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1. 아돌프 히틀러


[image]
그리고...
[image]
이렇게 됐다가...
[image]
다시 이렇게...
당대 '''공산주의의 정신적 본산'''인 소련의 최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무조건적인 척결'''을 외치는 나치당의 리더인 아돌프 히틀러는 사상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게다가 히틀러는 예나 지금이나 동유럽의 주류 민족인 슬라브인을 유태인과 동급의 열등인종 취급하기도 했다. 비록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서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대(對)독일 안보동맹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상황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기도 했지만, 이는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화려하게 뒷통수를 맞으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20세기를 상징하는 최악의 독재자들답게 통치 기술 - 정확히는 '''독재''' 기술에서는 서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스탈린의 대숙청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벌인 두 차례의 숙청에 다소 영향을 받았으며, 히틀러 역시 프로이센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독립적이었던 군부를 통제하는 데 스탈린의 방식을 상당수 차용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소련을 정복한 뒤 유럽 러시아 영토를 관리할 적임자로 스탈린을 꼽기도 했다. 이언 커쇼 등은 히틀러가 스탈린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히틀러의 사상에 따르면 슬라브인은 모래알같이 미개한 민족들이라서 자기들끼리 모여 국가를 이룰 수 없는데 스탈린은 비록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을 쓰긴 했어도 슬라브인들을 규합하여 현대국가같은 것은 건설하긴 했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의 범주라는 것.(...)
전쟁 후반기에 가서 계속된 패전과 점점 목이 더욱 조여지는 상황에 맛이 간 히틀러는 고참 지휘관들이 자기와 계속 의견충돌을 빚자, 측근들에게 "나는 정말 스탈린이 부럽다. 그 사람은 정말 자기 뜻대로 군을 좌지우지하잖나. 나도 머리가 굳어버린 군윗대가리들을 스탈린처럼 모조리 쓸어버렸어야 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말하기도 했고[1], 히틀러 암살 음모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정말 스탈린 방식[2]으로 군부 숙청을 단행한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에른스트 룀과 SA상층부의 숙청사건(장검의 밤)을 보고, "봤지, 히틀러 그 친구 참 멋지게 해치웠군"이라고 말하며 대숙청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후에 '히틀러와 함께 했으면 무적이었을텐데' 하는 식의 넋두리를 했다고 한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서로 라이벌이었고[3] 행적에도 비슷한 면모가 많았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스탈린은 붉은 파쇼라는 비난을 받았고, 히틀러도 집권 이전에는 나치당만의 독특한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보수우익에게는 극좌파라고 조롱받고 공산당 같은 극좌익에서는 정신나간 민족주의 극우로 조롱을 받았다. 냉전 이후에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이 주도하여 히틀러와 스탈린을 폭압적인 일당 경찰독재국가라는 본질적으로 같은 국가로 분류하면서 두 독재자는 서로를 미워하지만 결국 서로랑 똑같았던 자들로 분류되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체주의 이론은 냉전 때 소련을 적성국으로 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움직임이 강했으며 또한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 보수세력이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옹호하려는 성격도 있었다. 이 때문에 현재는 예전처럼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그리고 둘이 취한 수단의 유사성은 있어도 체제의 본질은 달랐으며 둘의 개인적인 성격 또한 완전히 달랐다. 일단 학력도 변변찮고 스스로 체계적인 사상을 만들지도 못했던 히틀러와 달리 스탈린은 그 자신이 소수민족 문제의 전문가였으며 독자적인 사상까지도 창안할 수 있었을 정도로 두뇌가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통치 기술 면에 있어서는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훨씬 치밀했다. 일반 행정만 봐도, 스탈린은 스스로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챙긴 반면, 히틀러는 기본적으로 행정에 일자무식이라 2인자들인 괴링, 괴벨스, 힘러, 보어만 같은 자신의 부하에게 행정을 방치해 안그래도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독일의 여러 문제점을 증폭시켰다. [4] 또한 스탈린은 절대로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당내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압한 뒤 대숙청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철저한 관료제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자신의 의사를 정책의 세부사항에까지 치밀하게 적용시켰다. 히틀러를 옹호(또는 찬양)하기 위해서, 히틀러가 2인자들의 충성경쟁을 정교하게 즐겼다는 썰을 푸는 사람이 있는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히틀러가 2인자들의 전횡을 방치하여 이들의 후계경쟁 및 충성경쟁 때문에 독일은 안그래도 부족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삽질을 했으며,[5] 골수 나치였다가 전후 회개한 알베르트 슈페어조차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히틀러의 이런 2인자 방치가 얼마나 독일의 전쟁수행에 해를 끼쳤는지는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사작전면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둘다 저능아였을지는 몰라도, 행정면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를 비교하며 히틀러의 행정능력을 찬양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또 둘의 차이는 전쟁적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히틀러가 배짱으로 정면돌파를 지르고 보는 성향이 강하다면[6][7]스탈린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타입이라고 해도 좋을정도로 철저하게 계산해가며, 어떻게 보면 매우 소심하다고 할수 있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증거는 많다. 독소전쟁 초기의 독일을 자극하지 말라는 명령이라던가, 한국전쟁을 허락 받으러 온 김일성을 48차례 내쫓았다던가, 한국전쟁 참전조차도 최대한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 쪽으로 한다던가.[8]
여담으로 스탈린과 히틀러가 직접 만난 적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을 당시에도 없었으나 한 때 같은 도시에 머문 적은 있었다. 1913년 빈에서 스탈린이 기거할 때 히틀러도 거기 있었던 것. 심지어 그 때는 티토도 빈에 살았다고 한다. 둘 다 막장 아버지의 영향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고 인간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유사하다.

