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드라마)/고증
1. 개요
제작진이 완벽한 고증은 어렵다고 하기도 했고, 고증이 제대로 된 부분이 꽤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꽤 있다. 그래도 중요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전반적인 고증은 상당히 양호한 수준이다. 한국 사극의 열악한 사정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정말 많은 공을 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용의 눈물에서 모아둔 자료가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사극계의 바람직한 계승 사례.
2. 스토리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서 참조.
3. 복식
3.1. 관복
송나라에서 전래되었던 고려 관복의 재현도가 높은 편이다. 이에 대해서는 1회부터 전면이 둥근 '''사모(紗帽)'''를 착용했던 용의 눈물의 고증과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모관대를 명나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 우왕 13년(1387)이고 용의 눈물은 그 이듬해인 위화도 회군부터 다루고 있기에 고증상의 문제는 없다. 하지만 역사상 정평공 손홍량(1287-1379)이 홍건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민왕 11년(1362년) 하사받은 초상화의 이모본을 잘 살펴보면 1387년 정몽주가 명나라로부터 도입한 사모와 단령과 놀랄만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원나라 이전의 중원왕조인 송이나 남송대에도 연각의 사모가 존재하였고 고려가 명으로부터 관복을 도입하기 이전에, 늦어도 원 간섭시기부터 연각사모의 존재를 인식하고 모방하였음을 조심스레 추론할 수 있겠다.(용의 눈물의 고증이 어떻게 보면 더 맞을 수도..) 1367년 한차례 관복을 흑립과 직령으로 개정하고 난 후(잘 지켜지지는 않은 듯하다), 관복을 일신한 공민왕 19년(1370)부터 이 시점까지는 원나라 이전의 각진 '''복두(僕頭)'''에 공복을 착용하고 있었고, 종묘에 모셔진 공민왕의 초상에서도 전각복두에 공복을 입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1회를 보면 명나라 사신이 훗날의 조선시대 관복과 유사한 옷을 입은 데 반해, 고려의 관리들은 그와 다른 송나라식 복장을 차려 입은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다만 명나라도 아직 건국 초기인 만큼, 고려와 비슷하게 남송의 복식을 입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은 있다. 하다못해 명나라의 것을 받아들인 조선 전기에는 사모뿔이 아래로 휘어진 모습(연각)이었고, 중기부터 사모뿔이 짧게 펴진다(경각)는 것을 감안하면 사모뿔이 벌써부터 경각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의문. 그런데 명나라 때 그려진 관리들의 초상을 보면 가정제 시기까지도 전각복두를 쓰는 사람이 있지를 않나... 혼돈의 카오스다.
이는 사실 공복과 상복의 구분이 모호해진 조선 중후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장면이지만(애초에 공복과 상복을 구분하는 연출가가 있었던가) 역사상 명나라가 송제를 회복한 이후 통상 홀이나 규(긴 구두주걱 형태의 옥)를 들고 있는 황제나 백관들의 공복은 송나라를 그대로 본받아 전각복두에 흉배없는 민무늬 단령(고려의 강민첨 초상 참고), 상복은 초기에는 남송의 제도를 따라 연각사모 중기부터 경각사모를 착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명나라 황제인 주원장(홍무제)의 관복은 오히려 예전 삼국시대 사극에서 많이 나온 당나라 황제의 복식과 거의 똑같다. 주원장의 익선관도 삼국시대 사극에서 여러 차례 나오던 당나라 황제의 관이다. 문제는 사모뿔이 위로 솟구친 왕, 황제의 익선관과 달리 주원장의 익선관의 사모뿔은 여기서 밑으로 내려가 있다. 그리고 명나라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군주와 관료들의 관모는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으며, 황금색 익선관은 이미 죽은 황제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정확히 따지자면 주원장의 익선관과 곤룡포 역시 이성계의 것을 따르되 곤룡포의 색깔만 황색으로 바꾸는게 맞지 않냐는 지적이 있다.
