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선수 경력

 




1. 클럽 경력



1.1. 프로 데뷔 이전


고등학교 시절 이미 전국구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당시 고교 축구계는 명실상부한 부평고 천하였는데, 부평고 같은 학년 선수인 이천수, 최태욱, 박용호 셋을 일컬어 '''부평고 귀각 3인중'''이라 했다. 여담으로 이들의 1년 후배가 김정우. 또한 이들 넷은 그대로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에서 뛰면서 8강을 달성했다. 이 때에도 특유의 독특한 성격은 유명했던 것으로, 3학년때 교육감배 대회 운봉고전에서 다리부상으로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팀이 너무 못뛰어서 감독에게 경기 출장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하자 '''그 자리에서 깁스를 벗어던지고 나가서 결승골을 넣고''' 1:0으로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다소 근성 스포츠물 만화같은 일화가 있다.
고려대 시절인 2001년 유벤투스 FC로부터 입단 제안을 받았다고 했지만 실제로 이적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협상 과정에서 결렬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프랑스LOSC 릴에서도 테스트를 받았다. 이 일로 당시 히딩크 감독은 이천수를 “릴리(릴 + 이천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표팀 소집이 들지 않자 프로가 아니라 대학생 신분이라 관심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한 이천수가 고려대 감독에게 읍소해 성사한 것으로, 이 때 네덜란드 전지훈련을 하던 히딩크가 이천수를 부르자 합류한 이후 시차적응이 끝난 유리한 상황에서 체력훈련 1등을 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며 눈도장을 따내어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1.2. 울산 현대 호랑이 1기


2002년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을 하자마자 2002년 K리그 18경기 7골, FA컵 3경기 2골 맹활약으로 K리그 준우승에 크게 공헌하여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 시즌 종료후에는 2002년 FIFA 월드컵에서의 활약과 K리그에서의 활약을 종합하여 AFC 올해의 신인상에 선정되었다
2003년 역시 K리그 18경기 8골로 맹폭하며 리그 최고의 선수의 모습을 보이던 와중에 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하게 되었다.

1.3. 레알 소시에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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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2년 월드컵의 활약을 바탕으로[1] 2003년 7월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했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2002-2003시즌 깜짝 준우승하여 다음 시즌준비를 위해 이천수를 영입하였다. 당시 레알 소시에다드에는 세르비아 출신 다르코 코바체비치터키 출신 니하트가 43골을 합작하였고, 미드필더에는 국내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신인이었던 사비 알론소가 있었다.[2] 스페인 언론에서도 이천수를 코리안 베컴이라고 소개하며 활약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코너 위컴만도 못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첫 경기에서는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MOM으로 선정되는 좋은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이천수 특유의 패턴인 데뷔전 좋은 활약 후 점점 떨어지는 경기력으로 적응 실패, 향수병 등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고 다음 시즌 CD 누만시아로 임대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소시에다드 입단 인터뷰에서 '''"몸값 올려서 레알 가는 게 꿈"'''이라 당당히 입을 털었던 흑역사가 있다. 덕분에 팬과 구단 관계자의 반감을 사버린 것은 당연지사.
2003-04 시즌 최종 성적은 라리가 13경기 0골, 코파 델 레이 2경기 0골, UEFA 챔피언스리그 6경기 0골로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서 슛포러브에서 FC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카를레스 푸욜과 만났는데 거의 발렸다. 본인이 회상하기를 푸욜은 진짜 벽 같았다고 제쳐버려도 끝까지 쫓아왔다고 한다. 푸욜의 클래스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1.3.1. CD 누만시아 (임대)


하지만 CD 누만시아에서도 부진을 떨치지 못해 결국 2005년 3월에 국내로 복귀했다.
2004-05 시즌의 성적은 라리가 15경기 0골, 코파 델 레이 1경기 0골로 이천수는 1시즌 반의 스페인 무대에서 단 한골도 득점하지 못하며 빅리그의 벽을 체감해야만 했다.

1.4. 울산 현대 호랑이 2기


해외진출이 폭망하고 2005년 울산 현대로 복귀하여 바로 2005 K리그 MVP를 수상. 풀시즌 40여 경기를 소화한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17경기(정규시즌 14경기, 플레이오프 3경기)에서 10골 7도움을 기록한 이천수가 MVP로 선정되었다. 이 시즌 울산은 수비와 조직력 면에서는 탄탄했지만 경기의 흐름을 바꿀 선수가 없었는데, 시즌 중간에 투입된 이천수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며 정말 리그의 수준을 뛰어넘는 기량을 보여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기에, 이 시즌 울산의 우승은 이천수가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시즌 절반을 소화하고도 MVP에 선정될 수 있었다. 이 시즌의 이천수는 말 그대로 사기유닛이라 불리며 K리그를 평정했다. 당시 울산 현대를 이끌던 김정남 감독은 이천수에게 재갈을 물리려 하지 않고 이천수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며 팀의 최전방을 휘저어 줄 것을 당부했고, 이천수는 마음껏 뛰면서 그 기대에 보답했다. 여러 팀을 거친 이천수의 선수 경력에서 팀 안팎으로 트러블이 없었던 적은 울산 현대 시절이 거의 유일했다.
또한 이당시에는 한중일 3국 클럽들끼리 모여서 하는 'A3 챔피언스컵'이라는 대회가 있었는데, 2006년 8월 5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울산 현대와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에서 이천수는 감기몸살로 전반을 쉬고 후반에'만' 들어가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역대 K리그 단일시즌 최고의 선수 5명

