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1. 개요
2. 고려시대편
2.1. 제1회
2.2. 제2회
2.3. 제3회
2.4. 제4회
2.5. 제5회
2.6. 제6회
2.7. 제7회 ~ 제8회
2.8. 제9회
2.9. 제10회
2.10. 제11회
2.11. 제12회 ~ 제14회
2.12. 제15회
2.13. 제16회
2.14. 제17회 ~ 제18회
2.15. 제19회 ~ 제20회
2.16. 제21회 ~ 제23회
2.17. 제24회 ~ 제25회
2.18. 제26회 ~ 제28회
2.19. 제29회 ~ 제30회
2.20. 제31회 ~ 제32회
2.21. 제33회 ~ 제34회
2.22. 제35회 ~ 제36회
2.23. 제37회 ~ 제38회
2.24. 제39회 ~ 제40회
3. 조선시대편
4. 여러 회에 걸친 비교
1. 개요
KBS에서 정도전의 생애를 주제로 방영되는 사극 정도전(드라마)에서 극중 전개와 실제 역사적 사건들의 비교를 위한 문서.
2. 고려시대편
2.1. 제1회
-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것은 신돈 집권 전 일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작중에 그녀를 위한 영전(影殿)을 짓는다고 한 것을 오해한 것일 듯하다. 사실 노국대장공주를 위해 영전을 짓는 것은 신돈 집권시와 그 이후의 일이고, 신돈은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짓는 일을 반대하였다가 실각의 빌미를 만들었다. 더불어 영전을 짓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역자들을 동원하고 사상자가 많이 나와 민심이 흉흉했던 것도 실제 역사적 사실. 모후인 공원왕후 홍씨나 심지어 하녀까지 국왕에게 간했으며, 간언을 했던 신하 하나는 끝내 공민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공민왕이 정도전을 보고 '뭐야 이 듣보잡은?'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죽기 전부터 총애했던 신진사대부로 고려사 '정도전 열전'에서는 "왕이 그를 매우 총애했다"고 기술했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신돈을 처벌하고 태묘에 제사 지낼때 일익을 담당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대에 이미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기 때문이다. 비록 혈통상의 문제가 있었고, 후일 우현보에 대한 그의 처분[1] 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컴플렉스도 있었겠지만, 그런 약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지금의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형부상서 정운경의 아들이었으며, 당대 최고 학자인 이색의 제자였다. 그의 출세는 적어도 공민왕대까지는 어느 정도 탄탄대로였던 셈이며, 그가 좌절을 겪는 것은 우왕때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본작에서와 달리 조선개국으로 완전히 틀어지기 전까지 동문들과 동료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이 문제를 비판한 기사.
- 작중에서는 성균사예가 낮은 직품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종4품의 꽤 높은 직함이었다. 당시의 정도전 같은 30대의 젊은 관료가 종4품이라면 순조로운 출세이다. 거기에 아버지, 어머니의 줄초상(아버지 3년상 중 2년째 될때 어머니도 돌아가시는 바람에)으로 그는 20대의 절반인 5년간 관직 생활을 쉬기까지 했는데도 저 정도의 승진속도를 보였다.
- 공민왕이 모니노가 신돈의 자식인가 의심하는 세간의 소문을 신경쓰는 묘사가 초반에 나오지만, 실제 사서에서 공민왕은 우왕을 확실한 자기 자식으로 여겼다. 다만 실제 그런 소문이 퍼진 건 맞고 공원왕후가 우왕의 출생을 의심했다는 것도 사실.
2.2. 제2회
- 이인임이 정도전을 문초하면서 아비 대에야 개경에서 관직을 지낸 가문이라면서 깔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애초 권문세족이라는 것 자체가 기존 문벌귀족의 생존자들에 무신정권의 잔당들, 한미한 가문 출신의 국왕의 친위 세력(심지어 신덕왕후 강씨의 집안을 일으킨 강윤충 같은 노비 출신도 있었다)에, 지방 향리 출신 과거 급제자들 중 권력을 잡은 자들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이들과 신진사대부가 확실히 나눠진다는 학설 역시 도전받고 있다. 이인임 역시 할아버지 이조년이 학문으로 집안을 일으켜 개경에서 입신하였으며, 형 이인복은 공민왕 초기의 중신으로서 원에서 과거 급제하는 등 학문으로 일어난 집안이었다. 이성계의 큰며느리는 한때 이인임과 결탁해 우왕 초기의 권신으로 있었던 지윤의 딸이며, 이성계의 사위 이제도 이인임의 집안 친척이었다. 즉 실제 저런 식으로 이인임이 생각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이야기. 단, 드라마 후반부인 37~38화에 나오는 것처럼 정도전의 모계에는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고, 나중에 정적들이 이를 가지고 넘어지는 등 그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였다.
- 공민왕의 최후는 정사와 달리 비극적으로 처리된다. 정사에선 익비를 임신시킨 홍륜을 최만생과 묻어버리겠다고 하다가 살해당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정도전의 일갈을 듣고 새 정치의 희망을 품어 이인임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왕이 평소 거칠게 대해온 것을 불만으로 여기고, 익비와의 불륜으로 공민왕이 자신들을 제거할 것을 알아챈[2] 홍륜 등의 자제위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에 정사에 있던 홍륜등과의 난행도 상당히 축소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 여기서는 환관 최만생[3] 이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 홍륜을 죽이려다가 공민왕과 같이 죽는 것이 역사와 다르다.
어째 공민왕 문서에 있는 이인임 배후설이 생각나면 기분 탓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기분 탓이라기 보다는 작가가 실제로 사료에 남은 내용과 이인임 배후설을 엮어 대본을 썼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공민왕을 비롯해 고려 후기 왕들의 기록에 조선학자들의 폄하가 들어가 있다는 지적이 조선 후기부터 지적되는 만큼 작가의 각색이 어느 정도는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은 이익과의 편지에서 '우왕, 창왕도 신돈의 아들이 아니라 왕씨 아닌가요?'라고 까고 동사강목에도 왕으로서 기록했다.
2.3. 제3회
- 공민왕이 사망한 뒤 공민왕지영위(恭愍王之靈位)라는 위패가 보이는데 고증상 오류이다. 시호는 본래 결정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 사이에 쓰는 호칭은 대행(대)왕. 게다가 저 공민(恭愍)이라는 시호는 공민왕 사후 명나라에 청시사(請諡使)를 보내서 하사받아온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사망한 바로 다음 날 아침으로 보이는 시점에 바로 이런 시호가 정해져 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시호가 정해진 왕의 위패를 만들 때도 저렇게 '성의 없게' 약칭을 쓰는 게 아니라 시호 전체를 쓰는 게 일반적. 따라서 공민왕의 경우 위패에 공민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라는 말이 다 들어가야 한다.
- 최영이 제주반란의 수괴 3명의 수급을 개경으로 보낸 것은 실제로 사실이다. 다만 그걸 가지고 이인임이 수작을 부린 것은 픽션이며 최영이 우왕을 겁박한 듯한 모습도 사실이 아니다. 현실 역사에서 우왕은 공민왕이 죽은 이후 9월에 왕위에 올랐고 최영은 10월에 수하 장수들과 함께 귀환해보니 왕이 이미 죽었으므로 왕의 빈소에서 보고를 올리며 통곡하다가 목이 메었다라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최영이 급히 개경으로 올라오자 제2의 무신란을 일으킬까 저어하여 하루아침에 우를 왕위에 올렸다는 건 각색이며, 그래서인지 실제 역사와도 다르고 작중 행동은 마치 구석을 받은 권신이 할만한 행동이라는 지적이 있다. 작중에서도 경복흥이 이를 말리거나 자신에게 부월을 들이대는 최영을 보고 이인임이 역적이냐며 디스하는 장면이 있다. 일단 최영은 기본적으로 우왕 즉위 당시 우왕의 즉위를 밀어붙인 이인임 측 사람이었으니 실제 역사적 사건과는 다른 묘사이긴 하다.
그러나 실제 최영의 행적을 보면 저런 식의 행동이 보이는 장면이 있다. 우왕이 매우 아끼고 신임하던 유모 장씨를 유배보내고 처형시켜버린 행적을 보면 드라마 묘사 뺨치는 수준. 이 일은 사실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기 위해 우왕이 유모 장씨에게 말을 듣고 임견미 등을 제거하려 했는데 최영이 이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때 최영 열전에 기록된 행동을 보면 자기 위하 무장한 군사들을 대거 도열시켜 놓은 채 백관을 소집해 장씨를 국문하라고 주청하며 우왕이 "최영 당신 충신 아니었냐? 대체 왜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러고 있는거냐, 이러지 마라"라고 말한후, 경복흥 등에게 "장씨는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이니 살려달라" 울면서 간청했다. 우왕의 태도가 어찌나 간절했던지 막상 최영과 함께 행동했던 경복흥도 그런 모습을 보고 눈물지었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되어있다. 최영은 이런 우왕의 간청을 무시하고 장씨를 유배보낸 다음 죽였으며 "신하의 몸으로 임금에게 항거한 것은 어쨌든 옳지 못한 태도가 아니냐?"는 간관도 유배를 보냈다. 어쨌거나 고려 후기에 유달리 무신들의 권세가 판을 쳤던 점을 감안한 묘사일 수도 있겠다. 이 대목은 드라마에서 생략되었다.
이거 외에도 역사에 기록된 최영이 간언하는 장면을 보면 왠지 우왕을 윽박지르는 듯한 말들이 많기도 하다(...). 당장 저 사태가 끝나고 최영이 우왕에게 한다는 말이 "전하께서 사악한 자를 물리치시고 저를 의심하지 않으시니 저도 심히 기쁩니다. 다만 신이 불충하다고 꾸짖으시니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다(...). 우왕도 최영이 두려웠는지 "다급한 김에 나도 몰래 실언했으니 깊이 후회하고 있소"라고 변명했다(...). 그 외에 공원왕후와 경복흥이 강녕대군 우가 아닌 다른 종친을 밀었고 이인임이 우를 왕으로 밀었다는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다. 이때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李壽山)이 말하기를, 마땅히 종실 영녕군(永寧君) 유(瑜)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했으나 결국 이인임의 뜻대로 되었다. - 고려사 공민왕 세가 23년 기록
이거 외에도 역사에 기록된 최영이 간언하는 장면을 보면 왠지 우왕을 윽박지르는 듯한 말들이 많기도 하다(...). 당장 저 사태가 끝나고 최영이 우왕에게 한다는 말이 "전하께서 사악한 자를 물리치시고 저를 의심하지 않으시니 저도 심히 기쁩니다. 다만 신이 불충하다고 꾸짖으시니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다(...). 우왕도 최영이 두려웠는지 "다급한 김에 나도 몰래 실언했으니 깊이 후회하고 있소"라고 변명했다(...). 그 외에 공원왕후와 경복흥이 강녕대군 우가 아닌 다른 종친을 밀었고 이인임이 우를 왕으로 밀었다는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다. 이때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李壽山)이 말하기를, 마땅히 종실 영녕군(永寧君) 유(瑜)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했으나 결국 이인임의 뜻대로 되었다. - 고려사 공민왕 세가 23년 기록
- 공민왕의 사망소식을 들은 최영이 급히 개경으로 회군해오자 이인임의 말발에 넘어간 경복흥이 무신정권의 재출현을 우려하여 명덕태후(공원왕후)에게 강녕군을 왕위에 올리자고 설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경복흥이 디스한 무신집권기 집권자 중 경대승은 그의 고조부 항렬이다. 문신을 우대하면서 이의민과 대립각을 세웠던 경대승의 행적을 고려하더라도 일단 무신정권 전체를 싸잡아서 깐 경복흥의 대사는 어찌 보면 패드립성 발언(...)이 되고 만다. 뭐 같은 청주 경씨이나 경대승 세계도 실전되어 두 사람 관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면도 있지만서도...
2.4. 제4회
- 이인임이 공민왕 사후 돌아가던 명나라 사신을 호종무장을 사주하여 죽이고 북원과 붙은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 맞다. 고려사 이인임 열전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드디어 이인임이 백관을 거느리고 우(禑)를 왕으로 옹립했다. 어떤 자가 이인임에게, "자고로 나라의 임금이 시해당하면 재상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그 죄를 받는 법입니다. 황제가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공이 필시 모면하지 못할 터이니, 원나라와 화친해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고 귀띔했다. 이인임이 옳은 말이라 여기고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 등이 귀국할 때 찬성사(贊誠事) 안사기(安師琦)를 보내어 전송한다고 둘러대고서 비밀리에 김의(金義)를 꾀어 중도에서 채빈 등을 죽여서 입을 막아버리게 했다. 김의가 채빈을 죽이고 북원으로 달아나버리자 이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 이성계가 서북 방언을 쓰는데 그 당시의 언어가 지금과 같다고 하긴 어렵기에 그냥 캐릭터성을 살리기 위한 각색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이성계 일족을 비롯해 그들이 이끌던 고려인 집단은 원래 전라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고...사실 동북 방언을 쓰는 것도 시대상 맞지 않는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동북 방언은 놀랄만큼 동남 방언과 비슷한데 그 이유는 이 시대의 조금 뒤인 세종대왕시절부터 시작된 사민정책으로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동북 지역으로 넘어와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북방언을 쓰는 것이 오류가 될 수 있다.
- 작중 등장하는 이성계의 정예병력인 가별초를 그냥 이성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픽션적 성격으로 여기기 쉽지만 이 가별초는 실제로 이성계가 이용하던 사병조직으로 이성계를 따라 전장에 종군하였다. 대체로 전주 이씨 집안이 이끌던 동북면의 고려인들과 이지란등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외 이성계의 인망을 보고 추가적으로 들어온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숫자는 대략 1000~2000여명 선이었다. 그 휘하엔 정예기병으로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성계의 공격적인 전술운용에 요긴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최유의 난이나, 황산대첩, 위화도 회군 등 이성계가 종군한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로 이후에도 존속하다가 태조가 승하한 이후 태종 11년(1411년)에 혁파되었다고 한다.#
- 이성계가 부하들을 많이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동각잡기에 "성심을 미루어서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하니 늘 욕하는 자가 없어 장군의 부하들이 모두 태조에게 예속되기를 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이성계를 비롯해서 작중 인물들 모두가 이지란을 지란이라고 부르는데 고려 시절 이지란은 본명인 퉁두란에서 이씨 성만 붙은 두란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꽤 높다. 조선 건국 후에 쓰인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지란과 이두란이라는 이름을 병용해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렇게 추측할 수 있다. 용의 눈물에서는 이 점이 반영되어서 퉁두란, 이두란, 이지란이라는 이름이 뒤섞여서 언급되었고 자막에서는 이지란(퉁두란)으로 나왔다.
- 이 내용 자체가 픽션이지만 이인임이 최영과 만나 상호견제구도로 고려의 이익을 도모하자 하였을 때[4] 인용한 나라를 하필이면 고조선이라 부르는데, 고려 당대에 고조선으로 지칭되는 나라는 단군조선이고, 이인임이 인용한, 중국 분열기에 세를 키우다 통일 한조에게 멸망한 나라는 이 후의 위만조선이기에 조금 맞지 않다. (고조선이라는 단어 자체는 14세기 말에 고조선 계승을 표방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쓴 용법이 정착되었지만 그 전에도 '옛 조선' 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도 고조선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대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일 뿐 고증의 오류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위의 대사를 옛 명칭 그대로 조선이라고 쓴다면,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대다수의 시청자는 오히려 혼란에 빠질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역사상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최소한 3개 이상 존재하였으며, 최신버전(?)의 조선과 구버전의 조선을 구분하기 위해서 구버전의 조선은 고조선으로 칭하게 되는데, 이 당시에는 아직 이씨조선이 성립되기 전이므로 단군조선을 고조선으로 위만조선을 조선으로 칭하였고, 따라서 지금 발언되고 있는 조선은 현재에는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나라다"라는 요지의 주석을 주렁주렁 달아 놓아야 하는 문제가 생기니 양해해줄 수는 있겠다.
이외에도 극중에서 (신진)사대부를 기존 귀족과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역사학자들의 분류 방식이지 당대의 용법은 아니다.[5] 엄밀히 말하면 극중에서 사대부, 선비라고 지칭하는 사람들도 귀족 계급이며, 또한 고려의 귀족들도 사대부로 볼 수 있기 때문. 단지 역사학자들이 기존 구 질서의 기득권자들과 신진 세력을 구분하기 위해 권문세족 같은 귀족과 신진사대부를 구분한 것이다.[6] 하지만 너무 역사에 충실해 사대부라는 호칭을 대사에서 빼버리고 그 자리를 다른 단어로 대체한다고 치면 대본이 얼마나 끔찍하게 변할 생각해 보자(이를테면 "우리 사대부들은..." 대신 "우리 이색의 제자인 신진 유학자들은..."등등). 그래서 그냥 현대 역사학자들의 분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 우왕 즉위 초 북원과 명, 고려 외교 관계는 사실과 픽션이 혼재되어 있어서 쉽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우선 신진사류들이 하루 빨리 명에 사신을 보내야 한단 주장을 한 것은 맞다.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과 성균사예(成均司藝) 정도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했으나 이인임이 이 말을 듣고 '재상들이 가길 꺼리는데 누가 가겠음?' 이라고 한게 사실. 그러니까 전의부령에 있을 당시에 그랬던 사극에서와 달리 정도전은 아직 하급 지위에 있었을때부터 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북원의 군벌 나가추(나하추)가 사신을 보내어 우가 왕위를 계승한 것을 물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북원에서 심양왕[7] 의 손자 타타부카(탈탈불화)를 고려왕으로 삼았다는건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에선 공민왕이 아들이 없으니 탈탈불화를 왕위에 올린다고 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왕의 혈통을 의심하고 있다는건 픽션의 성격이 강하다. 나하추가 군사를 일으켜 고려 변방을 압박했다던하는 일은 역사서에 '판밀직 이자송을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윤으로, 찬성사 지윤을 서북면 도원수로, 문하평리 유연을 동북면 도원수로 각각 임명해 각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북원의 침공에 대비하게 했는데, 얼마 후 변방의 정세가 평안하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징병을 중지했다.' 는 기록을 따라 각색한 것.