2. 프랭클린 D. 루스벨트


[image]
얄타 회담에서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은 연합국의 세 주축인 미국, 소련, 영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전시의 전략적 결정 및 전후처리를 위해 여러 차례 회동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지만, 루스벨트는 파시즘에 대해서는 강경했던 반면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유화적인 입장이었고, 때문에 전쟁 중에 이루어진 몇 차례 회담에서도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상반되는 이념에 비해서 다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라는 불편한 동맹국 지도자의 호의를 이용할 능력과 의도가 충분한 자였고, 국제연합이나 자유선거 등 미국의 다소 이상적인 전후 구상에 장단을 맞추어주는 대신[9] 동유럽중앙아시아 등지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공인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나치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대거 소모한 소련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자본과 공업력이 건재한 데다 렌드리스를 통해 사실상 연합군의 전쟁 물자를 대부분 책임진 미국에게서 상당한 양보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이는 루스벨트 안티들에겐 전후 냉전의 주도권을 내줄 뻔한 실책이자 스탈린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만 이건 결과론적으로 그렇다는거고, 사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2차세계대전 후기까지는 아무도 미국-소련의 2강체제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영국에서 미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오히려 미국-영국-소련 사이의 삼파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미국영국은 협력할 사이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간 경쟁해야 할 상대로 보는 측면도 있었다.[10] 이런 상황에서 루스벨트는 아직 미성숙한 소련보다는 기존 서방국들의 영향력을 조정하는 일에 더 관심을 쏟았고, 이것은 루즈벨트뿐 아니라 그렇게나 공산주의를 경계했다는 처칠도 해당되는 일이다.[11]
게다가 루스벨트가 전후의 소련을 어떻게 대할지 자체가 루스벨트의 급사로 오리무중에 빠져버려서 루스벨트가 친소련적이었다는 공화당 강경파 일각의 드립이 나오게 된 것이지, 당장 키신저만 해도 루스벨트는 오히려 스탈린을 이용해먹은 정황이 있으며 그가 살았으면 어떤 냉전 질서가 구축되었을지, 그가 스탈린을 상대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었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게다가 후임인 트루먼은 딱히 소련에 호의적이지도 않았으니..[12]
사실 루스벨트는 소련 뿐만 아니라 중화민국 등 제3세계 국가들에도 나름 온정적인 편이었으며, 이는 세계 제1강국이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먼저 손을 뻗어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루스벨트가 단순히 스탈린에게 양보만 한 것은 아니라, 스탈린의 대일전 참전 약속을 받아냈으며 이는 사실 2천만 명 넘게 희생한 소련을 다시 큰 희생이 요구되는 다른 전쟁으로 끌어들인 외교적 소득이었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관동군 궤멸로 일본이 쉽게 GG친 것처럼 보여서 사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은 가볍게 여겨지고 있지만, 미국은 일본 본토 점령 전에 거의 100만이 넘는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일본과 중립조약이 되어 있는 소련을 여기 끌어들이기 위해 유럽에서 대폭 양보를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소련 역시 몰락 작전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을 것이기 때문. 그만큼 소련군에게도 이득이 있긴 있었겠지만(이를테면 한반도, 일본 북부) 독소전쟁에서 이미 연합군 최고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3. 윈스턴 처칠


루즈벨트도 지적했듯 처칠은 전후에도 떠오르는 미소의 도전을 뿌리치고 구 대영제국의 영광을 유지하고 싶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자이자 자본주의의 신봉자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처칠이, 각국의 반제국주의 세력을 후원하는 공산주의자인데다 강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친하게 지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온 영국으로서는 19세기 그레이트 게임 시절부터 늘 그래왔듯이 안보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전후 패권국으로 부상할 것이 자명한 소련을 외교적으로 '''반드시''' 견제해야 했으며, 이는 제2전선 문제나 자유 폴란드의 전후 처리, 독일 분할 문제 등의 사안을 두고 양국의 첨예한 대립과 의심으로 이어졌다.
