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원회/역대 총재

 




1. 초대~2대: 서종철
2. 3대~4대: 이웅희
3. 5대: 이상훈
4. 6대: 오명
5. 7대: 권영해
6. 8대: 김기춘
7. 9대~10대: 홍재형
8. 11대: 정대철
9. 총재 대행, 12대~14대: 박용오
10. 15대~16대: 신상우
11. 17대~18대: 유영구
12. 18대 직무대행: 이용일
13. 19대~21대: 구본능
14. 22대 : 정운찬
15. 23대 : 정지택

기사나 자료별로 재임기간등이 조금식 다르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있어서 오류가 있을수 있습니다.

1. 초대~2대: 서종철


'''초대, 2대'''
[image]
재임기간
(2299일)
1981년 12월 11일 ~ 1985년 4월 1일
1985년 4월 1일 ~ 1988년 3월 27일
박정희 정권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거물인사로, 집권 세력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에 프로야구가 정치권 입김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게 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육사시절 교관(=담임)이었고, 군 시절 하나회 후원자 역할을 했었으며, 서종철이 육군참모총장이던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의 부관을 지낸 경력도 있던 인물.[1] '''한마디로 군사독재 정권 시절 대한민국 대통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막강 KBO총재'''. 사실 프로야구 초기에 적극적인(=반강제적인) 대기업의 참여와 기타 정부 지원 등이 서 총재가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이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 정부에 신청한 야구장 조명탑설치, 보수공사 예산이 거부당하자 노태우 정부 당시 체육부 장관에게 전화 한 통으로 바로 해결한 사례도 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샵(S#arp) 멤버 출신 서지영의 할아버지 정도로만 기억되지만... 2010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2. 3대~4대: 이웅희


'''3대, 4대'''
[image]
재임기간
(1634일)
1988년 4월 1일 ~ 1991년 3월 31일
1991년 4월 1일 ~ 1992년 5월 26일
경향신문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제5공화국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청와대 대변인, 문화방송 사장[2],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냈다. 용인시 지역구 국회의원(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3선(13대~15대)까지 지냈으며,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정계에서 자진 은퇴했다.
MBC 청룡 매각 문제를 해결하고[3] 전라북도 연고의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1991년)으로 8개 구단 시대를 연 총재이기도 하다.
2014년 별세했다.

3. 5대: 이상훈


'''5대'''
[image]
재임기간
(409일)
1992년 5월 27일 ~ 1993년 7월 9일
국방부장관, 재향군인회 회장. 율곡사업 비리의혹으로 사임했다. 이후 구속.

4. 6대: 오명


'''6대'''
[image]
재임기간
(25일)
1993년 11월 26일 ~ 1993년 12월 21일
역대 KBO 총재 중 최단기간 재임자.
새로 출범한 문민정부(김영삼 정부)는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지난 정권과 달리 낙하산 총재를 따로 보내지 않았고 그 덕분에 야구계가 정치권의 간섭없이 삼고초려 끝에 스스로 영입한 인물. 야구에는 완전 문외한이었으나, 조직위원장으로 1993 대전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행정능력을 보고 데려왔다.
그러나 취임한지 한달이 채 되지 않아 교통부 장관으로 영전하면서 떠나게 되었다.
교통부 장관 이후에는 동아일보 사장 및 회장, 아주대학교, 건국대학교 총장,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철도기술연구원장으로 기여를 하면서 철도기술연구원 공연장이 아예 오명홀이란 이름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5. 7대: 권영해


'''7대'''
[image]
재임기간
(277일)
1994년 3월 21일 ~ 1994년 12월 23일
국방부장관. 1994년 말에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에 발탁되면서 총재 자리를 사임했다.
이후 총풍 사건[4] 때 조사 중 자해를 시도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나중에 북풍 3인방이 북한 인사와 접촉 사실을 알고도 수사 지시를 내리지 않은 혐의[5]로 기소가 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6. 8대: 김기춘


