 모두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점도 그렇고, 진평왕의 총애를 받았던 점, 그리고 비형이 하룻밤 사이 귀교(鬼橋)를 놓고 그 부하 길달도 길달문을 순식간에 세웠다는 건립 전설처럼, 용수도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운 행적이 있어 공통적으로 토목사업에서 전승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나타나는 도깨비 관련 설화들의 기이한 기술력과도 상통한다. 그와 김춘추가 성골이 아니고 진골인 이유도 비형랑 설화의 내용대로, 성골일 진지왕이 자신보다 신분이 한참 낮은 여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 그렇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무열왕의 차남으로 용수에게는 손자인 김인문의 묘지석에는 "조부 문흥대왕께서는 기회를 포착함에 귀신같음이 많았다(知機其神)"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기회를 포착함이 귀신같다는 말은 주역의 계사 하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는 신라 중대왕권의 조상인 용수를 선양하는 구절이지만, 선양하는 데 있어 '신기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에서도 귀신들을 부렸다는 비형랑 설화와 어느 정도 일치점을 찾을 수 있어 흥미로운 대목이다.[18]
3. 일대기
3.1. 왕위에서 밀려난 왕자
태어난 연대는 대체로 57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일단 아버지 진지왕이 죽은 579년 이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 진지왕이 555년 즈음 태어났기에[19] 그렇다면 진지왕이 15세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해도 569년 즈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김기흥 등 삼국유사의 비형랑과 용수를 강하게 동일시하는 쪽에서는 용수가 진지왕의 유복자로서 대략 579~580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보기도 한다.[20]
어머니는 지도부인 박씨인데, 기오공(起烏公)의 딸로서 박씨 성에 상당하는 진골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때문에 진지왕이 진골과 결혼한 것 때문에 성골로서의 자격을 잃고 왕위에서 쫓겨났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월명부인 박씨에게서 태어난 진덕여왕이 성골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신라 중고기의 왕비들이 대부분 박씨라는 점에서 이 주장은 근래 부정되고 있다.[21] 오히려 왕위 계승 과정에서 밀려난 결과 진지왕계(사륜계)가 진골로 족강되었다고 보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 진지왕이 너무 일찍 죽고 사촌형 진평왕에게 왕위가 돌아가면서 용수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22] 이에 따라 용수는 성장 과정에서 진평왕계(동륜계) 왕실로부터 얼마간 경원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형과 용수를 강하게 동일시하는 쪽에서는 비형이 밤마다 월성 밖으로 나가서 귀신들과 놀았다는 설화의 내용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 각색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비형랑 설화에는 진평왕이 비형을 궁중으로 데려와 기르고, 나이 15세가 되자 집사로 임명했다고 하는 등 비형이 일방적으로 경원시되었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 내용도 함께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비형과 함께 놀았다는 귀신들을 진지왕의 지지세력으로 보고, 진평왕이 비형(용수)을 통해 이러한 진지왕의 지지세력을 포섭하려 한 것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대왕의 꿈에 등장하는 비형의 의적 집단인 '귀문단'은 이러한 해석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것.
3.2. 결혼, 그리고 부상하다
이 가운데 후자의 해석에 더욱 설득력을 실어주는 근거가 김용수와 천명공주 사이의 결혼이다. 당시 신라에서 혼인이 가지는 사회적 함의[23] 를 생각해보면 이는 사실상 용수가 진평왕의 잠정적 후계자 반열에 오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용수가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왕자'라는 존재 자체로 군주의 왕위를 위협하는 요소임에도 이처럼 파격적으로 후대받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진평왕 자신이 아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위의 이름 항목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평왕과 그 가족은 싯다르타의 가족을 Ctrl CV한 모델이었다. 진평왕의 이름은 싯다르타의 아버지, 아내는 싯다르타의 어머니를 베낀 것으로 이제 아들만 하나 낳으면 '이 아이가 싯다르타다! 싯다르타는 전륜성왕이 될 운명이었다! 따라서 이 아이가 전륜성왕이다!'라는 왕권을 신성화하는 삼단논법이 완성되는데 어째 줄줄이 딸만 태어났으니...
