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대결전
1. 개요
Decisive Battle
함대결전은 '''결정적 전투'''를 통해 해군의 목표인 제해권 통제를 영구적으로 달성하는 해군력의 운용 방안, 혹은 그것을 중시하는 해군 교리이다.
제해권 통제의 제 1 방해 요소는 매우 당연하게도 현존하는 적의 함대이다. 적의 함대가 없으면 제해권을 방해 받을 일도 당연히 없다. 함대결전은 적의 함대를 직접적으로 격파해 전쟁에서 제거하여 영구적인 제해권 확보를 하자는 매우 간단한 발상이다.
싸움배라는 물건은 (배라는 물건이 다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비싸며, 건조 자체에 소모되는 시간도 엄청나고 이 시간은 돈으로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군 자산 중에서 '''가장 비싼''' 자산에 속한다. 한번 함대가 박살나면 그것을 복구하는 것은 해당 전쟁 중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다음 전쟁에서도 불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러한 골때리는 군 자산이 활약하는 해전의 환경은 넓디 넓은 바다[1] , 사람이 마음대로 다닐 수 없고 하늘로 날아가는 게 아닌 이상 배라는 물건에서 타서 둥둥 떠 다녀야하는 심히 골치아픈 환경이다. 이런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들은 기존적으로 육상이나 공중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이는대, 이 느리게 움직인다는게 생각보다 느린건 아니라는 모순이 있다. 즉, 바다에서의 기동은 육상이나 공중에서의 기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육상과 공중과 달리 개개의 자산이 곧 엄청난 가치를 가진 하나의 군사 설비이며 이 설비 자체가 움직이며 싸우는 싸움이 곧 해전이다. (물론 물 속으로 다니는 싸움배도 있지만 어쨌든 이것도 물에서 다니기는 마찮가지.)
결국 바다에서의 싸움은 리스크가 다른 전장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싸움이며, 이런 위험을 가지고 제해권이라는 중대한 전쟁 이점을 쟁취해야 하는 해군은 매 전투 한번에 전쟁의 진행 양상을 뒤바꿀 수 있다는 엄청난 부담을 진다. 즉, 해전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전투'''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해군력 운용에 있어 "함대결전"은 가뜩이나 고위험인 해전의 위험이란 위험을 응축시킨 결정체이지만, 언젠가는 결전이 날 수 밖에 없고, 이에 승리한 측은 영구적인 제해권 확보를 보장 받을 수 있다. 함선의 손실 위험도 어마어마하지만, 제해권 승부를 결정짓지 못하면서 심해로 가라앉는 어마어마한 비용은 국가를 결딴내고도 남으며, 함대 자체가 소모하는 비용과 별개로 적의 함대가 아측의 해운을 공격하여 제해권 통제의 결과물을 쟁취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전장 환경을 바다가 아닌 육지(!) 따위로 옮기는 기지 타격을 당해 그 귀한 함대를 날려먹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함대결전을 바라는 순간은 찾아올 수 밖에 없으며, 함대결전을 아무리 피하더라도 결국 제해권 통제의 제 1 방해요소가 적의 함대인 이상 언젠가는 결전을 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오히려 위험천만한 함대결전에 집중하여, '''유리하면서 결정적인 전투 기회를 잡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해군 교리/전략 또한 매우 당연하게 성립하며, 그 대표적인 예시가 함대결전사상이다.
2. 역사
싸움배라는 물건이 전쟁사에 처음 등장한 이례 함대결전은 언제나 유효한 개념이었다. 물론, 각각의 결정적 전투가 준 영향의 충격은 해군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갤리선이 주류였으며 아직 싸움배를 위한 화포가 등장하지 않았던 고전적 해전에서는 기동력의 한계 못지 않게 화력의 한계도 심각했다. 고전적인 해전은 '''승선 전투'''가 필수적이었고, 승선 전투는 상대를 격퇴하거나 배를 나포 당하는 것으로만 마무리될 수 있기에, 패배한 측이 무사히 함대를 추려 퇴각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함대 전투 하나하나가 패배한 측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당대 노잡이 방식 특성상 숙련된 노잡이가 필수적인 것은 물론, 승선 전투원 자체도 육성하기 까다로운 숙련된 인력이라, 어떤식으로든 대규모로 승조원을 잃는 것은 대체로 영구적인 제해권 손실로 직결되었다. 하지만, 당대 패권 국가들의 해군력은 그 이후의 해군들에 비하면 훨씬 빈약한 규모였고, 노잡이들 봉급이 비싸다지만 후대의 화포 유지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배를 직접 용궁으로 보낼 방법이라곤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충각으로 부숴버리는 것 뿐이었기에 의외로 싱겁게 마무리되는 전투도 잦았다.[2]
또한, 해군 강국과 맞붙어 패배하는 일을 겪을 만한 경쟁 패권국이란 것이 죄다 자국 내의 경제 만으로 패권을 주장할 수 있는 국가들이었기에, 제해권을 빼앗기더라도 결국 자국 본토가 공격받지 않는다면 충분히 '''그냥 배를 더 많이 찍어내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였다.[3]
즉, 결전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 영향도 막대한 편이었지만, 그 어떤 시대보다도 해군 외적인 요소로 결정적 패배를 뒤늦게나마 회복하는 것이 가능은 했던 시대인 셈이다. 물론, 해군 외적 요소가 함대결전에서의 패배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결정적 전투에서의 패배는 곧 전쟁 자체에서의 패배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화포를 장비한 싸움배의 등장은 전투의 양상을 근접 충격/사격 전이나 승선 전투에서 사격전으로 조금씩 변화 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갤리선이 주류였던 시절에는 더이상 숙련 노잡이를 대규모로 요구하지 않고 그냥 노예 (...)를 써도 되는 신식 노잡이 방식이 등장함에 따라 화포로 인한 군함 값 폭증을 어느정도 무마할 수 있었고, 아직 제대로 함대를 운용하는 거대 패권국 자체가 없었기에, 매 전투가 대규모 함대전인 경우가 많았음에도 패전 한방에 아예 해군 자체가 영구적으로 결딴나는 일은 드물었다. 예를들어, 대표적인 함대결전인 레판토 해전에서 참패한 오스만 제국은 한동안 서유럽 세력 상대로 제해권을 주장할 수 없었지만, 서유럽 세력들이 워낙 미약했던 탓에 결국 오스만 제국의 해상 진출을 막을 수 없었다.
