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현/선수 경력

 





1. 클럽 경력



1.1. 프로 데뷔 이전


학창 시절부터 알아주는 유망주였다. 강릉제일고등학교광운대, 청소년 대표팀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던 설기현은 특이하게도 2002년 월드컵을 앞둔 유망주 육성 계획에 따라 K리그가 아닌 벨기에 주필러 리그의 로얄 앤트워프에서 프로데뷔를 한다.[1]

1.2. 로얄 앤트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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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주필러 리그에서 2000~01 첫 시즌 27경기동안 11골[2]을 넣으며 좋은 활약을 했고 이는 차범근에 이어 역대 2번째 유럽리거 시즌 10골 기록[3]이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다음 시즌은 같은 리그 우승후보인 RSC 안데를레흐트로 이적한다.

1.3. RSC 안데를레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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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를레흐트에서 벨기에 리그 우승을 이뤘고 슈퍼컵 대회에서는 해트트릭을 하며 4:1 대승을 이끌어 우승 주역이 되었다.[4] 그리고 2002년에는 안데를레흐트 소속으로 '''발롱도르 후보에 뽑히기도 하는 등'''[5][6]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2002~03 시즌에는 시즌 43경기 13골을 기록했으며 2003-2004 시즌에는 UCL에 진출하여 본선이 아닌 예선이기는 해도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 한국인'''이 되었고 마찬가지로 예선 라운드이기는 하지만 '''한국인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골'''도 기록한다.[7] 당연히 국내에서의 위상도 어마어마해서 국대 에이스급으로 부상했다. 처음부터 빅리그 빅클럽을 노리기보다 중급리그 중소팀에서 '유럽에 적응'하고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간 성공사례로 꼽히며 이동국과의 비교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주필러 리그에서 4시즌 동안 32골을 기록한다.

1.4.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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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잉글랜드 챔피언쉽의 울버햄튼에서 뛰었다. 이 시기에 사실 EPL에서도 제의가 왔었는데 본인은 경기를 뛰는걸 중요하다 여겼는지 울버햄튼을 선택했다. 이때 글렌 호들 감독의 전술에 따라 최전방 공격수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를 넘나들며 팀의 주전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2004-05 시즌 챔피언십과 각종 컵대회를 합쳐 총 40경기 6골을 기록했다.
2005-06 시즌에 FA컵에서 아스날을 만났는데 티에리 앙리가 설기현과 경기 중 몸을 충돌할 뻔한 뒤 양팔을 닭날개처럼 퍼덕이는 몸짓을 해서 국내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겁쟁이라는 뜻 외에 동양인을 비하하는 뜻이라고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으나 일반적으로 동양인 비하 제스처로 쓰이는 것은 아니라서 가라앉았다. 2006년 1월 30일 박지성이 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A컵에서 대결하기도 하였다. 2005-06 시즌 통산 설기현은 챔피언십과 각종 컵대회를 합쳐 36경기 4골로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했다. 시즌 종료 후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한 챔피언쉽 우승팀인 레딩 FC로 이적한다. 당시 레딩은 구단 최고 이적료를 지불하며 기대를 보였다.

1.5. 레딩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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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초기에는 EPL 선수랭킹 11위에 오르는 등 EPL에서 상위급의 선수로서 활약했으며, 레딩에서도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는 등 팀의 핵심으로서 활약했다.

특히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전에서 베나윤을 농락하고 기록한 결승골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슈퍼골.[8]
이 초기의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설바우두라는 칭호까지 얻게 되는데 어원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기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EPL 07/08시즌 오프닝에도 출연했었을 정도로 활약상이 컸다.
그러나 본인은 윙어가 아닌 최전방 공격수를 소화하고 싶다는 고집[9]으로 인해 스티브 코펠 감독과 갈등[10]을 빚기도 했고 이후 후반기부터 점점 부진의 늪에 빠져 결국 4골 4어시스트로 시즌을 마감했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 풀럼의 오른쪽 수비수인 리암 로세니어와 트레이드로 풀럼 FC로 팀을 옮긴다.

1.6. 풀럼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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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럼의 스폰서이던 LG의 영향도 있어 보이나 등번호로 7번을 달기도 했던 만큼 팀 내 대우나 입지는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설기현 영입을 추진한 로리 산체스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고 로이 호지슨이 부임하면서 입지가 크게 좁아진다. 베스트11을 고집하는 조직력 축구의 신봉자였고 교체를 통한 전술 변화도 잘 주지 않는 호지슨 밑에서 변변한 출장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사실 호지슨은 선수교체나 베스트11을 잘 안 바꾸는 편이기도 했고, 한번 전력 외 구성이 되면 잘 안 쓰는 감독이었다. 그래도 08~09시즌을 앞둔 한국 투어에서 부산, 울산전에서 어느정도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며, 출전의 기대감을 보여줬다 2008-09 시즌 개막전 헐 시티 원정에서 선제골을 기록한 것이 풀럼에서의 유일한 리그 득점이었다. 뒤이어 아스널과의 경기도 선발 출전했지만 호지슨의 구상에는 점점 없어졌다. 그리고 이 팀이 설기현이 EPL에서의 마지막팀이기도 했다.

1.6.1. 알 힐랄 FC (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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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우디 알 힐랄로 임대 이적되어 뛰다 풀럼과 계약 해지한 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다.

