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 한국의 성비 불균형 현상

 

1. 개요
2. 원인
2.1. 산아 지원 정책의 제한
2.2.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선택적 여아 낙태
3. 경과
3.1. 1980년대 이전
3.2. 1980년대 초반
3.3. 1980년대 중후반
3.5. 2000년대 이후
4. 여파
4.1. 남초현상
4.2. 결혼문화 변화
4.3. 낙태 반대론
4.4. 초고령화-인구 절벽 + 인구 증가율 둔화
5. 현황과 원인
5.1. 출생 성비 정상화
5.2. 군복무 중 사망률
5.3. 자살률 및 기타 사망률
5.4. 기타
5.5. 그럼 성비는 정상화 될까
6. 외국의 사례
6.1. 중국
6.2. 인도
6.3. 일본
6.4.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


원래 신생아 성비는 103~107[1]을 자연적인 범위로 본다.[2] 그러나 한국은 1980~90년대 태어난 신생아 성비에서 최대 '''116.5'''[3]라는 이례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즉 해당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 사이에서 심각한 남초 현상이 일어났다는 의미다. 대체로 홀수 해보다 짝수 해의 성비 불균형이 더 심하다.[4] 통계 자료
이 현상의 원인은 산아제한정책의 영향와 함께 태아 성별 감별이 가능해짐에 따라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한 여아 낙태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 원인


기본적으로는 장손을 원하는 사람들의 남아 선호 사상과 정부가 인구억제를 위해 산아제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상황이 겹쳐지면서 일이 커져버린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80년대에 태아 성 감별을 가능하게 만든 초음파 기기가 상용화된 것 또한 여아 낙태를 일으키는 중요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경제발전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 이에 따른 의료서비스의 대중화, 사회적 제동장치나 인식의 미비 등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

2.1. 산아 지원 정책의 제한


1971년에 정부는 가구 당 2명만 낳도록 권장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는 1자녀까지 자녀를 줄이도록 권장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부터는 빈곤층에 대한 피임약 지원금 지원을 중단하는 등의 산아제한 정책 완화 조치가 나오기도 했고 1993년에 산아제한 폐기정책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를 내기도 했지만, 정작 정책이 공식적으로 완전히 폐기된 건 3년 후인 1996년이다. 그리고 산아제한 정책의 잔재가 출산장려로 전환한 2002년까지 일부분 남아있었다.[5]
그 결과 인식 전환을 빨리 못해서 기본 출산율이 상당히 저조해졌다. 2001년 이후의 고용 불안정으로 인한 추가 하락까지 감안하면 희대의 대 삽질.
이런 정책이 나온 이유는 출생이 억제되어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개발도상국 차원의 정책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15세 이하와 65세 이상 인구는 15~64세 노동인구에게 부양을 받아야 한다. 소비만 하는 인구가 늘어날수록 자본축적에 해가 되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방해가 된다. 개도국에서 짧은 기대 수명 때문에 노인층은 존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출산율이 급속히 줄어 부양비율이 감소하는 것을 두고 '인구 보너스'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 시술은 이미 산아제한정책의 가장 중요하고 손쉬운 수단 중 하나였다.[6]
그 외에도 1970년대 서구에서 제시했던 멜서스 트랩과 같은 '인구폭탄론'과 미국식·유럽식 경제발전론에 입각한 여권신장을 숭상한 서구식 여성주의(여성해방운동)의 결합이 아시아의 후진국에게 정책적 압박과 동시에 서구의 대대적인 의료지원과 맞물려 낙태를 효율적인 산아제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결과를 초래시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7]
애초에 박정희 정권 당시 낙태가 활성화된 것에는 서구의 낙태에 대한 의료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8] 또한 산아제한정책에 대한 UN의 재정적 지원은 전두환 정권이 산아제한정책을 실시하도록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원래 산업혁명 당시 유럽에서 사용된 일반적인 산아제한정책에선 낙태 같은 사후피임도 하나의 수단이었지만 콘돔과 같은 사전피임의 확산과 대중화가 주요수단이었다. 낙태에 따른 산모의 사망위험성이 높았던 만큼 사전피임이 주요 골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당시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출산률을 낮추려 했기에 단속도 허술하고 처벌도 미미한 편이었다. 더불어 산부인과 측에서도 돈을 벌 수 있으니 암묵적으로 동조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2.2.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선택적 여아 낙태


의료기술의 발달로 출생 전 태아의 성별을 감별할 수 있게 되면서 남아선호사상에 의한 여아 낙태가 중산층에서부터 성행하여 신생아 성비가 점차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를 인지한 정부는 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선전했지만 이미 남아선호사상으로 얼룩져있는 한국의 정서상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1980~9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뱀띠, 용띠, 호랑이띠 여자는 재수없고 인생이 험난하며 드세고 시집을 못 간다는 미신이 있었다. 1990년생 백말띠 여아들에게 이 미신은 더 잔인하고 강하게 적용되었는데, 이때의 성비가 '''116.5'''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출산을 하기 시작하면서, 출생아수는 급격히 증가하는데 성비는 붕괴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딸을 낳았을 경우, 아들을 낳을 때까지 출산을 하다가 셋(넷)째 아이도 여아일 경우 장손을 얻기 위해 여아를 낙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통계청은 1990년부터 출산순위별 성비에 대해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통계청 통계 자료 여기서 조사된 셋(넷)째아 이상 성비는 남아선호사상을 뚜렷이 드러내는 대표적인 지표로 통했다. 실제로 1993년 신생아 성비는 115.3이었지만 셋째아 이상의 성비는 '''207.3'''였다.