그래도 진평왕이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닌 게, 용수는 그가 24~34세 즈음에 해당하는 603년에 천명공주에게서 김춘추를 낳았는데 이 즈음에 결혼이 이루어졌다고 치면 용수는 최소 20대 초중반의 당시 기준으로 노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진평왕은 40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후계구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였다.[24] 이후로도 새로 승만부인을 들여보지만 여전히 아들 안생겼기에 진평왕도 나름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결혼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용수는 그 덕분에 본격적으로 팔자가 펴기 시작했다. 용수는 다시 김춘추가 태어나고 20년이 지난 622년에 궁전의 사무를 담당하는 상당히 중요한 직책인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신라 정치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이 시점에 용수의 관등을 이찬(2급)으로 기재하고 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629년에는 용수가 그보다 낮은 파진찬(4급)으로 등장하기에 이 관등은 훗날 이찬으로 올라간 것을 가지고 소급 기재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44년}}}2월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았다. 일찍이 왕 7년에 대궁(大宮) · 양궁(梁宮) · 사량궁(沙粱宮) 세 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내성사신 한 사람을 두어 세 궁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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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진평왕 직후엔 성골 여자가 진골 남자보단 왕위계승의 우선순위가 높았는지 얼마간의 여왕 시대가 이어졌지만 이미 성골 남성이 없어서 더 이상의 성골이 나타날 수 없던 상황이었기에 사실상 용수나 아들 김춘추의 즉위는 시간 문제였다.
3.3. 정치적 입지의 강화
그래서 어느덧 50대를 바라보는 용수가 임명된 '내성사신'이란 어떤 관직인가? 삼국사기를 기반으로 추론하면 내성사신은 궁궐을 구성하는 건물 · 임야의 관리, 궁궐에서 소요되는 물품의 조달 · 제작 · 보관, 궁궐에 부속된 농장 · 공장의 관리, 궁궐에서 이루어지는 제사 · 음악 · 요리 · 빨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관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조직이었다. 단적으로 삼국사기의 직관지 3권 가운데 한 권이 통째로 내성사신의 관할이다.[25]
더욱이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629년에는 이찬 임말리(任末里)의 총괄 아래 전선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때 용수와 함께한 사람이 공교롭게도 김서현과 그의 아들 김유신이었다. 전투의 전개 과정에는 김유신에 대한 노골적인 미화가 상당히 섞여 있지만, 이러한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들과 함께 전투에서 활동했던 것은 이후 양자가 친교를 맺어 두 가문이 결합하는 단초가 되었다. 또한 두 가문은 전투의 승리를 통해 군부에서의 입지를 다지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때가 김유신의 나이 35세, 김춘추의 나이 27세였다.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건복 46년}}}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 파진찬 용춘 · 백룡, 소판 대인 · 서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신은 그때 중당당주(中幢幢主)였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패했습니다. 제가 평생 충성하고 효도하기로 스스로 약속했으니 전쟁에 임해서는 용맹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략 듣기로 '옷깃을 바루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지게 된다'고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곧 말에 올라 검을 뽑고 구덩이를 넘어 적진을 드나들면서 장군을 베어 그 머리를 들고 왔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보고는 승기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해 5천여 급을 참살하고 1천 인을 사로잡으니, 성 안에서는 두려워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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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선덕여왕 4년(635)에는 왕명으로 지방을 돌아다니며 감찰하고, 나중에는 백제의 엔지니어인 아비지(阿非知)를 포함한 신라장인 200여 명과 함께 서라벌[26] 에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한다.
3.4. 사후
황룡사 9층 목탑은 645년에 건립되었고, 황룡사 9층 목탑 찰주기에 따르면 건립 책임자로 기록되어 있음을 찾을 수 있기에 최소한 645년에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아들인 김춘추가 즉위한 후 '추봉'된 것으로 보아 김춘추가 즉위하는 654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몰년은 알 수 없다.