처칠은 합스부르크 왕가 제국의 복고를 비롯하여 구질서 회복을 외치기도 했지만 구 오헝 제국의 영토를 자기 배당금으로 받아야 할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조차 탐탁치 않아 했다. 그러나 쇠퇴해 가는 대영제국의 힘만으로 소련에 맞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처칠은 제3제국의 항복 후에 잔존 독일군과 서방연합군이 연합하여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언싱커블 작전을 벌여 소련의 뒤통수를 치려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13]
그러나 이런 뒤통수를 벌이기에는 미국이 여기에 매우 소극적일 것 같고, 새로운 전쟁을 만드는 건 매우 여론이 안 좋은데다가, 결정적으로 영국군 참모부가 유럽 전선에 전개된 소련군이 서방 연합국에 비해 3배 많아서 이기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려 취소했다.[14] 처칠의 반소련 정책은 미국의 미온적인 반응과, 결정적으로 처칠 자신이 종전 직후에 실각하면서, 처칠과 스탈린의 대결은 스탈린의 판정승으로 돌아가게 된다.

4. 해리 S. 트루먼


[image]
포츠담 회담에서 왼쪽부터 클레멘트 애틀리, 해리 S.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종전을 얼마 앞둔 1945년 첫 집권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어리벙벙하고 무능력해 보였고, 그가 친했고 존경한 루스벨트와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고까운 존재였다. 물론 트루먼은 빠르게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직위에 적응했고, 반공주의자이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트루먼은 스탈린의 홋카이도 상륙 계획을 가차없이 거절했으며 리비아를 소련 보호령으로 할양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이는 안티들에게 공산당 첩자 드립까지 나오는(...) 루스벨트의 친소 정책보다는 훨씬 강경하게 돌아선 것이며 이 때문에 트루먼을 방문했던 몰로토프는 트루먼의 노골적인 적대적 태도 때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트루먼의 입장에서 미소간의 대규모 첩보전이나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15] 동유럽 및 제3세계의 연이은 공산화 등 일련의 시대적 흐름은 '''스탈린과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여기게 했으며, 스탈린의 입장에서도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지역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이나 마셜 플랜 등으로 대놓고 소련을 견제하며 적성국 취급하는 미국이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미국이 전쟁 동안 보여준 압도적인 생산력과 핵무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을, '''미국소련독소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저항정신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기갑전력'''을 각기 두려워했고, 양국 모두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또다른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다행스럽게도''' 미소간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편 소련군이 만주 작전으로 만주를 넘어 한반도 북부까지 폭풍처럼 밀고 내려오면서 38선을 경계로 미소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고, 급기야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의 첫 포화를 알리게 된다. 다만 스탈린은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히틀러처럼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일부 반공소스가 주장하듯이) 미국과의 세계대전을 꾸미려는 인물은 아니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군이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어쩔 수 없이 공군을 참전시키면서도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엄청나게 신경을 썼으며, 미국 또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소련이 참전한 것을 눈치채고도 일부러 모른 척 하는 등 서로가 조심했다.

5. 마오쩌둥


[image]
1949년,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소련을 방문한 마오쩌둥
공산주의 원조국이자 당장 G2로 떠오른 소련의 위세 때문에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교황이었고 각국의 공산주의자는 아무리 자국에서 독재를 해도 스탈린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이는 중국에서는 황제나 다름없었던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국민정부 시점의 중국 공산당은 활동 자금의 90% 이상을 코민테른에게서 제공받고 있었으며 소련에서 온 기술 고문, 군사 고문의 지도가 없이는 역량 확대도 어려웠다. 코민테른으로부터 반혁명 수정주의자 집단으로 찍히는 순간 1920~1930년대 코민테른이 가지고 있던 국제적 위상을 고려할 때 모든 공산당원들의 적으로 찍히는 것은 물론이요 활동할 역량 자체가 완전히 중단되는 판이었다.