즉, 이 시절에는 함대결전에서의 승리로 얻은 결정적 제해권 이점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국가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매 해전이 높은 확률로 결전이 되기 쉬웠음에도 그 영향에는 한계가 분명했다.
하지만 화포의 성능이 초월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상황이 많이 뒤바끼기 시작한다. 일단, 당장 해군을 운용하는 국가들의 역량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젔다. 게다가 범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원양 항해가 가능한 거대 선박들이 설계되고 건조됨에 따라, '''선박들은 점점 화포를 둘둘 두르며 거대해지는 방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 특히 전열함, 곧, 그야말로 바다에 떠다니는 요새와 같은 초고급 주력 함선 개념이 도입은 매 함대 전투의 위험 부담의 초월적 증가 신호탄이 되었다. 전열함을 상대하려면 같은 규모의 전열함이 필요한대, 이 전열함은 또 너무 무겁고 비싸기 떄문에 멀리 장기간 항해하기 부적절해서, 일꾼으로 일할 소형 선박들의 수요도 폭증하는 이중고가 발생하였고, 아직 동력기관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화력 요소를 기동 요소로 극복할 방법도 없어지자, 이 시대의 해전에서 승리하려면 그냥 더 크고 아름다운 전열함을 확보하면서, 이 비싼 자산들을 어이없게 날리지 않을 우수한 숙련도를 갖춰, 아주 크고 아름다운 엄청난 규모의 함대전에서 한판 붙어서 이기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 전열함들은 후대의 전함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항구 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 함선들이었고, 결국 배가 영원히 바다에 떠있을 수는 없다는 한계는 전략 규모에서 기동 요소가 화력 요소를 압도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국가 전략 자체에서 밀릴 경우, 이전 시대 처럼 해군력을 운용할 국가 자체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함대결전의 성과를 굳히지 못하거나, 혹은 상대의 함대를 일거에 파탄내는 초대규모 결전 자체를 대지 못하고, 비교적 작은 성과, 즉 해당 전쟁 하나에서만 적 해군을 몰아내는 수준의 결전으로 그치는 경우도 잦았다.
물론, 상대가 섬나라거나 해서 반드시 적 함대를 제거해야하는 상황에서는 결국 함대결전을 노려 이기는 것 말고는 해군력으로 이익을 볼 방법이 없었고[4] , 결국 함대결전을 적극적으로 노리지 못하는 함대는 결론적으론 제해권을 잡지 못하므로 쓸모가 없었다. 통상파괴 또한 당시에는 사략선이라는 비교적(?) 소극적인 방식이 사용되었다 보니, 정규 해군의 범주로 포함할 수는 없었다. 상대 함대를 박살낸 후 항구를 막아버리는게 통상에 타격을 주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시대였으니, 제해권 때문에 꼬우면 전열함이나 더 만들어라로 귀결되는 샘.
이후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증기선이란 혁신이 해전에 도입되고, 이것이 '''철갑선'''이라는 중대한 변화를 불러오자, 해군이 소모하는 비용은 또 한번 하늘을 뚫고 승천함과 함께, 발달한 해군 기술에 걸맞는 더욱 크고 아름다운 선박들이 등장하게 된다. 특히, 결정적으로 현대적 싸움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드레드노트급 설계가 등장하면서, '''모든 종류의 싸움배가 체급 무관 드레드노트 설계로 수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all-big-gun 등, 가능한 모든 자금과 시간을 동원해 가능한 더 크고 아름다운 화포를 더 많이 우겨넣은 더 크고아름 다운 배라는 해군의 팽창을 기존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시켰다. 중간에 어뢰라는 혁신적인 변화가 도입되기도 하였지만, 이 어뢰에 두들겨 맞지 않도록 보조함 전력이 당연히 존재할 것이므로, 결국 전함은 전함만이 상대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거함거포주의가 대두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결정적인 전투 한번에 해당 전쟁에서 상대의 해군을 영구적으로 파탄내는 것은 물론, 아예 이후 재기가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들 가능성을 열었다. 당연히, 앨프레드 세이어 머핸 등 많은 전략가들은 이런 결정적인 전투가 제해권 장악의 핵심이 되리라 예측하였고, 그에 따라 크고 아름다운 대함대전을 대비하고 그에 집중하는 함대결전사상이 대두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은 명백히 '''사실''' 이었다.
열강간의 여러 충돌에서 크고 아름다운 선박들의 크고 아름다운 결전에서 이기냐 마냐가 전쟁의 양상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여러 전쟁에서 입증되었는대, 후발 주자로 열강에 진입한 일본 제국 또한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을 통해 함대결전이 매우 중요하다는 전훈을 얻었다. 당연히 해군사가 시작된 이례 언제나 있어왔던 건함 경쟁 또한 엄청나게 과열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식민지 이권 지키라고 만들어둔 해군이 그 식민지들을 감당하지 못하기 시작할 만큼 해군은 돈 먹는 블랙홀로 변해갔다.
당연히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부족하거나, 해상에서의 세력이 미약한 국가들은 해군 강국을 상대로 함대결전에 말려들면 그냥 그 날로 결딴나는 것이 당연해젔다. (그리고 이게 바로 함대결전사상의 결정적인 허점 중 하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 제국은 잠수함을 이용한 통상파괴전이라는 엄청난 혁신을 통해, 이전에도 대형함에 대해 소형함들이 저항할 수 있게 하는 죽창으로 거두되었던 "어뢰"의 효력이, 바다 속에서 숨은 채로 적 해상 자산에 죽창을 찔러넣는 잠수함으로 실현되었지만, 결국 독일 제국의 카이저마리네는 대영제국 해군에 비해 훨씬 열세인 배수량(...)을 극복하지 못하였고, 이는 독일 제국이 영국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카이저마리네는 장엄한 자침으로 영원히 소멸하고 말았다.
