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탁조의
莽卓操懿
1. 개요
중국 역사상 한나라 이후부터 조위[1] 때까지의 4명의 역적을 가리키는 역사용어다.
멤버는 왕망, 동탁, 조조, 사마의다. 망탁조의는 이 4명의 성을 제외한 이름을 따온 말이다. 당나라 사람 조인(趙璘)의 저서 ≪인화록(因話錄)≫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으로[2] , ≪송사(宋史)≫[3] 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 네 사람 모두 자신이 태어나 자라고 봉록을 먹던 국가를 무너뜨리려 한 자들로, 왕망은 선양의 시조[4] ,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찬탈(簒奪)의 시조'로 이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동안에 황제가 되었다. 동탁은 제위를 노렸으나 헌제의 선양이라는 미끼에 걸려 죽음을 맞았고, 조조와 사마의는 생전에 황제가 되지 않았으나 그 자손들이[5] 황제가 되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아예 조조는 '나는 오히려 주문왕을 따르겠다'는 말을 자주 하며 자신 스스로가 천자가 되지는 않겠으나 후대에 결국 조씨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노골적으로 하였다. 역심이 없는 순수한 발언이라고 보기엔 이미 조조가 헌제를 수없이 겁박하였고, 순욱이라는 희대의 명신이자 조조 자신이 "나의 장자방"이라 스스로 불렀던 인물을 숙청하면서까지 왕위에 오르는 야욕을 보였으므로 의도는 명확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황제의 자식을 회임한 후궁 동귀인을 죽이고, 효헌황후 복씨를 죽이고, 복씨 소생 아들들까지 죽이는 행위는 결코 신하의 행위라 볼 수 없다. 또한 왕망과 조조는 구석까지 하사받아 최강의 권신으로 군림했던 바 있다.
원술은 뽑히지 않았다. 다른 네 명의 경우 중앙 정부를 장악하고 황제를 압박하여 선양을 받아냈으며, 이를 통하여 이전까지의 황제를 폐위시키고 왕조를 교체한 데 비해, 원술은 지방 군벌로서 자의로 황제를 참칭하였기에 자기 지배 지역 바깥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망탁조의 4명은 후세 사람들에게 역적에 대한 기준이자 대명사가 되어서, 누군가가 역모를 꾸미거나 혹은 맘에 안드는 누군가를 디스할 때 반드시 튀어나오는 말이 되었다. 이 구성에서 실제 찬탈은 못한 동탁을 빼고, 실제 찬탈을 도모한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을 추가하여 '망조의온(莽操懿溫)'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6] 그 외에 양기, 홍공, 석현 등 한조의 간신 이름을 적당히 배합해 기현망조, 망탁공현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고정된 경구가 아니고 단순히 인명을 나열하는 것이기에 문헌에 따라 구성이나 어순이 다양한 편이다.
2. 구성원
2.1. 왕망
王莽.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꼭두각시, 허수아비 황제였던 유자영에게 형식적인 선양을 받아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그는 이미 유자영을 즉위시킬 때부터 가황제와 섭황제를 칭하고 그렇게 부르게 했으며 신나라를 세우고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려 각지에 반란세력들이 난립하게 만들었다. 결국에는 경시제 유현의 공격을 받아 장안 점대에서 죽음을 당하고 시신은 수천 갈래로 찢어졌으며[7] 머리는 완에 효수되었다. 더 비참한 것은 '''백성들이 머리를 때리고 혀를 잘라 베어먹었다.''' 여담으로 평제의 황후였던 왕망의 딸 황황실주(효평황후 왕씨)는 33살 나이에 불타는 건물 속에 들어가 자살했고 왕망의 조상들과 친척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졌으며[8] 일족들은 모두 몰살되는 등 끝이 매우 좋지 못했다. 망탁조의 라인 중 유일하게 삼국지 관련 인물이 아닌 사람이다. 그래도 한나라 관련 인물이긴 하지만.
2.2. 동탁
董卓. 동탁은 후한 말 십상시의 난 직전 권력자였던 대장군 하진의 호출을 받고 수도 근처에 있다가, 십상시의 난으로 하진과 십상시들이 싸우다 모두 죽은 사이에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을 접수한다. 이후 당시 황제였던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옹립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폐위한 소제는 이유를 시켜 시해했고, 양주자사에 불과했던 동탁 자신은 스스로 상국에 올랐다.
