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준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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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문민 정부
2대
주돈식

3대
윤여준


4대
신우재





대한민국 제4대 환경부 장관
윤여준
尹汝雋 | Yoon Yeo-joon

<colbgcolor=#003764> 출생
1939년 10월 17일 (84세)
충청남도 논산군 채산면
학력
경기고등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정치학 / 학사)
가족
아내 우선희, 슬하 2남
본관
파평 윤씨
종교
천주교(세례명 : 베드로)
소속 정당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6
경력
제16대 국회의원
동아일보, 경향신문 기자
국회의장 공보비서관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제4대 환경부장관
한나라당 총재특별보좌관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회 미디어대책위원
제4, 6대 여의도연구소 소장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회 상임부본부장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
재경일보 회장
민주통합당 국민통합추진위원장
민주통합당 국민통합공동위원장
새정치연합 새정치추진위원장
새정치연합 공동위원장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
윤여준정치연구원 원장
1. 개요
2. 생애
2.1. 정치 경력
3. 안철수와의 인연
4. 저서
5. 여담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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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자 출신의 정치인이다.
원로 정치인들 중에 김종인과 더불어 좌우 양진영을 넘나들며 활발히 자문, 참모로 활동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사실 철새라기엔 항상 보수 쪽에 머물렀다. 다만 그냥 박근혜를 반대[1]했을 뿐이다.[2]

2. 생애


1939년 10월 17일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윤석오는 대지주이자 정인보에게서 수학한 한학자였다. 윤석오는 해방 이후 송진우의 추천으로 이승만의 비서로 일했으며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총무처 차관을 지내기도 했다. 덕분에 윤여준은 어린 시절 경무대를 드나들며 이승만 내외의 귀여움을 받았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4.19 혁명에 참여했다.
대학 졸업 후 동아일보[3]경향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1977년 문화공보부장관 김성진의 제안으로 주 일본 한국대사관 공보관에 임용되었다. 주 싱가포르 대사관에서도 공보관으로 일했다.

2.1. 정치 경력


이후 1983년 귀국해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 보도담당관, 국회의장 공보보좌관, 청와대 공보수석실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청와대에서는 이순자에 대한 공보 관리를 맡았다. 제6공화국에서는 정무비서관과 정무장관 비서관, 안기부장 특보를 지냈다. 1994년 김영삼의 눈에 띄어 청와대 대변인 겸 공보수석으로 발탁됐다. 김영삼이 김현철의 국정 개입을 사과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을 때 담화문을 작성했다. 1997년 제10대 환경부장관에 임명됐다.
정권이 교체된 1998년부터 이회창의 참모로 활동했다.[4] 2000년 한나라당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을 지휘하며 승리를 이끌었다. 덕분에 이회창 대세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자신도 전국구로 원내에 입성한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회창의 선거 전략가로 활동한다. 이른바 보수의 장자방.# 근데 어째 실제 행적은 범증과 비슷하다는 게 함정.[5]
윤여준하면 떠오르는 제16대 총선의 "공천학살"이 결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패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 또한 만만치 않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과 단일화해 승리를 이룬 반면, 공천학살로 인해 보수 진영이 분열, 제2차 이인제 사태와 같은 표 분산 효과가 일어났다고 보는 분석이다.[6] 이로 인해 이회창이 총선만 승리하고 대선에 연달아 패배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이는 제16대 총선의 윤여준 발 "공천학살"이 참여정부 출범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근거로, 이회창은 김대중과 맞붙은 제15대 대선에서 이인제라는 돌발변수에도 약 40만표의 차이로 패배했지만, 윤여준의 공천학살 이후인 제16대 대선에서는 돌발변수가 사라진 노무현 대 이회창, 양강 구도에서 오히려 55만표 차이로 패한다. 이회창 대권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 제15대 대선에서 이인제였다면, 제16대 대선에서는 윤여준이었다는 얘기가 나올만 하다.
이후에도 2003년 여의도연구소 소장,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이끌었다.
다만 생각보다 선거 승률 낮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게, 프레임 싸움을 통해 불리한 구도를 비등하게 만들거나, 기적적으로 역전시키는 등 굉장한 폭발력을 일으키는데 역량을 발휘한다.[7] 그간의 성과를 들어 보면 선거 패배가 예상되던 제16대 총선에서 이회창을 끝없이 설득해 고참급 의원들을 다수 날리는 개혁공천으로 승리를 거머쥐며 이회창 대세론을 공고히 한 것은 사실이고, 제16대 대선에서는 민주당 캠프에서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내걸자 이른바 '수도권 공동화' 프레임을 짜며 기어이 비기는 상황을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다만, 제16대 대선에 대해서 윤여준 본인은 "자신은 선거 1년 전에 이미 이회창과 결별했다. 나는 왕따였다"라고 한 적이 있다.[8] 또한 대선 정국에서 최규선게이트 문제로 계속 조사 받던 사람이 선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하는 시각도 있기는 있다.[9][10] 윤여준의 선거 커리어에서 가장 큰 패배였던 17대 총선에서는 난데없는 거대 여당 견제론, 무조건 읍소 전략으로 최대한의 선방을 이뤘다. 그가 맡은 선거 중에서 딱히 뭔가 보여주지 않고 마무리한 선거는 뭘 해도 이길 만한 선거였던 2006년 서울시장 선거 정도.

