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원쇼

 

[image]
'''타이틀'''
서세원쇼
'''장르'''
토크쇼
'''방송사'''
KBS 2TV
'''방송 시간'''
화요일 저녁 10시 50분 ~ 11시 50분
'''방송 시작'''
1996년 10월 15일[1]
'''방송 종료'''
2002년 8월 6일, 총 343회
'''기획자'''
김영선 → 박환욱
'''담당 PD'''
이근형, 권영태, 이용준, 김호상
'''HD 유무'''
HD 방송된 적 없음[2]
1. 개요
2. '서세원의 화요스페셜'로의 시작, 그리고 독립 프로그램으로의 편성
3. 서세원쇼
3.1. 역습의 김건모 팬덤과 프로그램의 전성기와 하락기
3.2. 김남일 선수 부모님 조롱 논란
3.3. 궁지에 몰린 서세원과 프로그램 종영
4. 후폭풍
5. 기타
5.1. 후속 프로그램 진행자들의 불미스러운 일


1. 개요


1990년대 한국 연예계 주요 프로그램들이 일본 프로그램을 베껴오는 것이 유행하던[3] 시기, '라이온의 고키겐요'(ライオンのごきげんよう)[4]라는 프로그램의 내용을 옮겨와 국민 프로그램으로 성공한 프로그램. 이런 탓이었는지 방송 내내 방송 내용이 노골적인 상대 비방과 진행자 신격화라는 비판을 들었으며, 업계에선 방송가의 불문율인 '베낀 코너는 뜨더라도 대접해 주면 안된다'를 무시한 사례로 오래동안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다.
게다가 1999년에 SBS에서 방영하던 서세원의 슈퍼스테이션의 한 코너인 현상수배가 일본 후지TV에서 방영하던 달려라 행복건설의 한 프로그램인 도망자를 표절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세원의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2000년대 초반의 서세원은 메인 MC로 참여한 좋은 예감 즐거운 TV, 쇼 여러분의 토요일 등이 잇달아 조기종영되는 수모를 겪은 뒤 서세원쇼 하나만으로 근근히 버티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아래 후술할, 서세원이 마카오에서 도박을 한 사실이 적발되는 바람에 프로그램이 종영되자 이 때부터 그의 연예계 커리어는 슬슬 몰락하기 시작하더니 2014년 5월에는 당시 아내 서정희 폭행 사건으로 인해 연예계 생활은 완전히 끝난 상황이다. 이 때문에 KBS 미디어에서는 서세원의 출연금지로 인해 이 프로그램의 영상 판매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이며 현재는 이 프로그램의 홈페이지마저도 없앴다.
오프닝 음악은 Opus의 노래 "Live Is Life"였다. 2018년까지 존재했던 홈페이지 도메인은 'http://www.kbs.co.kr/end_program/2tv/enter/sswshow/index.html'이었다.

2. '서세원의 화요스페셜'로의 시작, 그리고 독립 프로그램으로의 편성


MBC에서 KBS로 이적한 서세원이 자기 이름을 걸고 '서세원의 화요스페셜'이란 프로그램을 만들 때만 해도, 모두의 기대를 받았지만[5] 1화가 방송되자마자 오만 구설수에 올랐다. 무대와 출연자만 다를 뿐, 경쟁사들의 주력 코너에서 베껴와 만든 코너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PD의 문제가 크지만 서세원의 이름을 걸고 방송되는 코너인데다, 서세원은 이미 최양락의 주력 코너였던 네로 25시를 베낀 코너를 낸 전적이 있기 때문에 서세원에게 모든 어그로가 튄 것인데, 토크쇼 파트의 1화 게스트로 나온 김자옥이 서세원이 엉뚱하거나 무례하게 나오면 칼같이 잘라버리고도 감싸주는 관용을 베풀며 프로그램 이미지 메이킹에 크게 이바지해, 토크쇼 부분은 서세원이 괜한 오두방정을 떨다가 역관광당하는 이미지를 안착시키게 되고 후술할 수많은 병크가 용인되는 기현상을 만들어냈다.
이홍렬이홍렬쇼를 노골적으로 베껴온 서세원쇼는 이홍렬쇼와의 차별점은 주사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홍렬쇼는 쿠킹토크라 이걸 베껴올 방법이 없고[6] 주사위는 상술한 일본 프로그램에서 베껴온거라 별다른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결국 서세원의 화요스페셜은 방송 내내 구설수에 올랐고, 종영이 논의되다 국내 코너를 베껴온 혐의가 진한 전반부를 없애고 2부의 토크쇼 부분을 독립 코너로 만드는 것으로 타협을 보게 되어[7] 1998년 2월 16일 독립 코너인 서세원쇼로 개편되었다.

