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니아/역사

 




1. 고대
2. 중세
3. 근세: 오스만 제국 치하
4. 근현대


1. 고대


고대부터 발칸 반도 서부에 일리리아인이 살았으나. 산세가 험하고 땅이 척박한 특성상 문명이 발달하기 힘든 위치였다.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인들이 에피담모스 등의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1] 로마 공화정에 정복당한 이후에는 일리리쿰 속주로 개편되었다.
로마 제국이 혼란을 겪던 서기 3세기부터 슬라브족들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략하는 6세기까지 일리리쿰 속주는 로마의 정예 군인 및 군인 황제들을 배출하던 장소였다.

2. 중세


서기 395년 로마 동서 분열 이후 동로마 제국의 관할로 편입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이민족의 침입을 일선에서 막아 주는 제국의 생명선 역할을 했다. 계속되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인구가 점점 줄어들던 일리리쿰 지방에 결국 6세기 무렵 슬라브족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지배력이 취약해졌다.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사이에는 알바니아 해안가에서 노르만 인과 동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으며 13세기 8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앙주 가의 샤를이 단명한 알바니아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며,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제국이나 베네치아 공화국도 이 곳을 거쳐갔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술탄 메흐메트 2세의 침공에 맞서 귀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일명 스칸데르베그)의 주도 하에 25년간 치열하게 투쟁,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 이후 결국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고, 기독교계 주민들은 베네치아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남부로 이주하였다(일명 Arbëreshë. 이 때 이탈리아로 이주한 알바니아인의 후손들 중 유명 인물로는 안토니오 그람시, 안토니오 칸드레바, 마테오 무사키오를 꼽을 수 있다).

3. 근세: 오스만 제국 치하


그 이후 알바니아는 보스니아랑 더불어 이슬람화 되어 유럽에서 가장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되었다[2]. 아무래도 스칸데르베그를 위시한 알바니아인들의 저항활동이 오스만 제국에 깊은 감명을 주어서인지 오스만 제국 시기 알바니아인들은 상당수가 투르크 제국의 정치가, 군인으로 활약했다.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중 42명이 알바니아 출신이었다.''' 하지만 알바니아의 산악지대는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통치하기 매우 까다로운 지역이었고, 19세기 유럽인 여행자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지만 "알바니아인들은 자신들에게 무기를 쓰게 해 준다면 누구에게도 충성할 수 있다."라고 평가할 만큼 변덕스런 민족으로 취급받았다. 오스만 제국 항목에서도 볼 수 있는 산골마을의 조세저항 이야기라든가, 훗날 이집트에 거의 독자적인 정권을 세운 메흐메드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라든가, 오스만 제국의 속주 총독으로 파견된 이들 중에서도 알바니아 혈통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다.