3. 경과



3.1. 1980년대 이전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의 특성상 다산을 장려했고, 근대 이전 높은 영유아사망율[9]과 부족한 피임법 등의 이유로 가능한 한 자식을 많이 두려고 했다.[10]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 시대까지 지속됐다.
그런데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2년 뒤인 1963년 산아제한정책이 실행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의료지원에서 비롯된 낙태가 효율적인 산아제한정책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11]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는 성감별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낙태 기술도 발달하지 않아 흡인식의 초기 낙태만이 산아제한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1980-90년대와 같이 여아가 대량 낙태당해 발생하는 성비불균형은 일어나지 않았다.[12]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남아선호사상이 아주 강고해지고 낙태도 10만 건 정도에서 20만 건 정도로 활성화 되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이 낙태를 받을 여건이 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결정적으로 성감별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우선 낳고 봐야했다. 태어난 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시기에는 을 보통 4명 이상 낳았다. 그래서 1969년까지만 해도 만 4~5명씩 낳고 막판에 아들 1명 낳는 식의 딸부잣집이 많았다. 하지만 남아선호가 유독 강한 집들은 1980년까지 계속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71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70년, 박정희 정권에서는 둘만 낳자,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라는 표어와 함께 산아제한을 본격적으로 확산한다.

3.2. 1980년대 초반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매우 높은 강도로 산아제한정책을 실행하였다.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라는 식의 산아제한 표어가 박정희 정권 후반~전두환 정권 초반 들어 '삼천리 금수강산이 초만원 된다'라는 식으로 표현의 강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차범근을 앞세워 '하나만 더 낳고 그만 두겠어요'[13]라는 포스터도 제작했을 정도. 특히나 이때 서구에서 일어난 멜서스 트랩을 위시한 인구폭탄론이 국내에 대대적으로 회자되었으며, 이에 따른 산아제한정책 실시 국가에 대한 지원이 전두환 정권의 산아제한정책을 부채질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1명만 낳자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역사상, 아니 현재까지도 이렇게까지 시행을 한 나라는 중국한국 단 둘뿐이었다고 한다.[14]
1980년대 초반에는 태어난 아이가 딸이면 강제 해외 입양을 시키는 사례가 존재했다.[15] 그나마 이것은 양호한 사례였다. 1960년대에는 아이를 몰래 죽여버리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마음을 고쳐먹고 키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시절에 태어난 분들에게 여쭈어 보면 의외로 흔한 일이며 유명인 중에도 그런 위기를 겪었던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1980년의 성비는 105.3:100으로 매우 자연적인 성비였고, 1981~84년까지만 해도 성비는 107-108:100으로 아직까지는 불균형 상태에 이르지 않았으며, 남녀의 성비는 사회학적으로 어느 정도 용인한 수준이었다. 참고로 최대 108:100까지는 위험하지만 사회학적으로 용인되는 수치이다.

3.3. 1980년대 중후반


1985년부터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나타나면서 사회적인 상황과 맞아떨어져 사상 '''유례가 없는 여아 낙태에 따른 성비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원인은 바로 임신 기간 중에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구별이 가능할 정도의 초음파 검사 기기가 국내에서 완전히 상용화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부터 3저 호황을 타고 중산층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질 좋은 의료 서비스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층들도 대거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산부인과마다 성별 감식부터 낙태 시술까지의 일련의 절차가 300~500만원에 거래되었고, 그나마도 예약이 잔뜩 밀려 몇 달씩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다. 이는 19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제동장치가 전혀 없었다. 서구의 경험만을 생각하고 이미 1973년에 산아제한정책에 협조하였으며 동시에 낙태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게다가 대다수의 사회문제는 민주화에 밀려서 대부분 이슈화되지도 않았고 정부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성계는 계속해 문제를 제기해 왔으나, 1986년 뒤늦게 심각성을 느낀 종교계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정부는 의료법을 개정해 1987년에 사전 성감별 자체를 불법[16]으로 규정하였다.[17] 그리고 낙태는 근친, 부모유전병, 산모의 건강침해 등의 사유만 허가하고 임신 28주일을 넘긴 산모의 낙태는 모자보건법상 예외없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여아 낙태의 경우 대개 28주 이후여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단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여전히 산아제한정책의 기조를 이어갔고 이는 노태우 정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단속이 돼도 처벌은 미미했던지라 시한을 초과한 낙태시술이 빈번하였다.[18]

