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선수 경력

 


1. 개관
2. 선수 경력
2.1. 고교야구 시절
2.2. 한국프로야구 1기(1995~ 2003)
2.2.1. 1995 시즌
2.2.2. 1996 시즌
2.2.3. 1997 시즌
2.2.4. 1998 시즌
2.2.5. 1999 시즌
2.2.6. 2000 시즌
2.2.7. 2001 시즌
2.2.8. 2002 시즌
2.2.9. 2003 시즌
2.4. 한국프로야구 2기(2012~ 2017)
2.5. 국가대표 경력


1. 개관



이승엽의 커리어는 크게 대한민국 시절과 일본 시절로 구분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상 최고의 홈런타자, 반면 일본에서는 두 시즌[1]을 빼고 명성과 기대보다는 떨어졌다고 할수있다.

2. 선수 경력



2.1. 고교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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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해 착실히 실력을 쌓아오다 1992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한 이승엽은 1993년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12년만의 청룡기를 모교에 바치는데 일조했다.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한 것은 그의 활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다만 고3때는 팔꿈치 부상[2]으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2. 한국프로야구 1기(1995~ 2003)


이승엽이 있던 시절 삼성 라이온즈는 굉장히 타고투저의 경향이 심했다. 마운드가 약해서, 2001년까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승엽의 한국프로야구 1기 성적은 그야말로 어마무시 한데.. 1기 통산 OPS가 '''1.0이 넘는다.''' 그것도 서비스 타임인 95, 96년 성적을 합쳐서다. 남들이 1시즌에 OPS 1.0찍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승엽은 평균 성적이 OPS 10할 이상. 참고로 7년 연속 30홈런에 1기 9년 동안의 평균 홈런은 36개.

2.2.1. 1995 시즌


[image]
[image]
1995년 신인 시절, 삼성 입단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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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월 2일 광주 해태전에서 데뷔 첫 홈런을 치는 이승엽
[image]
1995년 데뷔 초기의 앳된 모습
처음에는 한양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가계약되어 있었으나, 수능에서 '''총점 40점 이하'''를 기록[3]하며 대학 진학 자격을 상실하여 자연스럽게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게 된다. 이 당시 교육부의 규정에 따르면 체육특기자라 하더라도 수능시험 총점이 40점을 넘지 못하면 대학 입학이 불가능했다. 프로 입단을 위해 고의로 시험을 망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본인 입으로 사실임을 밝혔다. 정확히는 '''37.5점'''을 맞았다고. 대학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는데 선배들이 술을 엄청나게 권하는 바람에 본인이 생각한 대학생활은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1교시는 다 찍은 다음 2교시부터는 당구장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이 증언은 한양대 입학 동기가 될 뻔한 김건덕 에게서도 나왔던 말이다. 둘 다 한양대 입학을 위해서 합숙소에 잡혀 있었는데, 여기서 일부러 못보기로 의기투합해서 김건덕은 37점, 이승엽은 37.5점이 나왔는데 실업계인 경남상고를 나온 김건덕은 수능 점수랑 상관이 없어서 결국 대학을 가야했다. 이후 김건덕은 어깨부상으로 결국 프로지명을 받지 못했다.[4][5] 훗날 이 일화를 모티브로 한 뮤지컬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가 대학로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경상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청룡기 대회에서 최우수투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망한 투수여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때에도 좌완 투수로 입단했다. 좋은 투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팀의 빈틈을 메꿔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경북고등학교 시절의 팔꿈치 부상으로 투수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6] 이미 군 면제를 받았던 상태였지만...하지만 우용득[7] 감독과 박승호 타격코치는 이승엽에게 배팅 재능이 있음을 확인해[8] 스프링캠프에서 돌연 타자로 전향시켜, 1년간 타자로 기용하기로 계획을 변경한다. 여기에 우용득 감독은 한 수 더 떠 전년도에 완전히 지명타자로 전향한 양준혁을 우익수로 이동시키고 검증도 안 된 고졸 신인을 1루수[9]로 박았다.