4. 근현대



4.1. 알바니아 왕국과 이탈리아의 침략


1910년대 알바니아 독립전쟁발칸 전쟁 이후 독립을 되찾게 되었지만, 주변 나라들과 전쟁과 혼란한 내부 사정까지 나라가 안정될 날이 없었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북부의 족장 가문인 조골리(Zogolli) 가문 출신이었던 아흐메트 조구이다.
1920년에는 이탈리아와의 분쟁이 터져 전쟁을 치렀으며 전쟁에서 승리했다.
1922년부터 알바니아 공국의 수상 겸 내무상이 된 아흐메트 조구는, 1924년 정교도(正敎徒) 작가 세오판 스틸리안 놀리(Theofan Stilian Noli)가 이끄는 반란으로 한 때 망명했다가, 놀리의 좌경화와 친소련 정책에 겁을 먹은 유고슬라비아의 지원으로 반 년 만에 무력으로 정권을 탈환, 1925년에 알바니아 공화국(Republika Shqiptare)을 선언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3년 뒤에는 알바니아 왕국(Mbretëria Shqiptare)을 선포하고 조구 1세(Mbreti Zogu I)로 즉위한다. 절대권력을 추구하던 아흐메트 조구는 자신을 '스칸데르베그 3세(Skëndërbeu III)'라고 칭하면서 민족영웅인 스칸데르베그의 후손이라고 홍보를 하기도 했으나, 작고 가난한 알바니아로선 그럴 힘도 없었다. 조구는 절대권력화를 꿈꾸며 이탈리아 및 다른 나라 힘을 빌리려고 했다. 심지어 나치와도 손잡으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조구가 결혼할 때 히틀러는 축하 사절을 보내면서 벤츠 차량까지 여러 대 선물로 보냈다. 하지만, 정작 히틀러는 이 나라는 동맹이 되어봐야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여 무솔리니가 쳐들어갈 때 구경만 했다.
그러나 이런 그림자와는 반대로, 조구는 근대화 면에서 뚜렷한 치적을 남겼다. 샤리아(이슬람법)밖에 없던 알바니아에 터키의 개혁을 본받아 근대적 민법과 형법을 도입하였고, 처음으로 지폐를 도입했으며, 종교적 중립을 지켰다. 무슬림 이름인 "아흐메트 1세"가 아니라 "조구 1세"로 즉위했고, "우리의 종교는 알바니아(Feja e Shqiptarit është Shqiptaria)"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무슬림 국가지만 정교도, 가톨릭 등 종교적으로도 분열되어 있고, 전혀 다른 나라나 다름없었던 남부와 북부를 통합하기 위해 조구는 종교적, 지역적 분파주의가 아닌 통일된 국가의식을 심는 데 주력했다.
1939년, 베니토 무솔리니는 알바니아가 과거 로마 영토라면서 억지로 강제 통합해버린다. 이미 내전으로 제대로 된 군사력도 없던 알바니아군은 저항도 하지 못했고, 망명하는 조건으로 퇴위를 허가받은 아흐메트 조구는 얼마 안되는 재산[3]만 급히 챙겨들고 어린 아들과 아내와 몇몇 측근만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알바니아 왕국의 국왕은 이탈리아 국왕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가 겸직하여 동군연합의 형태를 띠었다. 알바니아 왕국(1939~1943) 참조. 형식상으로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독립공화국으로 분리된 유고슬로비아의 분할에 한발 걸쳐 코소보 등으로 영토가 확장되긴 했다. (이는 세르비아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서로 헝가리불가리아도 참여). 하지만 현실은 괴뢰국이고 그나마도 패전 후엔 토해내야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항복하자 나치 독일이 이곳을 점령하고 알바니아 왕국은 독일의 괴뢰국이 된다. 그러나 1944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수한다.
이후 2차대전 여파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망명생활을 하던 조구 1세는 1945년 알바니아로 돌아와 다시 왕가를 재건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해외로 달아나야 했으며, 결국 프랑스에서 객사해야 했다. 또한, 그의 아들 레카 조구(Leka Zogu/1939~2011)와 조구 1세의 아내인 게랄디네 왕비(Géraldine Apponyi de Nagyappony/1915~2002)가 1990년대에 다시 왕가를 부활시키려고 했으나 역시 좌절되었다. 그나마 왕비나 레카와 레카의 아내 수잔(1941~2004) 모두 알바니아로 돌아와서 세상을 떠날 수 있었고 셋 다 티라나에 묻혔다. 나중에 2012년 조구 1세도 티라나에 묻혔다.
현재 레카 2세(1982년생)가 알바니아 왕을 자처하고 있긴 하다.