3.4. 1990년대


1990년대 들어서는 처음으로 산아제한 정책이 다소 완화되었고, 늦둥이 둘째나 셋째를 낳는 가정이 늘어 소폭 증가하기는 했다. 이때도 김영삼 정부 시절 성비불균형이 위험수준에 이르게 된 것을 깨닫고 강력한 단속을 벌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 이러한 풍조는 끝나지 않았고 1990~1994년에는 남녀 성비 불균형이 극에 달했다.
특히 1990년은 백말띠의 해라 하여 이때 태어나는 여아는 팔자가 드세다는 일제 강점기에 토착화된 미신이 나돌고 있었으므로 116.5:100이라는 기록적인 최악의 성비를 기록했다.[19][20]
또한 단순 통계로만 알 수 있었던 이 성비불균형 문제는 1985~1989년생이 취학연령이 되는 1990년대 초중반에 들어 초등학교 한 반에 남-남 짝꿍이 급격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마침내 1994년에 방영된 드라마 M에서 낙태를 소재로 하여 사회에 높은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뜻으로 '며느리도 수입하시렵니까?'라는 제목의 공익광고가 나오기도 했는데 다문화를 존중하는 2010년대 후반 시점이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광고였다.
남아선호사상의 풍조는 1980년대 중반부터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으나 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인들과 386세대의 남아 선호는 나아지지않고 여아낙태를 계속하였다.

3.5. 2000년대 이후


1990년대생 장남 낳기에 실패한 일부 가부장적 가정은 성별에 상관없이 2000년대생 초반의 자녀를 두었다. 성별 선택 낙태를 했더니 살아남은 자녀가 없거나, 90년대와 비교하면 병원에서 성별을 안 알려주며 낙태를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90년대 초중반의 110이 넘는 성비만큼은 아니나 107~109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부터 100~105, 높아도 106으로 갔다.
이것도 약빨이 떨어져 딸이든 아들이든 구별하지 않는 분위기로 변하였기 때문에[21], 이러한 사회문제는 사실상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판단된다. 출산율 자체가 급격히 낮아졌기 때문이다.
여아 낙태로 인한 성비 불균형의 여파로 2005년 제정된 생명윤리법에서는 수정 및 착상 단계에서의 아이의 성별을 감별하는 출산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4. 여파



4.1. 남초현상


출생년도
남자
여자
성비
2012년
247,964
235,086
105.48:100
2011년
243,175
229,882
105.78:100
2010년
246,191
232,153
106.05:100
2009년
229,798
215,977
106.40:100
2008년
238,920
224,924
106.22:100
2007년
255,844
241,825
105.80:100
2006년
235,052
219,349
107.16:100
2005년
226,459
210,724
107.47:100
2004년
241,014
224,318
107.44:100
2003년
255,624
236,209
108.22:100
2002년
255,870
234,734
109.00:100
2001년
284,128
260,990
108.87:100
2000년
329,056
300,859
109.37:100
1999년
326,857
298,672
109.44:100
1998년
331,975
302,913
109.59:100
1997년
347,068
321,277
108.03:100
1996년
357,319
322,666
'''110.74:100'''
1995년
371,829
332,023
'''111.99:100'''
1994년
378,839
330,837
'''114.51:100'''
1993년
377,420
329,831
'''114.43:100'''
1992년
382,928
338,966
'''112.97:100'''
1991년
369,663
331,932
'''111.37:100'''
1990년
336,585
301,316
'''111.70:100'''
1989년
335,282
298,511
'''112.32:100'''
1988년
327,652
297,911
109.98:100
1987년
320,074
296,917
107.80:100
1986년
322,654
301,238
107.11:100
1985년
334,018
311,583
107.20:100
1984년
335,730
315,454
106.43:100
1983년
378,117
358,971
105.33:100
1982년
416,128
396,916
104.84:100
1981년
431,804
414,207
104.25:100
1980년
427,003
408,230
104.60:100
1979년
426,544
409,539
104.15:100
1978년
381,637
366,171
104.22:100
1977년
393,360
382,390
102.87:100
1976년
390,151
371,915
104.90:100
1975년
400,915
388,950
103.08:100
1974년
435,929
418,746
104.10:100
1973년
453,602
445,144
101.90:100
출처 위의 표는 2014년 2월 기준 주민등록 인구이다.
[22]
가장 먼저 남초 현상이 심각해졌다.[23] 1985년부터 2006년까지 22년 연속으로 정상 성비의 맥시멈인 107.0을 한번도 빠짐없이 초과했으며, 특히 여아 낙태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발생했던 1989~1996년생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최악의 남초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1998년 이후엔 출산율이 급감했다. 결혼적령기의 남녀 중에 여자의 나이가 적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의 남자들은 안그래도 남자가 더 많은데 혼인 대상의 결혼적령기의 여자 숫자는 더 적은 이중고를 떠안게 된 셈이다.
그리고 경제개발기간 동안 이촌현상으로 인해 농촌의 남초 현상이 더욱 심각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남초 현상이 심각해진 농촌을 중심으로 이미 1990년부터 매매혼이 빠르게 늘어났으며, 현재도 계속되는 추세이다. 물론 도시 지역 역시 아주 예외는 아니다.
등급제 결혼정보회사와 같은 결혼 선호도의 변화로 도시에서도 성비 격차와 더불어 결혼할 여자를 구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36~44세까지 매매혼이 확산된 상태다. 이미 2010년 기준으로 국제결혼에서 도시가 차지하는 비율이 70%까지 늘어났다. #

4.2. 결혼문화 변화


독신 남성의 급증으로 인해 독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개선될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당장 비슷한 일을 이미 겪었던 일본은 독신주의 남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것이 현실로 나타났으며 관련 다큐까지 나왔다.