1.5.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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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7-08 시즌 송종국이 뛰었던 네덜란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으로 이적해서 데뷔경기 엄청난 활약을 펼쳤으나[3] 폼이 점점 떨어져, 여전히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에레비디시 12경기 0골 KNBN 컵 2경기 0골로 이번에도 유럽무대 득점을 기록하는 것에 실패했다. 당시 네덜란드와 한국을 오가면서 향수병이다 태업이다 말이 많았는데, 훗날 밝혀진 바로는 국내에서 사기를 당해 입단 계약금을 몽땅 날리는 바람에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4][5] 이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창 적응해야 할 시간에 저러고 있었으니 네덜란드 언론이나 페예노르트 구단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1.5.1. 수원 삼성 블루윙즈 (임대)


결국 2008년 '''1년 임대'''로 K리그 수원으로 복귀했는데, 울산 시절 '사기 유닛'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인 데다 설상가상 부상까지 당하며 팀 전력에서 제외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대다수 축구팬들은 지금 당장은 네덜란드 진출 실패 여파로 이천수의 활약상이 저조하지만, 머잖아 심신을 추스리면 예전 기량을 되찾으리란 믿음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수원의 코칭 스텝에게 '''항명 파동'''을 일으킨다. 부상을 핑계로 팀 훈련에 무단으로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 삼성 스포츠과학 지원실에서 재활훈련을 하라는[6] 팀의 지시조차 거부했다. 거기에 문민귀가 이천수에게 폭행당해 전치 12주로 아주대병원에 눕게되자 결국 차범근 감독은 분노해 이천수를 '''임의탈퇴''' 공시했다.[7]

1.5.2. 전남 드래곤즈 (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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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초기에는 박항서 감독의 지휘 아래 예전 기량을 찾을 뻔했지만, 6월 후반 들어 계약서 조항 자작극이나 주먹다짐 등 평지풍파가 끊이지 않다 소동 끝에 임의탈퇴가 되어버렸다. 자세한 것은 문서 하단 전남 부분으로.
울산 현대 시절에는 김정남 감독체제의 공격의 핵이었다. 울산이 그저 수비를 단단히 굳히고 있으면 몇 안 되는 인원을 이끌고 나가 적의 진영을 붕괴시키고 골을 넣은 후, 그저 잠궈버리는 수비축구의 선봉장. 해외에서 돌아온 시즌에는 리그 절반만 뛰고도 울산에게 리그 우승을 가져다주고 본인은 리그 mvp를 차지한다. 반면, 수원 팬들에겐 애증이 섞인 선수. 비싼 돈을 주고 데려왔는데 제대로 활약도 못 하고 전남으로 가버려서 그렇다고 한다. 그리 대단한 애증은 아닌 게 얼마 뛰지도 않았고 수원은 그런 선수들 트럭으로 담아도 트럭이 작으면 트럭이 비좁을 지경이다. 첨언하자면 이천수라는 선수에 대해서 '증'만 크게 가지고 있던 수원팬들이 막상 이천수가 수원에 오게 되니 자기 선수 욕하긴 뭐하고 '그래 뭐가 어쨌던 네 실력은 인정. 사실 우리가 욕했던 것도 네가 실력이 뛰어나서 질투한 것도 있다' 정도로 정신 위안(?)을 시전하며 멘탈 정리를 하던 와중에 문민귀 폭행 사건 후 임의탈퇴 되자 '아 그냥 꾸준히 욕할 걸 저딴 놈 뭐하러 받아들여줬지' 정도의 멘붕을 일으켰다.
전남으로 이적한 후에도 여러가지 사건 사고에 휘말렸으나, 준수한 활약으로 역시 이천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2009년 6월 이천수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르고 마는데... 그 과정이 복잡하지만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남에서 뛰는 도중 사우디 클럽인 알 나스르에서 이천수에게 오퍼가 왔다. 한창 6강 싸움 중이던 전남은 이천수를 잔류시키고자 했고, 이에 불복한 이천수는 전 소속팀 페예노르트와의 이면 계약을 이유로 알 나스르로의 이적을 확정 짓는다. 이천수를 보내게 된 전남은 마지막으로 고별경기를 뛰어달라고 부탁했으나 이천수는 거부한다. 명목은 사타구니 부상이었으나, 이천수의 몸상태를 알고 있는 김봉수 코치가 이의를 제기하자... 이천수는 '''코치진과 맞짱'''을 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몸상태가 아니라 이적이 확정돼서 테스트 때문에 경기 안뛰는거라는걸 다 알고 있는 일이고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경기 뛰게 하지 말라고 공문까지 보냈는데 코치진이 일방적으로 성질낸것....맞짱이란 표현 보다 코치 쪽에서 컵을 벽에 투척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이천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2군 캠프로 옮겼다는 반론 역시 있다.
이천수는 그 날로 숙소를 이탈했고, 전격적으로 알 나스르로의 이적을 확정지었다. 그 후 이천수의 에이전트였던 김민재 대표의 이면계약은 없다는 폭풍의 기자회견이 나오며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이중계약도 아닌 '''거짓계약'''으로 이적을 한 이천수는 임의탈퇴 처분이 내려지지만...사우디아라비아에서 뛰게 되었으니 당사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8]

