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1. 개요
2. 역사
3. 조직
4. 관련 노래
4.1. 전대협 진군가
4.2. 전대협 찬가
5. 역대 의장
6. 전대협 그 후
7. 주요 사건
8. 관련 문헌
9. 동명의 보수단체

全國大學生代表者協議會

1. 개요


[image]
1991년 전대협 5기 출범식 당시 모습.[1]
한총련의 전신으로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존재했던 학생운동 단체이자 총학생회 연합체. 약칭 전대협(全大協)이다.
모토는 구국의 강철대오. 범 NLPDR계가 주류.
특히 학생운동의 최전성기였던 노태우 정부 시절에 전대협은 청와대와 주요 제도권 정당 다음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요 외신들로부터도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단체로도 평가된 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민주자유당)과 야당(평화민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올랐을 정도.[2]

2. 역사



6월 항쟁과 전대협 결성 1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1997)
10.28 건국대 항쟁으로 1300여 명이 구속된 뒤 비합법 지하서클 중심의 학생운동세력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선도 투쟁에서 대중 노선으로 변화를 꾀하기 시작하여 전국적인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했다.[3] 그리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4.13 호헌조치로 불붙기 시작한 민중 투쟁은 전국적인 학생운동 진영인 '전대협' 결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해 6월 항쟁 중에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장례를 위해 7월 5일 연세대학교에서 전국의 학생회장이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전국적 학생 대중 조직 건설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8월 1일 서울 지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서대협) 의장 이인영의 주도로 고려대에서 '제1회 전국 대학생 지역대표자 연석회의'를 시작으로 총 세 번의 회의를 거쳐 전대협은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
[image]
1987년 전대협 발대식 모습.
그리고 8월 19일, 충남대학교에서 전국 95개 대학에서 모인 3,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기 전대협 발대식을 열었다. 전대협은 발족 선언문에서 ●외세 배격과 독재 종식을 통한 자주적 민간 정부의 수립, ●조국의 자주적 평화 통일에 기여,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향한 연대, ●학문•사상의 자유 쟁취, ●전국학생총연합(전총련) 건설의 토대 마련 등 다섯 가지를 활동 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은 1987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과 13대 대선 투쟁[4], 1988년 6 ·10/8 ·15 남북 학생회담 시도[5], 전두환-이순자 부부 체포 결사대 활동 등으로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1989년 봄부터 문익환 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그 해 5.3 동의대 사태를 계기로 화염병 처벌법이 제정된 뒤 6월 30일에 한양대에서 열린 평축 출정식 당시에 인문관에서 고립 농성하다 수천여명이 구속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수배를 당했고, 특히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의 여파로 전국 140여 개 대학에서 열린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학생회장들이 당선되면서 NL-PD-비운동권 삼각 구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91년 시위 도중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씨가 경찰의 토끼몰이 유혈 진압 때문에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 때처럼 정권 타도를 외치면서 거리를 뒤덮었으나,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시인 김지하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의 운동권 비난 발언[6]으로 여론이 급반전하고 6월 20일 광역의회 선거에서는 민자당이 당초 열세였던 서울시의회, 경기도 의회, 인천시의회 선거에서 과반을 넘게 가져가며[7] 투쟁은 실패로 돌아간다.[8][9] 결국 1992년 총/대선 정국에서도 크게 힘을 쓰지는 못했고 전대협 7기 당시인 1993년 3월 경희대에서 대의원대회를 통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건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결의하며 전대협은 자진해산하였다. 이후의 역사는 한총련 항목 참조.

3. 조직


초기 전대협은 산하에 연락사무국만 두었으나, 1989년 3기 때부터 조국통일위원회를 비롯해 정책국, 집행국, 문화국, 사무국, 투쟁국, 홍보국 등 부서를 두어 조직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외에도 전업 활동가 중심조직인 '정책위원회'가 있다.
산하 지역조직으론 서총련(서울), 부울총협(부산/경남), 남총련(광주/전남), 대경총련(대구/경북), 대전대협(대전) 등을 두었다.

