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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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노트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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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문서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 개요
영어: Hull Note/Outline of Proposed Basis for Agreement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일본어: ハル・ノート
1941년 11월 26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1871-1955)이 주미일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1877-1964)[1] 와 미일교섭 특사 구루스 사부로#(1886-1954)에게 전달한 문서.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의 미-일 갈등 상황에서 사실상의 대일 최후통첩이었다.
문서는 머릿말, 일반적인 내용을 규정한 섹션 1, 그리고 좀더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규정된 섹션 2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섹션 2의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은 10개항이다.
2. 배경
1941년 11월 5일 쇼와 덴노는 제국회의에서 승인한 남방 작전을 실행하기 앞서 미국과 마지막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주미 일본 대사 노무라는 미합중국 정부에 두 가지를 제안하였다.
첫 제안은 1941년 11월 6일에 발표되었는데 일본군의 제한적 철수와 중일전쟁의 종료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일본 외교문의 암호 코드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일본에서 이 제안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두 번째 제안을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41년 11월 20일 노무라 일본 대사는 두 번째 제안을 발표하는데 그 내용은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의 재개, 동남아시아에서의 군사 철수, 중국에서의 군 철수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일본의 이러한 태도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여 비판적 입지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 장관을 필두로 하는 국무부는 일본의 두 번째 제안과 유사한 잠정 협정안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서도 일본은 군사 행동 계획을 변경하거나 철수하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어 미국이 일본의 태도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판단을 굳히는 이유가 되었다.
이에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마지막으로 자국의 입장을 정리하고, 중국 및 영국, 특히 윈스턴 처칠의 입장을 수용한 헐 노트를 일본에 제시하게 된다.
3. 양국의 반응
미국은 헐 노트를 제안하긴 하였으나 스스로 이것을 일본 제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말레이 반도로 항해하는 일본군 수송선단이 발견되었다는 첩보가 국무장관에게 문서를 일본에게 전달하기로 한 당일에 통지되고 있었다.
타임지에 따르면, 미국의 육군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은 그의 일기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미 일본군의 기습 공격 가능성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 놓고 있었다.
미국은 헐 노트에 공식적으로 만주를 기재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일본은 문서에 언급한 China에 만주국이 해당한다고 해석하였고, 이에 일본 수상인 도죠 히데키는 "This is an ultimatum(최후통첩)"이라 발언하여 일본은 헐 노트가 미국 측의 최후통첩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헐 노트가 일본 측 제안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통보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측 요구 사항이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 인하여 미국의 대일 정책은 이미 확고하여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본의 해석에 따르면 미국 측 제안을 해석하면 미국은 명시적으로 일본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는 의미도 보이지 않고 무역 협정도 교섭을 시작하자는 두루뭉실한 입장인 반면에 일본 측에게는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의 전면 철수와 해외 이권의 포기를 '''즉시 실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즉시"라는 표현은 일본 측의 선입견이며 영어 원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결국 일본의 외상(외교부장관)이었던 도고 시게노리는 외교적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일본 측 최후통첩보다 온건한 제안이 미국 국무부 내에서 작성 중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던 도고에게는 이 헐 노트가 "수십 년 동안의 교섭이 헛수고가 되었다", "일본이 그동안 쌓아 올린 국제적 지위를 모두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자포자기적 심리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도고 시게노리는 외교적 해결을 단념하고 외교 교섭의 중지를 일본 대본영에 통고함으로써 평화적 해결 가능성은 사라지고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4. 현대 일본의 해석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이 노트가 일본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려고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끌려들어간 피해국이라 주장한다. 정부 관료 중에서도 암암리에 팽배해 있는 주장인데 대표적인 예가 항공자위대의 막료장(참모총장)이었던 다모가미 도시오이다.[2]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헐 노트로 일본은 대미 개전을 강요당한 것이며 헐 노트는 최후 통첩이다"라는 의식이 많다고 한다. 일본인이 쓴 많은 역사서에서 헐 노트 존재를 강조하고 NHK의 프로그램에서도 헐 노트를 역사의 전환점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일본의 우익과 밀덕후들은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이야기만 하면 주문처럼 외우고 다닌다.
