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일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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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일레펠트(Herbert Ihlefeld : 1914. 6. 1~1995. 8. 8)'''
1. 소개
2. 출생과 군 입대
3. 스페인 내전에 참전
4. 서부전선
5. 발칸 전역
6. 동부전선
7. 마침내 항공단장
8. 독일 공군 최후의 도박
9. 신병기를 받았지만
10. 서훈


1. 소개


출생 : 독일 제국 Pinnow
출격횟수 : 1,000회
격추수 : 123기
소속 : 콘돌 군단, LG 2, JG 77, JG 52, JG 103, JG 25, JG 11, JG 1
최종 계급 : 대령
사망 : 서독 Wennigsen

2. 출생과 군 입대


일레펠트는 독일 제국 시대에 변경인 포메라니아주의 핀노브(Pinnow)라는 작은 깡촌에서 농장 인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이를 먹으며 직업학교에 들어가 견습 기계공 생활을 하던 일레펠트는 1933년 4월 1일에 군에 자원 입대하게 된다. 슈테틴에 주둔하고 있던 제5보병연대(Infanterie-Regiment 5)에서 군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처음 맡겨진 보직은 척탄병으로, 야심만만한 일레펠트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동료들에게 위터보크(Jüterbog)에 새로 세워진 항공기술학교에 들어가면 공군 장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원하여 1934년부터 군적을 공군으로 옮기게 된다. 이 학교에서 기초 항공역학부터 수업을 받기 시작한 그는 더 나아가 비행술을 배워 조종면허까지 땄고, 1937년 3월에는 새로 창설된 루프트바페의 리히토펜 항공단(Jagdgeschwader 132 Richthofen)에서 상사 계급장을 달고 자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3. 스페인 내전에 참전


그가 조종사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던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고 총통 히틀러는 콘돌 군단을 파견해 팔랑헤를 지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제88비행단(Jagdgruppe 88)의 제2비행중대(2. Staffel)에 일개 편대원으로 배속된 일레펠트 하사는 실전을 경험하면서 점차 숨겨진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곧 부편대장이자 로테 리더로 발탁되었다. 1938년 2월 21일에 소련 조종사가 모는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이 전역에서 최첨단 전투기인 메서슈밋 Bf 109B-1을 몰게 된 일레펠트 하사는 확인 격추 7기, 비공인 2기의 전과를 거두었고 파견에서 돌아온 후에는 총통으로부터 스페인 황금검십자장(Spanienkreuz in Gold mit Schwertern)을 직접 받는 영예를 누렸다.
파견 근무에서 세운 공로로 장교 진급 대상자가 된 그는 1938년 8월 1일에 새롭게 편성된 제2시범항공단(Lehrgeschwader 2) 예하의 제 I 그루페에 배속되어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예기에 어울리는 전술을 개발하고 훈련시키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 부대는 얼마 후 제77전투항공단(JG 77)으로 재편성되었고, 일레펠트는 1938년 8월 20일부로 정식으로 장교에 임명되었다.

