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고려)/가족관계
1. 개요
태조 왕건은 부인이 많기로 유명하다.[1]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태조가 많은 부인을 가졌다는 사실 정도는 알 정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즉위 초 불안한 왕권과 낮은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유력 귀족들과 혼인을 통해 혈맹을 맺는 혼인정책을 펼쳤다. 사서 등 알려진 바에 따르면, 29명[2] 의 부인을 두고 있고 부인들 모두는 유력 지방 호족이거나 공신들의 딸이다.[3] 이 혼인 정책은 태조가 살아있을 때는 그들의 딸을 인질로 삼아 반역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지만, 사후에는 유력 귀족을 외가로 둔 쟁쟁한 왕자들 덕분에 왕위 쟁탈전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후사가 단절된 경우 이름 뒤에 」표시를 붙인다.
2. 선대 가계
3. 왕후와 그 자녀
- 제1비 신혜왕후 류씨
- 제2비 장화왕후 오씨
- 2대 혜종 무武
- (+ 의화왕후 임씨義和王后)
- 흥화궁군興化宮君
- 경화궁부인 임씨慶化宮夫人
- 정혜공주貞惠公主
- (+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
- (+ 청주원부인 김씨淸州院夫人)
- (+ 궁인 애이주哀伊主)
- 태자 제濟 - 후사 없음.
- 명혜부인明惠夫人
-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 OO태자 태泰」 - 정종과 광종이 왕위를 이은 것을 보아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사에서는 사망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다.
- (+ OO공주) -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 洪氏의 딸
- 3대 정종 요
- (+ 문공왕후 박씨)
- (+ 문성왕후 박씨)
- 경춘원군慶春院君
- OO공주
- (+ 청주남원부인 김씨淸州南院夫人)
- 4대 광종 소
- (+ 대목왕후 황보씨)
- (+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 林氏) - 진천 임씨(鎭川 林氏), 혜종과 의화왕후 임씨의 딸[4]
- (+ 현비 김씨賢妃 金氏) - 궁인 출신
- 문원대왕
- 천추전군千秋殿君」
- 헌의왕후 유씨
- 증통국사證通國師 - 승려
- 낙랑공주
- 헌숙왕후 김씨
- 흥방궁주興芳宮主 - 원장태자元莊太子의 아내
- 제4비 명복궁대부인 → 신정왕태후 황보씨
- 제5비 대량원부인 → 신성왕태후 김씨
- 제6비 정덕왕후 류씨
4. 후궁과 그 자녀
- 헌목대부인 평씨獻穆大夫人 平氏 - 경주 평씨慶州 平氏 평준平俊의 딸
- 정목부인 왕씨貞穆夫人 王氏 - 명주 왕씨溟州 王氏[5] 왕경王景(김관경金官景)의 딸[6]
- 동양원부인 유씨東陽院夫人 庾氏 - 평주 유씨平州 庾氏(평산 유씨平山 庾氏) 유금필의 딸
- 숙목부인 임씨肅穆夫人 林氏 - 진주 임씨鎭州 林氏(진천 임씨鎭川 林氏) 임명필林名必의 딸[7]
-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 林氏 - 경주 임씨慶州 林氏 임언의 딸[8]
-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 洪氏 - 홍주 홍씨洪州 洪氏 홍규洪奎의 딸
- OO태자 직稷」
- OO공주 - 제3비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큰아들 왕태王泰의 아내
- 후대량원부인 이씨後大良院夫人 李氏 - 협주 이씨俠州 李氏(합주 이씨陜州 李氏) 이원李元의 딸
- 대명주원부인 왕씨大溟州院夫人 王氏 - 명주 왕씨溟州 王氏(강릉 김씨江陵 金氏) 왕예王乂의 딸
- 광주원부인 왕씨廣州院夫人 王氏 - 양근 함씨楊根 咸氏 왕규#s-1의 딸
- 소광주원부인 왕씨小廣州院夫人 王氏 - 광주원부인 왕씨의 자매[9]
- 광주원군廣州院君 - 정종, 광종 형제가 왕규를 없앨 때 왕규가 광주원군을 즉위시키려 한다고 누명을 씌웠기 때문에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 후광주원부인과 함께 처형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동산원부인 박씨東山院夫人 朴氏 - 승주 박씨昇州 朴氏(순천 박씨順天 朴氏) 박영규#s-1의 딸[10]
- 예화부인 왕씨禮和夫人 王氏 - 해주 왕씨海州 王氏(박씨朴氏) 왕유#s-2王柔의 딸[11]
- 대서원부인 김씨大西院夫人 金氏 - 김행파金行波의 딸
- 소서원부인 김씨小西院夫人 金氏 - 대서원부인의 자매[12]
-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13]
- 신주원부인 강씨信州院夫人 康氏 - 신주 강씨信州 康氏(신천 강씨信川 康氏) 강기주康起珠의 딸
-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 영장英章의 딸[14]
-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 순행順行의 딸로 성씨를 잃었다고 한다.[15]
-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 朴氏 - 평주 박씨平州 朴氏(평산 박씨平山 朴氏) 박지윤의 딸[16]
- 효제태자孝悌太子」
- 효명태자孝明太子」
- 법등군法燈君」
- 자리군資利君」- 고려사에 따르면 자리資利는 '막내'의 사투리이기 때문에 태조의 자식 중 막내아들로 추정된다.
