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전투(668년)

 

'''평양성 전투
平壤城戰鬪'''

'''시기'''
668년 음력 9월 21일 ~ 10월 21일
'''장소'''

고구려, 평양성
(현재 평양직할시 평천구역중구역 일대)
'''원인'''
당고종의 고구려 정벌.
'''교전국'''
고구려
당(唐)·신라
'''지휘관'''
<^|4>'''보장왕'''
'''연남건'''
연남산
신성(信誠)
오사(烏沙)
요묘(饒苗)
술탈(述脫)
당(唐)군
<^|1>'''이세적'''
설인귀
글필하력
방동선
유인원
유인궤
고간
학처준
곽대봉
등등
신라군
<^|1>'''문무왕'''
김유신[1]
김인문
김흠순
김천존
김문영
김문충
김진복
김지경
김양도
김개원
김흠돌
김인태
김상경
진순(陳純)
죽지
북거(北渠) 등등 다수[2]
'''병력'''
병력 규모 불명
700,000[3]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나당 연합군의 승리.'''
'''영향'''
고구려 멸망, 나당전쟁 발발.
1. 소개
2. 배경
2.1. 고구려 내부의 분열
2.2. 신라의 요청
2.3. 당 고종의 결심
3. 전투
3.1. 나당연합군의 공격
3.2. 평양공성전
3.3. 평양성 함락과 고구려 멸망
4. 전투 이후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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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두고 벌인 당과 고구려의 전투로 사실상 '''고구려 역사상 최후의 전투'''.[4]

2. 배경


당의 2차 침입 이후, 고구려당나라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고구려는 666년 5월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아들 연남생대막리지에 올랐으며, 당나라도 2차 침입 당시 막대한 국력 손실로 인해 함부로 움직이는 것을 멈췄기 때문이다.

2.1. 고구려 내부의 분열


이토록 잠잠하던 고구려와 당나라는 고구려 지배층의 내부 분열로 인해 다시 들끓기 시작한다. 대막리지의 자리에 오른 연남생은 이듬해인 666년 지방으로 순시를 떠났는데, 그의 동생들이던 연남건연남산에게 주위 사람들이 연남생이 당신들을 죽일 것이니 선빵을 놓자고 제의를 한다. 연남건과 연남산은 이 의견을 거절했으나, 비슷한 제안을 받은 연남생은 동생들을 의심해 밀정을 보냈고 그 밀정은 곧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발각되고 만다. 결국 두 형제는 연남생을 보장왕의 이름으로 소환을 하게 되는데, 죽게 생긴 연남생은 국내성을 본거지로 저항하려 하다 힘에 부친 나머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그해 6월 연남생은 당나라로 도망가게 된다.

또 어떤 이가 남생에게 이르기를 ‘아우들이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남생이 첩자를 보냈는데 남건이 그 첩자를 사로잡아두고 즉시 왕명을 사칭하여 남생을 불러들였다. 남생이 두려워하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남건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였다.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國內城)에 의지하다가 그의 무리와 거란(契丹), 말갈(靺鞨) 병사와 함께 당에 붙고,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 하소연하였다. 당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을 제수하고 수레, 말, 비단, 보검을 내려주어 돌아가 보고하게 하고, 글필하력(契苾何力)에게 조서를 내려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남생이 그제서야 화를 모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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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49권 열전 제9 개소문}}}
김부식은 개소문 본기에 남긴 사론을 통해 "연남생연헌성은 당 황실에서는 좋게 보았겠지만, 본국(本國)[5]의 입장에선 반역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男生獻誠 雖有聞於唐室 而以本國言之 未免爲叛人者矣)"라며 깠다.

2.2. 신라의 요청


한편 문무왕 또한 백제 멸망 이후 고구려의 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666년 4월,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당나라에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666년 4월) 임금은 백제를 평정하였으므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당나라에 병사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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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6권 신라 본기 제6 문무왕 상}}}

2.3. 당 고종의 결심


신라의 구원 요청과 더불어 고구려 최고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내부 분열을 보게된 당고종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대적인 준비 끝에 666년 12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한다.