1.5.3. 알 나스르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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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나스르 시절의 이천수
그리고 이천수는 알 나스르에서 임금 체불을 이유로 다시 무단이탈 이후 J리그 오미야 아르디자로 이적한다. 위의 사진에서도 그렇고 힘들었던 모양.

1.5.4. 오미야 아르디자


2011년 J리그오미야 아르디자와 계약이 만료된 후 2013년 초까지 무직 상태였다.
끊임없이 K리그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으나, 임의탈퇴 조치를 한 전남구단은 입장 변화가 없었다. 지금도 전남 구단과 이천수와의 위약금 문제 재판은 현재 진행형이다. 일단은 프로연맹에서도 사인한 에이전트가 내야하는 것이기에 그 에이전트는 손해를 보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지 않는다는 기사가 있었고, 재판도 그리 진행되었다. 진짜 위약금이 발생할 상황이라면 계약당사자인 페예노르트에 물려야겠지만 문제가 없었고 그걸 이천수에게 물린다는 계약내용 자체가 심각하게 문제가 있던 것이다.
K리그 복귀는 요원한 상황에서 이천수도 해외리그 재진출을 노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잘 안되는 듯 하다. 2012년 7월 7일 QPR에서 아시아 선수를 영입한다고 공언하여 알싸등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천수가 아닌가 말이 있었지만... 그 대상은 박지성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카더라였지만 꽤나 반향이 있었다.
2012년 9월 호주 클럽에서 오퍼가 왔지만 K리그에서 용서받기 위해서 K리그에서 다시 뛰고 싶다고 밝히면서, K리그계에서 이천수 논란을 재점화했다(참고). 이후 10월에 전남구단 홈 경기가 열린 날 경기장을 방문, 관객들에게 사과의 인사를 전했다. 이천수 본인은 용서받을 때까지 홈그라운드 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와서 사과하겠다고 말했는데, 축구인들 상당수는 '진정성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평하고 있다.(링크)
그러다가 마침내 2013년 2월 5일. 마침내 K리그가 다시 그를 받아주게 되었다. 임의탈퇴를 풀어 주기로 결정된 것. 관련기사
그리고 2013년 2월 22일, 전남 드래곤즈도 그의 임의탈퇴 공시를 해제하며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고향 팀인 인천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다. 등번호는 10번.

1.6. 인천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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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2013 시즌