1.7. 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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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로 복귀하며 축구팬들에게 회자될만한 먹튀전설을 쓰기 시작하며, 그 첫 단추가 포항 스틸러스 입단이었다. 포항의 1년 연봉 12억을 완전히 먹고 튄 것 정도까진 아닌데 중요한 부분에서 말아먹는 바람에 평가가 매우 안 좋아졌다. 거기다 이후 행적들은 포항 팬들의 신뢰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우선 부상이 너무 잦았다. 포항 입단 직후 첫 훈련에서 부상을 당해 3월, 4월, 5월 경기에 나온다, 안 나온다 하더니 결국 반 시즌을 그냥 날려먹었다. 그래도 후반기 들어와 골도 기록하고 나름대로 밥값은 해주나 했는데...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포항이 8강 2차전 조브아한과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허무하게 날려 팀의 무승부에 일조[11]하면서 제대로 욕을 먹고 삐걱대기 시작하였다.
이 슛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놀림거리가 되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도 포항 팬들 사이에서 한가위 대보름 폭발슛, 포항제철 대붕괴슛, 용광로 대폭발슛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아쉬워하는 설기현과 어처구니없어하는 박창현 당시 감독대행,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닌 서포터즈, 맨 마지막 리플레이까지 봤다면 매우 심하게 화가 나 죽일 기세로 달려오는 모따까지 포항 관계자 모두가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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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모따는 전부터 '설기현에게 패스하면 골 넣는다는 감이 온다'라고 인터뷰를 하는 등 설기현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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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포터즈들과 서로 주먹감자를 주고 받는 좋지 않은 장면을 연출했지만 그래도 본인 입으로 당연히 재계약 의사를 내비치면서[12] 계약이 끝난 뒤에도 2월까지 팀에 잔류하자 팬들도 당연히 설기현이 팀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조브아한전의 실책을 빼면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 설기현을 지나친 비난한 것에 대한 화해의 표시로 생일파티[13]까지 열어주었다.
그러나 잔류하겠다는 발언부터 이 모든것이 거짓이었다. 당연히 재계약 할 것이라고 한 뒤 딱 2달만에 당연히 재계약 하지 않았다.
재계약 하지 않은 배경으로는 새 감독 부임 후 첫 동계훈련부터 스쿼드에서 제외된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반 시즌은 생각보다 깊었던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못나갔으나 후반에는 기록에서 보여주듯이 16경기에서 7골 3어시스트를 할 정도로 기량을 회복했으나 새 감독 부임 이후 사실상 그 다음 시즌이 출전이 불분명해져서 연봉을 대폭 낮춰서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팀으로 이적한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 언급된 대로 리그 스탯만 놓고보면 잘 했다. 하지만 그 연봉에 부상으로 시즌을 반 날려먹은 것과 결정적 순간에 한가위 대보름 폭발슛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지나친 비난에 팬들과도 충돌하는 등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팬들도 부상이 본인의 자의도 아니고 괜찮은 스탯을 보이다가 실수한 만큼 다음 시즌엔 더 잘 해보자고 생일 파티를 열어준 것이고, 설기현도 이에 부응해 당연히 재계약을 할 것처럼 언론에 흘리다가 기미도 없이 갑자기 라이벌 팀 울산으로 이적해버렸으니 포항 팬들 입장에서 배신감이 매우 큰 사건이었다.
사실 설기현의 커리어 내내 언급되는 통수는 거진 이 패턴인데, 이적이나 은퇴나 모두 선수 본인이 할 수 있는 판단이고 직장 선택의 자유이다. 그러나 프로 축구라는 것은 팬층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 것이기에 똑같은 이적을 하더라도 이들에게 배신감을 주는 형태로 해서는 서로 좋은 말이 나오기 어렵다. 설기현은 항상 시즌 직후에는 구단에 잔류하겠다, 충성하겠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혼자서는 항상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 혼자만의 생각이 확고하게 굳어지면 이전까지 했던 말이 뭐였든 바로 뒤도 안 돌아보고 구단에 퇴단 통보를 해버리는 식이라서 자주 논란이 되었다.