무엇보다도 백성들에게 각종 학정을 일삼았다.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후한 역대 황릉을 도굴하는 등 나라를 다스린 게 아니라 그냥 털어먹었다. 특히 아무 고을이나 찍어서 자기 병력들을 풀어 마음껏 노략질하게 하는 것이 백미다. 또 돈 많기만 하면 장땡인 줄 알고 조폐창에서 화폐를 마구 찍어댔는데, 이 중에는 돈인지 쇳조각인지도 모를 저질 화폐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 때문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그냥 이 당시 중국의 화폐 경제가 이 인간 때문에 작살나고 물물교환 경제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결국에는 동탁의 첩과 놀아나면서 불안해하던 여포가 사도 왕윤의 사주를 받고 동탁을 살해했다. 이후로는 그간 저질러온 죄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
- 동탁의 일족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동탁의 머리는 효수되었으며 시체는 길거리에 방치되었다.
- 동탁의 폭정 때문에 고통받은 백성들은 효수된 동탁의 머리를 때리고 뚱뚱하고 기름진 시체에 심지를 박아 불을 질렀고[9] 원씨 문하생들은 그 시체를 완전히 불태우고 재를 길거리에 뿌렸다.[10]
- 동탁의 머리는 여포가 나중에 이각 등에게 패하여 원술에게 달아날 때 말 안장에 싣고 가져가 버렸다.
2.3. 조조
曹操. 조조는 이각에게서 도망친 헌제를 옹립하고 조정을 자신의 세력으로 채워넣어 황실을 매우 약화시켰고, 결국에는 위왕까지 올라 그 아들 조비가 위나라를 세울 기반을 마련했다. 실제로 역사가들의 평가 역시 조비는 이미 아버지가 깔아준 판에 오르는 걸 좀 앞당겼을 뿐이며, 실질적인 찬탈자는 조조라고 못박고 있다.
조조는 헌제를 허창으로 옹위한 후 황제 앞에서 칼을 차고 다니며 협박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에 연좌되었다는 이유로 황제의 아이를 임신 중이던 동귀인이나[11] 황제의 아들을 둘이나 낳은 복황후마저 시해하고[12] 그 자리에는 자기 딸을 밀어넣어서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13] 물론 조조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까지 관대할 수는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조조의 패악을 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고 더불어 동귀인의 경우 임산부는 출산전까지 죽이지 않던 인류의 불문율을 어기고 그것도 한황실을 보호한다는 인간이 황제의 아이를 죽였기 때문에 더 평가가 나쁘다. 조선시대 기준이긴 하지만 임산부는 처형을 하더라도 출산 100일 후에나 가능했고 그나마 제일 빨리 죽이는 경우가 궁녀가 간통을 저질러서 아이를 가진 사례였다.[14] 그 점에서 보면 질이 나쁘다는 혹평은 피할 수 없을 듯.
재미 중국인 리둥팡(黎東方; Orient Lee; 1907년 ~ 1998년)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사마의가 위를 건설한데 미친 영향은 조조가 한을 재건한데 미친 영향보다 미미하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물론 조조와 사마의 자체를 비교하자면 창업 군주로서 사마의가 조조보다 딸리는 건 사실이다. 조조가 암군들과 환관들의 집정,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집권과 이각의 집권 이후로 쇠약했던 정권을 20여년 동안 안정시켰던 건 큰 공헌이며, 사마의에게 조조만큼의 군공이 없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조는 여러 가지 실책과 한계로 통합된 중국을 건설하는 데 실패했기에, 한을 재건했다고는 볼 수 없다. 재건의 과정과 재건에 명분을 제공한 이념은 어디까지나 광무제부터 시작된, 올곧은 사인층이 정국을 주도한다는 이상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헌제 또한 많은 역할을 했음 또한 부정할 수가 없기에, 그걸 조조 혼자서 다 이룩했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사마씨가 황제를 구속하고 황제의 죄없는 충신들과 친족들을 죽인 만행을 저지른 건 사실이고 그 과정의 피해자는 물론 조씨 황실이었으나, 그건 사실 다 이미 조조가 만든 선례가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것이기에 남탓만 하긴 어려운 문제다.
또한, 말년에 갑자기 기존 황제가 받던 특전과 같은 것을 누리고 위왕(魏王)이 되려고 하는 등 권력에 크게 집착하고 한 황실의 권위를 최대한 망가뜨리려는 모습(헌제의 금교전을 대놓고 사용하거나 헌제 앞에서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등)을 많이 보인 건 유치한 추태였다. 이건 누가 봐도 사실상 아들이 황제로 쉽게 추대되게끔 멍석 깐 것이다. 훗날에 조조를 따라 찬탈의 길을 걸은 사마소, 유유, 소도성 등도, 이런 행태는 딱할 정도로 황당한 게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결코 본받지 않았다.
