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위홍
1. 개요
남북국시대 신라 후기의 왕족이자 권신이며 추존 국왕.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동생이자 제49대 헌강왕,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의 숙부로 크게 보면 신라 멸망에 일조한 인물. '각간 위홍'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각간(이벌찬)은 신라 17관등 중 1품에 해당하는 관등이다. 사후에는 대각간으로 추숭되었다.
2. 생애
초기의 생애는 역사서에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고 짤막하게 전해진다. 경문왕 2년(872년)에 이찬(伊飡)이 되었고 같은 해에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수할 때 황룡사성전감수성탑사 수병부령평장사(黃龍寺成典監脩成塔事 守兵部令平章事)라는 벼슬을 받고 총책임자를 맡았다.[6] 그리고 잠시 동안 태제(太弟)[7] 로 있었다. 헌강왕 때 최고위직인 상대등 위진(魏珍)이 물러나자 후임으로 상대등에 올랐다[8] . 위홍의 관직 위치상에서 보면 헌강왕부터 진성여왕 시대까지 실질적인 권력자였다고 볼 수도 있으며 천 년 신라가 망조에 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카 진성여왕 치세에는 위홍의 아내인 부호부인(鳧好夫人)이 진성여왕의 유모라서 총애를 받았고 조카인 진성여왕과 근친상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근친상간을 벌인 시점은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이 사망한 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대 사회에서 근친혼은 비교적 흔했으며 신라는 골품제의 특성상 근친혼을 장려하였다. 김유신 또한 조카와 결혼하였고 김춘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5촌 관계다. 이후 고려 초기에도 근친혼은 계속되었는데 천추태후와 경종은 둘 다 왕건의 손녀와 손자다. 요컨대 진성여왕과 위홍의 근친상간이 시대상을 감안하면 특이하고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이야기.
위홍이 죽고 나서는 진성여왕에 의해서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업적으로는 진성여왕 2년(888년) 왕이 각간 위홍(魏洪)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책으로 엮게 하니 책 이름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는데 책이 남아있었으면 고대 한국어 연구에 큰 기여를 했겠지만 남아있지 않다. 연회장에서 불리는 향가의 가사가 조금씩 달라 국가 공인 '노래방 가사집'을 만들려 한 것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 그런데 나라가 기울어 가는데 집권자라는 자가 유행가 가사집이나 편찬하고 있을 만큼 여유가 넘쳤으니 매우 웃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것이 위홍의 유일한 업적이라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시절 신라가 얼마나 답이 없는지를 방증해 준다.
3. 대중매체에서
후삼국시대를 다루는 매체에서 위홍이 진성여왕과 놀아나는 장면은 후삼국시대를 여는 왕조 말기의 프롤로그 격으로 주로 등장한다. 2000년 방영한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김주영[9] 이 열연했는데 배우 노현희가 연기한 진성여왕과 불같고 오글거리는 로맨스를 연출한다. 극중에서는 그저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던 여인이 원치않게 옥좌에 올라 그에 대한 환멸로 위홍에 의존하며 향략을 즐기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위홍에 대한 사랑은 순애보급이다. 성관계를 맺은 끝에 숙부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했으며 유부남 숙부와 젊은 조카 간의 사랑은 당대 기준으로 보아도 문제가 많았는지 위홍의 아내가 두 눈 뻔히 뜨고 다 지켜보면서 남편에 대한 분노보다 하늘의 벌을 받을까봐 두려움에 떨 정도. 20년만에 자신이 죽이려 했던 궁예가 살아 돌아와 눈 앞에 나타났지만 서라벌 정계의 큰 손답게 의연하게 그를 맞이한다. 궁예를 그간 계속 찾아 헤맸다는데 "맨 처음에는 죽이기 위해서였지만 2번째는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왕위를 잇게 하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어이없어 하는 궁예에게 하는 다음 대사가 위홍의 캐릭터 설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제 딴에는 가문을 지킨다고 그랬으며 어차피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계속된 왕위 쟁탈전으로 몰락해가고 있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였는데 이에 대한 궁예의 반응은 "개소리 집어쳐! 무슨 왕실을 지킨다는거야!" 그도 그럴 것이 작중 위홍은 진성여왕 대신 통치를 해야할 위치에 있었음에도 통치를 하기는커녕 진성여왕과 놀고 먹기만 했다. 