1.8. 울산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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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활약이 괜찮았던 울산 시절'''
결국 시즌 개막 직전 그 많은 팀들 중에 하필이면 포항의 자타공인 라이벌 울산으로 이적하면서 포항 팬들에게 죽일놈으로 찍혔다.
특히 이적하면서도 좋은 소리를 못 들은 것이 본인은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서 뛰고 싶은데 팀에선 자꾸 윙 포워드를 강요한다고.[14] 하지만 본래 볼 터치가 둔탁하고 골 결정력이 떨어지는 대신 돌파력과 크로스가 역대급인 선수라 포항 입장에선 당연히 윙 포워드로 쓰고 싶을 수 밖에 없었다.[15] 최전방 공격수 자리를 찾아간 울산에서도 윙 포워드가 제 포지션이라 보고 측면으로 돌렸다. 막상 떠나온 포항에서는 슈바가 부상으로 전반기 결장을 했던 탓에, 남아있었다면 설기현 본인이 원하던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 반시즌이나마 기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못내 포항 팬들에게 미안했는지, 2011년 4월 23일 리그 7라운드에서 벌어진 포항 홈에서의 영남더비[16]에서 한 번 더 포항을 상대로 홈런볼(...)을 차줌으로써 포항 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게 만들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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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2011년 챔피언십 플레이오프에서 친정팀 포항을 상대로 페널티킥을 얻어내고 성공! 이것이 그대로 결승골이 되면서 울산을 챔피언 결정전으로 진출시킴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따냈다.[17] 반면에 포항은 K리그의 챔스티켓이 3.5장으로 줄면서 플레이오프를 노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2011시즌 성적은 41경기 7득점 10도움. 포항-울산 시절이 통수로 자주 회자되지만 세간의 인식과 달리 울산에서의 설기현은 나쁜 선수가 아니었다. 이 기록은 정규시즌과 PO, 컵 대회를 모두 합친 것이다. PO에서 5경기동안 2골 2도움의 맹활약을 했던 것은 있지만, 정규시즌만 따지면 29경기 3골 5도움이란 연봉에 비해 공격포인트는 적었다. 다만 유럽에서도 먹힌 피지컬을 앞세운 요란한 돌파로 반대편의 인사이드 포워드 박승일과 함께 상대팀 바이탈 존을 헤집으며 포메이션 상으로만 최전방이지 실제로는 뒤로 쳐져 미드필더들과 함께 움직인 김신욱의 보좌 역할을 잘 해내 철퇴축구 1기의 준우승에 공헌했다. 다만 2002년 이름값과 높은 연봉에 비해 공격포인트가 적었고, 무엇보다 1년 있다 가버려서 포항 시절 이미지를 탈피하진 못했다.
돌이켜 보면 그나마 울산 시절이 공헌도, 임팩트, 헤어지는 과정 모든 면에서 가장 양호했다고 할 수 있다. 노쇠화가 완연했던 인천 시절과 달리 포항, 울산의 설기현은 부상으로 못 나왔을 때를 제외하곤 활약이 좋았다. 울산에선 시즌 절반 정도 날린 포항 시절보다 많이 출전하며 철퇴축구 탄생에 기여했고, 가장 중요한 플옵에서는 꽤나 몰아치면서 챔스 티켓에 공헌한 바 있고, 라이벌 팀인 포항에서 울산으로 이적한 것보다야 울산에서 인천 이적한 것이 낫다.
팀내 후배들과 사이도 좋았고 많은 후배들이 따랐다고 한다. 이 시기를 함께 한 김신욱도 2017년 울산 시절을 기억하며 "개인적으로 선수 때 제일 존경하는 선배를 꼽자면 인간적으로 성장시켜준 것이 설 코치님", "선수였지만 전술이나 팀을 이끌어가는 것이 탁월했다." 등으로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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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인천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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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악의 먹튀'''
2012 시즌을 앞두고는 연봉 문제로 울산 현대와 다투는가 싶더니 인천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다. 허정무 감독과의 인연이 큰 이적을 결심하는데 역할을 한듯. 연봉을 울산에서 받던 수준의 절반으로 줄이고, 인천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한 후 지도자 준비를 할 것이라 밝혔다.
포항 시절보다는 좋게 헤어졌음에도 한 동안 울산 팬들에게도 통수 소리를 들었는데, 전지 훈련에도 참가하고 재계약할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또 갑자기 인천으로 이적했기에 울산 팬들에게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로 인해 포항과 울산에서 모두 뛰었음에도 두 팀 팬들 모두에게 욕먹는 거의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물론 전지훈련 참가 후 이적하는 일이 희귀 케이스도 아니긴 하지만, 상기한대로 설기현 이적의 대부분은 "이 선수는 당연히 남겠지" 라는 기대감을 본인이 열심히 심어놓고선 갑자기 뒤도 안 돌아보고 이적해버리기 때문에 논란이 생겼다.
2012년 11월 18일 인천 유나이티드와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관중슛 사건을 홈에서 저질렀다.# 무슨 이유에서건 관중석을 향해 공을 찬 것은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비록 심판은 옐로 카드로 넘어갔지만 어린 관중에게라도 맞았다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후 언론에 밝힌 바로는 설기현 본인은 판정에 불만을 품고 공을 광고판에 찬다는 것이 그만 관중석으로 날아갔다고, 당연히 네티즌들은 그것조차 개발로 홈런을 치냐고 신나게 깠다.
다음날 19일 인천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문을 게재했다.
설기현입니다.
먼저, 어제 경기중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어제 경기중의 일련의 일들을 여러분께서 모두 보셨기 때문에 상황은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팀의 고참선수로 후배선수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흥분된 상태에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어제의 제 실수로 인해 불편을 겪으신 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점,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앞으로 보다 성숙된 모습으로 경기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설기현 올림
사과문을 올렸다지만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으며, 설기현 정도의 위치와 나이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2012 시즌에는 여러 경기에서 활약하며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2013 시즌 인천은 스플릿 A 그룹에 드는 저력을 발휘했지만 설기현 개인 활약은 평범했고, 2014 시즌은 부상으로 7경기만 뛰고 시즌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2015년 K리그 팬들 모두가 분노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1.10. 현역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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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일 K리그 클래식 개막을 4일 앞둔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하고, 성균관대학교 감독[18]으로 부임한다고 한다. 전지훈련도 동참하고 심지어 이번에는 시즌 새 유니폼 모델까지 맡았기에 부상으로 경기 얼마 안 뛰고 연봉만 받아먹었던 2014년의 모습을 지우고 그래도 올해는 뭔가 기대에 부응해주지 않을까 했던 팬들의 당혹감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거기다 인천에는 통역이 없어서 영어를 잘하는 설기현이 외국인 선수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포항 팬들과 울산 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천 팬들 역시 설기현을 크게 비난하고 있다. 설기현에 대한 이미지가 "시즌 개막 직전마다 일을 저지르는 선수"로 낙인찍히게 된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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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현의 은퇴에 대한 관중들의 답례'''.[19]
압권은 SEOL마했던 우리가 호9[20]였네, '''설'''레며 '''기'''다린 개막 '''현'''실은 '''뒤통수'''.
