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환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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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昌慶宮 歡慶殿
창경궁의 침전이다. 경춘전의 동쪽, 함인정의 북쪽에 있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했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은,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려우며 환경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남아있는 기록을 볼 때, 주로 왕과 왕세자 등 주로 왕실 내 최고위급 남성들이 많이 머문 곳인 듯 하다.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환경(歡慶)’은 《시경》 - 〈소아 · 초자〉 편에서 유래한 말로, ‘기뻐하고(歡) 경하(慶)한다’는 뜻이다.
2. 역사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었다. 1544년(중종 39년) 11월에 중종이 여기서 승하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탔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 때 다시 소실되어 1634년(인조 12년)에 인경궁의 문명전을 옮겨 재건했다. 1645년(인조 23년)에는 소현세자가 여기서 사망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데리고 환경전에서 경서를 강론하고 정사를 펼쳤으며## 신하들을 접견하기도 했다.# 이후 사도세자의 장남이자 정조의 친형인 의소세손이 여기서 잠시 기거했다.#
1830년(순조 30년) 8월 화재로 불탔고# 1833년(순조 33년)에 복구했다.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이 되면서 많은 창경궁의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환경전은 살아남았다. 다만, 일제가 환경전을 이왕직박물관 전시실로 바꾸면서 외부와 내부를 많이 훼손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2.1. 상, 장례 공간
환경전은 본래 침전이나 왕실의 상, 장례 공간으로도 많이 쓰였다. 1575년(선조 8년) 명종의 왕비 의성대비(인순왕후)의 상 때 여막을 이곳에 둔 것이 그 시작이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현종의 혼전을# 여기에 설치했다.
또한 빈전으로도 많이 사용했다. 무려 9번이었다.
- 1688년(숙종 14년) 장렬왕후#
- 1701년(숙종 27년) 인현왕후#
- 1800년(순조 즉위년) 정조#
- 1805년(순조 5년) 정순왕후#
- [1]#
- 1821년(순조 21년) 효의왕후#
- [2]#
- [3]#
- 1849년(철종 즉위년) 헌종#
- 1857년(철종 8년) 순원왕후#
- 1863년(고종 즉위년) 철종#
- 1878년(고종 15년) 철인왕후#
이렇게 환경전 영역은 조선 후기의 왕실의 상, 장례를 대표하는 공간이 되었다.
3. 구조
3.1. 《동궐도》의 모습(1634년 ~ 1830년)
- 《동궐도》를 보면, 1층[4] 으로 평면은 ‘一’자 형태이다. 기단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계단은 정면에 두 개 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 총 28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두와 취두를 올렸고, 건물의 가장자리 1열의 하단부에는 돌 기둥을 두어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정면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되어있고, 대청 칸 앞의 툇마루를 바깥으로 통하게 하여 현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건물 바깥 면의 가장자리엔 쪽마루를 덧대었으며 쪽마루 가장자리와 대청의 가운데 칸엔 난간을 설치했다. 그리고 동면의 가운데 칸엔 나무 사다리를 설치하여 쪽마루로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3.2. 1833년 ~ 현재
- 빈전으로 쓰던 시기에 재건했기 때문에, 1833년(순조 33년)에 다시 지을 때 환경전 정면에 복도각 4칸을 설치했다. 복도각은 혼령이 다니는 길을 뜻한다. 현재는 환경전 건물만 외따로 있지만, 원래는 다른 궁궐의 전각처럼 행각, 돌담, 문 등으로 영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1908년(융희 2년)에 제작된 《동궐도형》을 보면 서, 남쪽에 행랑이 있으며 동쪽에는 돌담을 설치했다. 북쪽에는 창고를 두었는데 창고 사이에 돌담과 우물을 두었다. 문은 총 7개가 있는데, 4개는 행랑에, 3개는 담에 달렸다. 이름이 전해지는 문은 2개인데 남행랑에 있는 환경전의 정문 개광문(開廣門)과 서행각에 있는 집의문(集義門)이다. 또한 영조가 이름 붙였던 공묵합의 규모가 넓어졌다. 그리고 문을 제외한 행랑의 칸들의 내부를 주방(廚), 대청(廳), 방(房)으로 꾸몄다. 이 역시 일제강점기에 모두 사라져 오늘에 이른다.
- 건물 본채는 《동궐도》에서 묘사한 것과는 꽤 다르다. 기단은 장대석 2벌로 깔고 정면에는 6단 짜리 계단 2개를 붙여 가운데 칸 앞에만 놓았으며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예전과 같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공포는 이익공 양식으로 공포와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양성바름을 하고 용두와 취두, 잡상을 올렸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칸 수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총 28칸으로 화재 전과 같다. 건물의 가장자리 칸은 툇간으로 구성했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대청 좌, 우에 각각 온돌방 2칸을 놓았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엔 분합문을 달았다. 대청 2칸의 정면과 뒷면은 툇마루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 바깥 면의 외형은, 벽 없이 전부 창과 문으로만 되어있다. 건물 바깥 면의 창호는, 측면 가운데 2칸과 대청 앞면과 뒷면의 출입문 및 현관에서 툇간으로 가는 문만 띠살이고 나머지는 전부 정(井)자 살이다.
- 위에 언급했듯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꽤 변했다. 외부의 경우, 대청 밖에 툇마루가 드러나 있는 3개의 칸 중, 가운데 칸을 제외하고 바깥에 창을 설치했다. 내부는 전부 마루가 깔렸고 모든 칸이 한 공간으로 트였다. 현재는 복원된 상태.
4. 여담
- 1830년(순조 30년) 화재가 났을 때 효명세자의 상 중이었는데 하필 관이 환경전에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염 속에서 가까스로 관을 빼내어 통명전 뒤편에 있는 환취정에 임시로 안치시켰다.#
[1] 빈궁이 설치되었다. 빈전과 용도는 같으나, 왕비가 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빈전이 아닌 빈궁으로 부른다.[2] 빈궁이 설치되었다. 빈전과 용도는 같으나,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으므로 빈전이 아닌 빈궁으로 부른다.[3] 찬실이 설치되었다. 빈전과 용도는 같으나,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빈전이 아닌 찬실로 부른다.[4]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