대타로 데뷔전을 치른 이승엽은 LG 간판 김용수를 상대로 중전 안타를 때렸다. 1995년 데뷔 첫 시즌 타율 .285에 홈런 13개로 신인으로서는 놀라운 활약을 보였지만, 이동수에게 밀려서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2.2.2. 1996 시즌


이듬해인 1996년 백인천 감독이 부임했는데, 백인천 감독은 이승엽에게 외다리 타법을 전수해 주었고[10], 1996년 2년차 시즌은 조정기를 보냈는데 첫 3할 타율을 기록했지만 홈런은 9개로 되려 한 자릿수로 줄어들었다.

2.2.3. 1997 시즌


그러나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장타에 눈을 떠 홈런 제조기로 명성을 높이며 대폭발했다. 126경기 전 경기를 출전해 .329의 타율과 32홈런 114타점으로 특 A급 타자의 바로미터인 3할 30홈런 100타점을 모두 훌쩍 넘겼다. 170안타를 쳐내 최다안타 1위에 올랐으며, 홈런과 타점 또한 모두 1위. 타율만 2위였는데 이것도 1위였으면 일찌감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뻔한 굉장한 시즌을 보냈다. 이 때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화려한 타선의 중심축에 서게 되었다.
1997년 5월에는 대구에서 LG 트윈스를 상대로 '''5:27'''이라는 역사적인 스코어를 포함하여 무려 3연전에서 '''49점'''을 내 LG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여기서 나온 논란이 '''부정배트 논란'''.
참고로 이때까지 이승엽의 별명은 신해철이 이끈 밴드 N.EX.T의 노래인 '날아라 병아리'에서 나온 얄리 혹은 스나이퍼였다.[11] 참고로 이 스나이퍼라는 별명은 스포츠서울에서 공모를 통해 선정한 별명인데, 3할을 쳐내는 정교함과 필요할때 마다 나오는 클러치 능력 등으로 인해 붙여진 별명이라고 소개되었으며 한동안 이승엽의 별명으로 애용되었다. 하지만 후술할 활약으로 라이온킹이란 별명을 얻으면서 이 별명은 사실상 묻히게 되었고 이후 스나이퍼의 칭호는 이 분이 가져가게 된다. [12]
장타 포텐이 터진 1997년 이후 이승엽은 명실상부한 한국프로야구의 홈런왕 신화를 만들어낸다. 특히 1997년부터 일본 이적 직전인 2003년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홈런 30개 이상을 쳐냈다. 1998년, 2000년을 제외하고 다섯 번의 홈런왕을 차지했다. 특히 1997년에는 앞선 3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던''' 삼성을 일약 포스트시즌에 복귀시킨 주역이 되었고, 이후로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타자로 활약하게 된다.

2.2.4. 1998 시즌


[image]
1998년 7월27일 대구 LG전에서 홈런을 치며 당시 월간 최다홈런 신기록(13개)을 기록한 이승엽 지금에 비하면 상당히 앳된 얼굴이다.

2.2.5. 1999 시즌


[image]
1999년, 전년도 홈런 경쟁을 펼쳤던 타이론 우즈와 함께
[image]
1999년 9월 30일 광주 해태전에서 54호 홈런을 친 이승엽