사실 여기서 이미 함대결전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생각하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대, 독일 제국의 카이저마리네는 ''결정적인 패전으로 인해 소멸'' 하긴 하였으나, 결코 ''크고 아름다운 대함대전''에서 박살나서 용궁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카이저마리네 제해권 장악이란 목표 달성에 실패함에 따라, 전쟁 자체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한 끝에, 일시에 모두 자침하여 자체적으로 용궁에 가는 '''뭔가 이상한 함대결전'''을 치룬 것이었다!
어영부영 함대결전사상은 '''(언젠가는 발생하는) 결정적인 전투'''라는 본질을 잃고 거함과 거포로 쇼를 하는 분위기로 어긋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이렇게 본질에서 역설적으로 어긋난 함대결전 중시 분위기의 대표적 실패 사례를 꼽는다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일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은 점감요격작전이라는 방안 자체는 괜찮은대 그 뒤의 발상과, 실제 전략 구성이 도저히 사람 머리에서 나올 것이 아닌 정신나간 수준이었던 희대의 막장 해군 운용을 보여주었고, 이는 지금까지 웃음벨 취급 될 정도로 비웃음을 산 2차 세계대전에서 손에 꼽는 졸전 사례로 박제(...)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는 일본 제국의 처음 부터 끝 까지 모든 게 글러먹은 정신나간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지, 함대결전이 무효함을 나타낸 사례는 결코 아니다. 일본 제국 함대는 분명 '''결정적인 전투'''를 했다. 그런데 '''졌다.''' 그리고 실제로 일제의 연합함대는 제해권의 반영구적 손실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낮잠 자던 거인을 찌른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의 해전에서도 함대결전은, 흔히 생각하는 (대포 빵빵 쏴대는) 대규모 함대전의 모습이 아닐 뿐 여전히 유효하다. 매우 당연한 이치인대, 지금의 해상 자산들의 건조 비용이 양차 대전 시기의 그 비싼 전함 뺨치게 비싸다! 양차대전 시기의 크고 아름다운 함선에 비해 훨씬 볼품 없어 보이는 쪼만한 선박 하나가 그 크고 아름다운 전함 수 척에 상응하는 무지막지한 전쟁병기인 것이 현대 해군의 현실(...) 오죽하면 이전에는 배수량 뻥튀기 구라가 대표적인 해군의 전통놀이(?) 였던것과 달리, 오히려 순양함을 구축함이라고 우기는 식의 배수량 밑장 빼기 구라가 유행하고 있다. (물론 함급/배수량 낮춰 부르기 또한 해군의 유구한 전통이다.)
따라서 현대 해전에서도 함대결전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그 방식이란 것이 함대간의 요란한 교전이 아니라,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인, 곧, 매 전투 하나하나가 결전(?)인 꼴이란 차이가 있을 뿐.
다만, 기존의 모든 군 자신을 재래식 무기로 만들어버린 핵무기 덕분에 완전파괴가 가능하게된 현대의 상황에서는 전통적인 영토 혹은 영해 장악이라는 관점을 탈피하여 의미가 살짝 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제는 함선의 개념을 '배' 라는 병기에 국한하지 않고, 대륙, 이나 '나라' 라는 개념으로 치환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핵공격을 받거나 해서 본국의 모든 시설이 불바다가 되어버리는게 가능한 현 현대 전면전에서, 무기부터 먹을거, 입을거 까지 모든 것을 보급받아야 하는 함선들간의 전투가 과연 예전처럼 결전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총력전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핵무기를 빼고 보더라도 첫 대전쟁 이례 전면전 상황에서 함대 따위만 터지는 게 아니라 국민은 물론이요, 모든 국가의 기반 시설이 불바다가 되는 게 상식이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우주기술의 발전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상대를 20여분만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역설적으로 그것 때문에 단두대 매치 양식의 총력적 전면전을 보기 드물어진, 현재 상황에서는 과연 무엇이 주력 해상 자산이고 그 자산들의 어떠한 교전이 결정적 전투인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3. 함대결전사상과 그 허점
함대결전사상은 "결정적인 전투 Decisive Battle"을 제대로 고찰 하지 않고, 결정적 전투를 전근대적인 '회전(會戰)' 개념으로 국한시킨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넘어서지 못하였다.[5]
이런 회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쟁 당사자들이 모두 회전을 원해야 하는데, '''전력이 약하거나 불리한 쪽은 당연히 회전을 기피하게 된다.''' 전력을 다 모아도 상대방을 이길 수 없거나 불리하다면 상대방이 한 방에 잡기 쉽게 일부러 전력을 모아서 던져주지 않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며, 전력이 약하거나 불리한 측은 전력을 모으더라도 적의 주력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과 선택을 통해 적의 전력을 깎아 먹는 길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한쪽이 원하지 않는 전투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외교나 정치, 전략적으로 한 쪽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는 어려운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대함대전을 유도하는 것 또한 함대결전사상의 일부분이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아 구시대적인 실책이라는 평을 듣는 것. 무엇보다 전쟁은 '최후의 외교수단'이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외교나 정치로 상대방을 움직일 수가 없어서 어쩔수 없이 하는 건데, 스스로의 힘으로 외교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 외교에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군대 전술이라면 그건 이미 전쟁에 쓰기에는 실격인 셈이다. 유틀란트 해전의 예에서 보듯 전력상 불리한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 주력에게 공격받자 이전에 짜놓았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야간을 틈타 도망갔다.