4년 만에 드디어 K리그에 복귀하는 만큼 각오가 남다른 모양이다. 그렇게 놀기 좋아하던 선수가 아버지가 주시는 술도 거절하는 등 절주를 선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방황하던 기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심적으로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거기에 K리그에 복귀한 2013년에 득녀까지 한 상황. 오로지 가족과 축구에만 모든걸 집중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2013년 3월 31일 K리그 클래식 4R 대전 시티즌과의 홈경기에서 교체선수로 복귀전을 치렀다. 4년 만에 돌아온 선수치곤 나쁘지 않았다는 평. 그러나 팀은 2-1로 패배했다.
4월 16일에 치른 7R 전남 드래곤즈와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해 많은 축구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전성기 때를 방불케 하는 활약을 펼쳤다. 데드볼 상황에서의 킥이 다소 부정확했다는 게 흠이지만, 지는 건 죽는 것보다 싫다는 특유의 악바리 근성과 공수 양면에서 엄청난 활동량으로 종횡무진 경기장을 누비며 '역시 이천수 ㄷㄷ'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인저리 타임에는 골대 하단을 노린 강력한 중거리슛을 때렸지만 김병지의 선방으로 데뷔골 무산. 결과적으로 경기는 0-0으로 비겼으나 본인의 크랙 기질을 유감없이 선보인 승부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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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뒤 전남 서포터석을 찾아 깍듯이 인사했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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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정 온 전남 서포터들은 그에게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약 2년 간의 공백기가 있는데다 30대 초반이기 때문에 보통은 전성기 시절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지만, 경기에 출전할수록 점점 경기력이 올라갔기에 팬들의 기대는 높아졌다. 4월 20일 8R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홈경기에서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면서 팀의 막판 역전승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는 2009년 5월 23일 성남 일화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이후 '''1,428일'''만의 공격포인트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친정팀이라 할수있는 울산 현대와의 K리그 클래식 9R 경기에서도 0:1 지고 있던 상황에서 동점골을 어시스트. 2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서서히 예전 전성기 시절의 폼을 끌어올리는 중.
이날 역시 이천수는 전남전과 마찬가지로 정중히 친정팀의 팬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고 울산 홈팬들도 'K리거 이천수를 보고싶다'라는 걸개까지 내걸며 이천수의 K리그 복귀를 축하하고 격려해주었다.
다음 상대는 어찌보면 '이천수 사건'의 모든것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전남, 울산, 수원까지 1달동안 연속해서 이천수의 과거와 밀접하게 얽혀있는 팀들과 대결하는게 흥미로웠는데 역시나 수원 홈팬들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이천수는 90분 폴타임 출전하며 고군분투 했으나 팀은 0:1로 패배했다. 이후 팀 동료 김남일과 함께 수원팬들을 찾아가 인사를 하며[9]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사를 어느정도는 청산하며 마음의 짐을 덜었다.[10]
친정팀과의 대결 이후 마음이 가벼워진건지 5월 12일 K리그 클래식 11R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는 거의 전성기 시절을 방불케하는 시즌 최고의 경기력으로 시종일관 골문을 두드렸으나 이 날 MVP에 선정된 박준혁 골키퍼의 미친선방과 골대불운속에 아쉽게도 득점은 올리지 못했다.
5월 19일 K리그 클래식 12R 강원 FC에서는 전반전 프리킥 상황에서 안재준의 헤딩골을 어시스트 하며 시즌 3호 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원정경기를 나서는 강원의 빗장수비탓에 전체적으로 경기력이 좋지 않았는데[11] 강등권에 처한 상황에서 처절한 수비를 보여준 강원을 상대로 꾸역꾸역 공격포인트와 승점을 챙기는 이천수의 클래스를 볼수 있었던 경기였다.

5월 25일 K리그 클래식 13R 부산 아이파크전에서 드디어 터진 시즌 첫 골을 포함해 1골 1도움 맹활약하며 팀의 3:0 완승을 이끌어냈다. 이로서 인천은 6승 5무 2패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무리. 기분좋게 휴식기를 보낼수 있게 되었다.
6월 딸을 득녀하며 그도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덕분에 올스타전에서 득녀세레모니를 하였다. 후반기가 시작됐지만 급작스런 현역 복귀로 몸이 적응을 못했는지 발목 부상이 도져 줄곧 출전을 못하고 있다. 전반기부터 통증이 계속 있었다고. 일단은 이석현을 비롯한 후배선수들에게 자리를 맡기고 차분히 다시 몸을 만드는 중이다.
8월 3일 K리그 클래식 21R 울산 현대전에서 오랜만에 다시 복귀전을 가졌다. 과감한 움직임으로 전반전 골대를 한번 맞추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 날 경기를 지배했던 심판의 벽을 넘지 못하고 2:2 무승부에 만족해야 했다. 옛날 성격은 못버렸는지 참다참다 주심에게 판정에 관해 항의를 하다 경고를 받기도 했다.
8월 10일 K리그 클래식 22R FC 서울과의 경기에도 선발 출전. 전반전 설기현의 골을 어시스트 하며 K리그 통산 32번째로 30-30 클럽에 가입을 했다. 다만 경기는 아쉽게도 2:3 인천의 패배.
8월 28일 K리그 클래식 25R 수원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오랜만에 멋진 활약을 보이며 3:1 완승. 상위 스플릿 리그 진출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직접적인 어시스트는 없었지만 날카로운 프리킥과 넓은 시야로 사실상 두 골을 만들어낸거나 다름없없다.
이후 인천 유나이티드가 상위 스플릿 라운드에 올라간 뒤에도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선 골까지 기록하였다. 하지만 아래에 후술할 음주 폭행 논란으로 10월 6일 FC 서울과의 홈경기가 그의 2013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
2013 시즌 총 기록은 19경기 출전 2골 5도움.

1.6.2. 2014 시즌


인천 유나이티드가 시즌 전체적으로 강등권에 위치하면서 이천수 본인도 부진한 시즌이었다. 28경기 1골 3도움. 아무래도 나이가 있어서인지 전체적인 체력이 떨어졌고, 본인의 다른 장점인 킥력도 약해졌으며 이천수 하면 떠오르는 미친 활동량이 크게 줄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나마 돌파력은 준수했고 어떻게 어떻게 경기장 끝까지 공을 몰고 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1.6.3. 2015 시즌