이후 항우의 진인 20만 학살사건인 신안 대학살 이후 400여년만에 벌어진 대규모 학살극인 '''서주 대학살'''과 '''원소군 투항병 수만 생매장 사건,[15] ''' 여포군을 공격할 때 팽성을 함락해 학살하는 등 여러 학살을 일으켰다. '''스탈린에 버금가는 각종 강제 이주정책[16] '''의 시행 등 중원 쟁패의 결과를 떠나 백성들의 민심을 잃는 행위를 많이 했고, 자신의 최고 공신이자 모사 중 하나인 순욱마저 위공의 구석#s-2을 받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함으로서 찬탈의 뜻이 있음을 인증한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인이 재능은 있어서 여러 뛰어난 업적들을 받았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장씨 3형제가 일으킨 황건적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고, 동탁이 황제를 납치해 장안으로 갔을 때에는 당당히 18로 제후에 이름을 새기며 한의 재건에 대한 생각을 보여줬다. 또한, 동탁이 불태운 낙양을 자신의 아들 대에서 복구를 시켰다는 점, 이미 망해버린 한의 간판을 유지했다는 점, 영제 때문에 어지러워진 중원과 화북을 평정하고 안정하게 만든 점에서는 확실히 그냥 나라를 개판으로 만든 왕망, 동탁보다는 낫다. 사마의도 사실 일평생 제갈량의 북벌만 막다가 고평릉 사변으로 정권을 잡은 거라... 허나 이와 같은 업적을 인정해도 결국 역적 취급을 피하진 못하고[17] 그로 인해 자신의 라이벌인 유비의 촉한정통론에 힘이 많이 쏠려 있다.
2.4. 사마의
司馬懿. 사마의 또한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여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18] 의 대를 지나 결과적으로는 그 손자 사마염이 황제에 올라 조위를 무너뜨리고 진나라를 세웠다. 다만 사마의의 경우 본인은 그냥 권력만 찬탈했고 따로 한 것이 없었으며 실제 제위찬탈의 작업은 둘째 아들이 주도해 행했다는 점이 좀 다르긴 하다. 이 점은 사마사도 마찬가지. 황제의 지위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결정적인 조치는 그가 아니라 동생 사마소가 행했다.
그런데 정작 사마의의 유언은 "나라에 충성하라."였으나 그 자식들이 말 안 들은 것 때문에 끼였으니 좀 억울하겠다. 하지만 일부러 자식들을 위해 자신은 충성을 바치는 식의 연기를 했다는 의혹도 강하며, 이 부분은 조조도 비슷하게 지적받는 부분이다. 한마디로 역적인듯 역적 아닌 역적 같은 자.
또한 사마씨는 조조의 일족들을 문초하고 많이 죽였는데 이 과정에서 위(魏)는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잃었다. 내정에 매우 뛰어난 치적과 업적을 달성한 바 있는 하후현은 끌려가 사형당했고 하후연의 차남이자 조위 차세대 유망주 격인 장수인 하후패는 촉한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나마 촉이 암군 유선과 간신 황호에 의해, 그리고 오는 폭군 손호와 간신 손준, 손침, 잠혼 등에 의해 망해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역으로 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마륭 같은 유능한 인재를 독발수기능의 난 진압에 투입한 거야 둘째쳐도 그 뒤 서량에 머물게 하는 등 사마씨들, 그 중에서 특히 사마염은 인재 보는 눈은 몰라도 인재를 쓰는 능력, 그릇은 없었다. 당장 개인적인 감정으로 삼국시대 후반부 최강의 무장 중 1명을 홀대한 것만 봐도 그렇다.