공민왕과 우왕 등 드라마에 등장하는 고려 왕들의 복식은 여전히 일반적인 전각복두가 아니라 절상건을 착용하고 있다. 비단 정도전만이 아니라 고려시대를 다루는 사극들이 대부분 고려의 왕관으로 절상건 형태의 관을 사용하고 있는데, 실제 역사상에서 저런 형태와 비슷한 관모가 나오므로 창작한 것은 아니지만 공민왕의 후대에 재현된 어진을 보면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사모뿔이 양옆으로 전개된 전각복두를 쓰고, 소맷자락이 매우 긴 붉은색 "공복"을 입고 있다. 다만 송대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왕은 "상복"으로 오사고모와 황색의 포를 입는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드라마상에서는 오사고모의 형태로서 다리(뿔)가 양옆으로 올라간 저 절상건의 형태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명대익선관의 별칭이 오사절상건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저런 고증도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 사진에서 공민왕이 자색의 도포에 황색의 용포를 받쳐 입은 것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국왕은 평소 상포(緗袍)를 입다가 중국 사신이 오면 자라공복(紫羅公服)을 입는다는 말을 절충하여 고증한 것으로 보인다. 극중 공민왕은 대체로 황색의 용포를 입고 있으며, 때때로 사진의 자색 도포를 겹쳐입기도 한다. 이 밖에도 평상복으로 흰색이나 옥색의 옷을 입는 모습도 나오는데, 역시 고려도경에서 고려 국왕은 평상시 쉴 때에는 검은 두건에 흰 모시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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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1450년) 윤1월 7일에는 "홍무 2년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공민왕(恭愍王) 전(顓)에게 구장 면복(九章冕服)을 하사하셨고"라는 구절이 있고, 숙종 14년(1688년) 4월 8일 기사에는 숙종이 태조의 어진을 보고 곤룡포 색상이 푸른색인 연유를 묻자 영부사(領府事) 김수흥이 “사람들이 이르기를, ‘고려(高麗)에서는 푸른 빛을 숭상하였다.’고 하니, 태조조(太祖朝)는 고려와 시대가 멀지 않기 때문에 더러는 푸른 빛으로 곤의(袞衣)를 만들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기록이 있다. 조선 초는 거의 고려의 편제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정권을 탈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제도를 조선 왕조에 맞도록 어느 정도 정비한 결과가 세종 때 만들어진 오례의(五禮儀)이다. 또한 홍무제가 공민왕에게 구장면복을 줄 때, 곤룡포를 같이 하사했다면 구장복은 중국의 구장복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곤룡포는 고려의 복색을 어느 정도 따라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태조 어진이 청색인 것으로 보면 바로 전대인 고려 말엽 왕들도 최소한 1369년(공민왕 19년, 홍무 2년)부터는 익선관과 청색 곤룡포를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시간이 우왕 14년(1388)으로 넘어간 19회부터는 고증대로 명나라의 것과 같은 사모관대를 착용하기 시작한다. 고려 왕의 복색도 명나라의 그것인 검은색 익선관과 황색 곤룡포를 착용한다.
3.2. 평상복
일반 복식 역시 용의 눈물에서와 같이 팔은 길고 소맷자락은 짧은 조선 초기의 특징을 띠고 있다. 다만 당시의 트렌드 그대로 풍성함을 강조하기보다는 현대의 트렌드에 맞게 좀 더 몸의 맵시가 드러나도록 어느 정도 퓨전과 변형도 이루어졌다고. 그래도 고증에 기반하여 여러 가지 신경을 쓴 것들을 보면 적어도 전작처럼 시공간을 초월한 웨딩드레스가 나오지는 않을 듯하다.
머리쓰개의 고증도 좋은 편으로 원 간섭기에 몽골 제국으로부터 들어온 '''발립(鉢笠)'''이나 조선 초기까지 자주 쓰인 대나무로 만든 '''중립(中笠)'''을 쓰고 있다.[1] 용의 눈물에서도 둘 다 나왔지만 발립은 태조가 즉위하기 전까지만 간간히 썼고, 그 뒤로는 잘 나오지 않았다. 또한 태종 즉위 전까지는 사대부들이 삼국시대에서 고려 중기까지 흔히 착용하던 두건을 쓰고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두건을 여전히 같이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발립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더욱 자주 보인다. 작중의 시간대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대왕 세종에서도 발립이 등장한 바 있다.
그리고 41화 이성계의 즉위 이후부터 남성들이 말총으로 된 망건을 쓰고 관자를 달고 있다. 이전에는 망건을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 형태도 천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조선시대 들어와서 일괄적으로 이렇게 처리한것. 망건을 쓰게 된 것이 공민왕이 문무신료들에게 갓을 필수로 쓰게 한 이후로 짐작되므로 고려 말 즈음에 망건을 써도 상관은 없지만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리 한 듯하다. 용의 눈물에서는 관복이 바뀌는 태종 즉위 이후부터 사대부들이 망건을 쓰기 시작했다.