4.2.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정권인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Republika Popullore e Shqipërisë)[4]이 수립되어, 독재자 엔베르 호자의 철권통치를 약 40년 동안 받았다. 이 시절 알바니아는 북한을 뛰어넘는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악명이 높았다.
호자는 처음에 유고슬라비아티토와 연합해서 공동의 적인 독일군과 싸웠으나, 호자는 티토가 은연중 알바니아를 유고의 한 연방국 알바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시키려 한다고 티토를 비난했다. 그 이후 1940년대 후반 티토와 스탈린이 결별하자 호자는 스탈린 편을 들어 티토를 수정주의자로 디스한다.
그러나 이후 소련에서 1950년대 중반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고 스탈린을 디스하는 한편 헝가리를 침공하여 반공봉기를 진압하자, 호자는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탈퇴한다. 이렇게 유고와 소련과 모두 관계가 악화되자 알바니아가 믿을 수 있던 것은 저 멀리 있는 중국. 당시 중국도 소련과 사이가 악화되었고 미국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당시는 중화민국(대만) 때문에 UN 안보리 상임이사국도 아니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양국은 매우 각별한 우호관계를 맺는다.
1970년대 후반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자 이제 호자는 "중국도 수정주의 국가가 되었다"며 "알바니아는 세계 유일의 정통 원조 사회주의국가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다시 유고슬라비아와 관계가 조금 개선된다. 덤으로 호자는 다른나라 공산 지도자도 비난했는데, 심지어는 김일성까지 "수정주의자, 사회주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그밖에도 국민들에 대하여 허가 없이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는 등, 그야말로 국제사회의 히키코모리나 다름없었다.

