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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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루클린 다저스
1884년 창단 이래 LA로 이전하기 전인 1957년까지는 뉴욕의 브루클린을 연고지로 했었다. 1884년 브루클린 애틀란틱스로 창단하여 초기에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에 속하며 1889 시즌에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890년 내셔널리그에 가입한 후 타 팀들이 '플레이어스 리그'의 창단으로 주전들을 잃는 와중에도 애틀란틱스는 주전 대다수를 지켜냈다. 이후 부진한 세월을 보내다 1899년 찰스 에베츠 구단주가 지분 30%를 볼티모어 오리올스[1] 구단주 해리 반 더 호스트에게 내주는 대신, 네드 핸런 감독과 윌리 킬러, 허기 제닝스, 조 켈리, 짐 허그스, 덕 맥제임스 등 주축 선수들을 받아 동년도 및 1900년 시즌에 연속 리그 우승을 이뤘다.
그러나 팀은 이들이 떠난 뒤 40여년 간 이웃 뉴욕 자이언츠와 뉴욕 양키스에 밀려 침체기를 겪었고, 월드시리즈에는 1916 및 1920 시즌밖에 못 갔다. 소유주와 팀명이 거듭 변경되는 등 난항이 있었다. 1932년 '''브루클린 다저스'''[2] 로 개명한 후 LA로 이전할 때까지 이 명칭을 사용했다. 브루클린 시절에는 여덟 번이나 개명을 했지만, 모두 브루클린을 연고지명으로 사용했고 한번도 뉴욕을 연고지명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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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다저스 경기장인 에베츠 필드
침체기에 빠진 팀에 서광이 비친 건 1938년, 전 신시내티 레즈 단장 래리 맥파일[3] 이 사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팀 전력강화에 매진하여 1941년에 다시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브루클린 시절이 끝나는 1957년까지 7번의 우승을 차지하면서 일약 내셔널리그의 강호로 도약하기에 이른다. 특히 맥파일 사장 임기 4년 동안 팀은 인기가 쭉쭉 상승했고, 재정적으로도 점차 안정됐다. 내셔널리그 우승을 못하던 시절에도 2등을 5번 차지하는 등, 염소의 저주를 얻어맞고 몰락해버린 시카고 컵스를 제치고 완벽하게 리그의 강호로 군림했다.
1943년부터 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단장 브랜치 리키가 사장 겸 단장으로 부임해 다저스에도 '팜 시스템'을 구축시켰고, 1947년 재키 로빈슨을 데뷔시키면서 메이저리그를 감싼 '인종의 벽'을 뚫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셔널리그의 강자로 성장했던 다저스는 이 업적 하나로 순식간에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존경받는 팀 중 하나로 더욱 거듭났으며, 가장 못했던 때가 3위였을 정도였다. 1948년에는 흑인 포수 로이 캄파넬라가 데뷔했고, 이듬해에는 중견수 듀크 스나이더도 성장하여 길 호지스-로이 캄파넬라 파워라인을 뒷받침해줬고, 역시 흑인인 신인 투수 돈 뉴컴도 팀내 최다승인 17승을 거두며 포텐을 터뜨렸다. 뒤이어 마이너리그 팀 몬트리올 로열스에서 각각 단장과 감독을 하던 버지 버베이시와 월터 앨스턴이 1950년, 1954년에 각각 단장과 감독으로 부임했다. 1953 시즌에는 최다승인 105승을 기록하는 한편, 뛰어난 타선으로 타율, 출루율, 장타율, 득점, 홈런, 총루타, 도루 등에서 모두 선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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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뉴욕 양키스 vs 브루클린 다저스 월드시리즈 포스터
하지만 현실은 이런 형태였다. 아래쪽의 추레한 캐릭터가 바로 브루클린 다저스의 마스코트 Brooklyn Bum(혹은 Dem Bums).
다만 월드시리즈에서 번번히 뉴욕 양키스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1941년, 1947년, 1949년, 1952년, 1953년까지 모두 뉴욕 양키스를 만나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지면서 그야말로 콩라인이 어떤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여줬다. 다행히 1955년에 조니 포드리스가 3차전에서 2실점 완투승, 7차전 완봉승으로 뉴욕 양키스를 누르면서 한 차례 우승을 차지했고, 포드리스가 MVP를 받아 자존심을 세웠다.
반면 1956년 월드시리즈에선 양키스 주전 돈 라슨의 퍼펙트 게임으로 또다시 월드시리즈에서 밀리면서 제대로 물을 먹었다. 뉴욕 시절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양키스에 조공(?)한 월드 시리즈만 해도 다저스가 6회, 자이언츠가 4회이다.[4] 게다가 정규시즌에서도 1950년, 1951년 2년 연속으로 마지막 경기에서 2위가 확정되어 월드시리즈 진출을 놓치기도 했다. 1950년은 1위 필리스를 상대로 이기면 타이브레이커로 끌고갈 수 있는 경기에서 10회에 결승타를 얻어맞아 패했고, 1951년은.....