3. 서세원쇼



3.1. 역습의 김건모 팬덤과 프로그램의 전성기와 하락기


토크쇼 파트만 남은 서세원쇼는 서세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토크쇼의 모든 권한은 서세원에 있었고, 토크쇼를 통해 이미지를 올리려 나온 배우나 가수들은 우선권 혹은 서세원이 좋게 말해주는 진행을 위해 온갖 눈치를 봐야 했다. 이 시기는 아직 고가치를 가진 기획사가 드물어서 회사의 입김이 약했던 시기였던 터라 결국 신작이나 신보의 홍보, 이미지 업을 위해 나온 어린 연예인들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서세원의 마음에 들어야 했고 오만 갑질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서세원은 자기보다 연배가 높거나 기수가 높은 사람의 관계자에겐 비굴할 정도로 편의를 봐주는 모습을 동시에 보여[8] 서세원의 편파 진행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고 코너가 분리된 지 두 달 뒤인 1998년 4월 7일, 신곡을 홍보하기 위해 출연한 김건모를 막 굴리다가 문제가 제대로 터진다. 1995년 잘못된 만남과 1996년 테마게임으로 엄청난 성공을 한 김건모[9]가 2년 만에 신곡을 들고 나온 상황이었다. 막상 방송을 보니 웬 말대가리가 노골적인 갑질과 피부색, 작은 키 등으로 김건모의 콤플렉스를 자극하곤 남성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식의 발언을 내놓아 팬들의 집단 항의가 이어지게 된다.
물론 여기까지면 평범한 팬들의 항의로 볼 수 있는데 김건모 팬들은 그저 항의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KBS가 시청자 의견을 듣는 모든 창구를 통해[10] 항의했고, 타 방송사의 옴부즈맨 프로그램에서 일부러 이를 언급하며 '이 방송은 저런 막장 방송과 달라서 좋다'라는 내용을 남겨 상대 평가를 받게 하는 등, 지금 봐도 참신한 항의를 이어나갔다.
이러한 항의들 중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1998년 4월에 한 김건모 팬이 막 KBS 사장에 부임한 박권상에게 4월 7일 방영된 서세원쇼 내용에 대해 항의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결국 사장 집에까지 투서가 날아들만큼 여론에 크게 데인 KBS는 몇 달간 출연 게스트를 서세원보다 나이와 짬이 되는 사람들로 쓸 수밖에 없었고, 그 후에도 과거 게스트로 출연한 사람 중 반응이 좋았던 사람들을 다시 부르며 김건모가 앨범 활동을 그만할 때까지 카드 돌려 막기 하듯 게스트를 돌려썼다.
신기하게도 연령대가 어느 정도 높은 스타들이 꾸준히 나오는 점이 중장년층에 어필해 게스트 돌려 막기가 정점에 다다랐던 6월 시청률은 오히려 상승했고, 여세를 몰아 서머 스페셜을 포함한 4주 연속 기획을 시도해 성공하며 1999년부턴 국민 토크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대다수의 토크쇼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방송사 측의 공영성 강화 차원에서 줄줄이 종영되는 와중에도 혼자 남아 어부지리로 국민 토크쇼의 자리에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인기를 얻기 위해 그 동안 지적되었던 게스트 비하 등의 각종 폐단도 점점 더 커지기도 했다.
그 결과 당시 막 태동하던 초고속 인터넷 상에서 폐지 운동이 벌어지거나 안티 카페가 생겨나는 등 서세원쇼에 대한 비판 의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고, 비판이 정점에 달했던 2001년엔 최악의 프로그램 1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하지만 까려고 보는 사람들과 게스트의 과거사 폭로를 이용하려는 게스트의 안티 팬들 덕에 시청률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그러다 2002년 6월, '''서세원쇼의 명줄을 끊어 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3.2. 김남일 선수 부모님 조롱 논란