'''8대'''
[image]
재임기간
(485일)
1995년 2월 9일 ~ 1996년 6월 8일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3선 국회의원(15대~17대). 前 박근혜 정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
법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2년후인 1994년, 국가안전기획부로 부터 KBO 총재직을 제안 받았고 이를 수락하며 제8대 KBO 총재직에 올랐다. 다만 KBO 정관에는 "구단주들이 협의해 총재를 선정한다."라고 나와 있기에 이런 식의 추대는 정관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총재직에 오른 후 "야구 얘기를 하고 사니까 도청당할 일도없어 평안하다." 같은 속 편한 소리나 하다가 불과 1년만인 1996년에 자진 사임했다. 당시 기사.당시 기사2
낙하산 인사 싫다고 야구계가 외치는데도 총재로 오더니 다른 이유도 아닌 의정활동에 전념하겠다고 1년 반만에 무책임하게 떠나버려서 이임 이후에도 비난을 받았다. 정작 본인은 총재 시절이 가장 재밌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KBO 총재시절 연을 맺은 양해영 사무총장과도 관계가 있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기춘을 보호하라

7. 9대~10대: 홍재형


'''9대, 10대'''
[image]
재임기간
(671일)
1996년 7월 4일 ~ 1997년 3월 31일
1997년 4월 1일 ~ 1998년 5월 6일
前 재정경제원[6] 장관, 3선 국회의원(16대~18대).
재임기간에 외국인 선수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앞 총재들과 달리 경제통이고 야구를 좋아해서인지 취임 때부터 향후 포부를 막힘없이 설명했다고 하는데, 첫 임기는 잘마쳤지만 두 번째 임기에는 취임 직후인 1998년 5월 6일 자진 사임. 이유는 비리와 관련되어 조사를 받게 되자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사임이유에 대해서는 홍재형 총재측에서 반박했다. 홍재형 KBO 前 총재 사임과 관련한 반론보도문
이 후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당선된 뒤 3선 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고, 진보 성향 낙선운동 단체가 검찰 수사에 대해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검찰에서 무혐의 내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8. 11대: 정대철


'''11대'''
[image]
재임기간
(100일)
1998년 5월 27일 ~ 1998년 9월 3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이번에는 집권 여당의 중진이었던 5선 의원 정대철이 KBO 총재로 취임했다. 하지만 취임한지 100일만에 경성 게이트[7]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KBO를 또 괴롭게 만들었다.

9. 총재 대행, 12대~14대: 박용오


'''12대, 13대, 14대'''
[image]
재임기간
(2611일)
1998년 9월 23일 ~ 1998년 11월 27일
1998년 12월 8일 ~ 2000년 3월 31일
2000년 4월 1일 ~ 2003년 3월 31일
2003년 4월 1일 ~ 2005년 11월 25일
'''역대 KBO 총재 중 최장기간 재임자.'''
두산그룹, 성지그룹 회장. 1998년 11대 정대철 총재가 비리혐의로 구속당하면서 사임하자 9월 23일 총재 대행으로 취임을 했으나 2달 만에 총재 대행에서 사퇴하였다.[8] 그 이유는 당시 정부에서 구단주가 총재가 되는것은 정관에 위배 된다며 압력을 넣었기 때문. 그러나 사퇴한 지 일주일 후인 12월 8일 정식으로 12대 총재로 취임한다. 구단주끼리 돌아가면서 KBO총재를 하기로 합의하였는데 그 첫번째 인물.[9] 역대 총재에서 박용오가 가장 낫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많다. 이 시기에 미필 프로야구 선수들의 국군체육부대 입대가 허용되면서 병역비리 비율을 낮췄고, 해체 위기에 몰린 쌍방울 레이더스해태 타이거즈의 매각 문제를 잘 처리해 8개 구단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
하지만 재임 3년 차인 2000년 초,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결성되자 방송 인터뷰에서 선수협을 비판하면서 "프로야구 따위 없애버린다."고 대놓고 망언을 한 탓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국내 최초 돔구장 부지가 두산타워 인근인 구 동대문운동장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주장했다가 축구계의 어그로를 끈 바도 있다.
2005년 11월 25일 일신상의 이유로 총재직을 사퇴한다고 했으나, 실은 두산그룹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동생들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역관광당하면서 7월 27일에 출국금지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고 검찰의 수사망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 뒤 회삿돈 297억 여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29억원을 횡령한 혐의[10] 등으로 불구속 기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80억원을 선고 받았다. 나중에 대법원까지 끌고 갔지만 결과는 1~3심 모두 같았다. 그 후 성지건설을 인수하여 재기를 노렸지만 대침체로 인해 사운을 건 용산 재개발 사업이 베이퍼웨어화되면서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렸고, 설상가상으로 차남 박중원(당시 성지건설 부사장)이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된 뒤 2009년 7월의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자 많은 스트레스를 받다가 2009년 자택에서 자살했다. 향년 72세.