3.3. 대례복
왕비의 대례복 역시 잘 고증된 편이다. 보통 조선시대 왕비의 대례복하면 맨 왼쪽의 장렬왕후가 입은 빨강색 대례복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사실 장렬왕후가 입은 치적의(雉翟衣)와 머리에 쓴 대수머리 형태의 대례복은 조선 중기때 왜란,호란을 거친 이후부터 입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1625년(인조 3년)부터 1897년 대한제국 전까지 입었다. 그 전까지는 주로 명나라에서 도입된 적의(翟衣)나 대삼(大衫)을 입고 머리에는 칠적관을 썼는데, 드라마 속 신덕왕후가 입은 대례복은 적의(翟衣)이다. 적의(翟衣)는 기록에 따르면 1370년(공민왕 19년)때 처음 도입되어 조선초기까지 입었다. 그러다가 1403년(태종 3년)때 명나라에서 대삼(大衫)을 도입하게 되면서 그 이후의 왕비들은 모두 이것을 입게 된다. 대왕 세종에서도 소헌왕후가 이 대삼을 입고 나온 적이 있다.
4. 무구
4.1. 갑주
갑옷의 고증도 좋은 편이다. 작중에서 장수들이 입는 '''경번갑(鏡幡甲)'''의 고증은 당대에 정지 장군[2] 이 입었던 경번갑 유물을 재현한 것인데, 용의 눈물에서 재현된 경번갑은 그로부터 반세기 뒤인 세종실록에 실린 것을 재현한 것이었으니 일단 당대성이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마저도 용의 눈물에서는 주연급 일부만이 입은 데 반해, 정도전에서는 지휘관급이라면 기본적으로 경번갑이니 그 사용되는 비중도 높아진 편.
다만 세종실록의 편찬 시점이 극중 시점으로부터 그렇게까지 먼 것도 아니니, 반드시 한쪽의 고증이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당시 장수의 갑옷은 각자 개인이 준비해왔을 가능성이 크기에, 고증을 따지자면 굳이 하나의 디자인으로 통일하기보다 철판을 사슬갑옷에 결합시킨다는 대원칙 아래 다양한 디자인을 섞어서 쓰는 것이 고증에 맞을 것이다. 실제로 국조오례의에는 세종실록의 것과도 다른 제3의 도안이 실려 있고, 일제강점기에 찍힌 경번갑 사진에서는 아예 사슬갑옷과 찰갑의 결합이라는 충격적(?)인 조합까지...[3] 다만 극중에서 이를 통일하는 것은 소품종 대량생산을 통한 제작비 절감과 더불어 극중 군대의 국적을 드러내기 위한 식별표지로서의 기능이 크다.
특히 고무적인 것은 갑주의 목가리개인 '''호항(護項)'''의 재현이 대단히 충실하다는 점이다. 호항은 용의 눈물 이래 종전까지 이 시대를 다룬 극들(신돈·대풍수·신의·기황후)에서는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에서는 엑스트라부터 최영이나 이인임과 같은 주연급 인물들까지 장수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호항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다.[4][5]
투구 역시 세종실록의 도안을 따름으로써 당대에 사용되었던 '''첨주(簷胄)'''에 가깝게 고증을 높였다. 이것은 용의 눈물에서도 나왔지만 역시 두정갑과 짝을 이루어 대부분의 인물들은 몽골주를 쓰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그에 반해 비중이 확 올라갔다. 게다가 그동안의 조선 중기 이전 사극들에서 선보였던 안습한 고증 실정을 살펴보면 그저 폭풍눈물. 잘 모르겠다면 이것과 한번 비교해보자.
궁궐의 금군들에게는 낮고 넓은 모양의 첨주형 투구를 씌웠는데 이는 고려도경에서 숙위병들이 금화대모(金花大帽)를 썼다는 것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금화대모는 높이가 2자에 달하는 금화고모(金花高帽)라고 해서 이것처럼 낮고 넓은 게 아니라 높고 좁은 모습이었을 것이고, 그 위에 장식했을 금화는 어디로.(...) 차라리 장군들과 같은 모양의 첨주를 씌우거나, 숙위병들도 평시에는 복두나 문라두건(文羅頭巾)을 썼다고 하니 차라리 천으로 묶은 모양새의 단출한 복두를 씌우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참고 장군들이 투구를 등에 지고 다니는 모습까지 고증했으면 찬사를 받았을 텐데 나오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쉬운 부분. 참고
다만 한국 사극의 암묵의 룰인 '주연들은 투구를 쓰지 않는다'는 부분은 여전한 듯. 이 점은 이방원 외 전원이 투구를 썼던 용의 눈물이나 주인공까지 투구를 착용한 근초고왕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한국 사극에서 나타났던 문제점이다. 본 사극에서는 이성계, 최영, 이인임 등의 주역들을 제외하면 거의 전부가 투구를 기본적으로 쓰고 있는데 이는 투구를 쓰면 주연배우들 얼굴이 가려진다는 점 때문에 예전부터 대부분의 사극들이 알면서도 용인해 온 문제이다. '엄연히 투구 쓰고도 눈에 인상이 깊게 남았던 근초고왕이나 불멸의 이순신의 사례를 본다면 과연 감안을 해줄 필요성이 있는가?'라는 지적은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전 사극들보다 투구 착용 비율이 올랐다는 점은 긍정적.