지문하부사 임견미가 서경상 도원수로 파견된 건 정도전이 유배가고 난 다음에 일이다. 이후 5회에서 나하추를 추격한 이성계와 만나 갈등을 빚었다던지 이인임이 이성계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할때 호위를 하라 명 한건 픽션이다. 이는 이성계가 변방의 장수이며 조상대대로 원을 섬겼기에 고려 중앙의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는 설정을 보여주는 장치로 이용된다.
지문하부사 임견미가 서경상 도원수로 파견된 건 정도전이 유배가고 난 다음에 일이다. 이후 5회에서 나하추를 추격한 이성계와 만나 갈등을 빚었다던지 이인임이 이성계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할때 호위를 하라 명 한건 픽션이다. 이는 이성계가 변방의 장수이며 조상대대로 원을 섬겼기에 고려 중앙의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는 설정을 보여주는 장치로 이용된다.
2.5. 제5회
- 정도전이 원나라 사신 맞이를 거부하였다는건 역사적 사실이다. 정도전 등 신진사류들이 공민왕을 지하에서 어떻게 보려고 그러냐며 사신맞이의 불가를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정도전이 경복흥의 집에 가서 "내가 마땅히 사신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에 묶어 보내겠다."라고 한 다음 명덕태후에게 "사신 맞이는 불가하다"라고 고하자 경복흥과 이인임이 분노하여 그를 회진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극에서 경복흥의 집이 아닌 도당에서 칼부림(?)을 했다거나 이인임의 멱살을 잡았다는 건 픽션이다. 정도전은 이후 2년간 유배살이를 한다. 다만 이 일은 안사기가 돌아온 김의의 수행원을 대접했다는 죄목으로 박상충에게 탄핵당해 자결한 이후의 일인데 본작에선 이 사건이 그 앞으로 앞당겨졌다. 애시당초 나하추는 우왕 1년 정월과 5월에 각각 사신을 보냈는데 본작에선 시간 문제상 그 둘이 합쳐진듯. 전체적으로 우왕 1년에 있었던 사건들이 시간 구분없이 뒤섞인 느낌이 강하다.
- 신진사대부들이 북원과의 화친을 반대한건 사실이고 정몽주와 정도전이 그 중심에 있었던것도 맞지만 정도전의 성균관 농성이나 최영의 성균관 난입 후 진압은 픽션. 그래도 나중에 박상충 고문때도 나오겠지만 최영이 신진사류 쪽에 호의적이진 않았다는 건 맞다. 유배지역이 전라도 나주의 부곡이었던것은 실제 사실이 맞다. 이인임이 정도전이 태후에게 사신 맞이 불가를 아뢰자 공무를 보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
- 정도전이 부곡으로 귀양을 가면서 하급 관리들이 부곡 백성들에 대해 "양인이지만 천민만도 못하다"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데, 고려 말기에는 향, 소, 부곡 등의 특수 행정구역에 대한 차별이 사라진 상태였다. 애초에 이런 특수 행정 구역들은 고려 중기 군현제도의 정비와 민란, 지속적인 토지 개간으로 인한 경제력 확대, 여러 차례의 전란에서 공을 세운 지역을 승격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몇몇 지배층의 사적 경제기반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고려 말기로 가면 하층민들의 출세와 거주지 이전, 행정구역 변경 등이 여러 차례 겹쳐 이미 명목상으로만 남아있는 수준이 되며, 이련 명목상의 특수 행정구역은 조선 초중기까지 남아있지만 실질적 영향력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2.6. 제6회
- 이성계의 개경 인맥이 상당히 생략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경처였던 강씨 집안과의 관계 외에도 큰아들 방우(진안대군)는 지윤의 딸과 혼인했고, 강씨 소생 막내딸(경순공주)는 이인임의 동생 이인립의 아들인 이제(흥안군)와 혼인했기 때문에 권문세족 집안과도 인맥이 어느 정도 있었다. 다만 이인임 집안과의 혼사는 이성계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재료로 18화에 나오긴 하고 지윤과의 인맥은 지윤 자체가 스토리에서 비중이 생략되어서(...) 같이 생략된듯. 어쨌거나 이성계 집안 자체가 워낙 오랜 기간 변방에 있었고 저렇게 대놓고까진 아니었겠지만 은근히 차별하는 것은 있었을 것이다.
- 안사기 사건의 세부적인 묘사가 다르다. 안사기가 김의의 수행원을 대접하여 박상충에게 탄핵당한 것까지는 같다. 고려사에서는 안사기를 탄핵한 후에 마침 판사(判事) 박사경(朴思敬)이 북원에서 돌아와 태후에게 보고하기를 "나하추가 저더러 '당신 나라 재상이 김의를 보내, 왕이 죽고 후사가 없으니 심왕을 받들어 왕으로 삼기를 원한다고 청하기에 황제께서 그렇게 한 것이오. 만약 전 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조정이 꼭 심왕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요.'라고 일러주었습니다.'"라고 하자 태후가 이인임을 불러, "듣건대 재상이 김의를 원나라에 보낸 지가 오래되었다는데 경들만 어찌 모르는가?"라고 꾸짖고 박상충의 상소를 도당으로 보냈으며, 왕명으로 하옥될 위기에 처하자 안사기가 도주 후 자결, 그 목을 효수했다고 되어 있다.
드라마에선 이 점을 각색하여 안사기의 조작책 중 하나가 정몽주를 포함한 신진사대부 측에게 미행당하고 확보당할 즈음에 칼을 꺼내들어 일행을 베어 위협하던 중, 지나가던 이성계에게 칼날을 잡혀 제압당해 신변을 확보당한 뒤 자백하는 바람에 들통났다. 거기다 국문은 최영이 하므로 자백 안하고 못 배길 상황이라, 이인임이 몰래 찾아가 '당신 가족들의 목숨을 내 수하들이 쥐고 있으니 동이 틀 때까지 자진해서 가족들의 목숨은 보전하라'고 강요했다. 안사기는 비빌 구석이 있다면서 역관광을 보내주겠다 했지만 이인임이 안사기 부인 것으로 보이는 노리개를 내밀었고, 마음이 급해진 안사기가 최영과 정몽주를 면담하고 싶다고 한 사이에 그 틈을 노린 이인임의 자객의 화살에 맞고 사망. 사실 노리개는 원래 이인임이 갖고 있던 것으로 순전히 뻥카였다. 이인임의 자객은 사실 안사기의 가족이 아니라 안사기 본인을 노리고 있었던 것. 이인임이 "노리개라고 무조건 제 부인의 것이 아니거늘..."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압권.
- 정도전이 유배지로 가기 전에 맹자를 정몽주에게 받는데 삼봉 본인이 후일 회고한 바에 따르면 정몽주에게 맹자를 받은 것은 그가 한창 영주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20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제사를 지내면서도 짬을 내서 한장 한장 열심히 읽었고 책을 보내준 정몽주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는 회고도 덧붙였다. 어쟀거나 그러니 '으아니 이 계집이 몽주가 보내준 책을 불태우다니!'라는건 픽션.
- 정도전이 부곡백성들을 막 가르치려 들면서 좌충우돌을 하는데 실제 정도전 본인도 처음에 유배를 왔을때는 오만한 마음으로 백성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나중가니 백성에게 부끄러웠다고 하고 있다. 삼봉의 글 답전보에서 한 노인에게 깨우침을 받고 '노인장을 진정 스승으로 뫼시고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습니까?'라고 하다가 거절 당한 일을 적은 일도 있다.
- 황연은 실제 정도전이 머물던 집의 보수주인이 맞다. 정도전의 저서 삼봉집에서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갔을 당시 '황연의 집에서 살았다'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정도전은 황연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지만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술을 잘 마셨고 그의 집에서 술을 잘 빚었는데 술을 빚으면 항상 나를 청해 함께 마셨다"라고 기록해 두고 있다. 다만 황천복이라던가 업둥이 관련 내용들은 죄다 픽션.
- 드라마 내용은 아니고, 드라마가 끝난 뒤 나온 사적지 소개에서 오류가 몇 가지 있다.
- 정도전이 지은 시 이름인 〈答田父〉를 '답전부'라고 읽었는데 사실 '답전보', 띄어쓰기까지 한다면 '답 전보'가 정확하다. 父는 '아버지'라는 뜻으로 쓸 때는 '부'로 읽지만 '사내'라는 뜻으로 쓸 때는 '甫'와 통용 가능한 글자가 돼서 '보'라고 읽는 게 정확하다. 이 점을 무시하고 父를 '보'라고 안 쓰고 '부'로 오기하는 예는 이미 굉장히 많지만 父가 뜻에 따라 '보'라고 읽힌다는 점에 유의한 매체들은 하나같이 '답전보'로 적고 있다.
- 나주읍성(羅州邑城)의 동점문(東漸門) 누각에 걸린 정도전의 〈제나주동루(題羅州東樓)〉의 일부를 해석했는데 去國身如寄(거국신여기)를 '나라 떠난 몸 붙어사는 것 같아'라고 했다. 비유적인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도성 떠난 몸' 정도가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이는데, 國에는 '나라' 라는 뜻 외에 '도읍' 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8] . 이렇게 해석하면 벼슬살이 하다가 지방으로 쫓겨난 당시 정황과 자연스럽게 맞는다.
2.7. 제7회 ~ 제8회
- 나주부곡에서 정도전이 겪은 중요한 에피소드인 답전보(答田父)[9] 내용이 생략되었다. 작중에선 황천복이나 업둥이 관련 에피소드로 대체된듯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만 드라마에서 새참을 먹다가 농민들이 정도전에게 "나으리는 무슨 죄로 오신 겁니까?"라고 질문하는 건 답전보에서 늙은 농부가 정도전에게 "그대는 무슨 죄로 왔는가?"라고 질문한 것에서 모티브를 따 온 듯한 부분.
- 업동이(훗날의 '양지')가 정도전에게 글을 배우면서 天地玄黃을 땅에다 현대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고증 오류이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는 대개 가로로 글을 쓸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갔다. 세로쓰기에서 줄을 바꾸는 방향이 오른쪽에서 왼쪽이라, 가로쓰기(한 줄에 1자씩만 쓰는 세로쓰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에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써나갔다.
- 이인임이 칼을 차고 명덕태후의 침소에 가서 명덕태후에게 칼을 겨눴는데 실제로 이랬다면 꼼짝없이 대역죄가 적용된다. 거기다가 명덕태후는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는 최종 결정권자였으니. 이인임도 그걸 알기에 태후가 협박에 굴하자 가져온 칼을 선물로 가져온 명나라산 보검이라는 핑계로 바치고 발뺌하였다.
- 작중에선 최영이 이인임에 의해 어쩔수 없이 신진사대부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원래도 최영이 신진사류에 그렇게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긴 했다. 어쨌거나 우왕 초기 신진사류들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은건 사실로 정몽주 역시 이 시기 언양[10] 으로 2년간 유배를 떠난적이 있다.
- 이색이 작중 유폐되는데 원래 역사상으로 이색은 1374년에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고 이후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 판삼사사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다. 이색이 유폐되었다는건 그러니 각색이다.
- 실제로 정몽주와 이성계의 사이가 돈독한 것은 맞았지만, 이성계가 정몽주에게 성균관에서 조언을 하고 이 일로 이인임한테 이성계가 찍이는 것은 극을 위한 픽션이다.
2.8. 제9회
- 이 시기 왜구의 침략이 해안가를 벗어나 내륙으로 침투하는 상황이었으니 왜구의 나주침공 자체는 이상한게 아니긴 하지만 정도전이 유배지에서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주변사람들을 모두 잃고 망연해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 박상충이 유배지로 가다가 고신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 것은 역사적 사실이 맞다.
- 임견미가 양광도에 왜구가 침입하자 상원수로 출정하여 실질적 전투는 이성계가 다 했음에도 공을 낼름 독차지하고, 왜구의 잔당들이 삼남 지방으로 갈 수 있다고 이성계가 경고하는 것도 부월을 들어 목에 겨누며 위협해 무시하고 개경으로 귀환한 이후 공을 독차지하면서 최영에게 있는 도성의 치안권도 이인임이 그에게 넘기려 하고 이성계로부터 왜구의 잔당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고받은 최영이 이를 대비하라는 것에 군사적으로 최영에게 짬도 안 되는데도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추태를 보이거나, 왜구의 잔당들이 준동할 가능성이 사실인 걸 안 이인임이 난 화분을 내뎐지면서 최영에게서 치안권을 뺏을 기회를 놓쳤다며, 불같이 화를 내면서 갈굼을 당하는 내용들은 그냥 극을 위해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2.9. 제10회
- 1380년으로 6년이나 타임슬립하다보니 신진사대부들의 중앙정계 복귀, 지윤과 우왕의 유모 장씨의 숙청이라던가 최영의 홍산대첩, 염흥방의 변절과정, 왜구의 수도 개경 위협을 두고 이인임과 최영간 천도를 두고 벌어진 대립, 정몽주의 일본 사신 파견, 이인임에 의해 우왕의 스승으로 임명된 이색, 경복흥의 탄핵 이후 사망과정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죄다 생략되었다. 다만 명덕태후 승하는 대충이나마 그려낸듯. 경복흥의 사망은 내레이션으로 나오고, 정몽주의 일본 사신 파견은 이인임이 그를 조전원수로 보내려할 때 대사로 언급되었다. 문하시중 경복흥이 축출된 뒤 이인임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여전히 수시중이라고 불리고 있다. 진포해전은 간단히 내레이션으로 최무선, 나세가 이겼다는 정황이나 승전 장계로 언급되는 수준에서 그쳤고 대신 미니다큐에서 군산시 진포해양테마공원을 다루면서 조명하였다. 여기서 생략된 사건들은 주인공인 정도전과 연결하기가 어렵다는 이유가 큰 것으로 보인다.
- 작중에선 정몽주가 이색에게 '삼봉이 유배지에 있은지는 6년이요 나주에서 영주로 옮겨간것'이라는 말하는것이 나오고 이후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가는 조건으로 정도전의 경외종편[11] 을 언급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가평부곡에서 약 2년을 보낸 정도전은 우왕 3년 고향인 영주에 가서 생가인 삼봉(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을 왕래하면서 4년을 지내다가 그 후 유배가 완화되어 사면하여 편의대로 거주지를 선택하게 하자 삼각산과 부평 등을 전전하며 후학을 기르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성계와 정몽주가 황산에서 왜구와 싸우고 있을 무렵이면 정도전은 아직 영주에 있어야 한다. 작중에서 왜구 침입으로 인해 난민신세로 떠돌게 된 것은 정도전과 이성계, 정몽주와의 관계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각색으로 보인다.
- 이성계의 경우도 그런데 우왕 3년(1377년) 왜구가 강화도까지 침범하자 조정은 이성계와 변안열 등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경기도통사가 된 이인임의 지휘를 받도록 했었다. 이때 6도도통사로 군을 지휘한 것이 최영이며 1377년은 최영의 홍산대첩 다음해였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이 있기 전에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왜구와 맞서 싸웠는데 본작은 이성계가 함주에만 머물러 있다가 강씨의 꾀병으로 개경에 올라온다는 설정으로 역사와 맞지 않는다. 애시당초 우왕 초기 왜구의 칩입은 고려가 국운을 걸고 싸워야 할 만큼 치열했는데 그 6년의 세월을 다 까먹다 보니 이성계가 함주에서 태평한 세월을 보내는 꼴이 되었다(...). 그래도 1380년으로 건너뛰기 전에 나주의 왜구를 이성계가 토벌하는 장면이 나왔으니 역사를 아주 무시한 건 아니다.
- 황산대첩에 중요한 인물이 빠졌는데 당시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장에 종군했고 황산대첩 당시에도 아버지와 같이 싸운 젊은 시절의 이방과가 등장하지 않는다.
- 작중 아기발도가 고려 조정에 개경을 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서신을 보내는데 이 자체는 실제 사실이 아니나 당시 왜구의 세력은 엄청나게 강하여 남원성 전투 당시 아기발도가 "장차 광주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여 북으로 올라가겠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만큼 사근내역 전투 이후 왜구의 기세가 등등하였다.
- 남원성에 있던 배극렴이 새파란 부원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며 불만을 가지다, 이성계가 먼저 다가가 고개를 숙여, 배극렴이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게 되는데 배극렴이 이성계보다 10살 연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있었을 법한 일이다. 훗날 배극렴이 국새를 들고 가서 이성계의 즉위를 청하고 1등공신이 되는 만큼, 불만을 가지던 이도 감화시키는 이성계의 모습을 위한 픽션으로 보인다.
- 작중 고려군은 여러 명의 원수가 등장하는데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 시기 원수란 원래는 유사시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기 위한 임시기구였다. 그러다 공민왕 이후 많은 전란을 겪으며 점차 상설화되기 시작했다. 개인이 원수직을 계속 맡으며 해당 지역이 원수 개인에 예속되어갔다. 더구나 여러 원수가 동시에 한 지역에 임명됨에 따라 지휘체계의 혼선마저 불러왔다. 여러 원수들을 배치하여 전투에 동원하는 것 역시 각 원수가 보유한 전력을 전장에서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앙의 정규군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성계의 경우엔 원래 동북면의 독립세력에 가까워서 그 자신이 가진 정예사병이 원래 있긴 했다.
- 왜구들이 세워둔 깃발에 오토모, 모리, 호조 등이 있는데, 오토모 가문이야 큐슈의 대영주니 그렇다 치더라도 모리 가문은 이 당시 주고쿠 지방 아키의 소영주였다. 작중 호죠가의 미츠노우로코 문장을 후호죠씨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으나 가마쿠라 막부시대의 싯켄가인 호죠씨도 똑같은 문장을 썼다. 시대상으로 모두 등장은 가능하다.
