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생

 

'''연도별 세대'''
1930년대생
'''1940년대생'''
1950년대생
1. 개요
2. 한국
2.1. 작명 경향
2.2. 학력
2.3. 정치 성향
3. 해외


1. 개요


현재까지 살아있으면 대부분 '''70대''', 즉 노년기이다.[1]

2. 한국


격변기인 1940년대생들은 셋으로 나뉘어진 편으로 1945년 8월 15일 이전생들은 일제의 망국 속에 세상을 보게 된 이들이었고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전생들은 미군정 치하 조선당시에 태어난 세대이며 1948년 8월 15일 이후생부터 1949년생은 대한민국 국적속에 태어난 세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40년대생들은 1947~1956년 사이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940~41년생들은 8월 15일 이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유치원을 다닌 마지막 세대이자 8월 15일 해방 후에는 최초의 유치원생이었다.
1945년 해방 이전에 태어난 세대들은 '''일제 치하 조선'''이라는 국적으로, 1945년 해방 이후에서 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미군정 치하의 조선'''으로 1948년 8월 15일 이후 ~ 1949년생에 가서야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으로 태어나야 했다, 1945년 해방 이전에 태어난 세대들은 어렸을 적만 했어도 자신의 조국이 '''일본'''인 것으로 잘못 알았던 적도 있었는데 그 시대까지만 했어도 일제 말기라 일제의 왜곡과 압제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영토였기에 '일본에서 태어났다.'라는 것도 사실상 가슴아픈 역사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그래도 43년생 ~ 45년생 기준으로 엄청 어린 나이인지라 일제시절에 대한 기억은 잘 나지 않을 것이다.)
1940년대생은 대부분 1960년대생 ~ 1980년대생 부모 세대이기도 하며 아주 심한 늦둥이일 경우 1990년대 초반생까지 있다.
정치적 혼란이 짙은 때라 이들은 어린시절부터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등의 인사들이 암살당한 것을 생생히 듣게 된 세대들이기도 하다.
일제 속에서 자란 영향으로 1940년대 극초반 일부 세대들은 일본어도 좀 할 줄 안다. 일제가 한민족 문화 말살을 위해 일본어를 강제적으로 교육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태어난 세대들은 '''해방둥이'''라고 불리웠다. 이제 이들도 70대가 되었으며 1940년생과 생일이 지난 1941년생은 80대가 된다. 1942년생, 1943년생들은 80을 앞두고 있다. 이들은 국민학교 시기에 ‘전시부독본’, ‘전시생활’[2], ‘우리도 싸운다’ 등 전시 교재로 공부했다. 이들은 대학에 입학해서도 교복을 입었다고 한다.[3] 초등학교 시절에는 1차 교육과정을, 중학교 이후에는 2차 교육과정을 밟았다. 이들은 수학의 정석성문영어로 공부한 첫 세대이다.
1940년대 출생자들의 대학 학번은 59~68학번이지만, 재수 이상일 경우는 69학번 이후도 가능하다.
1945년 분단 이전에 태어난 세대들은 분단의 경험없이 어릴 적까지는 북한도 자유롭게 오갔던 적도 있었다. 그 때는 휴전선이라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북한으로 간다고 해도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세대들 중에서는 북한 지방에서 직접 살아봤거나 전쟁 때 월남했던 세대들도 많다.
과거 월남전에 파병된 사람들도 일부 있다.[4] 이들의 대학 학번은 대개 59~69[5]학번이며, 대학 시절 교복을 입은 적이 있고[6], 학교 앞에서 탱크화염병을 봤다는 증언도 있었다.[7] 여기에 미니스커트 단속과 군인들의 소지품 검사[8]는 덤. 이들은 대학 시절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교수 연구실을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연령대에서 대학 시절 데모를 하다가 잡혀가는 바람에 수형 사유로 인한 병역면제자들이 속출했을 정도. 이들 중 전과자는 대부분 집시법 관련 전과자들이다. 그 시절 가정교육과, 유아교육과, 간호학과 등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학과에서 여학생은 '희귀종' 취급을 받았다. 어느 정도냐면, 그 학과에 여학생이 1명 들어오면 '대박'[9], 3명만 있어도 '여학생 많은 과'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대학교 강의실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을 정도. 이 세대에서도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수단에서 담배를 피운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화폐 가치가 높아서 당시 대학생들은 1000원으로 몇 주는 버틸 수 있었을 정도. 당시에는 토요일 수업도 있어서 이들은 수강신청 최대 가능 학점이 22학점[10]이고, 8학기 모두 최대치까지 꽉 채워서 들었을 때 176학점도 가능했다. 그나마 그 토요일 수업들은 대부분 인기가 없었다. 그 시기 대학생들의 패션은 교복과 사복의 과도기로 현재보다는 촌스럽다는 평이 많았고, 간혹 재건복이나 한복을 입은 학생들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용두동, 공릉동 등의 지역 이름으로 자신이 다녔던 단과대학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용두동에는 사범대, 공릉동에는 공대, 연건동에는 의대 등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들이 분산되었기 때문.
이들 세대는 고등학교 시절 2차 교육과정을 밟은 경우도 있고 3차 교육과정을 밟은 경우도 있다.
이 시기 남자들의 평균 학력은 중졸~고졸, 여자는 국졸~중졸이었다. 이 때까지도 대졸자들은 XXX 학사님으로 불릴 정도로 드물었던 셈. ('여학사'는 더 희귀했는데, 대졸자도 드문데 대학 나온 여성들은 더 드물었기 때문.) 그나마 도시에서는 고졸, 대졸인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11]
대한민국 최초로 의무교육 대상에 오른 세대이기도 하다. 다만, 시골에 살았을 경우는 의무교육을 혜택을 아예 못 받기도 했다.
유소년기, 10대 초반에 가서는 6.25전쟁도 겪게 되어서 이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올라 목숨을 연명하며 살았던 경험이 많다. 전쟁의 영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폭격으로 인해 국가가 초토화되는 등 여러모로 전쟁 피해를 직접 피부로 느꼈던 세대이기에 북한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휴전 이후에는 주한미군 병사들이 나눠주었던 미국산 과자나 햄캔, 통조림 등을 받으며 연명해야했다.
경제적으로는 1960, 70년대 경제발전에 기여한 산업화 세대들(1930 ~ 1950년대생)이며 이들 중에서도 가장 오랜기간동안 산업화에 기여한 세대이다. 60, 70년대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개발에 힘써왔으며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들이기도 하다. 일례로 산업화 세대의 일생을 다룬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연령대가 바로 40년대생이다.