다행히 설기현의 일방적 계약해지이기에 인천 입장에서는 위약금 받으면 끝나는 일이지만, 설기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인천의 1년 계획이 완전 틀어져버렸다. 설기현은 2014년 2년 계약을 맺어 2015 시즌까지 뛰기로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지난 시즌 끝나고 진작 은퇴를 선언하며 계약을 해지했더라면 설기현에게 줘야 할 남은 1년치 연봉을 진작에 세이브하여 이석현, 박태민, 남준재, 문상윤, 구본상, 이보 중 몇 명은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석현을 FC 서울에 헐값에 팔아치워버렸던걸 생각하면 더 열받는 상황. 게다가 김도훈 감독은 2015 시즌 케빈과 설기현 투톱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기에 설기현이 갑작스레 은퇴해버린 현 시점에서 다른 자원을 억지로 투톱으로 올리거나, 여름 이적 시장이 열리기 전까지 케빈 원톱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21] 또 구단 측에서는 설기현의 은퇴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를 선수로 등록했기 때문에 로스터 자리에 그의 자리를 비우게 되었으며, 여기에 설기현이 훈련도 제대로 참여하고 각종 홍보물에 '''메인모델'''로 설기현을 두는 등 지난 시즌에 그렇게 먹튀 짓을 했음에도 설기현을 기용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여왔는데, 설기현의 은퇴로 그 홍보물들을 죄다 폐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때문에 안 그래도 돈없는 인천 유나이티드는 돈을 또 써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한 마디로 팀에 도움 안 되는 민폐 짓만 저지른 셈.
설기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나이 든 전력 외 선수가 나갔으니 그 연봉으로 다른 좋은 선수를 잡을 수 있지 않냐는 말을 하는데 위의 이유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적시장 이미 다 닫혔고 인천은 선수들을 처분했으며 시즌 개막 4일 전인데 설기현에게 위약금 받는게 대체 인천에게 무슨 이득이 된다는 말인가?
이 와중에 대한축구협회에서 관리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페이스북에서는 '설기현, 당신의 새로운 축구 인생을 응원합니다. 지도자로서 새출발하는 설기현 선수에게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3분을 선정해 설기현 선수 친필 사인 축구화를 드립니다.'라는 멘트를 올려 인천과 포항 팬들을 비롯한 K리그 팬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물론 댓글창은 포털 사이트 못지 않게 전쟁이 일어났다.
앞서 각주로 언급된대로 설기현에게는 감독 경력도, 1급 지도자 자격도 없기 때문에, 성균관대에서 내세운 감독 채용 응시자격과도 맞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성균관대 축구부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이 와중에 설기현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지도자를 할 것이라면 감독을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나의 철학을 실현하고 검증받기 위해서는 감독으로 시작해야 한다. 내 경험을 내 팀에 입힐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독이다. '''코치로 시작하면 그런 축구를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라는 경솔한 발언으로 멋모르고 실드치던 이들마저 떠나보내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참고로 전남에서 스태프 생활을 시작해서 2013년 포항 스틸러스더블 달성을 이끌며 명감독으로 인정받은 황선홍도 시작은 전남 드래곤즈 '''2군 코치'''로 시작해[22] 전남 수석 코치 → 부산 아이파크 감독 → 포항 감독으로 차근차근 시작했다. 현재 K리그 최고의 감독 중 하나인 전북 현대의 감독, 최강희도 코치로 스태프 커리어를 시작했다. 심지어 지금 한창 욕먹는 홍명보도 어쨌든 먼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23]
물론 선수생활 끝나자마자 바로 감독을 맡는 경우가 아예 없는건 아니다. 단적인 예로 한때 프리미어리그에 있었던 미들스브로의 전 감독이었던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는 2005-2006 시즌까지 현역으로 있다가 현역 은퇴를 하자마자 다음 시즌인 2006-2007 시즌부터 감독을 맡았다.[24] 하지만 이 경우는 사우스게이트가 미들스브로의 주장이자 팀의 중심이었고, 사우스게이트 이전 감독이었던 스티브 맥클라렌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했는데다 미들스브로 구단에 베테랑 코치들이 많기 때문에[25] 이들이 사우스게이트를 보좌해줘서 가능한 일이었지만[26] 설기현은 지도자 수업을 받은 적도 없고, 감독 생활을 시작할 성균관대와는 어떤 연관도 없다.
하지만 설기현의 경솔한 발언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은퇴식에서 그는 '''"사실 3년 전부터 은퇴를 생각했다."''', "'''내가 인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인천에는 케빈이라는 좋은 공격수가 있다. 전력 공백은 특별히 없을 것이다", "김도훈 감독님은 너무나 흔쾌히 결정을 해줬다. 사실 서운하기도 한데, 그런 부분이 도움이 됐다"는 등, 본인은 농담이라고 하지만 정작 인천 구단 관계자 및 팬들을 더욱 화나게 하는 발언을 했다. 구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없으니까 은퇴해도 된다? 여러 팀에서 주전 경쟁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선수들을 무시하는 발언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케빈이 인천에 오게 되면서 설기현이 더욱 중요해진 것이 인천은 통역사가 없기 때문에 선수단중 영어를 제일 잘하고, 해외 경험이 많은 설기현이 통역사 대리를 해 주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가 자청해서''' 게다가 케빈은 인터뷰에서 대놓고 벨기에 리그 시절 설기현을 언급했을 정도이다. 은퇴 선언 얼마전 인터뷰에서도 "케빈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최대한 적응을 돕겠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갑자기 은퇴해버린 것이다. 이대로라면 케빈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팀 멤버들과 같이 뛰어야 한다.[27]
포털 사이트에서는 설기현을 옹호하는 댓글의 의견 대부분이 '''직장에서 일하는 도중에 더 좋은 제안을 건넨 직장이 있는데 당연히 거절할 수가 있겠냐'''라며 옹호를 하지만, 애초에 예시가 틀렸다. 그들이 말하는 예는 이적 시장 종료를 며칠 앞두고 이적 의사를 명확히 표시한 선수들에 한해서만 예시가 맞다. 어떤 사람들은 인천 유나이티드 구단이 삽질을 계속 하고 있었으니[28] 설기현도 팀에서의 입지가 불안하니까 은퇴한 게 아니냐고 왜 설기현이 욕 먹냐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설기현의 은퇴 여부가 아니고 '''설기현의 은퇴 시기'''다.
설기현이 그동안 잦은 부상으로 인해 몸 상태가 안 좋아 좋은 전력이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한참 시즌을 준비해야 하는 2 ~ 3월에 전지 훈련도 꼬박꼬박 참가하고 홍보 모델로도 참여하면서 은퇴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다가 이적 시장이 다 끝나가고 시즌이 개막하는 시점에 갑자기 은퇴를 하니, 이를 대비하지 못 한 구단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 밖에 없다. 본인이 뛴다고 하여 믿고 다른 선수들을 처분하고 유니폼 모델까지 맡겼는데, 누가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당장 은퇴할 사람으로 보겠는가?
거기다 쭉 언급되어 있지만 설기현이 과연 리더십을 지니고 유럽 경험까지 있는 고참 선수는 팀에 당연히 필요하고 그렇기에 유니폼 모델까지 맡겼으며 외국인 선수와의 소통까지 맡고 있었으니 경기를 얼마나 출전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설기현이 정말로 입지가 불안정한 정도였는지는 의문이 있다. 위에 언급된 대로 인천이 이 시즌 전에 내보낸 선수들과 남아 있는 공격수 현황을 보면 설기현은 분명히 케빈과 함께 공격에서 중요한 롤을 수행해야 할 선수였다. 과연 입지가 불안한 선수였는가?
그의 은퇴에 대해 인천의 한 관계자는 '''"인천이 기분 좋게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다. 꽃다발을 전해주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로 보기는 어렵다"'''라고 말했고 # 김도훈 역시 시기가 아쉬웠다며 올 시즌 그를 중요 선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시즌을 앞두고 커다란 공백이 생겼고, 당초 짜놓았던 전력 운용에도 차질이 있다며 케인과 역할 분담을 해줄 대안이 막막해 제로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인천이나 김도훈 감독이나 가겠다고 하니까 배웅은 해주겠는데 결코 좋다고는 말하지 못 하는 상황이다.
다 떠나서 설기현 본인 입으로도 갑작스러운 은퇴라고 했고 그 계기는 감독직이라고 밝혔다. 외부에서 더 좋은 제의가 오니까 현 소속팀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퇴 시기는 개막 4일 전이다. 이런 판단은 축구계에서도 절대 일반적이고 문제가 없는 행동이라 할 수 없으며, 인천 팬들 입장에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참고로 같은 시즌 은퇴 예정자였던 차두리는 시즌을 전부 소화하고 소속팀인 FC 서울에 FA컵 우승을 안겨주며 은퇴했고, 설기현 은퇴 직전까지 같은 팀이었던 이천수는 연봉을 자진삭감하고 팀에 잔류했으며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맡아 인천이 막판까지 상위스플릿 경쟁, FA컵 결승까지 올라가게 만드는데 공헌한 끝에 인천 팬들의 감사를 받으며 은퇴하였다. 선수 생활 내내 트러블 메이커였지만 인천에서만큼은 아름답게 헤어졌으며 그 덕분에 이후 인천 프런트에서도 일했다. 같은 2002 맴버들이 이런 좋은 모습을 남기며 은퇴했기에 더더욱 비교가 되었다.
이후 국가대표팀 은퇴식을 2015년 10월 13일에 있었던 자메이카와의 평가전 하프 타임에 치렀다. 하지만 설기현이 은퇴 과정에서 워낙 대형사고를 쳐놓은지라 "뭐하러 저런 사람에게 은퇴식을 치러주냐?"는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고, 실제로 하프 타임에 야유가 나오기도 했었다.