특히 1999년 54홈런으로 1998년 당시 두산 용병이었던 타이론 우즈의 42개, 토종타자로서 장종훈이 세웠던 41개보다 무려 열 개 이상 많은 공을 담장 너머로 날리면서 그의 주가는 폭등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홈런왕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 1999년 5월이 특히 뜨거웠는데, 한 경기 홈런 3개를 밥먹듯 쳐내면서 순식간에 5월 말 합계 20개 중반대 홈런숫자를 기록했고, 8월 초에 장종훈과 우즈의 기록을 깨 버렸다. 그 해 왕정치의 기록을 깨뜨리고 60개 이상 칠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나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리고 홈런 기록을 새로 써나가던 시절인 1999 시즌때 대구구장은 '''외야가 먼저 매진이 되고 사람이 더 많이 들어갔으며 잠자리채가 쫘악 깔려있었다'''.[13] 특히 1999년 한화 이글스와의 대구 홈 마지막 경기에서는 '''홈런성 타구'''가 한화의 용병 제이 데이비스에 의해 잡히자 팬들이 항의 차원에서 '''물병 등의 쓰레기를 투척'''했고 데이비스는 '''우산을 쓰고 외야에 서 있기도 했는데''', 하필 그 시점에 이미 홈런 54개를 친 상태여서 더했다.
1999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때는 홈런을 치며 활약했지만, 정작 자신의 동갑내기 임창용이 정규시즌 내내 너무 무리하게 등판한 결과 불을 지르면서...

2.2.6. 2000 시즌


[image]
2000년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홈런을 치고 난뒤.
그러나 외다리 타법의 약점이 드러나자 2000 시즌에는 54개의 홈런에서 36개로 줄어들었고 타율도 전년도 .323에서 .293로 떨어지며 위기가 시작됐다.

2.2.7. 2001 시즌


[image]
2001년 4월 6일 대구 한화전에서 자신의 윗대 홈런왕이던 '''장종훈'''의 통산 1000타점 기록을 축하해 주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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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 21일 최연소 200호 홈런을 기록한 모습
전 시즌에 이어 외다리 타법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던 모양인지 39개의 홈런을 기록했음에도 타율이 .293에서 .276으로 떨어지며 위기가 계속됐다.
하지만 2001년에 이승엽 인기는 매우 높았기때문에 신윤호를 상대로 1차투표에서 지고도 2차투표로 MVP를 수상한다. 당시 1차투표에는 신윤호가 우위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과반수가 투표를 안하면 1, 2위를 두고 재투표가 되는 규칙이 있어서 재투표했고 신윤호, 이승엽을 뽑지 않은 기자들이 죄다 이승엽에 투표해서 이승엽이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에 이승엽은 "이런 성적으로 MVP를 받아 부끄럽다."는 소감을 남겼을 정도로 이 시즌 이승엽의 MVP 수상은 다소 이례적이었다. 이후 타격폼 수정을 통해 위기를 돌파했고다.

2.2.8. 2002 시즌


2001년 전까지는 혼자서 홈런을 치던 타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렇다고 타자가 없던 것도 아닌게 1997년엔 양준혁(30홈런), 신동주(21홈런)가 버티고있었고, 1998년에도 여전히 양준혁이 27홈런을 치면서 뒤를 받쳤다. 1999년, 2000년엔 찰스 스미스(40홈런), 김기태 등이 중심에서 버텼고. 그러다 2001년 마해영이 들어오고 2002년 양준혁이 친정팀으로 돌아오면서 공포의 '''이마양 트리오''' 타선이 구축되었다.
2002년 0.323의 타율로 정확성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홈런 개수도 47개로 늘리며 홈런왕 2연패에 성공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는 이승엽을 '''큰 무대에 강한 사나이'''로 격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6차전까지 '''20타수 2안타'''라는 극악의 타격 부진에 시달리던 이승엽이었지만 김응용 감독은 그를 믿고 계속 출전시키는 뚝심을 보였고, 결국 KS 6차전에서 이승엽은 LG의 마무리 투수 이상훈을 무너뜨리는 '''동점 3점 홈런'''을 작렬시켜 우승으로 가는 발판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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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점 쓰리런 홈런 치고 홈에 들어온 이승엽
[image]
그 뒤에 나온 마해영이 백투백 홈런으로 경기를 끝낸 후, 그는 눈물을 보였다...
마해영의 회고에 따르면 동점 쓰리런 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에 들어와서 "'''형 제발 끝내줘!'''"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바람대로 마해영은 곧바로 '''한국시리즈 역사상 길이 남을 백투백 홈런으로 정말로 시리즈를 끝냈다!!!'''