10. 15대~16대: 신상우


'''15대, 16대'''
[image]
재임기간
(1072일)
2006년 1월 10일 ~ 2006년 3월 31일
2006년 4월 1일 ~ 2008년 12월 16일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업고등학교 선배이자 노무현 후원회장을 역임하는 등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치인 신상우가 박용오에 이어서 총재가 되었다.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결국 비리 혐의에 연루되어 불명예 퇴진했다.
정권에 의한 낙하산 인사였고 야구계의 의지와 무관하게 선임되었기 때문에 특이하게도 대행이라는 딱지를 3달간 붙이고 활동했고, 석 달 후에야 정식 총재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인들과의 연줄 덕에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4강 진출후, 쉽게 선수들의 병역 혜택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유니콘스 해체와 매각 과정, 그리고 히어로즈의 출범 과정에서의 잡음 및 원할하지 못한 처리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재임기간 중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는 와중에 농협, STX, KT 등 몇몇 대기업이 유니콘스의 인수를 시도했지만 KBO가 너무 자기 이익만 고집하다가 결국 모두 파토나고 말았다. 그렇게 KBO가 7개 구단으로 돌아갈 위협에 처하자 급박해진 신상우 총재는 갑자기 나타난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라는 정체불명의 투자 및 M&A 회사가 나타나자 이전 대기업들에게 제시했던 조건보다 훨씬 완화된 조건을 제시하며 이장석에게 급히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히어로즈 구단이 새롭게 탄생하며 8개 구단 체제가 유지되었다. 신상우는 8개 구단 유지를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지만 사실은 농협, STX, KT 등 훨씬 좋은 조건을 내세웠던 대기업들의 제안을 호기롭게 내치다가 결국 센테니얼이라는 개인회사에게 부탁하다시피 현대를 인수시켰고 이는 향후 KBO에 여러 파행을 불러오게 된 원흉이 되었다.[11]
2008년 12월 15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기소된 조영주 전 KTF 사장이 "신상우 KBO 총재에게 법인카드를 줬다"고 진술한 내용이 드러나자, 다음날 사퇴 의사를 표명하고 불명예 퇴진했다.