2.10. 제11회
- 작중에선 이성계가 신중한 태도로 나와서 이지란과 다른 원수들이 갈등을 빚는데 실제 역사상에선 다른 장수들이 다 왜구가 있는 험지공격에 신중한 태도로 나서나 이성계가 분연히나서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출정했다. 황산길에서의 전투 역시 변안열 등의 구원으로 어렵게 승리를 거둔 극과 달리, 황산 정상에 오른 뒤 주력군을 이끌고 평탄한 길로 진군하던 다른 장수들이 후퇴하는 사이 이성계는 홀로 세 차례나 적을 무찌르며 적의 본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온통 진흙탕이라 함께 뒹굴며 악전고투를 치렀음에도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었던 압도적인 승리였다.
- 황산대첩의 경우 실제로는 좁은 뻘판과 산속에서 난전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작중 산중 난전 묘사가 아주 틀리다고만은 할 수 없다. 총사령관 이성계조차도 병사들과 뒤엉켜 싸웠으니 어련할까. 극중에선 이성계가 말을 타다가 중간부턴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데 실제 역사상에선 이성계가 몇번이나 말이 죽어서 계속 바꾸어 타야 할 정도였고 실제 화살을 맞기도 했는데 극에서와는 달리 실제 화살은 왼쪽 다리에 맞은 것. 오죽했으면 중간에 난전 상황에서 적 장수가 이성계 뒤로 들어갔는데 미처 이성계가 확인하지 못해서 이지란이 급하게 이성계에게 외치고 바로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였어야 할 정도였고 곧이어 이성계가 적에서 포위되어 기병 몇명과 돌파하여 빠져 나올 정도로 지독한 난전이었다. 이 부분은 극중에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이성계가 부상당한 이지란을 구하지만...
- 작중에서 이성계는 주로 칼을 쓰지만 역사상으로는 이성계가 대우전과 유엽전으로 수십여명을 쏴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부분은 잘 나오지 않은듯. 다만 각색으로 중간에 왜구가 남원성의 고려군을 희롱할때 큰 화살로 왜구들을 일격에 격살하는 장면이 나오긴했다.[12] 또 황산대첩은 기병도 활약한 전장인데 한국사극의 한계인지 이 부분도 잘 나오지 않았다. 사실 고증대로 하려면 산지를 기병으로 달려가면서 싸워야 하는데, 조선시대에도 이미 답사한 선비들이 '어떻게 이런 거친 지형에서 기병으로 활약했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이므로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울 듯 하다.(…)
- 아지발도가 이성계가 온 것을 알고 이성계를 언급하는데 실제 역사에선 이성계의 이름을 바로 언급했다기 보단 이성계의 포진을 보고 아기발도가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정도로 말했다고 한다. 근데 이마저도 역사서의 각색일 가능성이 높다. 쓰는 언어도 다른, 전사한 적장이 살아 있을 때 자기 진영에서 부하들에게 말한 내용을 알아내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
- 아지발도를 죽인 게 이성계와 이지란의 콤비네이션인 건 맞지만 작중 나온 내용은 과장된 것으로, 원래는 아지발도가 전장에서 날뛰고 있는 가운데 이성계가 보고 투구를 저격하고 이지란이 마무리 샷을 넣은 것이지만 여기선 이성계, 이지란이 적진으로 말 타고 돌격해서 가만히 있는 아지발도를 화살 콤비네이션으로 죽이고 마무리 샷으로 이성계가 넣었다. 원래 역사상에선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활약상에 감탄해 저자를 사로잡을 수 있겠느냐고 이지란에게 묻자 이지란이 저놈 잡으려면 군사가 상할 거라고 언급하여 그냥 죽인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선 그냥 사로잡을만한 상황에서 이지란이 아닌 이성계가 죽이는 게 다르다.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죽인 곳도 기록에 있는 산 정상이 아닌 평지다. 한편 이 이성계-이지란 콤비네이션 장면은 시청자들에게 어쌔신 크리드 3 영상을 베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해서 아쉬움을 남겼다.
- 이성계의 승전 이후 개선 과정에서 역사상으로는 말을 타고 오던 이성계가 최영 등이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에서 내려 최영에게 절을 했고, 이성계의 절을 받은 최영도 맞절을 하더니 감격에 겨워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공이 아니면 누가 이일을 했겠는가'라고 하자 이성계가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는식으로 말했는데 다시 최영이 '삼한이 일어난것은 이 싸움에 있는데 장차 나라가 누구를 믿겠는가?' 하는 부분이 생략. 우왕이 금 50냥을 하사한것도 사실이지만 역사에서는 이성계가 사양했다고 되어 있다. 사대부 중에 이색과 권근이 이성계의 전공을 찬양하는 시를 올린것은 사실
2.11. 제12회 ~ 제14회
- 작중 보이는 이인임과 이성계의 극한 대립이나 이성계의 미륵사건 연루, 이성계의 이인임의 명나라 사신강요 등이야 이인임이 이성계를 경계했다는 실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각색들이다. 이쯤에서 극에선 이성계가 이색을 만나게 되는데 후일 위화도 회군에서 이색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조선개국 이후 태조가 이색의 목숨을 구명해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친분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 양지와의 에피소드는 1382년에 있었던 미륵사칭 에피소드를 각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금이라는 자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여 "만약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이르러 해와 달에 모두 빛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헛된 요설을 퍼뜨려 체포당한 사건을 뜻한다. 당시 이를 계기로 성리학자들은 불교억압의 명분을 얻기도 하였는데 극에서 양지를 구하려고 애쓰던 정도전과 달리 실제 정도전은 이를 매우 깠다. 당시 찬영이라는 유명한 승려가 이금을 비판했는데 정도전이 "석가나 저놈이나 다를 것이 뭐냐?"라고 디스하여 입을 다물게 만들기도. 또한 오리지널 캐릭터인 천복이가 개입된 이방원과 정도전의 첫 만남도 픽션으로 둘은 이성계와 정도전이 처음 만난 1383년 이후에야 대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 이방원이 이방석이 태어나자 강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가 질색팔색 하는데 사실 기록상 조선 건국 이전까지는 이방원 등 신의왕후 소생의 자식들과 신덕왕후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정몽주를 죽이고나서 이방원이 격노한 이성계에게 꾸짖음을 당할때 신덕왕후를 "어머니 왜 저를 위해 변명해주시지 않나요?"라고 빌자 신덕왕후가 이성계에게 한소리 하기도 했고. 용의 눈물에서도 이방석의 세자 책봉 전까지는 이방원이 신덕왕후를 극진히 모신 것으로 표현되었다. 다만 이후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두 사람간의 사이가 호전되는 장면을 그려넣었는데 이후 세자책봉 과정에서 정도전으로 인해 두 사람이 멀어지는 부분의 극적요소를 극대화하여 위함일 수도 있다.
- 12회에서 염흥방이 정도전을 떠보기 위해 이인임의 명을 받고 정도전의 학당인 삼봉재를 세 번에 걸쳐 때려부수었는데, 정도전이 실제로 귀양에서 풀려난 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후진들을 양성했을 때 그때마다 반대 세력에 의해 학당이 박살난 사건을 어레인지한 내용이다.
2.12. 제15회
- 극중에서 이성계가 호바투와 맞서기 위해 출진한 동북면 진중에 방원이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과거합격장인 홍패를 든 채 이성계를 찾아와 과거에 급제한 것을 알리는데 이성계의 반응이 영 냉랭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이방원이 이성계 가문의 첫 과거급제자여서 이성계가 매우 기뻐하였고 이방원의 과거 사령장을 몇 번이고 읽게 했다고 한다. '군인 집안'이라는 열등감을 확 씻어준 아들에 대한 태조의 기쁨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전반적으로 본 작품에서 이성계가 아들인 이방원에게 좀 냉랭한 편인데 실제역사에선 정몽주를 죽인 이후부터 눈 밖에 나기 시작했으며 그전까지는 아끼던 아들 가운데 하나였다.[13] 하지만 작중에서는 이지란이나 정몽주가 칭찬하자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장면이나 신이 나듯 어사화를 여러번 돌려보고 만져 보고 하는 행동 등으로 내심 기분이 좋은 듯한 묘사를 보여 주었으니 단순히 반응이 냉랭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단지 실제 역사에선 몇번이고 합격장을 읽게 할 정도로 난리를 피우며 좋아한데 반해 본작의 이성계의 반응이 너무 침착한게 문제일 뿐. 이는 제작진이 작중의 이성계의 캐릭터에 맞춘 각색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작중에선 이성계에게 이방원이 무장이 되고 싶다 의견을 피력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문신으로서 일했다. 뭐 실제역사에서도 사냥을 좋아하는 등 무인 기질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에 대한 동경심과 젊은이의 혈기로 인한 것으로 보면 어느 정도 극적 허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이방원의 과거 급제에 정몽주에게 가르침을 받은 식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기록에는 없다. 이방원의 스승은 장인이 되는 민제[14] 와 당대의 문인인 운곡 원천석이다. 다만 이성계와 정몽주가 친밀했던 것을 감안하면 정몽주가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 정도는 있을 것이다.
- 작중 최영이 쌀을 가지고 장난을 좀 친 상인을 가혹하게 처벌하는데 정도전과의 극중 대화는 각색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백성들에게 엄한 인물이었다. 전쟁시 군사들이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곧 참형에 처했으며, 공민왕 때 6도의 군사를 다스리며 배 2000척(!)을 만드는 과정에서 독단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는 바람에 집을 부수고 도망가는 백성이 50~60%에 이르렀으며 원성이 많았다고 한다. 또 상인들도 별로 좋게 안 봤는지 벼슬을 구하는 사람에게 "네가 공장(工匠)이나 장사꾼의 일을 배웠다면 절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갈하기도 했고 최영이 갈고리를 들고 상인들에게 호통치는 것 역시 고려사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 우왕이 궁궐 지붕 위해 올라가 광포한 행동을 하고 환관을 활로 쏘기도 하는데 실제로 우왕이 궁궐 지붕에 올라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 극중에서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동북면으로 갈 때 정몽주와 서로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한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 상으로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난 것은 정몽주의 추천 덕분이었다. [15] 그러나 이미 황산대첩 이전에 정몽주가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을 주선하였다가 불발된 사건도 있고, 이후로 가끔 정몽주가 정도전을 극찬하는 말을 이성계에게 하곤 했으므로 역사적 사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긴 무리다.
2.13. 제16회
- 극중에서 만남을 가진 이성계와 정도전이 그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다. 이방원과도 악연이 있을 뿐더러 이성계와 이지란도 탐탁치 않아하는 눈치. 용의 눈물의 정도전이 태조에게 충정을 다 바치고 자신을 낮추는 일반적인 조선 사극의 충신이었던 것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묘사고 실제 역사에서 정도전이 처음 이성계를 찾아갔을 때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이게 가면 언제 다시 만나나 하며 시를 짓거나(해설로 설명하기는 했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돈독히 대우했던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모습. 정도전이 이성계의 군영을 보며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동남방의 왜구를 치는 것을 이릅니다."라고 둘러댄 것은 실록에 그대로 나와 있는 대사다.
- 이방원이 떠나기 전에 대학연의의 글귀를 말하고 떠나면서 이성계가 대학연의를 구해 읽는데,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성계가 평소 학문을 즐겨했으며 대학연의를 즐겨 읽었다고 기록되었다. 대학연의는 비단 이성계 뿐만 아니라 태종과 세종도 여러 번 읽은, 여말선초 시기 제왕학의 교과서로 손꼽힌 책이었다. 아마 이성계가 제왕학을 익혀 군왕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실록에 기록되었을 것이고 실제보다 과장됐을 수 있다.
- 이방원이 본격적으로 아버지에게 정치적 조언과 계책을 내보이는데 사실 이방원이 본격적으로 이성계 일파의 핵심으로 떠오른건 위화도 회군 이후 20대의 일이다. 이때는 아직 10대로 책을 읽고 과거에 응시하는 나름대로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 극중 우왕과 정비의 미묘한 관계가 드러나는데 실제 역사상에도 고려사에 정비의 처소를 자주 드나들고 밤에도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비 열전에는 아예 공민왕의 후비 정비 안씨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자주 정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두 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를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 이성계가 조정에 올린 '안변책'을 정도전이 선물로 가져간 식으로 묘사되었는데, 기록상에 안변책은 이성계 본인이 직접 지은 글이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16] 정도전이 준 것이라고 하기엔 근거가 아예 없다. 정도전이 주었더라면 어느 기록이라도 남아야 정상인데 아예 없다. 게다가 이성계를 칼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무시하는 시각이 이전버전을 포함해 나무위키 도처에 잔뜩깔려있는데, 이성계는 칼과 활 말고도 최소 수 천 명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함흥을 중심으로 한 동북면 일대를 지배하는 대영주이다. 평생을 군무와 행정업무 일선에서 보내왔는데 그런 것 하나 제시할 정도의 식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장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라고 보는 시각이다.
- 이인임이 정몽주를 통해 이성계에게 개경으로 올라오라는 어명을 전하게 했는데, 이것을 임견미가 극찬하는 장면이 있는데 임견미가 양수겹장(...)이라는 말을 썼다. 양수겸장(兩手兼將)이 맞는 말이다(...).#
- 이인임이 이성계를 억누르기 위해 그의 가족들을 붙잡아 놓는 것을 모의하는 장면의 표현이 시대적, 상황적으로 보았을 때 부적절하다. 링크 참조
2.14. 제17회 ~ 제18회
- 작중 이인임이 이성계에게 역심이 있다 모함하는데 당대 이인임을 비롯해 이성계를 경계하고 모함하는 이들이 실제 있긴 한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 즉위전 기록 가운데 "태조는 최영과 친밀한 정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로 성하니, 사람들 중에서 우왕에게 무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으니, 만약 하루아침에 위급하면 마땅히 누구를 시키겠는가?"라고 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성계가 석고대죄를 하거나 상투를 자르는 등은 전부 픽션.
- 이인임과 이성계의 사돈관계, 왕가와의 사돈관계는 실제 있었던 일이 맞다. 이 일로 인해 후일 왕씨가 도륙날때 이성계와 사돈을 맺은 집안은 무사하게 된다. 다만 역모에서 벗어난 후 이인임을 국부로 올린 대가로 그리되었다는 건 픽션.
- 우왕이 이인임을 아버지처럼 모셨다는 건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동국통감에 따르면 우왕 10년 기록에 "우가 이인임(李仁任)의 처 박씨(朴氏)와 더불어 이인임의 별서(別墅)에 가서 매우 즐기었다. 우가 일찍이 이인임을 일컬어서 아비라고 하였기 때문에 박씨도 역시 어미라고 존대하여 불렀는데, 이때 우가 봉가이(鳳加伊)를 총애하여 항상 이인임의 집에서 유숙하였으므로, 이인임이 별서에 나가서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극중에서처럼 국부급으로 대우하진 않았겠지만.
여기서 봉가이는 덕비 조씨의 본래 이름으로, 덕비 조씨는 우왕이 둔 9비 3옹주(九妃三翁主) 중 한 명이다. 이들은 우왕이 조모인 명덕태후가 죽은 뒤 대부분 강제로 차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축출한 뒤 창왕의 생모인 근비와 현비, 그리고 앞서 우왕의 유배행을 동행한 최영의 딸 영비 최씨와 명순옹주를 제하고는 모두 폐출되었다.
2.15. 제19회 ~ 제20회
- 이인임이 병에 걸려서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는것은 역사적 사실이 맞다. 다만 병으로 물러난것은 1387년이며 실각한것은 1388년인데 3년간을 타임 워프해서인지 이게 합쳐진 듯, 어쨌거나 위화도 회군이 있었던 1388년에 졸했으니 건강이 나빴던 것은 맞는 듯한데, 정사에는 특정 질환에 대한 얘기는 없고 나이가 많고 병에 걸려서 물러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하륜이 이인임을 진맥하는데 하륜이 기본적으로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천문이나 의술, 풍수, 지리 등의 잡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 부분에도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 점을 여기서 보여준 각색인 듯.
- 남은이 다시 등장했을 때 푸념하듯이 말똥이나 치우는 궁의 마굿간 담당 하급관리로 지내는 것처럼 나왔지만 실제 역사상으로는 왜구를 잘 상대하여 중앙관직에 복귀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임명된 상태였고 이후에 이름 옆에 관직명이 나오면서 오해가 풀렸다. 이 사복시정은 궁궐 내 마필과 어가를 관리하는 사복시의 실질적인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벼슬이고, 품계로 따지면 정삼품인 고위관직이다.
- 염흥방이 조반의 땅까지 빼앗다가 최영의 반발을 사는 것도 역사적 사실, 본작의 내용도 이를 각색한 것이다. 역사와는 살짝 다른게 극에선 염흥방이 조반이 뭐라하던 씹다가 최영이 조반의 말을 듣고 항의하여 이인임이 돌려줄것을 명하지만 본작에선 이후 염흥방이 최영과 조반을 역모로 몰자고 하는데 실제로 염흥방이 조반을 역적으로 몰긴했다. 역사상에서 최영이 개입하는건 이후의 일. 또 실제 역사상으로 조반이 염흥방에게 애걸하여 토지를 돌려받았으나 이광이 다시 그 토지를 빼앗고 조반을 능욕하였고 조반이 이광을 찾아가 애걸하자 이광이 조반을 업신여기고 더욱 못되게 굴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조반이 이광을 참살, 이후 우왕이 염흥방과 임견미를 제거하기 위해 최영과 만나 논의한 것도 사실이다. 나머지 정도전이나 남은의 모습이야 각색이지만...
- 중간에 고려의 관복이 바뀌는데 이는 1387년부터 명의 관복을 들여서 사용했기 때문,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조선 초기 관복의 모습이 된다. 관복에 관해서는 고증 참조.
