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토시오

 


1. 개요
2. 괴상한 가정환경
3. 가이낙스 창립
4. 애니메이션 평론가
5. 논란
5.1. 섹스 스캔들
5.2. 거짓 망상 섹스파트너 리스트 유출 사건
5.3. 혐한
6. 기타


1. 개요


岡田 斗司夫
1958년 7월 1일생 오사카부 오사카시 태생
전(前)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경영자 및 프로듀서, 현 애니메이션&특촬물 평론가, 노하우 전수 작가, 사업가,
본인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유튜버다.
가이낙스의 전(前)사장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오타쿠의 왕'이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오타킹'이라고 부르고 자처한 시절이 있다. 다만, 현재는 흑역사 취급인지 본인은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 시기에 <오타쿠학 입문>이라는 책이 번역 출판되면서 그 이름이 알려졌다.
2019년부터는 스스로를 사이코패스라고 자처하고 있다. 니코나마 방송과 유튜브에서도 "사이코패스인 내가 보기엔" 이런 식으로 방송에서도 몇 번이나 자신이 사이코패스라고 어필한다. 본인 말로는 정의감이 없고, 선에 대한 찬동이나 악에 대한 분노 같은 감정이 없다고 한다.출처 영상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인터넷에서 비판을 받고 욕을 먹어도 본인은 전혀 감흥이 없다는 말도 했다.