2. 서부 이동과 1960년대의 전성기
뉴욕의 1인자가 되기 위한 시도로 당시 구단주인 월터 오말리는 브루클린 행정당국에 돔경기장 건설에 대한 협조를 요청한다. 그러나 이 협조 요청은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구장 여건에 대한 불만 및 뉴욕에서 밀린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57 시즌이 끝나자 뉴욕 자이언츠의 구단주였던 호레이스 스톤햄을 '''서부로 가자'''고 꼬셔서 서부로 이동한다. 다저스는 로스앤젤레스에, 자이언츠는 샌프란시스코에 입성하는데 이 결정이 두 팀의 '''운명을 갈랐다.'''
다만 여기엔 약간의 카더라급의 여담이 있다. 원래 오말리는 뉴욕을 떠날 생각이 없었고 될 수 있는 한 팀을 뉴욕에 잔류시키기 위해 애썼는데 오히려 시에서 나 몰라라 했다는 것이다. 이 쪽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저스는 당시 구장인 에베츠 필드(Ebbets Field)를 허물고, NBA 브루클린 네츠의 홈구장인 현재의 바클레이 센터 자리에 새로운 구장을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뉴욕시 건축담당자였던 로버트 모제스(Robert Moses)는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위치에 구장이 들어서길 바라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퀸즈 플러싱, 즉 지금의 뉴욕 메츠 홈구장인 시티 필드[5] 자리였다. 모제스는 다저스가 자신이 원하는 곳에 구장을 설립하지 않는다면 예산지원을 해주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오말리는 해당 지역을 거부한 것과 동시에 옛 구장을 그대로 쓸 생각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옮겼다는 것이다. 이 것을 들어서 모제스가 나쁜 놈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미국에도 많이 돌고 있는데, 월터 오말리의 평판이 회복될 일은 별로 없다. 기존구장을 못 쓰겠다고 한 것도 해당지역이 저소득층이 늘어났다[6] 라는 등의 경제적 이유였고, 퀸즈 지역을 거부한 것도 기존 홈인 브루클린을 유지하겠다라는 것도 있지만 해당지역이 시영부지였기 때문에 부동산 업자인 오말리가 그 땅을 공짜로 넘기지 않으면 싫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시영부지인 상태로 임대하는 것도 거부, 그럼 구매하라는 것도 거부했다. 여기에 원래는 워싱턴 세네터스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로스앤젤레스 시 당국에게 자신들을 데려가라고 설득한 것도 월터 오말리였다. 즉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도 오말리의 평판은 뉴욕에서는 여전히 최악인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오말리는 옛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 팬들에겐 송병준과 같은 존재로 남아있다. 농담처럼 적혀 있는데, 이 당시 다저스와 자이언츠 팬들의 멘붕은 이정도로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뉴욕에서 2위이고, 3위라고 하지만 다저스와 자이언츠는 뉴욕 양키스 안티팬들만으로도 어지간한 빅마켓 수준을 자랑했다[7] . 그런데 두 구단이 떠난다고 하니 팬들은 애원, 협박, 성토, 설득, 분노 등을 통해서 이전을 막으려고 애썼고, 이 일의 원흉인 오말리 성토대회는 거의 매일 열렸다고 한다. 특히 다저스의 연고였던 브루클린은[8] 하층민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다저스는 유일한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9] 이 당시 이들의 불만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1958년 뉴욕의 대표적인 두 칼럼리스트 잭 뉴필드와 피트 햄밀이 '''역사적으로 태어났으면 안 될 인물 10명'''을 꼽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쓴 글에서 1위에서 3위까지가 모두 같았다. 1위 아돌프 히틀러, 2위 이오시프 스탈린, '''3위 월터 오말리'''.
이라는 것은 당시 유명한 조크. 이 농담은 나중에 여러 버전[10] 이 생겨났지만 원조는 월터 오말리다.If you lock Hitler, Stalin and Walter O'Malley in a room with a Brooklyn Dodgers fan and give him two bullets for his gun, whom would he shoot?
히틀러와 스탈린, 오말리를 다저스팬과 한 방에 가두고, 다저스 팬에게 2발만 장전된 총을 준다면, 그 다저스 팬은 누구를 쏠까?
Shoot O'Malley twice!
'''"오말리에게 두 방"'''
서부 이동은 다저스에게 큰 성과를 가져다 주었다. 메이저 스포츠에 굶주려 있던 당시 서부 지역 사람들은[11] 옮겨온 명문팀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 예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캔들스틱 파크를 홈구장으로 쓰던 당시, 새 구장 신축 여부를 놓고 시와 갈등이 있었는데 항간에 타 지역으로 이전을 한다 카더라, 심지어 '뉴욕으로 다시 돌아간다 카더라'란 뜬소문이 나돌자 팬들이 '부탁이오 가지 마오(Please don't go)'란 피켓카드를 들면서까지 타 지역 이전을 막았다. 그래서 구장 부지도 비교적 헐값에 얻을 수 있었고, 최초로 흑인 선수를 등용하면서 우수한 흑인 및 히스패닉 선수들을 무한정으로 얻었다. 여기에 흑인 관중 유치에서 가장 앞서나간 것은 덤. 인기가 올라가면서 자연히 다저스는 더욱 성공적으로 로스엔젤레스 지역에 정착할 수 있었고, 결국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도약하는데 성공했다.[12]
LA 입성 첫 해는 순탄치 않았다. 오프시즌부터 주전 포수 로이 캄파넬라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전력에 구멍이 생겼고, 타자들이 임시구장 LA 메모리얼 콜로세움에 적응을 못해 14년만에 리그 7위로 굴러떨어졌으나, 신인 모리 윌스의 막강 타선과 투수 샌디 쿠팩스-돈 드라이스데일의 좌우 듀오가 조화를 이뤄 1959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962년 신설구장 다저 스타디움이 개장한 후 첫 시즌에서 윌스가 최다 도루기록 104개를 찍고 MVP를 받았다. 또 드라이스데일과 쿠팩스가 사이 영 상 및 방어율 1위를 각각 따냈다만, 정작 시즌 막판에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타이브레이크 끝에 져서 월드시리즈를 못 갔다.