2.2.9. 200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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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홈런 라이벌 심정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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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22일 대구 SK전에서 김원형을 상대로 세계 최연소 300홈런[14]을 기록하고 들어오는 모습.
2003년에는 전년의 상승세를 이어받아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2003년에는 0.301의 타율에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자 현재 한국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 홈런인 56홈런, 한 시즌 최다타점인 144타점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심정수와 펼쳐진 불타는 홈런왕 라이벌리는 2002년의 월드컵 열풍과 맞물려 침체되었던 한국프로야구의 흥행요소였으며, 이 둘은 2년 연속(2002~2003)으로 3할-40홈런-100타점을 찍었다.''' 그러나 심정수는 세부 스탯에서 앞섬에도 홈런왕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콩라인이 되었고 이승엽은 홈런왕 2연패에 성공함으로서 승자로 기록될 수 있었다.
2003년의 경우 홈런 신기록에 임박하자 원정경기를 나가도 관중들이 죄다 잠자리채를 들고 우측 외야부터 먼저 몰리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으며, 심지어 3년 연속 꼴지를 기록해 늘 관중석이 텅텅 비었던 최하위 롯데의 사직구장조차도 그러했다.

경기 종반 롯데가 승부처라고 판단해 이승엽을 고의사구로 내보내자 사직 관중들이 오히려 열이 받아 경기장에 불을 지르는 소요사태를 겪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때의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롯데 구단은 이승엽의 은퇴 투어 때 진짜 순금으로 만든 '황금 잠자리채' 모형을 선물했다.
[image]
[image]
'''2003년 한국프로야구 홈런 신기록 (56호) 달성'''
현재까지도 한국프로야구동양인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며,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야구에서도 2013년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깨뜨리기 이전까지 최다였다.3루베이스를 돌고있는 이승엽을 축하해주는 코치는 류중일이다.
연도
홈런
1997
'''32'''[15]
1998
38[16]
1999
'''54'''[17]
2000
36[18]
2001
'''39'''
2002
'''47'''
2003
'''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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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마양 트리오는 합계 '''127홈런 356타점'''을 쳐내기도 했다.
[*오타 위 사진에 09년도라고적혀있는 것과
93년도 트리오는 방송 오타이다]
여담으로 한창 홈런왕으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에도 "투수를 했으면 어땠을까?"하는 미련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때 "너는 한국 최고의 타자."라고 치켜세워주며 마음을 다잡아 준 사람은 前 KIA 타이거즈 감독 김기태.[20]

2.3. 일본프로야구 시절(2004~ 2011)


문서 참조

2.4. 한국프로야구 2기(2012~ 2017)



▲ 이승엽 삼성 2기 시절 응원가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옵션 3억을 포함한 총액 11억원에 계약했다.
2012년 복귀 첫 해 시범경기 성적이 타율 0.429 2홈런 7타점으로 거포에서 이똑딱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아주 긍정적인 성적이라 수많은 영양사들과 삼성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는 중.

2.4.1. 2012 시즌


[image]
2012년 7월 29일 목동 넥센전에서 '''한일 통산 500호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도는 모습.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4.2. 2013 시즌


해당 문서 참조.
[image]
'''2013년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홈런 신기록(352호) 달성.'''

2.4.3. 2014 시즌


[image]
2014년 9월 11일 NC전에서 역대 최고령 30호 홈런을 기록하는 모습.
복귀 첫 시즌에 비해 클래식 스텟은 향상됐지만, 리그의 타고투저 광풍에 견줘보면 실제 생산성은 2012시즌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나이 39세에 3할-30홈런-100타점을 기록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항.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image]
[image]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이 형님도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말았다. 사진은 나이가 들어 샴페인을 못 따 무차별 세례를 받고 있는 이승엽.
'''시즌 종료 후, 9번째 골든글러브를 획득하며 KBO 역대 최다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다.'''