2. 대표 팀 경력



2.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0년 1월 23일 뉴질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하여, 2002년 FIFA 월드컵, 2006년 FIFA 월드컵 등에 참가하였다.
2002 월드컵을 5일 앞둔 시점에 프랑스와 가진 평가전에서 박지성의 동점골에 이은 역전골을 넣어 이름을 알렸다. 경기 자체는 후반전에 2골을 먹히고 2:3 패배로 끝났지만, 당시 디펜딩 챔피언이자 피파 랭킹 1위였던 프랑스를 상대로 잠시나마 2:1로 리드하는 상황을 만들어내어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2.1.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특히, 2002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동국 등을 제치고 설기현을 발탁하였다. 대회 전 히딩크 감독은 설기현만 오면 다 해결된다고 할 정도로 강한 믿음을 보였고, 실제로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독일전 이전까지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한다. 특이한 점은 히딩크는 설기현 하면 흔히 생각되는 크로스 중심의 윙어가 아니라 오히려 당시에는 생소했던 인사이드 포워드에 가깝게 기용하였고, 16강 이탈리아전에서 후반 막판 천금같은 동점골을 넣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대한민국의 4강 진출에 큰 공헌을 하였다.
[image]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 극적인 동점 골을 넣고 환호하는 모습

2002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에서 후반전 종료 직전인 43분에 0:1 상황에서 크리스티안 파누치에게 맞은 공을 그대로 차서 기적같은 동점 골을 넣으면서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 대한민국의 8강 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 때가 정점.[29]

2.1.2. 2006 FIFA 월드컵 독일

[image]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앙리와 유니폼을 교환하는 모습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프랑스전 후반에 크로스 패스를 날려 공이 조재진 머리에 닿았고 그 공은 결국 박지성의 발에 맞아 천금 같은 동점골을 넣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오른발을 많이 썼지만 양발이 두루 능숙해서 어느 발로도 중거리슛이나 세트피스 처리가 가능했다.