알바니아의 상징이 된 벙커
소련이 헝가리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는 호자가 전 국토를 요새화, 자그마치 수십만에 달하는 벙커로 도배하는 병크를 터트렸다. 정확한 수를 모른다! 대충 80만 가까이 달한다는 이들까지 있다. 론리플래닛의 토니 휠러는 30만 정도로 쓴 바 있다. 이는 알바니아 사회의 내부 통제를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소련이 무너진 마당에 이 벙커는 도대체가 아무 쓸데없는 건축물이라 을씨년스럽게 곳곳에 버려져 아이들의 놀이터 비슷하게 사용될 뿐이다. 대부분의 벙커는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다. 가장 많은 qender 타입은 정 중앙 높이가 겨우 180cm에 내부는 120cm이다. 돔 구조라 웬만한 사람은 서 있기도 힘들며, 앉을 공간은 있어도 눕긴 힘들다. 그 다음으로 많은 소규모 지휘벙커 타입인 pike 타입은 높이 4미터, 넓이 6미터 정도로 공간의 여유가 있다. 벙커에서 애정 행각을 한다거나 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다만, 벙커 특성상 반지하에 곰팡이가 잔뜩 끼어있기에 위생적일지는... 도시 빈민이더라도 비를 피할 용도면 모를까 거주하다간 병이 나서 먼저 쓰러질 정도의 환경이다. 반면, 지휘용 벙커나 특수형 벙커 등을 사들여서 테마 호텔로 재개장하는 사례도 있다고한다. 포그라데치(Pogradeci)라는 도시에서 오흐리드 호수를 따라 달리다 보면 종종 사람 키보다 큰 벙커도 드물게 눈에 띄는데 그런 벙커는 대부분 사람들이 무단으로 점거해 주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튼튼하게 만들어서 허무는데도 적잖은 돈이 들므로 빈곤한 알바니아에선 손쓸 도리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개조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못 깨서 안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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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휠러가 쓴 나쁜 나라라는 책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호자가 벙커 개발책임자에게 몇 개 벙커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몇 개 벙커들이 시험삼아 만들어져서 그걸 실험하고자 하는 날이 왔다.
호자는 이 자리에서 개발책임자를 보자마자 "이것들이 튼튼한가?" 물어보았다. 책임자는 물론입니다! 어디 시험해보십시오!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호자는 웃으면서 "책임자가 직접 시험을 해봐야겠지?" 말을 하고 신호를 보냈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책임자가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호자의 부하들이 그를 잡아서 억지로 벙커에 집어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더니 미리 대기한 포병대가 나타나 수십여발 포탄을 벙커에 펑펑 쏘아버렸고, 한참 시간이 지나자 호자는 크게 외쳤다.
"네놈이 살아있으면 나는 훈장과 같이 약속한 보상을 할 테고, 네놈이 죽어 있다면 약속이고 뭐고 죄다 취소이며, 네놈과 관련된 이들이 책임자로서 처벌받을 것이다! 어떤가? 살아있냐?"
잠시 뒤, 문이 열리면서 책임자가 기어 나왔다. 호자 부하들이 책임자 얼굴을 보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얼굴"이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일단 책임자는 겉으로는 상처하나 없었기에, 호자는 크게 만족해하면서 약속을 지켜주면서 같은 벙커들을 더 많이 만들라고 지시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알바니아에서 호자가 얼마나 이 벙커들을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실화로 언급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과장되었거나 도시전설일 가능성이 크다. 벙커는 거의 다 전방에 사격대가 있기 때문에 수십여발 포탄이 쏟아지면 직격으로 안 맞아도 멀쩡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튼튼한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 편이 굴삭기 정도만 동원하면 가볍게 해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충 철근으로 구조를 만들고 반 뼘 정도 두께로 콘크리트를 쌓은 반구형 구조물일 뿐이다. 