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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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저서의 가치
3. 기록된 내용
4. 관련 문서


1. 개요


2012년 12월 5일 역사비평사에서 출판된 이연식 저작의 논픽션.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것과 같이 8.15 광복을 맞은 재한일본인들의 상황을 담은 저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해방의 기쁨을 맞이한 우리의 입장에서 쓰여진 저서들은 많지만, 지배세력의 국민들이 식민지에서 맞이한 해방 당시의 심정은 어떠했었는지를 알려주는 저서로서 읽어볼 만한 도서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인 이연식은 1970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한국현대사와 한일관계사를 공부했다. 당시 해방의 상황에서 '불쌍한 집단'을 찾는 중, 해외 귀환 동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으로 <해방 직후의 해외 동포의 귀환과 미군정의 정책>이라는 석사논문을 썼다.
그러다 일본 문부과학성 초청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의 국립도쿄학예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그곳에서 패전 후 일본으로 귀환한 귀환 일본인(히키아게샤)들에 대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의 해방 후 한국에서 일본으로 귀환한 일본인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대로 그가 박사논문으로 낸 해방 후 한반도 거주 일본인 귀환에 관한 연구의 재료가 된다.

2. 저서의 가치


식민지에서 살다가 간 지배국 국민들인 일본인들의 귀환사에 대해 뭘 그리 알 필요가 있는가 반문해 볼 수 있지만, 피지배국이었던 우리의 눈으로 본 해방의 시각과 지배국 국민들이었던 일본인들의 눈과 입장에서 본 해방의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살던 일본인들이 패전을 맞아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갑자기 떨어진 것에 울분을 토하거나 슬퍼하는 이야기 중 상당부분을 비판적 혹은 분석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조선인에 대해서는 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조선에서 모은 재산 대부분을 잃게 된 자신들만 피해자인 것처럼 생각한다든지, 타지에서 자라 본토 일본인과 묘하게 다른 정체성을 가졌지만 동시에 대다수 조선인과 유리된 삶을 살았던지라 조선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조선에 대한 이해도가 굉장히 낮다든지…

