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
1. 개요
참고(사건 일지)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안양 초등생 살인 1 크리스마스에 사라진 두 아이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 안양 초등생 살인 2 싸이코패스가 흘린 눈물의 의미
2007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 우양파크빌# 놀이터에서 오후 3시 30분경 명학초등학교 친구 2학년 우예슬 양과 같은 학교 4학년 이혜진 양이 친구들과 헤어진 후 실종되었다가 다음해인 2008년 3월 11일 이 양, 3월 19일 우 양의 시신이 발견된 사건이다.[1] 더불어 3월 17일 용의자 39살 정성현[2] 이 검거되어 이 사건은 '정성현 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
2. 범인 정성현
3. 피해 아동들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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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 생존해 있었다면 현재 이 양은 만 27세, 우 양은 만 26세.
실종 당일 오후 3시 30분 경, 이 양과 우 양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 헤어졌으며 16시 10분경 안양문예회관 앞 야외 공연장 CCTV에서 포착되었다. 이들은 오후 5시경 안양문예회관 인근 상가 주인에게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이후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익일 오전 0시 30분경 두 어린이의 가족이 경찰에 미귀가 신고를 한 것으로 수사가 시작된다.
4. 수사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 이 후 목격자와 제보가 전혀 없어서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12월 31일 공개수사로 전환된다. 하지만 그래도 성과가 없자 다음해 1월 8일 신고보상금을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으로 올리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건은 사실상 '''2달 동안''' 공백이 되었다. 실제로는 이 과정에서 수사가 부실하고 비합리적이었다는 내용의 수사 관계자 내부 고백이 있었다. [3]
3월 6일 어청수 경찰청장이 원점에서 재수사를 지시함에 따라 재수사는 시작되었고 그 결과 3월 11일 오후 4시 경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호매실동 호매실IC 칠보산에서 동원훈련 중이던 예비군에 의해 암매장된 여아의 토막시신이 발견되었다. 실종 77일 만이었다. 3월 13일 국과수의 DNA 검사결과 시신은 이 양으로 확인되었고 이 양의 생환을 기다리던 이 양의 가족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우 양의 생존 가능성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다음날에는 경찰이 이 양의 집에서 130m쯤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던 정성현이 사건 당일 동안구 관양동 렌터카 회사에서 현대 쏘나타를 빌렸다가 그 다음날에 반납한 사실이 확인되었고 해당 차량의 트렁크에서 혈흔을 채취하였다. 이틀 후, 혈흔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 양과 이 양이란 것이 드러나면서 두 어린이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일 오후 9시 25분경에는 충청남도 보령시의 어머니의 집에서 있던 용의자 정성현을 검거하였다. 정성현은 검거 당시에는 혐의를 전면 부인하면서 억울하다는 식의 말만 되풀이하였다.
이후 정성현은 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후 당황하여 시신을 유기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경찰이 교통사고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거기다 혈흔 및 렌터카 대여 기록을 증거로 대면서 압박을 주자[4] , 3월 17일 낮 12시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자백 후에도 진술이 오락가락해 수사가 원활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사망이 확인되었지만 시신이 없어 실종 상태였던 우 양을 시화호에 묻었다고 하다가 다시 오이도에 묻었다고 하다가 오락가락했었다. 아무튼 3월 18일 정성현은 영장이 발부되었고 7시간 후 정성현이 사체를 유기했다고 지목한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군자천을 수색하던 해병전우회 한 회원이 오후 4시 43분경 군자천 군자7교에서 군자8교 사이 제2간선 수로에서 어린이의 시신이 돌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오후 6시경 상류쪽으로 1㎞쯤 떨어진 군자6교와 군자7교 사이에서 시신 일부를 추가로 발견했으며 오후 6시 30경에는 군자5교 인근에서도 찾아냈다. 실종 88일 만이다. 3월 19일 국과수는 이 토막 사체들이 우 양이 맞다고 발표하면서 우 양의 사망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3월 24일 오전 7시 50분경 시화호 군자천 주변 갯벌 지역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이 것 역시 치아 구조와 DNA 분석 결과 우 양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성현은 이 양의 시신은 토막 낸 후 야산에 한 곳에 매장했지만 우 양의 시신은 군자천에 버리는 바람에 시신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것이다.