대장정 시점에서도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이 제공한 멕시코 은화와 무전기 덕분에 겨우 대장정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당연히 마오쩌둥도 표면상으로는 자신이 코민테른의 진정한 뜻을 추종한다고 주장하면서 코민테른에는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파시즘에 대항하여 부르주아들과 동맹을 맺으라는 코민테른의 유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동정항일을 실시하는가 하면 중일전쟁 내내 장제스 휘하의 통일된 항일 전선을 취하라는 스탈린의 지령을 무시하고 역량 확보 밑 소규모 게릴라전에만 몰두하였다. 혁명기 마오쩌둥-스탈린 관계를 요약하자면 마오쩌둥은 감히 스탈린에게 대놓고 개길 수는 없었지만 소련이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뒤로 호박씨를 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도 트로츠키주의자로 의심되는 마오쩌둥을 사이비 공산주의자로 폄하했으며 마오쩌둥이 중국의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제대로 된 항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1940년대까지 오히려 장제스와 더 친하게 지냈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주의의 배신자로 극렬히 디스를 할 정도였다.
1946년 국공내전이 재개되던 시점에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에 막대한 양의 원조를 제공하는 등 그들을 돕긴 하였으나 마오쩌둥의 혁명역량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국민당을 돕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오쩌둥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아니라서 계속해서 공산당의 확장에 제동을 걸려고 했다.
스탈린은 국공내전 말기까지 중공의 완승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중공을 전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고 1949년 국공내전 도중 난징이 함락되자 소련 대사관을 광저우로 이전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영미의 정보 입수를 위한 전략적인 행동이었지만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소련에 불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중공이 국공내전에서 역전하여 승리하자 마오쩌둥을 인정하고 중공 정권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고, 기술고문을 파견한다. 스탈린은 1949년 마오쩌둥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고 "승자는 비난받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마오쩌둥을 높이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마오를 경계하며 만나 주지 않아 마오쩌둥을 또 분노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도 스탈린 앞에서는 분노를 드러낼 수 없었다.
50년대에도 삐걱거림은 여전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공업화 계획이 비현실적이라고 비웃었으며 중국에 원조를 제공하는 대가로 만주에서의 이권을 포함하여 막대한 양의 자원을 뜯어갔기 때문에 중국은 불만이 많았으나 여전히 스탈린에게 개길 깡은 없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죽는 순간까지는 얌전했다.
이는 흐루쇼프 시절의 모습과 비교되는데 흐루쇼프 시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은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에 참관하였다가 발가락 끝으로 추는 이상한 춤을 볼 이유를 모르겠다고 디스를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스탈린이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보여줬을 때는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끝까지 관람한 후에 공연을 칭송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것을 두고 중국 연구자들은 마침내 마오쩌둥이 해방된 순간이라고까지 한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에 나온 마오쩌둥의 후기저작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즉, 스탈린은 기술과 생산력을 사회주의로 가는 가장 큰 요소로 보았는데, 마오쩌둥은 그 반대로 인간의 의지를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스탈린의 사상을 비판한 것.
물론 그렇다고 마오쩌둥누구처럼 스탈린을 대놓고 폄하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스탈린을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높이 평가했으며[16], 중소관계가 최악이었던[17] 1969년 10월 1일 국경절에 톈안먼 광장에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세웠을 정도였다. 비록 그 시점에 저 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6. 장제스


스탈린장제스중국 국민당마오쩌둥중국 공산당 사이에서 계속 양다리를 걸쳤다. 먼저 레닌시절 쑨원과 맺은 중국 국민당소련의 합작 및 국공합작은 스탈린 시절에도 계속되었고, 장제스군의 중핵을 이루던 장교들은 소련이 지원한 황포군관학교에서 길러낸 인재들었다.
이렇게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벌을 성공시키고 중국을 거의 통일하게 되지만 국민당의 중핵을 이루는 자산계급들은 공산주의와는 체질상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곧 갈등이 일어났다.
장제스천하통일을 이룩하기 작전에 공산당과 국민당은 혁명관이 달라 함께할 수 없다며 1926년 4.12 상하이 쿠데타를 벌여서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원을 학살하면서 깨진다. 스탈린은 이에 발끈해서 장제스를 돕기 위해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군사고문들을 모두 소환했다. 그리고 코민테른을 통해 국민당과 싸우는 공산당을 지도했다. 그리하여 스탈린의 입김 아래서 공산당은 난창 폭동광저우 폭동을 벌이지만, 모두 국민당에 의해 진압되고 대다수의 당원을 잃게 된다. 장제스는 "소련이 공산당의 폭동을 조종했다"면서 소련과 단교하고 스탈린과 관계를 끊었다.