- 쌍매당 이첨이 이 시기에 극에 다시 등장하는데 유배 한 10년가 있다가 1388년에서야 풀려서 그렇다.
- 작중 우왕이 국고가 부족하니 염흥방, 임견미 등에게 채우라고 하는데 실제 당시엔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후 우왕은 염흥방을 체포하면서 "재상들은 부유하니 녹봉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먼저 먹을 것이 없는 군졸들에게 지급하라."라고 말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임견미는 관리들에게 정해진때 녹봉을 주는게 제도인데 말이 되느냐면서 반란의 빌미로 삼았다고 한다.
2.16. 제21회 ~ 제23회
- 정몽주가 요동에서 명나라에 가지 못하고 돌아온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 맞다. 우왕 13년(1387) 명나라의 요동지역 폐쇄조치에 따라 이듬해 정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몽주 일행이 요동도사의 저지로 들어가지 못했던것. 이후 밀직사사 조림이 요동까지 갔다가 명나라에 입국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왔다.
- 임견미가 잡히면서 '이인임, 네가 내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네가 날 그르치는구나.' 라는 말을 했는데, 실제로도 했던 말이다. 이는 임견미와 염흥방이 예전에 최영을 죽이려 한 적이 있었으나 이인임이 막았었고, 또 최영을 숙청하자고 제안했으나 이인임이 거절했었기 때문이다.
- 작중 염흥방과 임견미가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잡히는걸로 묘사되는데 임견미는 실제로 군사를 모으려다가 잡힌게 맞지만 염흥방은 조반을 국문하려고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고 우왕이 의원을 보내 조반에게 약을 하사한 후 곧 본인과 모친 및 처를 석방하고 또 의약품과 가죽옷을 보낸 다음 염흥방을 순군에 하옥시켜버렸다.
- 작중 나레이션으로 나오지만 1천여 명에 이르는 임견미 등의 가신과 악질 종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모두 재산을 몰수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의 부인들은 고문을 당해 모두 옥중에서 죽었고 사형당한 자들의 자손도 죄다 몰아다 죽이면서 심지어 갓난아이까지도 모조리 강에 던져버리니 숨어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사형당한 자의 처와 딸을 적몰해 관비로 삼으니 모두 3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 작중에선 우왕이 이인임의 꾀병과 말에 흔들리면서 이인임을 구하려고 하고 최영이 동정론과 우왕의 명령 때문에 이인임 처분에 소극적인 것처럼 그린 것 같지만 실제로 우왕이 이인임을 구하려 하기 했다기보다도 최영이 적극적으로 이인임의 목숨만은 살려주자고 주장했다. 작중에서 말한 것처럼 이인임의 과보다 공이 크다고 한 것도 사실. 정확하게는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라고 말했는데 최영과 이인임이 둘 다 친원쪽에 가까웠던걸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발언. 또 작중에서 이성계가 이인임을 제거하자고 하며 최영과 극렬 대립하지만 역사상으로 그런 쪽의 대립은 없었던듯.
- 당시 이성계가 염흥방, 임견미에게 등용되어 지금 조정에 이들의 천거로 들어오지 않은 이들이 없으니 굳이 다 쳐내지 말고 재능을 가려서 쓰자고 최영에게 간하고 또 혹형으로 다르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최영이 듣지 않았다 한다. 실제로 드라마 내에서도 이성계가 이색과 대화하면서 최영이 지나치게 가혹하게 형을 집행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 작중 이인임이 최후의 계책을 세워 어떻게든 정계에 복귀하려고 하는 장면이 그려지지만 이건 각색이고 실제로는 최영과 이성계의 급습에 도망쳐서는 최영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울부짖다가 그대로 추포되어 귀양크리...이 장면 자체는 23화에 재현된다.
- 21화가 끝난 이후 도당삼봉이 소개되는데, 정도전의 호 삼봉은 이곳이 아니고 삼각산에서 따온 것이다.
- 임견미가 최후의 발악으로 어찌 피래미만 잡느냐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론 당시 백성들이 한 말로 이인임이 살아나자 "임견미와 염흥방의 일당 가운데 괴수는 그물을 벗어났다."고 한탄했으며 또,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운 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려주었다"라고 탄식했다 한다. 이 말은 23화에서 윤소종이 유배가는 이인임을 보면서 했다.
- 설장수가 명나라에 성절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으로 귀속시겠다는 명나라 황제의 성지를 가져왔다고 나오는데, 실제로 1387년 12월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뜻을 고려에 전했다.
- 이자송이 요동 정벌에 반대했다가 형벌을 받아 맞은 후에 옥사했다는 것, 정몽주 대신 명나라에 박의중을 사신으로 보내려고 한 것을 언급했다.
2.17. 제24회 ~ 제25회
- 극중에서 최영이 요동정벌론을 제시하자 많은 중신들이 반대하는데 실제 역사상에서 친명파 사대부의 반대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 극중에선 4불가론을 제시했을때 우왕과 최영이 같이 호통을 치며 이성계를 극딜했고 전략상 조언부분은 스킵되었으나, 기록상으론 4불가론을 제시했을때의 분위기는 그렇게 과격하지 않은 편이었다. 우왕도 '듣고보니 그럴싸한데?' 정도로 생각했고, 최영도 그렇게 엄청나게 격정을 내면서 의견을 무시한게 아니라 수시중 이성계의 위치를 생각해서인지 이성계의 앞에서는 동의하는듯 말하면서 나중에 우왕과 독대하여 재설득해 마음을 돌려놓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다만 실제 기록에서 전략상 조언을 할때에는 꽤 언성이 격해졌긴 했다. 게다가 정 원정을 하려고 하신다면 가을까지만이라도 원정을 연기해달라는 이성계의 발언이 완전히 빠졌다. 극중 진행을 위해 압축하다보니 이리 묘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위화도 회군 때 남은이 정도전에게 '회군'이라 적힌 서찰을 받고 이성계에게 회군을 해야한다고 말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남은은 회군 여론을 조성해 이후 '무진회군공신'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남은이 회군과정에서 회군을 주도하는 명분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정도전과의 연계는 각색.
- 건원칭제가 묘사되었다. 최영이 요동 정벌을 선언하면서 연호를 쓰고 우왕을 황제로 받들 것이라 한것. 그러나 사서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기존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로 돌릴 것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각색이 좀 심한 부분이긴 하다.[17] 다만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옛 고려의 영광 나아가서는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위성을 설명하려면 우왕을 황제로 떠받드는 것 역시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긴 하다. 또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우왕을 황제 폐하로 부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또한 묘사되었다. 한편 건원칭제(建元稱帝)라는 용어 자체도 엄밀히 말하면 고증 오류다. 당시 고려는 태조 왕건의 이름을 피휘하느라 '건(建)' 대신 '립(立)' 자를 썼으므로 건원칭제가 논의됐으면 입원칭제(立元稱帝) 등으로 불렀을 것이다. 다만 사극에서 피휘를 무시하는 건 고증 오류라기보다 자막이나 해설로 설명하느라 산만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 요동 정벌에 출정한 사람으로 정지, 박위 등이 언급되었지만 누군지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2.18. 제26회 ~ 제28회
- 위화도 회군 과정에서 있었던 회군 요청이나 환관 억류등의 사건은 역사와 그다지 큰 차이점은 없다.
-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가 백마를 타고 있는데, 이 역시 고증에 맞다. 이성계가 탄 여덟 준마를 그린 '팔준도첩'이라는 그림이 남아 있는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당시 제주도산 말인 '응상백(凝霜白)'이라는 이름의 말을 탔다고 한다. 여담으로 팔준도첩은 세종 때 화가 안견이 그렸었다고 전해지나,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안견의 진품이 아니라 조선 후기에 모사된 것이다.
- 극중에서 이성계는 회군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은 데다 휘하 제장들이 회군을 요청하자 고민하다가 결국 회군을 결단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로 위화도 회군이 철저하게 계획된 작전이었는지, 위화도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회군 속도가 무척 빨랐다는 점, 동북면에서 이성계의 사병이 합류했다는 점 때문에 설령 회군 결정 자체는 위화도에서 내려졌더라도 사전에 회군을 염두에 뒀을거라는 추측이 많다.
- 작중에선 정몽주가 회군 병력이 개경에 돌입하기 직전 이성계의 군영에 찾아가 그의 본심을 알아보기 위해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선 개경에 돌입한 이성계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정몽주의 스승 이색이었으며 당시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본작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것이지만 실제 역사에선 정몽주 못지 않게 이색과 이성계가 친분이 두터웠던 편.
- 27회에서 이성계와 조민수를 삭탈관직하고 누구든 잡아오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 관작과 상을 내릴 것이라는 어명이 내려져 그것이 방문으로 나붙은 장면이 나온다. 오늘날 흔히 조민수의 성은 한자로 曺로 적지만 해당 방문에서는 한 획이 더 많은 曹로 적혀 있다. 이것은 오류가 아니다. 본래 曹와 曺는 같은 글자라 전통적으로 통용돼 왔다.[18] 오늘날 국내에서는 전자는 중국인의 성씨나 기타 단어들을 표기할 때 쓰고 후자는 한국인의 성씨를 표기할 때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관습일 뿐이다. 옛 문헌에도 한국인 조씨를 曹로 적거나, 중국인 조씨나 기타 단어를 曺로 쓰기도 했다.
- 회군한 공요군과 최영의 근왕군이 개경 도성 내에서 시가전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수창궁 침전에서 1대1 대결을 벌인 것은 각색이다. 실제 고려사 기록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후원에 있었고, 팔각전에 든 우왕이 최영을 내주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며 이별한 후 그대로 체포되어 고봉으로 유배된다. 역사와 대사도 다른데 정사상으로는 이성계가 최영에게 당시 "이번 일은 내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라고 말했고 최영은 "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 이방원이 위화도 회군 당시 가족들을 데리고 기민하게 피신시킨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강씨가 포천[19] 농장에 숨었다가 고려군에게 잡히고 이방원이 구출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이 부분은 용의 눈물 쪽 묘사가 더 사실에 가깝다.
- 시가전 장면을 자세히 보면 수레를 엎어서 길목을 차단해놓았다. 이는 고려사에서도 '각 도로부터 구원병을 징발해 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수레를 긁어모아 거리 입구를 봉쇄'했다고 언급되는 것으로 깨알고증이다.
- 윤소종이 이성계에게 《한서》 〈곽광전〉을 바친 것은 태조실록 윤소종 졸기에 언급되어 있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 이성계가 무장들의 우왕의 폐위 요구에 망설이는 장면 또한 드라마 상 각색이다. 다만 이후에 극중에서 조민수와 이성계가 미는 차기 왕이 달라지는데 실제로 역사상의 이성계는 우왕을 폐하고 아예 다른 왕족을 세울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조민수의 반대로 창왕을 옹립하게 된다. 이때 조민수가 이인임을 불러들여 세력을 강화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인임을 만나 후사를 의논한 장면은 명백한 허구다. 조민수가 이인임의 복귀를 건의한 후에야 그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었으니 해당 시점에서 조민수는 이인임의 생사여부를 아예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 우왕이 환관들과 함께 이성계를 치려고 했던 것이 각색 아니냐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고려사에도 언급된 사실로, 그만큼 우왕 입장에선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성계가 아예 함정을 파고 있었다는 것은 각색이며, 실제로는 이 때 이성계와 조민수는 도성 외의 군진에 머무르고 있어서 허탕을 친 것으로 되어 있다.[20]
>우왕 14년(1388) 6월 병오일.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 80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ㅡ 《고려사》 권137, 열전50 우왕5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픽션이 지나친 거 아니냐는 글을 올렸다가 진짜 벌어졌던 일이었음을 알고 충격먹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픽션이 지나친 거 아니냐는 글을 올렸다가 진짜 벌어졌던 일이었음을 알고 충격먹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2.19. 제29회 ~ 제30회
- 정도전과 조준의 토지계혁 방안이 계민수전(計民授田)이라는 단어로 언급되는데, 드라마 방영 이전 역사 학계에서는 계구수전(計口授田)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쓰였다. 계민수전이 단순히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자는 의미가 있는 단어인 반면에, 계구수전은 한 가구당 식구의 수에 따라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자는 의미이기 때문. 쉽게 말하면 계구수전 쪽이 더 자세한 의미를 담고 있다.
- 근비가 여자인데도 한문을 읽는다. 그외 정도전 처인 최씨마저 글을 읽는데, 실제로는 조선시대에도 왕실 여인들도 조차 한문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21] 즉, 고증 오류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은 당시 모습이 반영이 안 되었다고 할 수도 있는 장면. 심지어 진성여왕도 까막눈이었다. 하지만 이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고도의 학문 활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읽고 쓰는 활동을 한글로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오히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한문이 귀족 여성들에게 좀 더 퍼져있었을 수도 있다. 근비 또한 이인임의 조카로 권문세가 출신이기 때문에 한문을 조금은 알았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정도전 처 최씨 또한 정도전이 유배되었을 때 출세하겠다고 일 안 하고 공부만 하다 이게 뭔 꼴이냐고 바가지를 긁는(...) 편지를 보낸 것이 남아 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최씨가 글을 알아서 직접 쓴 게 아니라 글을 아는 사람에게 대필을 부탁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그녀가 대필을 받아 편지를 보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여자가 글을 못 써 대필로 편지를 쓰는 게 흔했다. 이 때문에, 만약 최씨가 대필 편지를 보냈다면 굳이 대필 사실을 기록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조금 남아 있는 기록만 봐서는 최씨가 글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장담하기 힘들다.
-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성계가 다 집어치우고 동북면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남아서 싸워야 한다는 정도전과 충돌하고 경처 강씨부인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찾을 테고 자신도 섭섭하겠지만 순순히 받아들인다. 실제 역사에서 이성계가 정치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겠다고 한 것은 창왕 때가 아니라 공양왕 때이며, 강씨도 그냥 반대한 정도가 아니라 중간에 얘기가 와전되어 정도전과 남은이 동북면으로 떠나자고 이성계를 꼬드겼다고 오해해 그 두 사람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펄펄 뛰었다가 이성계가 직접 오해를 풀어줘서 정도전과 남은을 신임하게 된다.
- 정도전과 조준의 만남이나 조준이 벼슬을 그만두고 쉬던 동안의 토지개혁을 구상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백성의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망가져가는 그 백성의 말로를 논하는 장면은 픽션[22] 이지만, 조준이 조민수를 탄핵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드라마에선 조준이 조민수에게 뇌물을 주고 대사헌이 되어 조민수를 탄핵 뒷치기 하는것과는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조민수 탄핵 후에 대사헌이 된다는 차이가 있다.
- 조준이 윤소종과 친한 사이로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둘은 서로 친구였으며 조준이 윤소종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었다. 둘 가운데 윤소종이 1세 연상.
- 이색이 조민수와 결탁하여 창왕을 옹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사실로, 이후 공양왕 때까지 이 일로 주구장창 까이게 된다. 그리고 정몽주가 창왕 폐위까지 이성계, 정도전 일파와 뜻을 같이 한 것 역시 잘 묘사되었다.
2.20. 제31회 ~ 제32회
- 조준의 1차 사전(私田)혁파 상소에 대한 묘사가 계민수전(計民授田)을 그대로 사용한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전면적인 양전사업을 통해 고려 말 권문세족의 토지확대를 원 주인에게 복귀시키고, 그러한 토지 겸병의 수단이 된 복잡한 고려의 수조권을 철폐시키는 과전법의 원형에 가까웠다. 조준(조선) 문서 참조.
여기서 부연설명하자면 여말선초까지 왕토사상이 '실제로' 토지 소유권에 영향을 끼쳤고, 일제시대까지 소유권은 없이 수조권과 점유권 등의 복잡한 토지에 관한 권리만 있었다는 가설도 있으나, 여러 증거로 인해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설이다. 여말 사전(私田)이 수조권이 있는 토지와 소유하고 있던 토지 모두를 혼동되어 설명하는 용어의 혼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신라시대 이후 민작(民爵)이 사라졌다는 점, 과전법 시행 이후 수조권은 경기로 축소되었다가 사라진다는 점, 왕실 소유 토지인 궁방전이 명목상의 왕토사상과는 별개로 명확히 구분지어져 있었다는 점, 토지 소유권 송사에 대한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 등 때문. 당장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부전(賦典)만 봐도 수조권 개혁인 과전법과 본인의 전면적인 토지소유권 재분배 구상인 계구수전(計口授田)을 명확히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흔히 수조권에 따라서 관료 개인이 수조권을 가지고 있으면 사전(私田)과 국가가 가지고 있으면 공전(公田)으로 나누는분류법도 있는데, 과전법은 결국 전국에 있었던 관료들의 수조권을 경기지역으로 한정하여 사전을 축소하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드라마 상에서 '사전혁파'라는 단어 때문에 '관료들의 수조권을 혁파하여 토지의 겸병을 막겠다'는 의미로로 이해할 수 있어 계민수전이나 정전법을 도입하려는 급진파 사대부들의 주장과 혼동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흔히 수조권에 따라서 관료 개인이 수조권을 가지고 있으면 사전(私田)과 국가가 가지고 있으면 공전(公田)으로 나누는분류법도 있는데, 과전법은 결국 전국에 있었던 관료들의 수조권을 경기지역으로 한정하여 사전을 축소하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드라마 상에서 '사전혁파'라는 단어 때문에 '관료들의 수조권을 혁파하여 토지의 겸병을 막겠다'는 의미로로 이해할 수 있어 계민수전이나 정전법을 도입하려는 급진파 사대부들의 주장과 혼동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이색이 이성계를 명나라의 힘을 빌어 제거하기 위해 같이 사신으로 가자고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색이 창왕에게 직접 책봉을 받으러 같이 가자고 청했다가 대비의 반대로 거부당하자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성계가 농단을 부릴 것이 걱정되어서 이성계에게 같이 가자고 한 것이다. 이에 이성계 대신 이방원이 가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것을 정도전이 시킨 것으로 나오는 것은 창작이다.