시신이 이미 발견되었던 이 양은 3월 17일 안양의 메트로병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진 후 다음날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되었다. 우 양의 경우 시신 대부분이 발견되었지만 상반신 몸통 일부는 끝내 발견되지 않아 장례식이 늦어졌다. 부모는 '''‘시화호 물을 다 퍼서라도 예슬이 몸을 다 찾고 싶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4월 17일 오전 6시 50분경 관이 안양 메트로병원을 나와 모교인 명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모교에서 추모 속에 오전 8시 40분경 화장터인 경기 수원 연화장으로 가서 화장되었다.
5. 밝혀진 범행 과정
정성현의 경찰 진술에 따르면 2007년 크리스마스날, 정성현은 새벽 대리운전을 마치고 아침부터 대학교 선배[5][6] 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생맥주를 2000cc를 마셨다고.[7]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급기야 비닐봉지에 '''본드 흡입까지''' 했다고 한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정성현은 "환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때마침 동네 놀이터에서 놀다가 어머니 선물을 사고 귀가하던 두 여자아이,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을 발견한 정성현은 아이들을 위협하여 자기 집으로 끌고 가 성추행한 후 성폭행을 시도했고, 이에 반항하던 아이들을 제압하고 모두 처참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심하게 훼손했다. 그리고 나서는 태연하게 중국집에 음식을 시켜 먹은 것으로 밝혀졌다.
정성현은 시신훼손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는 시신의 발목부터 무릎, 허벅지 순으로 잘라냈다. 정성현은 이혜진 양의 시신을 빨간색 플라스틱 통에 담아 렌트한 차량(ef 쏘나타) 트렁크에 싣고 수원시 권선구 인근에 야산, 그리고 근처 하천으로 가 암매장하였다. 12월 26일 새벽 4시쯤에는 똑같은 방법으로 우예슬 양의 시신을 아까와는 달리 시흥시 군자천에 버려진다. 그리고 정성현은 아침이 밝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를 찾아가 태연히 컴퓨터를 고쳐줬고 오후 3시 쯤에는 렌터카를 반납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78일 후, 2008년 3월 11일. 수원시 권선구에서 훈련 중인 예비군이 여아의 시신 머리부분이 땅 밖으로 노출된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시신은 30cm 깊이로 암매장 되어있었고 무려 열 토막으로 잘려 있었으며 일부 신체 부위에서 톱 자국이 발견되었다.
국과수의 DNA 검사 결과 시신은 이혜진 양으로 확인되었고 이혜진 양의 생환을 기다리던 가족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시신 상태로 미뤄 보았을 때 실종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 정확한 사인과 사망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혜진 양은 1남 2녀 중 막내딸로 온 가족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찰은 살인범 정성현이 사건 당일(25일) 렌트카 회사에서 차량을 빌린 후 다음 날(26일) 반납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두 어린이와 자동차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도 추가로 발견했다.
경찰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정성현은 25일 크리스마스날에 집안에만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해당 렌트 차량의 트렁크에서 혈흔을 확보, 혈흔의 DNA 감식 결과 두 어린이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2008년 3월 16일, 정성현(40세, 대리운전기사)을 충남 보령의 정성현의 어머니 집에서 검거했다.
정성현은 체포 후 수사 과정에도 계속된 거짓말과 허위 진술로 수사당국의 혼선을 유발했다. 그중 대표적인 거짓말이 두 어린이를 차로 치어 죽게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정성현은 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후 당황하여 시신을 유기하였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경찰이 교통사고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거기다 혈흔 및 렌터카 대여 기록을 증거로 대면서 압박을 주자 3월 17일 낮 12시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자백 후에도 진술이 오락가락해 수사가 원활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사망이 확인되었지만 시신이 없어 실종 상태였던 우예슬 양을 시화호에 묻었다고 하다가 다시 오이도에 묻었다고 하다가 오락가락했었다. 그 뒤 3월 18일 군자천에서 우예슬양의 토막 시체 일부분이 발견되었다.
그후 3월 19일 수원지법은 정성현을 구속한 뒤, 3월 22일 현장 검증을 실시했다.
3월 24일, 공사장 인부 김모씨에 의해 우예슬 양의 머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우예슬 양의 몸통 윗부분은 끝내 발견하지 못한 채 유족들은 우예슬 양의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렀다. 따라서 국과수는 이 토막 사체들이 우예슬 양이 맞다고 발표하면서 우예슬 양의 사망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6. 범행 동기
정성현은 유년기에 아버지로부터 폭력과 학대를 당하였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재학 당시에는 친구들로부터 집단따돌림을 당하여 고등학교도 적응하지 못하였다(한국 현행교육법상 초등학교, 중학교는 의무교육에 해당).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여성들로부터 원인 모를 배신감과 혐오증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범행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이후 안양시의 한 자취방에서 은둔하며 지냈던 정성현은 사건 당일 크리스마스 예부 후 두 초등학생들에게 접근하여 자기네 집에 아픈 강아지를 돌봐달라고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여 성추행을 하려다 저항하자 살해 후 시신을 토막 내어 각각 호매실IC 인근 야산에 암매장하고 시흥 군자천에 버렸다고 진술했다.