4.3. 낙태 반대론


낙태 자율화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커져 낙태 찬성측에게 여론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더욱이 낙태 찬성측의 논리는 태아를 여성 신체의 일부로 본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리인데, 성감별을 통한 여아 낙태는 태아에 성별을 부여함으로써 태아를 인간으로 보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태아가 여성의 신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성을 부여할 이유가 없다.
현재 모자보건법에 기초한 낙태죄 논란에서도 여성계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 당시 낙태 반대 운동이 여성계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1987년 개정된 의료법을 만든 것도 당시 여성계 요구가 컸기 때문이다.

4.4. 초고령화-인구 절벽 + 인구 증가율 둔화


2010년대 들어 1980~90년대생이 결혼 및 가임 연령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1997년 외환 위기와 글로벌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벌어진 취업난을 비롯한 경제인구의 역동성 저하 때문에 성별을 막론하고 결혼을 포기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이런 남초현상까지 겹쳐서 초고령인구 사회로의 진입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회 인식의 전폭적인 변화로 인해 아이가 돈 먹는 기계처럼 여겨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선 가구 당 한 아이만 낳는 추세다. 합계출산율 역시 급하락하여 2018년엔 0.98명으로 떨어졌다.[24]
게다가 저 여아낙태까지 겹쳐서 가임기 여성 인구까지 감소하고 위의 상황까지 합쳐져서 출생아 수는 더욱 급감하였다.

5. 현황과 원인


그 많던 남자애들은 어디 갔을까?
2018년 5월 11일 네이버-동아일보 역전된 성비…그 많던 남자 애들은 어디 갔을까
2018년 5월 12일 네이버-동아일보 [토요기획] 어릴적 모자라던 여자 짝꿍, 커서 보니 남녀 짝이 얼추 맞네
90년대 출생자들의 성비는 여전히 나아진것이 없으나, 80년대 출생자들의 성비는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정상적인 비율로 바뀌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남성들이 많이 태어나는 만큼 많이 사망했으며 남성의 해외로 이탈하는 비중이 여성보다 많기 때문이다.
보통 출생 당시 여아에 비해 남아가 많은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라 정상적인 남녀 출생 성비를 보통 105 대 100으로 보는데, 이후 남아 사망률이 높아 시간이 지날수록 남성의 수가 100에 가까워진다고 한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우리나라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 출생 성비는 110 대 100을 웃돌아 남아의 자연 감소분을 감안해도 100 초반 수준으로 줄어들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최근 통계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출생한 세대의 성비가 105 대 100 수준으로 회복되고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1985년생 남성은 105명, 1988년생 남성은 107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행정안전부의 2017년 12월 연령별 인구 현황에 따르면 1985~89년생 남성은 총 168만9263명이고 여성은 159만8564명으로, 여성 100명당 남성이 105.6명 정도로 태어났을 때 성비인 110 대 100에 육박한 것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2년 전인 2019년 20대 중후반인 1990~94년생의 남녀 비율은 111 대 100가량으로 여전히 높지만, 9년 전인 2012년과 14년 전인 2007년에는 113 대 100보다는 줄어들었다. 과거를 봐도 2005년 현 30대가 10대와 20대 초반이던 시절의 성비가 110 대 100, 111 대 100 정도였다.
특히 서울은 성비 역전 현상이 일어나 2018년 4월 말 기준 서울 거주 30~34세 한국 국적의 남성은 37만2768명, 여성은 37만3496명으로 여성이 조금 많다. 심지어 전국 성비가 111 대 100에 육박하는 25~29세 인구도 서울은 남성이 38만7919명, 여성이 39만2888명으로 여성 인구가 더 많다.
이런 현상이 생긴 가장 큰 이유는 자연적 남성 인구 감소 때문이다. 즉 남성은 어린 시절부터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야외활동이 많아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현 20대 후반~30대 초반 남성의 유년 시절인 1990년 유년기 남아 사망률은 인구 10만 명당 35.5명으로 21.2명인 여아에 비해 높았다. 이들이 10대가 되자 남성 사망률은 61.3으로 가파르게 올라 30.1인 여성의 2배에 달했다. 이후 2016년까지 줄곧 동 세대 남녀 사망률은 20~30명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10만 명당 고작 수십 명, 0.0X%대의 미세한 사망률 차이로는 성비 역전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자연 감소는 보건이 발달하기 이전 전근대 사회 및 혼란기 사회에나 해당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여성의 도시 선호 현상에 있다. 치안 등의 문제로 농촌보다 도시를 선호하는 현상은 이촌향도가 시작된 이래로 본격화되었다.