11. 17대~18대: 유영구


'''17대, 18대'''
[image]
재임기간
(798일)
2009년 2월 24일 ~ 2009년 3월 31일
2009년 4월 1일 ~ 2011년 5월 2일
명지학원 이사장. 취임 당시부터 이미 부정부패, 횡령 등 각종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 중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수협 뿐만 아니라 각종 야구계에서 논란이 일었다. 다만 유영구를 선임한 것도 야구계 내부 사정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이 대통령의 측근인 신상우을 낙하산으로 총재로 앉힌 것처럼, 이명박 정부 역시 출범직후 논공행상의 일환으로 KBO 총재 자리에 친이계 정치인을 낙하산 투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전임 신상우 총재가 비리 혐의로 자진 사퇴하자, 야구인들이 또다시 낙하산으로 총재가 임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논란을 알면서도 기습적으로 유영구를 총재로 선임했다는 것. 하지만 유영구는 비리 혐의자였고, 결국 야구인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범법 혐의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총재로 선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인사설도 실체가 없는 것이 사실 마음만 먹었으면 신상우가 물러나고 유영구가 후임으로 취임할 때까지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에 충분히 낙하산을 앉히고도 남았다.
낙하산이었던 전임 신상우와 달리 유영구는 야구인들이 직접 선임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상우처럼 대행 딱지가 붙지도 않았다. 유영구는 17대 총재로써 잔여임기 1달을 채운 후 곧바로 18대 총재로 연임되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 내내 비리 논란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유영구 본인도 야구계에 잔뼈가 굵은 인물은 아니었기에 사실상 이용일을 비롯한 야구계 원로들이 측근인 그를 총재로 앉혀 사실상 얼굴 마담 역할을 시키고 뒷방에서 그들이 사실상 좌지우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유영구는 비리 수사를 받느라 야구판에는 신경 쓸 여력도 별로 없었다. 2010년 10월 21일에는 출금금지 조치를 당했다.
결국 범정 구속되기 하루 전인 2011년 5월 2일, KBO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자신의 후임으로는 이용일을 선임하도록 미리 내정해 두었다. 다음날인 5월 3일 검찰에 구속되었고, 다음날인 5월 4일 사직서가 수리되었다. #
재임 기간 중 업적으로는 서울대학교에 베이스볼 아카데미[12][13]를 설립한 것이 있다.

12. 18대 직무대행: 이용일


'''18대 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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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97일)
2011년 5월 17일 ~ 2011년 8월 21일
초대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야구계의 거물급 원로 인사였다. 비록 본인은 총재 자리에 오를 만한 부와 권력에 오르지 못했기에 총재가 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대신 측근인 유영구 명지재단 이사장을 KBO 총재에 앉힐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야구계의 실세 중 한명이었다. 그런데 유영구가 논란 끝에 결국 비리로 구속되어 사퇴하자 긴급사태라는 명분으로 본인이 직접 총재 직무대행 자리에 앉게 되었다. 결국 그나물의 그밥. 그나마 신상우 이전 총재들처럼 정치권 낙하산 인사가 아닌 야구계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인 점.
인물에 대한 내용은 이용일../역대 사무총장 문서 참조.

13. 19대~21대: 구본능


'''19대, 20대, 2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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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이용일 총재 직무대행이 신임 구본능 총재의 취임식을 축하하고 있다.
재임기간
(2321일)
2011년 8월 22일 ~ 2011년 12월 31일
2012년 1월 1일 ~ 2014년 12월 31일
2015년 1월 1일 ~ 2017년 12월 31일
범 LG가 인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이자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으로 범 LG가 방계 그룹인 희성그룹의 회장이다. 이용일 직무대행 체제를 오래 유지할수 없었고 정부 낙하산 인사를 피하기 위해 전문경영인이자 학창시절 야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14] 구본능 회장을 추대했다.
기업인 답게 KBO 리그 수익을 대폭 확충하고 KBO 리그 흥행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총재로 10개 구단 체제[15] 확립과 중계권 500억 시대를 열어 제쳤고 아마추어 야구 발전에도 전폭적인 투자를 통해 야구 발전을 도모하는 등의 업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억대연봉을 받을수 있었음에도 무급으로 일한 것도 화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KBO의 버드 셀릭이라는 평가내리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2016년까지 두 차례의 승부조작이 발생했음에도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 총재란 비판을 받았으며 2017년에 터진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KBO-페럼 유착 사태가 불거졌을 때에는 '''아예 존재감이 사라졌다'''. 국정감사에서도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임기가 끝나면 연임하지 않고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국감 출석한 구본능 KBO 총재 "깨끗이 물러나겠다"