45화 이후 갑주의 모습에도 변화가 오는데 이전에 군 최상층부가 입던 갑옷이 경번갑보단 두정갑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특히 왕자들은 모두 두정갑을 입고 나왔다. 이는 조선 장수 하면 떠오르는 두정갑의 모습을 반영한듯 하며 나라의 분위기를 다르게 보이게 하기 위한 연출로 여겨진다.
더욱이 경번갑 외에도 장교급 인물들이 입는 '''찰갑(札甲)'''의 고증도 국적 없는 판타지 갑옷을 사용하거나, 중국풍의 갑옷을 사용한 것보다 한층 진보한 모습이다. 역시 세종실록에 실린 찰갑의 도안을 그대로 재현한 것. 투구도 경번갑에는 첨주, 찰갑에는 몽골주(몽골발주)를 쓰고 있는데 몽골주는 이름에 몽골이 들어가서 그렇지 실제로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데다 이 당시는 원 간섭기까지 거쳤던 걸 생각하면 고증 오류라고 하기는 어렵다. 제작진의 설명으로는 용의 눈물에서는 고증대로 재현한 80kg짜리 갑옷을 입느라고 배우들이 고생이 많았는데, 지금은 발전한 기술 덕에 철의 질감을 재현한 특수 플라스틱으로 갑옷을 만들어 무게가 10kg으로 감량되었다고 한다.
몽골이나 외지 이민족 고증도 그럭저럭 괜찮지만 의외로 왜구의 고증에서는 아직도 크게 허술한 면이 있는데, 예산의 문제인지 불멸의 이순신 당시 쓰던 것을 그대로 유용하다보니 아지발도의 사병들이 뜬금없이 수백년 후의 전국시대 다이묘들인 호죠, 모리, 오오토모, 롯가쿠 등의 깃발을 등에 지고 전국시대 후기 양산형 갑옷을 입고 있다. 다만 장수 아지발도나 중하급 무사의 갑옷 역시 불멸의 이순신의 와키자카가 한산대첩 시점까지 입었던 소품을 그대로 활용했는데, 불멸의 이순신의 왜군 무장들이 전국시대인데 무로마치 시대 갑옷을 입고 있다고 까인 걸 생각하면 그거는 결과적으로 고증에 맞게 된 셈이다.(...) 또한 처음 왜구들이 등장시 손에 미츠도모에[6] 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있는 점은 옥에 티. 일본에 방패가 없던 건 아니지만 왜구들과 관련된 사료들에서 나오는 방패는 고정해 놓고 뒤에서 궁수들이 사격하는 입방패(파비스) 계열이다. 다행히 입방패는 제대로 나온다. 또 병사들이 아시가루하면 떠오르는 진가사(삿갓 모양의 투구)를 안 쓴 것은 다행이다.
일본에서는 손에 들고 쓰는 방패를 수순(手楯,てだて)이라고 하며,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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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출처
4.2. 무기
엄밀하게 따지자면 등장 인물들이 칼코등이가 없는 환두대도를 들고 있거나 임진왜란 이후 길이가 길어진 환도를 사용하는 모습은 아쉬운 부분이다.[9] 또한 검을 패용하는 방식이 제각각인데, 칼을 손에 들고 다니거나 용의 눈물에서 나온것처럼 허리춤에 꽂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고 띠돈이 있어서 거기다가 패용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정체불명의 굵은 가죽띠를 사용하는 경우도 꽤나 있다. 그래도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점차 허리에 검을 차는 모습이 늘어난다는 점은 고무적인 부분. 제작진들도 그래도 나름대로 고증을 위해 노력한다는 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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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최영이나 이성계의 막사에서 일본식 칼 거치대에 환도가 거치되어 있는 점은 문제인듯, 아이러니하게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칼을 세워서 보관하는 건 이인임과 조민수가 그러고 있다. 여담으로 거의 20년전 작품인 용의 눈물에서는 정확하게 벽에 세워서 거치해 놓았다.
활의 경우엔 대부분 국궁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쓰는 화살이 전통적인 화살이 아니며 깍지를 끼지 않는다는 게 차이. 또 18화에서 우왕이 사냥을 말리는 신하들에게 활을 겨눌 때는 검지와 중지로 화살을 잡고 검지,중지,약지,소지의 4손가락으로 시위를 당기는 양궁 사법을 쓰다, 이인임이 나타나는 다음 장면에서는 엄지와 검지로 화살을 잡고 엄지로 시위를 당기는 국궁 사법으로 바뀐다. 옥에 티?