지방에서 온갖 반란들이 발생하자 신하들은 위홍에게 몰려가 대처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으나 위홍은 이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때문에 신라는 수도 근방에 도적떼가 날뛰는 상황에 이른다. 위홍은 궁예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고 회유해봤지만 이미 기울어가는 신라에 있을 생각도 없었고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구하고 싶었던 궁예는 당연히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만다. 궁예는 그래도 숙부라고 "출가하여 절에 들어오라"고 마지막 기회를 주었으나 그는 그마저 거부했다. 그런데 궁예가 말했던 마지막 기회가 정말 마지막이 된 것이 얼마 뒤 위홍은 진성여왕과 성관계를 맺다가 복상사라는 심히 아스트랄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사실 복상사에 대한 암시가 있었는데 궁예가 떠난 뒤 위홍은 약간 쇠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위홍이 거부하는데도 진성여왕은 위홍과 성관계를 맺기를 요구했고 이는 결국 복상사로 이어진다.위홍: 남아있는 손이 없느니라. 네 아버님이신 경문대왕께서 가신 이후로 네 이복형들인 헌강대왕과 정강대왕마저도 후사 없이 옥좌를 버렸느니라. 오죽했으면 나이 어린 네 누이로 왕위를 이었겠느냐. '''지금 내게는 우리 가문과 왕실밖에 없느니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너를 죽이려 했고 세인들의 욕을 얻어먹어가며 어린 임금인 조카를 취했느니라. 왕실을 잃는 것보다야 그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느니라.''' 허나... 이젠 나도 지쳤다. 더 이상 나라를 지켜줄 왕손도 없느니... 아무도 없어. '''세상의 온갖 오물은 내가 다 뒤집어쓴 채''' 우리의 가문은 서서히 시들어 가고 문은 점점 닫혀지고 있는 게야.
궁예: 그렇게 나라를 생각하신 분이 오늘날의 신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소이까?
위홍: 이 나라가 어때서? 내가 없었으면 이 정도라도 버틸 줄 알았더냐?
위홍은 궁예의 인생 자체가 뒤틀리게 된 원인 중 하나였으나 궁예는 증오심보다는 경멸감과 한심함을 느끼며 대놓고 그를 조롱했을 뿐이었다. 궁예는 과거를 다 털어버리고 세상에 나가 백성들을 구원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를 미워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았기에 조롱하기만 했던 것. 물론 증오라는 감정을 안 느꼈을 뿐 용서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기에 위홍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궁예는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명복을 빌어주거나 하지 않았다. 나중에 독화살을 맞은 궁예가 사경을 헤멜 때 악몽에서 경문왕은 나왔지만 위홍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 한편 후백제가 세워지는데 간접적으로 기여를 했는데 복상사로 죽기 전에 부하인 견훤을 서남해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던 것. 일개 무명 군관이었던 견훤은 해적 능창과 사투를 벌인 끝에 서남해를 일거에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후백제를 건국해 독립해버린다.[10]
[872년] A B 황룡사찰주본기 기록[875년] 삼국사기 기록[1] 수직은 임금이 명예직으로 내려 주는 직함이다. 즉 위홍은 명예 병부령평장사 직함을 가진 것이다.[2] 희강왕의 아들.[3] 신무왕의 딸.[4] 사서에는 기록이 없고 금석문에서만 나온다.[5] 형인 경문왕이 875년에 승하했을 때 나이가 30세였는데 이로 보아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많아 봤자 40대 초반이다. 이는 삼국사기 기준이고 삼국유사 기준으로는 이 이후까지 생존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다소 모호하다.[6]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에서의 기록이며, 위홍이 경문왕의 친동생이라는 기록도 여기서 나왔다.[7] 숭복사비문의 기록. 다만 재상직인 상대등을 겸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태(太)가 꼭 왕위 계승자를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문맥상 가장 큰 동생을 뜻하는 듯.[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9] 2008년 대왕 세종에서 이숙번을 연기했는데 공교롭게도 의형이자 군왕인 태종(조선)은 궁예를 연기한 배우 김영철이 맡았다. 사실 작중에서는 숙부와 조카 관계로 나오지만 김주영과 김영철은 1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10] 2003년 방영한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반대로 김주영이 연기한 조원정이 서인석이 연기한 이의방의 부하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