겨울 12월, 고종이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겸안무대사(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인 안육(安陸) 출신인 학처준(郝處俊)에게 이들을 보좌케 하며, 방동선(龐同善)과 글필하력을 모두 요동도행군부대총관겸안무대사(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轉糧使)인 두의적(竇義積)ㆍ독고경운(獨孤卿雲)ㆍ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어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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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22권 고구려 본기 제10 보장왕 하}}}

3. 전투



3.1. 나당연합군의 공격


당군은 667년 9월, 신성을 무너트리고[6] 이 소식에 고구려 성 16곳이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형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의 자리에 오른 연남건은 급히 병력을 신성으로 보냈으나 설인귀가 막아낸다.
금산 전투에서 고간(高侃)이 이끌던 당군을 상대로 20만의 고구려군이 승리를 거둔다. 그 기세를 살려 당군을 추격했으나 설인귀가 때마침 측면을 공격해 5만에 달하는 고구려 병사를 몰살시키고, 요하 남소성에서 항거하던 15만의 고구려군을 글필하력이 격파한 남소성 전투로 인해 남소성, 목저성, 창암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668년 2월에는 부여성마저 점령 당하고, 그 주변 40개 성이 모두 항복하는 등 고구려의 방어 라인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연남건이 병력을 보내 부여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설하수 전투(薛賀水 鬪戰)에서 3만여명의 병력이 몰살 당하는 참패를 겪으며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신라 또한 전쟁 초기에는 참전하지 않고 전쟁 준비만 하다가고구려의 패색이 짙어진 668년 6월, 당고종의 합류 요청에 따라 668년 6월 21일,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김인문, 김흠순, 김천존, 김문충, 김진복, 김지경, 김양도, 김개원, 김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하는 등 신라군의 주축 병력을 총 집결시켜 신라 서북부 한성(漢城)에서 출진해 평양으로 진격한다. 이때 신라군의 병력은 무려 20만명에 달한다. 다만 출병한 신라군이 20만이라는 점은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에 나와있는데, 그동안 보여왔던 신라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무리인 대군이다. 당장 황산벌 전투의 5만이 국경지대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신라전국에서 모은 병력이기 때문.

21일,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 대총관으로 삼고, 각간 김인문ㆍ흠순ㆍ천존ㆍ문충, 잡찬 진복, 파진찬 지경, 대아찬 양도ㆍ개원ㆍ흠돌을 대당 총관으로 삼고, 이찬 진순(陳純[혹은 ‘춘(春)’이라 한다.])과 죽지를 경정 총관으로 삼고, 이찬 품일과 잡찬 문훈ㆍ대아찬 천품을 귀당 총관으로 삼고, 이찬 인태를 비열도 총관으로 삼고, 잡찬 군관ㆍ대아찬 도유(都儒)ㆍ아찬 용장(龍長)을 한성주 행군 총관으로 삼고, 잡찬 숭신(崇信)ㆍ대아찬 문영ㆍ아찬 복세(福世)를 비열주 행군 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선광(宣光)과 아찬 장순(長順)ㆍ순장(純長)을 하서주 행군 총관으로 삼고, 파진찬 의복(宜福)과 아찬 천광(天光)을 서당 총관으로 삼고, 아찬 일원(日原)과 흥원(興元)을 계금당 총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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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6권 신라 본기 제6 문무왕 상}}}

총장(摠章) 원년(서기 668년) 무진에 당 고종 황제가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고 또한 인문을 보내 우리에게도 병사를 징발하라고 하였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은 인문과 함께 병사 20만을 출동시켜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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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김인문}}}
이미 고구려의 남부 방어선을 맡고 있던 연정토가 앞서 신라에 12성과 수천명의 백성을 통째로 바치며 항복했기 때문에 국경 방어선은 뻥 뚫려 있었고, 신라군이 본격적으로 출진한 시점에 고구려의 대곡(大谷, 황해도 평산군)과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漢城, 황해도 재령군)을 포함한 2군 12성이 추가로 귀순하여 항복하였다.[7] 쪽에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평양 근교까지 다다랐다. 연남건은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을 투입해 성문을 열고 평양성 동쪽 근교 사천 들판에서 신라군을 저지하려 하지만 김문영이 이끄는 신라군이 승리하고(사천 전투), 신라군 본대가 평양성 북쪽 20리 지점인 영류산(嬰留山)에 도착하게 된다.
이제, 700년 사직을 이어온 고구려의 최후의 방어선은 평양성이 된 것이다.