4. 관련 노래



4.1. 전대협 진군가



1989년 3기 때부터 제정되었으며, 작사/작곡은 윤민석이 담당하였다. 원체 시대가 시대였던 데다 멜로디도 꽤나 중독성 있어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학번이라면 아직도 흥얼거릴 수 있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북한에서도 임수경이 방북하면서 전대협 진군가를 불렀는데 북한에서 주로 불러졌던 상투적인 당 선전 가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선함으로 한동안 상당한 인기곡이 되었다는 후문도 있다고.
한총련으로 바뀐 이후로는 전대협 진군가에서 한총련 진군가로 교체되었지만 한총련 진군가가 전대협 진군가에 비해서 NL적인 색체가 대놓고 드러나는 데다가[10] 노래 자체도 전대협 진군가는 박력감이 넘치는 데 반해 한총련 진군가는 울적거리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한총련으로 바뀐 이후로도 시위 현장에서 전대협 세 글자만 한총련으로 바꾼(...) 버전이 애창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 한총련 진군가는 94년 2기 한총련 출범식에서 조국과청춘이 최초로 보급되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전대협 진군가를 한총련 진군가 대신 불렀다.
여담으로 2016년 퀴어문화축제에서는 반대 세력을 향해 기가폰을 들이밀고서 'LGBT 진군가'를 부르는 참가자도 있었다. 한참 필 받아서 노래 부르다가 옆 사람이 쳐다보니까 뻘쭘해서 말하기를, '아 이거 옛날 전대협 진군가 패러디한 겁니다'(...)
또 다른 여담으로 철의 노동자와 코드 진행이 비슷해서 앞 소절에선 철의 노동자를 부르다가 뒷 소절에서 전대협 진군가로 바꾸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와 '단결만이 살 길이요'는 코드 진행뿐만 아니라 멜로디도 똑같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이여'가 '우리의 사랑이여'로 기억하거나 부르는 경우도 꽤 있었다는 후문도 있다나. 94년 2기 한총련출범식(조선대)에서는 아예 두 노래를 콜라보레이션한 곡을 노동자노래단(확인요망)이 공연한 적이 있다.
일어섰다 우리 청년 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전대협의 깃발 아래
(후렴)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아아 전대협이여 우리의 자랑이여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한 길로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한 길로

4.2. 전대협 찬가



자랑스런 이 땅에 아들딸로 태어나
투쟁으로 사랑하고 피땀으로 일구어온
해방조국 건설의 길 온몸으로 나간다
전대협의 깃발 들고 당차게 나간다
(후렴)우리 가는 이길 어디쯤 모진 가시 총칼로 있고
때론 거센 폭압에 상처받을 지라도
믿음으로 일어서고 사랑으로 일으키는
전대협이여 영원하라 통일의 그 날까지 *2

5. 역대 의장


  • 1기(1987년) 이인영: 서대협 의장 겸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前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이자 現 구로구 갑 국회의원, 통일부 장관
  • 2기(1988년) 오영식: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前 더불어민주당 강북구 갑 국회의원, 前 한국철도공사 사장
  • 3기(1989년) 임종석: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前 더불어민주당 성동구 을 국회의원, 前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前 청와대 비서실장, 現 대통령비서실 외교특별보좌관
  • 4기(1990년) 송갑석: 남대협 의장 겸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더불어민주당 광주 서구 갑 국회의원. [11]
  • 5기(1991년) 김종식: 한양대학교 총학생회장. 現 ㈜녹색친구들[12] 대표. 녹색당 당원
  • 6기(1992년) 태재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시카고 대학교 사회복지학 박사.