7. 진술 번복
앞서 언급했다시피 정성현은 자백할 때부터 '내가 안 했다'고 했다가 '했다' 이렇게 진술이 오락가락 했었는데, 그 후에도 이번에는 어떻게 살해를 했는지에 대해서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처음에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더니 나중엔 벽에 밀어서 살해했다고도 진술한 것이다. 다만 살해한 것 자체는 인정했다.
8. 결과
정성현은 사망한 두 초등학생과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웃집 아저씨였으며 평소 안면이 있었다. 따라서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우리 속담을 다시 한번 깨우치게 만드는 사건 중 하나로 경찰도 이 사건이 부실수사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후 정성현은 2009년 2월 사형을 선고받았고, 사형 집행이 사실상 모라토리엄 상태라 실질적으로는 가석방 없는 무기수로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9. 군포 부녀자 상해치사 사건
이 사건이 터지기 4년 전인 2004년 7월 17일 새벽 1시경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금정역 인근 W 모텔에서 성관계 대가를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이유로 44살 정 모 여인을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집 근처 야산 등에 버렸다.
참고로 이 사건은 살인이 아니라 상해치사로 처리되었다.
10. 중랑천 하수구 토막 시체 유기 사건 해결
이 사건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어떤 미제사건을 해결하는데 공헌을 하기도 했다.
2006년 8월 22일 서울특별시 중랑구 중랑천 하수구에서 몸통만 있는 여성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시신의 신원을 알 수 없어 수사는 답보였다. 당시 경찰은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머리와 손 등을 끝내 찾지 못해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몸통은 비교적 큰 부피 때문에 철망에 걸려 흘러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된 것이었다. 시신의 연령대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추정되었으며, 성별은 여성이라는 것만 오로지 확인된 상황이었다.
미궁으로 빠져드는 이 사건은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을 계기로 각 경찰서에 실종전담팀이 설치되면서 급진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각 경찰서에 3명 가량의 실종전담팀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변사자와 유랑자의 신원을 적극적으로 확인해 그들의 가족을 찾아주는 역할을 했다. 성동경찰서 전담팀은 2년 전 실종되었던 40살 김 모 씨의 어머니가 실종 신고를 낸 것에 주목하여, 김 씨의 어머니의 유전자와 변사체의 유전자를 비교한 결과 그들이 가족 관계라는 사실을 2008년 7월에 확인했다.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한 경찰은 이에 따라 김 씨의 남편 41살 김 모 씨가 사건 발생 직후 잠적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였고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여겨 그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용의자 김 씨는 휴대폰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건강보험 사용 기록으로 인해 그의 소재지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그는 아파도 병원, 약국을 방문하는 것도 피할 정도로 치밀한 도피생활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일용직 노동자인 김 씨가 연고지인 대구광역시에서 생활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7월부터 2개월 동안 공사판을 전전하며 탐문한 끝에, 지난 2008년 9월 17일 밤 김 씨를 체포했다. 김 씨는 은둔생활에 지친 듯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이유로 2006년 5월 17일 중랑구 자택에서 아내와 다투었고, 그녀의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이후 시신 유기를 쉽게하고자 사체를 절단하였고, 절단된 사체를 세 비닐봉지에 담아 중랑천 하수구에 버렸다'는 모든 혐의 사실을 경찰에서 시인했다.