2. 괴상한 가정환경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 당시 공병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밥에다 콩가루를 뿌려먹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이었으나 어머니가 시작한 사업이 갑자기 잘 되어서 중학교 때부터 부유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때 사업에 대해선 논란이 있는데 해외 유명 브랜드의 짝퉁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것이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어머니가 자수 사업을 시작했는데, 옷에 달린 해외 유명 브랜드 로고 상표를 변형한 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입 벌린 악어로 유명한 프랑스의 스포츠 웨어 브랜드 라코스테는 악어가 뒷발로 일어나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걸로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상은 외국 브랜드 상표를 똑같이 복사한 짝퉁을 만들어서 팔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디자인 흉내낸 옷에 외국 유명 브랜드 가짜 상표를 붙여서 팔면 수 십배로 비싸게 팔 수가 있다. 오카다 토시오는 부모 욕 먹이고 법률적인 위험한 것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1960년대 70년대는 지금처럼 저작권법과 상표법이 엄격하지도 않았다.
중학생 부턴 부모 덕분으로 잘 사는 집에서 자란 금수저였는데, 오카다는 이에 대해서 "내가 재벌2세라고 알고있는 사람이 많은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잘 산 건 사실이지만." 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부모님은 본인이 번 돈은 본인이 해외여행도 다니고 하면서 돈을 다 쓰고 돌아가셔서 재산을 남겨주지 않아서 물려받은 재산은 없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카다에게 한정된 용돈만 주고 과소비를 시키진 않았으나 오카다가 책이나 영화를 보는데는 상당히 개방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하며 책 만큼은 무한정 사주었다고한다. 그래서 대학생 당시에 오카다의 집에는 1만 7권에 가까운 서고가 있었다고 할 정도이다. 그리고 영사기를 집에두고 우주전함 야마토를 즐겼다고 한다. 심지어는 아예 오카다 전용 TV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오카다 말로는 아버지도 특촬물이나 애니메이션을 즐겨봐서 취미가 맞았다고 한다. UFO와 초능력은 실존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으로 SF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SF 소설과 잡지는 일본에서 출간된 책은 다 사모으고 소장하는 중증 SF마니아였다.
집도 대학 시절에 가면 증축을 했는데 복층집이었으며 집 지하에 핵쉘터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직접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핵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굳게 믿고있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큰 쉘터는 아니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둘만 들어가면 꽉차는 쉘터였다고 한다. 오카다는 이 사람들은 전쟁나면 자식들도 버리는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이 핵 쉘터는 튼튼하게 만들었지만 발전기나 공기 순환시설은 없으며 방사능에 대한 대비도 없었는데 이는 오카다의 아버지가 방사능도 위험하지만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식량을 빼앗으러 오는 폭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즉 정확히는 그냥 대피 시설이었다.
어머니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소득세로 세금으로 많이 내는 것이 불만이 컸다고하며 세금 대책으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종교법인을 만들어 자신을 교주로 놓고 당시 집 1층을 종교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고 한다. 원래는 단순한 탈세였기 때문에 어머니도 장난스럽게 여겼지만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진짜 하늘의 계시를 받는다는 착각에 빠져서 가족을 모아놓고 설교 (...)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종교 단체를 운영하는 거에도 비용이 들어가서 그걸 감안하면 세금보다 돈이 더 나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만뒀다고 한다.
머리가 상당히 좋은 걸로 유명해서 유치원 때 이미 기초 한자를 통달했으며 더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고 부모를 설득해 유치원을 그만두고 초등학교 입학전까지 놀았으며,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아이큐 테스트를 받았는데 150 이상의 수치가 나와서 '아 난 공부할 필요가 없겠구나.', '학교에서 숙제 내는 걸 하고있는 건 기회 비용의 낭비다.' 라고 생각해서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단편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즉 촬영장비가 집에 있었다는 것이다. 대신 독서를 했다고. 그래도 공부는 꽤 했는지 중학교 고등학교는 꽤나 좋은 학교를 갔다.
이렇게만 들으면 허무맹랑해서 전혀 믿을 수가 없는데 안노 히데아키, 야마가 히로유키 등 그의 지인의 말에 따르면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 아오이 호노오에서도 언급된다. 지인 말이라고 하는데 안노 히데아키나 야마가 히로유키는 실제로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있으면 팩트체크 업데이트 강력 요망. 애당초 사기꾼 기질이 있어 아이큐가 150 이상이라는 주장은 정식으로 멘사 테스트를 받아서 객관적으로 증명된 멘사 회원도 아니라, 머리가 좋다는 것은 본인 주장이다. 1958년생으로 오카다 토시오와 동갑인 심형래도 자기 아이큐가 높다면서 실제 학력은 고졸인 주제에 고려대를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당시에는 혈액형 신봉설처럼 아이큐가 얼마니 어쩌니하는 아이큐 신봉설이 퍼져서 저마다 자기가 아이큐 높다고 뻥치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돈만 주면 입학가능한 사립 중고등학교는 무시험으로 진학가능했다. 그리고 그렇게 머리 좋다고 자랑하는 오카다 토시오가 정작 들어간 대학교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지방 3류대. 그리고 자화자찬 자랑을 하면서 본인은 영어를 마스터해서 능통하다고 했는데, 그 잘한다는 영어 스피킹을 유튜브에서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은 아직까지 없다. 유튜브 채널에서 레퍼런스로 꺼내 드는 책도 영어 원서가 아니라 일본어 번역본만 가져온다. 영어 원서 해독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면서 본인 나이 60살이 훨씬 넘어서 그제서야 자기가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깨닫고 인터넷, 유튜브에서 동네방네 "나는 사이코패스"라고 소문내고 다니는 사람이 오카다 토시오다. 1990년대 중반부터 오타쿠라는 서브컬쳐계에서 유행하니까 스스로 "나는 오타쿠의 왕이야!"라고 스스로 '''오타킹'''을 자처하면서 마치 자신이 오타쿠 집단을 대표하듯이 행세한 적이 있고, 2000년대 후반에 배트맨 시리즈에서 조커(다크 나이트 트릴로지)가 사이코패스 캐릭터로 인기를 얻고 이후 조커(2019)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인기를 얻자, 어느 날 갑자기 오카다 토시오는 스스로 나도 사이코패스라고 느닷없이 커밍아웃을 하고는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1]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는 사이코패스가 바라보는 어쩌구 저쩌구하면서 마치 인간 심리학 박사 과정을 졸업한 정도로 허세를 떨고 있다.