- OO공주 - 경순왕의 아내
- 의성부원부인 홍씨義城府院夫人 洪氏 - 홍유의 딸[17]
- 의성부원대군義城府院大君」- 제6비 정덕왕후 유씨의 딸 유씨부인의 남편
- 월경원부인 박씨月鏡院夫人 朴氏 - 평주 박씨平州 朴氏(평산 박씨平山 朴氏) 박수문의 딸[18]
- 몽량원부인 박씨夢良院夫人 朴氏 - 평주 박씨平州 朴氏(평산 박씨平山 朴氏) 박수경의 딸[19]
-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 O선필宣必의 딸[20]
5. 기타 기록
징효대사탑비에 따르면 왕건의 자녀들 중 ??대왕, 필영대왕(弼榮大王), 청단(공/궁)주(淸端(公/宮)主)라는 호를 가진 자녀들이 있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등장하지 않는데, 징효대사탑 비문에 왕요군(정종), 왕소군(광종), 글자 마멸 부분 뒤에 ??대왕과 필영대왕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면서 알려졌다.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는 924년(태조 7년)에 비문을 지었으나 944년(혜종 2년)에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에는 비석 수립에 기여한 사람의 명단을 새겼는데, 왕요군 왕소군 등으로 기록된 당시 왕자군이나 태자 칭호가 아닌 대왕으로 추존되어 탑비가 세워진 944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대왕은 문원대왕이라는 말도 있고 다른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필영대왕은 이름이 아닌 시호로 기록된 것을 보면 924~944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후 대왕으로 추존된 것을 볼 때 상당한 권위가 있던 왕자로 보이지만 기록에서 소멸되어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징효대사탑 비문에 다른 왕자들을 제치고 왕요군, 왕소군, 추존 대왕과 함께 나란히 기록된 걸 보면 나름 앞에서 태어난 왕자였던 것 같다. 태조의 차남 왕태를 건너뛰고 3남 정종이 즉위한 점을 고려하면 당시 사망했던 왕태의 시호가 아닌가 추정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청단궁주는 고려사 병지에 나오는 개성 인근의 청단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1] 고려를 떠나 한국사 전체의 왕으로서도 가장 확실히 기록된 사례다. 자식의 경우 총 34명(25남 9녀)로 기록.[2] 동국통감에만 나오는 대량원부인은 일반적으로 신성왕태후가 왕태후가 되기 전 호칭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건에게는 25비주(妃主)가 있다고 하여 고려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다만 고려에서는 조선과 달리 후궁을 비(妃)로 칭했으므로 후궁 23명에 훗날 왕태후로 승격된 명복궁대부인, 대량원부인을 추가하면 정확히 25명이 된다.[3] 태조는 이들에게 고려의 궁원을 봉해주었다.[4] 혜종이 왕위에 앉아있었을 때 광종에게 시집갔다. 뒷배가 약했던 혜종이 자기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남편이 즉위한 뒤 남매였던 흥화군을 처형시켰으며, 왕녀였음에도 혜종의 약한 입지와 흥화군의 숙청 때문에 대목왕후에게 밀려 왕후가 되지 못했다.[5] 명주는 현 강릉으로 현재의 강릉 김씨 또는 강릉 왕씨로 추정된다.[6] 같은 명주 왕씨인 대명주원부인 왕씨가 大를 달고 있는 걸 보아 원호는 小명주원부인으로 추정된다.[7] 사서에서는 성이 누락되어 있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지에서는 임씨로 보고 있다. 이는 태조 즉위 직후 있었던 인사 이동에서 임명필(林明弼)이 순군부령에 임명되는데, 일부에서는 고려 초기 진주鎭州 출신은 대부분 임씨였던 점, 또 고려 초기에는 같은 이름의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이렇게 되면 의화왕후 임씨와 같은 집안 출신이 된다. 