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조선(대한제국)

 


1. 상세
2. 부산 용두동 대화재
2.2. 조선 단종
2.3. 조선 세조
2.4. 조선 선조(추정)
2.5. 조선 원종(정원군)
2.6. 조선 숙종
2.7. 조선 영조
2.8. 조선 장조(사도세자)
2.9. 조선 정조
2.10. 조선 순조
2.11. 조선 문조(익종, 효명세자)
2.12. 조선 헌종
2.13. 조선 철종
2.14. 대한제국 고종
2.15. 대한제국 순종
2.16. 왕족의 그림


1. 상세


조선시대 어진은 개국 초부터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실록에도 태조 이후 역대 왕과 왕후의 어진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이 나온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궁궐이 타면서 태조 어진, 문종 어진[1], 세조 어진[2], 덕종 어진만이 남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한양 수복 전.후로 태종세종 어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태종의 어진은 굉장히 낡고 삭아서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고 전해지며, 세종대왕 어진은 강화에서 옮겨와 봉안했다는 기록만 나올뿐이다. 정유재란 때는 한양이 함락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무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인조 대의 기록에서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운 선왕들의 어진을 강화도로 옮길 것인지를 논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병자호란 때 기타 다른 왕들의 어진들과 함께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란 이전의 임금들은 모두 어진을 남겼다는 기록은 있지만, 왜란 후의 임금들은 나라가 혼란스러워인지 몰라도 남기지 않았다. 조선 선조는 어진 그리기가 싫다며 거부했으며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을 그렸다는 기록이 없어서 이들도 어진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어진 제작이 다시 활발해진 시기는 숙종부터다. 영조는 20세와 재위 20년 후 50세 어진, 후에도 10년마다 어진을 남겨 5점의 기록을 세웠고[3], 행사 때마다 어진을 그린 조선 정조도 있었으며, 사도세자가 평양에 놀라갈 당시 화사 변상벽에 의하여 초상화를 남겼고, 정조 즉위 이후 현륭원으로 이동해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1921년, 고종의 3년상이 끝난 후 당시 각 궁궐에 퍼져있던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을 한 곳에 모아 모시기로 하고 창덕궁에 선원전을 설치했다. 1921년까지 남아있던 어진들은 태조, 세조, 원종[4],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5], 헌종, 철종, 고종의 어진 뿐이었다.[6] 그 전에 보존되어 왔던 문종덕종의 어진은 병자호란이나 1900년 당시 선원전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7] 또한 현륭원의 사도세자 초상은 후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의아한 점은 일제강점기때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불타 없어지기까지 9년이란 시간 동안 어진을 찍어 놓은 사진이 없다시피하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때까지야 왕의 어진이라는 이유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겠지만 이왕가가 사라지고 구 왕족들에 대한 대접이 좋지도 않았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무관심했다. 만일 이때 어진 관리 차원으로 사진이라도 찍혔다면 조선 왕들의 얼굴을 알 수 있었을거고 약간의 추정, 보정을 거쳐 복원도 가능했을 것이다.[8]

2. 부산 용두동 대화재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전쟁 당시에 다른 황실 유물과 함게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 관재청 벽돌식 창고에 보관되었다. 하지만 희대의 사고가 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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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용두동 대화재 당시.[9]