3. 기록



3.1. RSC 안데를레흐트


  • 주필러 리그 우승 1회 : 2003-04
  • 주필러 리그 준우승 1회 : 2002-03

3.2. 알 힐랄 FC


  •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 준우승 1회 : 2008-09
  • 크라운 프린스컵 우승 1회 : 2008-09

3.3. 울산 현대


  • K리그 준우승 : 2011
  • K리그 컵 우승 : 2011

3.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AFC 아시안컵 3위 : 2000
  • FIFA 월드컵 4위 : 2002

3.5. 통산 성적



3.5.1. 국가대표

연령
출전

U-17
0
0
U-20
12
7
U-23
24
10
A대표
82
19
종합
118
36

3.6. 주요 개인 수상


  • 체육훈장 맹호장 : 2002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수상 : 2002
  • 발롱도르 후보 : 2002[30]

4. 플레이 스타일



'''빠른 스피드, 유럽 선수들과 대등한 몸싸움이 가능한 체격, 정교한 크로스 3박자를 갖춘 양발잡이 측면 공격수'''로 한국 축구에서 상당히 드문 스타일의 선수다. 대부분은 앞의 셋 중 하나가 부족하다.[31]
그래서 히딩크는 유럽 선수들과 몸 싸움이 가능한 설기현을 월드컵 무대에서 주전으로 기용하고 이천수차두리, 최태욱은 상황에 맞춰 백업으로 활용했다.[32] 설기현 이후 대표팀에선 이 3박자를 갖춘 측면 공격수가 완전히 사라졌다. 특히 크로스는 제대로 올리는 선수가 아예 없다. 히딩크는 설기현을 두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외국 선수들과의 몸싸움을 이겨내고 크로스를 올려줄 수 있는 선수"'''로 평했다. 2001년 대표팀이 공격수 부재에 시달렸을 때도 담담하게 '''"설기현만 오면 다 해결된다"'''는 답변을 남겼다.
크로스를 평하자면 고정운 이후 대표팀에서 가장 정확한 크로스를 올리는 선수였다. 정확도는 물론이려니와 속도가 빨랐고, 각도 예리했다. 양발 잡이라 좌우도 가리지 않았으며, 정지상태에서 올리는 크로스 뿐 아니라 러닝 크로스도 한국에선 독보적이었다.[33] 2006년 월드컵 프랑스전에서 박지성의 동점골 과정에서 올린 런닝 크로스가 좋은 예.
피지컬도 한국 기준으론 스피드, 경합능력 모두 최상급이었고 187의 장신이라 공중볼도 상당히 잘 따냈다.[34] 이 피지컬을 바탕으로 약팀들 상대할 때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도 뛰었다. 왼쪽 윙포워드가 주포지션이었지만 양발 모두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 오른쪽 윙 포워드로도 종종 뛰었고 클럽에서는 중앙 공격형미드필더로 시즌을 소화한 적도 있다.
단점은 둔탁한 볼터치와 떨어지는 축구지능. 그가 대표팀 생활 내내 지적받은 골 결정력 부족이나 패스 정확도 부족은 둔탁한 볼터치에 기인한다. 건장한 신체를 바탕으로 한 슈팅파워는 좋았으나 볼을 부드럽게 다루는 능력이 부족하니 공이 뜨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35]박지성만큼의 축구지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공간 창출력이 부족해 다른 공격수들과의 연계 플레이가 약했다.
주력은 빠른 편이지만, 큰 키와 우람한 체격으로 인해 골문에서의 민첩성은 조금 떨어졌었다. 치고 달리는 것은 잘한데 골문 앞에서 섬세한 마무리가 아쉬운 편.[36]
이런 특성들 때문에 손흥민같은 인사이드 포워드는 맞지 않는 옷이고 전통적인 윙어의 역할, '''라인파고 크로스'''가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설기현을 밑에둔 감독들도 설기현을 측면으로 기용하려 하고 그가 원하던 대로 중앙 공격수로 기용하려 하지 않았다. 연계능력이나 공간창출 능력이 떨어지는 선수를 중앙에 세우면 효율이 떨어지는데다 스피드와 크로스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후술할 내용과 같이 본인이 이 장점을 살리기보다 다른 포지션을 선호했다는 것.
K리그에서의 행적이 좋지 않다보니 자주 비하당하지만 상당히 훌륭한 실력과 업적을 남긴 선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저평가를 하게 되는 원인, 가장 큰 단점이 뭐냐면 이 선수가 심각한 외골수라는 것이다. 자기 생각과 고집에 빠져 지도자들과 잘 소통을 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자꾸 중앙 공격수로 뛰려는 황소고집을 부리는 것인데, 레딩에서도 이 때문에 스티브 코펠 감독과 갈등이 생겨 결국 이적하게 되었다.[37][38] 풀럼에서도 본인이 말하길 자기가 생각해도 하면 안되는 실수를 감독에게 해 사이가 틀어졌다고 말했기도 했다. 박지성은 설기현을 말할때 "기현이 형이 선수로서 잉글랜드에 있을 때 감독들이 좀 더 기현이 형을 믿고 계속해서 꾸준하게 출전 기회만 주어졌다면 다른 어떤 선수보다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선수다." 라고 했는데 지도자와의 트러블은 가장 가까이에서 본 동료들조차 가장 아쉬운 단점인듯.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이 고집 때문에 K리그에서는 이적할 때마다 팬들과도 척을 지고 이적을 하니 여론마저 악화되었다.
포지션 고집도 심한데 도전정신이 부족하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주전 보장에 집착하였으며,[39] 이해가 되지 않을정도로 실력에 비해 너무 낮은 수준의 팀만 고집한 것도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2002-03 시즌 설기현은 안더레흐트[40]에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었는데, 월드컵에서의 활약에 유럽 무대에서의 활약까지 덧붙여 발롱도르 50인 후보까지 올랐을 정도였다. 이 시기 토트넘, 첼시 등 EPL과 라리가의 상위권팀에서 영입을 희망했을 정도 였음에도 이적하지 않았으며, 04-05 시즌 당시 벨기에를 떠날때도 에버튼이나 웨스트햄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설기현이 선택한 팀은 엉뚱하게도 그 해 챔피언쉽으로 강등되었던 울버햄튼이었다.[41], 풀럼을 떠날 때도 분데스리가의 여러 팀에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설기현이 선택한 곳은 황당하게도 중동의 팀인 알 힐랄이었다.[42]