또 서진 당시의 상황을 보면 문벌귀족들과 황족들이 그야말로 소돔과 고모라 수준으로 놀아재껴 천하는 도탄에 빠졌으며 나라가 폭삭 망하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의 상태였다. 거기에 사마염 사후 서진 말기의 20년간의 상황을 보면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각지의 세력 가진 왕들은 독자적인 군벌로 전락해 이민족 용병들을 활용하며 마음껏 서로의 세력을 깎아먹었고, 기껏 이룬 천하통일은 깨어져 그 절반을 북방이민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단, 사마염 사후 서진 말기의 20년간 상황은 국정 운용에서 많은 혼란이 있었고 양씨, 가씨 일가가 벌인 행태와 8왕들이 벌인 내전은 꽤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이미 흉노, 선비, 강, 저, 오환으로 대표되는 이민족 집단의 군사적 경험과 사회 체제, 지적 역량은 상당 부분 발전된 상황이었고, 영가의 난 자체는 꽤 우발적인 사태였다고 볼 개연성이 충분하다.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후기 로마 제국 같은 경우 그래도 이민족들은 자기네 구역에서 알아서 놀게끔 면밀한 관리가 이뤄졌고 이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딱히 군대나 관료 체제 진입, 승진 면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었던 반면 위진 제국은 이러한 배려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이미 동한 시기부터 이뤄졌던 추세라 서진과 사마씨 탓만 할 순 없다.
사마염이 경솔하게도, 알짜배기 영토 내에 독자적 세력이 있고 출세길에서도 이방인 수준으로 차별받는 불만 가득한 이민족 무장 세력의 존재는 고려하지 않고 지방 주둔군 규모를 마구 줄이고 가정사 관리에도 신경쓰지 않았던 게 동한~위진 시기부터 축적된 문제를 폭발하게 한 건 사실이었으나 설령 사마염이 이런 부분에서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이민족들에게 제국 절반을 내주는 사태가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진(晉)정권은 국토의 절반을 간수하고, 간수한 위치에서 다시 국력을 보존하고 추슬러 환온, 유유 등이 이민족 국가들을 여럿 멸망시키고 장안과 낙양을 탈환하는데는 성공했음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후대인이 조조와 사마의를 들먹이고, 거기에 선양쇼들을 벌인 이후의 남북조 국가들과 더 나아가 수당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것인가? 그것은 왕망이 개발한 선양이란 쇼를 보다 정교해서 가다듬어 충(忠)이란 개념을 자기 일가 유리할 대로 이용하는 행태는 당대인이 보기에도 가식적이었고, 현대인이 보기엔 당연히 속임수에 불과한 데 있다. 물론 아예 이런 개념이 없어 로마 시민인 휘하 군인들 지지만 있으면 현임 황제를 죽이고 개나소나 다 황제가 될 수 있는 로마 제국과 비교한다면 보다 정교한 제도였으나, 설득력이 그렇게까지 좋지 못했던 건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뒷날 오호십육국시대에 후조의 창업군주 석륵은 고구려 사신 우문옥고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신하인 서광과의 대화를 하던 중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시 이미 역적으로 인정되던 왕망과 동탁은 빼고 조조와 사마의를 디스한 것이다.
심지어는 사마의의 먼 후손인 동진의 진 명제도 왕도(동진)에게 사마의 일가의 찬탈 과정에 대해 듣고는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晉)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 라며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출처:진서(晉書) 제기 1권 선제기)대장부가 일을 꾸미는데 있어서는 마음이 호탕해서 일월과 같아야 하오. '''짐은 조맹덕 부자(조조, 조비)나 사마중달 부자(사마의, 사마사, 사마소)처럼 고아나 과부[19]
를 속이며 간교한 술책으로 천하를 빼앗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오.'''
3. 재평가?
유교에서는 충(忠) 사상이 매우 중요시되었으나, 동아시아의 유교 중심의 사고방식이 완화되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비판받던 망탁조의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었다.
왕망의 경우 초기행적과 이상은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는다. 신나라가 겨우 15년 만에 망해서 한서와 후한서 등의 정사에서는 얄짤없이 까이고 후한서의 경우 후한 자체가 전한을 멸한 왕망을 토벌하는 것을 정통성으로 보았다고 하는데, 이건 물론 후세인도 참조할 실적이긴 하지만 체제적, 행정적 평가로 봤을 때는 어디까지나 참조사항이지 평가의 전체로 볼 수는 없는 부분이다. 왕망은 초반에 좋았던 게 문제가 아니라, 정치 인생을 시작할 때부터 폭군으로 단죄되어 죽는 그 순간까지 이상주의자였다. 서한 체제의 가장 큰 문제인 빈부격차, 평민의 지위 하락, 호족층의 대두, 이민족 문제 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은 칭찬해줄만하다. 광무제가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지만 어디까지나 보수적인 개혁이라고 밖엔 볼 수 없으며, 보다 철저한 전면적인 개혁으로 보자면 왕망보다 못했다.[20]
다만 왕망이 후세에 실패자로 낙인찍힌 이유는, 왕망에겐 꿈꾸던 이상을 실현할 실무와 행정 능력이 없었던 데다 그걸 조력자를 통해 보완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은 데 있었다. 행정과 실무에 능한 조력자를 발굴해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통치자의 기본이라도 실현했다면 왕망이 그렇게 실패하진 않았을 것이다. 공민왕은 욕은 많이 먹지만 그래도 신돈을 발굴했었고, 진시황 또한 스스로가 실무에도 많이 간여했으되 이사 같은 인재들을 활용했다. 조조 역시 그 자신이 뛰어난 행정가였지만 동시에 인재들의 조언을 많이 빌렸고 참조했다. 그런데 왕망은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고 관료 집단을 지나치게 불신한 나머지 능력도 안 되면서 중요한 개혁을 함부로 추진하다가 망하게 된 것이다.