또한 전쟁의 흐름이 총력전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1차례의 결전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육상에서는 결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곧, 해군이 설령 진짜 크고 아름다운 대규모 함대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제해권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차지한다 하더라도, 승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한번 제대로 패전을 겪으면 영원히 복구가 안되는 위험을 지는 판에, 진짜로 제대로 함대결전을 잡아 이겨 제해권을 진짜로 영구히 장악해도, '''총력전에서는 그것 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즉, 이익 자체는 엄청나긴 한대 그 무시무시한 이점을 확보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안 되는게 총력전이고, 이는 그 귀한 함대들이 결전에서 삐긋나 일시에 몰살 당할 위험을 그 누구도 지고 싶어하지 않게 만든다. (이 또한 고전시대에서 부터 이어저오는 해군사의 전통이다! 승선전투가 핵심이던 시절에도 국가의 총체적 역량에서 밀리면 결국 이겨도 이긴게 아니었다.)
결정적 전투에서 패배해서 제해권을 해당 전쟁에서 영구적으로 상실하는 전훈들이 실제로 많이 있어왔긴 하나, 러일전쟁에서 발트 함대가 한 차례의 해전으로 궤멸된 것과 같은 ''대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의 러시아 해군은 러시아의 중심지와는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로 원정을 가야하는 특수한 상황에 있었고, 함대 전체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투에 끌려들어가 결정적 패배를 당해 ''소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가 결정적 패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교전을 거부하고 도주하는 것이 매우 흔했고 역설적으로 이 문제가 함대결전을 갈구하게 만들기도 한 것인대, 일본 제국은 이런 본질을 대부분 무시하였다. 게다가 발트 함대가 소멸해버리긴 했어도 러시아 제국은 여전히 추가적인 해군력 동원이 가능했었다. 단지,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국내 정세가 도저히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 졌기 때문에 발을 뺀 것이다.
오히려 한 번의 결전으로 한 나라의 해군력이 와해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애초에 함대결전사상의 기반이 된 쓰시마 해전부터가 서양에서는 근대 해전사에서 '''트라팔가 이후 최악의 참사'''로 유명하다. 제해권에서의 열세는 결국 이러한 참사, 곧 피할 수 없는 결정적 패배로 이어지게 되어있으나, 그것이 쓰시마 해전 마냥 아주 깔끔하고 크고 아름다운 대규모 함대전 형식으로 실현된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디. 즉, 대규모 함대전을 통한 결정적 승리는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사례'''인 셈이다.
결국 함대결전이라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야 정상인 문제를, 그걸 노릴 역량도 안 되는 판에 다른 가능한 대안 마저 모조리 배제하고, 쓰시마 해전 같은 특수한 사례 재현에만 목을 매달았으니 문제가 속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 더군다나, 설령 이게 잘 풀렸다 해도, 상술 했듯 총력전에서 해군이 결정적으로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 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역으로만 한정해봐도,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자원과 공업생산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대규모 해전에서 한두번 패했다고 가정하더라도[6] 그걸로 전쟁을 끝낼 가능성은 없고, 없었으며, 실제로도 못 끝냈다.
일본 제국의 발상은, 상술 했듯 함선의 기나긴 건조기간과 초월적인 비용 문제에 입각해서 '''"여기저기서 깨작깨작 싸우면서 복잡하게 하지 말고 한타 싸움에서 크게 한 번 이기면 그 다음부턴 전쟁 끝날 때까지 부담없이 쟤네들 바다 휘젓고 다닐 수 있겠다"'''라는, 얼핏보면 맞는 말 이고, ''실제로도'' 맞는 말이지만, 전쟁을 이길 수는 없는 발상이었다.
물론 일본 제국 또한 미국 자신들이 맞붙어 이길 가능성이 절대 높지 않다는 것을 아주 잘 있었기에 '어떻게 하면 미군을 이길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고민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제대로 된 한타 싸움 이전에 잠수함과 같은 비대칭전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미군의 전력을 갉아먹고 피폐화된 미군을 자신들의 준비된 주력전력으로 상대하여 격멸시키겠다는 점감요격작전이다.
하지만 이 점감요격작전은 정작 현존함대라는 함대결전에 맞서는 중대한 해군 운용법을 완전히 망각한 듯한 괴상하기 그지 없는 형태로 실현되었으며, 그 악명은 태평양 전쟁에 관련된 서적들에 자주 나오는 ''미군은 일본군이 주력부대 앞에 잠수함을 선행시킨다는 교리를 알고 있었기에 다수의 잠수함을 발견하자 주력부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는 식의 서술 만으로도 충분히 체감 가능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본 제국은 그 스스로 함대결전이 진짜로 유효하다는 것과 함께, 역설적으로 함대결전사상은 막되어 먹은 발상임을 모두 입증하였다. 일본해군은 미국과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함대결전을 3번이나 치뤘으며, 그 3차례의 결전 모두 주력 함정의 대부분을 잃는 참패를 당했으며, 그에 따라 전쟁 내내 제해권을 상실한 상태로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수행의지를 꺾지 않았다'''. 막말로 태평양 전쟁이 일본에 태양이 2개 더 뜨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것만 봐도 함대결전의 중요성과, 역설적으로 그 무효성(...)을 동시해 체감할 수 있다.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단 하루만에 갖다버린 결전, 정규 항공모함 3척에다가 500기에 가까운 항공기를 날려버린 결전, 역사상 최대규모의 해전이자 항공모함 4척, 전함 3척, 순양함 10척이 사라지는 대결전을 겪었고''' 그 결과 ''영구적으로 제해권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수행을 계속했다.''' 일본이 최종적으로 전쟁수행의지를 꺾은건 결국 원폭을 2발이나 얻어맞은 이후였으며, 그것은 전통적인 함대결전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새로운 시대의 결전이었다.