아들인 원녕태자가 진주낭군으로도 불리는 점을 보면 원래는 진주원부인鎭州院夫人으로 불린 듯 하다.[8] 경주 출신임에도 천안부天安府를 명칭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토착세력이 없던 천안을 왕실의 주요 지역기반으로 삼고자 천안을 본거지로 삼게 했기에 임씨의 아들들이 천안낭군天安郞君이라 불렸다는 설과 사서에는 없지만 임언이 천안태수를 지냈다는 설이 있다.[9] 광주원부인과 소광주원부인은 혜종의 후궁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 王氏의 자매[10] 견훤의 외손녀로 정종 제1비 문공왕후 박씨와 제2비 문성왕후 박씨의 자매[11] 춘주春州(춘천春川) 출신으로 예나 지금이나 춘천 일대가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가는 요충지이기에 영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동진을 위해서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12] 김행파가 신혜왕후 유씨를 따라 두 딸을 시집보내고자 평양에 들른 왕건과 두 딸을 원나잇시키고 출가하게 만들었지만, 왕건은 신혜왕후 때와 달리 자매에게 대서원과 소서원이라는 두 절과 노복을 주고 데려오지 않았다. 지못미. 그래도 최소한의 예우는 받았기에 후궁으로 본다. 이후 같은 가문의 김치양이 천추태후와 사통하고 그 자식이 왕위를 노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13] 사서에 나오는 왕건의 아내 중 성씨, 가계, 출신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이름이 지역명이었다면 출신지를 유추할 수 있지만 그것조차 아니다. 한국사의 후궁 제도를 참고할 경우 전(殿)과 원(院)은 양립하지 않고 규모에 따라 확연히 구분됐음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를 당호에 포함한 것은 굉장히 특이한 일이다. 만약 두 글자 중 한 글자를 빼면 거처가 서원(西院)이 되는 이유로 위에 나오는 김행파의 다른 딸로 추정되기도 한다.[14] 영장의 성씨는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한편 927년 왕건 휘하의 해군장군으로서 대야성을 점령한 영창英昌이 있고 신라 시대부터 章과 昌이 혼동되어 쓰였으므로 동일인물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하지만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둘이 동일인물이라면 애초에 귀족이 아니었으므로 성씨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15] 현대 학자들은 황주 출신이라는 점에서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이며 小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신정왕태후 황보씨가 대황주원부인大黃州院夫人이 아니냐 추정하고 있다. 신정왕태후의 부인 시절 봉호는 명복궁대부인明福宮大夫人이었는데 명복궁의 본래 이름이 황주원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16] 박지윤은 박수문과 박수경 형제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월경원부인과 몽량원부인의 고모가 된다.[17] 경상도 북부에 대한 안정과 홍유의 공 때문에 들인 것으로 추정된다.[18] 박수문이 박지윤의 아들이자 박수경의 형이기 때문에 성무부인 박씨는 고모, 몽량원부인 박씨는 사촌자매가 된다.[19] 박수경이 박지윤의 아들이자 박수문의 동생이기 때문에 성무부인 박씨는 고모, 월경원부인 박씨는 사촌자매가 된다.[20] 신라 출신으로 재암성載巖城 장군으로 있다가 태조를 돕고 930년 고려로 귀순한 선필善弼이라는 설이 있다. 왕건이 말년의 선필을 상부尙父로 대우하기도 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