1963년에는 샌디 쿠팩스의 괴물같은 활약으로 정규시즌을 씹어먹고 월드시리즈까지 가서 뉴욕 양키스를 4-0 스윕으로 끝내버렸는데, 명언제조기 요기 베라의 말씀이 아주 걸작이다. 월드시리즈 시작 전 '''25승 5패 평균자책점 1.88'''의 성적을 올린 샌디 쿠팩스를 두고 '''저런 애송이에게 25승이나 내주다니 내셔널리그 타자들은 전부 바보인가?'''라고 말했는데, 시리즈 종료 후 '''25승을 어떻게 올렸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5패나 한겨?'''[13] 라는 말이다.
1964 시즌에는 쿠팩스가 전 시즌보다 낮은 19승을 기록했고, 월드시리즈에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했다. 1965 시즌에 쿠팩스가 26승을 거뒀으나, 9월까진 숙적 샌프란시스코에게 고전하다 막판 13연승으로 리그 우승을 따내 월드시리즈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7차전 완봉승으로 이겼다. 1966년에도 쿠팩스가 27승을 거두는 등 리그를 쓸어서 월드시리즈에 연속으로 오르지만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4-0 스윕을 당한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샌디 쿠팩스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는데[14] '''27승 9패 평균자책점 1.73'''의 기록을 올린 괴물 에이스의 공백을 메꾸지 못해[15] 1967 시즌부터 7시즌간 가을야구를 못 치렀고, 결국 다저스의 1960년대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3. 1970년대: 2인자의 시대
1969년에 버지 버베이시 단장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창단으로 인해 떠나자 알 캄파니스 스카우팅부장이 단장으로 승진했고, 1970년에는 월터 오말리 구단주 겸 사장이 회장으로 추대돼 2선에서 물러나자 아들 피터가 사장이 되어 2세 경영 체제가 확립됐다. 샌디 쿠팩스가 은퇴하고 돈 드라이스데일이 노쇠하면서 1970년부터 1973년까지 4년 연속 서부지구 '''2위'''를 기록하면서 암흑기 아닌 암흑기를 걷게 되었을 뿐, 강호로서의 입지는 여전히 탄탄했다.
앨스턴 감독은 스티브 가비-데이비 롭스-빌 러셀-론 세이 등을 중심으로 막강 내야진을 만들어 1974년 정규시즌 때 돈 서튼과 앤디 메서스미스의 활약으로 신시내티 레즈를 102승으로 4경기 차로 눌러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꺾었으나, 월드시리즈에서 당대 최고의 팀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게 5경기만에 패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등장한 '빅 레드 머신' 신시내티 레즈와의 치열한 패권다툼의 시대가 전개됐는데, 같은 막강 타선으로 똘똘 뭉친 신시내티와 달리 다저스는 돈 서튼, 클로드 오스틴, 버트 후튼, 토미 존, 마이크 마셜, 앤디 메서스미스 등 막강 마운드가 버텼다. 일단 1975년과 1976년에는 신시내티에 밀려서 지구 2등에 만족해야 했다.
이 상태로 1976 시즌 도중에 1960년대의 영광을 이끈 월터 앨스턴 감독이 은퇴하고, 후임으로 토미 라소다 3루 코치가 감독 자리를 메웠다. 1977년과 1978년에 각각 2년 연속으로 신시내티 레즈를 제치고 지구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만년 하위팀에서 강호로 등장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2년 연속 제치고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 때도 다저스의 발목을 잡은 것은 레지 잭슨의 뉴욕 양키스였다. 2년 연속 만난 과거 뉴욕의 라이벌과의 클래식 매치에서 2년 연속 패배하면서 1970년대는 결국 2인자의 시절로 마무리해야 했다.