즉, 함대결전은 해군이 제해권 확보를 달성하기 위한 중요 수단이자 결론적으론 피할 수 없는 절차이나, 해군의 본분은 언제까지나 제해권을 통해 '''전쟁을 돕는 것'''이다.[7] 즉, 함대결전사상은 ''문명화된 국가의 해군이기를 포기한 전근대적이고 비문명적인 발상'께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4. 오해
함대결전사상은 주력함들을 모아서 회전을 하는 개념이 맞다. 다만, 일본으로서는 자신보다 물량이 많은 미국과 회전을 했다가는 승리할 가능성이 0%였기에[8] , 비대칭전력인 잠수함, 어뢰정 등을 사용하여 미국의 전력을 줄여 보고자 하는 구상을 했고, 그것의 결과물이 바로 점감요격작전이기도 하다. 다만 점감요격작전 문서에서도 그렇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패했다고 해서 이러한 구상을 과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 해군 소장이었고 퓰리처상까지 받은 사무엘 모리슨도 저서에서 당시 일본이 할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었다고 평했다. 다만, 점감요격전략이 훌륭하다는 소리는 아니고, 전력이 떨어지는 쪽에서 '''전쟁을 피하면 된다'''는 상식을 제외한 나머지 중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답이라는 뜻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또한 전쟁이 터지면 바로 항공모함으로 바꿀 수 있게 수상기모함, 상선, 잠수모함 등을 건조해내기도 했다. 히요, 준요, 치토세, 치요다, 쇼호, 즈이호, 류호 등이 그 예. 그러나 숙련병, 숙련 조종사, 기름과 함재기가 부족해 빈 배로 다녔거나 출항도 못하는 등 노력에 비해서 결과는 보잘 것 없었다. 일본도 일본 나름대로 자기 주제를 알고 어떻게 하면 미국과 더 잘 싸울 수 있을까 고민해봤다는 것이다.
5. 일본의 함대결전사상
5.1. 이론
공격적인 함대결전사상은 나폴레옹식의 기동을 통한 부분적 수적/화력적 우위를 얻어 란체스터 법칙을 이용, 아군에게 적은 피해로 적을 격멸하는게 된다. 그러므로 공격자의 함대결전 사상이라면 주력함들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적을 제거해야 한다. 아군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군이 입는 피해가 적어지기 때문에 주력함이 주로 투입될 수 밖에 없고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손해를 아까워 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 해군의 전력이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였어도 적에게 선빵을 때렸으면 어느 정도 무리가 있더라도 절대 멈추면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했다.
방어의 함대결전 사상이라면 반대로 이쪽은 꾹 눌러참고 있다가 단 한방에 모든 것을 뒤집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주력은 최후의 최후까지 움직여서는 안 되며 주력을 한 곳에 모으고 모을수록 좋다. 이 때는 최후의 일전 이전에 발생하는 주력의 피해를 누구보다 아까워 해야 한다.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방어적인 함대결전으로 톡톡한 재미를 보았다. 문제는 이 승리에만 눈이 돌아간 나머지 방어적 함대결전의 전략을 이용하여 공세적 작전을 폈다는 것이다. 사실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일본은 잘 해봐야 정말 버티고 버티다가 제2의 쓰시마 해전을 찍어야 했을지도 모른다.[9] 그러나 일본에게 운이 좋게 진주만 기습은 성공했고, 일본은 잘못된 전략을 지니고도 순간의 반짝임으로 이득을 얻었다.
마지막으로 총력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국력이 딸리는 국가가 자신보다 국력이 높은 국가와 싸울 때는 처음부터 장기적인 총력전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모든 군사력을 높혀서 단번에 승부를 보는 단기결전을 노리는 게 최선이긴 하지만, 무조건 이쪽에서 원하는 대로 상황이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이미 망상이었다. 같은 추축국인 나치 독일도 단기 결전을 노렸지만, 이와는 별개로 미흡하나마 장기전을 예상한 각종 개발 계획과 동원 계획을 만들고 사회간접자본 투자까지 진행했는데, 일본은 단기결전만 생각하고 장기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원 축적 면에서 보더라도 나치 독일은 석탄을 액화해서 석유로 만드는 시설을 국내에 대량으로 건설해서 가동한 후에야 전쟁을 벌였지만, 일본은 석유 수입선이 다 끊어지고, 비축한 석유도 잘 해봐야 1년 버틸 수준의 양만 가지고 전쟁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렇게 노린 단기결전의 첫 단추가 성공한 시점에서 계속 전투를 벌여 승부를 결정 짓든지 혹은 외교적 수습을 하든지[10] 아니면 얻어진 이득과 시간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뒤를 보는 총력전의 개념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그냥 운 좋게 얻어진 그 상황에 대한 현상 유지만을 꾀했으므로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길을 걷고 만다.
5.2. 실전
주력함을 미끼로 던진 어리석은 전술이다.
원래 함대결전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도 생각해본 적이 있으나[11] , 이미 유틀란트 해전으로 그런 망상은 끝난지 오래였고. 특히 미국이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 이런 전략을 구상했었으나, 유틀란트 해전을 참관한 뒤에는 건함사상을 바꿔가면서까지 전략을 바꾸었다.[12]
애초에 일본은 산호해 해전 같은 경우에도 '''경항공모함을 미끼로 일부러 떨어뜨리는 작전'''을 전개해서 무의미한 항공모함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리고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는 아예 대놓고 경항공모함인 류조를 미끼로 사용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정규항공모함 즈이카쿠를 비롯한 잔존항공모함들을 미끼로 투입한 것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저 해전에서는 야마토급 전함 무사시도 고기방패로 써버렸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일보다 더 전인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전함 부대의 방패로 생각해서 상식적으로 보면 전함 부대가 탱킹을 하고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아웃레인지를 해야 하는데, 항공모함 기동부대로 탱킹을 한 병크 of 병크도 저질렀다.'''[13][14]
항공대의 경우도 연합국은 어느 정도 베테랑이 된 조종사는 후방으로 돌려 교육에 투입, 신임 파일럿들의 기량을 높이는데 활용한 반면 일본은 매 전투마다 출격하던 놈을 그대로 다 투입했고 결국 한 줌도 안되는 에이스[15] 들이 소모되자 대전 후반기엔 새파란 신병만 남아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앞 문단에서 항모를 미끼로 썼다고 했는데, 전쟁 후기 일본 해군이 그렇게 한 것은 배는 있어도 쓸만한 파일럿이 없는 상황이 된 탓도 있다.