물론 어떤 팀을 선택할지는 선수의 자유이고 주전으로 나오지도 못 할 높은 레벨의 팀을 고집하는 것도 안 좋지만, 설기현은 너무 본인의 레벨에 맞지 않는 팀을 골랐다. 이런 선택들로 본인의 전성기와 기회들을 약팀에서 날려버린 것은 아쉬운 점.[43] 이적한 팀들의 수준이 낮았기에 쉽게 주전이 가능했지만, 전성기에 한 단계 높은 도전을 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1] 참고로 이 때 이상일이 KSK 베베런에 입단했으며, 설기현과 이상일은 한국 선수 중 최초로 벨기에 1부 리그에서 뛴 선수가 됐다.[2] 리그 10골,컵 대회 1골.[3] 이후 박주영(2010-11 시즌, 프랑스에서 리그 12골)과 손흥민(항목 참고. 여러번 이뤄냈다.), 석현준 (15~16시즌 포르투갈에서 리그 9골, 컵대회 2골), 권창훈 (17~18시즌 프랑스에서 리그 11골)이 유럽 리그에서 한 시즌 10골 이상을 기록했다. 그런데 스포츠서울은 설기현을 제외하고 석현준을 4번째 유럽 진출 선수 시즌 10골 달성이라고 기사를 냈다가 비난을 받았다.[4] 로얄 앤트워프는 설기현을 이적시킨 뒤, 03-04시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둥팡줘를 임대하면서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보기 좋게 2부리그 강등당하고 만다. 2020년 현재는 1부리그 소속이다.[5] 설기현 외에 발롱도르 후보자에 들어간 한국인은 2005년 PSV 박지성, 2019년 토트넘 손흥민이 있다.[6] FIFA 올해의 선수상까지 고려하면 홍명보도 1996년 공동 21위, 2002년 공동 17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7] UCL 본선 한국인 최초 득점은 PSV 시절 박지성이 04-05시즌 4강전에서 넣었다.[8] 이 골은 BBC에서 선정한 '06-07 EPL Goal of this season'에서 18위에 올랐다.[9] 케빈 도일이 확고하게 버티고 있고 르로이 리타와 데이브 킷슨도 괜찮은 활약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지 않은 고집이었다.[10] FA컵 경기에서 교체되어 나가는데 코펠 감독의 악수를 거절하여 논란이 되었다.[11] 황진성이 킬패스를 찔러줬고 일대일 찬스에서 골키퍼까지 제쳐진 완벽한 빈 골문을 두고 허공에 공을 찼다. 저게 들어갔으면 2:0으로 앞서가는 경기였고 후반 막판 골을 먹어도 2:1로 연장까지 갈 수 있었다.[12] 12월쯤 감독 피셜 재계약 확신 인터뷰가 있는 거 보면 팀과 팬에게 재계약 한다고 한뒤 겨울 전지훈련에서 갑자기 마음이 바뀐 듯.[13] 설기현의 집에선 생일을 음력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는데 포항 선수진들이 열어준 파티는 양력이 기준이었다. 즉 본의 아니게 생일파티를 두 번 연 셈. 그래서 황선홍 감독은 음력 생일에 이미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선물을 주지 않았다고.[14] 유럽 시절부터 감독과 드잡이질 많이 하는 선수였다. 그런 문화가 생소했던 한국 언론에서 왜 그렇게 감독하고 싸우냐고 묻자 유럽은 다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야 한다고 답하곤 했다. 물론 당시나 이후나 아시아계 선수들은 유럽에서 입지가 확고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기 주장은 해야 밥그릇은 챙길 수 있지만, 역으로 입지가 확고하지 않은 선수가 외골수로 싸워대기만 하면 좋은 결과 받기는 어렵다.[15] 이후 나이가 들며 폼이 떨어진 인천에서는 최전방에서 뛰었는데, 골 득점보단 포스트플레이와 사이드로 빠진 후 자신의 장기인 크로스를 올려주는 역할을 맡았다.[16] 여러모로 볼거리가 많은 경기였는데 그 중 하나가 경기 시작 전 포항팬들이 철조망에 붙인 '''"설기현 선수에 대한 피해보상비 청구서(아래 짤방에 나온)"'''와 홈 경기 서산 개최에 따른 울산 팬들의 울산 구단 디스 현수막 등.[17] 비록 울산은 전북에게 합산스코어 4:2로 패배해 준우승에 그치나, 설기현 덕에 따낸 이 챔피언스 리그 티켓으로 1년 뒤 '''K리그 유일무이의 대기록,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무패 우승에 성공한다.'''[18] 지도자 1급 자격증이 없어서 올해 내로 딴다고 했지만 감독 모집 공고에 지원도 하지 않았으면 지원 조건에도 맞지 않다.#[19] 3월 7일 있었던 2015 시즌 K리그 클래식 개막전, 광주 FC와의 경기 중에 걸려있던 걸개들이다.[20] 인천에서 설기현의 등번호가 9번이었다.[21] 그나마 지난 시즌에 포텐을 터뜨린 진성욱이 있긴 하나, 아직은 한참 어린 선수이고, 여러 가지를 잘 하는 선수이긴 하지만 체력적인 면에서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무작정 주전으로 쓰기도 애매하다. 실제로 지난 시즌엔 디오고와 계속해서 주전 경쟁을 해야 했다. 또한 부상으로 초반에 어쩔 수 없는 결장을 하는데 이럴 경우 사실상 주전급 공격수는 케빈밖에 없다.[22] 게다가 그 와중에 해외 연수까지 다녀왔다.[23] 물론 홍명보는 자격에 맞지 않는 라이센스를 가지고 국가대표 코치를 맡았기에 논란이 있었다.[24] 물론 이 당시 지도자 자격증이 없어서 말썽이 있기는 했다. 1년 만에 따내기는 했지만...[25] 이 당시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코치들 커피 심부름하는 장면도 자주 보였다(...).