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생
1. 개요
현재까지 살아있으면 대부분 80대이며[1] , 현재 사망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생존해있는 30년대생[2] 들은 장수하고 있는 셈이다.
2. 한국
일제의 마수가 뻗치는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3] 이들은 모두 광복 이전 출생자이다.[4] 창씨개명의 피해자로, 일제 당시 학교를 다녔던 경우는 강압적인 일본어 교육의 영향[5] 인지 친구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만 기억하는 경우도 있고, 일본어 실력이 웬만한 일본인 수준으로 뛰어나거나 심하면 기미가요를 부를 줄 알기도 한다. 이들은 사실상 마지막 간이학교 졸업생들이다. 이 연대 출생 여자들 중 일부는 한글을 읽거나 쓸 줄 몰라서 손자, 손녀에게 한글을 배우거나 어르신 한글교실을 다니는 등의 방법으로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경우도 있고, 학교를 다닌 경우는 출생신고가 늦은 탓에 10살인데 초등학교 1학년, 17살인데 중학생, 21살인데 고등학생인 경우[6] 도 심심찮게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출생들은 초등학생 때 9월 학기제를 경험했고, 초등학생 때 한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7] ‘전시부독본’ 등의 전시 교재[8] 를 기억하기도 한다. 1930년대생은 남자는 2000년대, 여자는 2010년대부터 사망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생은 1937~1946년 사이에 입학했으나, 출생신고가 체계적이지 않아 또래보다 1~3살은 더 먹고 학교에 입학한 경우가 많았고 중등교육기관은 1943~1952년 사이에, 대학은 1949~1958년 사이에 입학했다. 이들은 마을에 학교가 없어 수십 리를 걸어서 등교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들은 1950년대에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졸업장과 상장 등에 서기가 아닌 단기로 연도가 적혀 있었고[9] , 3월 입학을 겪지 못했다.
이 세대까지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고할 때 ‘국민학교’라는 단어를 쓴다. 사실상 학생 시절에 영어를 배우지 못한 마지막 세대이다.[10] 대학 학번으로 치면 49~59[11] 학번이며, 대학교 시절 교복을 입어 봤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당시 대학교는 대부분의 학과에서 성비가 엄청난 남초를 보이고 있었다.[12] 심지어 일부는 전차를 타고 통학한 적도 있었다고. 이들의 졸업장에는 대체로 연도가 단군기원으로 표기돼 있었다.[13] 성적 표기는 일제 당시에는 ‘갑을병정’이었다가 해방 후에는 ‘수우미양가’를 썼다. 이 연배의 사람들이 공부 못 하는 여학생들을 놀릴 때 ‘양가집 규수’라는 말을 쓴 것도 이 때문. 이 때까지만 해도 또래보다 1~3살 더 먹고 국민학교를 입학한 경우가 많아 10대 후반인 중학생들과 20대 고등학생들이 현재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체육이 1주일에 무려 4~5시간이었다. 당시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체육이 4~5시간이던 이유는 기초체력 향상을 위한 것도 있었으나, 고등학교와 대학교 입학시험에 체력장이 있어 이를 연습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물론 중학교 입학시험에도 체력장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1차 교육과정을 경험했는데, 이들은 수학 (정확히는 해석. 당시 공통수학은 중학교 수학의 복습에서 시작해 원으로 끝났기 때문.) 시간에 제곱근 개평법을 배웠다. 또한 국사 교과서에는 단기 연도를 사용했다.[14] 당시 고등학교에서 과학은 물리, 화학, 생물, 지학 중 하나를 필수로 이수한 뒤 1학년 때 이수하지 않은 3과목 중 하나를 더 배우는 형식이었고[15] , 외국어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중에 하나 혹은 2개를 선택하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은 영어+독일어 or 프랑스어를 선택했거나 영어를 선택했다고 한다. ‘영어실력기초’가 1950년대부터 쓰인 것은 이 때문.