3. 가이낙스 창립


오사카 전기통신 대학에 입학했는데 집에서 학비로 보내주는 돈 대부분을 애니메이션,특촬 덕질에 탕진하고 4년 동안 학교에 거의 나가지 않아서 결국 제적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오사카에서 세번째로 열리는 SF 컨벤션 대회 통칭 'DAICON 3"에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만들 생각을 했고, 지인의 소개로 오사카 예술대학 영상학과에 다니는 안노 히데아키,야마가 히로유키 ,아카이 타카미 등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도 전설적인 오프닝 애니메이션으로 회자되는 그 영상 제작에 사비를 털어서 지원했다. 실제로 채색 작업같은 단순 작업은 또래의 대학생 아르바이트를 고용해서 시급을 주고 불러왔었다고 한다.
다이콘 3 행사에서 선보인 애니메이션은 아마추어가 만든 애니메이션이라 하기 힘든 뛰어난 퀄리티와 재밌는 패러디가 가득찬 내용이 화제를 끌고, 뉴스에도 뜨고 상을 받기도 했다. 이 다이콘 3의 필름 제작의 애니메이션을 영상으로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본인이 운영하는 제네럴 프로덕츠라는 오타쿠 관련 굿즈 가게에서 1만엔이라는 비싼 가격으로 팔았는데 이 때 3000장이 나가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한다. 여세를 몰아 2년 후인 1983년 오사카에서 다시 열린 '다이콘 4'에서도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또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애니업계에서도 이미 소문이 나서 프로의 애니메이터도 제작에 참가를 해서 더욱 뛰어난 퀄리티를 선보였다. 특히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원화를 그린 바스트 모핑이 화제가 되고 이 영상을 만든 아마추어 영상 제작그룹 "다이콘 필름'은 업계와 애니메이션 팬층에서는 아주 유명해졌다.
이후 오카다는 다이콘 필름 명의로 <DAICON FILM판 돌아온 울트라맨>, <애국전대 대일본> 등 몇 편의 아마추어 단편 동영상을 자주 제작해서 역시 비디오 테이프를 만들어서 팔아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기획한 왕립우주군(원래는 8분짜리 단편 애니) 기획은 건프라로 떼돈을 번 것으로 유명한 "그 반다이"에게 가져가서 제작비 투자를 받기로 하고 1984년에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왕립우주군을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를 창립하고 초대 사장과 프로듀서를 겸한다.
이후 가이낙스에서 왕립우주군,톱을 노려라!,불꽃의 전학생,오타쿠의 비디오등을 기획하였다. 하지만 정작 기획안만 내놓고 사장이란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직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톱을 노려라도 기획안만 놓고 오카다가 도망가서 야마가 히로유키가 "사장이 저런 놈이란 게 알려지면 회사가 망한다." 라는 생각으로 오카다의 이름만 내걸고 각본은 자신이 썼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각본을 제대로 쓴 작품은 불꽃의 전학생 딱 하나다.
결국 92년 가이낙스에서 물러나게 된다. 당시 가이낙스의 다른 스탭들 말로는 "일을 안 해서 쫓아냈다." 라고 할 정도로 막장 경영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오카다는 이에 대해서 "이때 애가 태어났는데 애가 볼까봐 더이상 미소녀 벗기는 저질 애니는 못 만들겠더라." 라는 변명을 하고있다.