11. 그 후
11.1. 유가족들의 망가진 삶
이혜진 양 가족들의 삶은 막내의 죽음 이후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장례식 때 "너를 안고 잘 때가 가장 행복했는데..."라고 한탄했던 아버지는 일을 하려고 해도 막내딸이 계속 생각나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10여 년간 일했던 제조업체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는 일정한 직업 없이 하루하루를 눈물과 술에 의지해 보냈고, 건강이 악화돼 '''몸무게가 65kg에서 50kg 이하로 줄어들 정도로''' 수척해졌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생계마저 막막해졌다. 그동안 어머니가 시간제 파출부나 식당 일 등을 나갔지만 생활비를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도시가스비도 못 낼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양 유족에게 지급된 위로금은 고작 1000만원이다. 가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었는데, 범죄피해자 보호법이 2011년부터 시행됐지만, 소급적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
물론 범죄피해자 지원센터에서 친분을 가지면서 오랫동안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50여 회에 걸쳐서 가정방문, 상담, 심리치료를 해 왔고, 생계비와 생활필수품 지원, 주거환경 개선(도배 지원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심리상담치료와 약물치료, 각종 지원에도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은 치료되지 않았다. 범인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도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진 못했다. 오히려 '그런다고 우리 딸이 돌아오느냐'며 울분을 터뜨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만 커져 갔다고. 딸이 변을 당한 날인 크리스마스는 '악몽의 날'로 변했다. 그날 주려고 샀다가 끝내 전해주지 못한 인형을 끌어안고 울고... 이 양은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졌을 때 이 씨가 얻은 소중한 막내딸이었으며, 애교도 많았기에 그만큼 그는 딸에 대한 애착이 강했으므로 딸이 허망하게 살해되자 그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6년이 채 못 가 딸을 뒤따라가고 말았다.'''
2014년 3월 3일, 이양의 아버지 이창근 씨는 향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그의 지병인 심근경색. 다만 부검 결과,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어서 간에도 매우 심한, 간암으로 악화될 수준의 간경화 증세가 있었다고 한다. 간이 거의 살아날 가망이 없을 정도로 굳은 상태였다고. 아버지마저 끔찍한 범죄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그의 시신은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되어 앞서 딸이 묻힌 안양 청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남은 가족도 고통받는다는 점에선 다를 것이 없다. 어머니의 고통 또한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못 먹고 못 자고 스트레스 등으로 치아도 성한 게 하나도 없고, 아이를 그렇게 잃은 후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형제자매들(언니와 오빠) 역시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 진학까지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실종 사건이어서 아이의 신상이 다 공표되었고 장례식에도 학교 친구들이 조문을 왔었기에 '그 사건 희생자 유족'이라는 걸 주변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서 주위의 시선과 수군거림에 상처가 많다고 한다. 오빠는 해병대에 자원입대 했으나 하필 '''복무 중 연평도 포격 사건을 겪으면서''' PTSD를 하나 더 얻고 말았다. 후유증으로 불면 등 불안증세에 지속적으로 시달리고 있다고.[8] 이 소식은 안 그래도 약해졌던 아버지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친구 앞에서 펑펑 울면서 “아들마저 잃는 줄 알았어…. 혜진이가 살아 있을 때 지 오빠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하늘나라에서 지켜줬나 보다.”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한편, 우예슬 양 가족들은 피해자와 돌림자가 같았던 언니의 이름을 개명하고, 알던 이들과 아예 연락을 끊고 친척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이사를 가 잠적해서 아예 근황 파악조차 되지 않는 상태다.(이사 가고 싶은 건 이 양 가족도 마찬가지지만[9] 소문이 나면서 매수자가 나타나질 않아 떠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고통에 시달린다고 한다.) 도와주던 사람들조차도 그들과 연락이 안 되고, 추모제에도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11.2. 여전히 반성 없는 범인
2014년 10월 10일 정성현은 몇몇 언론사들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민사소송을 냈다. 관련 기사 정성현은 이들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내용 가운데, '정성현은 2009년 2월 세명(안양 초등학생 2명, 군포 부녀자 1명)을 '''살해'''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았다'는 문장을 지적하며, 군포에서 그가 정 모 씨를 때려 죽인 혐의는 살인죄가 아닌 상해치사죄로 판결을 받은 사실을 들어, "언론사가 사용한 '살해'라는 표현은 잘못되었고, 이 정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인하여 정성현이 명예훼손을 입었다."며 명예훼손죄로 각 언론사에 배상금 200만 원씩 청구했다.
그러나 판사는 '일반적으로 살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반드시 고의에 의한 죽임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며 '언론사들이 상해치사와 살인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허위사실을 보도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 외에도 정성현은 그가 유죄를 선고받은 연유 가운데 '강제 성추행'이라는 혐의 대신 '성폭행'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지만, 판사는 '성폭행이라는 용어는 국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용어로 그 개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며 그가 제기한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잊혔던 안양 초등학생 유괴 살해 사건이 잠시 재조명되었다.