3.2. 평양공성전


이세적이 이끌던 당군은 압록책(鴨淥柵)이라는 지점에서 총집결을 한 후 대행성, 욕이성을 무너뜨리며 쳐내려와 평양성에 도달했고 9월 21일, 신라군 또한 당군과 합류해 평양성을 포위한다. 보장왕은 이를 보고 연남산과 수령 98명을 보내 이세적에게 항복을 하려 했으나, 연남건이 결사 반대를 하여 무산이 된다. 그리고 고구려군은 나당연합군과의 최후의 일전에 돌입하게 된다.
장장 1달간의 평양성 전투는 처절한 전투였다. 평양 외곽에 위치한 신라 군영에 투입된 고구려군 또한 서당 당주 김둔산(金遁山)과 한산주 소감 김상경(金相京)은 죽음을 불사하고 저항해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간다. 신라군 중 부양(斧壤,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 사람 구기(仇杞)는 평양 남쪽 다리(南橋)에서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고 비열홀(卑列忽,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군) 사람 세활(世活)은 평양소성(平壤小城)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평양성 외곽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게 되자 이어 평양성 공방전이 이어지게 된다. 문무왕 본기의 기록에서는 평양성 북문에서 공을 세운 북거(北渠)라는 인물에게 관직과 상을 주는 것으로 보아 북문 공방전도 치열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평양성 대문에서의 싸움은 흑악현 현령(黑嶽令)선극(宣極)의 공이 컸다고 한다. 평양성 내부에서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이 평양 군주 술탈(述脫)을 죽이기도 했는데 고구려군의 주요 지휘관이 평양성 내에서 칼에 맞아 죽을 정도였던 것. 이처럼 피를 말리는 공방전이 1달 넘게 이어가던 와중에 나당연합군에게 뜻하지 않는 기회가 찾아왔다.

3.3. 평양성 함락과 고구려 멸망


총장(總章) 원년(668년) 9월에 적(勣)[8]

이 또 평양성 남쪽으로 진영을 옮기니, 남건(男建)이 자주 군사를 보내어 나와 싸웠으나, 모두 대패하였다. 남건의 밑에서 병사를 총관(總管)하던 승(僧) 신성(信誠)이 비밀리 군중(軍中)으로 사람을 보내어, 성문(城門)을 열고 내응(內應)하겠다고 하였다. 5일이 지나서 신성이 과연 성문을 열었다. 적(勣)이 군사를 놓아 들여보내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요란하게 두들기고, 성(城)의 문루에 불을 지르니 사면에서 불길이 일었다. 이에 남건(男建)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平壤城)을 함락시키고, 고장(高藏) · 남건(男建) 등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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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동이 열전 고구려}}}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던 와중에, 연남건의 심복이자, 군사를 담당했던 승려 신성이 이세적과 내통한 것이다. 신성은 이세적에게 협조 의사를 밝혔고, 그로부터 5일후인 10월 21일. 평양성의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자, 그 타이밍에 맞춰 신라의 기병 500기가 성문 안으로 돌파했다. 곧 이세적이 당군을 투입해 평양 성벽 위로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했다.
평양성은 불길에 휩싸였고, 고구려군을 이끌던 연남건은 자결을 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으며, 보장왕과 함께 당군에 사로잡힌다. 한때 요동을 호령하고, 중국 대륙과 당당히 맞서던 고구려가 705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겨울 10월에 대당(大唐)의 대장군(大將軍) 영공(英公)이 고구려를 쳐 멸망시켰다. 고구려의 중모왕(仲牟王)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에 천세(千歲) 동안 다스리려고 하였다. 모부인(母夫人)[9]

은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불가능하다. 7백 년이 적당하다.”라고 말하였다. 지금 나라를 잃은 것은 그로부터 7백 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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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권 27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킴}}}