2.1. 작명 경향


남자의 이름에는 ‘永’자가 많이 들어갔고[12], 여자의 이름에는 보통 ‘子’자, ‘順’자, '淑'자 로 끝나거나[13] ‘후남’, ‘말순’, ‘끝순’, ‘고만’, '서운' 등등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이름들도 많다. 이런 경우는 근대적인 호적 제도를 잘 몰라 아명을 호적에 올렸다가 나중에 정식 이름으로 굳어져 버린 경우[14]가 대부분이다. 심한 경우는 딸의 이름을 '섭섭이'라고 지었거나, '재열'처럼 아예 딸에게 남자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개명 신청을 하는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항렬자 때문에 남성들의 이름 중 여성에게 많이 쓰이는 이름이 쓰이기도 하고[15], 여성들의 이름 중에는 ‘선아’, ‘인영’, ‘윤선’[16], ‘윤아’[17] 등 현대에도 위화감 없이 쓰이는 이름들도 있다.
영미권에서는 남자는 John, William, James 등의 이름이, 여자는 Mary, Patricia, Elizabeth 등의 이름이 많이 쓰였다.
일본에서 남자는 다로(太郎), 지로(次郎) 등의 이름을 많이 썼고 여자는 이름 끝에 거의 '코'자가 들어갔다. 더 윗 세대는 田中ユラ 같은 가타카나 이름도 있었다.