6. 전대협 그 후


역대 전대협 의장들은 다들 감옥에서 나온 뒤에는 학생 시절의 NL 노선에서 이탈해서 나름대로 현실 정치에 뛰어들었다. 한총련과 달리 전대협은 막가파식 투쟁을 한 것은 아니다.
그에 반해 한총련 출신이 양지에서 활동하는 경우는 정말 찾기 힘들며 한총련이라 그러면 종북 이미지, 이적단체로서의 이미지가 지금도 투영되어 있다. 자기 과거를 숨기고 언론에 두문불출하는(심지어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이며 음지에서 활동하다 욕만 먹는 경우도 있다.
1기부터 4기까지는 정치권의 386 영입 붐을 타고 2000년을 전후해서 민주당계 정당을 통해서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다.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라인을 탄 이들은 대외적으론 햇볕정책, 사회적으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한미 FTA를 지지하고 최저임금 산입 범위를 확대하는 등 보수 정당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486세대와 친노의 핵심으로 현재 민주당 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전대협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계파 라인을 탄건 아니고, 여러모로 이합집산이 이뤄졌기 때문에 여러모로 우여곡절이 많았기도 했다.
5기 김종식은 졸업 후에 같이 활동하자는 선배들의 제안을[13] 거부하고 광주에서 지역 공동체 운동을 하다가 민주노동당 최순영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거쳐서 직접 지방선거에도 출마하였다. 이후 민주노동당을 나와서 환경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녹색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레디앙 인터뷰 1 레디앙 인터뷰 2
6기 태재준은 사실 대학 재학시에도 관악 자주파라고 불리던 비주사 NL 계열[14]로 기존 NL주류계[15]와의 마찰로 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았고[16] 얼마 안 가 체포돼 감옥에 갔다.[17] 출소 후 졸업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학위과정을 마쳤다. 2000년대 들어서 복지국가 건설을 주장하면서 친민주노동당 성향을 보였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하지 않고 미국 시카고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시카고 대학 특유의 엄격한 학사관리와 고문 후유증, 시카고 총영사관 정보 요원의 동향 감시로 인한 스트레스가 겹쳐 건강에 이상이 생겼고,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귀국했지만 학계 생활을 채 1년도 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었다.[18]
1993년 전대협이 자체 해산하고 한총련으로 확대 개편된 이후 전대협 간부 출신들이 결집해서 1994년 전대협동우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 전대협동우회를 통해서 역대 의장단 이외에도 전대협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학생운동가들이 조직적으로 제도권 정치에 투신하였다. 대다수는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으로 이어지는 민주당계 정당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노무현 정부 출범과 2004년 총선을 통해서 이들이 대거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자 한국정치를 개혁할 새희망으로 주목받았다.한겨례21, 주간동아 하지만 참신성 이외에는 뚜렷한 정치적 실천이나 대한민국을 바꿀 독자적인 대안을 선보이는 데는 결국 실패했고, 386세대로 불리우던 전대협 출신들이 조직적으로 캐리했던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는 침몰했고, 201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구태기득권으로 청산 대상으로까지 몰리게 된다. 이후 민주당이 2015년을 전후해서 엄청난 계파 갈등을 겪은 후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전대협 출신 정치인 중 상당수가 문재인 정부 내각에 입각했지만 당원들과 지지자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인물에 따라 케바케인 상황이다.
일부는 우파으로 전향해서 뉴라이트가 되었고[19] 이명박 정부 출범 전후로 한나라당-새누리당 쪽으로 대거 입당하였다. 이들은 아스팔트 우파라고 불리는 극우세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밑에도 후술하겠지만 2019년 현재 전대협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단체는 동명의 다른 단체일 뿐이며 우파 단체다.

7. 주요 사건



8. 관련 문헌



9. 동명의 보수단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 전대협 출신들이 많은 것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동명의 반문 성향이 짙은 우파 단체이다. 유튜브
2018년 12월에는 전국 대학가에 '문재인 왕 시리즈' 대자보를 붙여 주목을 받았다. 해당 대자보는 경제·에너지·대북·고용·외교·교육 등 문재인 정부의 정책들을 비판 및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이후로도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게시하자 경찰이 전담수사팀을 차려 수사에 착수했다.# 정부를 비판하는 불온 게시물을 대자보로 부착한 사람이 경찰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학교측에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침입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경찰이 무단침입으로 주장하며 기소를 하여서 논란이 일어났다. 전대협 문재인 정부 비판 대자보 사건
2019년 5월에는 문재인에 타노스를 합성한 문노스 합성 사진이 담긴 전단지를 전국에 뿌리기도 하였다. 공수처, 탈원전, 연동형 비례제 등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
2019년 6월에는 문재인시진핑 가면을 쓰고 중국에게 나라를 갖다바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이는 문재인의 중국몽 발언 등 언뜻 친중으로 보이는 행보를 비판하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
2019년 7월 17일에는 사람들이 보는 시내에서 반일 시위를 가장한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김치 전사 복장으로 김치 싸대기를 날리거나 러브라이브 네소베리 인형을 찢는 등의 행위였다.
2019년 7월 25일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북한 군인 옷차림을 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 8명이 인공기를 든 채 퍼포먼스를 벌이다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기사 경찰은 국가보안법에는 저촉되지 않으나 장난감 총기를 들고 활보한 데 대해 처벌 가능성을 찾는 중이다.
21대 총선에서는 김근태 서울대지부장이 국민의당 비례대표 4번으로 출마했다.
이 단체에서 대변인을 지낸 김정식이 김용식21대 총선 남양주시 을 후보의 쌍둥이 형이다.
2020년 7월 백선엽 장군 사망 이후, 광화문광장 시민분향소 마련을 주도했다. 이틀 동안 2만여명의 조문객들이 이곳을 조문했다고 주장했다. # #