1954년 12월 26일에 발생한 화재로 태조, 원종, 숙종[10], 영조, 순조, 문조, 철종, 고종, 순종을 포함한 15점의 어진을 제외한 나머지 35점의 어진들이 유물 3400여점과 함께 타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부산 용두산 대화재 참고. 이곳에서 화재 당시 상황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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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신선원전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어진 현황(네이버 케스트 자료)
화재에서 태조 익선관 1점, 원종 사모 2점, 영조 사모 1점 익선관 1점, 순조 원유관 3점, 신원미상의 익선관 1점 익선관 반신상 1점, 익종 면복 1점,
철종 군복 1점 원유관 1점 면복 1점, 순종 황룡포 1점 만이 살아 남았다.[11][12][13]
결국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전주 경기전에 모셔진 태조의 어진과 부산 화재에서 살아남았지만 묵서와 용안이 소실되어 신원 미상의 어진 두점, 용안이 소실된 태조, 순조, 문조(익종)의 어진, 신분을 확인할 묵서 부분이 소실됐다가 최근에 확인된 정원군 순종 어진, 얼굴, 신원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영조, 철종, 고종 어진 뿐이다. 부산에서 얼굴이 소실된 태조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는 청룡포본을 참고해 복원했고 철종 어진은 얼굴이 무사했기에 복원이 가능했으나[14], 순조 어진과 문조 어진은 가로로 얼굴이 완전히 불타 버려 복원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당 김은호가 순종 사후에 그린 익선관본 순종 어진은 1954년 화재로 오른쪽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어진 완성 후 촬영한 흑백 사진, 이당이 그렸던 순종의 다른 어진의 얼굴,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황룡포 등의 자료를 토대로 2014년 복원했다. 세조, 정조, 숙종, 헌종의 어진은 완전히 불타버렸으니 말 다했다. 세조의 어진은 김은호 화백이 이모할 당시 그렸던 밑그림이 남아 있었으나 행방이 묘연하고 경향신문 기사에 사진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다행히 2016년 11월에 김은호 화백 유품 속에서 밑그림이 발견되었다. 다만 수원 화성 화령전에 있던 정조의 구군복 어진은 선원전 이전 중 분실되었다고 하니 어디선가 발견될지도 모른다.
물론 조선 왕들의 경우 어진이 없더라도 얼굴을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데 각 왕릉에 묻혀있는 왕들의 두개골만 스캔해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15] 아니, 어쩌면 썩어서 뼈로 변하지도 않은 채 미라처럼 되어 있을지도... 조선 시대에 조성된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미라처럼 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간혹 들려오는데, 이는 석회·모래· 흙을 혼합한 삼물(三物) 반죽으로 무덤을 만든 데 따른 현상이다. 이 삼물 반죽이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공기를 완벽히 차단해 준 덕분에 시신이 썩지 않았던 것. 1868년 오페르트 일당이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고 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무덤 조성 방법 때문이었다. 이상 언급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면, 그야말로 정성 들여 조성되었을 왕릉 내부의 시신도 미라처럼 되었을 거라는 추론이 아주 불가능한 기대는 아닌 셈... 조선 왕릉 석실에 대해 다룬 기사 다만 아무리 민주주의 공화정 시대라 해도 왕의 얼굴을 복원한답시고 말짱한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내는 게 여론에는 좋지 않게 비칠 터이고 전주 이씨 종친회의 거센 반발을 이겨내야 하는데 그게 쉽나... 만약 지진과 태풍에 자연재해로 왕릉이 완전 파괴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되거나, 전쟁으로 파괴되는 특수한 상황을 빼고는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을 2015년 12월 8일부터 2016년 2월 14일까지 열었다. 이 전시회에 출품된 어진은 태조 어진 2점(청룡포본(복제품), 홍룡포본), 원종 어진 1점(사모본), 영조 어진 2점(사모본, 홍룡포본), 문조 어진 1점(면복본), 철종 어진 1점(군복본), 고종 어진 1점(석지 채용신이 그린 황룡포본), 순종 어진 2점(이당 김은호가 그린 황룡포본, 2014년 복원한 모사도)이다. 다른 어진과는 달리 순조 어진은 전시되지 않았다. 대구의 계명대학교 행보박물관에서도 2016년 10월 12일부터 12월 24일까지 어진 전시회가 있었는데, 홍룡포본 태조어진(불에 타서 훼손된 원본과 복원본), 익종어진, 원종어진, 영조어진(연잉군초상 포함 두 점), 철종어진(원본과 복원본), 고종어진과 순종어진이 전시되었다.#
그밖에 추존왕의 어진인 환조의 어진을 정종 때 계성전에 모셨다고 하는데[16], 후대에 추존왕의 어진은 모시지 않는 것이라는 여론이 나타나 철폐되었다. 이때 환조의 어진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화장사에 있던 정종 부부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과 공민왕 내외의 어진이 함께 존재했다 하는데 정종의 어진 역시 행방불명이다.

2.1. 조선 태조


조선태조어진 문서 참조.