5.1. 출생 성비 정상화


2007년 신생아 성비가 106.1 대 100을 기록했다. 이후 출생 성비 격차는 줄곧 감소해 2016년에는 125에 맞춰졌다. 신혼 부부, 입양 부부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여아 선호 사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결혼정보업체 조사결과 남자의 여아선호도는 69.9%, 여자의 여아선호도는 51.1%로 남아 선호에서 여아 선호로 크게 바뀌었다. 국내 입양 아동 성비도 여아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여자 아이인 경우 입양을 하려면 오히려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5.2. 군복무 중 사망률


한국은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국가이며 군 복무 중의 사망률이 높은 편이다. 2014년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1993년부터 2013년까지 21년간 한 해 평균 195.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수치는 사고로 사망한 인원만 넣은 것이다. 개인 질병, 자살, 민간인에 의한 피살, 전사 등의 사망은 제외한 것이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젊은 남성이 군에 입대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군에서 숨진 사람이 국방부 발표보다 더 많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드러났다. 2018년 5월 30일부터 SBS8 뉴스에서는 연속 기획으로 한국 군대의 엉망인 의료 체계를 폭로했고, 그 결과 고 홍정기 일병 등이 군 의료진의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해 숨진 사건이 보도됐다.
2018년 5월 31일 네이버-SBS8뉴스 [끝까지판다①] 뇌출혈 병사한테 '감기약'…국가의 부름 뒤 억울한 죽음-군대 갈 땐 국가의 아들, 아플 땐 당신의 아들
2018년 5월 31일 네이버-SBS8뉴스 [끝까지판다②] 뇌출혈인데 복부 X-레이…살릴 기회 3번, 군 병원이 다 놓쳤다
그런데 2018년 6월 1일 SBS 보도에서 이렇게 사망한 고 홍 일병이 군의 사망 통계에서 빠진 것이 밝혀졌다.
2018년 6월 1일 네이버-SBS8뉴스 [끝까지판다③] 군 의료체계가 부른 참사…사망 통계 누락 '황당한 이유'
즉 저 수치조차 과연 국방부가 얼마나 솔직하게 발표했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며, 위에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은 2010년대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미디어가 활성화 되기 전, 국방부와 군의 병사 관리가 소홀하고 열악하다는 현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인 1970년대생까지는 '''정말 살아만 돌아와도 다행이다'''는 인식이 있었을 정도로 관리가 개판이었으며, 해당 세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서 사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5.3. 자살률 및 기타 사망률


남녀 사망률의 차이를 벌리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자살이다. 자살률은 '10만명당 자살하는 사람의 비율'을 나타내는데, 대부분의 나라에서 남성 자살률이 여성보다 2배 정도 높다. 우리 나라의 양상도 그렇다. 다만 여성 자살률끼리 비교하면, 한국 여성의 자살률은 타 국가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통계청의 ‘2015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자살로 사망한 남성이 9559명, 여성은 3954명이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로 보면 남성이 37.5명, 여성이 15.5명으로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2.4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다음 해인 2016년 자살 통계에서도 자살자 수는 남성이 9,243명으로 여성 3,849명에 비해 많다.
이러한 수치는 2000년대 초반 통계부터 2016년 통계까지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자살뿐만 아니라 아주 유년기가 아닌 이상은 어떤 연령대를 불문하고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의 그것에 2배 가량에 달하는 양상을 보인다. 자살, 기타 질병사, 사고사 등을 모두 종합한 남녀 전체의 사망률은 한 해에 평균적으로 25,000명에서 27,000명가량 차이가 난다.

5.4. 기타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경우 여성이 남성에 비해 평균수명이 긴 만큼 남녀 사망률 차이가 크며 생활 습관의 차이 때문에[25] 여성이 더 많다.
또한 교통사고 발생 수[26] 역시 남성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전체 교통사고 중 남성 운전자가 낸 사고의 수 여성 운전자의 3배가 넘는다.
범죄자로 수용되고 있는 인원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2017년 12월 기준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 등 교정시설에 수용된 인원은 총 55,198명이며, 이들 중 남성이 51,425명(93%), 여성은 3773명이다.
강력범죄 가운데 생명에 직접적 위협이 되는 살인 범죄의 피해자는 남성이 56%, 여성이 44%였다.
연간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인구는 2017년 말 기준으로 1,959명인데, 증가 추세에 있고 그 대부분이 남성이다. 또한 통계에 나오지 않는 산재 사망자도 매우 많다. (정부와 기업의 입김이 세기 때문에 노동 조합의 힘이 강력한 대기업이 아니라면 산재 사망 인정 받기는 아주 힘들다.)
남성 수가 빠르게 줄어든 데는 해외에 정착하는 남성이 많은 것도 원인 중 하나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해외에 나가는 경우가 더 많으나 국내로 돌아오는 것도 여성이 더 많으며 남성 해외 취업자는 장기 체류자가 많은 편이나 여성 해외 취업자는 현지에서 정착하는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5.5. 그럼 성비는 정상화 될까