시 지원금이 줄어들어 재정난이 심각해진 인천에서 고액연봉자로 분류되어 있었고, 계약기간도 끝난데다 중국 중동 쪽에서 고액 오퍼도 오고 다른 팀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연봉 삭감을 감수하고 인천과 재계약했다.''' 본인 말로는 "내가 한참 어려운 시기일 때 인천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줬는데, 이제 와서 팀이 어렵다고 외면할 수 없다"라고 재계약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2015 시즌을 앞두고 인천이 감독선임으로 난항을 겪으며 감독없이 동계시즌을 허숭세월로 보내고 있을 때 자체적으로 후배들을 모아 연습을 시키는 등 팀 최고참으로서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러다 보니 대다수 국축팬들은 '''이제야 나이먹고 철이 들었다'''는 반응으로, 때마침 뒤통수를 치고 갑자기 은퇴한 같은 팀 전 동료 설기현과 멘탈 면에서 많이 비교되고 있다.
개막 첫경기에서 날카로운 패스로 김도혁의 첫 골을 어시스트하여 시즌 첫 어시스트와 K리그 클래식 2015시즌 첫 득점 기록에 일조한다. 이후 체력이 떨어져 풀타임을 소화하진 못하지만 지속적으로 출장하고 있으며, 케빈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골로 연결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경기력도 저번 시즌에 비해 많이 올라왔으며, 잘 풀리는 날에는 어느 정도 과거의 사기유닛 시절을 보는 듯한 돌파력을 보여주고 있다.
5월 4일에는 모교인 고려대학교에 1억원을 기부했다.
8월 2일 현재 중퇴했던 고려대학교에 재입학 신청을 하였고, 재입학 허가가 받아들여졌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지 시즌이 지나면서 한계점이 다시 보이고 있다. 돌파력과 별개로 이후의 슈팅이 막히는 경우가 많으며, 노쇠화로 인한 부족한 체력은 항상 교체카드 하나를 잡아먹는 상황이다. 세트피스와 킥력이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 애매해졌다. 이천수의 킥이 돋보인 상황은 전남 드래곤즈 상대로 케빈 오리스의 득점을 어시스트한 것, 그리고 대전 시티즌 상대로 터뜨린 프리킥 골 정도. 무엇보다도 부상 빈도가 높아져서 출전 빈도도 줄었다. 최근에는 박세직이 주전으로 나오는 상황. 그럼에도 경험 많은 이천수의 존재는 인천에게 보탬이 되고 있다.
그 결과 인천은 시즌 초반 강등후보라는 예상을 뒤엎고 마지막까지 제주와 상위스플릿 진출을 놓고 경쟁했으나, 아쉽게 팀은 상위스플릿 진출에 실패. 그리고 이천수 역시 부상으로 팀에서 이탈하면서 서울과의 FA컵 결승마저 관중석에서 응원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팀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인천의 FA컵 우승을 바랬으나 결국 준우승.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시즌을 마치게 되었다.

1.7. 현역 은퇴


그리고 11월 5일 이천수는 JTBC 뉴스룸에 나와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12] 멘탈갑으로 유명했던 선수들이 보통 은퇴할 때도 욕 먹는 경우가 많은데 이천수는 말년에 보여준 철든 모습으로 인해 훈훈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13] 다른 멘탈갑 선수류들과 같이 실력은 정말 좋았는데... 하면서 아쉬워하는 팬들도 많고.
은퇴하면서 "천재가 아닌 악바리로 팬들에게 기억되길 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은퇴 후 바로 JTBC의 축구 해설위원을 맡기로 했다. 다만 해설 뿐만 아니라 방송인 활동도 염두에 두는 듯 하는데, 이영표와 안정환이 해설과 방송인을 겸하는 걸 생각하면 크게 이상할 건 없다. 어찌됐건 평소 잘 보여주던 입담을 본다면 딱 맞는 직업이라는 팬들의 평가. 그의 파란만장했던 선수 시절을 생각해서라도 그의 제 2의 삶이 순탄하기를 진심으로 빌어 주자.
그리고 인천 유나이티드의 유소년(U-12) 총괄 디렉터를 맡는다고 한다.
은퇴 직전에 태국 파타야 유나이티드[14] 등 태국리그 여러팀에서 오퍼가 들어왔었다. 돈도 넉넉하게 줄수있는 구단들이었지만 지난 알 나스르에서의 경험이 걸려서인지 거절하고 고향팀 인천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는걸 고른다.
11월 28일 시즌 마지막 홈경기가 은퇴 경기가 될 예정.. 근데 그 상대가 하필 '''전남 드래곤즈'''
하지만 부상이 낫지 않아, 결국 은퇴 경기를 못 치르고 은퇴식으로 대체했다. 이천수 본인도 김도훈 감독도 굉장히 아쉬워했다고. 그래도 마지막에는 인천 시민들과 팬들에게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인천을 위해 일하겠다는 말로 은퇴식을 장식했고, 서포터즈 측에서도 '''"풍운아를 품은 우리는 행운아"'''라는 걸개로 이천수를 환영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의 마지막을 배웅하게 된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했던 악동이었지만 미워할 순 없던 최고의 풍운아가 그라운드를 떠나는 순간이었다. 그의 커리어는 항상 비난과 조소에 휩싸여 있었지만 마지막만큼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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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가대표 경력