2002년 6월 25일 방송분에서는 한창 월드컵에서 활약하던 김남일, 송종국 두 선수의 부모님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이때 서세원이 김남일의 학창시절을 공개적으로 디스[11]하거나 같이 출연한 김남일의 부모님을 싸잡아 조롱하는 내용이 방송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게 되었다.[12] 당시 방송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13]
당시 실시간으로 보던 시청자들이라서 서세원쇼가 예전부터 문제가 상당히 많았던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들이 절대로 아니었다. 서세원쇼 특유의 폐단인 출연자 과거사에 대한 폭로와 "너 같은 과거를 가진 놈이 나올 수 있는 것도 나 서세원이 대인배라 가능한 거다"란 식의 깔보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의 기적같은 4강 진출에 공헌한 월드컵 영웅[14]의 과거를 모욕적으로 다루는, 심지어 선수 본인을 초청한 것도 아니고 선수의 부모님을 초청해서 부모님까지 건드린데다 면전에서 자식을 웃음거리로 만든 행위는 당시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시청자들은 "월드컵 영웅도 서세원쇼에서는 오만 트집을 잡히고 모욕을 당하는구나!"라고 분노를 느꼈고, 이로 인하여 지난 6년간 참았던 시청자들의 분노가 끝끝내 폭발하게 된 것이다.
김남일의 부모를 조롱한 일에 대해 서세원은 여론이 월드컵 대표팀이라 특별 취급한다는 투의 언론플레이로 무마하려고 했지만, 방송이 나간 25일은 하필 월드컵 4강전에서 독일에게 1:0으로 패한 날김남일이 그 때문에 오열하는 장면까지 크게 잡힌지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일주일 만에 서세원은 공식 사과 발표를 서세원쇼에서 한 다음 가만히 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정신을 못 차리고 바로 다음 주 방영분에서도 게스트의 과거사 폭로와 갑질을 이어서 했다'''. 무소불위였던 본인의 연예 권력을 믿고 말로만 사과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꼴이 이러니 해당 방송분으로 인해 종영 서명운동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결국 위와 같은 사태에는 누구보다도 '''서세원 본인의 책임이 컸다'''.

3.3. 궁지에 몰린 서세원과 프로그램 종영


한편 김남일 선수 건으로 물의를 빚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2002년 7월 19일에는 서세원의 후원 및 제작[15]으로 만들어진 영화 긴급조치 19호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2020년 지금까지도 망한 한국 영화를 거론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괴작 중 하나가 되었으며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도 완전히 참패했다.[16]
긴급조치 19호는 '서세원쇼의 극장판'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영화의 짜임새가 형편없다는 것뿐 아니라 게스트로 촬영한 엄청난 숫자의 연예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숫자만도 수십 명을 넘는 연예인들이 스크린 앞에서 자신의 흑역사를 가지고 개그를 하는 장면들은 당시 서세원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 준다.
세세한 장면들에 대해서는 긴급조치 19호 문서 참조. 서세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제작에 참여했어도 이런 일견 굴욕적일 수 있는 촬영에 응했을지는 의문으로, 이 영화의 촬영 과정에서도 서세원쇼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거나 그보다도 훨씬 심하다고 짐작할 만한 갑질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낮지 않다. 이 점에서도 진정한 서세원쇼의 극장판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영화가 망한 것 외에도 서세원이 이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 홍보비 명목으로 '''방송사 간부들에게 뇌물 공세'''를 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서세원은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사과문이 나간 후에는 그동안 나이와 기수에 눌렸던 게스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쇼의 만행에 대해 라디오나 타 프로그램에서 실언을 빙자해 폭로했으며 당시 문화연대 측이 밝힌 주장으로는 토크쇼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빈곤한 정체성을 대변, 원치 않는 개인기를 강요해서 출연자를 희화화, 사회자 서세원의 도 넘은 인신공격, 다른 연예산업의 홍보 창구 역할, 잘못된 연예권력 양산 등 5가지였다. 이로 인해 당시 VOD 홈페이지에서 문제의 대사들을 무음 처리했다.
또한 홍보를 위해 굽어주던 음반사나 기획사들도 크게 성장하는 회사들이 많아지자 굳이 숙여야 할 필요성이 사라진 상황을 이제야 이해한 것인지 출연 예정 게스트들의 일정이 변경되었다며 보이콧하는[17] 사례가 많아지면서 총체적 난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서세원쇼는 누적된 시대적 변화가 서세원 본인의 문제와 맞물려 극적으로 나타난 끝에 몰락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서세원쇼는 2002년 8월 6일 종영이 확실시되었고, 2주 후 완전히 막을 내렸다. 더 이상 논란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매우 급하게 종영된 것인데, 검찰이 서세원을 상대로 비리 수사를 착수하자 일찌감치 국외로 잠적하느라 펑크가 난 끝에 종영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신빙성이 있다. 8월 12일에는 마카오에서 도박판을 벌였다는 소식이 있었고 이 때문에 안 그래도 곤두박질친 서세원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시궁창에 빠졌으며, 아내인 서정희와의 인터뷰 기사에서도 서세원이 수사를 피하여 국외로 사실상 야반도주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듬해에 서세원은 인터폴에 수배되기도 했다.[18]
정리하면 서세원쇼의 종영은 몰릴 대로 몰린 서세원이 일신의 안녕을 위해 프로그램이고 뭐고 팽개치고 국외로 도주하면서 더욱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때 서세원의 네임밸류를 앞세워 게스트에게 벌인 갑질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토크쇼는, 도를 넘은 행각과 진행자 서세원의 범죄가 겹치면서 추한 몰골로 급작스럽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굳이 서세원의 국외 도주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더 이상 참다 못한 대중들이 등을 돌린 상태라서 프로그램 유지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프로그램의 종영으로 방송에선 출연한 유명인을 희화화하거나 과거사 폭로, 갑질을 하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되었으며 당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과 제작진들은 이 사건 이후로 서세원쇼에 대한 언급을 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4. 후폭풍