무덤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지만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이므로 무열왕릉 뒤편에 줄지어 있는, 무열왕릉보다 훨씬 더 큰 무덤이 바로 김용춘의 무덤(문흥대왕릉)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4. 각종 매체에서의 김용춘
4.1. 드라마 선덕여왕
화랑세기 필사본의 설정을 채택했기 때문에 김용수와 김용춘이 별개의 인물로 나온다.
4.1.1. 선덕여왕에서의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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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정철이 연기했다.
진지왕의 아들이자 김용춘의 형으로, 천명공주와 결혼했다. 진평왕은 미실을 견재하고 후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마인 용수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화백회의에서 미실파인 상대등 세종을 비롯해 하종, 미생 등이 용수는 폐주 진지왕의 아들인 탓에 진골로 족강(族降)된 상태인데다 여태 신라를 위해 변변한 공을 세우지 못했다면서 용수가 태자 자리를 거절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용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신라를 위해 공을 세우겠다면서 백제에게 빼앗긴 모산성(母山城)[27] 을 탈환하는 선봉부대에 서겠다고 화백회의에서 공헌했다.
그러나 모산성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보니 탈환을 하기 위해서는 선봉대의 선전이 필수였고, 자칫하면 선봉대가 전멸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래저래 무리한 작전이었다. 이에 아내인 천명공주와 동생 용춘은 진평왕에게 하소연하고 별도로 용수를 말리려고 애썼으나 이미 화백회의에서 공언해버린 뒤라 소용없었다. 결국 천명공주는 용수가 입을 갑옷을 다듬고, 용수의 갑옷에 징표인 흰 옥패를 다는 것으로 무운을 기원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미실과 생각이 일치한 병부령 설원은 전투 중에 은밀히 용수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신라의 군대가 모산성으로 진격했고 용수가 이끄는 선봉대와 백제의 군대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28] 놀랍게도 용수의 용맹함에 힘입어 선봉대가 승리했으나 설원이 사전에 준비시킨 암살자가 화살을 날려 용수를 쏘고 말았다. 결국 용수는 사망했고 신라 왕궁에 승전보가 도착했으나 천명공주에게는 화살에 맞아 쪼개진 피묻은 옥패만이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이 용수와 천명공주의 금술이 좋았는지 천명공주의 뱃속에는 이미 두 사람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4.1.2. 선덕여왕에서의 김용춘
김용춘(선덕여왕) 문서로.
4.2. 드라마 대왕의 꿈
담당 배우는 정동환. 여기서는 김춘추의 아버지로 정상적으로 나온다. 이복동생인 비형랑이 폐위된 진지왕 대신 김용춘이나 김춘추를 왕위로 세위려고 하는 걸 알고 있지만, 일단은 반대하며 왕위에 관심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김서현과는 친구 사이인듯 하며 그의 아들인 김유신을 자신에 집에 머물게 하며 화랑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
사실 왕위에 관심 없는 듯한 모습은 살아남기 위한 훼이크로, 살아남아 빼앗긴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 중. 국반 갈문왕에게 채찍질까지 당하는 등 수모를 겪으면서도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이 시대의 고개 숙인 아버지상.
이후 36회에서 대야성 전투 중 의자왕에 의해 전사하고 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드라마상의 설정일 뿐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등 각종 기록을 봐도 김용춘이 대야성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은 '''없다'''. 의자왕의 손에 죽기 전에 실제로는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김춘추에게 처절한 복수를 당하는 검일을 죽인다. 사실은 김용춘이 진덕여왕 대까지 나오려고 했으나 배우 정동환의 스케쥴 문제로 이른 퇴장을 한 것이라고 한다. 검일도 본래는 배우 이병욱이 카메오 출연이라 잠깐 나오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었던 것.
4.3. 드라마 연개소문
담당 배우는 태조 왕건의 신숭겸으로 유명한 김형일. 이 작품에서는 어린 시절 연개소문이 김유신 가문의 노복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몸종으로 일했는데, 그를 비롯한 김유신, 흠순 형제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자격으로 교육한 것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