방패의 경우엔 고려 시대 방패 실물 유물은 현재 단 한 점도 전해 오지 않지만, 고려 시대 방패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기록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남아 있다. 저자인 서긍은 고려에서 본 방패 중 수패(獸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려의 수패는 칼이 꽂혀 있어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지만 견고하지 않다는 이야기다."수패의 몸체는 나무이고 뒷면에 가죽을 덮고 앞에 사자 모양을 그렸다. 위에 다섯 개의 칼을 꽂고 꿩 꼬리로 가렸는데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능히 상대방을 찌를 수 있다. 다만 그 방패는 아이가 가지고 노는 물건 같으니 충분히 화살과 돌을 막아 내지는 못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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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방패와 관련된 흥미로운 자료 하나가 일본에 남아 있는데, 사이타마 현 박물관에 소장된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라는 13세기 그림이 그것,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1281~82)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몽고습래회사는 당시 병사들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에는 고려군 혹은 몽골군의 것으로 짐작되는 장방형 방패가 나오는데, 현재 이 병사들이 고려군인지 혹은 몽골군인지, 그도 아니라면 중국 한족 계열의 강남군(江南軍)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로서는 고려군도 이와 유사한 방패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간접적 추정 자료로 가치가 있을 뿐이다. 어쨌든 고려도경에 나오는 수패나 몽고습래회사에 나오는 방패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원방형 방패와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후 27화 개경 공방전에서 사각형 방패도 등장했다.
다만 또 생각해봐야 할 점이 역시 고려 말과 시대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조선 초기 팽배수들이 사용하던 방패는 바깥쪽이 둥글게 깎은 나무에 가죽을 덮고, 앞면에 용이나 도깨비 문양을 그리고 테두리에 철을 덧댄 원형 방패였다는 점이다. 고려도경은 아무래도 고려 전기 쪽이고...결국 어느 쪽 고증을 따르느냐에 달린 문제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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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근내역 전투나 황산대첩의 경우 이상훈씨의 논문을 토대로 극을 전개하는 듯 하다.# 사근내역 전투와 남원성 전투는 이전과는 달리 CG등을 이용해 2000년대 한국 사극 전투 중에서도 괜찮은 스케일을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사근내역 전투가 대형 없이 좀 패싸움식으로 나간 건 옥에 티였는데, 고대나 중세는 물론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던 근현대에도 군대는 대열 유지에 모든 걸 걸었다(실제로 전투에서 죽는 경우는 대다수가 적들이랑 난전할 때가 아니라 대열 유지하다가 밀려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때였다). 그러나 회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전열을 짜고 궁병들이 사격전을 벌이는 등 이전의 사극보다 진보한 면도 있다.[10] 또 남원성 전투는 정연한 대형을 갖추고 방패와 활을 이용한 공성전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호평. 다만 동문선(東文選) 등의 기록을 보면 고려 시대의 합포성을 설명하면서 "성벽 위에는 매 2척마다 방패 1개, 창 1개, 깃발을 세운다"고 묘사하고 있어, 성벽 위에 방어용으로 방패를 추가로 설치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드라마상에 이러한 점이 없다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11화의 황산대첩도 그 스케일을 기대할만한 영상이 나왔다는 평가다.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점이 있지만 그 부분은 역사와의 차이점 문서 참조.
보통 한국 사극에선 기마병이 검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극도 그런 점이 있기 하지만 고려군도 아니고 왜구군의 아기발도가 잠깐이나마 뛰어난 창술을 보여준 것이 참으로 포스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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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전투의 경우 최영 측이 골목에서 수레를 동원해 바리케이드를 친 것은 기록에 나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낮에 벌어진 전투씬에서는 여전히 전열을 짜지 않고 단체 칼부림으로 나오는 중. 사실 전투씬에서 적 진영으로 달려갈때는 전열을 짜서 달려가는 것 까지는 하는데 붙는 순간 전열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단체 패싸움이 된다. 사실 대열을 칼같이 맞춰 움직이는 것은 엑스트라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문제로 쉽지 않은 것이다. 대열을 칼같이 맞춰 멋을 낸 것은 호빗: 다섯 군대 전투에서 잘 나타난다. 칼같이 맞추면 의장대스러운 멋을 낼 수 있는데 제작진이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6. 건축
당시는 고려 본궁인 만월대가 불탄 이후였으므로 작중 나오는 고려의 궁궐은 수창궁으로 추정되는데, 개경 궁궐의 정전 앞 제3문의 현판이 '운룡문(雲龍門)'으로 되어 있다. 운룡문은 만월대 정궁에 세워진 문이었으므로 이 문 역시 극중 시대상 존재할 수 없는 상태여야 하니 고증 오류. 또한 남북관계가 좋지 못한 지금 시점에서 수창궁이 과연 예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발굴조사 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다만 조선의 궁궐들도 정전들간의 유사성이 발견되며 고려의 궁궐터들도 토대를 높이 쌓는 고려 전통의 건축 방식은 비슷했기에 설령 만월대 세트를 사용하는 어쩔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라고 해도 고증상 더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을듯. 가령 MBC 사극 신돈에서는 홍건적의 난으로 만월대가 불탄 후 등장한 궁궐이 예전 만월대 세트에서 현판만 교체한 모습으로 나왔다.