[1] 왜 무대의 걸개 그림이 "건설 전총련"인고 하니 당시 전대협은 그 이름처럼 6월 항쟁이라는 특수한 정세 하에서 각 대학 대표자들로 구성된 일종의 가설 조직이란 한계를 안고 있었던 터라, 실질적으로 대학생들을 포괄, 지도할 수 있는 대중 조직으로의 변모를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총련은 향후 건설될 대중 조직의 가칭이었고, 이 목표는 이후 한총련의 출범으로 달성된다. 직명이 '전국' → '한국'으로 바뀐 이유는 주사파 관점에 따라 남한만의 조직이므로 '전국'이 아니기 때문이다.[2] 현대그룹, 삼성그룹, 대우그룹재벌이나 이들이 연합한 전경련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 크다고 평가됐다는 이야기다.[3] 그 전까지는 각 대학교의 지하 서클(이를 "언더티"라고 한다)들을 중심으로 연합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연합 시위나 선도 투쟁을 하는 형식이었다. 1970년대 까지는 거의 학교별로 조직되어 필요할 때만 연계되는 형식이었고(그 시절까지 대학생 숫자가 극히 드물었던 것도 한몫했다), 대부분 서울대 중심이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대학 정원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보다 본격적인 연합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흐름은 무림-학림 논쟁이나 학림 사건, MC-MT 논쟁 항목에서 잘 볼 수 있다.[4] 다만 이 과정에서 후보 단일화(김영삼)와 비판적 지지(김대중), 민중 후보(백기완)으로 나뉘어져 어려움을 겪었다.[5] 그해 8월 15일 판문점 진입 당시 누워서 행진하는 사진으로 알려진 그 사건.[6] 민주화 운동으로 오랜 옥고를 치뤘던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게재한 것이 결정타였다. 당시 강경대의 사망 이후 각계각층에서 연쇄 분신이 일어났는데, 김지하 시인이 이걸 모두 운동권 조직들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근거는 없다...강기훈 유서대필 조작도 이런 김지하의 강변을 정권에서 이용하면서 촉발된 것이다.[7] 다만 당시 평민당과 민주당이 91년 지방선거에서 노태우 정부에게 극도로 부정적인 여론을 믿고 단일화 작업 없이 따로따로 후보를 낸 것도 크기는 했다. 그래도 광역의원 선거에서 야권이 수도권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던 선거를 전대협의 뻘짓으로 날려먹었다는 분석은 달라지지 않기는 하지만. [8] 당시 분위기는 거의 정권 타도 직전까지 갔었다고 평가된다. 실제로도 3당합당 이후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의 인기가 낮다보니까 1991년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을 내주는 것 아닌가하는 얘기가 오갈 정도였다. 하지만 6월 항쟁 때와는 다르게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사무직과 자영업자층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실패했다. 3저 호황과 서울올림픽의 성공으로 두터워진 중산층이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제도 개혁을 선호했던 것으로 풀이된다.[9] 특히 정원식 밀가루 투척과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이 학생운동의 정당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다만 강기훈 유서대필은 결국 정권의 조작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지 오래. 그리고 정원식 밀가루 투척은 누가 뭐래도 쓸데없이 벌인 뻘짓이었다.[10] 사실 전대협도 헤게모니는 NL이 잡고 있었고 작곡자 본인도 NL 성향 음악인이라 '민족의 해방을 위해'라는 내용은 들어가 있다.[11] 20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고, 이후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다시 공천을 받아 당선.[12] 서울 지역의 사회적 기업. 강북구에서 저탄소주택 건축 사업을 하고 있다.[13] 정확히는 감옥에서 나온 직후에 한양대 직계 선배인 임종석이 찾아와서 같이 386세대의 청년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1990년대 중후반 청년 운동이란 명분하에 결집한 386세대의 학생운동 출신들은 결국 집단적으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전부 제도권 정치에 투신했다.[14] 소위 NL-left.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NL계에 합류했던 CA 다수파의 후신이다.[15] 이른바 자주대오 = 주사파[16] 당시 서울대 운동권 내부 정세로 주사파 계열 단독 후보가 나오지 못하여 태재준을 내세웠다고 한다.[17] 사실 태재준은 본인의 활동은 미약했지만, 학생운동 그리고 길게 보면 2000년대 진보정당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학생운동 시절 태재준을 따르던 비주사 NL 그룹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에 맞춰서 온건 PD 그룹과 통합해서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을 형성하면서 NL 노선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이들은 무조건적인 정권 타도, 반체체 혁명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현실적인 사회개혁 노선을 제시했고 졸업 후 민주노동당 혹은 시민운동에 뛰어들어서 복지국가 노선을 주장하였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할 때 실제 정책 파트에 가장 많은 인력을 제공한 건 바로 21세기 출신들로 2017년 현재까지도 학계와 언론, 시민단체, 제도권 정당 등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18] 현재는 서울역 앞 및 서울지하철 4호선 객차에서 자신이 국가정보원에게 독살을 당할 뻔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본인의 주장이나 블로그를 참조하면 전형적인 조현병 증세임을 알 수 있다. 태재준 블로그[19] 대표적인 케이스가 북한의 인권 탄압 참상을 알고 전향한 하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