결론적으로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는 남초 국가지만 상기 요인과 같은 남성의 이민률, 사망률, 국제결혼률이 계속 유지된다면 장래에는 결혼적령기 인구에서 남초가 완화될 가능성이 있다.
상기 서술된대로 남성의 사망률은 여성보다 높아 자연 상태에서는 연령이 올라가면 성비가 정상에 가까워지는것이 당연하다. 그렇다고 한국의 결혼 적령기 남성들이 제대로 짝을 찾을 수 있다고 보기에 이르다. 105:100이라는 자연성비 상태로 있어야 성인기에 정상 성비로 맞춰지는데, 80-90년대 남아 선호사상은 너무나 심각했고, 아무리 자연적으로 성비가 맞춰진들 정상 밤위에 들지 못하고 있다.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20대후반과 30대 초반의 성비는 정상화되지 않고 아직 비정상적임을 알 수 있다. 110명대 성비를 두고 성비가 정상화되고 인구구조적으로 안정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젊은 층과 여성의 경우 대도시, 즉 서울 거주를 선호하기 때문에 80-90년대 성비 불균형에도 서울은 여초 현상이 더 심화되어 있다. 그 말은 주변 지역의 여성들이 20대에 들어서면서 대거 서울로 몰려들었고, 수도권 외 지방의 남초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 상태라는 것이다. 실제 올해 4월 기준 서울에 사는 30~34세 남성(한국 국적자 기준)은 37만2768명이고, 여성은 37만3496명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남성성비가 111에 육박하는 25~29세 인구도 서울에선 여성(39만2888명)이 남성(38만7919명)을 압도한다.
현재 1980~90년대생 사이의 남초현상은 100:120이라는 경악할 수치를 찍던 출생 때보다 조금 완화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정상 수치보다 높다. 성비불균형이 아직 드러나지 않던 세대인 80년대 중반 출생자[27] 를 기점으로 성비가 크게 낮아져,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그 수치는 정상 성비인 100명대 초중반에 고정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예천군의 유치원생들은 남초이다.
2019년 10월 출생성비[28]

남성
여성
성비
비고
15~19세
1,394,737
1,287,990
108.72명
[29]
20~24세
1,788,783
1,615,311
110.74명
[30]
25~29세
1,835,889
1,642,938
115.29명
[31]
30~34세
1,630,180
1,528,130
106.63명
[32]
35~39세
2,013,457
1,935,923
103.88명
[33]
40~44세
1,990,047
1,923,546
103.46명
[34]
45~49세
1,962,420
1,908,263
103.30명
[35]
##
2019년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2019년 10월 말 여성 인구는 2598만5796명으로 남성(2586만5304명)보다 12만 492명이 많다. 이는 한국이 고령국가로 들어서면서 여초 국가로 바뀐 결과다.
20~30년 뒤에는 결혼적령기 남녀비율이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현재 30대 후반 미혼 인구는 이미 여성에 비해 남성이 모자란다. 주민등록 통계에 따르면 2016년 기준 35~39세 여성인구가 158만9284명으로 남성에 비해 1만9364명이 많다. 여초 현상이 두드러진 서울에선 해당연령대의 미혼 여성(33만9502명)이 남성에 비해 2만5795명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노인 인구 비중이 높은 사회는 여초 인구 구조를 갖게 되어 실제로 소말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나미비아, 짐바브웨 등 내전으로 남성 인구가 부족한 경우를 제외한 북미, 일본, 유럽은 대부분 여초국가다. 특히 고령인구가 많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남녀 성비가 95 미만, 일본은 90 미만으로 심각한 여초국가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수명이 짧기 때문에 노인의 성비도 자연히 극여초로 수렴한다.

6. 외국의 사례


출생 성비가 파괴된 나라 자체는 몇 안 된다.[36] 2010년 이전의 한국, 중국, 인도, 베트남, 아르메니아, 대만 등 10여개 이하. 문제는 이들 10여개 이하의 나라가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전세계 인구의 1/3이(75억명중 25억명) 넘는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흑인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남아가 적게 태어난다. 여초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고 남녀 출생성비가 1:1에 가깝게 되어, 다른 인종에 비해 남아 출생률이 낮은 편.
아시아의 성비불균형의 실태를 파헤친 논픽션 저서 '''남성과잉사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아시아에 미국 전체 여성보다 많은 1억 5,000만의 여성이 부족하다고 나오고 있다. 적어도 2050년까지 이런 남성 과잉으로 인한 사회문제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단, 이것도 낙태가 줄어들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6.1. 중국


중국에서는 아직도 팽배한 산아 제한 정책의 여파로 인해 현재 진행형의 문제다. 이 쪽은 아예 산아제한 정책이 30년 넘게 진행되다 보니 한국 못지않게 훨씬 심각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 한국은 그래도 2000년대 들어 성비 불균형 현상이 해소되는 추세에 있지만, 중국은 아직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서 중국 오지의 일처다부제를 실시하는 곳에서 신부 매매가 이뤄지는 상황이다. 특히나 이 지역은 더 혹독한 대접을 받기 때문에 더 높은 가격으로 신부들이 거래된다고 한다. 다만 이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지역에서 매매혼이 흔한 걸 생각하면 딱히 놀라울건 아니다.[37]
심지어 조혼 풍습까지 부활하고 있다. 남아가 있는 집안이 미리 같은 또래의 아이를 얻어 결혼시키는 것이다.

6.2. 인도


인도에서는 결혼을 하면 신부측에서 신랑 쪽 집안에 지참금을 주는데, 이 지참금이 몇 년치 봉급 수준이다 보니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여아를 사전에 낙태시키거나 이미 태어난 여아를 죽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도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남아선호사상이 만연해 있어 성비불균형이 심각하다.[38]
이 때문에 신부매매를 하거나 조혼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조혼이나 신부매매는 중국이나 인도나 상황이 비슷하다.
특히 조혼을 할 경우 악명높은 인도의 신부지참금을 면제받을 수 있어 가난한 가정에서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신부의 일부는 인신매매를 통해서 구하고 있을 정도로 불균형이 심각하다. 참고로 인도는 이미 전세계 조혼 풍습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다만 인도에서는 이런 문제로 인해 카스트 제도가 약화되는 순기능도 있다. 높은 카스트의 남초가 심하여[39] 상대적으로 성비가 안정된 낮은 카스트의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생긴 일이다. 게다가 동남아의 경우 국제결혼으로 경제적 혜택을 입은 극빈층을 중심으로 여아 출산을 늘리기까지 하는 상황이다.