[26] 결정적으로 미들스브로는 사우스게이트가 감독이 된 뒤 조나단 우드게이트를 임대하고 로베르트 후트를 영입해 사우스게이트의 포지션인 중앙 수비 보강에 성공했다. 후트야 말할 것도 없고, 우드게이트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부상을 달고 와 초반에 경기를 뛰지 못했으나, 매우 좋은 활약을 보이며 결국 완전 영입 협상에도 성공했다. 이게 다 사우스게이트가 갑자기 은퇴한 것이 아니라 미리 은퇴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27] 설기현은 통역가가 아니므로 인천이 통역가를 구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데 물론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이 역시도 설기현이 미리 은퇴만 통보했다면 시즌 개막 전에 미리 통역을 구했을 일이다. 그럼에도 본인이 자청해서 케빈 적응까지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 설기현이다.[28] 김봉길 해임, 이임생 감독 임명 실패, 이석현을 매우 싼 값으로 FC 서울로 이적시킨 것 등.[29] 사실 이 경기 전까지는 굉장히 찬스를 놓친 장면이 많았다. 비록 많은 찬스들을 만들 수 있던 것도 설기현이 유럽 선수들 상대로도 밀리지 않던 피지컬을 가지고 있던데다가 히딩크도 그 점을 적극 활용하였기 때문이지만, 골결정력은 다소 아쉬웠고 특히 비겼던 미국전에서 많은 찬스를 놓친 것 때문에 여론이 안 좋았다. 하지만 저 골로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는 소중한 골이었고, 더 나아가서 안정환의 미안함을 상쇄해 주는 중요한 골이었다. 안정환이 PK를 놓치고 멘탈붕괴 수준으로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골로 인해 안정환이 연장전에서 평생 잊을수 없는 골든골을 넣었다.[30] 대한민국 최초[31] 부평고 듀오 이천수최태욱은 스피드와 크로스는 좋았으나 170 초반의 단신이라 몸싸움이 안됐고, 스피드와 몸싸움으로 유럽 선수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차두리는 크로스가 부정확했다.[32] 2002 월드컵은 특이하게 미국전을 제외한 6경기가 유럽팀이었다. 폴란드, 포루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터키, 미국도 남미나 아프리카보다는 유럽 스타일에 가깝다.[33] 2021년 시점에 설기현에 근접한 레벨의 크로스를 올리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는 찾기 힘들다. 2002세대 이후 선수들이 런닝크로스는 커녕, 최성국(1983)이나 김민우(축구선수)처럼 오픈 찬스에서도 황당한 수준의 크로스를 올리는 일이 빈번했던 한국축구의 사정상, 한국 국대 역사에서 최고의 크로스 능력을 가진 선수를 논할 때 설기현은 반드시 거론되는 선수 중 하나이다.[34] 강력한 헤더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 뛸 시 크로스능력과 함께 대표적인 장점이었다.[35] 2002년 월드컵에서도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넣기 전까지 설기현은 이 때문에 욕을 먹기도 했다. 미국전에서 완벽한 찬스를 세 번이나 날려먹고 포르투갈 전에서는 후반 막판에 1대1 찬스도 말아먹었다.[36] 그를 비하하는 가장 대표적인 별명이 설거북이었는데 사실 이건 오명에 가깝다. 주력이 빠르다는 서술이 자주 되어 있듯이 187cm의 선수치고는 그렇게 느린 편은 아니었는데 덩치가 덩치크다 보니 느려보이기도 했고 골대 앞에서 어기적 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여 당시 축구를 잘 모르거나 국가대표 축구선수라면 일단 까고보는 팬들에게 붙은 잘못된 별명.[37] 당시 레딩에는 케빈 도일, 데이브 킷슨, 르로이 리타, 셰인 롱 등 이미 1군 공격수로 쓸 만한 선수가 네 명으로 시즌을 다 꾸릴만 했고 정확한 크로스, 빠른 스피드, 돌파력을 지닌 설기현은 오히려 오른쪽 윙어 쪽이 경쟁하기 더 쉬운 편이었다. 그런데 이미 저 네 명이 있는데도 '''볼 터치나 골 결정력이 좋지 않은''' 설기현을 저 선수들을 제끼고 굳이 공격수로 쓸 이유는 사실상 없었다. 사실상 편하게 주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자기 스스로 내쳐 버리고 팀을 이적하며 커리어과 완전히 꼬여버린 것.[38] 이 문제는 한 때 시오 월콧도 겪었던 문제인데 아스날 입단 후 중앙 공격수로 뛰기를 원했던 월콧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지 16-17 시즌부터 벵거를 설득하여 오른쪽 윙어로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39] 풀럼 시절엔 출장 경기 보장 조건 계약까지 있었다.[40] 에레디베시로 비유하자면 아약스, PSV까지는 아니더라도 페예노르트 정도의 평가는 충분히 받던 벨기에팀으로, 빅리그 최강팀으로의 징검다리 역할도 충분히 수행하던 팀이다.[41] 물론 울버햄튼은 강등 되었음에도 선수 이탈이 거의 없었기에 당해 승격 0순위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05/06 시즌에 승격하지 못 했다.[42] 분데스리가가 지금같은 위상을 가지던 시절이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알 힐랄보다 못 하는 팀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43] 울버햄튼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 시절의 챔피언쉽 리그는 아주 전통적인 영국식 킥 앤 러쉬 위주로, 단순 피지컬만 보자면 EPL 보다도 거친 면이 있었다. 이런 선수들 상대로도 피지컬에서 우위를 점하며 드리블로 둘 셋을 뚫어내고 크로스를 올릴 정도였다. 승격 0순위 팀이었음에도 팬들이나 동료 선수 조차 이런 선수가 왜 2부에 왜 왔는지 이해를 못할 정도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