2017년에 정성현은 그를 '살인마'라고 표현한 기자에 대한 소송장을 법원에 제출하여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12. 이 사건이 미친 영향
12.1. 초등학생 핸드폰 보급 급증
이 사건 이후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녀에게 핸드폰을 사주는 일이 급격히 늘었다.
이 사건 이전만 해도 초등학생들이 가장 선물로 받고 싶은 품목이 핸드폰이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여러 차례 기사화될 정도로 초등학생들이 핸드폰을 소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초등학생의 경우 일부 고소득층 부모의 자녀들이 핸드폰을 소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녀의 안전을 염려한 부모들이 너나 할것 없이 통신비 부담과 자녀의 핸드폰 중독 가능성을 무릅쓰고 핸드폰을 사주기 시작했다. 또한 각 초등학교 주변 문구점, 상점 등을 중심으로 '아동안전지킴이집'[10] 이 다수 지정되었고 각 학교에서는 아동들에게 유괴 및 성범죄 예방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하교시간 이후로도 학교 주변의 순찰을 강화했다.
다만 초등학생이 핸드폰을 소지하고 학교에 등교하는 데는 많은 교사들이 회의감을 나타냈다. 아동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우려가 있는데다 학교 일과 중 문제가 생기면 눈앞에 있는 교사가 아니라 떨어져 있는 부모에게 전화를 해서 해결하려 할 우려가 있어 교권이 침해된다는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 후인 2008년 7월 경기도 이천시의 모 초등학교에서 담임교사가 아이들을 빗자루로 체벌하는 동영상이 유포되어 큰 파문이 인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에서의 체벌 문제가 이 동영상이 유포된 이후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안양 사건은 초등학교 체벌 문제를 드러나게 한 나비 효과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2.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안양 사건과 관련한 피해 어린이들의 시신이 발견되어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산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생 여자어린이가 성범죄 전과자에게 납치당할 뻔한 사건이 발생하고 SBS가 이 사건을 보도하자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경찰이 늑장대응을 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관할 일산경찰서를 찾아가 담당 경찰관들을 강하게 문책했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범인은 서울 강남구에서 검거되었다.
안양 사건과 이 일산 사건으로 인해 대두된 아동안전은 이 해 4월 9일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최대의 이슈로 급부상했고, 여야 각 당은 학부모들의 표심을 잡기 위하여 아동안전 공약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대통령이 경찰서까지 찾아가 관계자들을 호되게 문책하는 모습은 국민들, 특히 초등 학부모들의 큰 호감을 샀고, 이것이 당시 집권여당이던 한나라당 지지율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한나라당은 민주화 이후 치러진 총선 수도권 지역에서 보수정당 역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렸다.
13. 둘러보기
[1] 이 사건은 특명 공개수배에도 '사라진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2] 이미 언론에서 신상이 공개되었기에 본 문서에서 밝힌다.[3] 관련 기사, 팟캐스트 방송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 '안양 초등생 살인' 편 참고. [4] 경찰이 증거를 대었기에 범인이 자백한 것은 확실치 않다.[5] 학교 선배라 하기는 그렇고 그냥 야간대학 동기다. 나이가 많아서 호형호제 하는 사이라고.[6] 하마터면 공범으로 몰릴 뻔했다고 한다. 그날 정성현과 만난 유일한 사람이고 자주 어울려 술을 마시고 그랬다고 한다. 경찰에서 범행 당시의 알리바이를 추궁하자 가족들과 외식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결제해서 알리바이를 못 밝힐 뻔했지만 차량으로 이동할 때 톨게이트 CCTV에 다행히 찍혔다고 한다. 또한 정성현의 동네가 주차하기가 불편해서 주로 호프집이나 식당에서 술을 같이 마셨다고 하는데 경찰에서는 만약에 정성현의 집에서 선배의 머리카락이 한 가닥이라도 나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한다.[7] 어느 주간지에서 위의 선배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인터뷰 마지막에 기왕 술 먹은 거 왕창 먹여서 하루 종일 집에서 잠이나 자게 만들 걸 하고 아주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또 담배 사러 나갔다가 피해자들을 보고 집으로 유인했다는 말에도 담배나 한 갑 사줘서 보낼 걸 하고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8] 이 기사가 나온 게 포격 5년 뒤인 2015년이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나고도 낫지 않았다면, 사실상 평생 후유증을 달고 살게 생겼다고 봐야 한다.[9] '''가해자가 살던 집과 지척인데다''' 이 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10] 만화가 이현세 화백이 아동안전지킴이집 안내 그림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