4. 서부전선


1939년 9월 1일 금요일,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으면서 전쟁이 터졌다. 일레펠트 소위는 폴란드 상공에서 편대장 자격으로 공중초계를 하면서 제공권을 장악하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좀체로 격추 전과는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일레펠트가 대망의 첫 격추를 경험한 것은 개전으로부터 반년이나 지난 1940년 5월 10일에 프랑스를 침공한 이후였다. 5월 29일, 됭케르크로 물러난 영국군은 철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 북동부의 생-캉탱(Saint-Quentin)까지 전투기 부대를 진출시켰고, 중대원 10명과 함께 출격한 일레펠트는 상공 2,500 m에서 RAF가 아닌 프랑스 공군의 모랑-소르니에 MS. 406 전투기 2대로 이뤄진 편조를 포착했다. 일레펠트가 1대를 떨구는 사이에 한스 트뤼벤바흐(Hanns Trübenbach) 대위가 나머지 1대를 격추시켰다.
이튿날에 일레펠트는 오후의 2번째 출격에서 영국 공군의 브리스톨 블레니엄을 1대 격파했고, 15:00의 3차 출격에서도 같은 기종을 1대 더 보탰다. 그런데 그 블레니엄은 폭격기답지 않게 기민한 기동을 펼치며 후방 총좌로 치열하게 반격했고, 결국 추락하기 직전에 일레펠트가 몰던 Bf 109E의 냉각기를 명중시켜 불시착하게 만들었다. 그는 생토메르(Saint-Omer) 부근의 들판에 동체 착륙했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6월 1일부로 일레펠트는 중위가 되면서 제2비행중대(2 Staffel)의 지휘권이 맡겨졌고, 7월 4일에는 1급 철십자훈장이 주어졌다. 프랑스가 항복하자 독일 공군은 도버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무조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의 중대에게는 7월 9일에 대함 공격 임무를 띠고 출격한 제2폭격항공단(Kampfgeschwader 2 Holzhammer)의 Do 17 폭격기를 엄호하는 임무가 떨어졌다. 일레펠트는 이 날 해협을 오가며 엄호 비행하던 도중에 호커 허리케인을 격추시키며 4번째 전과를 기록했다.
8월 30일에 일레펠트 중위는 칼레 부근의 해상에서 스핏파이어를 격추시켰는데, 이것은 그에게 10번째 전과로 비로소 그는 루프트바페에서 에이스 자격을 얻게되었다. 그렇지만 이 교전에서 제1비행단장인 베른하르트 미엘케(Bernhard Mielke) 대위는 스핏파이어에게 격추당해 전사하고 말았다. 결국 다음날 일레펠트는 공석이 된 비행단장 보직에 임명되었다. 비행단장 일레펠트는 해협 전투가 끝날 때까지 35대의 격추 기록을 쌓아올렸고 9월 13일에는 기사철십자훈장을 받게 된다.

5. 발칸 전역


독일군 사령부는 1941년 4월 6일, 마리타 작전(Operation Marita)을 발동했고, 이렇게 발칸 반도에도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다. 일레펠트가 지휘를 맡고 있던 제1비행단(I.(J)/LG 2)은 불가리아의 라도미르(Radomir)에 전진기지를 세우고 볼프람 폰 리히토펜(Wolfram Freiherr von Richthofen) 장군의 제8항공군단(VIII. Fliegerkorps) 예하에서 유고슬라비아 방면으로 전개하여 왕립 유고 공군과 싸우게 된다.
그가 몰던 Bf 109E-7(Werknummer 2057)은 철도역에 기총소사를 하다가 대공포에 얻어맞고 불시착했는데, 일레펠트는 곧바로 달려온 유고 병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유고군의 심문에 제대로 응하지 않던 일레펠트는 곧 총살대에 묶일 신세였으나 운이 좋게도 제5기갑사단(5. Panzerdivision)이 3호 전차를 이끌고 들이닥쳐 간발의 차이로 총살을 면하고 다시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4월 17일에 항복하며 완전히 독일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이어서 마케도니아의 프톨레마이다(Ptolemaida)로 기지를 옮긴 비행단은 3일 후 그리스 동쪽의 라리사(Larissa) 방면으로 출격을 나가게 된다. 그리스군은 저항했지만 얼마 안가 아테네와 피레에푸스(Piraeus)가 함락되었고, 27일에 부대는 엘레우시스(Eleusis)까지 전개하면서 사흘 후인 4월 30일에 항복했다.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이들은 크레타 전투에서 정찰과 초계 임무를 재개하면서 다시 전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5월 14일에는 몰라오이(Molaoi) 비행장을 비롯한 지상 목표들에 기총 소사를 퍼부으며 대지 공격 임무를 수행하는 부하들을 인솔했다. 일레펠트와 부하들은 크레타 섬의 전술적 요충지들과 섬을 오가는 배들에게 공격을 가했는데, 5월 22일에는 영국 해군의 경순양함 피지(HMS Fiji)에 폭탄을 명중시켜 기관을 정지시켰고, 이 배는 곧이어 달려든 Ju 88에게 3발의 폭탄을 더 얻어맞고는 뒤집혀버렸다. 크레타 전역에서 일레펠트 대위는 이처럼 지상 공격에 열중했던 탓에 5월 26일에 허리케인을 1대 격추시킨 것이 공대공 전과의 전부였다. 개인적으로 지상 공격 미션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일레펠트와 그의 부하들은 5월 31일에야 해당 전선을 떠날 수 있었다. 그의 비행단은 LG 2의 다른 비행단과 함께 러시아로 진격할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유고의 베오그라드로 이동해 대기하게 된다.