그 외에도 순양함이나 구축함 역시 전함간의 결전을 보조하기 위한 목적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순양함이나 구축함들은 서로 포화를 주고받는 전함 사이로 돌진해서 어뢰로 상대방의 전함을 격침시키는 이른바 '수뢰전'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지만, 대공-대잠 기능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특히 도쿄제국대학 총장이기도 했던 히라가 유즈루 중장이 1930년대 초에 구축함의 주포를 대공-대수상 양용포로 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낸 것이 결정타였다. 일본의 함대형 구축함들이 사용한 5인치 포들은 앙각이 75도로 높긴 했지만 주퇴기의 거리가 긴 평사포(캐논)인 탓에 방공전에 필요한 대량의 포탄을 고속으로 사격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게다가 이 보고서가 나온 얼마 후에 5인치 대공포를 전함과 항공모함의 대공포로 장착하게 되는데, 태평양 전쟁에서 주된 상대가 전함이 아니라 함재기와 잠수함이 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상당한 삽질이었다.[16] 덕분에 태평양 전쟁 중반기 이후에는 미국의 잠수함이 오히려 일본군의 구축함을 사냥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다만 이건 함대결전사상만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소나' 기술이 상당히 뒤떨어진 것이 더 문제였다. 물론 함대결전사상의 영향으로 소나 관련 기술을 등한시했던 것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뒤떨어진 기술 덕분에 나름대로 구축함 본래의 역할에 신경써서 만들었다는 구축함들도 소나의 성능 부족으로 제 역할을 못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다른 나라라면 통상파괴전이나 다른 방식으로 교리를 선회했겠지만, 유연성이 부족했던 일본 수뇌부는 '그래도 꾸역꾸역 모으다보면 언젠간 역전의 날이 오겠지'라는 판단으로 역량 부족을 드러냈다. 현실은 미국이 우월한 공업력으로 더 열심히 꾸역꾸역 모아서 적절하게 사용했기에 역전의 날은 영영 찾아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꾸역꾸역 모아서 역전하려면 생산력은 둘째치고 우선 소모전에서 우세를 점해서 더 많이 남겨야 한다. 꾸역꾸역 모아서 역전하기 위해 소모전에서의 피해를 감수한다는 발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방향착오였던 것이다.
결국 함대결전만 보다가 소모전을 보지 못한 일본군은 함대결전은 항공모함과 숙련된 파일럿 등 인적 자원 부족으로 밀리는데 다른 방향은 신경조차 안 쓴 덕분에 어디로 가나 답이 없는 안습한 상황에 직면했다. 이는 상기된 것처럼 구축함에 대잠장비가 부족한 탓에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같은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왔으며,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정말로 함대결전급 규모의 함대를 끌고 와서도 대함대전이 아니라 '적진돌파 후 수송선단 격파'를 목표로 잡아야 했고, 그나마도 미군의 2선급 함대인 태피3에게 패배하는 창피를 겪게 된다. 특히 결전병력의 주력인 전함들은 보조함 물량에 밀려 이리저리 치이고 당하던 끝에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 한 척도 제압하지 못하고 쫓겨나면서 굴욕의 정점을 기록했다.[17] 이는 급기야 일본의 패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고, 함대결전교리에 가장 열성적이던 일본 해군로서는 치욕적인 침몰이었다.
요약하면 일본군의 교리는 태평양으로 진격해오는 미군을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 등으로 최대한 소모시킨 뒤 전함 한타로 모두 격멸한다는 식이었고, 야마토급 등의 전함은 '최후의 한타 페이즈'에 써먹을 용도로 설계된 전함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은 초반 승리에 취해 처음 짜놓은 계획은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 소모전만 했고, 야마토를 비롯한 일본 전함들도 함대결전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소모되선 안된다는 핑계로 항구에서 놀기만 했다. 반대로 미국은 따끈따끈한 새삥 전함들도 과달카날 같은 최전선에서 쉴새없이 전투를 치를 정도로 절박했고, 결국 호위함들과 항공모함들이 모두 소모되고서야 무거운 엉덩이를 뗀 일본 전함들은 그토록 바라던 전함끼리의 한타 한번 못하고 격침된다. 만약 함대결전으로 승리하고 싶었으면 진주만 공습 때 전투기만 보내는게 아니라 함대를 다 끌고 들어가서 포격으로 아예 초토화를 시켜야 했다, 점령은 무리지만 완전 인프라를 박살내 놓으면 복구에 배로 시간이 걸렸을터이니.
설령 미국이 함대결전에 동의한다 쳐도 문제인 것이, 미국이 함대결전을 위해 전함들을 몽땅 긁어모으면 공고급, 후소/이세급과 같은 14인치 주포가 '''104문''', 나가토급과 같은 16인치 주포가 '''90~150'''문이 나온다. [18] 아무리 야마토급 전함 2척이 18인치 함포 18문을 더해준다 해도 미국에 대응수단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것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애초에 일본은 함대결전으로도 미국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함대결전으로도 미국을 이기기엔 수적 열세였다는 점은 일본군도 알고 있었다. 일본군의 군사정보 획득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국가별로 각자 능력에 따라 각급 함선의 소유량과 함대의 최대 규모를 정할 때 미일 간의 비율을 5 대 3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일본도 생각없이 들이받는 게 아니라 점감요격작전을 통해 미군의 힘을 빼놓고 나서 싸운다는 구상을 했었다. 하지만 미군이 일본의 의도대로 순순히 속아줄 리가 없으니 이 작전도 결국 무리수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함대결전이라는 단 한 번의 큰 전투로 승패를 가를 생각이었기 때문에, 장기전을 염두에 두는 지원세력에 대해서는 생각도 없었다.