5. 평가
헐 노트에는 "극비, 시안으로서 구속력 없음(Strictly Confidential, tentative and without commitment)"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었으나, 일본 측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유 없이 이 문구를 삭제하고 추밀원 및 천황에게 보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상업 문서나 외교 문서를 막론하고 이런 문구는 관례적으로 넣는다. 나중에 책임 소재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발뺌할 수 있는 근거(disclaimer) 정도로 쓰기 위해서이다. 다만 개전이 임박한 상황이나 촉급을 다투는 외교 문서에서 이 문구를 관례로 생각하고 빼 버린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당시 외무대신이던 도고 시게노리는 협상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해 버렸다는 이유로 당대의 거물급 외교관들이던 사토 나오다케(주 소련 일본대사) 및 요시다 시게루(주영 일본대사. 후의 일본 총리)등에게 비판받기도 했는데, 요시다는 "문서를 받았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면 바로 사직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군부도 약간은 정신을 차렸을지 모른다. 그게 남자의 도리다"라고 말했다고. 사토는 좌절 상태이던 도고에게 "실망하지 말고 교섭을 끈기 있게 추진하라.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설득했으나 교섭을 포기한 도고에게 실망하고 외무성 고문직을 사퇴했다고 한다.
FDR은 더 유화적인 제안을 원했으나 주요 각료들은 물론 해당 제안에 대한 영국, 중국 등 동맹국들의 반발로 훨씬 강경한 내용의 헐 노트를 제시했다. 헐 노트의 초안 작성을 주도한 것은 헐 장관의 국무부였다. 그러나 "협상 초반에 터무니없이 강경한 요구를 내어 상대방의 양보를 끌어내는 것은 미국적인 협상 문화"라고 말해 당시 미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는 회고담도 있다.
영국 은 미국이 일본에 유화적인 제안을 하는 것에 크게 반발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의 팽창주의가 영국이 아시아에 갖고 있던 이권(홍콩, 말레이 반도)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미일전쟁의 개전이야말로 미국을 독일과의 유럽 전선에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 동맹 조약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해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도 미국에 선전포고해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스스로의 패망을 부추겼다.'''
헐 노트는 선전포고가 아니었고, 엄밀한 의미에서 최후통첩도 아니었다. 물론 미국은 일본이 헐 노트를 수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협상 결렬이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협상 결렬을 사유로 선전포고 없이[4] 진주만을 공격한 것은 엄연한 국제법 위반이다. 물론 일본도 계획상으로는 선전포고하자마자 기습적인 선빵을 날리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서 적어도 국제법을 준수하려고 했지만 전달 시기도 늦은 데다 그 내용도 명확한 개전 의사 표시 등 국제법상 선전포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요소를 빼먹은 불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계획대로 공습 30분 전에 선전포고가 전달되었더라도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성격에는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진주만과 말레이 반도 공격 부대가 헐 노트가 제시되기 전 이미 출항을 완료하여 협상 테이블 밑으로는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으며 적어도 1941년 기준으로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소련의 유럽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는 등 유럽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물론 19세기 후반부터 미국과 일본은 민간 차원에서나 군 차원에서나 많은 교류를 가져 왔고[5] 일본 내에서 미국의 잠재력을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6] 그러나 일본 지도층 주류는 독일이 최종 승리를 할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7] 따라서 독일의 승리에 숟가락이라도 얹어야 한다는 견해[8] 가 미국을 두려워하는 견해를 압도하고 있었으며, 청일전쟁 및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본군은 '대국이라도 기습해서 단기간에 대타격을 주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대미전에도 똑같이 적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그랬지만, 미국은 초기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일본은 가용 자원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한 데다가 반자이 돌격 및 가미카제 등 멍청한 전략전술을 전쟁 기간 내내 써먹었고 그 대가로 패망했다.
6. 만약 일본이 헐 노트를 수락했다면?
일본 측에서는 소련을 추축국으로 끌어들여 연합군에 대항한다는 구상 역시 있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일본이 소련과 중립 조약을 체결(1941년 4월 13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독소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물거품이 되었고 이에 고노에 내각에서는 차라리 이것을 구실삼아 삼국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정책을 취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으나 도조 히데키의 반대에 의하여 무산되었다. 삼국동맹은 시작부터 반대가 많은 정책이었고 그후에도 삼국 동맹의 파기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견해로 당시 미일협상이 타결되고 미국이 중일전쟁에서 발을 뺐다면 일본이 중일전쟁에 전념, 중국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일본이 '정상적인 판단'을 하여 추축동맹 탈퇴 혹은 사보타주 모양새를 보이고 연합군이 실효지배했던 동남아를 완전히 포기, 일본군을 철군하는 대신 조선, 중국에 대한 권리와 전리품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했다면 전통적으로 고립주의자들이 득세하고 무기대여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합군을 지원했던 미국이 일본과 결전을 굳이 주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독소전쟁은 1941년 6월, 진주만 공습은 독소전쟁 이후 1941년 12월 벌어졌다. 독일의 위협이 극대화된 시점에서 일본이 선빵을 때리지 않는 한 미국이 세계 해군력 3위를 차지하는 일본 제국과 굳이 척을 질 이유는 없다.