4. 애니메이션 평론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생긴 오카다 토시오였지만 이때부터 자신의 애니메이션,특촬에 대한 지식을 살려서 애니메이션 평론가, 크리에이터 강사로서 변신을 시도한다.
시작부터가 이미 치트키라 할 수 있는데 애니 업계에서 일하면서 업계인과 자주 접촉했다보니 그의 평론은 "이 스탭은 이런 사람들이고 이런 의도로 만들어졌다." 라는 과정까지 포함되어 있어 정보량이 많고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평론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의 평론이었다. 당시 지브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지브리의 애니메이터들과 인맥이 많은 오카다의 평론은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터뷰나 책에서도 오카다 토시오의 이름을 언급한 적도 없다. 오카다 토시오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언급하며 물어뜯고 핧고 빨고 짝사랑이 심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카다 토시오를 존재를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일하면서 만나긴 한 것 같으나 둘이 뭐 대화를 나누거나 했다는 정황은 없고 오카다의 정보는 대부분 다른 애니메이터들을 통한 정보이다. "미야자키 씨는 타카하타 이사오씨가 옆에서 말려줘야 제대로된 작품이 나온다" 라고 주장하며 모노노케 히메 이후의 작품의 평론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건 그냥 말 뿐이고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이놈하고 얽히지 말라는 모종의 조치가 내려져 더이상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추측이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평론을 보면 다른 애니메이터의 증언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미야자키의 작품 중 최고로 평가하는 작품은 6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On Your Mark'이다.
여기서 또 천운이 오는데 지인인 안노 히데아키의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안노 히데아키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있는 오카다는 이 어려운 작품에 대해서 굉장히 이해하기 쉬운 해석과 평론을 내놓기 시작했고 엄청난 명성을 얻는다. 당시엔 에반게리온은 내용이 너무 어려워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카다는 안노가 에반게리온을 만들 때 참고한 작품들을 열거하면서 에반게리온은 패러디 작품이며, 이런 걸 알고보면 이해하기 쉽다는 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갔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TV판 신세기 에반게리온 뿐만 아니라 안노 작품에 대해서 평가의 잣대가 굉장히 관대한 편으로 신 고지라는 희대의 명작으로 추앙했으며 팬들에게 혹평받은 에반게리온:Q 조차도 호평하면서 실드를 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동전사 건담의 팬이기도 하지만 심각한 퍼스트 건담 원리주의자로 퍼건 이후의 건담은 시청도 평론도 거부하고 있다. 기동전사 Z 건담도 보긴한 것 같은데 논평할 가치도 없는 작품이라고. 그러나 건담 타이틀이 붙는 후속작 외의 토미노 요시유키의 작품은 고평가한다. 바다의 트리톤이나 무적초인 점보트3, 전설거신 이데온, 전투메카 자붕글, 성전사 단바인은 고평가한다. ∀건담은 타이틀만 건담인 작품이고 토미노가 건담다움을 버리고 새로운 걸 하려고 만든 작품이라며 고평가했다.
이렇게 지금은 미야자키 하야오나 안노 히데아키와 관계가 소원해졌으나 의외로 친한 인물이 토미노 요시유키이다. 토미노 자신이 잘 모르겠거나 생각이 정리가 안될 때 브레인스토밍 담당으로 가끔 만난다고하며 [2]그래서 토미노에 대한 얘기는 직접 만났다고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문가 이상의 관계는 아닌 것 같다.