스탈린과 장제스는 광저우 폭동 이후 약 몇 년간 결별하게 되고, 당시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있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 거의 인질이 되지만 양국의 이해는 다시 맞아떨어져서 1930년대 초 다시 수교는 이어진다. 장징궈는 1937년 국공합작이 재개되자 중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소련은 정부대 정부 관계에서는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지만, 소련공산당은 코민테른을 통하여 중국공산당을 지원하고 있었다. 소련은 국공합작 시절보다는 적었지만 군사고문과 군사원조도 계속 보내고 있었다. 중국으로 파견되는 군사고문은 소련군의 출세코스였다.
서안 사건이래로 국공합작이 개시되자 스탈린은 일본과 싸우는 장제스를 도왔고 공군 파일럿들을 파견했다가 일본이 항의하자 소련으로 철수시킨다.[18]
국공내전 당시에도 스탈린은 철저히 양다리를 걸쳤다. 국공내전 초기에는 누가 봐도 장제스가 우세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공산당을 노골적으로 돕지는 않았고 다만 만주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만주군에서 압수한 무기를 공산군에 넘기거나 혹은 소련 군정에 설치된 북한을 인민해방군이 통과하게 해주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소련은 끝까지 국공내전의 양상을 살피다가 1949년 중화민국난징이 공산군에 함락되고 나서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7. 김일성


스탈린 생전에 김일성은 절대권력자가 아닌 '''스탈린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애당초 자국의 내전에서 승리해 자력으로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조차 스탈린의 권위를 거역하지 못했는데, 소련의 힘으로 지도자가 된 김일성이 스탈린 상대로 뭘 어쩔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비유하자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고용된 비정규직 지국장이라면 스탈린은 세계 경제 반을 지배하는 대기업 회장인 관계로, 스탈린이 살아있는 동안 김일성은 스탈린 눈치를 항상 살펴야 했다.
6.25 전쟁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던 김일성은 오직 스탈린을 어려워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으나 무려 48번이나 거절당하고 쩔쩔맸다.# 김일성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했기 때문이다.[19]
그럼에도 김일성은 그 전쟁만은 무조건 일으켜야 했기 때문에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말을 만들어냈고 결국 애치슨 라인을 열심히 설명해서 스탈린에게 "한국에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계속 설명한 다음에야 간신히 전쟁을 허락받았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면 조공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전쟁 허락을 받았어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김일성에게 소련군 중에서 육군은 아예 내주지 않았고 극소수의 공군만 지원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지원 없이 가만 있었다. 심지어 남한의 북진으로 북한이 시종일관 수세에 몰리고 있는 와중에도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기도 했다.
소련은 세계대전을 우려해 공군의 참전조차 감추었지만, 미국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았다. 한편 스탈린은 김일성의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대대적인 인민재판을 통한 학살로 인하여 점령지의 민심을 잃고 있다는 소련군 보고를 듣고 '''"김일성 동무는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왜 가만히 있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을 내치지 않은 것은 적어도 북한에서 김일성을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김일성보다 말 잘 듣는 인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둔 것이다. 북한의 외무장관이었던 박헌영도 스탈린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스탈린은 박헌영같은 인텔리는 라이벌이였던 트로츠키처럼 먹물 들어서 자기 말 안 들을 거라고 판단해서 박헌영을 버리고 오히려 박헌영 숙청에 일조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김일성의 '''아부실력'''이 박헌영보다 나으면서도 김일성이 자신에게 반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죽기 1년 전 간이 부었는지 노망이 들었는지 '''"스탈린은 내 친구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1] 그 유명한 히틀러 관련 영화인 몰락에서도 이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2]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 고문으로 거짓진술, 연출된 간략한 공개재판, 판결즉시 처형.[3] 실제로 유럽이나 아시아나 스탈린vs히틀러 라는 의식은 매우 넓게 퍼져있다. 