고증을 지적한 오마이뉴스 기사[11]
사실 이 부분은 정말로 어른의 사정인게 태조 왕건을 찍었던 고려 왕궁세트는 헐리고 대왕 세종의 세트가 됐다. 왕건 세트장이 야외 세트 초창기에 지어서 조잡한 부분이 있고 수명이 다한 감이 있었지만 그 이후 KBS는 고려 세트장을 짓지 않았고, 역시 고려왕궁을 재현한 용인의 MBC 세트장은 용인시가 지원해줬지만 호구짓으로 용인시가 아닌 MBC에서 관리하고 있어 타 방송국에서 이용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MBC도 조선왕궁이나, 신라왕궁 등으로 등장시켜서 사실상 제대로 활용하지도 않는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이 궁궐 세트가 과거 연개소문 등에서 중국의 궁궐로 우려먹힌 적이 있었다는 점.
궁 뜰 바닥에 잔디가 깔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과거에는 잔디는 무덤에나 까는 것으로 마당에는 심지 않았으므로 고증 오류다.
45화에 CG로 나온 경복궁의 규모가 매우작은데 지금의 거대한 규모의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이 재건축하면서 거대화시킨걸로 정도전이 만들었을때는 약390칸 규모였기에 고증에 부합한다. 참고로 흥선대원군의 경복궁은 이전의 10배인 7000칸이며 이방원은 궁궐규모가 작은것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궁궐 즉 자금의 창덕궁을 건설한다
7. 기타
정도전 고증문제를 지적한 포스팅[12] 점고 받는 장면, 고려시대엔 없던 평민들의 염색된 옷, 사과, 현대적인 전통가옥 양식, 원래 4개 피워야 하는 봉수대, 그 시대에 없었던 주리틀기에 대한 점을 세세히 지적하고 있다. 단 위의 링크는, 학계에서 《고려도경》의 관련 기록에 의거하여 고려 시대 서민 가옥에는 일반적으로 구들이 있었고 상류층 가옥은 그렇지 않았다고 보는 것[13] 과 거의 반대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14] 또한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힘들거나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고려 말기 호송관의 무장 상태, 가체의 크기, 서민 집의 방 크기나 한 끼 식사량, 나무 숟가락의 크기와 모양 등에 대해 단정지어 말하는 경향이 있고, 그밖에 조선 말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를 놓고 극중 압슬형 묘사의 타당성을 논하거나 2007년 이후에 복원된 나주 정도전 유배지의 초사(草舍)를 당시의 건물로 착각하는 등의 문제도 많으므로 적당히 걸러서 보기 바람.
한편 2010년대 들어 사극에서 외국인들이 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여기서도 명나라 사신이 중국어를 사용하고 역관을 통해 고려인들과 대화하는 등의 모습도 발견된다. 2008년 대왕 세종에서도 명나라 사신이 중국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왜구 또한 일본어를 사용하면서 언어 고증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다만 일본병사가 아기발도를 쇼군이라고 칭한다거나, '쏴라!'를 '우테!'로 직역한 건 좀 옥에 티.[15]
극중 이성계가 동북 방언이 아닌 서북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솜망방이 처벌'이라던가 그 시대에 등장하기 어려운 용어의 사용이 지적받는다. 예를 들어서 정도전이 편전에서 북원과의 화친에 반대하는 말을 할때 민족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19세기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자세한 것은 민족 문서 참조. 기타 자잘한 오류로는 이성계 막사에서 한반도 모양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그림을 들 수가 있는데 애시당초 저런 그림이 나온 것이 근대에 들어와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토끼라 카더라' 라고 한 것에 반발하여 '사실은 호랑이다'라고 주장한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저 시대엔 존재할 수가 없다. 또한 북원이라는 단어도 문제가 되는데, 당시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 후대에 사용된 역사학적 명명일 뿐으로 당시에 쓰인 예를 고려사 사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최영이 요동 정벌을 강행하면서 말하는 '사대주의'라는 용어도 이와 마찬가지.