2.1.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99년 청소년 대표팀 주전으로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방가반두 컵[15]에 나가 준우승을 거둬들였다. 이 당시 태국 올림픽 대표팀을 상대로 7:2 대승을 거둬들였는데 이 경기에서 4골을 이천수가 넣었다. 당시 브라질 청소년 대표팀까지 이기고 결승에서 일본 JFL(실업리그)팀에게 2:3으로 석패했지만 8골을 기록하며 득점왕 및 대회 MVP를 차지했다. 이때부터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며 "밀레니엄 특급" 이라는 별명까지 생기기도 했다.
2000년 1월 23일에 있었던 일본 신년 대회에서 이탈리아 U-19 대표를 상대로 83분에 넣은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2.2.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2.2.1. 2000 시드니 올림픽


올림픽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오른 것은 2000년(당시 19세). 특히 시드니 올림픽 본선 조별리그 2차전 모로코와의 경기 때의 일화가 나름 재밌는데, 전반 종료 직전에 한국이 페널티킥을 얻고 주장을 비롯한 팀내 고참들이 모여 누가 찰지를 정하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누군가가 아무말 없이 공을 들고서 페널티 지역으로 걸어가길래 다들 황당해 하며 쳐다보니까 이천수였다.[16] 그리하여 이천수가 페널티킥을 찼는데 골키퍼의 선방에 걸려서 튕겨나온 볼을 다시 차넣어 1:0 이 되었고, 그대로 결승골이 되면서 한국은 스페인과의 1차전 0-3 패배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17] 2승 1패의 호성적을 거뒀음에도 골 득실에 밀려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영표의 말에 따르면 처음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부터 비범했단다. 이천수가 합류할 당시 대표팀은 한일전에서 패배한 상태라 분위기가 대단히 무거웠다. 그런데 합류 직후 선배 선수들과 대화하던 도중 한일전 이야기가 나오자 "어떻게 일본에 질 수가 있냐. '''내가 있었으면 이겼다!'''" 라고 말했다고......

2.2.2. 2004 아테네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 이란 원정 경기 결승골을 뽑아 냈는데, 아직 A대표팀도 2무 3패로 한번도 이기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대표팀을 통틀어 이란 아자디 원정에서 결승골을 넣어본본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또한 아테네 올림픽 본선에서도 출전하였으며 파라과이와의 8강전에서는 0:3으로 뒤진 후반에 중거리슛과 페널티킥으로 2골을 혼자 만회했으나 끝내 패배. 경기 종료 직후 주저 앉아 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서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2.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3.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02년 월드컵에서는 주전은 아니었지만 자주 투입되며 스피드와 체력을 이용해서 수비진을 자주 흔들어줬다. 폴란드전에서는 유상철을 대신해 후반전에 투입되었고 미국전에서는 부상당한 박지성을 대신해 전반전에 투입되어 활약했다. 페널티킥이 선언되자 자신이 차려 했지만 이을용이 순번이라서 찼지만 실축.[18] 그리고 안정환의 동점골 때 아폴로 안톤 오노 역할을 하기도 했다.이탈리아전과 스페인전에서도 교체로 활약했다.그리고 이탈리아전에서는 파올로 말디니의 뒤통수에 싸커킥을 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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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독일전에서는 부상이 있던 안정환설기현을 대신해 차두리와 선발로 나서서 거의 골과 다름없던 슛도 날렸으나 올리버 칸에게 막혔다.[19] 박지성이나 안정환 등처럼 눈에 띄는 공격포인트는 없었지만 특유의 패기 넘치는 플레이로 활력을 불어 넣는데 충분했다.

2.3.2. 2006 FIFA 월드컵 독일



2006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후보로서의 모습과 달리 월드컵 데뷔 첫 골인 토고전 프리킥 골을 비롯해 한국이 출전한 세 경기 모두에서 굉장한 활약을 보여주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첫경기 토고전은 결승골을 넣은 안정환에, 두번째경기 프랑스전은 동점 골을 넣은 박지성에, 세번째 경기 스위스전은 심판 판정이 잘못된것은 없었지만 오심이라는 명목하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경기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본다면, 2006년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는 박지성과 이천수였다. 이 시절의 이천수를 보지 못한 팬들의 저평가도 있지만, 당시를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둘 중 누가 더 에이스인지 고민 하게 만들 정도. [20][21][22] 여담으로 스위스와의 경기가 끝나고 탈락이 확정되면서 그라운드에서 엎드려 울어 또다시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2.3.3. 2007 아시안컵