4. 1980년대: '페르난도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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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우승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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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우승 장면
1980년에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라는 멕시코 출신의 에이스를 발굴하여 히스패닉계 팬들을 끌어 모으면서 다시금 인기의 발판을 마련한 후, 1981 시즌에는 파업으로 일정이 줄어드는 난제에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레 젝스포 드 몽레알(몬트리올 엑스포스)과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 상위 4개 팀들을 꺾어[16] 월드시리즈에 나섰고, 그동안 지긋지긋한 뉴욕 양키스를 꺾고 드디어 26년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83년과 1985년에는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패배해 '내셔널리그의 영원한 강호'란 타이틀이 무너졌으나, 1987년 프레드 클레어 홍보담당 부사장이 단장으로 부임한 후 1988년 시즌 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사온 커크 깁슨과 프랜차이즈 에이스 오렐 허샤이저의 활약으로 리그에서 선두를 달렸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선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데이비드 콘-드와이트 구든-론 달링 삼각편대의 뉴욕 메츠를 꺾었고, 월드시리즈에 올라 104승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1차전에 커크 깁슨이 그 유명한 절뚝거리면서 끝내기 홈런을 시작으로 당시 쌩쌩한 에이스 오렐 허샤이저의 역투까지 더하여 4승1패로 우승을 차지한다.
전반적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강호로서 군림하기는 했지만, 우승을 노리기에는 한끗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늘 상위권에서 활약했던 시절이었으니, 실패한 시즌은 거의 없었다.
5. 암흑기 아닌 암흑기
1990년에 발렌수엘라가 이웃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떠난 후 암흑기 아닌 암흑기에 돌입했다. 이 와중에도 1991년에 대럴 스트로베리와 브렛 버틀러를 영입해 활기를 불어넣었으나 1992 시즌에는 리그 최악의 승률인 99패를 기록했다. 다만 에릭 캐로스와 마이크 피아자, 라울 몬데시, 라몬 마르티네즈, 이스마엘 발데스 등 팜 출신 유망주들이 팀을 재건해 1995년과 1996년에만 플레이오프 진출했으니 암흑기라 해야 맞지만 정작 성적은 꾸준히 5할 이상 내는 괜찮은 성적이라서 완벽한 암흑기도 아니었다. 특히 1995 시즌에는 막강 타선을 자랑했던 풋내기팀 콜로라도 로키스를 꺾어 역사상 최초로 디비전 시리즈에 올랐으나, 신시내티에게 3연패로 광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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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클레어 단장의 능력이 빛을 발해 5년 연속 내셔널리그 신인왕(사진 좌측부터 에릭 캐로스, 마이크 피아자, 라울 몬데시, 노모 히데오, 토드 홀랜스워스)을 배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아시아 지역의 개척에 나서 노모 히데오와 '''박찬호'''를 등장시킨 것도 1990년대였다. 흥행이라는 면에서 보면 흑인 선수 및 그 시장의 개척, 히스패닉 선수 및 그 시장의 개척에 이어, 세 번째로 다저스가 또 다시 새로운 시장을 발굴했으니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1990년대가 다저스의 최고 침체기였던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1996년 7월에 팀 최고의 명감독 토미 라소다가 심장 이상으로 쓰러져 팀을 떠났고, 산하 마이너리그 팀 앨버커키 듀크스 감독인 빌 러셀이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아 처음으로 와일드카드에 진출했으나, 당대 최강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게 3연패로 또 광탈당했다.
1998년 3월 19일엔 피터 오말리 구단주가 경영권을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에 팔아넘기는데,[17] 이때부터 2004년까지는 다저스 팬들도 완벽하게 흑역사 취급하고 있다. 새 구단주 머독은 야심차게 돈을 뿌렸으나 팜 중심인 팀에게 거액 투자와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동년 시즌 도중에 마이크 피아자와 토드 질을 플로리다 말린스의 게리 셰필드 등 4명과 맞바꾸는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으나, 약빨이 안 먹혀 지구 3위로 굴러떨어졌다. 1999 시즌 때 사상 최초의 억대 계약으로 케빈 브라운을 사들이고 명장 데이비 존슨 감독도 모셔왔으나 성적은 더 오르지 못했고, 2000 시즌에도 숀 그린까지 보강하며 월드시리즈를 노렸으나 결과는 뻔할 뻔자다.
FOX 시기 동안 감독들은 두 시즌 간격으로 교체됐고[18] , 1998년 클레어 단장이 떠난 후 케빈 말론같은 후임 단장들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좀 한다 싶은 선수들에게 지나친 거액을 안겨주며 계약하면서[19] 팀 운영도 힘들어졌다. 1999년에는 로버트 데일리 타임워너 영화/음악담당 회장이 구단 회장을 맡아 사실상 운영권을 위임받았다.
특히 90년대에는 훗날 명예의 전당급으로 성장하는 '''페드로 마르티네즈''', '''폴 코너코'''를 다른 팀에 퍼주며 남 좋은 일만 해주는 등 여러모로 속쓰린 일이 많았다. 토미 라소다의 감독직 은퇴 이후 한솥밥을 먹었던 유격수 빌 러셀에게 밀려 감독직을 얻지 못한 과거 다저스의 명포수는 결국 옆동네로 떠나서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세이버메트릭스를 팀의 모토로 삼았던 폴 디포데스타 단장은 팀내 리드오프감 중견수 유망주를 두번이나 룰5 드래프트로 내몰고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기도 했는데, 그 선수는 2008년부터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내셔널리그 외야 골드글러브를 3연패한 중견수 셰인 빅토리노.