해체하기 어렵다는 건 중장비가 없기 때문에 손으로 까부수기 어렵다는 말이지 포탄에도 잘 버틸 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뭐 설득력 있는 말이긴 하지만 벙커가 한 종류만 있는 것도 아니니 저 일화 속 벙커가 알바니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가 아닌 소대급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대형 벙커일 수도 있고 독재자 앞에서 시현하는 만큼 특별히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더욱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종종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치적물들이 튼튼한가를 검증해왔다.[5] 이런 사례를 볼 때 저 일화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967년에는 세계 최초로 절대 무신론 나라임을 선포하고 이슬람 및 정교회들을 탄압했다. 종교 탄압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며 냉전시 대의 다른 공산권에서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형식적으로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소련의 경우 헌법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었고 심지어 북한조차 교회나 절을 지어놓고 목사나 승려가 있다고 하고는 있다. 물론 북한에 실제로 종교의 자유 그런 거 없다. 알바니아처럼 아예 공식적으로 국가적으로 무신론이라고 선포한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절대권력을 누리던 호자 또한 이오시프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암살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았고, 늘그막에는 정신이상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암살을 무서워하면서 스탈린처럼 고립되어 있다가 쓰러져도 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는 것도 두려워했기에 의사들을 곁에 두면서도 의사들에 대하여 엄격한 사전점검을 했다. 죽기 얼마전에는 아들과 딸에게 권력 양도까지 논의했으나 실패했고, 1985년 호자가 죽은 뒤엔 라미즈 알리아가 뒤를 이었다.
알바니아의 공산독재는 계속되었으나 동유럽 민주화의 물결 속에 1990년 알바니아 각지에서도 시위가 일어났고, 수많은 알바니아인이 알바니아를 탈출해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떠났다. 결국 알바니아에선 다당제가 도입되어 의사 살리 베리샤가 이끄는 민주당이 창당되었으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다당제는 도입되었음에도 공산주의 정부는 1991년 총선에서 농촌 지역구에서 승리를 바탕으로 정권연장에 성공했고, 노동당에서 사회당으로 당명을 개칭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경제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1992년에 치러진 조기총선에서 사회당이 패배하면서 마침내 공산정권은 종식되었다. 그 후 전국에 깔려있던 호자 동상은 마구잡이로 파괴되었으며, 호자가 살던 집이나 박물관은 죄다 공공 또는 민간 시설로 바뀌었다. 호자의 자식들은 대부분 해외로 망명했다.
수도 티라나 서쪽에 두러스(Durrës)라는 도시가 있는데, 티라나와 두러스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시티파크(CityPark)라는 대형 쇼핑몰이 있다. 이 쇼핑몰의 주인은 호자의 아들인데, 이 점에 아이러니를 느끼는 사람도 제법 있는 듯.
티라나에서 가장 번화한 블로쿠(Blloku)라는 곳이 있다. 이 곳은 강남이나 이태원 쯤 되는 곳으로 지금은 나이트클럽, 고급 상점 등이 즐비한 곳이 되었지만 공산 시절에는 고급 당원만 출입할 수 있는 통제구역이었다. 블록쿠라는 말 자체가 통제 구역(The Blocked Area)이라는 뜻. 이 지역 안에는 호자의 소유물이었던 주택도 한 채 있다. 누구는 자택이었다고 하고 누구는 별장이었다고, 또 누구는 집무실이었다고 하는 등 이 건물의 정체를 알 방법이 없다. 어쨌든 호자 것이었음은 분명.
현재 알바니아 국민들이 공산 시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복잡한 것 같다. 특히 노년층의 경우에는, 공산 시절에는 맨발로 다녀도 될 만큼 도로가 깨끗하고 사람들도 좋았는데 괜히 민주화해서 동네도 더러워지고 인심도 흉흉해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공산 시절의 전설같은 이야기는 여전히 많이 회자되는 듯.