6. 결과
일본 해군도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으로 두 번이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구레 군항 공습 등으로 해군이 사실상 사라지건 말건 패전시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함대결전에 버금가는 타격인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도 끝까지 전쟁을 했지 절대로 항복 따위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독일 또한 1943년 중반 이후 연합군의 호위항공모함이 바다를 뒤덮으면서 해전의 승패가 결정났지만 유보트의 저항이 종식된 것은 전쟁이 끝날 무렵이며, 일본도 그 허접한 잠수함대가 전투를 종료한 것이 전쟁에서 패전한 후다. 애초에 많은 반례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이라는 단 1개의 예외를 가지고 다 그렇게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게 모든 문제의 근원.[20] 물론 의지가 있건 없건 배가 없는 해군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고 확실하게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기는 한다. 그게 한 번의 전투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대규모의 전력전이 곧 상호확증파괴가 될 수 있는 현대에서 '''국가와 국가 간의''' 전력전이 나올 가능성은 제로라 봐도 된다. 한국에서의 북한 도발사나 미군이 개입하는 여러 분쟁지역 등은 전부 소규모 교전(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이다. 미사일 위주의 해전이 주류가 되는 지금에 와서는 함대결전은 (주력함대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장악하는 방법의 하나로 남아있을 뿐으로[21] '모든 해군을 동원한 한타 싸움으로 승리한다'는 교리는 결국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일본과 미국은 함대결전을 계속해서 치러온것일수도 있다. 점감요격작전으로 적의 주력을 깎아오겠다고 벌여온 전투들이 하나같이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투들 뿐이었다. 일본이 생각하던대로 한타 싸움에서 크게 이겨서 활개치고 다닐수 있게 된것까지 그대로다. 단, 승자가 미국이었을 뿐.[22]
지금도 일본의 다양한 서브컬쳐에서 등장하는 '결전'은 모두 이 함대결전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3]
[1] 물론 생각보다 안 넓은 연안에 국한될 수도 있지만, 그 연안이라는 것이 아무리 좁아봐야 어지간해선 육상보다 훨씬 광활하다.[2] 진형과 사기가 붕괴되면서 너무 빨리 패주해 버리면 오히려 승선 전투를 오래 하지 못해 나포되는 선박 수가 줄어들 수 있다. 물론 패닉에 빠저 자침(...)을 시전하는 경우는 당연히 예외.[3] 재미있게도 이것은 현대에 와서 다시한번 재현된다.[4] 즉, 제해권을 우회할 수단이 없었다.[5] 개별 군주/국가의 권력과 대민 통제력이 약하고 농업생산량이 부족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장기간 유지할 수 없었던 봉건사회에서는 전력이 뒤쳐지는 쪽도 마지못해 회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종종 있었으나, 민족국가가 탄생하고 산업혁명으로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증가했고, 총력전의 개념이 생겨남으로서 후술할 외교, 전략적 수단만이 원치않는 상대를 회전으로 끌어내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6] 실제로도 결정적 패배를 겪었었다. 바로 그 진주만 기습 공격에서 미 해군은 반쯤 소멸 했었다. 하지만 미국은 그렇게 상실한 제해권 하나 만으로 전쟁에서 질 나라가 절대로 아니었다. 당연히 최종적 결과는...[7] 바로 이것이 모든 종류의 해군력 운용법과 해군 전략이 공유하는 근본적인 난점이다.[8] 애시당초 전쟁 초기 목적부터가 미국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약을 맺기 위해 우위를 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9] 사실 백번 봐줘서 일본 해군이 쓰시마 해전급으로 이겨서 미군 주력함을 다 박살냈다 해도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러일전쟁 역시 종전한 이유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군이 주력함을 잃고, 일본군이 막강하고 계속 러시아군을 이겨서가 아니라(203고지같은 실책도 많았다) 러시아의 국내 사정이 이미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로 악화되었기에 러시아가 정전 협상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의 국내 정치 사정이 좋았다면 애초에 러일전쟁의 결과는 전혀 달랐을 수도 있었으며, 게다가 러시아는 당시 공업생산량 같은 기초 생산력이 바닥을 치는 와중에도 군대육성에 중점을 둔 상황이었다. 즉 제2차 세계 대전 시점에서 세계 공업생산량 1위를 찍은 미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 만일 함대를 잃었어도 미국은 실제 역사에서 보여줬었던 대로 함대를 찍고 찍고 또 찍어내고 그냥 많이 만들어내서 소모전과 물량전을 걸었을 것이고, 이미 중일전쟁을 치르면서 태평양 전쟁을 함께 치르던 일본이 이를 이겨냈을 리가 만무하다. 다만 이렇게 되면 유럽 전선은 조금이나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10] 다만 외교적 수습은 절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선전포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대놓고 상대국을 폭격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함선들을 파괴했는데 저쪽에서 외교적인 시도를 받아줄 리가 만무하다. 무조건 항복이라면 모를까... 만일 미국의 함대 전체규모가 태평양 함대였고 함대 생산능력도 미흡해서 태평양 함대를 잃는 순간 해군력이 증발하고 비슷한 규모의 함대를 재건하는데 몇 년씩 걸리는 상황이었다면, 미국으로서도 일본 함대가 미 본토를 타격하기 전에 적당히 끝맺고 후일을 도모하는게 합리적이었을 테니 외교적 수습이 가능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태평양 함대 정도의 전력은 미국에게 복구에 시간은 좀 걸리지만 비용은 감당할만한 수준이었고, 열받은 미국은 역으로 쇼미더머니를 갈겨서 '''바다 수평선을 군함으로 가득 매웠다.'''