6. 막장 맥코트 시대
돈을 우선시하던 뉴스 코퍼레이션 측은 부동산 재벌 프랭크 맥코트에 팀을 팔았고, 새 구단주 맥코트는 고액 연봉의 먹튀들을 차례차례 처분하면서 다저스는 다시 회복되어 갔다. 물론 이 때는 맥코트가 '''다저스의 진정한 재앙'''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2004년 8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 비록 첫 상대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처참히 말리고 탈락했지만. 이후 2006년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008년과 2009년에는 2년 연속으로 내셔널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 올라가지만 2년 연속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패배했다. 월드시리즈는 20년째 못 올라가고 있지만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강자 자리를 탈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기간동안 좋은 성적을 보여주자 떠나갔던 관중들도 차츰 돌아와서 메이저리그 전체 관중동원 2위의 초인기구단의 위상을 회복했다.
그러나 다저스의 진정한 재앙이 찾아오는데, 바로 구단주 맥코트가 상상 이상의 막장이었던 것. 이미 빚을 내서 구단을 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빚을 만회하기 위해 다저스를 이용할 것은 점쳐졌지만, 구단주 부부가 이혼소송을 하면서 팀을 담보로 싸움질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에 팀의 재정을 구단주의 사적인 일로 낭비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팀을 도저히 돌볼 수도 없는 상태임이 드러났다. 다저스를 담보로 거액의 돈을 빌려 사치를 일삼았고, 심지어 다저스를 통해 정치 자금을 모아 정계 진출까지 꿈꿨다고 한다. 여기에 점성술사를 고용해서 그들의 점에 따라 승패를 점쳤다고 하니 이건 뭐(...). 그래서 대권을 노리고 질러야 할 2009년 오프시즌 동안에 정작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동쪽의 누구는 이해할 수 없는 괴짜스러운 행동을 저질러도 제국을 재건하기라도 했지...
분명 2010 시즌 선발진은 화려했다. 제2의 샌디 쿠팩스를 꿈꾸는 88년생 좌완 영건 클레이튼 커쇼, 2009 시즌 전반에 사이 영 페이스를 달렸던 채드 빌링슬리[20] , 첫 시즌부터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여 좋은 모습을 보인 존 일라이, 일본인 투수 구로다 히로키, 준수한 4~5선발의 성적을 보이는 비센테 파디야까지. 하지만 구단주의 막장짓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흔들리는 팀이 성적이 잘 나올리가(...).
급기야 명문 다저스가 선수들 월급을 못 줄 신세에 몰렸다. 결국 중계권을 FOX에 헐값에 팔아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개입해서 중계권 계약을 무효로 만들었다. 결국 맥코트 부부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다저스는 2011년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명문 다저스라는 위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저스를 노렸다. 댈러스 매버릭스의 구단주 마크 큐반이나, 다저스의 스타 출신인 스티브 가비가 이끄는 투자자 집단, 그리고 옛날의 구단주인 오말리 가문 등등.
2011년에는 이렇게 팀이 제정신이 아니고 연봉이나 덜어내며[21][22] 리빌딩을 시작해야 할 처지까지 가나 했지만, 맷 켐프와 클레이튼 커쇼[23] 가 다저스 팬들의 유일한 희망으로 군림하였고 후반기에 콜업된 유격수 유망주 디 고든이 3할을 치면서 눈을 즐겁게 해줬으며 옛 명감독 토미 라소다는 84번째 생일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서 명예 감독으로 덕아웃에서 선수단을 지휘하고 홈 관중들에게 생신 축하 노래를 들었다.
시즌 종료 후 커쇼는 다저스의 암울한 득점지원 속에서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이안 케네디와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 아메리칸리그의 금강불괴와 함께 '''78년만의 양대리그 동반 트리플크라운'''을 이뤄내는 대기록을 세웠고, 켐프는 리아나와의 결별 이후 분노의 맹타를 휘두르며 39-40으로 아깝게 40-40을 놓쳤지만 내셔널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에 등극했다.
7. 다시 태어난 내셔널리그의 공룡구단
각 시즌의 내용은 해당 시즌 문서 참조.
맥코트의 막장 행각으로 지쳐가던 팬들에게는 다행으로 팀은 과거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스탠 카스텐, 매직 존슨과 그 외 여러 사장단이 뭉친 구겐하임 컨소시엄에게로 넘어갔다. 팬들은 다른 누구보다 카스텐 사장이 야구단을 잘 경영했던 경험이 있으므로 다저스의 부활에 대해 기대를 걸었다. 더불어 네드 콜레티는 이제 카스텐에게 밀려 바지단장이 될 거라는 환호성도 같이 질렀다.(...)
2012년 중반 핸리 라미레즈를 영입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와 대규모의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아드리안 곤잘레스, 조시 베켓, 칼 크로포드를 영입, 페이롤을 확 올리면서 돈 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2013년 1월, 자세한 규모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여하튼 최소 1년 3억 달러 가까운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25년 70억 ~ 80억 달러'''의 중계권 계약을 체결하며 그야말로 공룡 구단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시청률 상승, 그리고 팀 성적 상승에 대한 의지 표명 및 보험으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네임밸류와 연봉만 높은 고령자들도 받아들인 게 흠이라면 흠.