2.2. 조선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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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군 영모전에 봉안돼있던 단종 승마 영정
복원한 승마 영정
강원도 영월에서는 단종을 태백신으로 여겨 지금도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데, 이 근방의 사찰 들이 그 추모제를 열고 있다. 원래 그 전에는 용포를 입으며 단상에 앉은 모습의 단종 영정, 또는 나무인형으로 영모전에 봉안 되어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훼손이 심각해졌고, 1927년 영월 군수 이규진이라는 사람이 목상은 불태우고, 불교 탱화기법으로 다시 제작해 만든 민화 형태의 영정이다. 단종을 끝까지 모셨던 충신 추익한이 백마를 탄 단종에게 머루달래를 바치는 모습이다.
이 영정은 6.25 전쟁때 영모전이 폭격을 맞으며 소실이 되었고, 운보 김기창 화백에게 복원을 의뢰하여 다시 만들었다. 지금은 여러곳에서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많아 여러가지 버전이 있다. (3~4개 버전이 있는듯하다.) 현재는 다시 세운 영모전에 붉은 용포 모습의 승마 영정이 봉안 되어있으며 이 영정을 표준삼아 추모제를 연다고 한다.
참고로 영모전은 단종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강원도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어있다.

2.3. 조선 세조




2.4. 조선 선조(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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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탁연이 소장한 선조 어진
윤탁연(1538 ~ 1594)이 소장한 선조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전립(戰笠)과 무복을 입은 그림이다. 곤룡포가 아닌 것으로 보아 몽진 와중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윤탁연이 직접 그린 것은 아니고, 선조는 평생 어진 그리기를 싫어했다는데 전란의 혼란 와중에 누군가 몰래 선조의 초상화를 그린 것을 발견, 이를 입수하여 비밀리에 보관해 왔다. 윤탁연은 직후 전란의 초기에 사망했다.[17] 그가 보존한 어진은 후손들에 의해 전해져 왔으며 1974년 윤탁연의 후손 가문을 발견한 이은상에 의해 발견되었다. 윤탁연의 후손들도 선조의 초상화가 전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가, 이은상의 방문으로 실체를 확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감정사들은 ①전복 차림이 측면의 좌세이고 ②좋은 필치가 못되며 ③아무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선조의 어진으로 봐야 할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련 기사 딱히 이 그림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가 전무한 편이라 좀 더 전문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밑에 나오는 원종의 어진과 굉장히 닮아서 진짜 선조의 어진이 아닐까 하고 추정만 가능하다. 선조의 어진이 맞다면 광해군과 덕흥대원군의 얼굴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미지 링크
선조 어진, 원본은 아니고 누군가 모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선조 어진이 이베이에 떴었다. 현재는 판매된 상태. 이 어진은 선조라고 명시되어 있다.

2.5. 조선 원종(정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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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부분이 소실된 정원군(원종) 어진
원종(정원군)의 어진으로 추정되는 어진이 공개되었다. 부산 용두동 대화재 때 살아남은 신원 미상의 어진 4점 중 하나다. 신원 미상의 어진 2점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불에 타 들어갔기 때문에 오른쪽 윗 부분에 써있는 문구가 타버려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선원전 어진 목록에 원종의 어진이 머리에 쓴 사모와 단령을 입은 차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어진 양식이 17세기 초상화 양식인 점으로 보아 원종의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되었다. 그리고 2015년 이 어진이 원종(정원군)의 것으로 최종 판명이 되었다.기사
위의 선조 어진과 함께 인조나 덕흥대원군의 얼굴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표제만 남은 채 얼굴 부분이 모두 타버린 원종 어진이 한 점 더 존재해서 1870년대에 이모된 형식으로 복원을 진행하였다. 현재 본 어진의 복원본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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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복원한 정원군(원종) 어진
2016년 9월, 원종의 어진이 완전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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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원종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원종 초상화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의 초상화는 같은 그림으로 보이며 실제 어진과 비교하면 복식은 비슷하지만, 용모는 대충 그렸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이다. 다만 특이한 점은 열성어진에서 정원군이 쓴 사모가 효명세자가 쓴 사모와 같은 모양인데,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을 비교해 보면 정원군의 사모의 모습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선원보감을 보고 모사하다가 실수로 잘못 그린 듯 하다.

2.6. 조선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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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어진 (추정)
열성어진에 실린 숙종 초상화
일제강점기 당시 2종류의 어진이 원본+이모본으로 전해져 오고 있었으나, 6.25 전쟁 이후 관리 실수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 위의 왼쪽 그림에서 보듯 숙종 어진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있는데, 이것이 숙종 어진이 맞다고 해도 얼굴을 포함한 2/3 부분이 타버려 사실상 복원은 불가능하다.
'열성어진'(列聖御眞)에는 숙종의 모습이 남아있기는 하다. 이 책에는 조선조 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놨는데, 태조, '''숙종''', 영조의 어진의 간략본도 있다. 다만 열성어진에 실린 어진들 자체가 워낙 실제 어진과 동떨어진 그림 수준이기에, 신뢰도는 많이 떨어진다.