[11] 영국의 경우 유틀란트 해전 당시 독일 주력함대를 섬멸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함대 지휘관 존 젤리코가 강하게 비판받았는데 이는 영국 또한 이 시기까지는 함대결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젤리코의 함대 운용을 고려하면 모든 지휘관들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12]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는 최대속도가 느리더라도 언제든지 전장으로 갈 수 있게 순항속도와 연비를 늘렸고, 적의 공격을 잘 받아내기 위해 집중방어같은 방어력에 치중했다고 하면. 유틀란트 해전 이후 한번의 해전으로 전멸시키기도 당하기도 어렵다는 걸 알게 되자, 순양전함의 빠른속도와 표준전함의 강력한 공격력과 집중방어를 가진 고속전함을 요구하게 되었다. 다만, 이런 변화는 단지 전훈에 따른 것은 아니고 기술 발전에 힘입은 바도 컸다. 고속전함은 유틀란트 해전 이전에도 있었고 이는 연료를 석탄에서 중유로 바꾸면서 얻어진 결과였다. 유틀란트 해전으로 생겨난 건함사상의 가장 큰 변화는 일명 포스트-유틀란트 구조라고 부르는 방어구조의 변화로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던 갑판 방어력이 강화된 것이 특징이다.[13] 다만 이 점은 일본도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서, 이후의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전함을 포함한 부대가 선두에 서고 항모가 포함된 본대는 살짝 뒤에서 움직이며 목표 분산을 노렸고, 실제로 미군 항모에서 발진한 공격대는 대부분 전함부대만 깔짝대고 돌아갔다. 문제는 이런 진형은 안 그래도 부실한 대잠전력을 더 분산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정규항모 두 척을 잠수함에게 말아먹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14] 사실 전함의 경우 대공사격보다는 적 전함에 대한 대응역할이 강조되는 편이라 적에게 전함이 없으면 전함을 배치하는 게 필수는 아니지만 대공방어를 해줄 호위함은 충분히 붙여줘야 했다. 그러나 상대인 미국의 경우 전함의 주요 임무에 대공화망 구성이 당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즉, 전함이라는 막강한 무장 플랫폼을 단순히 함대함 포격전용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최대한도로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 써먹은 것이다. 그 편이 여러모로 합리적이기도 하고.[15] 이걸 뽑을 때 우수한 재원을 선발한다며, 벌거벗겨 체조시켜 균형감각을 보기도 했다는 사진이 남아 있다. 사카이 사부로는 나중에, 전쟁 말기 파일럿 부족에 시달릴 때, 전쟁 전에 너무 소수정예로 뽑는 바람에 문제가 없음에도 탈락한 사람들이 아쉬웠다고 회고했다. 이런 사람들을 불러서 쓰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은, 이미 그들이 징병되어 허구헌날 터져나가는 배의 수병들이나 반자이 돌격을 하는 알보병들이 되어 소모되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16] 구경은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해군이 미군에게 받아 타던 구형함들의 주포가 바로 2차대전 때부터 사용하던 38구경장 5인치 양용포로 명포 반열에 들어간다. 그 외 일본 해군의 대공기관포, 기관총도 구경이나 바탕 모델 자체는 평이 좋은 서구 모델에 기반한 게 많았다. 그런데 구경만 같거나 비슷했지 성능이 떨어졌고, 베이스 모델이 있는 경우는 일본화시켜 양산할 때 잘못 만들기도 했고, 실전에서 운용할 때 후진적으로 사용하는 등 미군만큼 성능을 뽑아내지 못했다.[17]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는 히어만의 어뢰공격을 피했지만 그 이후에 전과를 기록하지 못했고, 야마토와 나가토는 히어만의 어뢰에 쫓겨 도망갔다. 공고급 순양전함 1번함 공고는 미군 구축함들을 격파하며 활약했지만, 일본 함대는 레이테 만에 진입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그리고 히어만은 일본군의 집중공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승리자가 되었다.[18] 네바다급 2척(14인치 2연장X2, 3연장X2 총 10문), 펜실베이니아급 2척(14인치 3연장X4 총 12문), 뉴멕시코급 3척(14인치 3연장X4 총 12문), 테네시급 2척(14인치 3연장X4 총 12문), 콜로라도급 3척(16인치 2연장X4 총 8문) 노스캐롤라이나급(16인치 3연장X3 총 9문) 2척, 사우스다코타급(16인치 3연장X3 총 9문) 4척, 아이오와급(16인치 3연장X3 총 9문) 4척. 여기에 5척의 몬태나급(16인치 3연장X4 총 12문)이 추가될 수 있다.[19] 이 때문에 일본 해군 내부에선 함대결전을 위해 군축조약을 쌩까고(최대 조약 파기까지 감수하고) 함대를 무조건 미국의 함대 이상으로 늘리자는 '함대파'와 조약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의 함대 수를 그나마 그 정도로 묶어 놓은 거라는 '조약파'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20] 물론 점감요격작전 문서에서 언급되는 나카무라 료조 중장처럼 대충 본 사상의 약점을 알고 있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러일전쟁의 전훈을 과도하게 신격화하고 금과옥조로 여기며 이에 대한 반론을 쉬이 제기할 수 없었던 일본군의 경직된 군사문화 때문에 이를 대놓고 반박할 수 없었을 뿐. 이런 상황은 일본 육군도 다르지 않아서 이들 역시 사실상 러일전쟁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전략전술을 사용했다.[21] 제해권을 장악하려면 좋든 싫든 적 주력함대가 바다로 기어나오지 못하게 해야하니까.[22] 함대결전사상이 통하려면 함대결전으로 함대를 잃은측이 함대복구까지 막대한 시간이 들어 전쟁기간동안 재기불능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세계 공업력 1위던 미국의 생산력에 일본의 생산력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함대결전으로 양측이 전함들을 다 잃었다고 쳤을때 일본은 연단위로 해야 겨우 1~2척 복구할 수 있었다면 미국은 월단위로 함선을 뽑아내 복구하고도 남았다. 이러니 소모전 양상에서 일본은 미국에게 절대 이길 수가 없었다.[23] 그래서 전투 퀄리티를 조금이라도 보장하려는 애니들은 대부분 그 "결전"에서 이런 슈퍼무기들을 등장시켜서 개연성을 맞추려고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