3. 안철수와의 인연


안철수의 멘토로도 유명하다. 청춘콘서트를 함께 하며 안철수와 가까워진다. 2011년 서울특별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안철수가 출마 의사를 밝혔다가 번복하자 "박원순에게 양보하는 구도를 만들자"고 하여 군소후보였던 박원순을 지지율 1위 주자로 만들고 퇴장하기도 했다.[11]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경선 캠프에 합류했다. 일각에서는 2011년 서울시장 선거 과정 중 안철수가 "윤여준 전 장관이 제 멘토라면 제 멘토는 김제동·김여진 씨 등 300명쯤 된다"고 한 말 때문에 안철수와 윤여준의 관계가 멀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하기도 했다. 문재인이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된 이후에는 국민통합공동위원장으로 선거 운동에 나섰다. 이 당시 찬조연설이 상당한 주목을 받아, 문재인 캠프는 마지막 찬조연설을 윤여준의 연설을 재방송 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박근혜를 "10년을 가까이 해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선거운동을 잘 하는 사람"으로 실명 언급 한 번 없이 묶어내면서, 문재인 후보는 "두 시간만 이야기해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통치력이 있는 사람"으로 상대화 했던 당시의 연설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역시 전세를 뒤집지는 못해도 팽팽하게 하는 것이 장기인 것이 드러난다.
2014년 안철수의 신당 조직인 새정치추진위원회위원장으로 안철수와 다시 손을 잡았다. 그러나 안철수가 그 후신인 새정치연합민주당의 통합을 추진하면서 또 다시 결별한다.
2016년새정치민주연합 탈당 이후 안철수가 신당 창당을 추진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12] 그리고 예상대로, 안철수접촉을 시도했다. 윤여준 본인도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국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 자리를 수락했지만, JTBC 뉴스룸에 출연한 한상진 공동 창준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건강상의 이유로 같이 일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1월 22일, 그동안 건강문제로 모습을 드러내보이지 않았던 윤여준 창당준비공동위원장이 기조회의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회의 복귀 이후 국민의당이 직면한 현안들에 대한 질문에 여유롭게 대답하는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2016년 4월) 이후 안철수에게 실망하여 비판을 하고 거리는 두는 모습을 보였다. 20대 총선을 앞두고는 비례 대표를 선정하는 자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총선 이후 인터뷰에서 안철수에게 칭찬과 쓴소리성 격려를 하는 걸로 보아서는 국민의당에서 완전히 멀어지지는 않고 아마 당의 컨설턴트 식으로 남을 걸로 전망된다.
2016년 4월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추진단장에 공모지원했다. 사실상 추대형식으로, 윤여준 본인은 총선 전부터 정해진 것이었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7달 만에 사의를 표했다.
자신의 인생관, 정치관 등을 밝힌 2018년 6월 인터뷰에서는, 안철수가 이젠 오히려 새정치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정치를 접는 게 좋겠다고 했다. [삶도] 윤여준 “미안합니다, 이런 나라를 물려줘서…”

4. 저서


  • <대통령의 자격>
  • <윤여준의 진심>

5. 여담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83 - 1990
정계 입문

1990 - 1995
합당[13]

1995 - 1997
당명 변경

1997 - 2011
합당[14]

2011 - 2012
탈당[15]

2012 - 2013
입당[16]

2013 - 2014
탈당

( )
2014
창당준비위원회

2014 - 2016
신당 합류 거부

2016 - 2018
입당[17]

2018
합당[18]

2018 -
탈당
정계 은퇴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한나라당
7,365,359 (39%)
당선 (11번)


8. 둘러보기





[1] 지금보면 신의 한 수. 어쩌면 윤여준 입장에선 박근혜가 몰락하게 될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2] 처음 정계를 떠나게 된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이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자 이를 공공연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윤여준의 입장에서는 해야 할 말을 한 것. 이 일로 이전까지 윤여준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보수쪽 여론은 완전히 돌아서, 대갈공명이라고 찍히고 쫓겨나 이후로 보수 정권과 정당에는 다시는 발을 붙히지 못한다.[3] 대부분의 시간을 신동아#s-2에서 보냈다. 사실 동아일보는 단국대 나와선 입사하기 어려운, 학벌이 굉장이 중요한 언론사다.[4] 이회창은 처음엔 윤여준을 단국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기용하지 않았다.[5] 선거 승률이 높지 못한 것 외에도, 자신이 보좌하는 후보들과 마찰을 빚다가 결별하는 일이 잦았던 점을 빗댄 것이다. 심지어 이회창과 결별할 때는 이회창의 아내 한인옥과 마찰이 있어 결별하기도 했다.[6] 실제로 윤여준의 공천학살 이후 이회창이 낙천한 계파 보스들을 다시 끌어안으려 한 행보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노무현 캠프의 덧셈 정치와 반대로 윤여준의 뺄셈 정치가 이회창 정권 대세론에 가장 큰 한계를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7] 여권의 대표적인 선거 전략가로 꼽히는 이해찬의 경우에는 표계산에 상당히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한인옥뿐 아니라 하순봉, 양정규, 신경식 등 이회창의 다른 측근들의 견제를 받았다.[9] 16대 대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설훈 의원이 윤여준이 최규선으로부터 20만 달러를 받았다고 허위 폭로를 하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10] 있다고 보는 측에서는 수도권 공동화 프레임이 선거 막판에 돌아온 윤여준의 원기옥 한방으로 보곤 한다.[11] 이는 윤여준의 주장으로 안철수의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12] 이준석 대표는 썰전에서 안철수에게는 '현실주의적 참모'로 이분과 강용석 전 의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본인은 별로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며 사양의 뜻을 펼쳤지만 아예 합류를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라서.....[13]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4]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5] 안철수 캠프 합류[16] 국민통합추진위원장으로 추대[17] 창당준비위원장[18] 바른정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