2.7. 조선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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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 시절 영조
조선 영조의 어진
연잉군 시절 영조의 어진은 현재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원본이다.[18] 다른 어진들과 달리 오른쪽 부분만 조금 불타고, 표제가 오른쪽에 있었으면 신원을 밝힐 수 없었는데도, 표제까지 남아있어 매우 운좋게 살아남은 어진이다. 이 어진은 숙종 40년인 1714년, 영조가 21살 되던 해에 화사 진재해가 그린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 1491호이다. 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은 51세때의 모습으로 대한제국 광무 4년인 1900년에 경운궁 선원전에 불이나 태조, 숙종,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이 사라지자 고종이 이들 어진을 모사하도록 지시했을 때 같이 제작된 어진으로 조석진(趙錫晉), 채용신(蔡龍臣) 등이 모사한 것이다.
MBC에서 방영했던 사극 '이산'에서 이순재가 영조 역으로 출연했는데, 실제로 위의 어진과 외모가 상당히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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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어진박물관에서 복원한 영조 전신어진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위 어진을 바탕으로 한 전신 어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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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어진의 영조의 초상
열성어진에 실린 영조[19]의 초상은 위의 어진과 매우 다르게 그려졌다. 연잉군 어진이나 고종 때 이모된 어진과는 전혀 다르다. 그나마 눈매가 치켜올라간 것이나 비슷한 정도이다.
다만 영조는 어진 화사를 자주 했었고, 일제시대까지도 어진이 6축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2축 외에 다른 어진을 보고 그렸을 확률도 있다. 수염으로 미루어 볼 때 연잉군 시절과 51세때의 어진의 중간에 그려진 어진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2.8. 조선 장조(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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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초상화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다. 다만 사당에 모셔진 신격화시킨 초상화인 것으로 추정한다.

2.9. 조선 정조




2.10. 조선 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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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의 어진
확대모습
순조 30년(1830년) 43세 기념으로 화가 유당 김하종이 그린것을 시작으로 채용신이 모사한 것이다. 순조 어진은 원유관 원유관본 2점과 익선관본 2점 총 4점이 있다고 전해졌으나 원유관본 '''3'''점 만이 남았는데[20] 원유관본은 얼굴의 반이 불타 복원은 불가능하다.아니, 최소한 귀와 눈썹이 남은 효명세자와 달리 이쪽은 구렛나룻와 귀 일부분 외에는 남은 부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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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대중들에게 순조의 어진은 원유관본만 알려졌지만 2016년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수장고를 잠시 공개할 때 작게 사진으로나마 나왔었다. 다만 순조 추정 어진이라 학계의 연구결과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 것이라 순조 어진 익선관본으로 확정 할 수 없었고 2019년 2월 발표한 논문에서는 다시 신원 미상의 익선관본으로 개칭됐다. 사진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어진의 용안중 입술만 남은 상태이며 용보는 다른 어진과 다른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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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순조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순조 초상화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진의 얼굴이 타버려 구레나룻 외에는 확인 할 수 없으니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남아 있는 간략한 초상화로만 순조의 얼굴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 실제 어진과 열성어진에 남아있는 초상화가 많이 다르듯 열성어진에 남아있는 초상화를 신뢰할 수는 없다.

2.11. 조선 문조(익종, 효명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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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
확대모습
왕들의 족보인 선원계보에 의하면 문조(효명세자)는 어진이 8축이나 제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지만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이 어진 하나뿐이다. 그동안 이렇게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1954년 부산 관재청 화재 당시 끄집어낸 문조어진 한 본이 더 있다. 현재 보존처리를 마치고 국립고궁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지만 이 어진도 얼굴 부분이 타버려 복원이 불가능하다.
문조가 18살 때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남아있는 어진 중 유일한 면류관곤복본이며 순조 26년인 1826년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얼굴 부분이 소실되어 복원이 불가능하다. 얼굴 윤곽과 눈썹 일부만 조금 보이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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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효명세자 초상화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실린 효명세자의 초상화가 20대 초반에 죽은 세자의 모습 치고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이게 묘사되었다.