이들의 평균 학력은 대략 국졸~중졸이고 무학도 심심찮게 있어,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장만 가지고 있어도 ‘지식인’, 학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면 ‘XXX 학사님’으로 부를 정도이다.[16] 당시 대학에 진학한 여성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전공은 가정교육과, 유아교육과, 간호학과 정도였다.
또한 상당수가 6.25 참전용사인데 웬만한 80대 중후반~90대 중후반 사람들은 대부분 참전용사이다.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고할 때 ‘보통학교’라는 말을 쓴다면 90대 이상[17] , ‘소학교’라는 말을 쓴다면 80대 중후반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50년대 후반 학번인 남성들은 ‘군대에 가기 싫어서’ 대학을 갔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대학을 가지 않으면 군대로 끌려갔는데, 이렇게 군대를 가게 되면 언제 죽을 지 몰랐기 때문. 이들은 어린 시절에 아이가 울 때 ‘왜놈 순사 온다’[18] 라는 말을 자주 들은 건 덤.
해방 후 첫 대학생들은 이 세대이며, 58학번까지는 여기에 들어간다. 다만, 이들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학을 갔으며, 여자의 취학률이 상당히 낮았던 세대 특성상 상당수가 남자이다. 이들은 대학교 시절 교복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19] 리포트, 시험 답안 작성, 논문 작성을 모두 한자로 쓴 것은 덤. 이는 당시 시대상 한자로 쓸 수 있는 모든 어휘를 한자로 써야 했고, 한자어를 한글로 쓰면 감점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2020년 기준 실향민 1세대들의 평균 연령이 대체로 80대 초중반이라고 한다. 정확히는 실향민들 중 북쪽의 고향에서 뛰놀던 기억이 있던 세대들이 늦어도 이 시기 출생이라는 것.
1930~32년생은 해방 후 최초의 중학생, 1933~38년생은 해방 후 최초의 초등학생, 1939년생은 해방 후 최초의 유치원생이었다. 교육과정의 경우 이들은 대체로 1차 교육과정을 밟았다. 1930년대생들이 1940~5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학교 입시를 봤고, 고등학교 시절 계산자, 제곱근 개평법 등을 배운 것이다. 국사 과목에서 연도 표기는 단기로 했고[20] , 영어는 중학교, 심하면 고등학교 때부터 배웠다. 이들은 고등학교 시절 안현필의 '영어실력기초', '메들리 삼위일체 강의', '영어기초 오력일체' 등의 참고서로 영어를 공부했고 이지흠[21] 의 '수학의 강의', '입시 수학의 분석 연구'로 수학을 공부했다.
8.15 광복 당시 이들은 유소년기~중학생이였고, 20대 때 6.25 전쟁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남성들 대부분은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기도 하였고 여성들은 미망인이 늘어갔다. 그리고 30대에 가서야 박정희 군사정권을 경험하였고 50대에 가서는 전두환, 노태우의 민정당 정권을 경험한다. 환갑이 다 돼서야 김영삼의 문민정부를 경험한다.
1930년대 출생자들의 대학 학번은 49~58학번이지만, 재수 이상일 경우는 59학번 이후도 가능하다. 그들 중 대학 출신자는 대부분 남성이었고, 여자들은 고등학교 졸업만 해도 고학력 취급을 받을 정도이다. 이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입시를 치러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에는 연호를 단군기원으로 써서 1930년대생은 단군기원으로 연도가 적힌 졸업장을 받아야 했다.
바로 이 연대에 전두환(1931년생), 노태우(1932년생)가 출생하게 되었다. 주요 정치인들과 기업인, 법조인들의 경우도 보수적인 인물들이 많다. 그 외 유명인으로는 이순재, 신구, 신성일, 양택조 등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징병제 대상에 올랐던 이들이기도 하다.
2.1. 학력
2015년 인구총조사를 기준으로 무학력자 비율이 가장 높은 세대이며, 동시에 학력이 가장 낮은 세대이다.