2.4.4. 2015 시즌


[image]
2015년 6월 3일 KBO 리그 개인통산 '''400홈런''' 달성의 순간.

'''바로 지금. 이 위대한 순간의 증인이 될 수 있어 행복합니다!''' - 2015년 6월 3일 포항 롯데전에서 KBO리그 최초 개인통산 400홈런 달성 후 캐스터의 멘트

KBO 최초의 두 자릿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지만, 수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내의 해당 항목 참조.
해당 문서로.

2.4.5. 2016 시즌


[image]
2016년 9월 14일 대구 한화전에서 '''한일 통산 600호 홈런'''을 기록하는 모습.
해당 문서로.

2.4.6. 2017 시즌


[image]
2017년 10월 3일 레전드를 떠나보내다
해당 문서로

2.5. 국가대표 경력



2.5.1.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당대 KBO리그 최고의 홈런타자 이승엽2000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을 겸한 본 대회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참가했다.
당시 대회는 사실상 중국, 일본, 대만, 한국 4파전이었다. 이 팀들 사이에서 최소 대회 준우승을 기록해야 올림픽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중국[21], 태국, 대만, 일본를 모두 이기고 대회 전승 우승을 차지하며 올림픽 본선에 직행했다.
이승엽 역시 팀의 중심타자 겸 1루수로서 자신의 역활을 훌륭히 수행했다. 특히 1999년 9월 16일, 가장 큰 난적이 될거라 예상했던 대만전 홈런을 터트리며 5:4 신승을 이끌었다. 이 홈런을 기점으로 이승엽은 국가적인 영웅으로 발돋움했다.

2.5.2. 2000 시드니 올림픽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09539D 75%, #A01E20 75%, #1E2776 90%, #ffffff 95%)"
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9
9
28
5
2
0
1
7
3
.179
.258
.357
.615
0
12
3
-
1999시즌 KBO리그 한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갈아치운 이승엽은 이미 박찬호, 박세리 등과 함께 한국 스포츠 최고 스타중 한명이었다. 2000시즌 역시 가공할 만한 활약을 하던 이승엽이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는 드림팀의 중심타자 겸 주전 1루수 역할을 수행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승엽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치룬 9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자신의 위상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대회 내내 1할대 타율과 6할대 OPS에 머무르며 최악의 부진을 기록했다. 31타석 동안 홈런은 단 한개에 불과했을 정도로 자신의 장점인 장타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이런 이승엽의 개인적 부진과는 별개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우승후보 일본을 비롯해 이탈리아, 남아공, 네덜란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4승 3패로 4강에 진출했다.
4강전에서 당시 최고 유망주였던 로이 오스왈트가 선발로 나선 미국에 2:3으로 석패한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일본과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놓고 결전을 펼치게 됐다. 대회 내내 부진했던 이승엽은 이 날 결국 이름 값을 해냈다.
0:0 팽팽하던 8회말, 2사 1-3루 상황에서 마쓰자카 다이스케를 상대로 2타점 2루타를 때려냈다! 이 날 마쓰자카를 상대로 3타석 모두 삼진을 당한 상황에서 때려낸 장타였기에 더욱 값졌다. 이후 김동주가 연이어 적시타를 때려내며 득점까지 기록했다. 결국 이 점수를 잘 지켜 대한민국은 3:1 승리를 거두며 동메달을 획득했고, 이승엽의 2루타는 결승타가 되었다.
이 대회에서 이승엽이 매우 극심한 부진에 빠지며 제 몫을 못해온 것은 사실이다. 규정타석 충족 타자중 2번째로 낮은 타율과 가장 많은 삼진을 허용한 점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숙명의 라이벌 일본과 2번의 경기에서 예선라운드 투런포, 동메달 결정전 2타점 2루타를 처내며 킬러로서의 면모를 뽐냈다. 또한 최악의 비율 스텟에도 불구하고 팀 내에서 가장 많은 타점(7)을 기록하며 승부처마다 해결사로서 역할을 해왔음을 증명했다.