한편 조조와 사마의는 각각 조위와 서진#s-1이라는 새 왕조의 창건자로 황제에 추존되었으며, 역성혁명 논리에 자유롭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시하는 현대에 와서는 어쨌든 후대로 이어진 왕조를 건설한 둘을 창업군주로는 평가하는 편이었다. 고대의 정권교체의 주체들을 무조건 나쁘다라고 평가하면 어린 황제를 몰아내고 송나라를 건설한 조광윤 같은 자들도 다 개쌍놈이 된다는 논리에서였다. 결론은 정치 못하고 실패하면 역적이고 어쨌든 후대로 이어지는 왕조를 건설하면 창업군주가 되는 것. 그래서 현대에는 반란자를 특별히 나쁘게 평하지 않는다. 거기다 마오쩌둥이 조조를 상당히 좋아하여 중국에서 한때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21]
그러나 조조의 경우 현대적인 기준은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도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악행'''들이 속속 재발굴되며 한동안 불던 재평가에서 다시금 조조는 악당이라는 쪽으로 기울어가는 추세다. 당시에도 '''서주 대학살'''같은 악행으로 비난받아 적대 세력을 키우는 꼴이 되었고,[22] 조위 치하의 위나라의 정국이 그야말로 살기 힘들었다는 점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상당히 각박하고 배려 없는 위나라의 전시 체제 운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걸 사마씨 정권이 아주 약간 풀어주자 민심이 그다지 위나라를 그리워하지 않는 쪽으로 돌아선 것만 봐도 '''백성들이 왜 조위를 미워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동양사학계의 거장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조조를 악랄한 정치인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마씨까지 갈 것도 없이 촉한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촉한은 유비의 선정과 제갈량의 뛰어난 내정관리를 통해 북벌을 일으키면서도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지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비단 사업, 농업 발전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 '''촉한이 망한 뒤에도 촉 지역에서 제갈량과 유비는 크게 존경받았다.'''[23] 특히 진나라 멸망의 결정적 원인인 이민족 정책에 있어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면모를 보여줘 이민족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손오 또한 개척이 미진하던 강남지역을 발전시킨 공이 있으며 잦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에게 세금을 독촉하지 않는 등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다.[24] 그러나 조위는 사방의 적을 제압하기 위해 상시 계엄령 상황을 조성하여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으며 이민족과도 전쟁을 벌였다. 때문에 세금을 크게 물리고, 백성들을 고향에서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조조가 이후 민중에게 찍힌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또한 조조 이전 한나라의 실정 및 혼란과는 별개로 한나라는 당시 보기 드물었던 400년 통일 왕조였고 아무리 허울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벼락출세자인 조조가 전근대 사회에서 400년 통일 왕조로서 쌓아왔던 전통과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당시 관점으로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조는 비록 황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황후를 처형하고 황제의 후궁과 후궁이 임신한 황제의 아이까지 죽이는 등 한 황실을 엄청나게 핍박했다.