가난, 남존여비, 일제 강점기 및 전쟁의 혼란 3개가 겹쳐 이들 세대의 학력은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낮고, 특히 여자는 더 낮았다. 당시 80대 이상의 경우 중학교가 6년제였으므로 현재의 중졸은 당시에는 중학교 3학년 수료, 고졸은 중졸이었다.
2.2. 정치 성향
정치적으로는 보수성향이 짙다. 혈기왕성했던 젊은시절 대부분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절을 보낸 영향 때문에 보수색채가 짙은 편이다. 본래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6.25 전쟁과 반공교육을 직접 겪으며 반북의식이 대체로 강한 편이다. 그 때문에 한 때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지만,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가 강해지자 결국 4.19혁명에 참가해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이건 당시 학생들이던 40년대생이 더 심했다.
하지만 윤보선 정권이 구태의연하게 매달리자 이후 5.16 군사정변을 한 때 지지하고 박정희 정권의 출범을 지지했지만 이후 6.3 사태에도 나섰으며 박정희 정권에서도 제법 군사 독재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리고 젊은시절에는 3선 개헌 저지에도 제법 나서는 등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반감도 제법 강했다. 하지만 1930년대생들의 경우 반공 교육을 겪은 것은 물론, 6.25 전쟁에 대한 참상도 겪은 지라 박정희 정권의 반공 교육에 호의적이거나 열광했고 그 뿐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을 돕기도 했다.
유신이 선포된 이후 1930년대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등에 항거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유신 체제가 지속되면서 점차 보수화되어 갔고 10.26 사건 이후 12.12 쿠데타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계속 보수화되어 갔다.
이후 보수 성향이 점차 강해지면서 전두환 정권에서 서울 올림픽 유치와 3저 호황 등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전두환 정권의 군사 독재가 심해지자 1930년대생들 역시 넥타이 부대의 주요 일원으로써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도와주었고 연이어 6.10 항쟁에도 참가했다. 하지만 이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보수 성향이 강화되었고 연이어 김영삼과 이회창을 많이 지지했다. 연이어 IMF 사태가 터지면서 1930년대생들의 보수 성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한 때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DJP 연합을 하자 충청권 30년대생들이 제법 김대중을 지지하기도 했고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이 행정 수도 공약을 하자 역시 충청권 30년대생들이 제법 노무현을 지지했다. 허나 민주정부가 대북 정책을 친북한 정책으로 펴고, 경제 정책에서 종부세 등으로 크게 실패하자 30년대생들의 보수 성향은 재차 확고하게 강해져 17대 대선에서는 이명박에게 몰표를 던졌고 18대 대선에서도 박근혜에게 몰표를 주었다. 19대 대선에서도 홍준표에게 몰표를 주면서 결국 30년대생들의 보수 성향은 영구적으로 확고해진 상태이다.
3. 해외
일본에서는 원폭 기억이 뚜렷한 마지막 세대이다. 하지만 이후 학창시절에는 생활수준 상승을 경험하고 주간 만화잡지 탄생 수혜자이기도 하며, TV보급 세대이기도 하다. 대학생 혹은 직장에 다닐때 전공투 등 운동권에 참여하며 각목을 들고 헬멧을 쓰며 정치투쟁을 했다. 주로 <아사히 저널> 같은 시사잡지를 읽고 <주간 소년 매거진>도 즐겨 읽었기에 '한 손엔 아사히 저널, 다른 한 손엔 소년 매거진'이란 말도 돌았다.
서양의 경우 징집 및 핵전쟁에 공포감을 가지고 기성세대의 권위적 사고방식을 거부하며 베트남전 반대 투쟁을 벌이기도 하고, 청년기에는 머리를 기르고 마약과 로큰롤에 빠져 현실 도피 성향을 보이기도 한 힙스터 문화의 주요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중문화적으로 서구권에서 큰 업적을 남긴 세대인데 이들이 청소년기였던 1950년대의 로큰롤에 열광했으며 이 시기에 스스로 음악계에 뛰어들어 현재의 대중 음악을 정립시킨 세대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엘비스 프레슬리가 있다.