일본이 세계대전에 참전을 안했거나 연합국 쪽에 확실히 붙어 중국만 공격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미국이 일본에 대해 ABCD 포위망을 유지하고 압박했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일본은 동남아에서 국부군과 비교도 안되는 상대와 싸우며 군사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으니 중일전쟁에 더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는 결코 중국에 좋게 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타결이 되면''' 말이다. 하지만 1941년 시점에서 미국이 일본 제국의 중국 정복이란 목적을 인정해줬을 가능성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만주사변에서부터 일본군이 자위적 조치라는 명분과 배치되게 만주 바깥인 진저우 폭격을 감행하고 열하까지 쳐들어가자 미국은 크게 불쾌해하며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행위에 경고를 한 바가 있다. 중일전쟁 시점에서는 반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루스벨트가 이런 행위를 묵과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나온 것이 고철과 석유 금수조치였다. 그리고 중화민국이 독일과 협력해서 못 믿을 대상이었다는 썰이 일각에서 나오지만 애초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9] '''공산당 토벌을 위해''' 독일 무기와 기계류를 들여온 것이 중화민국을 못믿을 국가로 보이게 했다는 것은 근거가 어디인지도 모를 주장이고 문제의 중독합작이 이뤄지던 1930년대 초중반 중화민국은 1935년 법폐개혁을 비롯하여 영국 및 미국과도 엄청나게 교류하고 있었다.[10]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동해안 대도시들에 미국의 자본이 많이 투입된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극동에서의 질서 유지 차원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국익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일본의 중국 침략이었다.
그리고 화북 일부만 함락되었떤 중일전쟁 극초기라면 모를까 중국의 주요 대도시를 모조리 점령한 1941년의 미-일 협상 시점에서 미국이 만주를 제외한 중국 본토에서 일본의 점령지를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라리 만주사변, 열하사변 때처럼 미국이 중국을 원론적 입장에서 지지만 하면서 실질적으로 방기한다면 모를까(그나마도 석유 금수조치라는 강경처분을 내린 이상 물건너간 일이고) 일본의 중국 침략을 인정하는 외교적 합의가 나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중일전쟁 탓에 미국 내의 반일, 혐일 여론 또한 (전쟁까지 각오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무섭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1941년의 미-일 협상도 미국의 대일 경제 제재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것이었고, 이 제재조치는 중일전쟁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항의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는 중국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완전 철군, 중일전쟁 개점 시점으로의 원상회복 뿐이었을 것이다.[11] 이 경우 미국도 더 이상 경제 제재를 시행할 명분을 잃었을 것이고,[12] 일본도 만주와 조선에 대한 권리는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적잖은 피해를 보며 얻은 거대한 점령지를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거저 내준다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역시나 1937~1938년 시점이라면 화북에서의 일본 권익을 약속받는 조건으로 군부를 달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수십만의 피해를 보고 엄청난 전비를 소요한 상태에서 1937년 트라우트만 공작 때 장제스가 합의한 바가 있던 화북 권익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중국에서 쫓겨나는 조건을 일본 군부가 받아들일리는 만무했다. 만약 내각이 단독으로 이런 협상에 합의했다면 군부가 그날로 쿠데타를 일으켰을 것이다. 결국 일본은 더 이상의 협상 대신 영미와의 전면적인 개전을 선택했다. 그것도 미국의 개입을 최대한 늦추거나 최소화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두 배제하고, 미국의 태평양 주력 기지에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을 날리는 방식으로. 차라리 일본이 미국을 제외하고 네덜란드와 영국에게만 선전포고를 했다면, 미국도 어떻게든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대체로 고립주의에 익숙했던 미국민의 전쟁 의지는 진주만 기습 때만큼 강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미국과 개전하더라도 하와이를 제외한 필리핀, 괌, 웨이크 섬 정도로 공격 대상을 한정했다면 마찬가지로 미국민들이 받는 충격과 분노의 정도는 덜했을 것이다. 이후 동남아시아의 자원지대를 확보하고 중부 태평양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벌였다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종전협상을 벌이거나, 그게 안되었더라도 실제의 전황보다는 더 나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을 돈벌이밖에 모르는 약체 민족이라고 무시하는 견해와[13] 미국의 잠재력을 제대로 높이 평가하는 견해가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켜 기왕 개전이 불가피하다면 초전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자!는 방침을 골랐다. 결국 미국과 어떠한 협상도 불가능하도록 퇴로를 막아 버린 것은 일본 자신이었다.