사마의의 경우도 요동에서 공손연을 토벌할 때 벌인 대규모 학살로 현대에도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으며 삶 자체도 위선적인 부분이 너무 많은데다가 최고 권력자가 된지 2년만에 죽어 통치자로서 업적이 적고, 후손들이 만든 서진이 천하 절반을 이민족에게 내주고 말았기 때문에 평가가 박해졌다.[25]
현대 드라마 삼국을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조비가 사마의에게 "내가 황제가 되어도 될까?"하는 식으로 묻자 사마의는 "님 아빠인 조조는 능력치가 개쩔어서 자기 인망까지 깎아가며 황제가 될 필요가 없었지만, '''님은 권위도 딸리고 기본 스탯이 영 좀 아니기 때문에 일부러 황제가 될 필요가 좀 있어보임'''"식으로 대답한다. 이에 결국 조비에게 찬탈당하고 산양공이 되어 배에 오르는 헌제를 부둣가에서 배웅하는 사람이 하필 또 '''사마의'''로 재해석되는데, 헌제는 사마의를 기특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사마의가 조씨를 끝장낼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는듯 한 눈치로 극중에서 그려진다. 근데, 이건 훗날 북제가 동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나온 일화를 끌어다 여기서 쓴 것이다. 물론 상황 자체는 선양을 가장 처음 해보는 왕조였던지라, 조비 측에서는 어서 빨리 선양받고 어중간한 상황을 끝내야 했던 필요가 절박했던 게 사실이지만.
마지막 동탁만은 '''재평가도 없는 그냥 악인'''으로 묘사된다. 그래도 그나마 좋은점을 찾아보면 젊은시절 강족무리가 손님으로 찾아오자 전재산이었던 황소를 내어 잔치를 치렀고[26] 또 부하들을 잘 챙겨주어 부하들이 잘 따랐다는 정사의 기록을 보아 히틀러처럼 인간적인 면 '만'은 좋은 사람으로 추측된다. 그래도 동탁 관련 이야기를 언급할 때 "동탁도 처음부터 성격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언급하긴 한다. 물론 동시에 나중에 권력 욕심에 중독되어 타락한 인물이라고 동시에 부정적 언급도 쓴다. 즉 옹호라 하긴 힘들고 기껏해야 깔 때 까더라도 제대로 알고 까자 정도. 다만 동탁의 횡포로 인한 의외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기는 했는데, 바로 동한을 좀먹던 환관 집단과 외척 집단,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던 기득권 집단이 동탁 손에 싸그리 정리된 것. 물론 어디까지나 동탁 자신이 그 기득권을 혼자 다 쳐먹으려고 그런 것이고 이 과정에서 죄없는 양민들까지 대거 학살당하고 나라 자체가 유비, 조조, 손권 3군웅 덕에 수습되기 전까지 쭉 개막장이 되었기에 절대 이걸 가지고 동탁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4. 선양 받은 후 황제에 대한 행적
재미있는 것은 동탁은 실질적으로 신왕조를 세우지 않았으니 논외로 친다면[27] , 망탁조의의 멤버에 추가로 환온을 친다고 해도 '''이들 전원이''' 선양받은 선대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동탁이 선양받지 않았다고 해서 '''황위에 대한 욕심이 없는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동탁은 '''황명을 밥먹듯 거절해가면서까지 지킨 자리가 양주자사'''였으며 황제였던 소제 유변을 자기마음대로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다 헌제 유협을 박아넣은 데다가 그 유변마저 나중에는 이유를 시켜서 독살했다.[28] 왕망이 폐위한 유자영은 왕망 때에는 유폐되었긴 해도 살아 있었고[29] 조비가 폐위시킨 헌제는 천수를 누리었고 사마염이 폐위시킨 조환은 천수를 누린데다가 한술 더떠 사후 황제로 추봉되기까지 하였다. 환온이 내친 사마혁 또한 천수를 누렸고, 사마덕종 또한 환온이 아닌 유유에게 죽는다. 이는 이들이 충신이거나 역성혁명을 일으킨 선구자여서는 당연히 아니고 정치적으로 이것이 유리하다는 분위기가 그당시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위해서는 전 황제를 죽여서는 곤란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선양 후 전 황제를 죽이지 않는 관습은 망조의온 시대뿐만이 아니라 고대시대 부터 망조의온 시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깨진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요순시대의 선양도 전황제의 피가 흐르지 않은 상태에서 선양이 이루어졌고, 연나라왕 쾌 또한 살아 남았다가 제나라의 침공으로 자살했으며, 그외에는 삼국지보다 고대에 선양 기록은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러나 동진의 공제 사마덕문을 유송의 고조 유유가 죽이면서 그 후의 왕조는 송태조가 대인배적 행동을 할 때까지 무조건 선양 후에 이전 왕조의 황제를 죽여버리게 된다.
5. 예시(?)