2013년, 위엄넘치는 빅마켓 구단으로 다시 태어난 다저스의 운영 원칙은 스탠 카스텐이 클레이튼 커쇼의 7년 2억 1천 5백만 달러 계약 발표 당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잘 나타난다. 이 때 카스텐 사장은 5년차 옵트 아웃이 있지만 트레이드 거부권은 없는 계약에 대해 '옵트 아웃은 얼마든지 넣어줄 수 있다. 하지만 트레이드 거부권은 말도 안 되는 조항이라고 생각한다. 옵트 아웃보다 어이가 없다. 내 생전 트레이드 거부권을 계약에 넣은 적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한 마디로 '네가 잘해서 돈 더주는 건 얼마든지 더 줄 수 있는데 네가 못하는데 자리 보전해달라는 징징은 ㄴㄴ해'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고효율은 포기하더라도 고효과는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 이는 빅 마켓으로서 나름 현명한 처신이며 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팜을 가꾸는 데에도 카스텐 사장이 직접 나서서 발언할 정도로 열심이라, 유망주 팜의 전체적인 두께는 얇더라도 탑 100에 들어가는 핵심 유망주들은 사수하면서 열심히 키우고 있다.
2013, 2014년 좋은 정규시즌 성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서 좌절하자, 2014년 10월 탬파베이 레이스의 단장 앤드류 프리드먼을 영입하여 사장에 앉히고 전권을 부여했다. 로건 화이트를 비롯한 예전 프런트 멤버들 다수가 교체되었고 프리드먼은 맷 켐프를 과감하게 트레이드하는 등 본인의 색깔에 맞는 방향으로 팀 개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7.1. 2012 시즌: 블록버스터 트레이드가 무색했던 성과
7.2. 2013 시즌: 미라클 다저스
7.3. 2014 시즌: 또다시 가을좀비에게 덜미를 잡히고 라이벌 팀의 우승을 지켜보고 말다.
7.4. 2015 시즌: 앤드류 프리드먼 사단과 함께하는 첫 번째 시즌
7.5. 2016 시즌: 새로운 감독과 함께하는 첫 시즌, 다시 NLCS에 올랐으나 최강전력을 넘지 못하다
7.6. 2017 시즌: NL 최강 타이틀을 얻으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으나 휴스턴에게 패하며 우승의 꿈을 접다
7.7. 2018 시즌: 30년만의 우승은 이루어질 수 있나 했으나, 또 한번 준우승
7.8. 2019 시즌: 허망하게 끝나버린 세 번째 도전
7.9. 2020 시즌: 32년만에 우승의 한을 풀다
대대적인 보강을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지만 FA시장에 게릿 콜과 앤서니 랜던이 나왔지만 게릿 콜은 근소한 차이로 양키스로 가버리고 앤서니 랜던은 에인절스로 가버리는 것도 모자라서 지난시즌 평균자책점 1위 타이틀을 가진 류현진도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해버리는 동안 오클랜드에서 방출된 블레이크 트라이넨 단기 1년계약 빼고는 이 말이 무색하게 느낄정도로 스토브리그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결국 FA시장에 필요한 선수자원이 없어지자 FA자격까지 1년남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무키 베츠 트레이드 조건을 맞추기 시작하고 결국 상위 유망주들을 내주고 무키 베츠와 데이빗 프라이스를 영입하는데 성공하면서 다저스는 다시 우승후보로 오른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시범경기가 취소 되 버리고 개막마저 5월로 연기되어 버리는 초유의 사태는 물론 더 심해지면 2020시즌 자체가 날아가버릴 위기에 빠졌다. 이게 무슨 문제냐면 2020시즌이 통째로 연기되어 날아가도 무키 베츠는 FA로 나갈게 확실시 되기 때문에 시즌을 통째로 통제하든 경기를 대폭 축소하여 시작하든 다저스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입은 셈이다. 그리고 앤드류 프리드먼 사장은 자신의 커리어를 통째로 걸고 무키 베츠에게 12년 365M을 쐈다.
7월말에 개막인데 데이비드 프라이스는 아예 시즌포기 선언을 하였고 켄리 젠슨, A.J 폴락 등 훈련에 안나오는 모습에 이들도 시즌포기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월시 우승에 빨간등이 켜지려하고 있다. 일단 다저스는 연봉을 줄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애당초 우승을 노리고 유망주를 주고 데려온 선수라서 마냥 웃기만 뭐한 상황
그리고 9월 23일, '''LA 다저스가 8년 연속 지구우승을 확정지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는 제이크 맥기가 오클랜드의 션 머피를 상대, 삼진으로 장식했다.
류현진과 리치 힐, 마에다가 이탈하고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데려온 프라이스까지 시즌포기 선언을 하면서 약해진 것처럼 보였던 선발진은 탑 유망주, 탑 노망주, 탑유망주 출신 데뷔 5년차 좌완이 모두 선발 자리를 차지하면서 맹활약. 빈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커쇼도 19시즌보다 방어율을 낮췄고, 5명 중 방어율이 제일 높은 투수가 3.44를 기록한 뷸러였다. 물론 젊은 선수들이 21시즌에도 잘 해준다는 보장도 없고 풀시즌을 치르게 되면 부상 가능성도 염려해야 되겠지만 선발진은 완전히 세대교체가 되었다.