4.3. 알바니아 공화국


민주화 이후 1992년 조기총선에서 살리 베리샤가 이끄는 민주당은 새로 알바니아의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도 얼마 안가 언론 자유를 제한하면서 독재적인 측면을 보였고, 민주당은 강하게 탈공산화 정책을 폈지만 베리샤를 포함해 알바니아의 지도층이 대개 '공산귀족' 출신이라 탈공산화 정책 뒤엔 분규가 따랐다. 경제 상황은 별로 개선되지 못했고 범죄도 늘었다. 노동당의 후신인 사회당의 라미즈 알리아와 파토스 나노 등 야당 정치인들이 체포되었고 베리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남북간 지역감정도 존재했으며, 북부 지방이 민주당의 세가 강했다면 남부 지방은 사회당의 세가 강했다. 지역감정의 차원이 다르다. 동네마다 지지하는 당의 당기를 집집에 걸어 둘 정도. 출신 지역들이 다양한 티라나에서조차 이런 일이 흔하고 지방으로 내려가면 더 심하다는 듯.
당시 집권 민주당은 다단계 사기 회사들에게 돈을 받아 가면서 국민들에게 투자를 권유하였고, '''국민의 60%가 거의 전 재산을 털어 가면서 다단계 사기에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1997년 피라미드 사기 회사들이 도산하면서 당시 민주당 정권에서 계좌동결을 하자 사기당한걸 깨달은 국민들은 분노해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폭력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정부군은 폭격을 하면서까지 시위를 진압하려 하자 시위대는 무장 함정을 탈취해 해군기지를 장악하는 수준까지 갔다. 베리샤 정권은 남부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했고 이 혼란 속에서 3,800명이 사망하는 막장 상태에 이르자 알바니아 정부는 조기 총선을 대가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혼란 상황은 일단 잠재웠다. 이 때 무기고가 약탈되어 총기류가 많이 유출되어 지금도 그 때 유출된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새해 선물로 소총을 주고받기도 하고.. 자세한 내용은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 참조.
계속된 경제혼란과 부정부패는 알바니아 마피아들이 날뛰는 계기가 되었다.
조기총선에서 민주당은 패배하고 사회당이 집권했다. 그러나 1998년 야당 지도자 하이다리가 피살당하자 다시 유혈사태가 발생했고 알바니아 정부는 반정부 세력 뒤에 베리샤가 있다며 베리샤 체포를 검토했다. 그러나 그 때 코소보에서 내전이 터지면서 오히려 알바니아 혼란상은 진정되었다. 그리고 코소보에서 난민들이 들어왔고 알바니아의 내부 사정은 더 나빠졌다.
2000년대 들어 알바니아는 여전히 부패하고 부유해지진 않았지만 점차 안정되어갔으며 치안도 개선되었다. 또한 알바니아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다. 알바니아에서 치러지는 선거는 거의 모두 부정선거 의혹을 받긴 하지만, 2005년에는 다시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겨서 집권했다. 2009년에도 다시 민주당이 승리했으나 부정선거 의혹이 나왔고 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자 2011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2011년 수도 티라나에서는 시위 도중 사망한 시위대 3인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여기에 10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참여하였다. 이 시위는 당시 티라나 시장인 야당 당수 에디 라마(Edi Rama)[6]가 주축이 되어 현재 여당 당수이자 정부 수장, 알바니아의 실질적 1인자인[7] 살리 베리샤(Sali Berisha)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그러나 2011년 지방선거에서 라마는 재집권에 실패하고 여당 소속 룰짐 바샤(Lulzim Basha)에게 시장직을 넘겨주었다. 이 지방 선거의 투명성에 의문을 제기해 불복한 라마의 주장을 알바니아 법정에서 기각했고, 라마는 현재 유럽 연합에 이 안건을 올려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2013년 현재까지도 바샤가 멀쩡하게 재직하는 걸로 봐서는 이 사안은 그냥 넘어간 듯.
결국 2013년 선거에서는 사회당이 승리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2017년에 알바니아는 총선전 정국혼란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지방선거를 취소했다.# 그리고 2017년 6월 18일에 열리는 총선을 앞두고 여야대치가 계속되자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했고 야당측은 반발했다.# 하지만 2017년 6월 25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사회당이 승리했다.#
2019년 2월 16일에 티라나에서는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되었다.#
2019년 11월 26일 오전 3시쯤 '''규모 6.4'''의 강진이 발생해 51명이 사망하고 2500여명이 부상당했고 최소 4000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정도 지진은 1926년 이후 93년 만에 처음이며 40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1979년 지진을 넘어선 사상 최대의 피해이다. 첫 지진 이후 100여차례 여진이 지속됐으며 이 가운데 두 차례는 규모 5.0 이상의 비교적 강한 지진이었다. 앞서 올해 9월 21일에도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해 100여명이 부상당하고 주택 수백채가 파손됐었다. #1 #2 #3 #4 #5 #6 11월 27일 알바니아 정부는 두러스수마네 지역에 대해 30일간 유효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피해 복구를 위한 총력 지원에 나서기로 했으며 국가적인 애도의 날로 정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이날 알바니아 내 모든 공공기관은 조기를 내걸었고 28∼29일 계획된 국가독립기념 행사도 모두 취소됐다. # 희생자중에는 알바니아 총리의 예비며느리와 그 가족도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1] 로마 때의 디라키움이고 현재의 두러스이다.[2] 다만 대부분이 나이롱이다. 1년에 한 번도 자미(회당)을 찾지 않는 사람은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을 동시에 다 믿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그런 반면에 라마단(알바니아에선 라마잔이라고 한다) 기간에는 정해진 시간에 침도 안 삼키는 독실한 신자도 제법 있는 편[3] 이라고 하지만, 가져간 재산을 현재 액수로 치자면 2,5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었다.[4] 후에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국명를 바꾼다.[5] 5호 16국 시기 북하를 세웠던 창건자 혁련발발은 수도 통만성을 세울 당시 성벽을 구역별로 나누어 일일이 송곳으로 찔러보아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그 구역 담당자 및 인부들을 모조리 살육하여 그 성벽에 같이 파묻어 버리는 비인륜적이고 살벌한 방식으로 품질관리를 해서 천팔백년도 훌쩍 지난 현재까지 잘 남아있다. [6] 원래는 미술가로, 시장에 재직하는 동안 티라나 시의 외관을 미적으로 꾸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7] 알바니아의 대통령은 외교 등 극히 일부의 표면적인 일만 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