지정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숙적이었던 것도 사실이고.[4] 이 때문에 히틀러의 명령을 행정기관에 하달하던 마르틴 보어만이 실질적인 독일의 통치자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5] 예를 들어 괴링의 공군과 힘러의 SS가 모두 기갑사단을 보유하고 동부전선에 나섰으니, 이런 행정적 낭비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바로 알 수 있다 [6] 특히 프랑스 침공과 관련된 책만 봐도 알 수 있다. 전격전의 전설같은[7] 굳이 전쟁시절을 빼고, 체코슬로바키아 건이나 오스트리아 합병, 폴란드 침공만 봐도 히틀러가 얼마나 정세에 모험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전간기에 히틀러가 이웃 국가를 상대로 했던 것 중 그 어느것도 정상적인 회담을 거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오직 대공황의 여파로 일어난 초인플레이션, 그에 따라 불거진 전쟁 배상금 지불 문제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해 베르사유 조약 폐기, 재군비 선언 등 도박에 가까울 정도로 아슬아슬한 형국을 이어갔고, 결국 폴란드 침공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인내심를 건드려, 아직 전쟁준비도 덜 된 상태에서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만다.[8]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전쟁협조를 했는데, 미국은 다 알고 있었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겨우 몇 년밖에 안 지난 상황인지라 세계대전으로 번지기 싫어서 대충 눈감아줬다.[9] 이후 동유럽에서의 자유선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철의 장막 너머에는 죄다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그나마 국제연합은 6.25 전쟁 등 강대국간 삐걱거림이 존재하긴 했으나, 어찌저찌 돌아가긴 했다.[10] 당장 루스벨트는 나치에 의해 쑥대밭이 된 유럽국들이 아직도 식민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제국주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며 한탄한 적도 있었다.[11] 이러다보니 처칠도 말년에 후회했듯, 공산주의 콤플렉스로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 정권을 용인하는 병크를 저지르기도 한다.[12] 사실 이 점 때문에 스탈린이 더 반서방적으로 틀어진 점도 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친서방 기조가 유지되는 가운데 스탈린이 죽었다면 이후 소련의 스탈린 격하 운동과 상대적 탈권위주의 흐름을 생각해볼때 잘만 구슬렸으면 진짜 동유럽에서 수십년은 일찍 자유선거가 치러졌을지도 모를 일.[13] 그렇다고 해서 나치 독일(히틀러부터 되니츠까지)이 기대했던 '국방군이 영미 연합군에 항복 후 동맹 체결, 소련군 진격 저지 및 유럽에서 격퇴'라고 바라던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망상이 현실성이 있어지는 건 아니다. 그만큼 독일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은 소련을 엄청난 위협으로 보았지만 그와 별개로 현실적으로 소련을 침공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고, 처칠은 사람들을 싸우게 하는 건 잘했지만 직접 작전과 전투를 하는 건 보어 전쟁 시절부터 형편없었다. 흔히 갈리폴리가 처칠의 몇 안되는 실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말레이 해전을 비롯해서 처칠의 군사적 안목은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훨씬 수준이 낮았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부터 '군사학의 제1 법칙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라고(벌써 서유럽이 모스크바-혹은 러시아 그 자체-에 갔다가 참패한게 3번이고 그 3번중 1번은 바로 독소전쟁이었다.) 결사반대했으며 미국조차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짓이다. 게다가 이미 서방에 비해 우위에 있는 소련 첩보망에 다 들켰을 정황이 있다.(말이 안되고 되고를 떠나서 소련은 물론 당장 전쟁이 끝난 뒤며 사람도 많이 죽어 피해가 많긴 했지만 영국이라고 사정이 좋은건 아니었다. 전후 대영제국이 해체의 길을 걸었을 정도인데 소련에 싸움 걸 여력이 되었을 것 같나? 당장에 소련은 독소전을 겪고도 오히려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쌍벽으로 떠오른 반면 영국은 소련이나 미국에게 밀려났다.)[14] 이 언싱커블 작전은 90년대 비밀이 해제되면서 수면에 나왔지만, 소련은 당시에 이미 첩보망을 동원해 이런 처칠의 의도를 대충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스탈린 자신도 처칠을 매우 안 좋게 생각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 나온다.[15] 다만 이 사건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했더니만 미국은 무지막지한 물자를 베를린에 그것도 몇달간 때려박아 그 막대한 양에 소련이 데꿀멍할 수 밖에 없었던 것[16] 이런 평가는 덩샤오핑이 훗날 마오에 대해 그대로 다시 써먹는다.[17] 당시 중앙아시아와 만주접경에서는 중소 양군 수백만이 일촉즉발의 태세로 대치중이었다.[18] 이렇게 소련 파일럿들이 송환되면서 장제스플라잉 타이거즈를 조직하게 된다. [19] 독소전쟁 이후 국가 재건에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