2.5.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2.5.4.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09539D 75%, #A01E20 75%, #1E2776 90%, #ffffff 95%)"
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7
7
24
8
0
0
5
10
8
.333
.414
.958
1.372
0
5
3
-
일본 진출 2년차인 2005시즌, 이승엽은 30홈런을 때려내며 일본 프로야구 적응에 성공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훈풍속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성공적인 FA계약을 맺음에 성공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KBO는 이승엽이 이적 첫 시즌 적응을 위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합류를 고사할까봐 초긴장한 상태였다. 다행히 요미우리 구단과 이승엽 모두 대표팀 합류에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치면서 큰 잡음없이 팀에 합류했다.
이승엽은 1라운드 1차전 대만과의 경기부터 1루수 겸 3번타자로 선발출전했다. 비록 이 날 3타수 0안타, 1득점의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팀이 2:0으로 승리하며 3년전 삿포로 참사를 설욕할 수 있었다.
이승엽의 타격감이 깨어난 것은 1라운드 2차전 중국전이었다. 이승엽은 이 날 4타수 4안타(2홈런), 1희생타, 5타점을 기록하며 중국의 마운드를 맹폭했다. 이승엽의 활약에 힘업어 대한민국은 중국을 상대로 10:1 완승을 거뒀다. 또한 이 날 승리로 2라운드(8강) 진출을 조기에 확정지을 수 있었다.
1라운드 3차전 숙명의 라이벌 일본전 역시 선발출전한 이승엽은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이 날 1:2로 뒤지고 있던 8회초, 이시이를 상대로 투런포를 때려내며 팀을 역전시켰다. 이후 두번의 수비에서 일본에게 한점도 허용하지 않고 경기가 끝나면서 이 홈런이 결승홈런으로 남게 됐다.
이승엽의 활약은 2라운드에 가서도 멈추지 않았다.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역시 1회부터 투런포를 작렬시키며 3경기 연속 홈런의 기세를 이어갔다. 이 홈런이 이 경기 대표팀의 유일한 득점이자 결승타가 되었다.
2라운드 2차전 메이저리그 올스타로 중무장한 미국과의 경기 역시 이승엽의 활약은 이어졌다. 이승엽은 돈트렐 윌리스를 상대로 1회부터 솔로포를 때려내며 팀에 리드를 안겨주었다.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 좌완투수 돈트렐 윌리스를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며 한국팬들 사이에서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염원하는 분위기가 급속도로 퍼지기도 했다. 이 홈런으로 잡은 리드 이후 미국에게 단 한번도 동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이승엽은 또 다시 결승타의 주인공으로 기록됐다. 무려 4경기 연속 결승타.
2라운드 3차전 다시 붙은 일본과의 경기에선 이승엽의 방망이가 쉬어갔다. 3타수 0안타, 1볼넷 만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날 역시 박찬호의 호투와 이종범의 2타점 2루타에 힘업어 2:1로 일본을 꺽고 대회 6연승을 이어갔다.
연이어 만난 일본과의 4강전 역시 이승엽은 4타수 0안타로 부진했다. 팀 역시 0:6으로 패하며 최종 3위에 만족해야했다. 하지만 이 대회 이승엽은 일본, 멕시코, 미국의 상위리그 투수들을 상대로 전혀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뽐내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대회 홈런왕, 타점왕, 1루수 올스타에 선정되며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됐다.