타선은 벨린저, 먼시, 피더슨이 부진했지만 영입한 베츠가 제몫을 다해주고 시거와 폴락, 테일러가 커리어 하이급으로 잘쳐준 데다가 포수 윌 스미스의 장타력도 폭발하여 예전처럼 최강 타선의 화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와일드카드에서 밀워키 브루어스를 만나 1선발 뷸러, 2선발 커쇼를 내세우며 시리즈에 돌입했다. 결과는 2전 2승 0패로 압승을 거두며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했다. 하지만 스윕보다 놀라운 것은 가을 바보 커쇼가 자신의 등판 경기에서 무려'''8이닝 무실점 13k라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90개 언저리의 투구수로 완봉 페이스를 보였지만 커쇼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흔쾌히 덕아웃에서 쉬고 있는 모습은 우리가 알던 가을 바보 고집쟁이 커쇼의 모습이 아니었다. [24]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올해 가을야구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만났지만 역시나 아직 내셔널리그의 최강자는 자신임을 과시하듯 시리즈 스윕으로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그렇게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하여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만났다. 1, 2차전은 무기력하게 패하며 '역시나 가을에는 안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3차전, 1회부터 11점을 뽑아내며 포스트시즌 한이닝 최다 득점 신기록을 갈아치웠다.하지만 4차전에서 직전 등판에서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였던 커쇼를 내세웠지만 5이닝 7피안타 4실점 4자책으로 무너지면서 패배하여 가을의 불길은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5차전, 1, 2회에 연달아 실점하며 패색이 짙어졌지만 6회에 윌스미스가 역전 3점 홈런을 때려내며 리드를 가져오며 7:3 승리를 챙겼고 다저스는 탈락 위기에서 기사회생하였다.
그리고 대망의 6차전이 되었다. 이날 선발 투수는 뷸러와 프리드, 결과적으로 뷸러는 6이닝 7피안타 무실점을 했지만 프리드는 6이닝 8피안타 3실점 3자책으로 나쁘지 않은 투구를 선보였으나 1회부터 시거와 터너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며 분위기를 빼았겼다. 그렇게 6차전을 승리로 가져가며 시리즈 동점을 만들었다.
그렇게 벼랑끝 승부까지 온 다저스와 애틀랜타는 각각 선발투수로 더스티 메이(오프너)와 이안 앤더슨을 내세웠다. 하지만 더스틴 메이와 두번째 투수 토니 곤솔린이 3실점을 합작하여 진짜 떨어지는 것이 확정된 듯한 기운이 들었다(2:3)
하지만 4회 무사 2, 3루에서 저스틴 터너가 주자를 모두 지우는 호수비를 선보이며 분위기를 가져오는 듯 했다. 그리고 6회, 대타로 들어선 키케 에르난데스가 동점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았다(3:3)
바로 다음 이닝, 코디 벨린저가 불펜투수 크리스 마틴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때려내며 4:3 리드를 가져왔으며, 불펜에서는 훌리오 유리아스가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틀어막았고 로버츠가 9회에 젠슨을 올리지 않고 잘 던지던 유리아스로 끌고가며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중견수 플라이아웃으로 잡아내어 2020년 내셔널 리그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대망의 월드시리즈 6차전, 좌완 훌리오 유리아스가 마지막 타자를 3구 루킹 삼진으로 잡아내며 다저스의 가을야구 잔혹사를 끝내버렸다. 32년만의 우승이었다. 그러나 경기 도중 저스틴 터너가 키케 에르난데스로 교체되는 일이 있었는데, 경기가 끝나고 그 이유가 밝혀졌다.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터너가 무증상 감염 형태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양성 판정을 받은게 밝혀지며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말았다. 이는 1차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고 경기 전에 받은 검사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나오지 않아서 처음에는 문제없이 경기에 출전했지만, '''경기 진행 도중에''' 양성 판정이 나오면서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 차원에서 격리 조치가 이뤄진 것이다. 이에 대해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는 터너에게 우승 세레머니에는 참석하지 말고 격리를 하라는 권고를 했는데, 커미셔너의 이 권고를 거부하고 우승 세레머니에 함께 참석하는 바람에 이러한 태도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후 COVID-19 확진 판정을 받은 저스틴 터너와 가족은 텍사스에서 개인 전세기로 왔고 다저스 선수단은 유나이티드 항공을 타고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 바로 버스를 타고 다저 스타디움으로 가서 그대로 자택에서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7.10. 2021 시즌: 21세기 최초의 월드시리즈 2연패에 도전하는 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대업을 쟁취하고 맞이하는 2021 시즌. 하지만 시즌 시작도 전에 비보가 2개나 터져나왔다. 먼저 다저스의 심장이었던 토미 라소다 감독이 향년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으며, 현지시간 1월 19일에 또 하나의 전설이자 '''메카닉'''[25] 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돈 서튼이 신장암 투병 후유증으로 인해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6]