5화에서 정도전이 유배를 가는 장면은 예능 프로그램인 렛츠고 시간탐험대를 떠올린 사람들이 꽤 있는듯하다. 여기서도 보수주인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러하고. 사실 사극에서 보수주인이 나온 건 정도전이 거의 최초라고 봐도 좋다. 뭐 여기의 보수주인은 나이도 지긋하고 시간탐험대의 보수주인보단 착한 사람이긴 하다. 사실 시간탐험대에서도 나온 얘기지만 돈이 있다면 말이나 당나귀 등의 탈 것을 구매해 타고 갈 수도 있었다. 거기서는 돈이 없다는 설정을 해서 생고생을 해서 그렇지... 칼을 안 찬 것은 배우의 안전문제 때문일듯. 어쨌든 그동안 유배객의 단골 탈 것이었던 소달구지가 안 나온 것만 해도 고증의 진보. 23화에서 이인임이 유배 갈 때는 고전적인 방법(...)을 썼으나, 이 때는 남은을 통해 "저게 다 백성들 보라고 일부러 저러는 거요"로 못박아두어 논란은 대충 피해갔다. 조리돌림과 유배행렬을 합쳐놓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뒤부터 계속 아무 설명 없이 소달구지가 나오는 걸 보면 그냥 익숙한 걸로 가자고 정한 것 같기도. 뭐, 주리 틀려서 하반신이 만신창이가 된 사람이 멀쩡히 말타고 가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한데 문제는 주리도 고려시대 형벌이 아니다...
참형은 원래 귀에다 화살을 꿰고 죄인을 엎드리게 하여 고정시킨 다음 큰 칼로 집행하는게 일반적이었지만, 본 사극에선 그런 모습이 재현되진 않았다. 뭐, 한국사극에서 원래 제대로 참형이 재현된 것이 거의 없긴 하지만.
7화에서 나주 마름이 정도전에게 내보인 사패문서에 찍힌 옥새는 원래 '''세종대왕의 어보'''(…)이며, 이런 어보는 임금이 승하한 후에 제작을 한다. 80년 후에야 만들어지는 어보를 가져다 찍어놨으니 빼도박도 못하는 고증오류. 전라도라면서 廣州牧이라고 적어놓기도 하였다.
또한 위 문서에서는 연도 표기를 간지로만 적었는데, 국왕의 결재를 받은 공식 행정문서에 들어가야 할 '○○ ×년'이란 형식의 중국 황제 연호가 누락되어 있는 것 역시 고증 오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패문서로 알려진 보물 제1135호 조온(趙溫)의 사패문서(1399년, 좌측)와 보물 제899호 조흡(曺恰)의 사패문서(1401년, 우측). 조선왕조실록에는 국호를 정한 직후인 태조 때 '조선왕보(朝鮮王寶)'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태종 때 명나라가 책봉 고명을 허가한 후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란 글자가 새겨진 옥새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좌측 문서에는 조선왕보, 우측 문서에는 조선국왕지인이 찍혔음이 확인된다. 고려사 여복지에 공민왕 시기인 1370년 5월, 명 태조 주원장이 거북 모양의 옥새를 고려에 보내주었고, 거기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가 드라마의 시대배경과 일치하는 만큼 저 사패문서에도 역시 '고려국왕지인'이 찍혀 있어야 고증에 맞다. 여기에다 27회에서 개경 도성에 붙였던 조민수와 이성계를 삭탈관직하고 토벌할 것을 적은 칙서 방문에 찍힌 옥새는 문종의 어보.
그외 옥의 티라면 티인데 19화에서 임견미 역의 정호근 씨의 소매자랏 속에서 깔깔이(...)로 추정되는 노란색 내복이 보인 것이 잠시 화제가 되었다.
진품명품에서도 전문가들이 정도전의 고증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내시의 경우, 공민왕, 우왕을 모시는 강내관, 창왕, 공양왕을 모시는 김내관 등의 내관들은 모두 수염을 기르고 있어 환관이 아닌 것으로 묘사되지만, 고려시대 말기에는 이미 몽골의 영향으로 왕실에서 환관이 널리 쓰이고 있었고 사실상 내시부=환관과 같은 상태였다.