<서세원쇼>가 좋지 않게 끝난 뒤 KBS 2TV의 화요일 오후 11시대는 상상플러스 이전까지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으며 <서세원쇼> 종영 후 한동안 파일럿-특집 프로그램으로 꾸며오다가 2002년 10월 29일 시작한 <김용만 박수홍의 특별한 선물>로 정규 프로그램이 편성됐는데 이 프로그램은 두 MC(김용만 박수홍)의 소속사였던 매니지먼트 업체 (주)감자골에서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됐고 시청자들의 사연으로 꾸며졌으나 진부한 화면 일색, 가학적 벌칙, 자사 드라마 장희빈 홍보 등으로 물의를 샀으며 결국 22회(2003년 4월 1일) 만에 단명했다.[19]
아울러, <김용만 박수홍의 특별한 선물> 후속 프로그램인 <논쟁 버라이어티 당신의 결정>은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을 토론을 통해 함께 고민해보겠다.’는 기획의도로 출발했으나 '연예인 떼거지 출연’이란 전형적인 오락적 틀로 고민을 희화화시켰다는 혹평을 받았고 결국 11회(2003년 6월 17일) 만에 조기종영되는 수모를 당했다.[20] 이렇게 되자 KBS는 일요일 오후 10시에 방영되어 온 단막극 드라마시티를 2003년 6월 24일부터 이동 편성했지만 "화요일 밤 시간에 드라마를 2편 이상 방송하는 건 무리다"라는 지적을 받아오자 그 해 11월 9일부터 일요일 오전 9시 40분으로 변경됐고[21] 이 프로그램 자리에는 <대한민국 1교시>[22]가 신설되었는데, 이는 <논쟁 버라이어티 당신의 결정>의 조기종영 이후 5개월 만에 KBS 2TV의 화요일 심야 예능-오락 프로그램이 부활된 셈.
그 <대한민국 1교시>는 <서세원쇼> 이후 이어진 화요일 심야 시간대 징크스에서 이제야 본격적으로 벗어날 것으로 기대를 모았고, 예상대로 첫 회부터는 잘 나가며 출발은 좋았으나, '세계의 1교시' 코너에서 중국어는 물론, 기본 영어도 못하는 연예인을 보내는 바람에 세계 각국의 교육 현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는 기획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했으며, 급기야 2004년 5월 4일 시작한 SBS <김용만 신동엽의 즐겨찾기> 때문에 시청률이 갈수록 떨어지자[23] 상상플러스에게 자리를 내주고 2004년 11월 6일부터 토요일 오후 5시 50분으로 이동했지만, 옮기고 나서도 시청률 부진은 여전했고, 결국 다음 해 봄 개편으로 막을 내렸다.[24]

5. 기타


문희준이 안티팬들의 공세에 시달리던 시기에 유명했던 처키 흉내 짤방이 이 프로그램에서 나왔다.