또한 글로만 평론을 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강연 활동도 많이 했는데 워낙 말빨이 뛰어나서 강연을 할 때마다 만석을 채웠다고 한다. 그리고 NHK와 협력해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썰을 풀어놓는 방송인 BS 만화야화, BS 애니메 야화를 기획해 상당한 시청률을 올리며 명성을 높인다. 이 프로그램엔 오카다 말고 히카와 류스케 등 다른 평론가도 참여했지만 유독 오카다가 주목받은 것은 그가 말빨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히카와 류스케도 명성으로는 그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말더듬이 있어서 방송에선 별로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이후에는 니코니코 동화에서 개인 인터넷 방송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저서 '오타쿠학 입문' (1996)을 통해 가이낙스를 만든 자신들의 업적을 포장하면서 "오타쿠는 사회적 약자, 음침한 사람들이 아니라 창작할 수 있는 원동력을 가진 사람들." 이라는 이유로 띄우는 자신만의 오타쿠론을 내놓으며 당시 사회적으로 무시받던 오타쿠 층의 결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평론과 비평은 실제로 프로듀서로 현장에서 일한 경험과 각종 관련 서적을 읽은 지식에서 우러나온 거라 대단히 정확하고 사실관계가 틀리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특유의 잘난 척 많이 아는 척하는 태도가 오버해서 저게 과연 실제로 저랬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도 만든다. 특히 지브리의 작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팩트가 아니라 오카다 토시오의 주관적인 거의 망상에 가까운 해석이 많아서 비판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장하는 하쿠의 정체는 어릴 적 오기노 치히로가 강물에 빠졌을 때 그를 구하고 대신 목숨을 잃은 친오빠였다 라는 해석을 하는 등. '니들은 이런 식으로 보는데, 내가 보기엔 이렇다'라는 식이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할 수도 있다. 자질구레한 실수도 있는데, 오카다 토시오는 ''오타쿠"라는 단어가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 이후로 NHK에서는 방송 금지용어로 지정되었다고 책에 썼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런 사실이 없어서, 공개적으로 실수였다고 사과하기도 했다. <오타쿠학 입문>에서 <썬더버드(특촬)>은 저예산이라고 썼는데, 1편당 당시 최고의 제작비를 제공받은 작품이다. 또 미야자키 하야오토에이 동화 입사지원서에 '미제(미국 제국주의) 만화영화에 대항하기 위해서 입사한다'라고 썼다고 썼는데 이 역시 확인 불가로 어디에서도 그런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입사 후에 디즈니 만화영화 기법을 많이 흉내내서 따라하고는 했다. [3] 그리고 <오타쿠학 입문>의 책의 일부 내용은 오카다 토시오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다른 평론가의 글(특히 망가특촬 관련)을 가져와서 짜집한 것으로 드러나 저작권에 관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특촬 평론 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서도 다수 작성했고 궤변에 능해서 좀 이상한 논리의 저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에서 레진이 번역해서 발매한 '세계정복은 가능한가'가 있다. 인간을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혈액형 판단같은 무근본 무근거 뇌피셜 잡소리도 책으로 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인문사회, 시사 문제에 대한 저서를 집필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돈이 될 것 같은 것은 뭐든지 책으로 출판한다.