- 최영이 사형 당할 때 윤소종이 "공은 한 나라를 뒤덮었으나 죄는 천하에 가득 찼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형장에서 낭독한 것은 아니고 간대부로서 논평한 것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있다.
- 최영이 사형 당할 때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데, 실제로 그가 죽던 날 백성들은 크게 슬퍼했고 개경의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아서 이성계 일파에게 무언의 항의를 했다고 한다[23] .
2.21. 제33회 ~ 제34회
- 이숭인이 창왕시절에 부모의 삼년상을 제대로 치르지 않고 과거의 감독관을 맡았다는 것을 구실로 탄핵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숭인의 탄핵 사실을 가지고 이색과 그 제자들이 삼년상을 온전히 치르는 사람이 만 명에 한 명꼴 될까 말까라고 하면서 정도전 일파를 비난하는 장면은 각색된 내용. 이색 본인이 1357년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儒學)에 의거한 삼년상(三年喪) 제도를 실시하게 했고 당시에 부모상을 당했을때 벼슬을 계속하는 것이 탄핵당할 일이었던건 사실이었기 때문. 여담으로 정도전은 부모의 삼년상을 온전히 치르느라고 관직생활을 5년이나 쉬었다.
- 이숭인이 정도전을 사문난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유학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자라는 소리니 유학자로서 못할 말은 아니지만[24] 아무래도 이 단어 자체가 조선 후기 붕당정치 시절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용어인 만큼 약간 뜬금없는 부분은 있을수 있겠다.
- 이색을 비롯한 온건파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 정도전 일파에게 탄압받고 유배간 것이나 우왕의 명을 받은 김저 등이 시도한 이성계 살해기도가 들통나 우왕과 창왕의 처분과 향후 고려의 왕위를 결정했던 흥국사 논의는 역사적 사실이며 이성계를 비롯해 정몽주등 이 논의를 주도하여 공양왕을 추대한 이들을 '흥국사 9공신'이라고 불렀다. 다만 본작에서는 우와 창을 폐위시키려는 논리였을 폐가입진[25] 을 극중에선 아예 정도전 일파는 이참에 창왕으로부터 이성계의 선위를 받아내려고 하고 정몽주는 고려를 유지하기 위해 폐가입진을 고육지책으로 내세운 것으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 정몽주도 폐가입진에 찬성했기에, 이것을 합리화시킨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정몽주가 공양왕을 올린 것을 '왕조를 지키기 위해 왕을 버린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럴듯한 각색. 이후 공양왕이 정몽주를 불러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것으로 보아 확인사살.
- 이림이 김저의 옥사로 연루된 인물로 언급되었다.
- 정몽주가 흥국사에서 선위를 반대하면서 선위를 하면 우왕이 태상왕, 창왕이 상왕이 된다는 취지로 발언했는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 발언은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 선위를 통해 왕조를 교체하고 구 왕조의 군주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는 경우, 상황이나 상왕으로 높이기보다는 제후로 강봉(降封)하되 선위 이전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고, 사후에 제왕으로서 능묘를 조성하면서 묘호, 시호, 능호를 올리는 정도가 일반적이다.[26] 물론 선위 받았다가 나중에 죽이고 대우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대우를 후하게 해줄 때는 이런 식으로 했다는 뜻이다.
- 그리고 당시엔 상왕이 둘일 때 각각을 태상왕, 상왕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는 제도나 관례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조선 태종 재위기에 태조와 정종이 각각 태상왕과 상왕이었던 것을 보고 작가가 그렇게 집필한 모양인데 이건 반드시 그래야 했던 건 아니다. 종종 태조가 왕→상왕(정종 재위기)→태상왕(태종 재위기)으로 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왕→태상왕(정종·태종 재위기)이었다. 정종 재위기에 태조는 태상왕, 약칭 상왕이었다가 정종도 상왕이 된 뒤에 태상왕=태조, 상왕=정종으로 굳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정종은 태조 사후에도 계속 그냥 '상왕'으로만 불렸지 태상왕으로 높여진 적은 없었다. 단지 태종이 상왕이 된 뒤에 노상왕(老上王)이라는 어정쩡한 칭호를 부여했을 뿐이다.[27] 결국 퇴위한 왕의 칭호를 무엇으로 할 것이냐 하는 점은 케바케였던 것. 애초에 상왕이 둘인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 뭐라고 부를지에 대해 확립된 제도나 관례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래저래 실제 역사 속 정몽주가 '선위하면 우왕=태상왕, 창왕=상왕 된다'는 취지로 발언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래도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선위할 경우 정통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 그리고 폐가입진을 주도적으로 제안했을 가능성은 있기는 하지만.
- 흥국사 논의에서 조준이 정몽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성계가 선위를 받는 건 영영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등 반대 의사를 표하는데, 실제 역사상에서 조준이 공양왕의 즉위를 반대했다는 부분을 반영한 듯. 역사상으로는 조준이 정창군이 재물 모으는데만 급급한 인물로 왕의 재목이 아니라고 디스하면서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 흥국사 논의에서 심덕부, 지용기, 성석린 등이 참여했다고 언급되었으며, 설장수, 박위 등이 등장했지만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게 등장했다.
- 흥국사 논의에서 윤승순이 명나라에서 자문을 받아온 것으로 언급되었다.
- 공양왕이 즉위하자마자 바로 우왕과 창왕을 죽이라 명을 내리고 이성계가 너무 이르다고 반대한 내용이 생략되었다. 역사적인 해석으로는 공양왕이 이를 서두른 것은 폐가입진의 논리에 따라 자신이 왕위에 오른 명분을 강화하고 실권자인 이성계의 민심지지도를 떨어트리고 우와 창의 죽음을 모두 이성계의 탓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 공양왕이 이전의 여말선초 사극 등에서 억지로 떠밀려서 왕위에 오른 나약하고 유약한 왕족으로 표현된 것과는 달리 여기선 유약한 모습은 위장이고 정몽주와 힘을 합쳐 고려를 지키고 최후의 힘까지 저항하려는 모습으로 나온다. 실제로도 이전 사극 등의 묘사와 달리 현재 사학계에서는 고려 최후의 군주로서 공양왕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고 보고 있다.
- 우왕의 최후는 용의 눈물에서도 나온 야사를 나름대로 해석하여 각색한 것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우왕이 진짜 왕씨의 자손임을 보이기 위해 어깨죽지 부근에 진짜 비늘같은 것이 있음을 보여주고 죽지만 정도전에서는 나는 왕씨의 자손이라 비늘이 있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인두로 어깨를 지져 그 흉터를 용비늘이라면서 보여주는 광기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의 성과 출생을 바꾸려드는 이성계 일파에게 서해용왕의 저주가 있을 것이라면서 저주를 퍼붓는데 이것은 사인검의 전설을 각색한 것일 듯.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창왕은 사약을 마시고 쓰러지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칼에 베여 죽임을 당했다. 고려사 원문에도 창왕의 죽음에 대해 우왕과 똑같이 벨 주(誅)자를 쓰고 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가 참형을 당하는 묘사는 충격적이고 잔혹한 묘사라 이렇게 변경한 듯하다.[28]
2.22. 제35회 ~ 제36회
- 35회에서 우현보가 조준과 대담을 하는데 전제 개혁안의 수용을 요구하는 조준의 요구를 물리치면서 "사전은 태조 대왕 이래로 유지돼 온 고려의 숭고한 가치이자 혼입니다"라고 발언한다. 그런데 우현보가 전제 개혁에 반대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과연 사전 제도에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을지는 의심스럽다. 사전 제도가 고려의 오랜 제도이기는 했지만 그게 근대의 자본주의 경제학 같은 어떤 사상적 기반을 가지고 유지된 건 아니기 때문. 굳이 따지자면 왕토 사상에 사전 제도를 끼워넣어 궤변을 늘어놨을 수는 있지만 전제 개혁 지지자들도 왕토 사상을 내세웠을테니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실제 역사에서 우현보 같은 당대의 보수파들은 아주 오래 유지된 제도를 하루 아침에 갈아치울 수 없다는 논리를 펴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 윤이, 이초 등이 명나라에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한다고 말했다는 것이 언급되었다.
- 36회에서 유백순의 정도전에 대한 탄핵상소는 실제와 약간 다르다. 실제로는 1391년에 순녕군 왕담과 함께 나라를 비방하는 말을 꾸며낸 죄로 국문을 받았으며, 죄를 시인하지 않다가 고문당하자 위화도 회군을 한 장수들은 군사를 되돌렸으니 오히려 공로가 없는데도 포상을 받았다고 진술하면서 정도전을 비판했었다. 이 정도까지 가면 유백순의 정치생명은 끝났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유백순은 조선 건국 이후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2.23. 제37회 ~ 제38회
- 정몽주가 정도전의 출생을 우현보에게서 알고 노비의 자손이라며 탄핵하고 유배를 보내고 죽이려고 했던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 맞다. 고려사 정도전 열전 마지막 부분에 자세히 나온다. 정몽주가 '고고한 충신' 이미지와 달리 고려를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냉혹한 정치가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왕조실록 정도전 졸기에선 그 내력이 자세히 나오는데 우현보의 친척중 하나가 스님이 되었다가 여종과 관계를 맺었고 이후 환속해서 여종을 취해 낳은 딸이 정도전의 외조모라고 되어있다.
- 유자인 정몽주가 고려의 업적으로 불교 경전인 대장경을 언급하는 게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사실 정몽주는 젊은시절 절에 들어가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는 등 불교에 대한 이해가 높은 사람이었다. 공양왕이 국사를 들이는데 반대하는 등 유자로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불교 안티 유학자' 가 아니었다는 것. 진짜 극렬 불교안티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자제를 바라는 서한을 쓴 적도 있을 정도다. 사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성리학을 배운 왕족이나 사대부들 중에 불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29] . 이것만 봐도 사회 분위기라는 게 그렇게 빨리 한꺼번에 바뀌기가 어려웠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 가끔씩 이방원이나 경처 강씨의 입을 통해 언급된 향처(鄕妻) 신의왕후 한씨가 사망한 것이 언급된다.
- 이성계가 낙마를 하고 이를 계기로 정몽주가 정도전-이성계 일파 숙청을 단행한것은 사실. 다만 이성계가 정몽주와 언쟁을 나눈 후 화나서 술을 마시고 홧김에 도성으로 가다가 낙마했다는 것은 순전히 제작진의 창작이다. 실제로는 명나라로 사신을 간 공양왕의 세자 왕석을 마중나오던 중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였다.
- 이성계가 빈사의 위기에 처하자 자객을 보내 제거하려 했다던 이야기도 허구이며 정도전을 참하라는 왕명이 내려왔다는 것도 각색이다. 정도전의 경우엔 보주로 유배를 보내라고 했을 뿐. 사실 정몽주파 간관들이 '조준이랑 정도전 등 참하시져'라고 했다는 건 사실인데, 왕이 흥국사 9공신 중 하나라고 하여 참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있다.
- 이성계가 부상을 입고 벽란도에서 요양하다가 아픔을 참고 가마를 타고 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 이성계가 앓아 누은 사이 이방원이 가족들과 친지들을 모아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이며 아버지인 이성계에게도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또한 정몽주 암살 모의에서는 이성계의 이복동생인 이화와 이성계의 사위인 이제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만, 드라마에서 이화는 등장조차 하지 않고 이제는 경순공주와의 결혼 장면에서만 등장한다.
- 정도전에게 어명을 전달하는 병사가 한손으로 대뜸 전달하는데 실제로는 예를 갖춰서 두손으로 "어명"을 죄인에게 전달한다.
- 정몽주가 이성계 일파들 중에서 정도전을 제일 먼저 죽이려는 모습은 창작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정몽주가 제일 먼저 죽이려 했던 인물은 조준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먼저 이성계의 보좌역인 조준(趙浚) 등을 제거한 후에 이성계를 도모해야 한다." 하면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대표적인 사람으로 조준을 꼽았다. 정몽주의 입장에서 정도전과 같은 일반적인 급진 사대부들은 대부분 이색 문하의 같은 동문이었으나, 조준은 성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는 점에서 제거하는데 정치적 부담이 적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24. 제39회 ~ 제40회
- 이지란이 정몽주를 죽이자는 이방원의 제안을 이성계가 거부하는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암살을 이방원 혼자 한것 처럼 묘사했지만 이성계의 이복동생 의안대군 이화, 이성계의 사위 이제, 정종 이방과 이렇게 모여서 모의 하는 와중 이지란을 끌어들일려 했다. 극중에선 이성계의 형제들이 생략 되어서 안나왔고 이제또한 경순공주와 결혼식 이후 생략 되었으며 정종 이방과는 참살후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으로 나왔다. 정종이 참살이후 공양왕을 압박한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 39회에서 정몽주가 살해당하기 직전에 선죽교를 선지교라고 부르면서 그곳으로 가자고 했는데, NG가 아니라 사실이다.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라고 불리었는데 정몽주가 이 곳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후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 가지가 솟구쳐 나오게 되었다고 하여 선죽(善竹)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기 때문. 오히려 정몽주가 이 다리를 선죽교라고 했었다면 이쪽이 고증오류.
- 정몽주가 이방원과 만난 후 말을 타고 가다가 판개성부사 유원이 죽어서 그 집에 문상을 가자고 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정몽주는 유원의 빈소에 문상하고 돌아가던 길에 변을 당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정몽주가 유원의 집에 찾아가는 것이 묘사되지는 않았다. 정몽주가 유원의 빈소를 찾아가 시간이 지체된 바람에 조영규 등이 무기를 준비하고 정몽주를 죽일 준비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정몽주의 말이 선지교로 가려 하지 않자 정몽주가 말을 돌려보내고 내려서 걸어가는 것은 창작으로, 실록의 기록에는 조영규가 말을 먼저 공격해서 정몽주가 떨어졌다가 도망치자 이를 쫓아가서 죽였다고 되어 있다. 또 드라마의 묘사와 달리 선죽교는 해당 문서에서 보듯 당시에는 난간이 없었다.
- 드라마에서는 한밤 중에 정몽주가 난자당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백주대낮에 살해당했다. 다만 제작진도 이를 모르지는 않아서 역사대로 낮에 정몽주가 암살되는 묘사[30] 를 검토하기도 했지만 연출 뿐만 아니라 촬영 스케줄 때문에 밤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대낮에 살해한 이방원의 의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약간 아쉬운 부분.
- 사실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계획은 이미 정몽주도 알고 있었다. 이성계의 일파지만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했던 변중량이 이방원의 계획을 듣고 사전에 정몽주에게 알렸지만 정몽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를 만나러 간다. 극중에서는 변중량이 애초주터 등장하지 않는다.[31]
- 실제 역사상에서 정몽주가 살해당한 이후론 저자거리에 그 목이 효수되지만 본작에서는 그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용의 눈물에선 이 장면이 정확하게 묘사되는데, 귀양을 갔던 정도전이 개경으로 들어온 뒤 효수된 정몽주를 보고 망연해하는 장면이 있다.
- 이방원의 하여가는 일부 구절이 '성황당 뒷담이 무너진들 어떠하리'와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로 각기 다른 두가지 버전이 전해오는데, 극에서는 실제 칡도 등장시키며 만수산 버전을 택했다. 하지만 정몽주에게 보낸 서찰이나 한자 자막에는 城隍堂後坦(성황당후원)이라고 나온다. 원문은 한자로 된 성황당 후원이 맞고, 만수산 버전은 조선시대 이후에 시조로 전해오는 것인데 작가가 거기까지는 신경쓰지 않은 듯하다. 실제 수많은 매체에서 한자 원문은 성황당 버전을 소개하고 해석은 만수산으로 '의역'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하여가를 이방원이 실제로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참고
- 40회에서 공양왕의 폐위 교지를 남은이 읽은 것, 대신들이 이성계의 집으로 와서 왕이 되기를 청할 때 배극렴이 옥새를 들고 있는 것과 이성계가 선위를 거절한 것[32] 은 실제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다만 이성계가 국새를 요물이라고 부르며 땅바닥에 내던진 것이나 정도전과 독대 이후에야 즉위를 수락했다는 것은 극중 각색이며, 실제로는 '내가 몸만 안 아팠어도 냅다 도망갔을 텐데 그러질 못하네… 씁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하면서 어보를 받는다. 다만 이러한 기록을 의식했는지 이성계가 몸이 다 나아서 말을 탈수 있으면 동북면으로 가겠다는 언급을 하였다.
- 배극렴이 왕대비에게 폐위 교지를 내려달라고 하는 장면은 조선왕조실록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태조실록 1권 1년, 첫 번째 기사의 첫머리다.(총서에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와 일대기, 공양왕의 동맹 제의까지가 정리되어있다.)
>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보다 먼저 이달 12일에 공양왕(恭讓王)이 장차 태조의 사제(私第)로 거둥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태조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고 하여 의장(儀仗)이 이미 늘어섰는데,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ㅡ《조선왕조실록》태조 1권, 1년 7월 17일
-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동맹 제의를 한 것과 극중에 나오는 동맹 제의 글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다.[33] 고려는 물론 동아시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기상천외한 발상[34] 이라 할 수 있는데, 공양왕이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이성계에 집에 찾아간 것이 아니라 이방원 등을 불러 동맹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역사에서든 극중에서든 이성계는 공양왕의 동맹제의를 무심한 듯 시크하게 거절했고, 얼마되지 않아 공양왕은 폐위되고 이성계가 지지 세력과 함께 조선 왕조를 열게 된다.
-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는 경처 강씨가 정몽주 살해의 배후라고 주장하며 역사와(?) 다른 전개를 했다고 드라마를 설명했다. 참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많은데, 김종성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죽인 일로 화를 낼 때 이방원이 강씨에게 서운함을 표시했다는 것 단 하나 뿐이기 때문. 더군다나 그것도 '어머니께서 시키시고서는 왜 가만히 계십니까' 따위가 아니라 '어머니는 왜 제 편을 안 들어 주시고 가만히 계십니까?' 정도이기 때문에, 1차 왕자의 난 이전까지 이방원과 강씨가 가까운 사이였음을 보여주는 근거 정도로밖에 활용될 수 없다[35] .