2.12. 조선 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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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헌종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헌종 초상화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우 미남이었다고 한다. 잘생긴 외모 때문인지 궁녀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궁녀들과 놀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해버린 데다 어진마저 남아 있지 않기에 미남이었다는 헌종의 얼굴은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남은 간략한 초상화로 추측해 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버지인 효명세자처럼 20대에 요절한 왕치고는 너무 나이들어보인다.

2.13. 조선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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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의 어진
복원본
철종의 31살 때 모습을 담은 구군복본 어진으로 철종 12년인 1861년 3월에 제작되었다. 《어진도사사실(御眞圖寫事實)》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도사를 담당했던 이한철, 조중묵이 주관화사였고 김하종, 박기준, 백영배, 백은배[21], 유숙, 이형록이 도와 1개월 동안 제작했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1492호이다. 또 구군복본 외에 원유관본과 면복본도 전해지지만 묵서만 남고 태반이 소실되었다. 얼굴까지 소실된 다른 어진들과는 달리 얼굴 부분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 1987년, 복원본을 제작할 수 있었다. 다만 완벽하게 복원하지는 못했는데 입 부근이 소실돼서 추측으로 그리다보니 입술이 두터워져 전체적으로 얼굴상이 맹해보이는 효과를 가져왔고 어좌 밑에 깔려있는 용화문석의 용의 방향도 오류가 나 복원품에서는 재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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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재복원한 철종 어진
결국은 2013년에 전주 어진 박물관에서 철종 어진을 재복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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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철종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철종 초상화
정원군과 함께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실린 초상화와 실제 어진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한데 정말 많이 다르게 생겼다. 다만 코 모양이나 수염은 간략한 묘사나마 모양이 어느 정도 잡혀있으므로 여타 어진 복원 시 참고해 볼만 할 듯하다.

2.14. 대한제국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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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 어진
고종의 어진은 1872년 군복대소본, 익선관본, 복건본, 면복본등 모두 5본이 도사했는데 그 중 2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10년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의 모사본들 뿐이다. 또한 위 사진 오른쪽 아래에 있는 통천관 강사포본의 경우는 배경에 휘장을 치는 등 일본식 화법이 가미되어 있는게 특징이다. 역대 제왕 중 유일하게 외국인이 그린 어진이 있다. 휴버트 보스(Hubert Vos)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그린 것.# 고종의 경우 어진 말고도 사진 자료도 많이 남아 있으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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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인이 찍은 가장 오래된 고종황제 초상 사진이 발견돼 화제다. 미국 뉴어크 박물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근대 서화가이자 사진작가인 해강 김규진이 촬영했으며, 촬영한 해는 1905년이고 촬영장소는 덕수궁 중명전이다. 고종이 외교사절로 방문한 미국인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인다.국외소재문화제재단 보도자료

2.15. 대한제국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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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종 어진[22]
순종 어진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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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어진(1916년 作) 당시 사진
이당 김은호 화백의 순종 어진 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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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소실된 어진(1928년 作)
2014년 복원한 황룡포본 순종 어진#
전통적인 기법보다 서양화적 요소가 가미된 어진이다. 1916년 어진이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건 순종 어진 유지초본으로 마지막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익선관본 중 황룡포, 홍룡포본 총 3점이 있다고 전해지며 1954년 용두동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알려졌으나, 황룡포본 1점이 살아남아 2015년 문화재청에 의해 공개되었다.
그림의 표제가 적혀있던 오른쪽 부분이 탔지만, 순종 생전에 촬영했던 제국 군복 사진을 토대로 김은호 화백이 그렸던 어진과 같고, 고종과 더불어 유일한 황룡포를 입은 모습인 점으로 알 수 있었다.
현 공개된 순종 어진은 김은호 화백이 1928년 서울 영희전에서 제작 한 것이고, 위의 흑백 사진에 순종 어진 홍룡포본은 이왕직의 요청으로 1916년 제작되었다.

2.16. 왕족의 그림


흥선대원군의 최종 군호는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이지만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탈바꿈하며 군호가 격상된 것이기 때문에 일국의 군주로서 사용된 군호는 아니다.

2.16.1. 경신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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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이성계신의왕후의 장녀. 현재 유일하게 신원이 분명한 여성 왕족의 초상이며, 초상화의 몽고풍 의상을 통해 여말선초의 의복문화에 대해 유추 해 볼 수 있는 자료다.