2.5.5. 2008 베이징 올림픽 플레이오프



2.5.6. 2008 베이징 올림픽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09539D 75%, #A01E20 75%, #1E2776 90%, #ffffff 95%)"
경기
선발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8
8
30
5
1
0
2
6
4
.167
.265
.400
.665
0
9
4
-
이승엽2006 WBC에서의 맹활약과 2005~2007시즌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한국야구의 자존심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2008시즌 들어 상황은 정반대가 됐다. 데뷔 이후 최악의 부진을 경험하며 소속팀에서 주전경쟁까지 쉽지 않은 상황이 펼처졌다. KBO리그에서 이대호, 김태균 등 젊은 1루수들의 활약까지 겹치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더 이상 이승엽이 필요하지 않다는 여론들 역시 나오게 됐다. 하지만 김경문 대표팀 감독은 여전히 이승엽을 신뢰하며 팀의 주전 1루수로 기용할 뜻을 밝혔다.
이승엽은 대회 내내 주전 1루수 겸 4번타자로 기용됐지만 좀처럼 부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예선 라운드 6경기에서 중국전 끝내기 안타를 제외하고는 해결사라 불릴만한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홈런은 단 한개도 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승엽을 강도 높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다수의 팬들은 이승엽이 라인업에서 빼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경문 감독은 이승엽에게 변함없는 믿음을 천명하며 4번타자로 기용했다.
이러한 믿음의 야구는 결선 라운드부터 보답을 받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23타수 3안타(.130)로 극도의 부진을 겪던 이승엽이지만 이 날 8회 2:2 동점상황 결승 투런포를 때려냈다. 좌완킬러 이와세를 상대로 때려낸 홈런이기에 더욱 대단했다.[22]
결승전 역시 이러한 기세가 이어졌다. 이승엽은 1회부터 상대 선발 노베르토 곤잘레스를 상대로 투런포를 때려냈다. 결국 대표팀이 쿠바를 3:2로 이기고 금메달을 거뒀고, 이승엽은 일본전에 이어 2경기 연속 결승타의 주인공으로 기록됐다.
더군다나 이승엽이 고영민에게 던진 공을 받아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자마자 뒷주머니에 넣었다가 KBO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 공은 차후 야구박물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2.5.7.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09539D 75%, #A01E20 75%, #1E2776 90%, #ffffff 95%)"
경기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4구
상세
3
10
4
3
0
0
1
3
.400
.400
.700
1.100
0
2
0
-
2007 시즌 이후 일본프로야구에서 최악의 부진을 겪은 이승엽은 결국 2009 WBC 출전을 고사한 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다. 시즌 준비에 사활을 걸어 슬럼프를 탈출하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절치부심에도 불구하고 이승엽의 일본 커리어는 반등하지 못한 채 2012년 삼성라이온즈로 복귀했다.
KBO리그로 복귀하자마자 이승엽은 다시 예전의 타격감을 찾기 시작했고, 괜찮은 성적으로 2012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결국 류중일 감독은 이승엽을 다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선발한다.
당시 대표팀에 김태균, 이대호라는 걸출한 1루수들이 있었기에 굳이 이승엽을 선발할 이유가 없다는 여론도 일부 있었다.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이승엽이 그라운드 밖에서 배태랑으로서 팀에 힘을 불어 넣는 역할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정작 대회가 시작하자 이승엽은 부진한 김태균을 밀어내고 주전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비록 팀은 2승 1패 호성적을 기록함에도 불구하고 사상 첫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맛봤지만, 이승엽은 팀에서 가장 많은 득점과 가장 높은 OPS를 기록하며 자신이 왜 국민타자-국제용 타자인지 입증했다.