삼국사기, 고려사에서 보이는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편지에 '오직 망·탁의 간사함만이 보인다(唯看莽卓之姦)'며 견훤을 왕망과 동탁에 비유하며 비난하는 문구를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들을 까는 부분이 끝도 없이 많다. 업적도 많고 조선왕조의 처지로 봐도 그럭저럭 정당화가 가능한 조조나 사마의보다는 왕망을 까는 드립이 넘치는데, 왕망에 비유해서 까니까 '''어떻게 왕망에 비교할 수 있냐고''' 화를 내면서 반박하는 부분도 있을 정도다. 심지어 조광조도 사후 왕망 소리를 들었다.
위안스카이 또한 신해혁명 직후 혁명 진압을 위해 청조에 기용되었을 때 황족 중 하나로부터 '사마중달과 같은 자'라는 평을 들었다. '범을 불러 집을 지키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라는 것이었는데, 청조로서는 당시 북양 신군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위안스카이의 기용 없이 혁명군의 진압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결국 그냥 선양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왔다. 당장 청 황실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나마 존중을 해준건 북양군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적대하던 혁명 세력이었다.
6. 기타
망탁조의 중 유일하게 왕망만 게임에서 등장하지 못했다. 그나마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할 수도 있는 추측을 해 볼수는 있지만, 신나라 자체가 게임 등 미디어 믹스에서 인지도가 꽤나 저조한데다가 신나라 소속으로 등장한 고대무장이 없기 때문에 등장할진 미지수.[30]
망탁조의 중 왕망과 조조는 자신의 가족들이 황실과 혼인해서 외척의 형태로 권세를 공고히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정작 각각 왕망/조조의 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혼인한 구 황실에게 끝까지 충성한 것도 묘한 공통점이다. 가령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 왕씨는 전한의 태후로서 전국옥새를 감추고 끝까지 선양을 반대하고, 왕망이 한나라의 제도를 고쳐도 자신의 궁정에서는 고치지 못하도록 저항했다. 또한 왕망의 딸인 효평황후 왕씨 또한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전한이 멸망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황녀라는 호칭도 거절한 채 칩거하다가 왕망이 몰락할 때 자신도 한 황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조의 딸인 헌목황후 조씨 또한 효원황후 왕씨처럼 전국옥새를 내주지 않으며 선양에 반대하고, 남편인 헌제가 폐위된 뒤에도 끝까지 남편을 보필하며 후한의 황후로서 삶을 마쳤다.
[1] 사실 사마의도 역적짓을 한 나라는 조위이지만 일생의 절반 이상을 한나라 시절에 보낸 인물이다.[2] ≪인화록≫권 5 : ... 而莽, 卓, 操, 懿以降, 行滔天之心, 援此為法, 尤可悲也. 출처[3] ≪송사≫권 409 : ... 而大奸之必還, 莽, 卓, 操, 懿之禍, 將有不忍言者. 출처[4] 흔히 말하는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선양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아닌, 타의적이고 반강제적인 선양을 말한다.[5] 조조의 아들 조비,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6] 다만 동탁은 찬탈만 못했을 뿐이지 실제로 저지른 전횡과 악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7] 항우도 공을 세우기 위해 다섯 장수들이 다섯 갈래로 찢었지만 왕망은 훨씬 더 처참했다.[8] 왕망의 고모인 효원황후 왕씨의 능은 이 때 무사했으나, 곧 들이닥친 적미군에 의해 친척들과 같은 수모를 당하는 걸 피하진 못했다.[9] 이쪽은 연의에서 묘사되는 부분.[10] 원소의 숙부였던 원외가 태부로 있었는데 원소가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키자 분노하여 원외를 비롯한 원가 일족을 주멸했다. 이에 그 문하생들이 복수를 한 것이다.[11] 연의의 영향으로 '동귀비'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귀인이 맞다. 후한의 내명부 체계는 매우 간소하여 황후-귀인-미인-궁인-채녀의 5등급이었고, 귀비라는 품계는 한참 후대에 가서야 처음 나왔다. 즉 후한 말에 '귀인'이라고 하면 황후 이하 최고위 후궁이었으나, 나관중 시대에는 '귀비'라는 고위 후궁 품계가 신설되어 '귀인'이라고 하면 하급 후궁에 불과하게 되었으므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색이 된 것이다.[12] 복황후의 아들 둘도 독살당했다.[13] 정작 그렇게 황후가 된 조조의 딸은 후일 조비의 찬탈에 마지막까지 저항했고, 끝내 조위의 공주이기보다 후한의 황후이기를 택한다. 