8. 관련 자료
[1] 지금 있는 동명의 팀과는 다르며, 1882년 창단 후 1899년에 해체됨.[2] 당시 뉴욕 시내를 지나던 노면전차들을 피해 바삐 걸어다니는 시민들을 일컫던 'Trolley dodgers'라는 표현에서 유래했다.[3] 현 필라델피아 필리스 단장 인 앤디 맥페일의 조부이다.[4] 뉴욕을 떠난 이후까지 합치면 다저스는 8회, 자이언츠는 5개.[5] 시티 필드는 에베츠 필드를 아주 빼다박은 모습이기 때문에, 다저스가 그 자리로 갔을 경우를 예상하는 것은 정말로 쉽다.[6] 문서 상단에도 언급이 있고, 아래에도 언급이 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저스에 골수팬들이 많았다.[7] 지금도 뉴욕에는 양키스 팬이 많은 만큼 그에 못지않은 안티들이 존재한다. 보스턴 레드삭스팬들도 꽤 되고. 뉴욕 메츠가 양키스와 겨루기엔 여러모로 대항마 수준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 내셔널리그로 리그가 달라 자주 만날 기회가 없다보니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 대체로 같은 리그, 같은 지구 내 라이벌인 레드삭스로 편입되는 경우가 좀 있다.[8] 이전 버전에서는 브롱스라고 적혀 있었는데, 브롱스는 양키스의 연고지다.[9] 이후 이 팬덤을 이어받은 것이 뉴욕 메츠이다.[10] 심지어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S 로마와 SS 라치오 간 데르비 델라 카피탈레 항목에도 이런 농담이 있다.[11] 다저스 이전 전에 존재한 메이저 스포츠 팀은 NFL의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 로스앤젤레스 램스밖에 없었다.[12] 다만 스프링캠프는 한동안 브루클린 시절 이용하던 베로비치를 계속 썼다가 2008년 3월 애리조나로 옮겼다.[13] 요기 베라에 이 말에 그 당시 다저스의 주전 내야수였던 모리 윌슨은 "그는 잘 던졌지만 우리가 경기를 망친 것이다."라고 말했다.[14] 팔꿈치 인대 파열로 인한 은퇴이며, 좌타자용 사이드암 커브가 그의 선수인생 단축을 재촉한 것이다. 지금은 토미 존 서저리(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가 개발되어 인대가 끊어져도 수술을 통해 재활이 가능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수술 방법이 알려져 있지 않아 팔꿈치 인대 파열은 곧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의미했다. 만약에 그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면? ㅎㄷㄷ[15] 그리고 저 기록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좋은 은퇴 시즌 기록이다. 아니 메이저리그 모든 투수의 시즌 기록 중 가장 좋은 시즌의 기록이라고 해도 5위권안에 들만한 성적이긴 하다.[16] 여담으로 해당 대회는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꺾고 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릭 먼데이의 뜬금 솔로포로도 유명하다. NLCS 5차전까지 가는 접전(당시 5전 3선승제)이었는데 재밌게도 5차전이 열린 날이 월요일이어서, 이 릭 먼데이의 뜬금포를 '블루 먼데이'라고 부르며 요즘도 가끔 회자하곤 한다.[17]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구단주 테드 터너에게 맞서기 위해 팀을 샀다는 얘기도 있었다.[18] 빌 러셀-데이비 존슨- 짐 트레이시[19] 대표적으로 대런 드라이포트. 다저스 입장에서 2000년 당시 당연히 박찬호를 우선 잡고 싶어했지만 박찬호는 FA시장에 나가서 자기 가치를 평가받기 위해 연장계약을 거부했고, 다저스는 할 수 없이 드라이포트와 연장계약을 맺는데 문제는 13승이 개인 최다승, 4.16이 최저 평균자책점, 192이닝이 최고이닝이었던 투수에게 연평균 '''12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이유도 없이 안겨준게 문제. 드라이포트에게 너무 큰 돈을 안겨줘서 정작 박찬호가 FA시장에 나왔을때 돈이 없어서 크게 베팅하지도 못했다. 물론 박찬호의 허리부상 염려때문에 텍사스 레인저스 말고는 접근하는 팀도 없었긴 하지만...[20] 후반기에 박살나면서 무참히 꿈은 깨졌다. 그래도 4.03의 ERA에 196.1이닝 소화.[21] 하지만 $12M의 연봉을 수령하는 구로다 히로키가 눈치없이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하여 다저스 팬들이 뒷목을 잡았다(...). 그래도 구로다의 성적만 보면 다저스에서 실질적인 2선발을 맡아 200이닝을 던진 공로가 있으니 까방권도 줄 수 있는 편.[22] 정작 라이벌 자이언츠에서 3년 21M으로 모셔온 후안 유리베는 2할을 겨우 넘기며 자이언츠의 첩자로 거듭났다.[23] 특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팀 린스컴과 자주 맞붙었는데 그 때마다 굉장한 호투를 선보이며 더욱 복덩이가 되었다.[24] 브루어스의 최강 불펜이 부상 등의 이유로 빠지고 시리즈 도중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는 등 브루어스가 너무나 악재 속에서 경기를 치르기도 했지만[25] 말년에 부정투구 논란에 휘말리긴 했지만, 현역시절 누구보다 더 칼날같은 컴퓨터 제구와 강력한 커맨드를 자랑해서 붙여진 별명이다.[26] 서튼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도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