3. 조선시대편
3.1. 제41회 ~ 제42회
- 짧게 지나갔지만 이성계의 즉위식에서 남은이 국궁(鞠躬), 사배(四拜), 흥(興), 평신(平身)이라고 외치는데 몸을 굽히고 네 번 절을 하고 일어나라는 의미로 궁중 의례의 절차이다.
- 이방원이 정도전과 대면하여 정도전의 관직과 칭호를 전부 나열하는데 맨 마지막에 봉화군(奉化君)이 나왔다. 대화 시점은 아마 태조 1년(1392)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실록을 보면 당시 정도전의 작위가 봉화군이었으므로 정확한 고증이다. 이후 태조 5년(1396)에 정도전의 작위가 봉화백으로 변경되며, 제47회에 그 사실이 반영돼 자막에 '정도전(봉화백)'이라고 뜬다.
- 유생들이 조선 개국 후 첫 과거시험에 집단거부를 한 것으로 연출했으나 실제로는 그런 것 없었다. 조선시대 첫 문과시험은 개국 직후가 아닌 그 다음해인 태조 2년(1393)에 실시되었고, 최초 합격자 99명에 태조가 직접 3명을 추가로 합격시켜 최종합격자는 102명이다.[36] 사실 이 장면은 용의 눈물에서 조선왕조의 첫 과거시험의 주제가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논하라'라는 것을 유생들이 보고 이성계 눈앞에서 단체로 시험거부를 하는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다. 또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극중 등장한 두문동의 일화는 야사이다.
- 정도전이 황거정을 사주해 이숭인 등 이색 계열 신진사대부를 제거하도록 하고, 볼기가 아닌 등에 곤장을 때려 죽게 한 과정은 고려사 이숭인 열전과 조선왕조실록 정도전 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유생들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은 각색. 실제 기록에서는 사실상 정도전이 사적으로 쌓인 원한을 앙갚음하기 위해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태조실록을 기록한 것은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 일파이므로 정도전이 어느 정도 비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극중 해석은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극중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정몽주도 정도전 및 그 일파들을 상대로 같은 수법을 사용하려던 적이 있다.
- 극중 태조나 대신들이 의안대군 이방석을 '의안군'으로 부르는데, 실제로는 이방석은 개국 직후 세자가 되었기 때문에 군의 작위를 따로 받지 않았다. 의안대군이 군의 작위를 받은 것은 사후 형인 태종에 의해 소도군(昭悼君)[37] 의 시호[38] 를 받았을 때가 처음이며,[39] 의안대군(宜安大君)의 존호를 받은 것은 1680년 숙종에 의해 추증된 것이다. 즉 '의안군'이라는 존호는 존재한 적이 없다. 명백한 고증의 오류로서 아쉬운 부분이다.
- 마찬가지로 세자 책봉의 문제가 오가고 있는 와중에 영안군, 정안군, 회안군, 무안군 등의 호칭이 나오는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록에 의하면 왕자의 책봉 자체는 태조 1년(1392년) 8월 7일의 일로 세자 책봉일인 태조 1년 8월 20일보다 며칠 빠르기는 하지만, 왕자의 책봉시 이미 의안대군이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세자가 누군지 기정 사실화 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기 때문.
- 태조가 중전 강씨와의 독대 이후 직접 총명한 의안군을 세자로 지목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처음에 배극렴, 조준, 정도전과 의논할 때 갑자기 중전 강씨가 침전 밖에서 큰 소리로 통곡을 하는지라 태조가 무안군을 단호히 세자를 지목했다. 그러나 배극렴, 조준, 정도전이 퇴궐한 이후 다시 의논한 끝에 태조를 알현한 자리에서 방석을 밀었고 이에 의안군 방석이 세자가 된 것. 정안군 VS 의안군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각색한 듯하다.
- 같은 시대를 다룬 이전의 사극들과 다르게 이성계의 아들인 왕자들을 부르는 작위가 대군 대신 군으로 나온다. 조선 초기 왕자와 공신의 작위는 자주 오락가락했는데, 처음에는 군으로 봉했다가 태조 5년에 오등작 품계를 따라 이성계의 형제와 친아들은 공(公)으로, 조카를 비롯한 방계 왕족은 후(侯), 기타 공신들은 백(伯)으로 봉했다.[40] 이후 태종 즉위 이후 천조국의 오등작을 참람되게 따를 수 없다 하여[41] 공, 후, 백을 각각 대군과 부원군, 군 등으로 고쳐부르게 하면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정도전에서는 이 호칭의 변화를 제대로 고증한 것이다. 이전의 사극은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기 이전에 쓰였던 관계로 태조나 정종 시기 왕자들의 칭호를 대군이라 부르는 오류를 낸 사례가 많다.
- 세자 책봉과정에서 나왔던 "나라가 태평할 때는 적장자를 왕위에 올려야 하고, 난세일때는 공이있는 자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라는 말은 실제로 실록에 있는 내용이다. 역사에서 이 말은 조준이 했다. 한편 극중에서 정도전은 덕망이 있는 자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실제 역사에선 그냥 다른 대신들과 의견을 같이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조선으로 바뀌면서 내시가 환관으로 바뀌었다. 원칙적으로 따지면 고려시대 내시도 고려말쯤되면 환관이어야 하지만 시대변화를 느끼게 하기위해서 조선이 되자 내시가 환관이 맞는 것으로 표현한듯 하다.
- 41~42회에서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드라마가 정도전의 활약상 대신 세자 책봉문제를 맨 처음으로 다룬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한 시청자들이 많았는데, 드라마 스토리 전개가 역사고증에 맞다. 의안군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은 이성계가 즉위한지 고작 1달 후 였다. 다만 세자 책봉 이후에도 나레이션으로 업적을 날림처리했다는 비판이 많았는데, 사실 정도전의 초창기의 업적은 드라마 스토리로 구성하기에는 극의 긴장감이 떨어지고[42] 실록에도 그 기록이 많지 않다. 참고
- 세자 책봉을 반대할 때 이방원 뿐만 아니라 이방간, 이방의도 반대하는 것으로 등장하지만 자막으로 표시도 되지 않고 구분도 되지 않게 나온데다가 캐스트 명단에도 나오지 않는다.
- 조준이 의안군의 세자 책봉 교서를 쓰라는 이성계의 어명을 거부하는데 사실이다. 다만 이때 그가 거부한 사람은 이방석이 아니라 이방번이다. 태종실록 조준 졸기에는 태조가 조준에게 종이와 붓을 주며 이방번을 세자로 쓰라고 하였으나 거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배극렴이 41회 후반부부터 안색이 안좋은 상태로 등장하다가 42회에서 갑자기 죽는데 실제로 이성계 즉위 4달후에 죽는다. 실록에는 태조가 친히 빈소에 조문했으며 매우 슬퍼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것을 반영하여 이성계가 홀로 배극렴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 듯하다. 한편, 배극렴은 아들이 없어서 외손자가 장례를 주관했다.[43]
- 이성계가 개국 초에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보낸 것도 사실이다. # 날짜를 보면 이 명을 내린 날이 이방원이 정안군으로 책봉된 바로 다음날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왕자들에게 군호를 봉하던 시점에 이미 후계구도가 윤곽이 잡힌 것을 보면 이성계가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보낸 목적이 드라마와 비슷할 가능성이 있다.
- 이방원의 부인 민씨, 즉 훗날의 원경왕후를 모두 군부인 마님으로 부르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민씨는 이방원이 정안군에 책봉된 후 바로 정녕옹주(靖寧翁主)[44] 라는 작위를 받았다. 고로 이전에 신료들이 잠저 시절의 신덕왕후 강씨에게 택주님이라 부르듯이 민씨에게 역시 옹주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맞다.
- 이성계가 성계탕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비록 궁 밖으로 나와 성계탕을 직접 먹은 것은 각색이나, 실제 성계탕 설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개성 사람들은 죽은 최영 장군과 고려의 충신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제물로 바쳐진 돼지를 '성계육'이라 했으며, 돼지고기를 썰어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때의 돼지탕을 '성계탕'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이성계가 돼지띠였기 때문이다.
- 이지란이 신덕왕후의 조카딸인 곡산강씨(谷山康氏)와 혼인하게 된 것을 이성계가 늦장가라고 놀리는 장면이 42회에 나오는데 실제로는 이 혼인은 두번째 혼인이다. 이 혼인을 하기 이전에 함안윤씨(咸安尹氏)라는 부인이 있었다.[45] 그리고 이지란이 곡산강씨(谷山康氏)와 혼인하게 된 시점은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았다.
3.2. 제43회 ~ 제44회
- 이성계가 42회의 성계탕 사건 이후에 처음으로 천도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묘사되는데, 처음 천도 이야기가 나온 것은 개국 1달 뒤인 1392년 8월이고 처음 후보지는 계룡산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8월 13일(임술) 2번째기사에 따르면, "도당에 한양 천도를 명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시점은 배극렴이 죽기 이전이고, 한창 세자책봉문제가 나오던 시점이니 드라마상으로는 41회~42회 사이의 시점. 그러나 이 논의는 흐지부지해지고 이듬해 이성계는 계룡산 천도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다.
- 43회에서 이성계가 계룡산 인근의 지도를 보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실록에 태조 3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1월 2일(무신) 1번째기사, '태실 증고사 권중화가 태실의 길지와 신도 후보지의 지도를 바치다'라는 기록이 있다.[46]
- 이성계가 계룡산 천도를 언급하자 조정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실록에는 그런 기록은 없다. 태조가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 대족들이 모두 싫어한다' 는 언급을 하는걸로 보아서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어느 정도 있던 건 사실이겠지만, 드라마처럼 대놓고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고 실제 천도 준비도 꽤나 진행되었다. 조준도 44화에 나온 것처럼 무악으로의 천도를 반대하긴 했지만 극중에서처럼 천도 자체까지 반대한 건 아니었다.
-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계룡산이 어떠냐고 묻자 잘 모르겠다고 답한 것도 사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3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2월 11일(병술) 2번째기사[47] 여담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대부분의 기록이 무학대사가 아닌 왕사(王師)[48] 자초(自超)[49] 로 기록되어 있다.[50]
-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천도문제에 대해서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보라고 권유한 것은 실제로는 계룡산이 아닌 고려시대의 남경 옛 궁궐터(지금의 서울)에서 했던 말이다.[51]
- 하륜이 이성계 앞에서 계룡산 천도를 반대해서 결국 이성계가 계룡산 천도를 단념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하륜의 졸기에 따르면, "태조가 계룡산(雞龍山)에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이미 역사를 일으키니, 감히 간하는 자가 없는데, 하윤이 힘써 청하여 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후 신도읍의 터를 잡는 과정에서 무악(지금의 신촌)천도를 주장한 것 역시 사실 [52] 여담으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국역본에서는 하륜의 이름이 하윤으로 표기되어 있다.
- 윤소종이 정도전이 명나라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돼서 죽은 것처럼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반년 정도 차이가 난다. 드라마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이 시기에 왜구들이 대규모 난동을 부리거나 왕씨 일족에 대한 처분 문제 등등의 굵직한 사건들이 꽤 있었다. 정도전이 명나라에서 귀국한 날은 1393년 3월 20일이고, 윤소종이 죽은 날은 동년 9월 17일. 한편 정도전의 대사에서 윤소종이 며칠동안 병때문에 입궐을 하지 않았다가 죽은 것으로 언급되는데 실제로는 죽기 1달 전인 8월 2일에 병으로 사직했다. 출처는 모두 조선왕조실록.
- 44회에서 이성계가 조선경국전을 보고 처음에 거부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는 조선경국전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고 정도전에게 하사품까지 주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5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5월 30일(무진) 1번째기사.
- 44회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려는 정안군 앞에서 이성계가 눈물을 흘린 것은 사실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6월 1일(기사) 5번째 기사. 원문에는 휘루(揮淚), 말 그대로 눈물을 뿌렸다고 표현되어 있다.
3.3. 제45회 ~ 제46회
- 45회부터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가 등장하지 않고 조영무만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45회 중간 부분에 해당되는 시점인 1395년에 조영규가 사망하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조영규의 죽음을 잠깐 언급하는 방법으로 극에서 퇴장. 덧붙여 45회 마지막 부분의 시점은 1396년.
- 무학대사가 경복궁을 동향으로 지으려다가 정도전에게 태클을 먹고 남향으로 지었다는 얘기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정도전이 태조에게 '나라의 명운은 도읍의 지기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말한 것이나, 하륜을 두고서 '술법에 의존해는 간사한 자'라고 디스한 것 역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53]
- 경복궁의 이름을 짓는 장면도 실제 역사를 각색한 것이다. 경복궁의 경복은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년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이다. 정도전이 연회 중 대취한 태조 이성계가 "경은 이번에 새로 지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서 우리 왕조가 만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즉석에서 일어나 궁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54] 그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이름을 붙인 것도 모두 정도전이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도 정도전이 붙인 이름.
- 경복궁과 광화문 거리 공중조감도 CG에서 경복궁의 규모가 매우 작은데 이는 정도전이 만든 경복궁은 약 700칸 규모로 매우 작은 크기였기에 고증에 부합한다. 현재 남은 경복궁 터는 7000칸 규모이며 자금성 면적의 70%에 해당될 만큼 거대한 규모인데 이는 흥선대원군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부러 부지를 넓힌 것이다. 이방원은 작은 경복궁에 불만을 품고 지금의 창덕궁을 만들어 이사하였다.
- 이성계가 완공된 경복궁으로 들어갈 때 궁궐 정문 현판이 '광화문'이 아니라 '정문'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는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세종 때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태조실록 1395년 9월 29일 기록에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기는 하지만 똑같은 태조실록(1395년 10월 7일)을 보면 정도전이 경복궁의 각종 전각들 이름을 지은 뜻을 밝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남쪽의 문을 정문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기록이 충돌하는 이유는 태조실록은 두 번에 걸쳐 찬집되었는데, 현존하는 태조실록은 세종 30년(1448년) 8월에 찬집된 본이기 때문에 편찬 과정에서 세종 재위기에 이미 쓴 '광화문'이란 이름을 그대로 삽입하였기 때문이다.
- 주원장이 표문을 트집잡아서 정도전을 보내라고 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55] 실제로 주원장은 이 사례뿐만 아니라 명나라 국내에서도 글자를 트집잡아서 신하들을 숙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방원이 사신으로 온 대가로 선물로 주겠다고 말한것은 각색. 사실 역사상으로 이방원은 극중에서처럼 묶여서 끌려 오지도 않았고, 오히려 조선의 세자라면서 엄청난 환대도 받았고 후일 영락제가 되는 연왕 주체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56] . 이는 주원장이 이방원에게 힘을 실어주어 정도전을 견제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 사신으로 온 이방원 앞에서 주원장이 하는 말에 달린 자막엔 '세자'라 적혀 있긴 하나 실제 발음으로는 '타이쯔(tàizǐ)[57] ', 즉 태자라고 했다. 근래에 한국 사극을 중국어로 옮길 때 [58][59] 국왕을 황제, 세자를 태자라고 자막을 달긴 하지만, 사실 고증을 제대로 한다면 주원장이 조선의 세자 문제를 거론할 때 '태자'라고 하면 안 되고 그대로 '세자', 현대 표준중국어(관화, 만다린)로 한다면[60] 스쯔(shìzǐ)라고 말해야 한다. 조선에서 쓰는 칭호·관직명은 명나라에서도 변함 없이 그대로 부르는 것이었고(애초에 명나라한테 승인을 받은 관직명들이다) 명나라 국내에도 세자라는 칭호가 있었다. 세습이 허용된 제후들의 후계자는 황태자와 구분해서 세자라고 했기 때문이고 제후국인 조선도 그것을 따른 것이다. 아무튼 엄밀히 고증할 셈이었다면 주원장이 '타이쯔' 대신 '스쯔'라고 해야 한다.
- 45회부터 권근이 조선 조정에 출사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록에서 권근이 조정에서 업무를 수행한 기록이 1394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 45회에서 이성계가 연회를 베풀고 정도전에게 '유종공종(儒宗功宗)'의 칭호를 내린 것,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말에서 떨어졌을 때를 잊지 말라고 한 것,[61] 정도전이 이성계 앞에서 춤을 춘 것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62]
> 밤에 임금이 판삼사사 정도전 등 여러 훈신(勳臣)을 불러 술을 마시고 풍악을 잡혔다. 주연(酒宴)이 한창 벌어질 무렵에 임금이 정도전에게 하는 말이,“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경 등의 힘이니,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 만대에까지 이르기를 기약함이 옳을 것이다.”하니, 도전이 대답하였다.“제(齊)나라 환공(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어떻게 해야 나라가 다스려지오?’ 하니,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莒) 땅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마옵시고, 원컨대, 중부(仲父)께서는 함거(檻車)에 있을 때를 잊지 마소서.’ 하였으니, 신이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말 위에서 떨어지셨을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역시 항쇄(項鎖)했을 때를 잊지 않으면, 자손 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서 문덕곡(文德曲)을 노래하게 하고, 도전에게 눈을 껌벅이면서 하는 말이,“이 곡은 경이 찬진(撰進)한 바이니 경이 일어나서 춤을 추라.”하니, 도전이 즉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임금이 상의(上衣)를 벗고 춤을 추라 하고, 드디어 귀갑구(龜甲裘)를 하사하고는 밤새도록 심히 즐기다가 파하였다.ㅡ《조선왕조실록》태조 8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10월 30일(경신) 1번째기사.