6.3. 일본


[image]
1873~2010 일본 내 성별출생자수 및 성비 통계자료
출처 : 후생노동성
2011년 이후
년도
남아
여아
성비
2011
538,271
512,535
105.0
2012
531,781
505,450
105.2
2013
527,657
502,159
105.1
2014
515,533
488,006
105.6
2015
515,452
490,225
105.1
2016
501,880
475,098
105.6
2017
484,449
461,616
104.9
출처 : 일본정부 e-Stat 출생성비 및 합계특수출생률
일본의 경우 1948년 미군정 시기에 산아제한정책이 시행되었으며 낙태(임신 22주 이내) 또한 이때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허나 110을 넘어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출생성비의 최고점은 1966년도로 고작 107.6을 기록하였다.[40]
세계적으로 남성의 평균수명이 짧고 사망률도 높듯이 일본 또한 고령화와 더불어 고령 여초 사회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나이든 자식들의 노모 부양과 같은 사회문제도 발생했다.

6.4. 기타


최근에는 종교, 지역을 넘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알바니아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은 지정학적, 종교적, 사회적 유사성이 거의 없는 국가인데도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오직 경제가 한창 발전 중인 개발도상국이며 산아제한정책을 실시하고 낙태가 자율적인 것 외에는 없다.
당연히, 이런 현상을 겪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음성적인 성매매의 광범위한 활성화로 에이즈 등의 성병 전파가 증가되는 등 사회적 문제는 위험수위에까지 이르고 있다. 선진국이라면 성노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성병검사를 하고 이것은 잘 지켜지지만 저 문제가 일어나는 곳들이 중국을 제외하면 대부분 개발도상국이다.
미국, 캐나다에서도 아시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캐나다에서 아시아계 이민 1세대의 출산률을 조사한 결과 비정상적인 남초현상이 나타났다는 것.#[41] 이것도 필리핀계, 일본계는 성비 불균형 출산 문제가 없고, '''한국계, 중국계, 인도계가 가장 심하다. 이 셋 중에서도 한국이 제일 심하다.'''
오바마 행정부는 성감별 후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진보단체와 아시아계를 중심으로 한 여성단체의 반발로 의회에서 부결된 사례가 있다. 다만 하원에선 20주 이상 태아 낙태금지 법안이 통과된 상태이며#, 일부 주에서도 낙태 규제를 강화하는 상황이다.# 최근에 일어난 텍사스 주의회 필리버스터로 낙태법안을 무산시킨 사건#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42]