[1] 한 해는 당연히 2006년이고, 나머지 하나는 '''일본시리즈 우수 선수상'''을 수상한 2005년. 2007년에도 30홈런을 기록하며 중심타선에서 활약했지만, 제한적인 출장 속에 투수친화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며 30홈런을 기록하고 일본시리즈에서도 대활약한 2005년에 비하면 부족했다. 무엇보다 2007년은 성적 하락의 분기점이 되는 해다.[2] 이 부상이 군 면제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고교 때부터 팔꿈치 부상을 안고 있었으며 실제로 프로 입단 이후 초창기에도 이 때 입은 팔꿈치 부상으로 상당히 고생을 했다. 과거 MBC에서 방송했던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도 언급된 내용.[3] 이 당시 수능 총점은 200점.[4] 김건덕은 정말 비운의 선수였는데, 고교시절의 혹사로 인해 한양대 입학 후 1년 동안은 투수로 등판하지 않기로 했으나 국제대회에 참가하면서 다시 공을 던지면서 부상이 악화되어 이상 투수로 뛰지 못하고 타자로 전향하지만,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다. 그 후 삼성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데려가서 경산 볼파크에서 훈련을 받던 도중 군입대 영장을 받아 군면제를 위해 체중을 늘리지만, 규정의 변화로 결국 현역으로 입대한다. 그 때 어려웠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산업체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당해 결국 프로 생활을 접게 되었다고 한다.(추가로 부상으로 인해 산업체에서 일을 못하게 되면서 구청에서 추가로 공익근무를 해야 했다.) 그 후 야구배트를 파는 영업사원으로 있다가 춘천고, 부경고 코치를 거쳐 리틀야구단 감독으로 지내다가 2016년 11월 17일에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고교시절에는 이승엽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엄청나게 일이 풀리지 않아 재능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선수가 되었다.[5] 김건덕의 대학행을 추진한건 그의 아버지였는데 이후 아들의 인생을 망쳤다며 한평생 자책하며 술만 마시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6] 척추분리증이 있는 선수이므로 이게 원인일 가능성도 있다.[7] 이승엽뿐만 아니라 투수 유망주였던 이대호를 타자로 전향시킨 것도 우용득 당시 롯데 감독의 작품이다. 이대호도 어깨 부상이 있었다.[8] 사실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던 청룡기 결승전에서는 결승홈런도 쳤었고, 1994년 세계청소년 대회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팔꿈치 부상으로 타자로만 활약해 홈런상과 득점상을 수상한 바 있다.[9] 타격에 비해 수비가 약했던 이동수가 1루수로 나올 때는 좌익수를 보기도 했다. 또는 양준혁이 좌익수를 서기도 했는데 1993년부터 주전 우익수로 복귀한 이종두가 어깨와 허리통증을 호소한 데다가 양준혁과 함께 또다른 1루수 요원에 속한 김성래는 1995년 시범경기 도중 장단지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그 탓인지 전년도에 1루수로 포지션을 바꾼 이만수도 당시 노쇠 기미를 보여왔던 탓에 이승엽을 1루수로 전향시키기도 했으며 좌완투수가 선발에서 나올 당시에는 이만수가 1루수를 보기도 했다.[10] 이것 하나만으로도 백인천 감독은 삼성에서 아주 큰 일을 해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백인천이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야구로 먹고 사는 것의 팔할은 이승엽 덕분이다.''' [11] 1995년 팬북에선 얄리로 소개됨[12] 2012 스카우팅 리포트에 수록된 카툰으로 물론 2011년 모습 한정. 오히려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장성호가 엘지를 저격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었다. [13] 2003 시즌도 마찬가지[14] 종전의 기록은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만 27세 249일[15] 이 해 홈런왕을 처음으로 차지했다. 2위는 30개를 기록한 이종범.[16] 이 해 타이론 우즈가 기존 장종훈의 시즌 41홈런을 경신하여 42개를 쳤다.[17] 타이론 우즈의 KBO 홈런 신기록을 '''바로 이듬해'''에 경신.[18] 홈련왕은 40개를 날린 박경완.[19] 이른바 "아시아 홈런 신기록". 자신의 KBO 신기록을 자신이 갈아치움. 이미 전반기 끝나갈 시점에 홈런 40개를 돌파했었다. 다만 2013년에 NPB블라디미르 발렌틴이 57홈런을 치면서 아시아 홈런 신기록 타이틀은 발렌틴에게로 넘어갔고 아시아 최초로 60홈런을 돌파하면서 시즌을 마감하였다.[20] 삼성에서 뛰었을때 주장을 역임했으며, 이승엽이 그를 보스처럼 따랐다고 한다.[21] 2승 0패[22] 참고로 이 홈런은 이승엽 본인이 직접 뽑은 자신의 선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