6. 동부전선


6월 18일, 제 I 비행단은 루마니아부쿠레슈티로 옮겨가 제77전투항공단(JG 77)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동쪽으로 진격할 남부 집단군(Heeresgruppe Süd)을 지원하기로 예정되었고, 부대원들은 브리핑에서 3일 후에 러시아의 드넓은 영토를 정복해나갈 것이라는 언질을 듣게 되었다. 6월 22일 오전 3시 20분, JG 77의 메서슈밋 전투기 70대가 일제히 날아올라 제27폭격항공단(Kampfgeschwader 27)의 He 111 폭격기 편대를 엄호하며 국경을 넘어가면서 독소전이 시작되었다. 일레펠트 비행단장은 첫날 새벽 첫 출격에서 이미 SB-2 폭격기 2대를 격파했는데, 이 소련 공군기들은 마치 앉아있는 오리처럼 쉬운 사냥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독소전 첫날 비행단은 7회나 출격을 거듭하며 마주치는 적기들을 추풍낙엽처럼 휩쓸어버렸고, 일레펠트 또한 개인 격추수를 37대로 늘려놓았다. 나흘 후인 6월 26일에 일류신 DB-3 폭격기 2대와 폴리카르포프 전투기 1대를 한꺼번에 해치우자 그의 전과는 40대가 되어 다음날 전군에서 16번째로 곡엽 기사철십자훈장을 받게 된다.
Bf 109와 맞먹는 고성능 전투기를 갖춘 RAF 조종사들과 혈투를 벌이던 일레펠트 대위는 이 전선에 와서 서툰 소련 조종사들이 모는 구닥다리 전투기들을 상대로 편안하게, 마음껏 전공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훈장 서훈식 다음 날에 또 한 대의 I-16을 제물로 삼은 그는 부대를 우크라이나 지방의 우주호로드(Ужгород)로 이동시켜 7월을 맞게 된다. 7월 2일에 5회째 출격에서 일레펠트는 전과보고서에 구식 I-153을 또 하나 추가했다. 7월 6일에 7회나 출격한 그와 부하들은 오후 늦게 나간 6번째 출격에서 눈 아래 낮게 나는 5대의 SB 폭격기와 그들을 엄호하는 I-16 전투기 7대를 발견하고는 성난 매처럼 달려들어 44번째 먹잇감을 가로챘다.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전과를 늘려가던 일레펠트에게 포식을 즐길 기회가 왔다.
8월 30일, 일레펠트는 자신의 48번째부터 52번째 전공이 될 5대의 MiG-3를 단 한번의 교전에 휩쓸어버리는 희열을 맛보았다. 이 전투를 치룬 일레펠트는 어떤 요령을 깨우친 것인지, 그후부터 하루에 여러 대의 적기를 잡아내는 날이 부쩍 늘어났다. 1942년 4월 22일, 공군 대위 헤르베르트 일레펠트는 루프트바페에서 15번째로 100기 격추를 살아서 달성한 파일럿이 되었다. 이처럼 지상근무는 팽개치고 전투에 솔선수범한 덕분에 그의 비행단은 동부전선에 투입된 이래 323대의 적기를 격추시켰고, 그 댓가로 고작 17대의 전투기만을 잃는데 그치고 있었다.