14. 22대 : 정운찬


'''2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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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일)
2018년 1월 1일 ~ 2020년 12월 31일
경제학자로서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인물이자 전직 국무총리. 학자 이미지하고 국무총리 재직 시절 이미지로 인해서 야구랑 어울리지 않을것 같은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야구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야구를 굉장히 좋아하는 유명 인사다. 고등학교 시절 야구부에서 활동했었던 적도 있었고, 젊은 시절에는 메이저리그 경기도 즐겨본 것으로 알려져있다. 야구에 관한 책도 써낸 적이 있었고, 또한 심지어 2013년 준플레이오프 관전 평가기사를 쓴적도 있었다. 다만 그가 두산 베어스의 오랜 팬임을 예전부터 대놓고 홍보해왔기 때문에(...) 취임 초기 커미셔너로서의 공정성을 지킬 수 있겠느냐는 우려 있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최종 엔트리 논란이 불거졌을 때 어떠한 언급도 없이 방관했고 그것이 곧 나비효과로 이어져 첫 경기에서 대만에게 지는 자카르타 참사를 겪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금메달을 취득했지만 대회에서 보여준 결과들이 병역특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부추기면서 재검토로 이어지는 악영향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병역특혜의 재검토로 이어지게 만든 발단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국정감사로 이어졌는데 당시 손혜원 의원이 선동열 감독을 불러 무리수를 두는 비난을 쏟아질때 정운찬 총재 본인은 선동열 감독을 지키기는 커녕 오히려 비난하면서 자신만 보호하기 급급한 모습을 보여줘 여론의 지탄을 받았고 결국 그것이 선동열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직을 사퇴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책임한 언행으로 인해 일부 언론에서는 총재 사퇴를 거론하고 있다.

결국 2020년 10월 13일 정운찬 총재 연임 포기 기사가 올라오면서 kbo총재를 물러나게 되었다. 여담으로 후임으로 정지택 전 두산 구단주가 추천되고 있다고 한다.

15. 23대 : 정지택


'''23대'''

재임기간
(일)
2021년 1월 1일 ~

[1] 평생 전두환, 노태우의 후원자이기도 했다.[2] 이 때 전두환 대통령에게 땡전뉴스의 중단을 건의하여서 일시 중단되었으나 나중에 부활되었다.[3] 전직 MBC 사장이자 MBC 청룡 2대 구단주 출신이었기에 매각 작업 개입에 용이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MBC 청룡 문서에도 잘 나와 있지만 MBC의 청룡 구단 운영은 상당히 후진적이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성적마저도 좋지 않아 야구단 운영에 대한 회의감이 커졌다. 결국 1989년 매각 작업이 추진됐고 럭키금성그룹이 청룡 구단을 인수하게 된다.[4] 1997년 대선 직전 휴전선에서 무력 시위를 해달라고 북측에 요청한 사건.[5] 국가보안법 위반.[6] 1994년 재무부와 통합되며 기획재정부가 되었다.[7] 대전의 건설업체 경성이 대전 지역 민영방송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유력 국회의원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사건.[8] 과거에는 총재 대행이 없이 모두 정식 총재였지만 이번에는 총재 대행이었기 때문에 12대 총재가 아니었다. [9] 다만 다른 재벌들이 부담을 느꼈는지 계속 고사하면서 3번 연임하다가 이후에는 다시 정치인이 왔다.[10]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횡령.[11] 그러나 농협은 금산분리 때문에 어차피 프로야구단 직접 운영이 불가능했고 STX는 외형 확대를 계속하다가 무너졌기에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이 둘이 빠진 것은 다행이었다. KT야 나중에 프로야구에 들어오게 되고.[12] 지도자 양성 학교. 영어, 야구심리학, 야구사회학, 스포츠생리학등을 가르치며 시험을 통해 이수를 완료한 인원에게 지도자 라이선스를 지급한다. 축구계의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발급해주는 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13] 다만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베이스볼 아카데미 자격증을 인정하지 않으며, 정부 공식 지도자 자격증을 발급 받아야 아마추어 야구지도자가 될수 있다고 공문을 보내며 다시금 논란이 되었다. 기존 30만원 이상 돈을 지불하고 자격증을 딴 사람들이 붕 떠버렸기 때문.[14] 경남중학교 재학 시절까지 야구선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 구자경이 반대해서 선수 생활을 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구본능 총재가 재임하던 임기 중에 창원시 연고의 NC 다이노스수원시 연고의 kt 위즈가 창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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