5.1. 후속 프로그램 진행자들의 불미스러운 일


<서세원쇼> 이후 화요일 심야 시간에 방영된 예능-오락 프로그램들의 MC들은 그 뒤 대거 불미스러운 일들을 겪었는데, 그것을 일명 "'서세원쇼'의 저주"라 했으며, 그 대표적인 진행자들은 다음과 같다.
  • 김용만('김용만 박수홍의 특별한 선물'): 불법도박 사건으로 인해 KBS에서 한동안 출연이 금지되었다가 2016년 8월 4일, 해제됐다. 1개월 후에 출연료 미지급 소송에서 패소하는 일을 겪었지만, 그 뒤에는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
  • 이휘재('논쟁 버라이어티 당신의 결정', '상상플러스'): 2006년, <상상플러스> 방송 중 함께 출연 중이었던 정형돈에게 '손가락 욕'을 건내는 장면이 포착되어 당시 시청자 게시판에 비난의 글들이 쏟아졌다. 그 뒤엔 여러 논란과 구설수가 겹쳐 이전보다도 활동이 뜸해졌지만, 이후에는 피드백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판이 나아졌다.
  • 유재석('논쟁 버라이어티 당신의 결정'): 신동엽이 만든 회사이자 본인이 속해 있었던 소속사와 방송 3사끼리 출연료 지급 소송을 벌였다. DY 엔터테인먼트 사건 참조.
  • 이훈('대한민국 1교시'): 헬스클럽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가 큰 실패를 맛봤다.[25]
  • 탁재훈('상상플러스', '김승우의 승승장구', '달빛프린스'): 김용만이 그랬던 것처럼 2013년 연예인 불법도박 사건에 연루되어 퇴출당했으며, 2016년, 연예계에 복귀한 뒤에도 KBS 출연금지는 풀리지 않았다가 2018년 해금됐지만, 복귀 프로그램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도 평판이 나빠서 활동이 뜸한 편이다.
  • 신정환('상상플러스'): 상습 불법 도박 때문에 KBS와 MBC 출연이 금지됐으며 그 이후에는 SBS에서도 출연금지 명단에 올랐다. 그 이후에는 '아는 형님'에 게스트로 제외하면 사실상 연예계 활동이 뜸한 편이다.[26]
  • 이수근('상상플러스', '승승장구', '우리동네 예체능', '하숙집 딸들'): 불법도박 때문에 KBS 출연이 금지되었다가 2016년 3월 4일에 해제됐지만, 출연 프로그램들의 열에 아홉은 예전(불법도박 걸리기 전)보다는 오래 못가고 금방 종영되었으며, 과거의 일 때문에 평판이 갈리는 편이다.[27]