7. 마침내 항공단장


이와 같은 전투력과 지휘능력을 공군 수뇌부로부터 인정받은 그는 1942년 5월 10일자로 동부전선에 투입된 독일 공군에서도 최정예로 이름높던 제52전투항공단(JG 52) 예하 제 I 비행단장으로 부임했다가 소령으로 승진한 후인 6월 22일에는 마침내 항공단 사령관이 되었다. 7월 22일에 Fi 156 슈토르히 연락기를 몰고 전선 시찰을 돌던 그는 재수없게도 소련 전투기에게 발각되어 도주했지만 기총 사격에 맞고 추락했다. 이 사고로 총상과 골절상에 이르는 큰 부상을 입은 그는 거의 1년간이나 전선을 떠나야만 했다.
긴 입원 생활 끝에 컨디션을 회복한 그는 1943년 7월에 새롭게 창설된 제25전투항공단(JG 25) 사령관으로 부임했는데, 서유럽을 활동 무대로 상정하고 만들어진 이 부대는 특별히 고공용으로 개조된 Bf 109를 장비하고 영국 공군의 골칫거리 드 해빌랜드 모스키토 전폭기를 저지하는 것을 주임무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단좌 전투기인 Bf 109는 이런 임무에는 별로 알맞지 않았고, 특히 야간에 침투해오는 모스키토는 거의 손 댈수가 없었다. 때마침 연합군의 독일 본토 공습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레펠트 소령과 부하들에게 있어 중폭격기 요격 임무가 제일 중요한 일이 되었다.
1944년 2월 1일에 중령으로 진급한 일레펠트는 제국 방어전투 부대인 제11전투항공단(JG 11) 사령관 보직이 주어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 제1전투항공단장인 발터 외자우 중령이 감기를 앓다 헤르만 괴링 원수의 핀잔을 듣고 홧김에 출격하는 바람에 P-38에게 격추당해 전사해버리자, 제1전투항공단(JG 1)의 지휘봉을 대신 넘겨 받았다. 보통이라면 고급 장교가 되어 출격할 기회가 줄고 중상으로 인한 긴 입원 생활을 거쳤다면 전투감각이 형편없이 무뎌졌을 터였지만, 일레펠트 중령은 예외였다. 7월 14일에 부하들과 함께 발진한 그는 폭격기 편대를 엄호하던 P-51과 스핏파이어를 각각 1대씩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했으니 말이다. 25일에는 영국 공군의 아브로 랭커스터와 스핏파이어를 동시에 떨구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었다.
부상과 긴 공백기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무렵 만 30세의 일레펠트 중령은 당시의 전투조종사로서는 할아버지나 다름없게 여겨질 나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일선의 수퍼 에이스와 다름없는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8. 독일 공군 최후의 도박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유럽 내륙으로 진격을 거듭하며 저지대 국가에 공군 기지를 전진 배치시키자, 이제 독일 본토는 폭격기 뿐만 아니라 전투기들의 공습에도 밤낮으로 시달리게 된다. 독일군 수뇌부는 회심의 반격으로 보덴플라테 작전을 발동했고, 일레펠트 중령은 JG 1의 가용기체를 거의 모두 이끌고 네덜란드의 트벤테(Twente) 비행장에서 오전 8시 10분에 발진했다. 중령이 이끄는 본부비행대는 라이네(Rheine)에서 8시 15분에 이륙한 제 II / III 비행단과 공중에서 집결했고, 벨기에의 말데겜(Maldegem)과 우르셀(Ursel)을 목표로 날아갔다. 20대의 포케불프 Fw 190A-8과 30대의 Bf 109G-14로 구성된 이들은 제1야간전투항공단(Nachtjagdgeschwader 1) 소속의 Ju 88 야간전투기 4대를 선도기 삼아 길안내를 받으며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고도 50 m의 저공으로 서쪽으로 날고 있었다.
JG 1 편대가 헤이그(Hague) 부근을 통과하던 순간, 지상에서 소나기처럼 기관포탄이 날아들고 대공포탄이 어지러이 작열했다. 어이없게도 이 격렬한 대공 사격은 우군이 쏘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상급 부대로부터 아군 부대가 통과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고, 하늘을 날으는 비행기만 보면 무조건 쏴대는 습관대로 모든 포문을 총동원해 사격해온 것이었다. 고도가 낮았던 탓에 몇 대의 전투기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며 추락했고, 선두 편대에서 날고 있던 사령관 일레펠트도 피격을 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로테르담(Rotterdam) 근처의 들판에 무사히 동체 착륙해 목숨은 건졌으나, 아군 대공포에 큰 피해를 입은 공습 부대는 지휘관도 없이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으니, 작전의 성패는 이미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빈켈(Bawinkel)에서 8시 15분에 이륙한 제 I 비행단에게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벨기에의 헨트(Ghent)에 위치한 신트-데니스-웨스트렘(Sint-Denijs-Westrem) 비행장을 향해 이동하던 이들에게는 독일군이라면 이를 박박 가는 폴란드 망명 조종사들로 편성된 RAF 제301스쿼드론과 308, 317스쿼드론이 모두 모인 제131비행단(No. 131 Wing RAF) 소속의 스핏파이어 XVI가 달려들었다.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임무를 속행한 JG 1은 적기 6대를 격추시키고 지상에 주기된 54대를 격파하는 댓가로 29대의 전투기와 25명의 조종사를 잃어야만 했으며, 일레펠트는 그 시간에 터덜터덜 걸어서 부근의 독일군 진지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어떤 상황도 알지 못한 채....