2.16.2. 완산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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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이복형 완풍대군 이원계의 차남이자 태조의 조카이며, 태종 이방원의 사촌형이 된다.

2.16.3. 익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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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안대군
이성계의 3째 아들로 야심이 적어 '왕자의 난'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으며, 태종 즉위 후에 대군의 지위에 올랐다. 태조 이성계와는 부자지간이므로 현재 남아 있는 태조의 어진과 용모를 비교해 보면 좋을 듯 싶다. 더불어 정종과 태종의 모습을 유추 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0년 1월 도난을 당했다가 그 해 4월 회수에 성공하여 보관하던 중 2009년 재도난을 당하여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진범은 잡혔지만 해외에 반출을 해버려 안타깝지만 돌아오기가 어려울 듯 하였는데...
문화재청의 끈질긴 노력으로 2018년 다시 '''회수에 성공'''했다!기사

2.16.4. 효령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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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 경내 효령각에 소장되어 있는 효령대군의 초상화다. 1978년 11월 10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되었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비록 중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작품이다. 문화재청 링크
윗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동생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아서 양녕대군이 비행을 일삼을 때 자신을 효령이라고 사칭했다는 기록도 있고, 3형제의 동생인 성녕대군이 죽자 아버지 태종이 "성녕은 내 아들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아이였다"고 회상하는 기록이 있어 이 그림은 태종과 세종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초상화이기도 하다.

2.16.5. 이원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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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덴리대학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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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오리 이원익은 가까운 왕족이 아니고 직계 왕족은 아니지만 태종의 8번째 서자이자 유복자익녕군 치의 4대손이다. 익녕군 치는 세종대왕이나 효령대군의 이복동생이 된다.
태종 이방원의 5대손으로 왕실 방계로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2.16.6. 금산군 이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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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9번째 서자 익양군 이회(益陽君 李懷)의 증손자 금산군 이성윤(錦山君 李誠胤 1570∼1620)의 초상화이다. 익양군 이회의 아들이자 청원도정 이간의 아들로, 촌수로는 성종의 현손이다. 광해군과 8촌 형제 간이 된다.
그는 성종의 현손으로, 종친 작위가 부여되는 비교적 가까운 방계 왕족이었다.

2.16.7. 흥선대원군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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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관학창의본, 복건심의본, 금관조복본, 흑건청포본, 흑단령포본
보물 제 1499호 이하응 초상

5점의 초상 모두 복식이 다르며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하고 성대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 이한철이 그려 수준 높은 묘사력과 화격을 보여주는 최상급의 걸작들이다. 더구나 뛰어난 필력을 자랑했던 이하응의 친필 표제(表題)와 영정함 안에 써넣은 별폭의 홍지표제(紅紙表題), 궁중 표구장의 족자표장(簇子表粧), 유소(流蘇), 영정보, 향낭, 영정함, 영정함보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조선말기 왕실의 아름답고 격조 있는 초상화 문화를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다. 5점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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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 화백이 복원한 대원군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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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초상화 초안, 작자미상

2.16.8. 흥친왕 이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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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흥군으로도 불리며 흥선대원군의 맏아들이자 고종의 친형이다. 친일 행적으로 비판을 받고있다.
화가는 철종, 흥선대원군 등을 그렸던 이한철의 작품이다.

2.16.9. 신정왕후(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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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신정왕후 초상화
신정왕후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어서 현재로서는 신원 미상의 초상화다. 신정왕후는 효명세자(문조)의 왕후로 헌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철종 사후 흥선대원군의 차남[23] 즉 고종을 양자로 삼아 보위에 올려놓았다. 이 초상화의 존재는 1990년대에 이미 알려졌으나 모습이 공개되지는 않았었다가 문화재청이 최근 발간한 '한국의 초상화'에 '조선 말기 여인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2.16.10. 명성황후'''(아닐 가능성 매우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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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명성황후 초상화
2017년 민씨 부인의 초상화가 발견되었다. 그림 뒷면에는 적외선으로 조사한 결과 민씨(閔氏)라는 글자가 발견되어 명성황후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상 명성황후는 아니고 그냥 평민 민씨 여성의 초상화일 가능성이 높다.