4. 전투 이후


고구려 왕은 먼저 천남산(泉男産) 등을 보내 영공을 만나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 복남(福男)ㆍ덕남(德男) 그리고 대신 등 20여 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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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6권 신라 본기 제6 문무왕 상}}}
고구려의 보장왕을 비롯한 고씨 왕족들과, 연남건을 비롯한 대신을 포함한 20만명을 당나라로 강제이주시킨다. 당고종은 보장왕으로 하여금 당태종의 무덤으로 끌고가 강제로 절을 하게 했다.
  • 보장왕은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책봉된다. 677년 2월, 요동의 안정화를 위해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에 책봉되었으나 오히려 말갈과 함께 손을 잡고 당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681년 초에 앙주(卬州)[10]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연남생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에 임명되었으며, 3,000호에 달하는 식읍을 받게 된다. 그러다 고구려부흥운동의 조짐이 보이자 진압하기 위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관리로 임명되었고 679년,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 연남건은 쓰촨성 첸저우(黔州)에 유배되었는데 그 후의 삶은 알 수 없다.
  • 연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小卿)으로 봉해졌고 장안에서 평생을 살다 702년에 숨을 거둔다.
한편 청장전관서에는 이세적이 고구려의 문물이 왕성함을 꺼려하여 서적을 모아 불태운 것을 언급되는데, 저자 이덕무와 학자 김용겸은 저자 우리 역사에서 큰 불행이라고 한 일화가 실려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이 일화가 실려 한국 서책 역사의 첫번째 수난으로 꼽힌다. 천년 이후의 기록이니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상황에서 찬란한 문화유산들이 기록들과 함께 수없이 멸실되었을 것은 정황적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한편 신라 문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하던 도중 함락 소식을 듣고 한성으로 돌아간다. 10월 22일에 전공을 치하하는 자리를 마련했으며, 11월 5일에는 고구려 포로 7,000명을 이끌고 서라벌로 돌아간다. 11월 6일, 문무왕은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신라 선조들 앞에서 고한다. 한때 고구려와 백제의 위협 속에서 멸망할 뻔한 나라가, 삼한을 하나로 만들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 젖힌 것이다.

“삼가 앞선 임금의 뜻을 이어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묻고 원흉들을 처단하여 나라의 운명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고하옵니다. 신령께서는 들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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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6권 신라 본기 제6 문무왕 상}}}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까지 제압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신라 문무왕은 검모잠, 안승, 고연무 등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손을 잡고 7년간의 나당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고구려는 비록 멸망했지만 안시성을 비롯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후 고구려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후에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고구려 땅에 새 나라 발해를 건국함으로서 고구려가 발해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기에 고구려부흥운동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게 되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5.1. 대조영(드라마)


극 초반부에서 고구려 멸망을 다루는 대조영에서 등장.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우회해 남하하더니 지명천의 수비대를 박살내고 평양성 근처에 주둔하자 대조영이 고사계와 지원군을 이끌고 안시성에서 평양성으로 지원을 갔다.
처음에는 연남건의 지휘 아래 당나라군을 물리쳤지만 당나라 첩자들이 심리전을 걸고 신성과 부기원이 내부에서 성문을 여는 바람에 함락된다. 부기원은 항복하면 고구려 황실과 백성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설인귀의 약속을 믿고 성문을 열었지만 이적은 그런 약속 한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면서 평양성을 박살낸다.

5.2. 평양성(영화)


영화의 소재가 고구려 최후의 날이었던 평양성 전투를 다루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평양성(영화) 항목 참조.

6. 관련 문서



[1] 다만 김유신은 명목상으론 총 사령관이었으나 노환으로 인해 경주시에 머물고 있었다.[2] 도유, 용장, 숭신, 순장, 장순, 선광, 의복, 천광 (···) 복세 등등 여기에 다 실지 못할 정도로 많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당시 신라의 장수란 장수들은 싸그리 동원되었다고 말할 정도다.[3] 구당서 계필하력 열전(당군 500,000),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신라군 200,000)다만 출병한 신라군이 20만이라는 점은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에 나와있다. 하지만 그동안 보여왔던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무리인 대군이라서 신라군 20만은 과장으로 본다. 당장 황산벌 전투에 동원된 신라군 5만이 국경지대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신라 전국에서 모은 병력이기 때문. 최후의 전투 느낌이 강했기에 약 10만 대군은 편성했을거라고 본다[4]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안시성을 비롯한 곳곳에서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보장왕이 당에게 항복한 이후, 고구려라는 나라가 사라진 상황에서 벌어진 전투였다.[5] 고구려[6] 이때 신성 사람이었던 사부구(師夫仇)가 신성의 성주를 결박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7] 이 때 별 저항 없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황해도 지역은 이후 검모잠, 안승이 주도하는 친신라 반당 고구려부흥군의 활동거점이 되었고 나당전쟁에도 신라와 함께 당나라와 싸운다.[8] 이세적을 말한다.[9] 동명성왕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을 말한다.[10] 현재의 쓰촨 성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