- 이숙번이 정도전의 진법훈련에 반대하다가 매를 맞는 것은 작가의 창작이다. 애시당초 이 장면 자체가, 드라마 초기의 정도전과 이인임의 대립 장면에서 가져온 것. 이숙번은 1차 왕자의 난 이전까지는 과거시험에 합격한지 얼마 안된 평범한 하급관리에 불과해서 실록을 포함한 역사기록이 별로 없다. 여담으로 이숙번은 조선 최초의 과거합격자중 한 사람이다.
3.4. 제47회 ~ 제48회
- 47회 처음에 정도전(봉화백)이라는 자막이 나왔는데, 정도전이 봉화백의 작위를 받은 것은 1396년의 일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7월 27일(임오) 1번째기사.
- 47회에서 신덕왕후가 궁궐에서 죽은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죽기 며칠 전에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63] 의 집으로 옮겨져서 그곳에서 죽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8월 9일 (갑오) 1번째 기사, 8월 12일 (정유) 2번째 기사, 8월 13일(무술) 1번째 기사. 여담으로 실록에서는 신덕왕후를 생존중에는 현비(顯妃)라고 기록했다.[64]
- 47회에서 신덕왕후가 죽을 때 나온 나레이션에서 숙종 때 신덕왕후라는 존호를 받았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사망 직후에 받은 존호이다. 출처는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9월 28일(계미) 1번째기사. 숙종 때 받은 존호는 정확히는 후궁격으로 격하된 그녀에 대한 예우를 복권한 뒤에 덧붙인 것. 또한 대한제국 때 고종이 국조인 태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그의 비인 신의왕후와 신덕왕후도 각각 신의고황후와 신덕고황후로 추존했으니 숙종 때까지 설명하는 김에 이것까지 덧붙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 정도전이 사헌부를 통해 하륜을 탄핵해 잡아가두면서 조준이 정도전을 찾아가 대화하는데, 경상도에서 투항한 왜군을 놓친 박자안이 문초를 했다가 하륜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죄로 압송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조준이 정도전에게 날조하지 말라고 한다. 실제로 하륜은 박자안의 사건에 연루되어 수원으로 유배되었으며, 극중에서 정도전이 이방원을 찾아가면서 하륜이 수원으로 유배될 것을 언급한다.
- 48회 태조가 동북면의 정도전에게 송헌거사라는 이름으로 서신을 보낸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고려의 충숙왕을 본따 본인을 거사로 칭하며 좌승지에게 호를 추천해 달라고 했고 왕이 되기 이전의 호인 '송헌'을 사용하게 되었다. 다만 편지에 요동정벌에 대한 이성계의 의지가 드러나는 부분은 극의 창작이다.
>서로 작별한 지가 여러 날이 되니 생각하는 바가 매우 깊다. 신중추(辛中樞)를 보내어 가서 행역(行役)을 묻고자 하였더니, 최긍(崔兢)이 마침 와서 동지(動止)를 갖추 알게 되니 조금 위로되고 풀린다. 이에 저고리
[檽衣]
한 벌로써 바람과 이슬을 막게 하는 것이니 영납(領納)하면 다행이겠다. 이 참찬(李參贊)과 이 절제사(李節制使)에게도 함께 저고리 한 벌씩을 부치는 바이니 권련(眷戀)하는 뜻을 말하여 주기 바란다. 나머지는 신중추의 구전(口傳)에 있다. 춘한(春寒)에 때를 순(順)히 하여 스스로 보전해서 변방의 공(功)을 마치라. 갖추지 못한다. 송헌 거사(松軒居士)는 쓴다.ㅡ《조선왕조실록》태조 13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2월 5일(임오) 3번째 기사- 극중에서 태조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는 조준의 말을 마뜩찮게 여겼지만 실제로는 조준의 의견을 경청하여 기껍게 여기었으며 이를 헐뜯는 남은에게 호통을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사실 요동 정벌의 실패를 두 번이나 경험한 태조로서는 정도전의 요동정벌에 대해서 극중에서처럼 무작정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극중에선 이를 각색해서 태조가 조준의 말을 들은 척 하면서 실은 정도전에게 힘을 실어주는 페이크를 친 것으로 묘사했다.
- 명나라로 간 사신들(정총·김약항·노인도)이 신덕왕후의 승하를 기리기 위해 주원장이 준 옷 대신 흰색옷을 입었다가 주원장의 노여움을 사서 죽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출처는 태조실록 12권, 6년(1397 정축 / 명 홍무(洪武) 30년) 11월 30일(무인) 2번째 기사. 정확히는 주원장이 문제의 사신들을 체포하라고 했는데 이것을 피해서 도망가다가 잡히는 바람에 더더욱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당한 것이다.
3.5. 제49회 ~ 제50회(마지막회)
- 명태조 주원장이 1차 왕자의 난 직전에 죽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주원장이 죽은 날은 홍무 31년 윤 5월 10일(1398년 6월 24일)이고, 1차 왕자의 난은 같은 해 8월 26일에 일어났다. 하지만 왕자의 난 이전에 조선에서 주원장의 죽음을 안 것은 작가의 각색.[65] 왕자의 난 이후의 기록인 태조실록 15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10월 3일(을사) 1번째 기사에 따르면 이 시기에서야 비로소 조선에서 주원장의 죽음을 알게 된 것으로 나타난다. 여담으로 정식으로 명나라에서 주원장의 죽음을 알리는 사신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것은 반년 뒤이다. 출처는 태조실록 15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12월 22일(갑자) 1번째 기사 "명나라 태조 고황제의 부음과 연호를 알리는 예부의 자문. 대통력 1부를 함께 보내오다".
- 무인정사 직전의 상황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용재총화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실제로는 대충 다음과 같다. 우선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나고 내려가기 전에 송별회에서 하륜이 일부러 술을 쏟아 날벼락을 맞은 이방원이 화가 나서 집에 가는데 하륜이 사과해야 한다면서 따라가서 누가봐도 의심하지 않을 절묘한 독대 자리를 만들어 정도전의 움직임에 대해서 논의하고 다른 계책은 없고 선수를 처야 한다며 계략을 진언한다. 이때 안산군수 이숙번의 군대가 한양에 들어와 있었는데 신덕왕후 사후에 능침 작업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걸 이숙번이 맡게 되었고 이 군사를 이용하여 정도전을 치자고 한 것. 즉 1차 왕자의 난 당시 주력군은 이방원 개인의 사병과 이숙번의 군사였다. 그러나 이 기록을 제작진은 의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도의 병력으로 과연 도성을 뒤집을 수 있었겠냐는 것. 그래서 하륜이 충청도에서 추가 병력을 이끌고 오는 것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렇게 되면 충청도 병력이 한성까지 올라오는데 어째서 아무런 보고가 없었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충청도에서 서울까지는 빨라도 3-4일은 걸린다. 급작스럽게 쿠데타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요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드라마 종반부에 정도전의 불교 비판 논문인 불씨잡변이 나온 것 역시 역사절 사실. 불씨잡변은 1398년에 음력 5월에 저술된 정도전의 마지막 글 중 하나다. 작중에서 정도전이 이를 조준에게 보여주면서 서문을 써 달라고 하며 조준과 화해할 계기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픽션. 조준이 이를 거절하며 "권근에게 써달라고 하시오"라고 하는 것은 권근이 불씨잡변에 서문과 주석을 달았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 왕자들이 정도전 일파의 꾐으로 태조의 병문안을 갔다가 등불이 없는 것을 보고 의심하는 것은 실록[66] 에 나와있는 사실이다. 실록에서는 이방원이 배가 아프다며 일단 뒷간으로 피신하는데 , 드라마에서는 누워있는 이성계 앞에서 무릎꿇고 정도전이 살려주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실록의 왕자의 난 당시 기사가 중구난방에 모순적인 면이 많은데다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기록의 진위 자체가 의심되는 면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각색이 필요한 장면이었다. 다만 작중에서는 정도전이 이방원을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긴 했었기에(결국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실록에 충실한 묘사였다고도 볼 수 있다.
- 이방원 일파의 병졸들 일부가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 민무구·민무질과 더불어 모두 모였으나, 기병(騎兵)은 겨우 10명뿐이고 보졸(步卒)은 겨우 9명뿐이었다. 이에 부인이 준비해 둔 철창(鐵槍)을 내어 그 절반을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여러 군(君)의 종자(從者)들과 각 사람의 노복(奴僕)이 10여 명인데 모두 막대기를 쥐었으되, 홀로 소근만이 칼을 쥐었다."라는 실록의 기록을 참조한 묘사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 소경(禮賓少卿)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光化門)으로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정예(精銳)한 기병(騎兵)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라는 내용과 모순되어 이 부분은 실록이 쓰였을 당시 왜곡됐을수도 있다.
- 극중에서는 이방원의 부인 민씨가 주변 종친들과 대신들을 설득하는 역으로 나오지만 이건 각색. 또 극중에서처럼 몰래 무기를 숨겨 이방원군을 무장시킨 것은 실제 역사상에 나오는 그녀의 행적.
- 작중에서 이방석은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명하여 죽이는데 실제 역사상에선 이거이 부자가 사람을 시켜 죽인다. 사실 본작에서 이거이는 존재 자체가 증발(...)했으므로 어쩔수가 없을듯, 여담이지만 이방번은 회안군 이방간등이 사람을 시켜 죽였으며 실록에서는 이방원이 죽이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이거이 부자가 독단적으로(...) 죽였다면서 이방원이 이숙번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장면이 있다.
- 이방원이 정도전의 장남 정진을 "대는 잇게 해주지"라며 아량을 베풀어 살려주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당시 정진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지방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양에 있었다면 그 역시 동생들과 같은 꼴을 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수군에 충원되어(조선시대 수군은 칠반천역 중 하나로 사실상 천민 취급을 받았다.) 몇년간 고생하였으나, 이후 태종이 사면해주어 복직되었다. 세종조에는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죄인의 아들치고는 상당히 잘 나간 셈. 다만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진이 지방에 있었어도 이방원이 쿠데타 성공 뒤 그를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텐데 실제 살려준 것으로 보아 극중에서와 같이 최소한의 아량은 베풀어 주겠다는 의식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는 대를 잇지 못하고 사후에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치러줄 자손이 없다는 것이 몹시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대를 끊어버리는 것은 그야말로 최종 오의에 해당됐다.[67] 따라서 이방원으로서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화를 면한 정진을 잡아다 죽였으면 기어이 남의 대까지 끊을 정도로 잔혹하다는 여론의 원성을 살 수 있으니 그건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이방원은 처가와 사돈 집안도 도륙낸 사람이므로 정진이 왕권을 위협하리라고 판단했다면 잔혹하다는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를 죽였을 것이다.
- 남은의 최후는 실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실록에서 따온 부분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뿐이다. 실록에서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정도전이야 미워하는 자가 많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자진출두했으나 방원 일파에게 참살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68] , 작중에서는 송현방을 빠져나온 뒤에 전황를 뒤집기 위해 이지란을 찾아가지만 이지란의 집은 이미 이방원 세력에게 점령된 뒤였기 때문에 거기서 싸우다 죽는 걸로 묘사되었다.
- 정도전의 최후는 실록의 최후 부분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을 수용해서 절명시로 알려진 자조를 읊고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실록에 기록된 비굴한 최후에 대해서는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도전의 최후를 왜곡해서 전하는 대사를 통해서 나온다.
- 극중에서 이방원이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아버리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정확히는 왕의 종친을 음해하려고 했다는 종친모해죄다. 그래서 정도전의 장남 정진이 빨리 복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모죄였다면 빼도박도 못하는 가문 멸족.
- 조준의 행보가 살짝 미화되었는데 실록에서는 조준이 난이 일어나자 점을 치면서 싸움의 행방의 가늠하다가 거의 끌려오다시피 한 것으로 기록되었지만 극에서는 민씨의 설득 끝에 마음을 결정하고 이방원에게 투신하는것으로 그려진다.
- 정도전의 시신이 산기슭에 버려져 부인 최씨가 시신을 못 찾는 장면은 정도전의 무덤이 확실하게 발견되지 않은 것을 반영한 내용이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 사리원, 반계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정도전의 무덤은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기록은 정도전이 죽은지 대략 200년이 지난 후에 쓰인지라 정확하지 않을 수가 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역 인근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 우면산 기슭에서 그 중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발굴했으나 지석이 있을 자리에 지석이 사라지고 없어서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무덤은 없다. 한편 정도전이 복권된 시기인 고종실록 9권, 9년(1872 임신 / 청 동치(同治) 11년) 3월 23일(정미) 1번째 기사에 따르면 "사손(祀孫)이 고한 바에 의하면 묘소가 실전(失傳)되어 사판(祠版)[69] 으로 제사를 받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명을 내렸다고 한다. 해석하자면 후손들도 묘소 위치를 몰라서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이다.
4. 여러 회에 걸친 비교
- 이 드라마가 시작되는 공민왕 재위 말년부터 최고 대신의 관직명을 문하시중(약칭 시중)으로, 그 다음 가는 관직명을 수문하시중(약칭 수시중)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고증 오류이다. 문하시중-수문하시중 체제가 도입된 때는 창왕 시절이고, 창왕 이전에는 각각 문하좌시중(약칭 좌시중), 문하우시중(약칭 우시중)이라고 불렀다.[70] 당시에는 좌를 우보다 높은 관직에 썼었기 때문에,[71] 창왕 때 명칭을 개편하면서 더 높은 이 원칙에 따라 좌시중을 문하시중, 그보다 낮은 우시중을 수(守)문하시중으로 고친 것이다.[72]
- 고려시대에는 '호반 무(武)' 자 등 자주 쓰이는 글자 상당수가 역대 왕의 이름으로 쓰였던 까닭에 조선시대보다 피휘가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혜종의 이름인 武 자를 피해서 무장을 호장(虎將)이라고 하고, 무신을 호신이라고 하는 등 지금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들 상당수가 고려시대에는 피휘로 인해 생소한 형태로 쓰였다. 그런데 사극에서 이런 피휘를 충실히 따라 대본을 쓸 경우 시청자들이 겪을 혼란이 너무 크다. 그래서 사극들은 피휘를 무시하는 게 관행이다. 이 드라마도 마찬가지로 관행을 따라 피휘를 무시한 용어들이 많았다. 이걸 엄격히 지키면 이전 대하드라마 중 하나는 제목부터 '호인시대'가 됐어야 한다. 결국 편의상 알아도 고증무시하는 부분.
- 10~11회에 나오는 왜구 측의 일본어 표현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아지발도 등 왜구들이 '이성계', '황산'를 한국어 발음대로 발음하는데, 일본어에서 한국어 고유명사를 이렇게 원음에 가깝게 읽어주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의 일로 그 전까지는 일본 한자음대로 읽었다. 또 설령 이 부분을 눈감는다 하더라도 일본어에는 모음이 ㅏ, ㅣ, ㅜ, ㅔ, ㅗ 다섯 개 뿐이기 때문에, '황산' 은 몰라도 '이성계' 라는 발음을 또렷하게 하기 어려운데, 정작 들어보면 너무도 정확하게 발음한다. 물론 왜구 역을 맡은 배우들도 한국인이니 발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식의 논리라면 굳이 한국인에게 어눌한 일본어를 시킬 이유가 없었다.