그런데 '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다.'는 일반론을 과도하게 따랐는지, 고려 편 까지는 수염을 기르고 나오던 내시들이 조선시대 편 부터 갑자기 수염이 없어지는 기묘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양 천도 이후에도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이 5명인 걸로 나온다. 원래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은 6명(진안군 이방우, 영안군 이방과, 익안군 이방의, 회안군 이방간, 정안군 이방원, 덕안군 이방연)인데 진안군 이방우는 1393년 사망했고 덕안군 이방연은 아예 조선 건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5명이 아닌 4명이 나와야 맞다. 이방우의 경우 그의 사망을 나레이션으로까지 언급하였으니 이 때 나온 한 명은 덕안군 이방연으로 염두하고 출연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1] 립(笠)은 본래에는 야외 활동시의 쓰개로, 하급관리 및 평민 이하 신분의 사람들이 쓰던 것이나 원 간섭기 이후에는 몽골 복식의 영향으로 상류계층의 귀족들에게까지 사용되었다. 조선 중기부터는 구하기는 물론 관리하기도 어려운 말총으로 흑립을 만들어 쓰면서 이것이 고급화되어 선비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데, 선비가 아니라도 능력만 있다면 쓸 수 있었다.[2]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수차례 격파하였고, 특히 관음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서남해안에 창궐하던 왜구의 침입에 종지부를 찍었다. 무엇보다 이후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한 인물이다.[3] 사실 드라마 정도전의 경번갑에 보이는 철판도 자세히 보면 하나하나가 정사각형 모양의 통철판이 아니라 두 개의 철편을 나란히 이어붙인 것이다. 이 철편은 아래에서 서술할 찰갑의 구성품인 바로 그 특수 플라스틱 철편. 일단 찰갑에 쓸 철편을 대량주문하고, 그것을 얼마간은 경번갑에 쓴 것으로 보인다. [4] 다만 조선 중기부터는 두정갑이 보급됨에 따라 귀와 목을 가리는 투구드림의 방호력이 강화되면서 호항의 필요성이 사라졌고, 자연스럽게 호항은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용의 눈물을 포함한 종래까지의 드라마들이 벌써부터 투구에 방호력을 갖춘 투구드림이 달려 있는 것은 고증오류일수도 있지만, 이미 삼국시대 유물이나 고려시대 불교미술 등에 드림을 갖춘 투구가 등장하는데다 북관유적도첩 중 척경입비도@에서 천막 안에서 앉아 있는 지휘관들의 투구를 보면 첨주인데도 드림이 붙어있다.(특히 위쪽에 그려진 천막 안의 장수의 경우 뚜렷하게 챙이 보인다.)다만 삽화가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이라 1차사료로는 부족한 점이 있다.[5] 그외에 시대 차이는 많이 나지만, 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 나오는 조선군 기병들의 투구를 자세히 보면 드림이 달린 첨주다.[6] 일본 본토가 아닌 류큐 왕국의 상징이다.[7]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내려오는 유구한(?) 방식.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에서 사용되는 갑옷과 무장이다.[8] 조선은 활을 많이 사용했기에 이 방식을 많이 사용하였다. 출처는 <조선전쟁 생중계>.[9] 재미있게도 공민왕이 사용하는 칼은 이성계의 전어도를 레플리카한 것이다.(...?)[10] 2000년대 들어 근세 이전의 군대가 전열을 짜고 싸우는 걸 보여준 사극은 이 드라마를 제외하면 퓨전사극인 뿌리깊은 나무 초반 회차에서 똘복이가 북방 군대에 들어가 싸울 때 정도다(...).[11] 다만 이 기사엔 엄연히 '''조선초에 완성된''' 개경 내성구조를 고증 잘했다고 말하거나 이미 '''홍건적의 침입으로 당시에 불탄''' 만월대 세트를 사용했어야 한다는 식으로 '고증오류'가 좀 있다.[12] 단 이 고증을 지적한 만쭈리라는 필명의 블로거는 역사 전공이 아니라 경영학 전공이며, 사료를 왜곡하면서까지 조선을 폄하하는 악질 조선까로 2014년 4,5월에 다수의 역사 커뮤니티에서 비판받고 있다. 2014년 4,5월 이글루스 역사 밸리, 네이버 카페 부흥, 역개루, 다음 카페 토탈워에서 조선을 향한 지나친 적대감 표출과 그를 위한 사료 취사선택, 조작으로 논란을 일으켰으나, 본인 블로그에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댓글을 삭제하고 비판글 작성자들을 차단한 전과가 있다.주요 비판 링크 주인장의 다른 글에 대한 역덕들의 반응 1 반응 2[13] 상류층은 조선 전기까지 휘장과 장막을 쳐서 찬바람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막고, 융단을 깔아서 찬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14] 단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 시대 가옥에서 방 전체를 데우는 전면온돌은 고려 중기 즘에 보편화되므로 전면온돌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15] 쇼군이 아니라 '토노(殿, 주군)'라고 불러야 맞음. 또한 撃つ는 근현대 격발식 화기의 방아쇠를 당긴다는 뜻으로 원거리 냉병기 및 점화식 화기의 사용에는 放す를 썼으니 실제로는 '하나세!'라고 해야 맞다. 역덕이 아니면 누가 신경쓰겠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