[1] 1930년생과 생일이 지난 1931년생은 90대이다.[2] 특히 남성은 2019년 기준 기대수명이 80.3세로 현재도 살아있다면 이미 평균을 뛰어넘은 셈이다. 다만 여성은 기대수명이 86.3세로 아직까지도 제법 생존해 있다.[3] 이들 일부는 일제의 강압으로 일본어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은 영향으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기미가요를 부를 줄 아는 이들도 있었다. 어린 시절 국민복/몸뻬 강요를 겪은 건 덤.[4] 정확히는 민족 말살 통치기.[5] 조선어가 교과목에서 빠진 것도 이 시기이다. 이 시기 교과서를 잘 보면 '국어의 가나'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당시 국어는 일본어였다. 다만, 현재와는 다르게 가타카나를 히라가나보다 먼저 배웠다. 그 당시에 학교를 다닌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에서 조선어를 쓰면 벌금을 내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는 등의 벌을 받았다고 한다.[6] 뒤의 2가지 경우는 입시도 고려해 봐야 한다. 당시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모두 입시를 치러 들어갔기 때문. 재수나 삼수를 거듭해서 15~16세에 중학교, 18~19세에 고등학교를 입학한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 같았다면 ‘고등학생이 왜 중학교에 입학했냐’, ‘대학생이 왜 고등학교에 입학했냐’는 말이 나올 정도.[7] 1938년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이 돼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글을 배웠으나 1933년생은 6학년이 돼서야 한글을 배웠다.[8] 잘 보면 이런 전시 교재에는 비행기, 탱크, 군함, 폭발물 등의 제목이 붙어 있다.[9] 1938년생은 4271년 같은 식.[10] 당시 영어는 선택과목이었고, 주당 5시간이 배정되었다. 이후 세대는 초등학교나 중학교부터 영어를 정규 및 필수과목으로 배우고 있다.[11] N수생 포함[12] 예외는 가정교육과, 유아교육과, 간호학과 정도.[13] 1930~1940년대 출생자들의 졸업장을 잘 보면 생년월일이 42XX년 M월 N일 (단, XX<=99, M<=12, N<=31)이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14]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서 임진왜란은 1592년에 일어났다고 서술하지만, 당시 교과서에서는 '''3925년'''에 일어났다고 서술했다. 또한 당시 국사 교과서에서는 인물의 출생 연도와 왕의 재위 연도를 모두 단기로 표시했는데, 세종대왕의 재위 연도만 봐도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1418~1450년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당시 교과서에는. 3751~3783년으로 표기돼 있었다.[15] 예를 들어 1학년 때 생물을 이수했다면 2학년 이후에는 물리/화학/지학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16] 특히 여자는 학력이 더 낮았는데, 당시에는 여자들이 많이 배우는 것을 나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고학력으로 인정받으며 학교 교사를 할 수 있었다.[17] 이들에게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중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서~'라는 말이다. 실제로 이들 세대가 해방 후 최초의 대학생이었다. 당시에는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실제 나이로는 10~11세에 소학교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8] 순사 온다, 순사가 잡으러 온다, 순사가 총 메고 온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순사가 잡아간다 등의 바리에이션이 있다. 이외에 거지 온다, 문딩이가 잡아간다 등으로 우는 아이를 달래기도 했다.[19] 예를 들어 당시 서울대학교의 교복은 남색이었다.[20] 1차 교육과정 당시 국사 교과서에서 임진왜란이 3925년에 시작해서 3931년에 끝났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3009년에 일어났다고 서술된 것도 단기를 사용한 영향이다.[21] 본명 이용태.[22] 일제 치하 보통학교, 소학교, 간이학교 졸업은 여기에 들어간다.[23] 일제 치하 구제중학교, 구제고등여학교, 군정기 당시 6년제 중학교 포함.[24] 학사, 석사, 박사.