- 위에서도 지적했지만 왕자들을 '대군'이라고 지칭한 것은 태종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의 조선시대 파트에서 대군이 등장하지 않고 '군'이라고 한 것은 초반부 한정으로 적절한 고증이었다.[73] 하지만 태조 5년 즈음에 칭호들을 정비하면서 왕자들의 작위는 오등작 중 하나인 공(公)으로 바뀐 듯한데 이 점이 반영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군과 공이 섞여 있어서 실제로 어땠는지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할 듯하다. 한편 정도전의 작위가 군에서 백으로 바뀐 것은 제대로 반영이 됐다. 41화에서 이방원이 정도전의 전체 직위와 칭호를 모조리 나열하면서 맨 뒤에 봉화군이라고 했었는데 47화에서는 자막에 정도전 이름 옆에 봉화백이라고 표기되었다.[74]
[1] 우현보 집안 사람들이 자신의 혈통 중 노비의 핏줄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고신을 늦게 받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개국 당시 더 철저하게 박살을 내서 정몽주등과 가까웠던 우현보의 아들 셋을 죽였다고.[2] 이인임이 최만생의 불안을 듣고 홍륜을 제거할 것이란 것을 알아채고 은밀히 수하에게 그 사실을 알릴 것을 지시하는 모습이 있다.[3] 최만생이 환관인데도 수염이 나 있는데, 무인시대에서도 의종의 직속 환관인 왕광취와 명종의 직속인 조 환관은 수염이 나 있었다. KBS에서는 고려시대의 환관을 국왕의 근신인 내시와는 별개로 구분하고 고자도 아니었다고 설정한 반면, MBC에서는 고려 말에는 환관이 고자였음을 상정하고 배역을 정했다. 신돈에서 환관인 박불화와 안도치는 수염이 없었다. 사실 거세한 환관을 두는 제도는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으로 도입된 것이라서 MBC의 묘사가 정확한 듯.[4] 사실 그때는 북원이나 고려나 망했어요 상태라 힘을 합쳐봐야 소용도 없었다. 위화도회군 당시 고려군 총 병력이 5만에 불과했으니 한마디로 북원과의 동맹은 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인임의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 신진사대부들이 괜히 선왕인 공민왕이 세운 친명 정책 뒤엎고 나라 말아 먹으려고 작정했느냐면서 깐 게 아니다.당시 북원과의 통교를 반대한 정몽주의 상소[5] 이전 버전의 문서에서 사대부라는 명칭이 없었다고 돼 있었는데 명칭 자체는 중국의 춘추시대에 이미 있었다. 하위 지배 계급인 사(士)와 그보다는 높은 계급인 대부(大夫)를 함께 일컬은 것.[6] 다만 최근에는 이런 접근법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 기존에 고려 말~조선 초의 신진사대부라고 부른 계층이나 권문세족은 서로 통혼을 하기도 했고 실제론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 권문세족이라는 용어는 당대에 지배층 내에서 강한 권세를 가진 측을 비난하기 위해 딱지를 붙인 수준이다. 게다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반대파로 몰려 권력에서 배제된 가문의 대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조선의 지배 계급으로 복귀하기도 했고.[7] 사실 '심양왕'이라는 칭호는 초창기에 잠깐 쓰였을 뿐이고 이후엔 '심왕'으로 승급되었다(심양왕 문서 참고). 따라서 이 시점에서는 심양왕이 아니라 심왕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8] 한시에서 자주 보이며,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종종 나오는 國人이라는 말도 '나라 사람들' 이 아니라 '수도 사람들'. 더 나아가 중앙 귀족들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9] 여기서는 父의 음이 보가 맞다. 비유적으로든 아니든 아버지를 뜻하는 것이 아닌 남자를 지칭할 때는 보로 읽는다. 答田夫로 기록하고 있는 곳이 있으나 원문은 答田父. 전보는 밭 가는 노인네라는 뜻.[10]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11] 해배되는대신 도성에서 살 수는 없는것.[12] 사실 이 일화는 황산대첩 일화는 아니지만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록이긴 하다.[13] 사실 위화도 회군 당시 인질로 억류당할 것 같자 일가친척들을 데리고 함흥으로 피신하는 결정을 내린 사람이 바로 이방원이었고 공양왕 4년 이성계가 황해도에서 머무르다 낙마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조정 내에서 반이성계파가 득세하게 되고 정몽주가 이 기회를 타고 정도전 등 친이성계파를 유배보내자 바로 황해도로 내려가 부상을 입은 이성계를 개경으로 데려오기도 하는 등 조선개국에서 이방원의 공이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14] 뒷날 태종이 된 이방원은 장인의 집에 찾아가 술자리를 열었는데 술에 취해서 "오늘은 장인어른을 옛날처럼 사부님이라고 부르고 싶으니, 장인어른께서도 저를 이 선달이라고 불러 주십시오"라고 제안하여 그대로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5] 삼국지연의에서의 방통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16] 안변책이니 안변지책(安邊之策)이니 하는 건 훗날 붙여졌고, 당시엔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으로만 일컬어졌던 그 상소의 주된 내용은 '평시에도 백성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갑작스런 외인들의 침공에 대비케 해주고, 관할 지역에서 거둔 세금으로 군량을 자급할 수 있게 해줄 것, 세 가구를 일호(一戶), 백호를 일통(一統)으로 삼아 장수의 군영에 속하게 해줄 것, 권문세족 출신 수령과 장수들은 가렴주구가 심하니 청렴한 자를 선발해 보내 줄 것'등이었다. 이 계책이 조정의 재가를 받은 이후 동북면은 군사권과 행정권을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17] 게다가 정황상 당시 건원칭제를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고려의 요동 공격이 성공한다고 가정해도 결국 고려는 명나라와 협상을 해서 사태를 수습해야 했을 것이다. 고려가 용케 요동을 점령하고 명나라와 교섭이 시작됐다고 전제해 보자. 그때 명나라가 만약 건원칭제 사실을 알면 고려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을 것이다. 명나라가 건원칭제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면 고려는 건원칭제를 지켜내는 대가로 다른 걸 포기해야 할 수 있다. 협상이 결렬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때 가서 건원칭제를 취소하면 국내적으로 우왕의 권위가 실추되는 등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니 딜레마에 빠진다. 우왕과 최영이 당시 성급하긴 했지만 설마 여기까지 생각 못 했을까? 이런 정황 때문에 건원칭제가 요동 정벌 직전에 추진됐을지 매우 미심쩍다. 그리고 고려가 외왕내제를 하던 시절에도 독자 연호는 거의 쓰지 못했고 요나라와 금나라의 연호를 쓴 경우가 많은데, 우왕 때 황제 칭호를 쓰는 것(칭제)을 넘어서 독자 연호를 선포하는 것(건원)까지 하는 건 굉장한 무리수이다.[18] 전통 시대에는 같은 한자에 수많은 이체자(異體字)들이 있어 전부 통용되었다. 오늘날에야 각국별로 표준 한자 형태가 표준화했지만 과거엔 그게 잘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종종 서예가들이 일부러 옛날처럼 이체자로 썼는데 틀린 글씨 아니냐며 비전문가들의 태클에 시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19] 당시 지명은 포주였는데, 똑같은 표기법의 19금 적인 단어가 있어서 현재 지명으로 소개한 듯하다. 한편 오늘날 지명 가운데 인천이나 포천처럼 천(川)으로 끝나는 것들 상당수는 과거에 주(州)였다가 조선 초에 강등된 곳이다. 강등시킬 때 주(州) 자에서 점을 뺀 천(川)으로 바꾼 것이다. 다만 조선 초에 주(州)를 강등할 때 천(川)이 아니라 산(山)을 집어넣은 경우도 있다. 조선 초에 주(州) 지역의 강등이 이뤄진 이유는 주가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20] 다만 사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주요 무장들이 하나같이 모두 자신의 사가에 없었던 데다가, 분노했을 우왕이 가솔이나 측근에게조차 피해를 입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우연히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정보나 낌새가 이미 새어나가서 대비한 결과 우왕의 발악이 무산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있다.[21] 대표적인 예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인수대비처럼 한문뿐 아니라 범어에까지 능한 여성이나 시인이나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여성도 있기는 했다.[22] 실제로는 4년간 집에서 서책을 탐독하며 토지개혁을 구상하는 정도였다.[23] 특히나 시장 문을 닫는 것은 오늘날에는 문자 그대로 파업이지만, 고려사를 찾아보면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될 때 기우제와 함께 시행되거나 국왕이 서거하는 등 중대사를 당했을 때에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24] 사문난적이라는 말 자체가 《논어》에 나온다.[25] 조선 건국세력이 자신들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우와 창은 신돈의 자손이며 따라서 진짜 왕씨를 올려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26] 예컨대 조비에게 선위한 후한의 헌제가 여기에 해당된다. 조비가 황제가 된 뒤 헌제는 제후인 산양공(山陽公)에 봉해졌다. 하지만 의복 등 관례를 황제였던 시절과 같게 하고, 조비에게 글을 올릴 때 신(臣)이라고 쓰지 않아도 되었으며 사후에 황제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27] 정종을 부각시키면 태종과 이후 국왕들의 정통성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정종을 높이는 걸 꺼렸다. 태상왕이었던 태조가 사망한 뒤 정종은 계속 상왕으로만 불렸지 절대 태상왕으로 높여지지 않았다. 또한 세종은 즉위 직후에 정종을 제치고 태종을 태상왕으로 높이려고까지 했었다. 단지 태종이 "형(정종)이 태상왕이 아닌데 어떻게 내가 태상왕이 되냐"며 사양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세종을 정종을 태상왕이라고 높이지 않고 그냥 '더 연로한 상왕'이라는 뜻의 노상왕으로 올렸다. 정종에 대한 미약한 대우는 사후에도 확인된다. 정종과 달리 태종은 세종의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여 끝내 죽기 전에 태상왕으로 불리게 됐다. 정종은 또한 묘호를 못 받아 시호의 두 글자를 따서 공정왕 또는 공정대왕이라고 불렸을 뿐이며, 시호도 다른 왕과 달리 여덟 자가 아닌 딱 네 자만 받았으니 대우가 어땠는지 알 만 하다. 정종은 세월이 한참 지난 숙종 때에야 일반 국왕과 마찬가지로 묘호를 받고 시호의 글자 수도 늘어났다.[28] 이건 용의 눈물도 마찬가지였다.[29] 대표적인 예시가 월인천강지곡. 이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직후에 편찬한 책인데,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찬불가다. 그 외에도 세조는 세자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불경을 언문으로 풀이한 석보상절을 썼고, 즉위 이후에는 월인천강지곡과 이것을 합쳐 월인석보를 펴냈다.[30] 특히 이지란 역의 선동혁도 선죽교 사건을 낮으로 설정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표하기도 했다.#[31] 용재총화에 기록된 야사에 따르면 권근이 이때 정몽주를 만났는데 일단의 군사들이 정몽주 일행을 앞질러가니 정몽주가 권근더러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32] 정치에 싫증이 났다는 이유가 아니라 겸양의 의미였다.[33] 출처는 고려사 공양왕 4년 7월 갑신일.[34] 공민왕으로부터 동맹 서약문의 초본을 쓰도록 명받은 이방원은 '나라끼리 동맹을 맺는 사례는 있었으나 임금과 신하가 동맹을 맺는 사례는 없다' 라고 반대했다가 어쨌든 써 달라는 명을 받는데, 이를 보면 춘추전국시대에 나라끼리 동맹을 맺는 사례를 참고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는 있다. 한편 4대 60년간 실권을 장악한 최씨 무인정권 하에서 명목적으로나마 고려 왕조가 남았던 것과 비교하기도 한다. 다만 당시 최씨 정권은 어쨌든 고려 왕조를 아예 무너트리고 최씨 왕조를 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이성계는 이미 확고한 지지 기반과 함께 새 왕조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르다.[35] 또한 이 실록 기사는 태종 당대에 편찬된 것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방원을 꼬박꼬박 '전하' 라 부르는 등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으며, 설령 객관적이라고 본다 하더라도 사료 하나 딸랑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역사 해석이 아니라 소설의 영역이다.[36] 이때 합격한 사람중 하나가 나중에 이방원의 심복이 되는 이숙번.[37] 소도공(昭悼公)이라고도 불렀다.[38] 다른 왕자들은 생전에 존호(尊號)를 받았지만 '소도'는 사후에 애도하는 의미를 담은 시호로서 준 것이다[39] 이때는 이미 왕자에게 대군의 작위를 쓰고 있었지만, 태종이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후궁격으로 격하시켜 버렸기 때문에 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석은 후궁 소생으로 취급되어 군의 작위를 받았다. 덧붙여 조선 건국 직후에는 왕자와 공신들이 모두 '군'이었고 이후 공·후·백으로 바뀌었다가, 태종 때 다시 각각 대군·부원군·군으로 바뀌었는데 이방석의 동복형인 무안군도 후궁 소생으로 취급되어 군이 대군으로 바뀌지 않았다.[40] 따라서 이 드라마가 끝날 즈음에는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의 존호를 '군'에서 '공'으로 바꾸어서 표기했어야 옳은데 이 점은 반영되지 않았다. '대군'이라고 쓰는 오류를 내지 않은 건 좋았으나 '공'으로 바꾼 건 반영되지 않은 점은, 방석을 의안군이라고 잘못 지칭했던 것과 더불어 아쉬운 대목.[41] 흔히 '재야사학'을 자칭하는 부류들이 주장하는 맹목적 사대주의가 아니라 정도전 집권기에 경색되었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펼친 정책이였다. 조선이 황제국 용어를 고집하면서 얻을 수 있는 내부적 이익은 이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42] 책 편찬, 제도 정비 같은 업적의 경우 드라마에서 필요한 갈등요소가 끼어들 틈이 많지 않기 때문, 잘해야 조선경국전이나 한양 천도에서 얽힌 스토리인데 작가의 창작이 너무 많이 개입되면 어떤 드라마처럼 고증이 왜곡될 수도 있다. [43]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2월 2일(무신) 1번째기사[44] 남편이 정안군(靖安君)이니 '안' 자를 뜻이 통하는 '녕' 자로 바꾼 정녕옹주에 봉해졌다. 부부의 작호를 세트로 지은 것.[45] 함안 윤씨는 영의정 윤희보의 딸로서 매우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는데,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홍주목사 서의에게 시집갔다가 한 번 서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 판사 김세덕와 재혼했으나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보국사의 중과 간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인임이 윤씨에게 뇌물을 받고 이지란이 공이 많다고 하여 결혼을 주선했다는 기록이 있다.(…)[46] 이 기사에서 산수 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 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1장의 지도로 압축되었다.[47] 어가(御駕)가 새 도읍의 중심인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 “능히 알 수 없습니다.”[48] 왕의 스승이 되는 스님[49] 무학대사의 본명이 박자초이다.[50] 법명인 무학은 태종실록부터 등장한다. 불교를 배격하기 위해 세워진 나라의 실록에서 승려의 법명을 쓰기는 좀 그래서 본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51]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갑술 8월 13일의 기사[52] 사실 조선시대 기준으로 따져도 이 지역은 성저십리 지역으로 사실상의 수도 지역이었다.[53] "풍수의 도참이 옛 사람에 의해 말해진 것이라면, 신(臣)이 드리는 말씀(성현의 말) 역시 옛 사람이 말씀하신 바이옵니다. 그러하온데 전하께서는 선비의 말은 듣지 않으시고 술수하는 자의 말은 믿으시겠습니까?"[54] 조준이 정궁에다가 이름을 짓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장면이 있는데 본디 고려시대의 본궐에는 딱히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증한 것일듯.[55] 조선왕조실록 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7월 19일(갑술) 1번째기사.[56] 용의 눈물 같은 경우 조사의의 난이 터졌을 무렵 명에 파견된 하륜에게 영락제가 '그대의 임금과 짐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무척 친해졌었고...' 하는 식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57]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타이쯔라고 쓰긴 했지만 실제 한국인이 저 발음을 들어 봤을 때 타이즈에 좀 더 가깝게 들린다.[58] 중국인들한테 '왕'은 군주라기보다 군주의 신하 정도로 생각하여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외국의 왕들을 황제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59] 다만 중국 역시 자국의 번왕과 제후국의 국왕의 예를 다르게 생각한 것은마찬가지여서, 조선의 국왕은 자국의 황자들보다 높게 쳐 주었다. 다만 차기 제위를 이을 황태자의 경우는 얄짤없이 조선 국왕보다 위였다.[60] 명나라 초기에 주원장이 썼을 중국어는 현재의 표준 중국어와는 달랐겠으나 사극에 고어를 부활시켜서 사용하진 않으므로 현대 표준어 발음대로 옮기면 될 것이다. 더불어 조선시대에 훈민정음으로 적힌 중국어 학습서 등을 토대로 볼 때 당시 표준적인 중국어 발음은 현대의 표준중국어보다는 산동 방언이나 상해어(오어·吳語)의 발음 체계에 좀 더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중국어를 기준으로 봤을 때 산동 방언과 상해어가 현대 표준어보다 보수적인 발음 체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 그리고 이색이 주원장을 만났을 때 이색이 구사한 중국어(당대의 북경어)를 주원장이 알아 듣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다가 여러 정황을 보면 그가 당대의 남방 방언을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당대의 해당 지역 발음을 구사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편찬된 당대 중국어 발음을 훈민정음으로 옮긴 기록들은 현대에 명·청 시대 중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61] 이성계가 즉위하기 직전에 낙마 사건으로 이성계 일파들이 정몽주에게 역습을 당해서 조선 건국이 무산될 뻔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4년 뒤 시점에서도 충분히 트라우마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62] 곱사춤을 춘것은 용의 눈물의 오마주이다.[63] 고려 말 ~ 조선 초에 활동한 내시.[64]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에는 중전에게까지도 비의 칭호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 초기에 소헌왕후가 '공비' 의 품작을 받은 이후로 곧 중전은 따로 비의 칭호를 받지 않게 되었다.[65] 하지만 첩자 등 비공식 루트로 미리 정보를 얻었을 수는 있다. 당시 조선은 요동 정벌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요동과 명나라 수도에 첩자를 심어뒀을 가능성이 있다. 극중에서도 공식적인 사신을 통해 알게 된 게 아니라 현지에 심어놓은 간자(첩자)들의 밀서로 알게 된 것으로 나온다.[66]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1번째기사[67] 공자는 "처음 (나무 또는 흙으로 된) 인형을 만든 자는 후손이 없으리라!(始作俑者其無後乎)"이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공자는 순장을 강하게 비난하는 사람이었는데, 무덤에 인형을 묻는 풍습에서 확대됐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공자가 과거에 인형을 처음 만든 사람을 당시 기준에서 최고로 심한 말로 저주한 것이다. 오늘날 역사학자·고고학자들은 당대의 인식과 달리 순장이 먼저 있었고 이후에 인형을 묻는 풍습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긴 하지만, 아무튼 이 표현에서 후손이 없다는 게 옛 사람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일로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다. 후손의 존재는 노후 복지일 뿐만 아니라 사후 복지(...)이기도 했던 것이다.[68] 뒷날 이방원은 즉위 후에 "남은이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69] 신주(神主), 위패[70] 이 명칭은 1369년(공민왕 18년)에 붙여진 것이고, 그 전에도 여러 차례 개정이 있었다.[71] 이것을 상좌(尙左)라고 한다. 하지만 항상 상좌였던 건 아니고 역사적으로 상우(尙右)였던 시대도 있고 한다. 덧붙여 '강등'의 의미로 쓰이는 말인 '좌천(左遷)'이라는 단어는 상우였던 시대에 만들어진 단어인데 훗날 상좌로 바뀌었어도 계속 본래의 의미대로 강등이라는 뜻으로 쓰였다.[72] 직책명에서 '수(守)'는 계비직고(階卑職高), 즉 품계는 낮지만 직책은 높은 것을 맡을 때 쓰는 말이라고 한다.[73] 다만 앞에서 지적했듯이 방석을 의안군이라고 한 것은 오류이다.[74] 이미 앞에서 설명했지만 중언부언하자면, 태종 때 들어서서 공·후·백이 각각 대군·부원군·군으로 다시 변경됐다. 오등작은 원래 천자만이 신하에게 줄 수 있는 작위인데 반해 군은 제후도 줄 수 있는 작위이다. 당시 태종은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둬서 외교 마찰의 여지가 있는 오등작을 폐지하고 제후가 하사할 수 있는 '군' 계열의 작위로 바꾼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오등작 말고도, 죽은 왕에게 붙였던 묘호나 능호도 역시 본래 제후가 쓰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냥 두었다. 아무래도 이것들은 왕과 직접 관계돼 있어서 이걸 없애면 대내적으로 왕의 권위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어서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