2.2. 학력


연령
무학
초졸
중졸
고졸
학사 이상[18]
65~69세
154,050 (7.3%)
628,332 (29.8%)
457,439 (21.7%)
597,202 (28.3%)
270,962 (12.9%)
70~74세
300,658 (17.1%)
632,370 (36%)
307,917 (17.5%)
348,692 (19.8%)
169,342 (9.6%)
가난, 남존여비, 일제 강점기 및 전쟁의 혼란 3개가 겹쳐 이들 세대의 학력은 낮은 편이며, 특히 여자는 더 낮았다.
어찌 보면 학력보다 병역이 더욱 해당 인물의 지적 수준을 더 정확하게 표현한 것인데 장교 출신(또는 이와 대등한 학력 보유자)이 지성인 최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지잡대 출신이 이 시절의 초졸과 비교해서 지적 수준이 우월하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2.3. 정치 성향


전쟁의 폐허를 경험하고 20, 30대에 박정희 정부[19]를 거치며 고도의 경제성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이 높으며 보수적인 색채가 상당히 짙다. 물론 1940년대생도 한 때 젊은 시절에는 4.19혁명의 주역으로 대부분 참가해 이승만 정권을 무너트리기도 했으며 박정희 정권 때도 6.3항쟁과 3선개헌 저지 등에 참가하며 정권에 저항하기도 했다. 또한 70년대에는 40년대생들 역시 유신헌법에 대한 저항도 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6.25 전쟁에 대한 참상을 직접 겪어 세대 자체가 기본적으로 북한에 대한 적개심과 반공 의식이 굉장히 강했기에 반공체제가 강했던 박정희 정권에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었고 경제 개발을 나서서 도왔다. 중년기에 접어든 80년대에도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도 항거하지만, 3저호황을 누리며 제법 전두환 정권에서도 경제 등은 높이 평가했으며 서울올림픽 유치 역시 높이 평가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의 군사독재가 심해지자 다시 완전히 반 전두환 진영에 섰고 당시 넥타이부대의 주축이던 40년대생들은 각종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며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에도 힘을 보태주었다. 그리고 6.10항쟁 때는 40년대생들이 넥타이부대의 주축으로 선봉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을 거치며 40년대생들의 보수성향이 재차 강화되기 시작했다. 3당합당 이후에는 보수성향이 상당히 강해져 김영삼이회창을 지지했으며 특히 IMF 사태를 겪으면서 1940년대생들의 보수성향은 한 층 더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 때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DJP연합을 할 때는 충청권 40년대생들이 김대중을 지지하기도 했고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의 돌풍이 불고 충청권 수도 공약을 내세웠을 때는 40년대생들도 노무현에게 제법 표를 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40년대생들은 보수성향이 확고해졌지만 여전히 사안에 따라 민주계 정당을 지지해 준 경우도 있었다. 허나 민주정부가 대북정책을 친 북한 정책으로 펴고 경제정책이 실패하면서 결국 완전히 보수성향을 띄게 되었다.
그 결과 17대 대선에서는 이명박에게 몰표를 주었으며 18대 대선에서도 박근혜에게 몰표를 주었다. 그리고 19대 대선에서도 홍준표에게 상당한 표를 주었다.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 노무현과 17대 대통령인 이명박,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김종인이 1940년대생이다.
재계에서는 이건희, 정몽헌, 박삼구, 조양호, 임창욱, 최원석, 조욱래, 신준호, 이명희, 현재현 등이 있다.

3. 해외


이때 태어난 이들은 전전세대와 전후세대로 나뉜다. 세계적으로 1946~1964년생을 '베이비붐 세대'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1946년부터 '전후세대'로 결정짓는다.
일본에서는 이들 중 1947년 이후 출생자는 '단카이 세대'라고 하는데, 1945~1950년까지 출생자 중 가장 출생율이 높은 세대이다. 이들은 어릴 적부터 생활수준 상승을 경험하고 주간 만화잡지 탄생 수혜자이기도 하며, TV보급 세대이기도 하다. 대학생 들어서는 전공투 등 운동권에 참여하며 각목을 들고 헬멧을 쓰며 정치투쟁을 했다. 주로 <아사히 저널> 같은 시사잡지를 읽고 <주간 소년 매거진>도 즐겨 읽었기에 '한 손엔 아사히 저널, 다른 한 손엔 소년 매거진'이란 말도 돌았다.
유럽의 경우 '반전운동 세대'나 '68세대'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징집 및 핵전쟁에 공포감을 가지고 기성세대의 권위적 사고방식을 거부하며 베트남전 반대 투쟁을 벌이기도 하고, 청년기에는 머리를 기르고 마약과 로큰롤에 빠져 현실 도피 성향을 보이기도 한 히피 문화의 주요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중문화적으로 서구권에서 큰 업적을 남긴 세대인데 청소년기였던 1950년대의 로큰롤에 열광했으며 1960, 70년대 들어선 스스로 음악계에 뛰어들어 현재의 록 음악을 정립시킨 세대이기도 하다. 일례로 비틀즈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같은 걸출한 록 밴드 멤버들 대부분이 1940년대생이다.