3. 기록된 내용


생소한 만큼 꽤 흥미진진한 내용이 많다. 여기 자세히 나와있다. 이 중 몇 가지만 추려내자면
  • 당시 전시였던 관계로 부산의 전 지역은 등화관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8월 15일을 기해 해제되었다고.
  • 히로히토 덴노의 옥음방송으로 일본의 패전이 알려진 직후,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에게 특이한 지시가 내려왔다. 그 내용인즉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 부부 일행이 탈 선박을 급히 구하라는 것이었다. 이틀 후 이 선박은 부산 앞바다를 출발했는데 얼마 못 가서 갑자기 목도 앞바다에서 멈춰선 후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아베 부부가 조선에서 약탈한 귀중품이 너무 많았던 나머지 낡은 배가 감당을 못하고 침몰 직전으로 갔던 것이었다. 결국 짐을 절반 정도 바다에 버리고 난 후에야 간신히 부산으로 돌아와 쉬쉬하며 경성으로 몰래 잡입했다고 한다.
  •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면서 한국이 해방되자, 조선총독부는 총독령으로 각 기관에 달려있던 덴노의 사진과 조선 각 지역의 일본 신사에 설치된 위패들을 모두 소각할 것을 명령했다.
  • 만주 작전의 성공으로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지역으로 입성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만주와 이북 주재 일본군 수뇌부는, 자신들과 군인 가족들을 즉시 대피시키고는 나머지 100만 명의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피방송도 내보내지 않았다. 아울러 이전에 각 기관 수장들과 조선주재 일본 대기업 간부들은 이미 탈출했다. 이 결과로 졸지에 소련군이 이북에 입성하는 모습을 본 일본인들은 경악하고 일본 정부조선총독부자신들을 적군의 손에 내팽겨쳤다는 사실에 분노했으며, 일부는 노동력이라는 이유로 소련으로 끌려가거나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 채 빈손으로 이남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 시절 함경남도 원산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일본인 카사이 히사요시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원산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사는 원산부[1]와 한국인 거주지역이던 원산리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한다.[2] 이 일본인 거주지역에는 모든 공공시설과 심지어 치안시설까지 배치되어, 일본인들의 거주에 불편함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한국인들이 원산부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기에, 원산부와 원산리는 지금의 남한과 북한 같은 괴리감을 가진 지역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해방 당시 자신의 거주지역에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만세를 부르는 것에 "이렇게 많은 조선인이 있다니!!!" 하면서 놀랐다고. 그곳이 본래 한국인들의 땅이란 사실 자체를 아예 몰랐다는 뜻이다.[3]
  • 해방이 되고 나서 많은 폭력사태가 일어났다고 한다. 피해자는 대부분 일본제국 경찰과 교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이하게도 일본인들보다는 한국인들의 피해가 컸다고. 알고 보니 해방을 맞이하고 나서 사람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 형사들과 교사들로 일했던 한국인들에게 가한 것이었다고 한다.
  •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분주했는데, 은행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빼가고 자신들이 모아둔 재산들 모두를 갖고 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짐이 많았는지 감당을 할 수가 없어 비틀거리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그러나 한국인들이 "그 재산들은 모두 우리를 착취해 이룩한 거니까 함부로 못 가져간다! 가지고 가려거든 날 죽이고 가져가라!!"며 반발하자 미군정에서 이를 수용, 반출할 수 있는 개인 재산과 현금 반출액을 제한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전쟁 당시 많은 일본의 선박들이 파괴된 까닭에 배편도 별로 없었고, 당장 입국하게 되면 여러 가지 검사나 조사로 그나마 가지고 간 재산이 더욱 줄어들게 되니, 상당수의 귀환 일본인들이 밀수선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밀수선은 비싸고 위험한 데다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을 노리는 해적까지 횡행했다고.[4][5]
  • 문화통치 당시에 이주해서 한반도에서 산 일본인 부모들에게서 한반도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으로 귀환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일본제국 경찰관은 충청도에서 출생했는데 광복이 되어 자신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환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반도 출신 일본인들은 조선을 합병한 영토가 아닌 원래 일본 본토의 일부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다. 조선이 독립된 나라였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누구에게서도 '여기는 우리가 부당하게 침략해서 빼앗은 곳'이라고 알려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채로, 태어날 때부터 그때까지 평생을 여기도 일본 땅이라고 교육받으며 그런 줄로만 알고 살아왔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 한반도의 일본인들은 실직하거나 권력에서 밀려났고, 생계를 위해 궂은 일을 하거나 세간살이를 헐값에 파는 등 생활이 악화 일변도였다. 그러나 일부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은 대공습으로 폐허가 된데다 기반도 없는 본토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그래도 한반도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것을 느끼자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서 계속 잔류하기로 마음먹었다.[6] YMCA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한국어 수업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희망자들이 정원을 초과, 학급을 하나 더 늘렸을 정도. 하지만 사회혼란 속에서[7]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미군정의 일괄송환 방침이 확정되자 이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설사 미군정이 그들의 잔류를 허락해줬어도 한국전쟁때 남북 양쪽에 학살당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이러나 저러나 돌아가는 쪽이 나았다.
  •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남긴 상당수의 재산들을 사서 모으는 한국인들도 있었는데[8], 생활터전을 잡기 시작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한국인들도 생기기 시작했다고. 왜노라고 경멸하면서도 일본인들과 장사를 하기 위해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는 이중성을 나타내는 일부 한국인들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도 있었다.
  • 패전과 해방이라는 상황을 동시에 당한 일본인들은 순식간에 뒤바뀐 갑을관계의 현실을 체감해야 했다. 이 중 어떤 일본인 여교사는 갑작스레 자신이 가르치던 한국인 학생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자기 자녀의 선생이라는 것 때문에 그 학생의 학부모는 그녀에게 많은 신경을 써줬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괴로웠다고 한다.
  • 일본으로 귀환한 귀환 일본인들의 생활 역시 피폐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일본의 상황도 상황인지라 거의 잉여 취급이었다고 한다.[9] 귀환한 일본인들은 생활터전을 잡기까지는 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일본 내 사정 역시 현시창이다 보니 아예 수용소를 영구거처로 삼는 귀환 일본인들이 있었다고. 여기에 본토 일본인들 역시 자신들의 생활도 힘든 판에 먹여야 할 입이 더 생긴 것에 대해 불쾌해 했다고 한다. 심지어 전염병이 돌자 이를 옮기는 주범급으로 간주하는 듯한 사회분위기 역시 우호적이지 못했다. 아예 본국인들이 "너희는 식민지에서 그렇게 수탈하고 착취해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천벌받는 거야!!"라는 말을 하는 까닭에 그 괴로움이 더했다고 한다.
  • 이렇게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들은 크고 작은 고초를 겪었지만, 그래도 38선 이남의 일본인들은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이북의 일본인들은 소련군의 현지조달에다가 반일 감정도 남한 지역보다 심해서[10] 잔류는커녕 하루빨리 남하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루었다. 몸만 빠져나오면 다행이었고, 소련군강간이 무서워서 대부분의 일본 여성들은 머리를 빡빡 깎거나 숯을 얼굴에 문질렀다. 이 사람들의 행색은 귀환한 뒤에도 일본에서 한동안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을 괴롭히거나 괴롭혔다고 여겨진 일본제국 경찰 출신 일본인들도 상당수 살해되었는데, 이는 남한 지역보다 훨씬 더 심했다고 한다.[11]
  • 해방 직후 일본인의 눈으로 본 소련군미군의 모습 비교도 인상적이다. 당시 소련군은 전투 부대가 선두로 남하해왔기 때문에 몰골이 상당히 꾀죄죄했고,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조달했다. 일본인이 키우던 개가 지나가던 소련군에게 총 맞아 죽은 뒤 보신탕 신세가 되어버리거나, 소련 여군들이 몰려와 옷가지와 이불을 전부 챙겨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심지어 소련군을 환영하던 조선인 자치위원회도 그들의 약탈을 주의하라고 사이렌을 울릴 정도. 조선인들도 일본인 정도는 아니지만 물품을 강탈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강원도 춘천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주둔하다 철수하고 미군 대대가 진주했는데 이들의 복장과 장비를 보고 일본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놀랐다고 한다. 얼핏 봐도 모두 로 무장한 데다가 식량은 물론 먹을 물까지 휴대하고 다녔기 때문. 한 일본인 이장은 "이런 나라와 4년 동안 싸웠다니 믿기 힘들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 해방 후 소련군 주둔 지역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들어선 인민위원회일제강점기에 식민통치에 앞장서거나 조선인들에게 패악을 저질렀던 일본인들의 죄를 소급해서 처벌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복수 차원의 보복재판이라 부르며 반발이 많았다. 처벌된 일본인들은 당시 법관이나 일본제국 경찰의 간부에서부터 3.1 운동 당시 조선인 시위대를 향해 물을 뿌린 소방대원[12]과 조선인 학생을 차별했던 여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일본인들은 일제 하 조선이 입은 피해복구 작업에 동원되거나 소련으로 이송되어 소련 전후복구에 갈려나갔다.