[1] 일본 해군 대장 출신으로 제3함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서 한쪽 눈을 실명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2] 이 사람은 <일본은 침략국가였는가(日本は侵略国家であったのか )>라는 불쏘시개 논문을 출판해 큰 논란을 야기한 전력이 있다. 미국의 술수에 일본이 전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논리를 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할 것.[3] 당시 중립국이었던 미국을 명백히 겨냥한 문구로 평가받고 있다. 즉, 미국을 협박한 것 [4] 사실 일본은 근대 역사에서 전쟁 상태에 돌입할 때 선전포고를 제대로 한 적이 별로 없다. 청일전쟁에서는 선전포고 없이 청군 함대를 기습하였고, 러일전쟁에서는 선전포고를 하기 직전에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였으며, 중일전쟁과 할힌골 전투에서도 선전포고 없이 무단으로 기습하였다.[5] 개항 과정이 강압적이긴 하였으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미일관계는 아주 양호했다. 이 밀월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다.[6] 이러한 주장을 했던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른바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요나이 미쓰마사, 그리고 이노우에 시게요시이다. 당대에는 매국노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으나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이어지면서 이들이 현명했음이 밝혀졌다. 물론 야마모토는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연수 경험이 있던 데다가 미국에서의 생활로 인해 미국의 잠재력을 두려워하였음에도 진주만 공습을 성공시키는 등 전쟁 노력에 박차를 가하지만 결국 미 해군 항공대의 습격에 사망하고 말았다.[7] 이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당시 영국 및 미국을 위시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똑같이 생각한 내용이었다.[8] 이 견해에서 실시된 군사 훈련이 바로 관동군의 '관동군특별대연습(關東軍特別大演習, 영어로는 Kwantung Army Special Exercise/Maneuvers)' 내지는' 관동군 특종 연습(關東軍特種演習)', 약칭 '관특연(関特演, Kantokuen)이었다. 러시아의 유럽 영토에서 개시된 바르바로사 작전에 호응하여 극동 영역에서도 소련 침공을 개시하려는 목적을 띤 채 실시된 관동군의 대규모 훈련(약 100만 명 정도가 동원됨)이었으나, 2년 전에 처참하게 박살난 전력 때문에 소련을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던 일본 육군이 대소전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고, 석유 및 고무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를 침공하는 것을 더 중시한 대본영의 판단에 따라 결국 관동군의 소련 침공은 무산되었다.[9] 애초에 막스 바우어를 비롯한 독일 군사고문단이 처음 중국에 온 것은 나치당이 집권하기도 전이었고 한스 폰 젝트의 활동도 1933~1934년 시점으로 히틀러가 깽판을 치기도 전이다.[10]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에선 국민당이 영미에 나라를 팔아버린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게거품을 물어댔고 일본에서는 중국의 화폐개혁이 성공하고 영미의 영향력이 중국에서 확대되는 꼴을 못봐줘서 훼방놓으려고 엄청난 방해공작을 펼쳤다.[11] 억지로 방법을 하나 찾자면 충칭의 장제스와 협상을 통해서 중국에서 철군하는 대가를 중화민국으로부터 직접 받아내는 게 있었겠지만 일본은 중화민국에서 점령한 모든 영토를 보호령으로 할양하라는 날강도 요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화민국 측에서 전쟁이 아니라 외교로 망할 판이라고 이를 갈고 있었으니 불가능했다. 일본이 점령한 영토란 것이 수도 난징에 최대도시 베이징, 상하이, 우한에 장제스가 10년간 육성한 공업과 개혁농촌 등이 모조리 다 포함된 상태이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에 침략을 당해서 휴전 조건으로 서울과 7대 광역시에 공업지대를 모조리 다 할양하고 별볼일없는 산간오지만 남겨놓으란 요구를 받았을 때, 싸울 여력이 남아있다면 그런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12] 미국이 일본 극우들의 주장처럼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일본을 멸망시키려는 게 아니었다면야. 물론 어디까지나 일본 극우들의 전쟁 정당화를 위한 망상이다.[13] 엄밀히 말하자면 도조 히데키는 국력상 미국과 격차가 매우 크다는 것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황국 정신으로 극복 가능하다는 행복회로를(...) 열심히 돌리면서 전쟁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