[1] 1940년생과 생일이 지난 1941년생은 80대이다.[2] 잘 보면 군함, 탱크, 비행기, 폭발물 등의 제목을 가지고 있다.[3] 아마 1945~1949년생인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대학 시절 교복 입은 사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4] 당시에 병장으로 전역한 이들은 월남전 파병을 다녀온 사람들이다. 또한 1948년 이전 출생자들의 경우 1.21 사태로 군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 (정확히는 전 군의 전역 특명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되어 병장들이 일반하사로 진급하고 전역하기도 했다.[5] N수생 포함[6] 다만, 입학식 등에 한두 번 입고 마는 수준이었고, 3학년 이후로는 잘 입지 않았다. 졸업식 때는 대부분 정장을 입었다.[7] 심지어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난 경우는 군인들이 학생들을 귀가시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8] 불온서적화염병 등은 압수 조치.[9] 보통 당시에 여자 없는 과의 대명사인 경영학과, 행정학과, 법학과, 공과대학에서 썼다.[10] 여학생 전용 과목 (아동학, 가정학개론)을 수강하는 여학생은 24학점도 가능. 당시 여자의 대학 진학률이 낮아서 이런 케이스를 적용받는 경우도 높아야 10% 안쪽이었다.[11] 당시 고등학교를 나온 여성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교복을 떠올렸고 (자신의 교복을 언니에게 물려받거나 동생에게 물려 주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어려운 과목으로 수학과 영어를 꼽을 정도였다. 가장 잘 했던 과목은 대체로 가정. 대학교를 나온 여성들은 대학 시절 교양필수로 '가정학개론'을 수강해야 했다. 남성의 경우는 교련.[12]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 오래 살라는 의미에서 永자를 이름에 많이 붙였기 때문. 당시 남자 이름 상위권에 영수 (永洙, 永壽, 永秀 등), 영호 (永浩, 永鎬, 永虎 등), 영식 (永植, 永湜, 永寔 등), 영철 (永鐵, 永哲, 永喆 등) 등 '영'자가 들어간 이름이 있는 것도 이 때문. 그런데 남자 이름은 세대를 거의 안 타기 때문에 2030 세대에서도 '영(永)'자 들어가는 이름은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영준(永俊)이라든가... 심지어 그들의 아빠 동년배에게 붙여도 별로 위화감 없다.[13] 당시 여성들의 이름을 잘 보면 '순자', '영자', '미자', '희자' 등 '자'로 끝나는 이름들이 많다. 1949년 출생 여성의 이름 상위 10개가 영자, 정자, 순자, 춘자, 경자, 복자, 명자, 숙자, 정순, 화자로 그 중 90% 이상이 '자'로 끝났을 정도.[14] 박막례가 이런 케이스이다. 원래 집에서 쓰던 이름은 '박애경'이었으나 호적에는 '박막례'로 올라갔다.[15] 이런 경우는 항렬자를 밑에 쓴 경우가 많은데 (항렬자를 위에 썼어도 여자 이름이 되는 경우는 있다.), 특히 항렬자가 밑에 ‘순’일 경우 많이 보인다. (다만, 여자들은 順 (순할 순)을 많이 쓰고, 남자들이 쓰는 '순'은 한자가 淳 (맑을 순) 등이 많다.) 이외에 ‘희’, ‘미’가 항렬자, 그것도 이름의 끝에 쓰이는 경우 (이를 가리켜 ‘밑에 O자 돌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에도 많이 나오며 간혹 이름의 끝에 항렬자가 쓰이는 경우 ‘예진’, ‘은서’ 등 여자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16] 칠곡 가시나들 출연자 중 안윤선 씨가 이 이름을 쓴다. 그녀는 한글을 떼고 영어도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시를 썼다.[17] 제주도 최고령이었던 오윤아 씨가 이 이름을 쓴다.[18] 학사, 석사, 박사.[19] 60년대~7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