[1] 초기엔 '서세원의 화요스페셜'이라는 토크쇼의 2부 파트로 나오다 1998년 2월 16일, 독립코너로 편성되었다.[2] 최종회가 HD란 설이 있으나 당시 KBS는 예능 프로그램에 HD 장비를 도입하지 않았다.[3] 사실 이 때만 유행했던 건 아니고, 이미1960년대부터 존재했던 꽤나 뿌리깊은 악습이다. 부산에서 일본 TV 방송이 잡혔기 때문에 검열과 시간에 쫓기거나 귀차니즘에 찌든 방송사 PD들이 프로그램 개편철이 될 때마다 부산으로 가서 일본 TV 프로그램을 베낀 게 시초로 한창 표절이 심했을 때는 단순히 포맷을 베끼는 수준을 넘어 내용도 베끼는 경우도 많았으며, 1990년대 들어서도 크게 변하지는 않아서 이때까지도 포맷을 베끼는 것이 관례화되었을 지경이었다. 물론 표절인 것이 드러나면 언론이나 여론으로부터 까이는 것이 다반사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베른 협약 및 국제저작권협약 미가입국이라 외국저작물은 법적으로 보호를 못 받았으며 초고속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부산에 살고 있지 않은 이상은 표절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표절이 횡행했다. 대한민국이 베른 협약에 가입한 건 1996년의 일이다. 사실 서세원의 코미디 스타일조차 아카시야 산마가 구사하던 오와라이 스타일의 마이너 카피라는 지적이 있었다.[4] 후지TV의 프로그램으로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5년 전인 1991년부터 2016년까지 방영되었다.[5] 서세원은 1980년대 애드립 상황극과 깐죽 개그를 독식하다시피한 최양락의 대항마로 기용될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데 능했고 순간순간 내는 애드립 개그에 능했다.[6] 뭔가 만들거나 요리를 해야 하는데 이 경우 진행자의 기본 능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베껴와도 진행을 할 방법이 없는 것이 태반이다.[7] 97년 5월 27일 방송분에서는 같은 달 20일부터 화요일 밤 11시로 이동한 동시간대 SBS 코미디 전망대 공동 MC로 투입된 개그우먼 조혜련을 2부 게스트로 출연시켜 따끔한 눈초리를 샀고(조혜련은 '코미디 전망대'로 SBS 진출을 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조혜련을 공동 MC로 투입시키는 과정에서 95년 봄개편부터 전년도 가을개편 전까지의 상황(3인 체제)으로 되돌아갔다) 결국 코미디 전망대는 시간대를 변경한 지 1달 만에 부분개편(6월 24일)으로 간판이 내려졌으며 이런 충격 탓인지 SBS는 2000년 10월 가을 개편 이전까지 한동안 화요일 심야 시간에 예능-오락 프로그램을 편성하지 않았다.[8] 일대일 토크 외에 일대 다수 토크가 진행되는 빈도도 많았다.[9]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서 유재석은 이 시기 김건모는 헬기를 타고 다니고, 리허설 없이 바로 생방송에 투입되는 등 격이 다른 대접을 받았다고 말했다.[10] '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 같은 옴부즈맨 프로그램 그리고 전화, 우편, PC통신. 참고로 지상파 3사 옴부즈맨 프로그램은 1993년에 첫 방송되었다.[11] 김남일은 고등학생 시절 반년간 방황하며 가출한 적이 있었던 과거사가 있었는데 서세원이 이 점을 악용했다.[12] 날짜를 잘 보자. '''2002년'''이다. 어느 정도였냐면,당시 김남일의 사인 1장은 잘 나가는 연예인 사인 10장과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2018년~2020년까지 대구 FC 감독을 맡았었던 안드레안양 LG에 뛰던 시절 김남일에게 박치기를 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13] 실제로 대본 내용이 저렇게 되어 있으며 중간에 김남일 선수의 부친이 서세원의 언행에 대해 불쾌해 하는 내용도 여럿 있었다. 이는 명백한 인격모독 행위로 절대로 방송에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다.[14] 김남일은 2002년 월드컵 대표팀으로 당시 한국팀 중요 전술인 3-4-3 포메이션의 미드필더로 적극적으로 활동해 큰 인기를 얻었다.[15] 감독은 김태규. 이전에도 서세원은 영화판에 기웃거린 적이 있었는데, 그 전 해 개봉한 2001년의 조폭 마누라 역시 서세원이 제작했으며 세간의 예상을 깨고 상업적으로 선전한 바 있다. 참고로 감독인 김태규는 2015년에 사망했다.[16] 김성오가 이 영화로 데뷔했다.[17] 서세원쇼에 나오라고 하면 타 프로그램 나갈 것도 빼 버린다고 윽박질렀단 썰도 있다.[18] 이 때 이수만도 횡령 혐의 등으로 함께 수배되었다. 그 뒤 이수만은 2007년에 풀려났다.[19] 김용만은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친정인 KBS 복귀를 했으며 박수홍은 2001년 가을개편 때 신설되었으나 다음 해 봄 개편 때 종영된 파워쇼 한중일 삼국지에 이어 본인이 KBS에서 진행한 신설 프로그램의 두 번째 조기종영 굴욕을 맛봐야 했다.[20] 공동 진행자였던 유재석은 '대한민국 1교시' 남자 진행자로 한때 물망에 올랐지만 고사했으며 난항 끝에 남자 MC는 이훈으로 낙점됐다.[21] 그 이후 시간대는 자주 변경됐다.[22] SBS '헤이 헤이 헤이' 종영과 함께 옮겨 온 김원희가 메인 MC였다.[23] 메인 MC였던 김용만은 '대한민국 1교시' 남자 진행자 물망에 한때 거론됐다.[24] '대한민국 1교시'의 시간대 이동에 따라 성장드라마 '반올림'은 2004년 11월 7일부터 일요일 오전 8시로 변경되었는데(2005년 2월 27일 끝) 시즌 2는 2005년 3월 6일 첫 방영되었으며 그 해 11월 6일부터 오전 8시 50분으로 변경되었고(2006년 2월 26일 마지막) 시즌 3는 시즌 2 후반부 때 그랬던 것처럼 일요일 오전 8시 50분에 방송됐다.[25] '대한민국 1교시'에는 이훈에 앞서 김용만, 유재석, 남희석, 이휘재, 박수홍, 강호동 등이 남자 MC 물망에 올랐다.[26] 그나마 나온 그 프로그램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렸다.[27] 그래도 지금은 별다른 구설수를 일으키지 않아서 평은 나아진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