9. 신병기를 받았지만


1945년 1월 30일, 조국 독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일레펠트의 어깨에는 대령 계급장이 올려지며 새로운 소임이 맡겨졌다. '''긴급 전투기 프로그램(Jägernotprogramm)''' 계획에 의거해 1개의 제트엔진을 달고 나무로 만들어진 국민 전투기(Volksjäger) 하인켈 He 162로 편성된 요격부대를 이끌라는 것이었다. 외자우 제 I 비행단은 독일 북부의 중심 비행장인 파르킴(Parchim)으로 이동했는데, 그 무렵 이 비행장은 제트전투기 부대인 제7전투항공단(JG 7)이 먼저 주둔하고 있었고, 연합군은 이곳이 나치의 신병기가 출격하는 기지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대적인 공습이 가해질 운명이었다. 하필이면 적에게 절호의 전략목표로 점찍힌 곳을 신병기의 데뷔 장소로 정한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이 기지에서 북북동 80 km 떨어진 로스토크(Rostock)에 하인켈 공장이 있어서 기체와 유지 부품을 비롯한 기자재를 공급 받기 편했기 때문이다. 그 편리함이란 다름 아닌 전투기들을 육로로 실어나를 가솔린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는데, 제트엔진은 등유로 작동되지만 비행기를 옮겨줄 트럭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사령관 일레펠트 대령에게도 개인 탑승기인 He 162A-2(Werknummer 120230)가 주어졌고, 3월부터 지상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요원들이 기종전환 훈련을 끝마치기도 전에 올것이 오고야 만다. 1945년 4월 7일, 미군의 B-17 중폭격기 134대가 손바닥만한 비행장에 새카맣게 몰려와 융단 폭격을 퍼부었고, 단 한차례의 공습만으로도 기지의 기반 시설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틀 후 일레펠트는 파르킴에서 서쪽으로 20 km 떨어진 루드빅스루스트(Ludwigslust)로 기지를 옮겼지만, 헛수고였다. 일주일 후에 새 기지도 박살나버리자 부대는 또다시 짐을 싸 북쪽 끝 덴마크 국경지대에 있는 레크(Leck) 비행장으로 옮겼는데, 이곳도 공습에 쫓겨온 Me 262들이 북적거리고 있어 훈련을 하기에는 알맞지 않았다.
그즈음 일레펠트 휘하의 제 II 비행단은 그제서야 로스토크의 하인켈 공장으로 가서 기체를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뒤늦게 도착한 제 III 비행단 대원들은 받아올 전투기가 없어서 해산되면서 정비사들을 비롯한 지상요원들은 육군에 합류하게 된다. 제 아무리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지휘능력이 뛰어나다는 일레펠트 대령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독일이 항복한 후, 일레펠트 대령의 탑승기는 미군이 본토로 가져가 조사해본 다음 보관되었다가 현재는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10. 서훈


스페인 참전 메달
스페인 황금십자장
전상장 흑장
조종사 및 관측수 기장
2급 철십자 훈장 (1939. 9. 26)
1급 철십자 훈장 (1940. 7. 4)
기사철십자 훈장 (1940. 9. 13)
공군 명예컵 (1941. 6. 12)
곡엽 기사철십자 훈장 (1941. 6. 27)
독일 황금십자장 (1942. 4. 9)
곡엽검 기사철십자 훈장 제9호 (1942. 4. 24)
황금 전선 1000회 비행장(Frontflugsp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