4. 관련 문서



[1] 인풍전대 허리케인저의 스승 히나타 무겐사이를 연기했던 배우 니시다 켄 또한 이 곳 출신이다. 그러나 태어난지 2달 만에 일본이 항복.[2] 일본만 이런 건 아니고 식민제국 대부분의 행태가 이랬다.[3] 이들 일본인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이름은 김, 박, 이 등 성씨 정도에 불과하며, 한국인들과의 일화는 부차적인 것으로 언급된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거주구역과 완전히 분리된 거주구역에서 끼리끼리 어울리며 그들만의 리그를 살아갔으며(오죽하면 조선에 살면서도 조선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근대화된 일본인 거주구역에 비해 한국인 거주구역은 봉건적 시절에 머문 배경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왜 그렇게 많은지, 왜 그렇게 일본인을 싫어하는지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다.[4] 일본에서는 한동안 저 과정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재산을 빼앗겼다며 이에 대한 보상을 한국에 청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었다(...). 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해 한국에서 보상을 요구하면 나오는 카운터였다(...). 한일기본조약을 맺게 되면서 일본은 공식적으로 일본인이 한반도에 남겨두고 온 자산의 청구권을 포기한다.[5] 통상적인 전쟁이었다면 한국이 승전국이었을테니 이런 주장은 개소리쯤으로 치부하며 상대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조선은 승전국 대우를 받지 못했으므로 상황이 조금 꼬여버렸다. 일본 측도 그걸 알고서 주장한 것.[6] 대표적인 인물이 군산의 대농장주 시마타니 야소야(島谷八十八)[7] 이 혼란은 광복 초기라 피할 수 없는 것들이긴 했으나, 일본도 책임이 없다곤 못한다. 마지막에 조선총독부가 돈을 미친듯이 찍어내 뿌린 통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징용에서 목숨을 건진 한국인들이 돌아오면서 주택난이 시작된 것이다.[8] 헐값에 일본인 명의의 대규모 토지를 명의이전 받아서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일본인 소유 농장의 마름 출신이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다든지 면사무소 다니던 면서기가 일본인 명의 토지를 자기 명의 토지로 인수한 것으로 조작해서 막대한 부자가 되기도 했다.[9] 애당초 일본인들은 같은 일본인이라고 해도 조선, 만주, 대만 등 식민지와 외국에서 오랜기간 거주하거나 출생한 일본인 귀국자들을 사회적으로 심하게 차별했다.[10] 경성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은 일본어 라디오 방송이 계속되었지만(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다가 1946년 1월에 방송종료.), 평양에서는 해방과 동시에 라디오 방송에서 일본어가 전면적으로 배제되었다. 이로 인한 정보의 부족은 북한 지역 일본인들의 공포감을 부채질했다.[11] 살아남은 일본인들은 그동안 피해를 입혔던 조선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도게자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12] 왜 소방관이 동원되었는가 하면 당시의 소방대는 일본제국 경찰의 산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 소방청 내용을 참고. 이 소방대원은 조선인 독립투사에 대한 살인 혐의가 적용되어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