5. 논란



5.1. 섹스 스캔들


2015년 일본의 가쉽 주간지를 통해 그가 수많은 여성과 동시에 교제하고 있으며 문란한 성생활을 지내고 있음이 폭로되었다. 지금까지 대략 80명의 여성과 교제했으며 2015년에는 9명과 동시 교제 중이었다고 한다. [4] 그중엔 나이차가 40은 나는 여대생도 있었다고 한다. 이 여성들은 오카다의 말빨과 재산에 혹해서 넘어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카다가 애니 업계의 중진이기 때문에 애니업계 들어가기 위해서 그에게 몸을 줬다고 하기도 했다. 그와 아이진(애인 주로 불륜관계일 때 쓰는 말) 관계를 맺은 여성이 그린 고발 만화에서는 동의하지도 않은 성관계를 강요하는 성폭행에 가까운 행위였다고 한다. 그 여성에게 술을 먹이고 호텔 앞으로 데려간 후에 말한 그 이유가 "내가 너 한테 그 동안 신경 써주고 도와줬으니까 그 보답으로 섹스를 제공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내가 너가 저항해서 섹스를 못 했으니까 그 여성한테 호텔비를 지불하라는 오카다 토시오한테 "뭔 이런 놈이 다 있냐"라고 경멸했다고 한다.
오카다는 여러가지 변명을 했지만 이미 수많은 증거 앞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사실 이 1980년대부터 바람기가 있어서 불륜을 저질렀고 동네에 소문이 나서 오사카에 더 살 수가 없게 되어서 도쿄로 이사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인간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스캔들로 그가 진행하던 사업 다수가 정지되었으며 오타킹으로서의 명성은 땅으로 추락하게 된다.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경찰에 잡혀가지 않은 건 오카다는 상대가 만약 미성년자일 경우 성년이 될 때까지는 대화와 데이트만 하면서 절대 성관계를 갖지 않았고, 상대가 거절하면 성관계를 하지 않았으며, 성관계를 할 때는 동의를 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남겼다고 한다. 저 위의 고발 만화에서도 당사자가 성관계를 거부하자 오카다가 그만두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참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강간 행위 직전에 여성이 발버둥쳐서 겨우 멈췄고, 오카다 토시오는 섹스를 안 했으니까 호텔비 2천 엔은 그 여성에게 너가 지불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은 여성이 동의한 양 증거를 남기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다. 아예 법정으로 갈 경우를 대비해서 다 계산했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데로 잔머리가 돌아가는 쓰레기같은 인간이다.
하지만 그전부터 꾸준히하던 개인방송과 블로그는 그의 출중한 말빨과 지식 덕에 여전히 잘나가고 있으며 현재는 개인방송과 유튜브 채널 후원, 광고료로 여전히 상당한 수익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개인 방송에선 저 문제에 대해서 "내가 말빨이 출중하고 남자로서의 매력이 넘쳐서 여자들이 꼬이는 걸 어떡하냐" 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뻔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생 전체를 놀고 먹은 막장 그 자체의 인생인데 지금도 부와 명성을 가지고 사는 걸 보면 천운이란 것이 실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
놀고먹는 것을 궁리한 것으로 더 큰 흑역사는, 한 때 사장인 오카다 토시오 본인한테 사원이 한 달에 만 엔씩을 갖다바치는 이상한 사이비종교 시스템같은 회사라는 것을 차려서 사원을 모집했다가. 사회적으로 인터넷 여론으로 엄청난 비판을 받고 포기한 적이 있다.

5.2. 거짓 망상 섹스파트너 리스트 유출 사건


今回インターネットに流出している、私と関係をもったとされる女性のリストですが、ほとんどは私が、仕事で会っただけの女性に対する妄想を書いたものです。
ほとんどは実在の人物を元にした創作であり、そのような事実もないのに、名前を出されてしまった方々に心からお詫びします。
岡田斗司夫출처
이번에 인터넷에 유출하고 있는, 저와 관계를 맺었다는 여성의 리스트입니다만, 거의 제가, 일로 만나기만 한 여성에 대한 망상을 쓴 것입니다. 거의 실재의 인물을 모델로 해서 만든 창작으로, 그런 사실은 없는데도, 이름이 나온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오카다 토시오
2015년 비공개 트위터 계정이 털렸는데, 오카다 토시오가 오사카 예술 대학 여대생들과 섹스를 했다는 거짓 망상 섹스 경험담이 쓰여있었고, 그 섹스파트너 리스트가 유출되었다. 2ch 과 트위터 등 인터넷 여론에서 비난이 일자 이후 사과했다.