7. 관련 문서


[1] (남자 신생아의 수/여자 신생아 수) *100을 한 수치다. [2] 이 수치를 벗어나면 인공적으로 출산에 개입을 한 것으로 여긴다.[3] 1990년이다. 이유는 아래 항목을 참고.[4] 불균형이 역대 최고였던 1990년생도 짝수해고 앞뒤해보다 유독 두드러졌던 1986년, 1988년, 1998년, 2000년, 2002년, 완전히 정상범위를 되찾은 2007년 이후 가장 높았던 2010년 모두 짝수해다. 반면 불균형이 잠시나마 약간 완화된 1987년, 불균형이 사그라든 1997년은 홀수해고 정상범위를 되찾은 2007년, 아예 105단위로 정확히 세계평균치 라인까지 되찾은 2011년 역시 홀수해.[5] 예를 들면 정관수술하면 에비군 훈련 퇴소, 민방위 훈련을 면제해주던 정책이 있었는데, 2003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심지어 보험도 비 급여 항목으로 바뀌었다.[6] 물론 이건 한창 경제발전할 때 얘기고, 출산율도 대체출산율(2.1명) 밑으로 떨어지면 아동인구에 대한 부양이 줄어들면서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지 몰라도 노령인구 비중이 급속히 늘어난다.[7] 다만 알바니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과 미국-캐나다, 호주-뉴질랜드에선 정책으로 반영이 되지는 않았다. 동시기에 여성의 사회활동 진출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피임약이 널리 보급되면서 출산율이 급속히 떨어지는 바람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었기 때문.[8] 다만 박정희 정부 때까지는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는데, 당시에는 출산율이 크게 줄었다고 해도(1955년:6명→1982년 2.5명) 아직은 출산율이 인구대체 수준(2.1명)을 훨씬 웃돌았다. 그리고 낙태는 가능했지만 의료시설과 비용에 문제가 있었고 무엇보다 성 감별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9] 이 때문이라도 많이 낳으려고 했다. 아기의 백일잔치돌잔치 풍습, 출산 후 늦은 출생신고도 여기에 기인한다.[10] 당시 보통 가구 당 평균 자녀수는 6명 이상(영유아 사망 제외)이였고 간혹 10명 이상도 있었다.[11] 박정희가 일부합법화했다고 하나, 산아제한을 이유로 한 낙태는 당시에도 명백히 불법적이었다.[12] 자연적으로 출생성비는 '남아 105:여아 100'이다. 이후 사고나 질병 등의 이유로 가임기에서 거의 1:1로 맞춰지고, 평균수명 때문에 노년기에 여초화된다.[13] 차범근 항목에 걸려있는 그 포스터 맞다.[14] 한국과는 달리 중국은 계획생육정책으로 강제적으로 시행되었기에 좀 다르기는 하다.[15] 참고로 이 기사의 주인공 딸(페이스 베스케즈, 한국 이름 권선영)은 몇 년 후 배달의 무도 특집에 출연하였다.[16] 당시 조항은 의료법 제19조의2에 규정되었으며 1988년에 시행되었다. 내용은 의료인은 태아의 성감별을 목적으로 임부를 진찰 또는 검사하여서는 안되며, 같은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도와 주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료인이 태아 또는 임부에 대한 진찰이나 검사를 통해 알게된 태아의 성별을 임부 본인, 그 가족, 기타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하였다.[17] 201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관련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32주 이전 태아에 대한 성감별은 무조건 의사면허취소 사유로 간주되었으며, 1994년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는 처벌규정까지 생겼다. 참고로 면허취소 사유는 정신질환이나 마약중독 등으로 정상적인 의료행위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나 의사 면허증의 대여, 의료법 관련 금고형 이상을 받는 등 중죄에만 적용된다.[18] 1990년대 들어서 사문화되긴 했지만 산아제한정책은 공식적으로 1997년에야 완전히 사라졌다.[19] 1990년 1~3월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음력 1989년 12월로 일찍 출생신고를 하기도 했으며, 1990년 늦가을이나 겨울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음력 1991년 설이나 1991년 입춘까지 묵혀두다 출생신고를 하고는 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출생신고를 미리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터라 후자가 절대적으로 많다. 그래서인지 1991년 1~2월생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20] 비슷한 사례로 일본에서는 1966년에 출생아 수가 잠깐 줄어든 적이 있었는데, 이는 병오년에 태어난 말띠 여자는 기가 쎄서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 낳기를 꺼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21] 오히려 딸을 원하는 가정도 등장하였다.[22] 출생아 수, 출생 당시 성비를 고려했을 때 1974~2013년생이 아니라 1년 당겨서 1973~2012년생으로 추정된다.[23] 재미있는 것은 북한은 여초화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1978년부터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했는데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제난 때문에 남아선호사상이 있는데도 아들, 딸 나눠서 낳을 여유가 사라져서 경제인구 여초화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남한에 비해 의료시설 등이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24] 2019년은 0.92명으로 더 떨어졌으며, 더 심각한 저출산으로 인해 2019년 11월에 인구 자연감소가 발생했다.[25] 과음, 담배, 야근[26] 다만 이건 평균 사고율의 차이보다 단지 남성 운전자가 많기 때문이다. 평균 사고율은 여자가 약간 높다.[27] 아직 아이를 많이 낳던 때였다. 여자 아이가 생겨도 지우기 보다 아들을 또 가지면 되던 시절.[28] 2019년 10월 1일 기준[29] 2000년생 ~ 2004년생, 당시 출생성비 107명 ~ 109명[30] 1995년생 ~ 1999년생, 당시 출생성비 109명 ~ 111명[31] 1990년생 ~ 1994년생, 당시 출생성비 115명 ~ 116명, 성비 문제가 극에 달하던 때.[32] 1985년생 ~ 1989년생, 당시 출생성비 111명 ~ 116명, 성비문제가 극에 달하던 때.[33] 1980년생 ~ 1984년생 , 당시 출생성비 105명 ~ 109명[34] 1975년생 ~ 1979년생, 당시 출생성비 106명 ~ 110명[35] 1970년생 ~ 1974년생, 당시 출생성비 109명 ~ 112명[36] 아직 종교의 힘이 강한 것이 현실인데, 크리스트교, 이슬람 등 메이저종교들은 낙태를 금기시한다.[37] 반대로 여자가 금덩이가 되어 시부모앞에서 남편을 구타해도 아무도 찍소리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괜히 뭐라 했다가 여자가 집나가면 그게 더 손해니깐....한 시골마을에서는 남편이 죽자 동네남자들이 장례식장에 몰려와서는 과부에게 작업을 건 경우도 많다고.[38] 대체로 아랍권 국가에선 신랑 쪽 집안이 신부 쪽 집안에 지참금을 주는 제도가 일반적이라 결혼 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은 편이다.[39] 여아 낙태는 성감별이 가능하고 안전한 낙태가 가능한 고소득층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40] 이는 1966년이 병오년이었는데, 병오년에 태어난 말띠 여자는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 낳기를 꺼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41] 이 조사에선 한국은 둘째아 남아성비가 무려 120로 나왔다. 다만 조사자가 말했듯이 표본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참고 사항으로만 보는게 좋다.[42] 다만 미국의 경우 아시아 이민자들의 성감별 낙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불법 낙태로 8~9개월의 임신 후기 태아를 유도분만 이후 살해한 커밋 고즈널 사건도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로 해당 인물은 현재 1급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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