2007 4개국 아시안컵에도 당연히 승선했다.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이 부상으로 불참하게 되었고, 안정환, 박주영, 차두리 등은 극심한 슬럼프로 명단제외된 상황이었기에 에이스 이천수의 역활이 어느때보다 중요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이천수의 활약상은 대단했다.[23] 이천수는 한국이 치룬 6경기에 모두 출전하였다. 비록 득점은 없었지만 시종일관 그라운드를 누비며 상대에게 가장 위협적인 선수였다. 승부차기에서도 이천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8강 이란전과 4강 이라크전에서의 승부차기에서 모두 1번 키커를 맡으며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켰다.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은 결국 3,4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승부차기로 꺾고 대회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일본전에서 나카무라 슌스케가 가만히 지나가던 이근호에게 로우킥을 날리며 시비를 걸자, 선수들끼리 몸싸움이 나던 혼전중 몰래 다가가 나카무라를 가격하는 참교육을 실시했다. 이천수는 일본 애들이 먼저 실수를 했기 때문에 선배로서 나설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3. 기록



3.1. 울산 현대 호랑이


  • 리그컵 준우승 : 2002, 2005
  • K리그 준우승 : 2002
  • K리그 우승 : 2005
  • 슈퍼컵 우승 : 2006
  • A3 챔피언스컵 우승 : 2006
  • 리그컵 우승 : 2007

3.2.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 KNVB컵 우승 : 2007-08

3.3. 수원 삼성 블루윙즈


  • K리그 우승 : 2008
  • 리그컵 우승 : 2008

3.4. 인천 유나이티드


  • FA컵 준우승 : 2015

3.5.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 아시안 게임 축구 동메달 : 2002

3.6.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AFC 아시안컵 3위 : 2000, 2007
  • CONCACAF 골드컵 4위 : 2002
  • FIFA 월드컵 4위 : 2002

3.7. 통산 성적



3.7.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연령
출전

U - 17
0
0
U - 20
13
20
U - 23
27
11
A 대표
78
10
종합기록
118
41

3.8. 주요 개인 수상


  • 춘계대통령배 도움왕: 1998
  • 추계연맹전 득점왕: 1998
  • 백운기 득점왕: 1999
  • 말레이시아 방가반두 컵 득점왕: 1999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2002
  • 체육훈장 맹호장: 2002
  • K리그 신인상: 2002
  • K리그 도움왕: 2002
  • K리그 베스트 XI: 2002, 2005
  •  아시아 올해의 청소년 선수상: 2002
  • 제18회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프로스펙스 특별상: 2004
  •  프로축구 골든볼 골든슈 시상식 - 월간 (9, 10월) 골든볼: 2005
  • K리그 MVP: 2005
  • AFC 아시안컵 베스트 XI: 2007
  • 제24회 베스트 드레서상 최고의 베스트 드레서 스포츠 부문상: 2007