5.3. 혐한


1958년생이라, 20대인 1980년대는 일본이 잘 나가던 거품경제 시절로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 미국을 턱밑까지 추격했던 리즈 시절을 보냈고,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가이낙스의 사장과 프로듀서로 일한 경험으로 인해 한국 애니업계는 일본의 하청업계로 실력도 기술도 딸리는 한참 아래로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오카다 토시오 말로 애니산업은 후진국에서는 불가능한, 즉 발전된 선진국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 한국으로 동화(動畵)를 하청 발주한 한국회사가 일본으로 보내오는 종이 박스에는 덤으로 한국 인스턴트 라면이나 한국 과자 등을 선물로 끼워 보냈는데, 괜히 이상한 마약 같은 것 보낸 것으로 오해받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것 보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이 일본으로 밀수 마약을 보내 장사를 하던 사건이 들통나서 일본에서 시끌법쩍했다고 한다. 한국을 저 밑으로 보고 깔보고 편견에 가득찬 태도였다) 오카다 토시오가 말하기로는 북한이 아닌 한국의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보낸 택배에서 마약이 나와서 난리가 났다고 발언했는데, 아마도 사건 자체를 북한의 소행을 남한의 애니메이션 회사라고 시프트 한 것은 혐한 성향으로 뇌가 착각을 일으킨 것으로 여겨진다.
일단은 아버지가 전쟁 경험자이기도 했고 본인도 고지라기동전사 건담 같은 반전 좌익 작품을 많이 봐서 그런지 아베 신조 정권의 정책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이고 넷 우익, 일본의 우경화나 전쟁에 대해서는 부정적 의견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5]
그런데 한국에 대해서는 유독 "한국과 일본인은 근원부터가 다르다", "한국인은 믿어선 안 된다", "한국인은 돈 문제나 시간 문제를 지키지 않는다", "한국의 문화는 열등하다", "한국은 그냥 무시해라" 같은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이 짬뽕된 극단적 주장을 한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당시 한국에 하청을 줬다가 제작 일정이 파투났던 거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 당시 경영자였던 오카다는 파산의 공포를 맛보았다고.[6] 사실 이에 대해서는 가이낙스의 책임도 어느 정도는 거론되고 있지만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항목 참조 바람) 원래 사람이 자기가 파산할 정도의 위기 상황이었다면 왜곡해서 기억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사고로 이어지기엔 충분하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에 대해서도 "현실을 숨기고 미남, 미녀만 나오고 있다", "저열한 문화가 담겨있으므로 볼 가치가 없다", "한국은 먹고 살기 넉넉한 엘리트가 아니면 창작자가 되기 힘든 환경이다. 따라서 모두가 공감하는 작품이 나오기 힘들다" 라고 혹평을 일삼고 있다.
요컨데 일반적인 넷 우익에서 혐한으로 이어지는 그런 흐름이 아니라 정말 개인적인 원한과 악감정이다.[7]
일본 내에서 혐한 인사로 유명하지 않으며 근거가 없다는 사람도 있는데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고 넷 우익을 싫어해서 일본 넷 우익들에게 찍혀서 혐한 인사로 유명해지지 않았던 것이지[8] 방송할 때마다 심심하면 혐한 발언을 하는 사람이다. 위의 발언도 유튜브 채널에 모두 존재하는 발언들이고 한국을 비판하는 혐한 영상도 따로 편집해서 올리고 있다. # 세월호 관련 한국의 국민성이 열등하다고 하는 영상, # 소녀상이 싫으면 3배 큰 반박 동상을 옆에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세우면 된다는 영상 (2016년. 5월 19일 방송)
오카다 토시오가 요즘도 유튜브 영상에서 "캉코쿠와네~ "라고 썰을 풀면, 한국 칭찬은 1%도 없고 한국 까고 욕하는 말 뿐이다. 이 때 니코나마(니코니코 동화 실시간 방송)의 댓글 반응은 혐한 성향의 일본인의 동조 댓글로 가득찬다. 오카다 토시오 본인도 그런 댓글 반응을 알고 있으니까 한국 까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