조비가 선양을 받고 옥새를 달라고 사자를 보내자 못 준다고 한참 버티다가, 끝내 강요를 못 이겨 옥새를 집어던지며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라고 울며 저주했고, 기어이 폐위된 남편을 따라가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했다. 사실 이는 정치적인 이유로 내린 선택일 수도 있는 것이, 이 사람 입장에서 오빠인 조비가 조씨 왕조를 세우면 대통을 잇는 것은 조카네 혈통이지 본인 자식, 손자가 아니다. 남편을 계속 재위시키다가 자기가 아들을 낳아서 후일 그 아들이 제위를 물려받는 게 본인에게는 가장 좋은 루트인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헌제가 폐위당한 뒤에도 끝내 따라간 걸 보면 손익 계산만 따진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사랑 내지는 충성하는 마음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14] 이것만은 어쩔 수 없다. 후에 후계자 분쟁이 벌어질 수 있었기에 왕가에서는 이 경우에서만큼은 엄격하게 집행할 필요성이 충분했다.[15] 전투 후 남은 인원을 이렇게 했다는데 전후 죽임을 당한 원소군이 7~8만명이라고 한다.[16] 주로 회남 지역에 시행되었는데, 유수구 전투 직후 조조의 뻘짓으로 회남의 백성들이 집단으로 오나라로 이주하는 일도 생긴다. 손권/인간 사냥 참고. 이 때문에 회남 지역은 인구가 확 줄어 텅텅 비어버렸다. 한중의 무력화 같이 제대로 생각하고 이주시킨 것도 있지만, 이 때의 집단 이주는 제대로 분양을 해주는 등의 행동을 기대조차 하면 안 된다. 그냥 가려고 안 하면 패 죽이더라도 강제로 이주하게 하는 것이 당대 정책이다.[17] 일단 역사적으로는 청나라 시기 공식적으로 역적으로 낙인찍히긴 했다. 지금에서는 의미는 없지만.[18]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 직후 승상 직위까지 받았지만 사양하고 태부 자리까지만 올랐고 사마사는 대장군이었다. 사마소는 대장군이었다가 1년만에 진공, 진왕까지 올랐다.[19] 고아는 헌제와 위의 어린 황제들, 과부는 후한과 위의 태후와 황후들을 말한다.[20] 이는 근본적으로 호족 세력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도 원인이다.[21] 이 둘은 닮은 구석이 많았기에 일종에 시대를 초월한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22] 그리고 이 서주대학살만큼은 훗날 삼국지(정사)의 저자인 진수조차 깠을 정도로 당대 위정자에게도 욕먹을 짓거리였다. 당시 시대는 아무래도 백성 한둘쯤 학살해도 고위층 한둘을 죽인 것보다는 낮게 취급되던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까였다는건 해도 너무했다는 심리를 다들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23] 촉한 멸망 약 '''40여년 후''' 그 자리에는 성한이 들어서는데 성한은 촉한의 신하였던 범장생을 재상으로 발탁하였으며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를 세우는 등 촉한을 우대했고 촉한의 백성들은 그 시점까지도 강유가 촉한을 재건하지 못하고 죽은걸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촉한이 촉한의 백성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24] 손호가 사마염만도 못하게 무리하게 국정을 운영해서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기에 손호부터는 아니지만[25] 이게 단순한 결과론이라면 모를까 서진은 망할 요소란 요소는 다 갖췄을 정도로 심했다.[26] 전승에 따라 후에 강족들이 감동 받아 수백 마리의 가축으로 보답했다는 후일담이 붙는 경우도 있다.[27] 기실 동탁은 황제를 폐위하고 그가 제위에 오른게 아니라 헌제를 즉위시킨 것이기에 반란의 여지 등을 생각하면 죽이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다른 3명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것.[28] 동탁이 선양받지 않은 것은 아직 힘이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아직 원소나 조조가 거물이 되기 전이긴 하나, 북방의 공손찬을 포함해 동탁에 필적하는 강력한 군벌들이 있었고, 동탁 본인도 "천하를 쥐었다"고 할 만큼의 힘은 아직 없었다. 동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드린 건 힘도 있지만 천자를 끼고 있었고, 한조의 이름이 어느 정도 무게감은 있었기에 명목상으로나마 정통성에 기댈 수 있기 때문인데, 선양받는 순간 이건 모두 사라지고 힘으로만 천하를 눌러야하기 때문이다.[29] 어릴 때부터 철저히 유폐되어서 세상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훗날 경시제 유현에게 살해되었다.[30] 그도 그럴 것이, 신나라는 고작 15년 만에 망한 왕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