[1] 물론 2002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이천수는 청소년대표팀 시절에도 스페인과 몇 차례 대결을 벌인 바 있는데, 그 때마다 스페인 상대로 상당한 활약을 보여줬다. 스페인 관계자들에게는 아마 어느 정도 인상이 있는 상태에서 2002년의 활약으로 정점을 찍으며 이적한 것이다.[2] 당시 사비 알론소는 동갑인 이천수에 대해 "너는 프리메라리가에서 성공할 수 있다!"라고 립서비스를 하였다. 그러나 이천수는 당시 사비 알론소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였고, 성격도 좋지 못하다며 회고하였다. 사비 알론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알론소는 자기가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과 깊은 친분을 쌓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과감하게 거리를 두는 성격이다. 그러면서도 성격이 나긋나긋한 것도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인데 이천수처럼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와는 친해지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 당시의 이천수는 성격이 당찬 정도를 넘어 자존심이 무진장 강했다. 알론소한테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닐듯. 실제로 슛포러브에서 풋살훈련시 골대를 옮기는 등의 사소한일로 사비 알론소와 빈번하게 다툼이 있었으며 거의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바람에 주변 동료들이 말릴 정도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알론소의 축구 실력은 인정했다.[3] 기록만 보면 믿기지 않겠지만, 데뷔경기 포함 초반 몇경기를 본 축구 팬들은 영점조절만 되면 무난하게 주전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 못 믿겠으면 데뷔전을 검색해서 보자.[4] 훗날에도 이적을 둘러싼 불상사, 특히 돈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 걸로 봐서는 축구 외적으로는 비상식적으로 허술하고 매니저에게 휘둘리는 사람인 것같다.[5] 많은 프로 선수들이 이런 사기를 당한다. 운동에만 전념하고자 믿는 사람한테 맡기는데... 안정환도 당했다.[6] 특히 야구팬이 이곳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을 텐데, 삼성 트레이닝 센터는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7] 차범근 감독의 말에 따르면 임의탈퇴를 시켰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하는 생각으로 임의탈퇴를 풀고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천수의 정신자세가 모자라다 판단, 다른 팀에서라도 뛰는 편이 좋겠다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분노해서 방출했다고 보긴 어렵다.[8] 임의탈퇴는 징계가 아니다. 연맹에서 징계 먹였으면 페예노르트, FIFA와 싸웠어야 할 판이다.[9] 김남일 역시 팀을 떠날때 큰 갈등을 빚어 수원팬들과 사이가 좋지않다. 자세한 내막은 항목참조[10] 정확히 말하자면 이때 수원팬들과 완전히 화해한 것은 아니다. 김남일과 이천수가 손잡고 수원 서포터 응원석으로 올 때에 경기 마친 수원선수들도 마침 같은 응원석 쪽으로 오던 터라 자기 선수들에게 쳐준 박수가 제 3자가 보기엔 김남일과 이천수에게 쳐준 것으로 보였던 것.[11] 지난시즌부터 불거진 우려였는데 인천은 공격적으로 나서는 팀을 상대로 역습을 하는데 강하지만 시작부터 걸어잠그는 팀을 상대로는 이상하리만치 약한모습을 보여주었다. 개막전 경남 FC와 시즌 첫패를 안겨줬던 대전 시티즌이 대표적인 예[12] 파올로 말디니를 일부러 걷어찼음을 이 날 밝혔다.[13] 인천 팬들의 경우 갑자기 뒤통수를 치고 도망간 설기현 때문에 그에 대비되는 이천수의 모습에 고마워했다.[14] 이천수의 은사 임종헌감독이 있었던 팀이다.[15] 이상하게도 방가반두컵을 검색하면 국내 인터넷 블로그나 기자들까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대회로 적었다. 틀림없이 방가반두는 방글라데시에서 열렸던 대회다. 그나마 1999년 연합뉴스를 찾아보면 제대로 나와 있다.[16] 그리고 2002년 월드컵 미국전 당시 페널티킥을 얻었을때도 이때와 비슷하게 원래 본인이 차려고 했었다. 물론 이번에는 저지당해서 게임 시작 전부터 전담 키커로 지정되어 있었던 이을용이 찼지만 실축한다.[17] 하지만 조별리그 3차전 칠레와의 경기에서 퇴장을 당해 한국은 숫적 열세 속에서 남은 경기를 치뤄야 했다.[18] 당시 1순위 키커가 황선홍이었는데 머리부상 때문에 못차서 선수들이 서로 눈치만보니까 '어, 아무도 안차는 분위기야?'라고 생각하고 차려했다고 한다. 근데 차려고 공을 가져다 놨는데 벤치에서 지켜보던 스탭들이 모두 깜작 놀라서 다 일어났다고 한다. 그후 벤치에서 이을용이 차라고 지시가 내려갔고 이을용이 찬거라 한다.[19] 이때 본인 말로는 차는 순간 들어갔다 라는걸 느꼈는데 그 슛이 막히는걸 보고 이번에는 정말로 질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20] 2005년부터 2006 월드컵 끝나고 페예노르트 이적 직후까지가 이천수의 최전성기로, 박지성과 비견되는 오프더볼 움직임 및 활동량, 세계 최상위권의 정지된 상태에서 킥 능력, 탄탄한 신체 밸런스와 순간 속도를 이용한 돌파, 뛰어난 축구지능을 이용한 연계 모두가 어우러진 만능 공격수였다. 박지성보다 더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1:1 돌파를 중시하던 일부를 제외하면 당시 축구를 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천수의 활약에 대해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에야 박지성이 압도적인 커리어와 경기력으로 평가를 압살하지만, 그 즈음의 신문지상에서는 박지성과 함께 국가대표 에이스 취급을 받았다. 야구로 비유하자면, 김광현vs류현진 느낌이었다.[21] 조재진은 과거 황선홍, 최용수와는 달리 거의 전적으로 떨궈주는 역할만 하는 지라 각광 받지 않았고 박주영은 현재의 이승우, 이강인처럼 조커정도로나 가능한 초특급 유망주지 주전이 절대 아니었다. 설기현의 경우 월드컵 이후 레딩에서 폼이 좋았던 편이지만 잠시 잠깐이고 소속팀에서의 삐걱거림이 너무 잦았다. 안정환은 이 시기 이미 노장측에 들어서는 시기였고 소속팀 문제로 폼이 온전하지 못했다. 이동국은 독일월드컵 예선에서 무얼해도 되는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가대표에서 미친듯한 활약을 했지만 월드컵 직전 리그에서 불운한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며 하차. 예선을 하드캐리한 정경호도 상당히 활약했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기용당하지 못했다. 김정우와 이근호 등 떠오르는 신인급은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이천수와 박지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에이스 역할이 없었다.[22] 다만 설기현은 클럽 커리어로 따지면 당시에 이미 발롱도르 후보 및 챔피언스 리그 한국인 첫 골 기록 등을 달성했고, 이후에도 EPL 선수랭킹 11위를 찍는 등 유럽에서 한골도 못넣은 이천수와 비교가 안된다. 그러나 설기현과 차두리 등 피지컬 중심의 축구를 하는 선수들은 국대에서 당시 박지성 중심의 전술에 안 맞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아드보카트 감독도 설기현을 후보로만 기용하였다.[23] 몇몇 팬들이 1:1을 잘 못했다고 저평가하기도 하지만 이천수는 이운재와 함께 대회 공식 베스트 XI에 뽑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