2.16.11. 영선군 이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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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조카이며 흥친왕의 아들 , 순종의 사촌형이 된다.
[1] 완전한 것은 아니고 얼굴 일부 부분만 남은 조각이었다고 하나, 수염이 긴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고 한다.[2] 세조의 어진은 한 사찰에서 발견되어 다시 궁궐로 돌아와 보존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모사본 제작을 명했다. 기록에는 이 어진을 전쟁통에 구한 인물이 바로 광해군때 간신인 이이첨.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조의 영정은 봉선사로 옮겨졌는데 하필 이때 일본군이 들어와 봉선사를 불태웠다. 광릉참봉이던 이이첨은 도망가는 승려들을 붙잡아 영정의 위치를 묻고는 홀로 불타는 절간을 헤치고 들어가 영정을 끌어냈다. 이후 영정을 안전하게 호송하기 위해 홀로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되는게 낮에는 숨고 밤에 90리를 걷는가 하면, 2번이나 몰래 일본군 진영 한복판을 통과했고. 심지어는 중간에 의병 부대에 합류해 전투까지 치르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의주로 세조의 영정을 무사히 호송했다.[3] 고종대에 이모본 하나 더 추가되었다.[4] 인조의 아버지로 사후 추증되었다.[5] 헌종의 아버지로 사후 추증되었다. 익종으로 추증되었으나 대한제국 시기 문조로 재추증되었다[6] 이후 순종 사후 김은호 화백이 그린 순종의 어진이 추가되었다.[7] 고종의 명으로 채용신과 조석진이 헌종과 순조, 영조, 정조의 어진들을 복원했다는 기록이 있다.[8] 다만 고종은 사진 찍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진이 많이 남아있다[9] 보름전인 12월 10일에도 화재가 났었는데 이 사진은 12월10일 사진이라고도 한다[10] 단 이건 반쯤 타버려서 오른쪽 부분은 아예 타버렸고 왼쪽 부분만 남은 어진의 인물이 숙종으로 추정된다.[11] 그 중 순조는 무려 3점이나 남아있는데 아직 대중들에게 공개가 되지 않았다. 이곳을 참고[12] 현재 남아있는 고종 어진은 황명으로 제작한 어진이 아니라 정식으로 제작 후에 고종의 유지 초본을 가지고 있었던 화가 채용신이 민간인에게 그려준 어진이다. 그래서 황룡포 3점이 남아있지만 모두 같은 나이의 고종이며 초상화로 유명했던 채용신의 평소 실력에 비해 그림의 작품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 밖에 황실에서 보관한 어진은 모두 소실되었다. 2019년 2월 발표된 논문에서는 선원전어진모사등록에 등록된 어진 중 누락된 어진이 있음을 증명했고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신원 미상의 어진 2점과 철종 어진, 순조 어진이 공개되었다.이곳을 참고[13] 신원 미상의 어진 2점이 아마도 숙종 어진이나, 고종 어진으로 추정된다.링크[14] 정확히 말해서 입술부분 제외[15] 임진왜란 당시 약탈된 성종의 능과 중종의 능을 제외하곤 도굴된 적이 없다. 다만 고종과 순종은 사진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복원할 수 있다.즉 성종중종의 얼굴은 이런 방식으로도 알 수 없다.애초에 무덤이 수백년 전에 도굴당했으니...[16] https://www.chf.or.kr/c2/sub2_2.jsp?thisPage=1&searchField=&searchText=&brdType=R&bbIdx=102281|#[17] 또다른 얘기로는, 피난 직후 선조가 분조를 맡게된 임해군한테 자신을 그린 어진을 주면서 아비를 잊지말라고 당부를 했는데, 임해군은 행패를 부리다가 왜적과 손잡은 국경인 일당에 붙잡혔고 이 어진은 임해군을 호종했던 윤탁연이 가까스로 챙겨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18] 다른 것은 모두 이모본 또는 복원본이다.[19] 영종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래 묘호는 영종이었다. 후대에 영조로 바뀐 것. 정조 역시 원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나 후대에 정조로 바뀌었다.[20] 위에서 언급했듯이 누락된 어진이 1점 더 있었다.[21] 임천 백씨로 현종, 숙종 때 어의였던 백광현의 종잉손자이자, 백광현의 형 백광찬의 직계후손(잉손)이다. 아버지는 백민환 할아버지는 백명채 증조할아버지는 백사구 고조할아버지는 백임대 현조할아버지는 백상규 래조할아버지는 백홍주 곤조할아버지는 백흥선 잉조할아버지는 백광찬. 출처: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22]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23] 서형이 한 명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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