6. 기타


아내하고는 1981년 쯤에 결혼했다고 하는데 그래놓고 불륜을 일삼았으며 1999년엔 이혼했다. 딸이 있으며 지금도 가족끼리 만나기는 한다고 한다.
뚱뚱한 체형이었지만 한때 엄청나게 살을 뺐던 적이 있으며 이때 자신의 다이어트 법을 쓴 '레코딩 다이어트'라는 책이 50만 부이상 베스트 셀러에 올라가기도 했다. '레코딩 다이어트'란 그냥 그 날 그 날 자기가 먹은 음식을 일기쓰듯이 꾸준하게 기록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비만체인 경우 내가 이렇게나 많이 먹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각하게 돼서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을 자제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살이 빠진다는 거다. 하지만 운동 없이 식사량 조절로만 하는 다이어트 법이 제대로 될 리가 없고 결국 요요현상이 와서 몇 년만에 원래 체형으로 돌아갔다. 훗날 가쉽지에서 밝혀진 바로는 이 다이어트는 어느 여성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한 거였다고 한다. (...) 책을 쓴 본인도 결국 실패한 다이어트 비법인데 그 비법을 책으로 써서 팔아서 50만 부 이상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오카다 토시오는 돈을 많이 벌었다.
안노 히데아키 하고는 에반게리온 TV판 제작 중만 해도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어느 시기부터는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안노 모요코와 안노가 결혼할 때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신극장판이나 신고질라에 대한 해석도 가만보면 다 추측이다. 최근 수십 년간 안노 히데아키하고 직접 만나서 대담한 적도 없고, 안노 히데아키도 오카다 토시오라는 이름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 잘난 척 하길 좋아하는 오카다 토시오가 안노하고 직접 만나서 뭘 물어봤다는 말도 없다..그러나 안노가 2019년 12월 가이낙스 경영이 방만했다고 대대적으로 성토하는 칼럼을 기고하였으나 오카다 토시오의 이야기는 없고[9] 적어도 야마가 히로유키 전사장과 다르게 오카다 토시오랑은 에반게리온 제작 이후로도 일정 기간은 만났던 걸 생각하면 적어도 안노에게 큰 피해를 입힌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오카다를 아는 사람들은 오카다보다 더한 쓰레기가 있었다고 놀라워하는 반응. 또한 오카다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야마가는 예전부터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으며, 사기꾼들이 회사를 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하는 야마가의 자존심을 이용해 합법적으로 회사를 강탈하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것이며, 모든 것은 야마가 쪽이 뭔가 좀 모자라서 벌어진 일이었다."라면서 안노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
[1] 오카다 토시오의 자칭사이코패스라는 것은 어느정도 캐릭터 설정이거나 자뻑일 수 있으나, 조커(2019)의 인기를 보고 갑자기 만들었다는 부분은 사실과는 다르다. 그의 유튜브 영상에서 자칭 사이코패스 언급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16년 중반부터라, 호아킨 피닉스캐릭터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갑자기 커밍아웃했다는 것은 사실에서는 좀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2] 오카다 말고도 히카와 류스케하고도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3] 이 발언은 근거가 없으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인 오시이 마모루는 미야자키는 반미주의자가 맞다는 인터뷰를 여러번 하였고 붉은 돼지에도 디즈니 비판이 있다. 또한 미야자키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번 했다. 단 어디까지나 상식 선에서 할 수 있는 말로 이걸 보고 미야자키가 미국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그런 사람으로 여긴다면 곤란하다.[4] 더 웃긴 게 80명과 사귀었단 얘기를 자기 개인방송에서 자랑처럼 언급하였다. (...)[5] 그래서인지 일본의 극성 혐한들은 오카다를 자신들의 동지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매국노라고 몰아세우는 경우가 많다.[6] 하청업체에 대해서 갑질을 좀 했었다. 본인 인터뷰를 재구성하면 장인정신이 없네 어쩌지만 준 돈의 2배로 부리려다가 준 만큼만 된 것 가지고 난리친 것. 자세한 건 나디아 항목 참조.[7] 다만, 오카다 본인도 최종적으로는 자신들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시인하는 모양새인 듯 하다. 이것이 일본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한국에 대한 비판점이 될지는 몰라도, 전세계의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본다면 노동력을 착취하려다 실패했다며 하소연하는 걸로밖에 안 보이기 때문이다.[8] 사실 일본의 혐한 이론은 굉장히 극단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런 이론과 다르게 오카다는 자신이 한국이 싫은 자신만의 이유를 주장하고 있어 일본 내에서 혐한 인사로 분류하지 않는 것. 예로 오카다 토시오는 종군위안부에 대해서는 그런 건 전쟁 중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으며 일본이 없다고 하는 건 그런 게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넷 우익들은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9] 오카다 토시오는 에반게리온 제작 이전에 가이낙스를 그만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